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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은한 행복 ---- 남진원 시 전집 8 - 5
은은한 행복 남진원
자는 걸 깨워 휠체어에 태웠다. 한바퀴 돌아볼까? 아내를 휠체어에 태웠다. 2단 휠체어라서 고급스러웠다.
중전마마가 타는 마차요, 마마 어디로 모실까요? 아내를 태우고 1층 로비로 내려갔다. 로비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고 한다. 이런 횡재가 있나? 무엇이든 먹지 않아서 안달을 했는데, 아이스크림을 사 오니 너무 비싸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흰아이스크림을 입에 가져가는데 세살 어린아이다. '아이차가워, 그러면서도 자꾸 먹는다.
볼을 두 손으로 살짝 감싸쥐어주었다. 천진한 어린아이가 되었다. 아내는.
나는 내 일생에 다시 없을 귀여운 부처님과 같이 요즘 지낸다.
행 복
남진원
내 속에
송두리
네가 살고
네 속에
송두리
내가 살고
( 1985. 11. 7. 제2시집 『나비, 청산의 나비』 )
행 복
남진원
오래 사니
이젠
숨만
편히 쉬고 있어도
행복하지.
( 2024. 4. 10 )
幸福
남진원
나이 들어 행복은 딴 게 아니다.
그저 소소한 것들, 그게 다 행복이지.
저녁 간단히 먹고 편히 잠들 수 있으면
그건 큰 행복이다.
50년의 문단 생활에서
내가 진짜 좋아하는
몇 편의 시가 있으면
인생 최대의 행복이란 걸 알았다.
그래,
내가 좋아하는 시들이 詩經이지.
몇 편의 시들이 있어서
내 인생의 행복을 이렇게 이끌어가는구나 .
행복의 四季
남진원
봄은 조용한 아침에 지렁이의 꿈틀거림처럼 가볍고 비밀스럽다
꽃이 피어 노래하고 두근거리는 초록색의 바람이 불어
나는 행복을 꿈꾸네
여름은 뜨거운 커피 향기처럼
나를 들뜨게 하지 숲을 움직이게 하고
잠자리 떼는 하늘처럼 높아가네
떠 있는 별은 코끼리 같은 느릿한 즐거움으로 유혹하여
행복하네
우리의 성숙한 사랑처럼 가을이 오면
그대의 미소를 보다가
그대의 아름다움을 보다가
그대의 사랑을 보다가
그대는 오늘
괴로움을 호소해도
나는 기꺼이 따뜻한 마음으로 함께 할 수 있으니
사랑하기 때문이라네
가을바다는 짙은 그리움으로 넘실거리고
그대의 모습은 산을 넘고 들을 지나
붉은 단풍이 되어 내 깊은 혼을 태우네
소곤거리는 풀벌레는
쓸쓸한 사랑의 연주이지만
그 슬픈 멋이 좋아
달을 바라보며 한 잔의 술을 드네
눈 내리고
난로에서 장작불이 타오르면
삶의 비탈길에서 그대 손잡고 거닐던
웃고 기뻐하고 화내고 울던 삶의 낙관들
작은 모닥불 사랑이 되어 겨울을 녹이지
그리고 하얀 겨울은 다시 봄을 부르고 여름을 맞으며
그렇게 또 우리들의 슬프고 시리고 빛나는 기억들은
가을 속에서 짙어지고
겨울엔 은빛 사랑으로 다시
눈내리고 또 눈내리고
눈내리고…
행복하네.
( 「바다시 낭송회 카페」, 2010. 10. 31)
행복의 여울목
남진원
봄,
봄은 조용한 아침에 꽃잎의 하늘거림처럼 가볍고 비밀스럽다
꽃은 피어 노래하고 두근거리는 초록색 바람이 불 때면
우리는 연두색 두근거림으로 행복을 꿈꾼다.
여름,
여름은 커피 향기처럼
마음을 들뜨게 하지 숲을 움직이게 하고
잠자리 떼는 하늘처럼 높아간다.
길고 넓은 잎사귀처럼, 또는 코끼리 같은 느릿한 즐거움으로
진한 바다의 근육질 빛깔이 되어
정열과 낭만을 유혹한다.
성숙한 믿음처럼 가을이 오면,
그리워하는 사람의 손을 잡는다,
그대의 미소는 가을 호수의 물빛에 흔들리고
그대의 아름다움은
젊은 달빛 아래에 어리는 꽃 그림자이다.
바다는 짙은 원색으로 넘실거리고
사랑의 마음은 거친 산을 넘고 험한 들을 지나
붉은 단풍처럼 잠자던 영혼을 흔들어 깨운다.
소곤거리는 풀벌레는 안개꽃 같은 멋이 좋아
별빛들의 연주처럼 들리고
우리는 달을 바라보며 잘 익은 술 같은 음악을 맛본다.
겨울,
눈 내리고
난로에서 장작불이 타오르면
손잡고 거닐던 오솔길을 지나 행복의 언덕에 다다르고
웃음과 울음, 긴 시간의 마디를 열고
웃고 기뻐하고 화내고 울던 삶의 낙관들을 꺼내 보며
화해의 일기를 쓴다.
창밖은 지금, 눈 내리고
눈 내리고
난로에서 피어나는 불꽃은 사랑이 되어 겨울을 녹인다.
하얀 겨울엔
감사와 기도로 다시 태어나는 우리들의 뜨거움이 있다.
불의와 비애로
아픔과 괴로움이 다가온다 하더라도
용서와 믿음은 세상을 이겨내는 힘
오직 사랑하기 때문에
오직 사랑하기 때문에
따뜻한 마음의 불꽃 지피는
정갈한 시간
한없이 맑아지는 영혼을 노래하며 걸어간다.
문득 걷다가
반쯤 고개 돌려 되돌아보는
행복의 여울목에는
발자국을 따라 다시, 봄은 오리니
봄은 오리니.
우리의 사랑은 사계를 따라 흘러라
우리의 꿈도 영원으로 흘러라.
나의 집, 행복의 집
남진원
밖에 나가면
빨리 집에 들어오고 싶다
갓 결혼한 신랑 때처럼
집에 사랑하는 이가
기다리기나 하는 것처럼 말이다
6층, 새 아파트
이름은 「행복주택」
방에는 새댁 같은 우리 집 내 책들, 침대, 책상들이
그래, 신부처럼 기다리기 때문이지
깨끗한 싱크대와 수납장, 수세식 화장실 등이 있는
특급 호텔보다 멋진
행복이 사는 집이다
( 2025. 11. 8 )
행복하구나
남진원
복사꽃은
화사한 여인
이 봄날
내 옆에 있네
행복하구나
평범하게 보일지 몰라도
새 울고 나비 나는
만화방창(萬化方暢)의 진 풍경
이토록 기막히게 아름다운
봄날을 맞을 줄이야
생각이나 했으랴
허전한 봄날
인적없는 산집에
너희들이 찾아와 벗하니
마냥 행복하구나
행복하구나
( 2022. 4. 19. [ * 나의 삶 나의 문학, 남진원문학전집 1권 수록 ])
행복한 기적
남진원
‘아이구구’
할머니는 아침에 일어나실 때 이런 말을 쏟아내셨다
70이 넘어선 내가
할머니를 닮았나 보다
아침에 내 몸뚱어리를 일으켜 세우느라고
‘아이구구구’
꼭 같은 소리를 내니 말이다
소리는 내 질러도
일어나서는
조심조심 걸아 다닐 수 있다니 …
오늘도 기적이다
사람들은 70대의 나이에 뭐 그러느냐고 하지만 사람마다 살아온 삶이 다른 것처럼
건강 또한 나이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지 않으니 말이다.
( 2024. 3. 8.)
나는 행복합니다
남진원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내가 없으면
고통도 없고 불행도 없고 행복도 없습니다
내가 없으면 많은 사람들이 있어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살아 있어야 행복합니다
내가 숨 쉴 수 있어야 행복합니다
젊어서는 건강했지만
몸은 어제보다 건강하지 못하고
기억력도 떨어지고
미세먼지와 질병
나쁜 일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오늘은 어제보다 나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오늘은 어제보다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 해도 탓하지 않습니다
그렇다 해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하늘과 땅, 태양
물과 별, 공기와 나무, 꽃과 새
오늘도 볼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다정한 사람들, 고마운 사람들
오늘도 말할 수 있어서
따뜻이 손잡을 수 있어서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참 행복합니다
노년의 행복
남진원
나이 들어 행복은 딴 게 아니다
그저 소소한 것들
그게 다 행복이지
저녁 간단히 먹고 편히 잠들 수 있으면 그건 큰 축복이다
반백년, 시간의 흐름
시인으로 살면서
그나마 내가 진짜 좋아하는
몇 편의 시들이 있어서
그게 내 인생의 기쁨이란 걸 알았다
그래,
내가 좋아하는 시들이 시경이지
떼로는 아프고
더러는 막막하고
자주자주 힘들었지만
사랑이 있고 그리움이 있는 시편 하나 둘 셋
이제 알 것 같다
몇 편의 시들이 곁에 있어서
노년의 삶을 이렇게 물들여가는구나
몇 편의 시들이 함께 하면서
노년의 행복을 이렇게 이끌어가는구나.
행복해했다
남진원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에 노을 물든 저녁 하늘을 보았다
강릉의 노을은 어이하여
이리 고운가
노을이 물드는
저녁 마을은
노을이 고와서
너무 고와서
노을이 마을처럼
흐르는 노을
마을이 노을처럼
흐르는 마을
예전에 지은 ‘노을’ 을 읊조리며 행복해했다.
( 2025. 5월 6월 어느 날)
行雲流水
남진원
잔설 녹은
물빛에서
봄
한 자루
새어나오고
산 위로
위로는
구름이 銀銀
저기, 수묵화 번지는
산어귀
아스라이
멀어지는
衲子
풍경이 되다
( 제17시집 『조그마하게 살기』, 태원, 2023. 5 )
향
남진원
향은
땅과 하늘을 잇는
사다리
무당 아주머니
향을 사르고
손을 모으고
절을 하네.
그것이
하늘과 땅의
인사법이란다.
지극함으로
빚어 낸
정성스러운 마음
향내음 따라
땅과 하늘로
오르내린다.
( 제8시집. 할아버지 이뽑기. 대교출판. 1997)
( 제17시집 『조그마하게 살기』, 태원, 2023. 5 )
허깨비짓
남진원
내가 하는 글 짓거리 허깨비 짓 도까비 짓
그런들 어떠리 저런들 또 어떠리
여기에 기쁨 있으면 그만 인 것, 아무렴
( 제16시집 『쇠장수 강영감님』, 태원, 2021. 11. 22 )
- 시조작품집 좋은 작품상 수상 (시조문학사) -
허공 배,
남진원
산다는 것은
허공에
배 한 척 떠다니는 일이야
내 몸이란
허공 배
이리저리 힘줄 드러낸 채 노를 젓다가
풍랑에 꺾이기도 몇 번인가
만리 밖을 온 것 같은데도
돌아보니 제 자리네
둘러보니
온 곳도 간 곳도 모르겠네
그렇네, 산다는 것은
허공에
배 한 척 떠 있는 일이라네.
(2024. 1. 3.- 1. 11.)
( 2024. 5. 11. 남진원 제18시집 『어머니 물동이길』, 동우재 )
虛空 葬
남진원
매주 손수레에 생활 쓰레기를 한 짐씩 싣는다.
쓰레기 하치장을 향해 길을 나섰다.
새것들이 점차 못 쓰거나 고물이 되어
시간 속에서
쓰레기가 되는 것들이
가야하는
쓰레기 葬地 길
종내는 이 몸뚱어리라는 물건도
이리 될,
虛空 葬이구나
(2023. 7. 18. 2024. 9. 모던포엠 )
현충일
남진원
태극기 두어 서넛 내 걸린 아파트 창문
아픔 벌써 잊었던가, 부끄러운 우리 얼굴
영령의 숭고한 정신, 다시 피워 살려야…
요즘 어찌 지내오
남진원
바람 부는 들길에 나가니 코스모스가 예쁘다
길옆에 흐르는 물소리는 또 얼마나 맑은지 …,
어둔 밤 창문을 여니
작은 아기 이처럼
빛나는 별들이 있어
세상은 구부러져도 아직 살만한 가 보다
이럴 때 누군가 묻는 말
요즘 어찌 지내오?
그러자,
가을날 오후가 내 대신 햇볕을 가르킨다
골찌기 물속 물 방개와 가재를 비추던 햇볕
한 소쿰 같은
가을 날 오후의 햇볕을 말이다
이날,
햇볕 옆에 둥둥 떠가는 구름 한덩이를 보았다
흰색 허름한 바지 저고리를 입고
허공처럼 앉아있는
노인의 모습처럼,
그 모습을 보니
네 삶도 졸다가 깨다가 하는 한 채의 구름인 게야
그저 졸다가 깨다가 하는…
( 2024. 10. 7.)
허름한 몸뚱이
남진원
파릇한
새 잎 나더니
열매가 맺혔다
어느 날
말라가고 썩어지더니
자취가 없다
實相이 아니니
허름한 이 몸뚱이도
살다가 병들면
썩어질 몸
무엇을
더 깨달을 것인가
고통과 기쁨을 겪는 마음 그대로
썩어지는 마음 그대로
귀한 부처님이네
나의 극락이네
( 제17시집 『조그마하게 살기』, 태원, 2023. 5 )
허 물
남진원
지구가 뜨거워졌다
해의 잘못이냐
달의 잘못이냐
아니면 누구의 허물인 겐가.
( 2024. 7. 24. 2025. 2. 18. 개작 )
虛心
남진원
욕심을 비우고 나면
소원조차
텅 비니,
끝내는
모든 일이
편안하여진다
깎아 만든
불상 앞에서
빌 소원도 없어지고
걷는 것, 보는 것, 행하는 것 …
부처의 발걸음
아닌 것이 없네
부처의 마음 아닌 것이 없지.
(2024. 2. 19)
獻盞
남진원
10년의 지난 삶이 행복으로 이어진 건
지금도 꽃 같아라, 그대의 음덕인 줄
사랑의 잔을 올리며 오늘 그댈 기리오
( 제16시집 『쇠장수 강영감님』, 태원, 2021. 11. 22 )
- 시조작품집 좋은 작품상 수상 (시조문학사) -
연습을 하며 사는 일
남진원
연습을 하며 사는 일은
준비를 하며 사는 일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살자
만나는 연습을 하며 살자
돈과 권력과 명예가
너의 것이라 해도
친구여, 나의 것이라 해도
종내 가져갈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우리는 인생의 밭을 경작하는 농부들
떠나는 날을 자네가 아는가
만나는 날은 자네가 아는가
사랑의 씨를 뿌리는
삶의 이랑에서
우리 떠나는 날은 몰라도 좋아라
만나는 날은 몰라도 좋아라
오늘도
외로움을 벗삼으며
사랑의 옷을 마련하는
나의 친구여
연습을 하며 사는 일은
준비를 하며 사는 일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살자
만나는 연습을 하며 살자.
( 1985. 9. 10. 『물레문학』4집)
현장학습
남진원
더위도 추위처럼
친구로 하기 싫은데
여름이면 개구쟁이처럼 치근댄다.
아휴, 더워!
가만히 있어도
등허리에 흐르는 땀
머리가 지끈거리고 짜증이 난다.
물놀이 가는 아이들
낮잠을 즐기는 아이들도 보인다.
여름을 이겨내는
좋은 방법 무얼까
문득 할아버지 말씀이 떠오른다.
아픔은 아픔으로
더위는 더위로 이겨 내어라!
그렇다.
한여름 햇빛 아래에서
풀을 매시던 어머니를 생각하며
나뭇짐을 해 오시던 아버지를 떠올리며
나는 땀방울을 친구 삼아
할머니 모시치마 냄새가 살아 숨쉬는 곳
현장학습을 나섰다.
땀 흘리던 나무들이 반갑다고
땅 속에 숨겨 둔
실한 뿌리를 보여주기도 하고
숲은 둥지 큰 산새들의 집을
슬며시 가르쳐 주곤 했지.
그제사 땀방울은 가벼운 먼지처럼
날아오르고
어디선가 향긋한 바람이 불어왔지.
바람 속에서는 둥실둥실
빨간 고추잠자리들이 꿈꾸는 듯 떠 다니더라.
- 블로그 ‘털보’ 일소일빈 ‘한자는 우리글이다’에 게재 -
(2013. 11.11. 07:54 올린 글)
현장학습
남진원
TV에서
보고 또 보고 또 보는
광고가 이어진다
재미없는, 아예 도움도 안 되는
저런 광고들
전에는 채널을 바로 돌렸지만
‘세상은 흥미 없이
다 이런 모양이야’
그냥 보고 또 본다
이건
학교에서도 배우지 못했던
‘타인에 대한 이해력 기르기!
또는
무심한 상태 배우기’ 라는
현장학습이다.
( 2024. 5. 11. 남진원 제18시집 『어머니 물동이길』, 동우재 )
혜초
남진원
길을 걸어가니
혜초가 뒤따라온다.
한참을 걸어가는데
어느새 혜초가 앞서 간다.
여보게, 좀 쉬엄쉬엄 가세.
겨우
동행이 되었다.
이제 앞서지도 말고
뒤에 오지도 말고
나란히 저 언덕 오르세.
( 시집 『어초』, 2002.8.1. )
胡瓜(오이)
남진원
새봄에 오이 모종을 했지
열 중에 다 죽고 두 포기가 남아
옥수수밭 사이로 가 보니
우와!
누렇게 익은 오이를 한 광주리 거두었다
복권 맞은 것 같았다
胡瓜(오이)
남진원
고향 집 옥수수 밭 사이
자라던 오이
어머니가 심어두었지
우연히 옥수수밭 속에서 발견한
아이의 팔뚝 같은 노랑색 오이
씹으면 달콤한 물이 더위를 식혀주었다
방터골에서 심은 오이 속에서
고향집 냄새가 풍겨 왔다
오이를 배어물며 고향집 옛 식구들
그리운 얼굴을 떠올렸다
오이를 통해 고향집의 과거 속에 내가 서 있었다.
거기엔 내 모든 행복이
비밀처럼 숨겨져 있었다.
( 2024. 7. 29 )
호기심
남진원
흰구름 두리둥실 멀리멀리 퍼져갈 때
소풍 온 산새들 숨바꼭질 한창이다
무엇을 찾고 있을까 ‘왈칵’ 이는 호기심
호랑바위
남진원
세류로 가는 길가 큼직한 바위 하나
호랑이를 닮았다고 호랑바위라 불렀다지
그 바위 옆을 지날 한층 힘이 솟구쳤지.
( 2025. 9.1. 수정. 제16시집 『쇠장수 강영감님』, 태원, 2021. 11. 22 )
- 시조작품집 좋은 작품상 수상 (시조문학사) -
호랑바위
남진원
석둔 골 아래 신작로
토산 가는 길옆엔
불쑥,
큰 바위가
호랑이로 지켜 섰지.
든든한 마을 수호신
믿음직한 지킴이,
( 2025. 9. 1 )
호미 맛
남진원
사람들은 트랙터로 밭 갈고 풀은 농약 쳐서 깡그리 잡는다.
그러나 우리 할머니, 헛간에서 녹슨 호미 들고 나와 앉는다.
풀을 손수 매신다.
반질반질해진 호미처럼 윤기 나는 곡식
농약 냄새 대신 할머니 손맛, 마음 맛, 호미 맛 까지 담겼다.
( 2015. 9. 17. 제14시집 『 산골에서 보내온 동시』, 좋은 꿈 ),
호박꽃
남진원
오랜만에
하 하 하 호 호 호
웃을 일 있나 보다.
연주가 시작되려고 한다.
여기저기
번쩍이는 금관악기들
( 2015. 9. 17. 제14시집 『 산골에서 보내온 동시』, 좋은 꿈 ),
호박꽃이 핀 날
남진원
여름이 왔다고 기뻐 먼저 알리는 건
매미인 줄 알았는데 호박꽃잎 이로구나
황금빛 나팔을 꺼내 막무가내 연주한다
( 제16시집 『쇠장수 강영감님』, 태원, 2021. 11. 22 )
- 시조작품집 좋은 작품상 수상 (시조문학사) -
호박 韻
남진원
쟁기 들고 나서는 길 댓돌을 내려서니
호박꽃 활짝 피어 주위가 황금 물결
하루가 경이로워라 날 기쁘게 한 녀석들
옥수수 밭 사이에 제멋대로 뒹굴더니
알 배통 드러낸 채 거침없이 뽐을 낸다
보름달, 지나가다가 몇 번은 암, 놀릴 걸
넉넉한 시골 인심 어디서 나나 했네
성글고 둥근 모양 편안한 속을 냈지
끓이는 장국 속에서 보글보글 익던 情
호박 섶 뒤적이니 다가오는 어머니 모습
쌈 가득 입에 넣고 마주 보고 웃던 가족
유년의 행복 몇 가마니 호박줄에 매달렸다.
( 2022. 9. 10)
호박잎
남진원
호박잎은
바람 불면
너울
너울
코끼리 귀.
( 2015. 9. 17. 제14시집 『 산골에서 보내온 동시』, 좋은 꿈 ),
호 수
남진원
쑤욱 쑥 나무들
누구 키가 더 크나
들여다보고
울긋불긋 나무들
누가 더 예쁜가
들여다보고
볼 때마다
커지는
나무들의 꿈
클 때마다
보고 싶은
나무들 마음
그때마다
빙그르르
바람 따라 웃고
그때마다
방글
해님 따라 웃는
나무들의
꿈이 크는
호수
(1975. 8. 강원아동문학 제3집)
남진원의 뭄단 50년사. 제1권 ,p.11.
동시 ‘호수’는 공식적인 문단의 전문지에 발표한 첫 작품이다.
그러니 금 년인 2024년은 문단 50년이 되는 해이다.
호수에 물들다
남진원
조용히 걷다보면 경호는 사랑이어라
작은 바람, 여린 눈빛 부드러운 물의 미소여
그리움, 말 걸어오니 호수에 이냥 물들다
2020. 7. 3. 강릉여성문학인회 주최 20020년 9월 경호시화전 특별 초대시. 2020. 8. 27 수정)
제16시집 『쇠장수 강영감님』, 태원, 2021. 11. 22 )
- 2022. 시조문학 좋은 작품집 상 수상 대표 작품
(‘개구리 우는 밤, 누더기 몇 벌, 호수에 물들다, 홍시’)
(제17시집 『조그마하게 살기』, 태원, 2023. 5)
호수와 나무들
남진원
울긋 불긋 나무들 누구 키가 더 크나
들여다본다
울긋불긋 나무들 누가 더 예쁜가
들여다본다
볼 때마다 커지는 나무들의 꿈
클 때마다 보고 싶은 나무들의 마음
그때마다 빙그르
바람따라 웃고
그때마다 방글
해님 따라 웃으며
조금씩 조금씩
나무들의 꿈이 큰다
날마다 날마다
나무들의 꿈이 영근다.
호주머니
남진원
군밤 호도 두둑히
넣고 나오면
골목마다 우루루
몰려들지요
날 때리던 돌이도
손을 내밀고
날 놀리던 철이도
눈을 찡긋찡긋
석이 녀석 하고만
놀던 순이도
내 주머니 졸졸졸
따라다녀요
( 1980. 8. 20. 물레방아 제5호)
첫 시집 (동시집), 『싸리울』, 1982. 12. 10. 아동믄에사)
호수에 물들다
남진원
조용히 걷다보면 경호는 사랑이어라
작은 바람, 여린 불빛 부드러운 물의 미소여
그리움, 말 걸어오니 호수에 이냥 물들다
( 제16시집 『쇠장수 강영감님』, 태원, 2021. 11. 22 )
- 시조작품집 좋은 작품상 수상 (시조문학사) -
호연지기
남진원
친구와 시간나면 차를 타고 쏘다녔다
산과 강 호수 바다 휘돌아 집에 오면
마음엔 호연지기가 콩나물 크듯 자랐다
( 제16시집 『쇠장수 강영감님』, 태원, 2021. 11. 22 )
- 시조작품집 좋은 작품상 수상 (시조문학사) -
호칭
남진원
아침 근무 교대를 한 모양이다.
간호사 샘이 반갑다고 나를 부른다.
"할아버지!"
하나도 반갑지 않았다,
미운 간호 쌤!
오빠 정도는 안 돼도 아저씨 정도는 아직 만만한데.....
( 2013. 시집 <하늘에 기댄 아내>, 태원 )
혼자 사는 노인
남진원
자식도 떠나가고
부인도 떠나가고
혼자 사는
노인
사는 게 별거 있나
적당한 운동이
나를 살리고 나면
맛있는 거 먹는 게 낙이다.
사람 구경하며 고요하게 사는 게 낙이다.
(2018. 9. 6. )
홀로 살고 있으니
남진원
바로 아래 진룡이 동생
착한 동생도 가고,
부모님 다 돌아가신 …
요즘
세상과 뚝 떨어져 사는
고아가 되었구나
홀로 살고 있으니
모두 다 그리운 얼굴
아름답다고 여겼던 나무와 꽃,t 새소리 …
이들보다
피붙이 가족이 더 아름다운 줄을
이제야 알다니 …
다행히
사랑하는 여 동생들이 있어
큰 위안이 되는 구나
동생들아,
고맙고
고맙구나.
( 2024. 5. 11. 남진원 제18시집 『어머니 물동이길』, 동우재 )
지금부터다!
남진원
그래, 마음을 편안히 먹고
홀로서기를 하는 거야
진정한 홀로서기는 지금부터야.
그래 그래, 2, 30대 홀로 선다고?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야
무쇠보다 강한 힘과 머리로
무엇인들 못 해내랴
4, 50대 홀로서기?
지식과 지혜의 삶을 사는
그 나이에 홀로서기?
암, 말도 안 되지
60대, 70대?
그렇다.
기력이 쇠해지고
정신도 희미해지는 이 무협
나를 알아차려서
내 나이 73세, ‘홀로서기!’ 하는 거야,
힘든 일 헤쳐나가며 하는
진정한 홀로서기인 거야
홀로
살아감을 견뎌내고
홀로 살아감을 놀이 삼으며
홀로 살아감에 즐거움을 느끼며
살아가는
진정한 멋진 삶,
지금부터다!
( 2025. 9. 3.)
(2025. 11. 10. 제목을 ‘지금부터다’로 바꿈)
홍 매
남진원
그리운 畫紙 한 장 펼쳐놓고 앉았으니
먹빛 붓, 그려가다 홀연히 휘몰아친다
무수한 紅花 낙관에 쏟아내는 향기의 꽃
紅梅
남진원
바람이 붓이 되고 나니, 세상 온통 화지(畫紙)구나
그리움은 적막으로 미리 스민 봄날 한 때
신들려 찍어내는 저, 움직이는 홍화(紅花) 낙관
( 2010. <강릉문학> 18집 )
( 2010년, 도서관 문학작가 파견사업 작품집 )
(2025년 修正)
홍매 곁에서
남진원
2010년 2월 매화, 온통 그대 향기더니
봄마저 놓아버리고 어둡게 한 2011
얼어서 혹독한 상채기 망울멍울 피멍이다
( 2013. 시집, <하늘에 기댄 아내>, 태원 )
홍시
남진원
곪아서야 낳는 병
네 놈이구만
푸른
눈두덩이
새빨개가지고
……
썩어질
퍽,
터져버려라이.
( 2002. 6. 20. )
( 시집, 『어초(語草)』, 붓다가야, 2002. 8. 1.)
홍 시
남진원
홍시를 손에 들고 가만히 바라본다
그토록 좋아하던 어머니가 안 계시네
숨 죽여 사시던 세월 눈물처럼 아려라
( 제16시집 『쇠장수 강영감님』, 태원, 2021. 11. 22 )
- 2022. 시조문학 좋은 작품집 상 수상 대표 작품
(‘개구리 우는 밤, 누더기 몇 벌, 호수에 물들다, 홍시’)
(제17시집 『조그마하게 살기』, 태원, 2023. 5)
紅雲
남진원
어느 날 저물 무렵 紅雲 저 은은한 자태
깨우친 사람처럼 기쁨 이리 크더냐
극락이 따로 없느니 부귀영화 예 있네
( 제16시집 『쇠장수 강영감님』, 태원, 2021. 11. 22 )
- 시조작품집 좋은 작품상 수상 (시조문학사) -
홍의장군
남진원
임진란은 쓰레기 대란 강산이 앓은 몸살
조선의 말갈기 후려치며 돌아보니
오염돤 강물이 흘러 한반도를 적셨다.
녹슬고 구겨지고 흙벽은 무너졌다
한 때는 휘돌던 기혈, 산맥 온통 꿈틀댔지
丹穴로 이어온 명줄 다질 일도 푸른 약속
어그러진 피의 산하 의병으로 세운 칼끝
오직 한 길 구국의 혼, 왜적을 섬멸하고
충의로 낙관을 찍었다 의령이 낳은 홍의 장군.
화개(花開) 마을
남진원
마을이 봄을 데려왔다.
민들레 위로
나비들을 풀어놓았다.
벌들은
화려한 벚나무에 몰아넣었다.
봄은
밭일 나서는 어른들 입에다 웃음꽃을 매달았다.
밭이랑마다 햇볕이 푹푹 쏟아졌다.
( 남진원문학전집 6권. 시집, <할머니의 등잔불> 수록 )
화산 같은 죽음의 빛속에
남진원
오늘을 팔아가며
내 생애를 태우는 밤
새벽녘 잠을 죄다
물소리로 깨워놓고
산 앉아 강물도 앉아
물소리를 팔고 있다.
몇 천년 숨결 맑은
고려의 항아리들
천성은 고운 잡목
마을 안에 쌓이면
승천의 북소리들은
귀를 사고 있었다.
한다발 핏덩어리
철장 안에 쏟아놓고
火氣를 이기지 못해
무덤들이 떠나는 밤
하얗게 부서진 죽음
죽음 위에 앉은 죽음
( 1980. 시조문학 가을호 )
( 1991. 9. 1. 제6시집, 시조집 『내 인생 밭을 매면』)
( 1980, 물레문학 창간호)
花心
남진원
방터골 벼랑으로
진달래 피었어라
질박한 꽃의 숨결
산 물소리 순해지고
수줍어
밝혀든 花心
어질어서 눈 감았소
화암 약수
남진원
雲霧로 덮인 날은 물빛에도 산이 젖고
층암절벽 바위틈에 팔뚝 같은 힘줄을 불끈 틀고 앉은 노송이 하늘을 이고
바람을 머리칼처럼 흔들고 섰는데
생명도
푸르게 젖을
약수여, 너
시린 가슴
(1988. 11. 20. 『강원시조문학』 )
화전리의 아침
남진원
종지기가 종줄을 당기는 새로
화전리의 아침이 깨어나고 있다
- 날개처럼 부서져 내리는 울창한 햇살의 그물 -
그 위로 뚝뚝 떨어지는 하늘이
잎 푸른 가지에 달려
햇살을 훑어내리고
그림자차럼 청청한
바람의 목소리들이 나뒹굴며
휘파람을 분다
「여기는 바람과 하늘이 질척이는햇살의 늪」이라고
그때쯤 새들의 지저귐속에
나와 너의 흰빛 인사의 속살
우리 모두는
가방속에 햇살을 꾸려넣으며
출근을 한다.
( 1977년 11월 5일 경향신문)
화집 속의 山門
남진원
화집 속에 있는 어느 여류 화가의 그림을 벽에 붙여 놓으니
시선이 절로 닿는다.
눈 내리는 모습인데 절은 안 보이고
절로 들어가는 山門의 풍경만 보인다.
풍경 속의 실제는 추울 텐데
그림을 보고 있으면 따뜻해지고 행복해진다.
사대천왕처럼 지키고 선 듯한 소나무 두 그루
눈 부릅뜬 사대천왕은 무섭지만 소나무 두 그루는
어질고 인자해 보인다.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은은한 세상
한 폭의 大藏經이다
(2023. 1. 3)
和平
남진원
天
地
人
모두
열어놓고
조용히
숨쉬기
(1993. 10. 30.『강릉문학』창간호 )
화평(和平)
남진원
몸
열어놓고
조용히
숨을 쉰다.
( 제9시집 『어초』, 2002. 8. 1 )
환한 적막
남진원
하얗게 눈 온 천지에
오늘은 하늘이 햇살을 쏟아붓는다
새로 태어난
기막히도록 눈부신 세상 같다.
조용함이 흰 색으로‘
빛나는,
눈 위로
펼쳐진
무색 소리의 빛
텅 빈 아득함의 이,
美的 空虛
(2024. 2. 8)
활쏘기
남진원
땅 위에 즐비한 고층 건물
어느새
물 속에도
수중 궁궐을 이루었다
물을 뚫고
거꾸로 치솟은 거대한
새장
보름달이 뜬 자정
고구려의 아이가
물속에 활을 겨누고 있다
하늘로 탈출한
새의 꿈을 꾸는
눈부신 순간이다.
( 1988. 4. 『해안』 5집)
황국
남진원
가을볕이 폭 익은
국화 화분을 들고 찾아왔다.
사람도
국화꽃이다.
마음이 송 송 송 국화잎에 맺혀
눈이 아리다.
사람아
국화 화분을 들고 다니지 말지어다.
( 1987. 10. 1. 제3시집『넘치는 목숨으로 와서』)
황금 날개
남진원
언덕에 올라서면 숨을 가늘게 내쉬는 환자처럼 빨간 기와집이 낮게 엎드려 있다. 가까이 다가가는 내게로 옮겨오려는 듯…. 그러나 끝내 움직이지 못한다. 집 입구에 다가가면 어머니의 노쇠한 다리가 그런 모습으로 맞이하고 있다.
점점 가까이 다가가면 빨간 기와집은 속을 그대로 보인다. 담 벽 한쪽이 무너져 옆구리를 벌리고 있는 빨간 기와집의 얼굴. 검은 개가 기둥 한쪽을 무시로 핥는다.
아버지는 빨간 기와집 속에서 기억을 풀어놓고 산다. 비가 쏟아지면 오래된 기왓장 사이로 삐죽이 빗방울들이 아버지와 어머니 틈 사이로 끼어들어온다. 빗방울은 축축하게 젖으며 구름방울이 되어 떠다닌다.
누구에게나 있었던 조금, 아니 화려하던 기억의 갈피 속에서 눅눅하게 바래지는 것을 알 때는 상황이 종료되어가는 때듯이, 아버지의 내일은 외출 금지를 당한지 오래됐다,
아버지도 보고 계실까. 빨간 기왓장 너머 황토 빛에 물들어가던 마을 어귀 노랑때까치소리처럼, 가지 끝에 매달린 고향 마을의 강물소리, 너울너울 날개를 휘저으며 미확인비행물체처럼 떠 있는 잠자리 황금빛 날개…
다시 언덕을 올라선다. 낮게 엎드려 있던 빨간 기와집도 움직이려고 한다. 이번에는 떠나가는 아들의 뒷모습에 대고 팔을 흔드는 아버지, 아버지의 두 팔은 황금 날개가 되었다.
수액이 멈춘 겨울나무 가지도 흔들리며 환하게 날아오른다.
황금의 카운타 펀치
남진원
뭘하고 살았나
살면서
카운타 펀치 한 개 쯤
넣고 다녀야 하는 것을
불혹의 나이에야 눈치챘다
아주 작은 일에도
너희에게는 카운타 펀치가 필요했다
빽이 있어야 된다는
숱한 말들을 전설처럼 흘려들었다가
지금은 정말 실감이 난다
조심스럽고 겸손한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은
너희에게 오히려 무능력자로 보이고
그래서 깔아뭉개기나 하고
그런데 너희에겐 놀랍구나
너희보다 조금만 힘센 펀치만
턱주가리에 멕여도
카운트 다운이 되는 걸 보았다
장관, 국회의원, 교수, 검사 …
그 옛날 우러러 보이고 부러워 보이던 존재들이
카운타 펀치 한 방 씩에
가는 걸 보면서
하물며
가난한 시민의 살 권리를
은은히 골탕 먹이고 쥐어짜던
콧대 높은 중하급 관리들이야
쟆 한방에도 푸른 서슬이 꺼지고
금방 소금절인 배추잎이 되어버리는구나
옳거니
어떤 코미디언은
선거전에서부터 출마하니 안 하니
코미디 연출을 하더니
재산공개 때문에
썩 괜찮은 국회의원 자리도 내던진다며
끝내는 자신까지 웃기는 자도 있었으니
국정운영도 코미디 쯤으로 알았던가
아무튼
불혹이 지나서야 절감하게 된
황금의 카운타 펀치
한 개쯤 넣고 다녀야 하는 것을…
시세말로
이거 어ᅟᅮᆫ 勢 없고 돈 없는 논
어디 글퍼서 살갔나.
(1993. 10. 30.『강릉문학』창간호 )
황달
남진원
“여보, 눈 떠 봐.”
누운 아내가 감았던 눈을 힘들게 떠 보여 주었다.
속눈까지 화장했구나
노란색, 녹색으로 덮인 아내의 눈이지만…
내 곁에 있다는 아내의 또 다른 숨결이다.
( 2012. 시집, 하늘에 기댄 아내. 태원 )
황소
남진원
똥파리 달려들어도 꼬리 휙~ 흔들고 만다
되새김질 할 때 봐라, 황소만이 갖는 여유
큰 걸음 놓을 때에는 마당이 늘 좁았다.
( 제16시집 『쇠장수 강영감님』, 태원, 2021. 11. 22 )
- 시조작품집 좋은 작품상 수상 (시조문학사) -
황톳길
남진원
밤이면 옥수수들 한껏 서서 무섭던 때
칠흑 같은 황톳길은 천지 분간 안 되었어도
원시의 진한 흙냄새 내 정신의 뿌리였다
( 제16시집 『쇠장수 강영감님』, 태원, 2021. 11. 22 )
- 시조작품집 좋은 작품상 수상 (시조문학사) -
황토를 밟고 서면
남진원
여기 황토를 밟고 서면
할머니가 그랬듯이
늘 한 맴을 먹어야 된다고
가슴을 잡아 쥐는 바람을 본다.
삼베치마 같은
달이 비치는 밤이면
질긴 숨결을 꼬아 자리를 매는
할아버지 고드랫돌 넘기는 소리도 들렸지.
지금도 매운 노끈 몇 개 묻혔음직한
황토에
물 때 끼지 않은 소나무들이
든든히 뿌리를 박고 선 길목
이곳 소나무 숲에 서면
할머니가 그랬듯이
늘 한 맴을 먹어야 된다고
또 가슴을 잡아 흔드는 바람을 본다.
( 1987. 10. 1. 제3시집 『넘치는 목숨으로 와서』)
황우지 해안
남진원
천연의 평화로움 누가 이리 선물 했나
보게나 이곳은 특유의 관광지이지
하늘이 풍덩 안기니 내 영혼도에머랄드
母鄕의 품 같아서 마음 길 열고 가면
스며드는 제주의 숲, 속 깊은 뜻 있어서
가만히 귀 열고 듣는 억년 향의 흰 소문
찰방대는 물놀이도 순연한 한 편의 시
고개 드니 푸른 바람 속세는 간 곳 없다
뭇 인파 환희로움으로 두둥실 뜬 붉은 해
( 현대시조 2023년 봄호. 2023. 4. 30. )
황혼
남진원
노을이 붉게 물든 저녁을 보면
하루의 기도처럼
성스럽다
黃昏이란 게
어찌 붉게 물드는 모습 뿐이겠는가
어둠으로부터 와서
새벽을 지나 하루의 호흡과 맥박이
잘 익어서
산마루에 붉게 물드는
최고의 순간 같은 절정
하루를 정리하는 저 모습은
황혼기가 아니라
가장 화려한 생의 황금기이구나.
( 2024. 4. 21 )
회복탄력성
남진원
그 가난했던 교육대학 시절을 끝내고
발령을 받았다
27,200원
첫 봉급액이었다
굶다시피 살다 봉급을 받고가
얼마나 세상이 신기했던가
그런데도 늘 부족했다
마음이 떠돌았다
글이란 것을 쓰면서 채워졌다
회복탄력성이 글을 쓰면서 내게로 찾아온 것이었다
글에서
사는 즐거움을 알았다
글에서 아름다웠던 것들을 다시 찾아냈다
지금,
집도
절도
없이 살지만
글과 함께 할 수 있으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나다
( 2022. 12. 27 )
( 제17시집 『조그마하게 살기』, 태원, 2023. 5 )
후비개
남진원
“아이 가려워.”
“어디 보자.”
엄마가 귀를 들여다보시더니
귀 후비개를 넣으신다.
살곰 사알곰
간지러워 해해해 웃음이 나온다.
“ 뭐가 좋다고 …. 아유, 징그러워. 이 귀 벌레들 좀 봐라.”
엄마는 귀지를 귀 벌레라고 하셨다.
엄마의 귀 후비개에는 귀 벌레가 가득 담겨 나왔다.
귀 벌레가 막아놓은 귀
이제 뻥 뚫려 시원하다.
마음도 막힐 때가 있다.
마음 벌레가 막을 때이다.
이때도 마음 후비개가 있다면
내 마음이 뻥! 뻥! 뚫릴 텐데….
휴대폰
남진원
밖에 나왔다
허전하고 이상하다
그렇지
두고 온 휴대폰
한 발짝도 갈 수가 없다
움직일 수가 없다
어느새 내 발길
묶이고
내 자유까지 휴대폰에게 주어버렸다.
( 2024. 9. [모던포엠 ] )
휴전선 近況
남진원
하늘길은 구름이 떠다니고 눈부신 새 떼가 오고 가고, 가고 온다.
사방이 탁 트인 자유의 길이건만.
땅의 길은, 긴장한 숲
사방에서 서로를 겨냥하고 있다.
휴지통
남진원
쓰다가 버려진 것 모두 모여서
버려진 것들끼리
모여 사는 동네
만나는 것마저
버려진 것들이
버려진 것끼리 만나
만남을 알고
정마저 버려진 것들이
버려진 것끼리 만나
정을 나누고
쓰다가 버려진 것 모두 모여서
버려진 것 끼리
모여 사는 동네
아픔도 절망도
머리 맞대고
눈물도 웃음도
얼굴 맞대고
살아가리라
살아가리라
쓰다가 버려진 것 모두 모여서
버려진 것들끼리
모여 사는 동네
뜨겁게 뜨겁게 살아가는 동네
( 2025. 1. 28 )
(2024. 2. 25. 강원문학 7집에 수록된 작품을 개작)
첫 시집 (동시집), 『싸리울』, 1982. 12. 10. 아동믄에사)
제8시집 (동시집), 『휴지통』, 1997. 9. 25. 대교출판)
( 2015. 4. 15. 남진원동시선집. 지식을 만드는 지식)
( 2025. 1. 28. 전면 개작 )
휴휴사의 풍경소리
남진원
고요한 휴휴사에 풍경소리 들려온다
패던 장작 놓아두고 모탕위에 앉았으니
뎅그렁 곁에 다가와 눈물 같은 속을 준다
편한 날도 드문드문 그리움에 휘이는데
은근히 달구는 律 찻물 다 식혀놓고
적막한 허공배 안에 가을 한 채 싣고 가나
어디서 온 것인가 모양도 뵈지 않고
어디로 갈 것인가 향도 색도 없는 걸음
맑아라, 풍경소리가 그림자도 두지 않네
( 2012. 한울림문학 10집 )
희영이네 메밀밭
남진원
내 살던 고향집 그 옆에 메밀밭
메밀밭 그 옆에는 아름다리 밤나무 숲
무서리 내린 날이면 쌀알 밤이 떨어졌지
그때는 잠귀도 밝아 이른 새벽 일어나서
풀숲을 헤치면서 쌀알 밤을 줍곤 했지
주머니 불룩해지면 가슴도 탱탱하게 차올랐지
숨은 밤을 찾아 이리저리 거닐 때면
메밀밥 망가진다고 고함치시던 희영이 할머니
지금은 또 어는 곳에서 메밀밭을 가꾸실까
( 1991. 4. 『소년문학』)
희영이네 밤나무 숲
남진원
여름이면 빛이 나던
초록의 밤나무 숲
신비한 매미소리
새벽잠을 깨워댄다
무더위 여름 한낮을
씻어놓는 긴급전화
(2024. 2. 6)
흔데
남진원
살면서 물집 생기는 게 한두 개이던가
막말한 입
함부로 씹은 입
이리저리 휘두른 손 …
짓누르며
물집이 생기더니
몽글몽글 맺히는 피고름
만져지는 저 것
함께 데불고 가는
내 이승길이어라
괴로움에 시달려도
아파하지 않고
오냐
너도 내 살
( 1991. 10. 30. 아라리문학 10집. 2024. 4. 16 추고))
흙
남진원
흙위로
새싹이 돋았다
노 스님 잇몸에서도
뽀얀 새 이가 나더니
흙도
제 속
다 허물고,
새 아기 이 같은
파란 싹을
내보이고 싶은가 보다
( 제17시집 『조그마하게 살기』, 태원, 2023. 5 )
흙을 벗해 살다
남진원
폭염에 폭우까지 밭은 연일 풀밭 일색
그 어느 농사꾼이 이렇게 풀물들까
제초제 치지 않는 속 그 아무도 모르리
진땀을 흘리면서 흙을 벗해 사는 여름
연이어 뽑아내도 비만 오면 움트는 풀
호미질, 휘어진 허리 그 내력을 알겠나.
저 멀리 풀숲 사이 코스모스 꽃이 폈다
풀 사이 뽑은 고개 바람에 한들한들
이 억센 틈바구니에서 장하게도 살았다
해바라기 자라더니 어엿하게 꽃피웠다
알알이 익고 나니 찾아온 참새 손님
주인은 허수아비네 들며 날며 빼먹는다.
매미야 참매미야 때맞춰 너, 오다니
무더위 식혀주는 시원한 푸른 음색
가을이 천천히 오게 기도하고 싶구나.
만년에 이 골짜기 흙속에 묻혀서는
틈틈이 글도 쓰고 농사짓고 산 벗하니
신선이 따로 있던가, 내가 바로 그렇네
임포는 학 기르며 외로움도 잊었지만
무심촌 골짜기 괭이질 하는 촌부
때로는 무던한 아낙, 그리워 할 때도 있지.
흙에서 터를 잡아 씨앗들이 살아간다
나도 한 개 사람 씨앗 심어져 자라왔고
칠십여 風霜 속에서 哀樂의 잎 피웠구나.
호랑바위
남진원
임계면 골지리 골지천 옆에는 커다랗고 둥근 바위 하나가 서 있다
바위 이름이 호랑바위다
어릴 때 그 옆을 지날 때면
호랑이가 나타날 것 같아 오금이 저렸다
바위 밑에는
검고 시퍼런 물이 沼를 이루었다
어둔 밤길이 아니라도 그 바위 옆을 지나고 나면
마치 호랑이를 이겨 먹은 듯 하여
영웅이 된 듯하였다
돌이켜 보니 실은,
마을을 지키던 호랑 바위
지금도 잘 있는지 궁금하다
( 정선문인협회 카페 2024. 4. 4.)
허공처럼 살다
남진원
어떤 삶인들
끝내 허물어져 바다가 되고
바다 속 삶은 솟아
산이 되더라
그래,
恒常하는 것이 어데 있노
모두가
허공처럼 사는 걸 알겠다
나,
역시
허공처럼 사는구나
허허,
( 2024. 5. 10)
현대시
남진원
현대시라고 쓴 시집을 받아
읽었다
어렵다
차라리 보내지 말지
이런 글은 보지 않을 때
더 즐거운 세상이 된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예를 들어, ‘물이 흐른다’
이런 내용인데,
얼마나 언어를 뒤틀어놓고 구부려 놓았는지 …
그런 걸 메타포라고, 고도의 시적 기술이라나 뭐라나 …
뒤에 붙인 해설 쪼가리들은
더 어렵다
사는 게,
정작 대단한 일인데
시라고
이리 어렵게 써놓으면
얼마나 더 대단해지는 건지 ….
(2024. 5. 19)
휘파람 시
남진원
나의 노래는 휘파람 시
나의 사랑은 휘파람 노래
떠가는 구름이 이 마음 알까
흐르는 바람이 이 마음 알까
그녀가 그리울 때는 휘파람을 분다
나무에 기대어 휘파람을 분다
못견디게 못견디게 그리울 때는
아름다운 그대 아름다운 그대
나의 노래는 휘파람 시
휘파람 불며 불며 너를
너를 쓴다
나의 노래는 휘파람 시
나의 사랑은 휘파람 노래
떠가는 구름이 이 마음 알까
흐르는 바람이 이 마음 알까
그녀가 그리울 때는 휘파람을 분다
외로움에 기대어 휘파람을 분다
사무치게 사무치게 그리울 때면
사랑스런 그대 사랑스런 그대
나의 노래는 휘파람 시
휘파람 불며 불며 너를
너를 쓴다
( 제17시집 『조그마하게 살기』, 태원, 2023. 5 )
휴게실에서 커피를 마시다
남진원
병원 휴게실 사람들 옆에 끼이면 괜히 든든하다. 그리고 또 무기력함이 이내 들어찬다. 무엇을 견딘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다는 것을 이 사람들도 견디면서 느끼는 걸까 이따금 술 취한 보호자들이 소리도 지르고 싸움도 하였지. 그들 모두 깊이 멍이 들어 있다
그러나 링거대를 밀고 다니는 사람들 만큼 아픔을 견디며 이겨내야 할 사람은 드물다
커피 자판기에 손이 간다. 커피가 빠져나온다. 커피는 뜨거움 속에서 견디다가 내게로 온다 나는 한 모금의 뜨거움으로 암세포를 녹이듯 커피를 마신다. 천천히 마신다
느지막하게 해가 넘어갈 때처럼 꾸물거리며 자주 딴 짓을 하며 커피를 마신다
(2013. 시집,<하늘에 기댄 아내>, 태원 )
휴전선 近況
남진원
하늘 길은 구름이 떠다닌다. 눈부신 새 떼가 오고 가고, 가고 온다.
사방이 탁 트인 길이다.
땅의 길, 긴장한 숲에서 나오는 초록 숨결은 길을 지우고
사방에서 서로를 겨냥하고 있다.
*약력: 강원도문화상 수상. 한국아동문학연구회 강원도지회장. 관동문학회 회원, 한국문입협회 회원으로 활동. 문학동해안시대연구소 대표.
휴휴사 풍경소리
남진원
고요한 휴휴사에 풍경소리 들려온다
패던 장작 놓아두고 모탕 위에 앉았으니
뎅그렁 곁에 다가와 눈물 같은 속을 준다
편한 날도 드문드문 그리움에 휘는 데
은근히 달구는 律, 찻물 다 식혀놓고
적막한 허공배 안에 가을 한 채 싣고 가나
어디서 온 것인가 모양도 뵈지 않고
어디로 갈 것인가 향도 색도 없는 걸음
맑아라 풍경소리가, 그림자도 두지 않네
( 2016. 4. 13. 남진원 제15시집. [무소유의 냄새]. 태원 )
- 시집속의 시조집 「나를 놓다」
휠체어에 태우고
남진원
자는 아내를 깨워 휠체어에 태웠다. 한바퀴 돌아볼까? 고개를 끄덕인다, 아내를 휠체어에 태웠다. 2단 휠체어이다.
어디로 모실까요? 아내를 태우고 1층 로비로 내려갔다. 로비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고 한다. 대박이다 무엇이든 먹지 않아서 안달을 했는데, 아이스크림을 사 오니 너무 비싸다고 한다. 흰 아이스크림을 입에 가져가는데 세살 어린아이다. '아이차가워’, 그러면서도 자꾸 먹는다.
볼을 두 손으로 감싸 주었다.
천진한 아내. 내 일생에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사랑스런 부처님이다.
(2013. 시집,<하늘에 기댄 아내>, 태원 )
흔데
남진원
좋아하다가 미움이 생기고
미워하다가
물집이 생기더니…
몽글몽글 맺히는
피고름
그래,
너도 내 살
( 2016. 4. 13. 남진원 제15시집. [무소유의 냄새]. 태원 )
희영이네 밤나무 숲
남진원
내 살던 고향집 그 옆에 메밀밭
메밀밭 그 옆에는 아름드리 밤나무 숲
무서리 내린 날이면 쌀알 밤이 떨어졌지
그때는 잠귀도 밝아 이른 새벽 일어났다
풀숲을 헤치면서 싸락밤을 줍곤 했지
주머니 볼록해지면 부자 된 듯 그 기분
숨은 밤을 찾아 이리저리 거닐 때면
메밀밭 망가진다고 고함치던 희영이 할머니
지금은 어느 곳에서 메밀밭을 가꾸실까.
( 2024. 5. 11. 남진원 제18시집 『어머니 물동이길』, 동우재 출판사.)
[ 다시 읽어보는 좋은 시들 ]
빗방울
남진원
하얀 빗방울은
빗방울은
고아라,
나무에, 풀잎에
맑은 색깔로 피워놓은
허공
숨결.
삶 한끼
남진원
헌 난로
같은 내가,
산방에서
깨다가 졸다 보니 …
고요도 舊友인 냥
커피 향에
슬그머니 녹아든다
무심히 깃드는 행복
이 수수한
삶
한 끼
한참 동안
남진원
길과 나무와 개울물이 함께 어슴푸레해지는 시간
저녁 먹은 빈 그릇을 개수대에 쓸어 담아 넣고 문을 나선다
길과 나무와 개울물이 나를 끼어 넣어 준다
한참 동안 함께 어슴푸레해진다
( 관동문학 2014. 12.10.)
虛空 葬
남진원
매주 손수레에 생활 쓰레기를 한 짐씩 싣는다.
쓰레기하치장을 향해 길을 나섰다.
새것들이 점차 못 쓰거나 고물이 되어
시간 속에서
쓰레기가 되는 것들이
찾아가는
쓰레기 葬地
길이다
종내는 내 몸뚱어리라는
이 물건도
이리 될,
虛空葬이다
현장학습
남진원
TV에서
보고 또 보고 또 보는
광고가 이어진다
재미없는, 아예 도움도 안 되는
저런 광고들
전에는 채널을 바로 돌렸지만
‘세상은 흥미 없이
다 이런 모양이야’
그냥 보고 또 본다
이건
학교에서도 배우지 못했던
‘타인에 대한 이해력 기르기!
또는
무심한 상태 배우기’ 라는
현장학습이다.
( 2024. 5. 11. 남진원 제18시집 『어머니 물동이길』, 동우재 )
호 박 순
남진원
호박씨가 딸어져
올라왔다
걱정했는데 용케도
잘 자란다
호박순은
호박의 눈인가?
해빛 쪽으로 방향을 잡아
씩씩하게 잘 자란다.
베란다에 푸른 잎이 자란다는
이 생명감!
호박순이 자라는걸
보는 게
요즘은 가장 기쁜 일이다.
( 2025. 8. 31. )
강원예술, 황홀한 춤사위
남진원
우리 언어의 수묵화가 그려지던 날
나무의 몸짓은 돌을 말하게 하고
꽃은
미소 띄는 산하를 만들었네
천상의 세계를 연주하는
음악은
빛의 선율을 흘러보냈지
듣는가
어언, 60년의 세월을 예술의 불가마에 익혀 내놓은
저, 젓대 소리
강원예총의 아름다운 하모니인 것을
원시의 강과 하늘과 바다가
살아가던
천혜의 땅, 강원도에
위대한 예술인의 역사가
메밀꽃으로 피어난다
현대와 전통의 장단에 맞춘 60년의 예술혼을 이어오며
우뚝 선
강원 예총의 눈부신
오늘의 도약
나무 꽃 새들의 향기가 구름에 어울리고
신화 같은 숲의 숨결이
강원의 새 시대를 여는 21세기
인공지능의 색상과 호흡한다
‘감동’이란 생명을 불어넣어
기술 과학 시대가 예술이 되게 하는
강원의 예인들이여
민중의 삶이
그대들 탄소 제로, 예술인의 눈과 귀 입과 손짓에서
위대한 혼불로
살아나는 것을 본다
어느 덧, 60여 성상
색채와 소리와 몸으로
예술의 금자탑을 우뚝 세운
예향의 푸른 음색
이제 스스로 부풀어 출렁인다
이제 스스로 황홀하여 춤을 춘다.
- 2022년 강원예총 예술의 밤 행사 시 낭송 작품
( 2022. 7. 24. )
회상
남진원
지나온 길,
돌아보면
아픈 상처마저
반짝이며
살아 숨쉬는
보석 알갱이들
( 2025. 4. 3.)
휴대폰
남진원
밖에 나왔다
허전하고 이상하다
그렇지!
두고 온 휴대폰
한 발짝도 갈 수가 없다
움직일 수가 없다
어느새 내 발길
묶이고
내 자유까지 모두
휴대폰에게 주어버렸구나.
○휴전선 近況
시: 남진원
하늘 길은 구름이 떠다닌다. 눈부신 새 떼가 오고 가고, 가고 온다.
사방이 탁 트인 길이다.
땅의 길, 긴장한 숲에서 나오는 초록 숨결은 길을 지우고
사방에서 서로를 겨냥하고 있다.
휴지통
남진원
쓰다가 버려진 것 모두 모여서
세상에 버려진 것 끼리
모여 사는 동네
만나는 것마저
버려진 것들이
버려진 것 끼리 만나 만남을 알고
정마저 잊어버린 것들이
버려진 것 끼리 만나
정을 나누고
쓰다가 버려진 것들 모두 모여서
세상에 버려진 것끼리
모여 사는 동네
티끌
남진원
위대하다고 하던 인물
막강한 권력자들
세계 최강의 부자 들
모두 거들먹거려 봐야 …
세월 속에서
한 줌 재 밖에
되지 않았구나
손안에 쥐니
미세 먼지일 뿐
거대한 세상이란 게
손안에
티끌이구나
풀
남진원
‘풀풀!’
사전에서 찾아보니
‘날쌔고 기운차게 뛰거나 나는 모양’이라고 나왔다.
모진 환경에 얼마나 날쌔고 기운차게 살아왔으면
이름을 ‘풀’ ‘풀’ 이라 지었을까.
초여름은 진짜, 풀과의 전쟁이었다.
밤새 비오고 나니
풀풀
풀풀
마구 자랐네.
가문 날에 곡식은 말라죽어도
풀은 마른 땅을 더 꽉 그러쥐고 살아냈다.
골치 아픈 녀석들이지만
모질게
살아내는 법
배울만하다.
어려운 때가 와도 ‘풀 풀’
풀만 생각하면
풀풀 용기가 났다.
[월간문학 2018년 6월 10일]
나는 늘,오늘입니다
남진원
나는 늘,
오늘입니다
나를, 나는 장사지냈습니다
73년의 육신과
영혼을 불 질렀습니다
최고의 善, 최대의 惡도
불 질렀습니다.
善도 없습니다
惡도 없습니다
나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나는 없는,
나로 삽니다
나는 늘,
오늘입니다
나는 늘 현재입니다
바위 앞에서
남진원
입이 없다고
뜻도 없으랴
진정한 귀
열린 자는
들어라
온몸으로
말하는
저,
침묵의 언어를.
아프면 다,보인다
남진원
몸이 아프면
다 보인다
평소에
밥 먹는 일
그냥
걷는 일
사람들과
말하는 일
가끔
미소짓는 일
그리고
편히 잠드는 일
깨어나면
조용히 눈뜨고
숨쉴 수 있는 일
이 보다 더
행복한 일 없는 것을.
낭송시
우리네 삶, 늘 흔들리며 살아도
남 진 원
흔들리며 사는 일이
어제, 오늘의 일이었던가
내 인생은 늘 4.8도의 지진이 일어났으니
삶의 곳곳이 허기진 채
수차례 여진도 다반사였지
선반의 그릇 흔들리듯
자네도
흔들리며 살아오지 않았는가
지난 번 전북 부안 땅 엉덩이에 4.8의 지진이 났는데도
전국 곳곳,
비틀
비틀
그래,
우리네 정치도 교육도 문화도 사회 곳곳에서
이미 지진 수치 4,8도를 넘어
비틀거리고
우리네 삶, 늘
흔들리며 살지 않느냐.
그래도
밥 먹는 일
그냥
걷는 일
사람들과
말하는 일
가끔
미소짓는 일이 있어서
이 보다 더
행복한 일이 없습니다
이 보다 더
숭고한 일이 없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늘 고맙습니다.
흙
남진원
흙에서 터를 잡아 살아가는 무리들이 있다
나도 한개 사람 씨로 심어져 자라왔고
육십여 풍상(風霜) 속에서 애락(哀樂)의 잎 피웠구나.
만년에는 방터골의 흙속에 묻혀 지낸다
틈틈이 이곳에서 농사짓고 산 벗하니
신선이 따로 있던가, 내가 바로 신선이네
임포는 학 기르며 외로움도 잊었겠지만
나는 방터골에서 낫질하는 촌부이네
때로는 파란 하늘을 같이 볼 사람, 그리울 때도 있지.
폭염에 폭우까지 밭은 풀밭 일색이다
어느 농사꾼이 이렇게 둘까 애가 타 못 배길 거다
제초제 치지 않는 내 속은 누가 알아 줄 것인가
진땀을 흘리면서 고추밭 풀을 맨다
한두 번 내리쳐도 끄떡없는 풀뿌리들
괭이질, 휘어진 허리 그 내력을 알겠다.
멀리 풀 숲 사이 코스모스 꽃이 폈다
풀 사이로 고개 뽑아 바람에 한들한들
억센 풀 틈바구니에서 장하게도 살아났다
여동생들은 제발 일하지마! 타이르듯 달래지만
어찌 풀을 보고 그냥 두고 말 것인가
그래도 일 한 자리는 표도 나지 않는데.
뜨거운 여름날에 풀을 마구 뽑았더니
오후엔 힘이 쏙 빠져 움직이지 못했다.
누워서 한잠 푹 자니 다시 산 듯하였다
해바라기를 심었는데 잘도 자라 꽃피었다
알알이 익을 무렵 찾아온 참새 손님
주인은 허수아비로 여기나, 들며날며 빼먹는다.
불청객 참새는 곡식을 까먹고
밤손님 고라니는 잎을 모두 먹어치웠다
울면서 겨자 먹기지만 ‘보시(布施)한다’ 생각했다
매미야 참매미야 참 고맙다 참매미야
이 더운 날에도 시원한 네 푸른 음색
가을이 천천히 오게 기도하고 싶구나.
2018년 여름은 특별한 한 해구나
제일 많이 땀 흘리고 물도 많이 들이 킨 날
밭에 난 무성한 풀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길길이 날뛸 것만 같은, 6년 만에 최고다.
( 2018. 8. 2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