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운과 해월의 도통 전수. 1863년 8월 14일 밤 수운이 해월에게 도통을 물려주는 모습을 그림(<천도교창건록>)>
8월 14일 저녁 수운은 자기의 방으로 해월을 불렀다. 수운은 해월에게 무릎을 단정히 하고 앞에 앉으라고 하였다. 해월은 스승의 지시에 따라 무릎을 꿇고 단정하게 앉았다. 수운은 해월에게 몸을 움직여 보라고 하였다. 해월은 아무리 애를 써보았으나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도원기서(道源記書)>에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4일 삼경(三更, 밤 12시경)에 좌우를 물리치고 선생(수운을 가리킴)은 묵묵히 오랫동안 생각하다가 경상(해월의 이름)을 불렀다. 경상에게 “그대는 무릎을 단정히 하고 평좌해보라.” 하였다. 경상은 이 말씀에 따라 앉았다. 선생이 이르기를 “그대는 수족(手足)을 임의로 굽혔다 폈다 해 보라”고 하였다. 경상은 갑자기 대답을 하지 못했으며 정신이 있는 듯 없는 듯하여 몸을 굽혔다 폈다 할 수가 없었다. 선생은 이를 바라보시고 웃으시며 몸을 쳐다보다가 이르기를 “그대는 어찌하여 이러하는가?” 하였다. 이 말을 듣자 곧 굴신(屈伸)이 되었다. 선생은 이르기를 “그대의 몸과 수족을 조금 전엔 펴지 못하더니 지금은 펴니 왜 그러한가?” 경상이 대답하기를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습니다.”고 하였다. 선생은 이르기를 “이것이 바로 조화(造化)의 큰 것이로다. 후세에 어지러움이여. 신중하고 신중하라.”
수운은 해월을 불러 그의 도력(道力)을 시험한 것이었다. 수운의 마음이 그대로 해월의 몸에서 작용하는 것을 통해 두 사람이 한 마음으로 통해진 이심전심(以心傳心)을 확인하였다. 이 의식을 마치고 도통을 물려주었다. 수운은 해월에게 수심정기(守心正氣) 네 글자와 부도(符圖), 그리고 수명(受命)이라는 글씨를 적어주었다. 그리고 시 한수를 내려주며 “그대의 장래를 위한 강결(降訣)이니 길이 잊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용담에 물이 흘러 네 바다의 근원이요, 검악에 사람이 있어 일편단심이로다.(龍潭水流四海源 劍岳人在一片心)
이 시의 앞 구절 용담(龍潭)은 수운이 동학을 창도한 곳을 말하고 뒤 구절 검악(劍岳)은 해월이 사는 검등골을 지칭한다. 이 시구는 수운이 이전에 지은 ‘용담수류사해원 구악춘회일세화(龍潭水流四海源 龜岳春回一世花, 용담에 물이 흘러 네 바다의 근원이요, 구미산(龜尾山, 용담의 뒷산)에 봄이 돌아오니 온 세상이 꽂이로다)’의 뒤 구절을 고친 것으로 용담에서 시작된 동학의 가르침이 온 세상에 펼쳐질 것이고, 검악 출신의 해월이 일편단심으로 이 도를 이어갈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즉 해월에게 도통이 전수됨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시이다. 해월은 자신의 재주가 미천하여 이를 받을 수 없다고 거듭 거절하였으나 수운은 “천명(天命)”이라고 말하면서 성공한 사람은 가는 것이라고 일축하였다. 그리고 교단의 모든 책무를 해월에게 맡겼다.
다음날인 8월 15일 추석을 맞아 용담을 찾은 제자들에게 수운은 해월에게 도통을 전수했음을 공식적으로 공지하였다. 이로써 해월은 수운을 이어서 동학의 제2세 교조가 되었다. 수운은 해월에게 7월 23일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의 직책을 내려 교단의 직무를 일부 맡긴 후 한 달도 되지 않아 도통(道統) 마저 물려주었다. 이때 해월의 나이가 37세였다.
평범한 농부였던 해월이 동학의 도통을 물려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일찍이 부모를 여위고 친척집에 더부살이하며 천덕꾸러기로 취급받던 어린 시절, 17세에 제지소의 직공으로 들어가 손이 부르트도록 일하며 동생을 먹여 살려야 했던 청년 시절, 결혼 후 처가살이와 마북에서 동네 집강(執綱)으로 일하며 주위 사람으로부터 그럭저럭 대접을 받던 장년 시절을 보내던 그가 동학에 입도한 지 2년 만에 동학 교단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고려대학교 철학과 교수였던 최동희는 수운이 찾는 후계자의 덕목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다.
첫째는 마음이니, 그(수운)의 마음과 같아서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 되어 그의 마음과 완전히 일치하는 사람이어야 하고, 둘째는 근기(根氣)이니, 어떠한 난관이 있더라도 이를 타개할 신념과 투지를 갖춘 사람이어야 하고, 셋째는 인덕(人德)이니, 덕성 있고 포용성이 있어서 수많은 도인들을 능히 다스려 나갈 수 있어야 하고, 넷째는 학식(學識)이니, 천도를 깨우쳐서 천지의 운수를 완전히 터득한 사람이라야 할 것이다.(최동희, <해월 최시형>)
<수운 최제우의 피체로. 수운은 1863년 12월 10일 경주 용담에서 체포되어 영천-대구를 거쳐 과천(지금 서울의 말죽거리)까지 올라갔다 철종의 승하로 다시 대구감영으로 이듬해 1월 6일 이송되어 심문을 받았다. >
해월은 앞의 세 가지 덕목에는 뛰어났지만 마지막 조건인 학식은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해월은 수운의 가르침을 하나도 거슬리지 않고 마치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 2년간의 종교적 수행을 통해 해월은 수운이 인정할 정도의 학식도 갖추었다. 해월이 비록 말은 유창하게 하지 못하고 문장도 뛰어난 편은 아니었지만 누구보다도 진실하게 수운의 가르침을 따랐다. 그리고 이적(異蹟)을 행하면서 도를 깨달아 나갔고, 수운의 마음도 잘 헤아려 어긋남이 없었다. 또한 해월은 가진 것이 없는 빈천한 신분이라서 당시 사회 문제에 대한 비판 의식도 투철하였다. 즉, 해월은 천여 명이 되는 동학도 가운데에서 성(誠)?경(敬)?신(信)에 가장 뛰어났고 종교적 이적을 행하고 포덕을 할 정도로 종교적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해월은 훗날 제자들에게 자신이 입도한 뒤에 독실하게 공부했던 경험을 거울삼아 공부에 매진하라고 당부하였다.
독실하게 공부해서 이루지 못할 것이 없느니라. 내가 신유년(辛酉年, 1861) 여름에 도를 받은 뒤로부터 독실하게 공부할 뿐이더니 얼음물에 목욕하여도 따스한 기운이 돌고 불을 켜도 기름이 졸지 아니하니 정성들여야 할 것은 도학(道學)이니라. 우물을 판 뒤에라야 물을 마실 것이요, 밭을 간 뒤에라야 밥을 먹을 것이니, 사람의 마음공부 하는 것이 물마시고 밥 먹는 일과 같지 아니한가.”( <해월신사법설>, ‘독공(篤工)’)
수운이 일찌감치 후계구도를 정한 것은 만일의 화에 대비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동학의 교세가 커지자 주변에서 동학의 주문에 있는 천주(天主) 글자만을 지목해 서학(西學)이라 모함하는 자가 많아졌다. 특히 경상도의 유학자들은 동학을 없애려고 조정에 상소를 올리고 관에 압력을 행사하였다. 대표적인 곳이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이었다. 도남서원의 산하에 있는 우산서원(愚山書院)에서 돌린 통문에서 동학을 “요망한 마귀와 같이 흉측한 무리”라고 하면서 “서학(西學)을 개두환명(改頭幻名)한 것”이라고 몰아붙였다. 경상도를 성리학의 최후의 보루라고 여긴 이들은 “옛날에는 감히 이 지역에 서학이 들어오지 못하였으나 소위 동학은 선학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쭉쟁이풀과 같은 것으로 들어와 자라고 있다.”라고 하면서, “우리들의 급선무는 햇빛을 못 보게 넝쿨을 뽑아버려야 한다.”고 하였다. 도남서원에서는 이를 받아 1863년 12월에 상주의 옥성서원 등 여러 곳에 또 통문을 돌렸다. 여기에서도 “동학은 서학의 명목을 이어가는 것”이라며 “송주하는 천주라는 것은 서양에 의부한 것이고 부적과 물로 병을 치료하는 것은 황건적의 행위를 도습한 것”이라고 동학을 비하하며 뿌리를 뽑으라고 하였다.
유학자들이 동학을 극렬하게 배척한 이유는 자신들의 가치를 지키려는 것도 있었지만 현실적으로는 지식층들이 동학에 입도하는 사례가 늘어나 위기의식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도남서원의 통문에서도 이러한 점이 드러난다. “문벌 좋은 집안의 재주 있는 사람들이 점차 물들어갈 염려는 없으나 오히려 부족함을 좌교(左敎, 여기에서는 동학)의 윤리를 본떠서 자신의 필설을 더럽히며 밝은 도리를 논척할 수 있다.”라는 내용을 살펴보면 유학자 가운데서도 동학에 입도하는 사람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동학이 지식인들 사이에 알려져 자신들의 영향력이 위축되자 유학자들은 동학의 뿌리를 뽑으려고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다.
수운이 용담에 되돌아오고부터 동학의 유포는 급속도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유학자들은 동학이 “귀천의 차별을 두지 않고 백정과 술장사들이 같이 어울리며 엷은 휘장을 치고 남녀가 뒤섞여서 홀어미와 홀아비가 가까이 하며 재물이 있든 없든 서로 돕기를 좋아하니 가난한 이들이 기뻐한다.”라고 평하였다. 동학은 기존의 신분제도, 남존여비의 차별, 빈부의 격차 등을 두지 않고 서로 돕는 모습에 유학자들은 자신들의 영향력이 감소될까 두려워했다. 동학이 신분과 빈부의 차별을 두지 않고 유무상자(有無相資)하는 모습은 이후 동학 확산의 요인이었고 마침내 1894년의 동학혁명으로까지 분출되었다. 하지만 동학의 확산에 비상이 걸린 유학자들은 조정에 동학을 이단으로 몰아 척결할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였다.
1863년 10월 들어 본격적으로 동학을 탄압하기 위한 방책을 논의하던 조정에서는 급기야 11월 20일 정운구(鄭雲龜)를 선전관으로 임명하여 수운을 체포하고자 서울을 출발하였다. 정운구는 경주로 내려오면서 동학의 확산을 직접 목격하고 실감하였다.
거의 날마다 동학이야기가 들려오지 않은 날이 없었으며 경주를 둘러싼 인근 고을에서는 더욱 심했다. 주막의 아낙네와 산골의 초동들까지도 글(동학의 주문)을 외며 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주문은 위천주(爲天主) 또는 시천지(侍天地, 시천주를 잘못 씀)라 하였다. …… 사람마다 그 학을 하니 이들이 물든지 오래여서 극성스러움을 알겠다.(<선전관정운구장계>)
<해월(海月) 인장. 해월 최시형이 직접 판각한 것으로 알려진 인장으로 유족이 보관하고 있다. >
동학의 유포가 생각보다 많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정운구는 파악하고 급히 용담으로 잠입하여 12월 10일 새벽에 수운을 체포하였다. 수운은 사전에 조정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있어서 제자들이 피신할 것을 권하였지만 “이 도가 나에게서 나왔는데 내가 어찌 피하겠느냐. 내가 받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고는 해월을 불러 그간 자신이 지은 경편들을 모두 주면서 발행해 줄 것을 권하였다. 이때 수운이 해월에게 준 경편들은 약 20년 후에 해월에 의해 <동경대전(東經大全)>과 <용담유사(龍潭遺詞)>로 판각되었다.
또한 수운은 자신이 부르기 전해 해월에게 용담으로 찾아오지 말 것을 명령하였다. 해월이 머뭇거리자 수운은 크게 화를 내며 제자가 스승의 말을 듣지 않느냐고 해월을 내쫓다시피 하였다. 수운은 해월이 자신과 함께 있다가 체포되면 동학의 운명이 위태로움을 염려해 해월을 용담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하였다. 수운이 체포되자 이제 동학의 명운은 해월의 어깨에 달려있었다.
성강현 문학박사, 동의대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