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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將兵)과 종서(縱書) 육필 편지
이원우
우리 모두는 자기가 빠져서 헤어나지 못할 정도가 되었을 때, 이런 표현을 쓴다. 무엇 무엇이라 하면 자다가도 일어난다. 고스톱이라 하면 자다가도 일어난다. 노래라 하면 자다가도 일어난다. 음담패설(淫談悖說)의 ‘음’ 자만 들먹였다 치자, 자다가도 일어난다. 술판이 벌어졌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못 지난다 했다, 어찌 자다가도 안 일어날 수 있으랴! 그러고 보니 이 약간은 얄궂은 명제(?)엔 부정(否定)이 선수를 치는 것 같다. 이를 전자(前者)라 하자.
이번엔 이런 문장을 제시해 놓고 보자. 그 반응이 사뭇 궁금하기에 지레짐작을 하는 거다. 그는 불우 이웃 돕기라면 자다가도 일어난다. 그는 자신이 굶을지언정 가난한 친구를 위하는 일이라면 자다가도 일어난다. 긍정의 의미가 깔려 있지만 실행은 그만큼 어려운 게 후자(候者)에 속한다 하겠지.
나 어정쩡한 예비역 육군하사 이상충은 어느 쪽에 분명하게 속하지 못하는 것 같다. 중흥시조인 휘자(諱字) 거명 할아버지 39세손인데, 주변인(周邊人)? 하지만 내 처지를 두고선 그 진단이 적절하리라. 참 <우리말사전>의 주변인 해석은 이렇다. 둘 이상의 이질 집단이나 사회에 속하여 양쪽으로부터 영향을 받지만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난 사전을 덮으면서 불안감에 젖을밖에. 어정쩡한 자신을 자책하면서.
타관 생활이 내일모레면 어느덧 10년이다. 대중가요 ‘나그네설움’에 그렇게 천착(穿鑿)하다가, 가끔은 고복수의 ‘타향살이’를 섞어 불렀다. 그러다 뜬금없이 민요 ‘이팔청춘가’에 목메기도 했다. 이팔청춘을 니 자랑 말아라/ 덧없는 세월에(좋다!) 백발이 되누나// 세월이 가기는 흐르는 물 같고/ 인생이 늙기는(절씨구!) 바람결 같구나
그러는 나를 두고 아내는 물끄러미 바라보곤 알 듯 모를 듯한 웃음을 보내며 중얼거린다. 들리지는 않지만, 아내의 입 모양에서 나는 그걸 읽는다.
“저 양반 또 도지는군. ‘이팔청춘가’라면 자다가도 일어나니, 쯧쯧. 보나마나 오늘 또 무르팍에 멍께나 들겠지.”
갑자기 멍이라니? 하니 처음 이 이야기를 접하는 사람은 의아해하지 않고 못 배기리라. ‘청춘가’ 가사 중 괄호 속에 든 ‘좋다’ 혹은 ‘얼씨구’ 등은 말하자면 추임새다. 장구 따위(?)는 여기서 반주로 어울리지 않는다. 노래 부르는 사람이 자신의 신체 부위를 세게 침으로써만, 흥을 배가(倍加)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멍은 ‘자연현상’이다. 믿거나말거나 아니냐고? 한때 민요 강사로 부산 시내며 밀양의 노인학교를 드나들었던 추억담의 하나라 우기고 싶다.
지난 10년 참으로 내게 변화가 많았다. 다른 건 제쳐 두고라도 이사만 세 번 했다는 사실! 정말 잊히지 않으리라. 수원, 천안, 용인….그러다 정착한 곳이 이곳 용인이다. 이삿짐센터 차, 그 대형 트럭만 봐도 몸서리쳐지니, 그것만으로도 내가 이 고장을 사랑하는 명분이요 당위성이이다. 단 죽어서는 유해(遺骸)로 진화(?)하여 고향 밀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나와의 묵계(默契)요, 아내와의 약속이기도 하다. 거기 엄마, 아버지가 계신다. 아직 자식들에겐 확언을 하지 못했지만.
서너 해 전까지만 해도 나는 무료로 군 안보 강사를 했다. 물론 전방 부대 장병들이 그 대상이었다. 무료로 말이다. 딱 마흔 시간을 해냈으니, 그 기록은 자평해 봐도 결코 예사롭지 않다. 물론 그걸 갖고 떠들어봤더니, 폄훼하는 이도 한둘이 아니더라. 하지만 그러는 그들일수록 군부대 정문에도 안 가 봤던지 세상을 부정일변도로 대하는 시각의 소유자다. 내가 아무리 어정뱅이인들 왜 이것조차 못 밝힐쏘냐.
말이 쉬워 군 장병 대상안보 강연이지, 실제로는 그건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무엇보다 나는 안보에 전문 식견을 가지지 못한 위인이라 엄두를 내는 것 자체가 부담이었다고 고백하자. 하지만 무슨 일이든지 저질러 놓고 보는 성미라 그 결과가 설사 비참하다 해도 그건 추후의 문제 아닌가? 해서 말이다. 여러 부대에서 초청만 오면 나는 <중고등학교 음악 교과서>며 <흘러간 옛 노래>, <대중가요 1000곡> 따위의 책과 <명심보감(明心寶鑑) 해설> <전래 동화집> 등을 배낭에 넣어 짊어지고 부리나케 집을 나섰다. 서너 해 동안 그랬고, 내 발이 닿은 부대만, 자그마치 열대여섯 개 부대다. 대대(大隊) 급 이상 말이다. 단 전곡에 있는 26 사단 직할 공병 중대와 정비 중대는 예외로 하고….
그동안에 겪었던 모든 이야기를 다 늘어놓을 수는 없다. 여기서 가장 먼 거리에 있는 두 부대에서의 강연 요지를 털어놓으면 구두든 이렇게 짐작은 하리라. 아하, 고생께나 했군그래. 그래도 재미있는 걸?
오늘 나는 ‘우리나라 동부와 서부의 최 북쪽 내 부대 방문기’라 이름하고 풀어나가려 한다. 단 전제나 조건 하나. 적어도 지역감정에 자유롭거나 치우치지 않은 전우라야 약간 공감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나이가 좀 든 사람이라야 또한 고개를 끄떡일 테고. 옛날 서당에 다녔던 촌로라면 금상첨화이고. 자신이 군에 갔다 왔거나 현역인 전우, 가족 혹은 일가친척 중 어느 누가 군과 관련이 있는 국민도 행여 귀 기울여 줄거다.
26사단에서 제대했었다, 52년 전이다. 지금은 부대 자체가 없어지고 드넓은 터에, 상당한 크기의 기념관으로만 사단장실 근처에 자리 잡고 있다. 통합되었다는 말이다, 8사단에. 사령부에 못 들어가 본 지도 일 년이 훨씬 넘었으니, 그립기만 하다.
먼저 얽히고설킨 빛고을 광주(光州)와의 인연을 화두로 내세운다. 그래야만 최종 ‘목적지’인 종서(縱書) 육필 편지까지 끌고 가고 순조롭게(?) 매듭을 지을 수 있을 테니까.
광주는 내가 첫사랑과 하룻밤을 보낸 고장이다. 신양 파크 호텔….그 이름도 수시로 기억나고 외관마저 재생된다. 동성동본인 그 첫사랑은 지금 미국 오하이오 주에 산다. 비록 성을 최(崔) 씨로 바꾸었지만.
광주는 내 중편소설에도 등장한다. 63년도 삼랑진에서 살인(?)을 저질렀다. 그러곤 그날 새벽 경전남부선 완행열차를 타고 열 시간 넘게 걸려 죽을 고생을 한 끝에 광주에 도착한다. 구두 닦는 애를 붙잡고 물어 근처의 홍등가로 접어들었는데, 마침 들어온 아가씨가 동성동본이 아닌가? 거기서 며칠 동안 묵으면서도 그 아가씨와 동침하지 않았다. 동성(同姓)만 들어도 아무리 도피 중이지만 같이 눕기 두려웠던 터. 더구나 동본(同本)이라니, 선고의 유훈이 생각나서 도무지 그 짓을 저지르지 못하겠더라. 갖은 고생 끝에 목포로 가서 부둣가에서 발동선을 타고 가거도로 몰래 들어가 다시 몇 년을 허송했다. 살인이 아니라는 어처구니없는 누명을 벗고 귀향하여 학교에 복직하고 새 가정을 이룸으로써 해피엔딩.
그러니 어찌 내가 광주를 어찌 있겠는가?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광주 생각이 머리에서 않았다. 그 ‘옛 이야기’가 되살아나서였다. 더구나 유네스코 부산 대표 전국대회의 단골 출연자인 나로서는 그 신양파크 호텔에서 부르던 ‘청춘가’며 ‘밀양 아리랑’들 일상에서 흥얼거리기 예사였다.
나로서는 태어나서 제일 북쪽에 발을 디뎠던 소중한 체험이 26사단 직할 중대에서 비롯되었다. 거기 공병 중대 장병들을 대상으로 안보 강연을 자의반타의반으로 하게 되었으니 전말(顚末)을 밝히자면 이렇다.
26사단 7*여단 본부 및 예하 3개 대대에서 안보 강연-그래 차라리 인성 교육이라 하자, 마음 편하게 말이다.-에 맛(?)을 들이고 있을 무렵, 나는 26기계화 보병사단의 공식(公式) 카페에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들었다. 동부 전선 최전방이라 할 수 있는 직할 공병 중대가 연천군 전곡읍에 있다는 사실을 그 카페에서 알았으니, 결과로 보면 운명의 여신이 미소를 보냈다고 할 수밖에.
그날도 나는 무심결에 카페의 문을 열었다. 공병 대대 란에, 광주에 사는 어떤 병사의 아버지가 보낸 애타는 사연이 올라와 있었다. 아들이 입대 후 공병 대대로 갔다는데, 그 뒤로 소식이 전혀 없다는 거다. 나는 머리에 섬광(閃光) 같은 충격을 느끼곤 댓글을 달았다. 나 자신이 26사단 부관참모부에 있었고, 그 내무반과 공병대대가 서로 지척에 위치해 있었다는 말을 전했다. 그러고 허풍으로 끝날지 모르는 답신을 덧붙였다. 지금도 나는 26사단에 자주 가니 걱정 말라고 하곤, 내가 앞으로 제대할 때까지 이재형 병사를 보살펴 주겠다고 큰소릴 친 거다.
따지고 보면 참으로 무모하기 이를 데 없는 노병의 만용이었다.
그런데 병사의 아버지의 이름이 이차희란다. 내가 다시 문자로 물었다. 혹시 본관이 어디냐고 말이다. 그런데 경주라는 게 아닌가? 내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대답이다. 마침내 통화가 이뤄졌다. 더욱 놀랄 내용인즉 바로 이거였다. 아저씨 되시는군요. 저는 상서공파입니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동성동본! 그 또한 고함이라도 지르는지 우렁찬 큰소리가 전화기를 온통 지배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재형은 공병 대대 본부가 아니라, 전곡에 있는 직할 공병 중대에 파견 나가 있다는 게 아닌가! 파주와 양주 근처에 산재해 있는 7*여단과 예하 직할 대대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이라 처음엔 적이 당황했다. 그런데 다행히, 사단사령부 인사참모를 통해 악산(岳山)에 묻혀 있지 않고, 왕복 도로가 험하지 않다는 정도는 알게 되고 나서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인사참모는 주소와 중대장 이름을 일러 주었다.
한자를 섞어서 단박에 중대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수형 일병과의 사적 인연이며 여태까지의 군부대 안보 강연에 관련된 이모저모를 섞어 적었다. 그러니 나를 한 번 불러주면 좋겠다는….사실 그런 청탁(?)은 얼토당토않다는 평을 받기 십상이다. 득보다 실이 많을 가능성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제대 반세기인 한갓 노병, 신세대를 전혀 모르는 퇴역 교육자를 반길 장병(특히 병사)들이 얼마나 될까? 중대장은 그 정도의 판단력을 갖춰야 한다. 그런데 그가 좋다는 회신을 보낸 것이다. 물론 휴대 전화로. 그의 마지막 한마디가 나까지 파안대소하게 만들었다.
“할아버지, 한자를 섞어 편지를 보내 주셨더군요. 한데 그 한자를 저를 비롯한 장교들이 못 읽어 나이든 부사관님들에게 물어 보고 해석(?)했습니다. 하하. 옆의 정비 중대 병력도 참석하도록 해 주십시오. 교육장은 두 개 중대가 직할이라서 대대가 아닌데도 있는 교회 안입니다.”
그가 넌지시 일러 주었지만, 공병대대장을 경유하여 사단장의 입김(?)도 작용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곱씹어보고 내린 결론이 이거였다. 그러면 그렇지, 일개 중대장이 임의로 외부 인사를 안보 강사로 위촉했다 치자. 만약 폐해가 있다면 그걸 뉘라서 감당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드디어 12월 23일 열 시로 강의 일정이 잡혔다.
새벽 여섯 시에 집에서 출발하기로 했다. 운전조차 할 줄 모르는 내가 차가 있을 턱이 없다. 아내 또한 운전대를 놓은 지 오래다. 하지만 죽으란 법은 없다지 않던가? 며칠 전 안산에 조그마한 기업체를 운영하는 밀양(密陽)의 내 옛 제자에게 부탁했었더니 자기가 나서겠다고 며칠 전 답을 보낸 것이다.
“제 처랑 선생님 댁 앞으로 가겠습니다. 아침진지 드시지 말고 그냥 나오시면 됩니다. 커피도 끓여야지요, 저희가.”
여명(餘命) 무렵에 군복을 입고 기다렸다. 제자 내외가 밖에서 기다린다는 연락을 보내왔다. 눈보라가 그 시각까지 그치지 않아서 낭패였다. 전날까지의 적설량도 적지 않아 제자는 거북이 운전을 할 수밖에. 그래도 제자는 이를 악물고 험한 길을 헤쳐 나갔다. 두어 시간 뒤에 의정부 시가지를 벗어난 한적한 마을 어귀에 주차를 하고 셋이서 김밥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만감이 교차해서였는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 한 방울이 시트에 떨어졌다. 그러자 내외도 약속이나 한 듯이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치는 게 아닌가! 이상해서 물었으나, 계속 머뭇거린다. 제자는 군에 가지 않아-다리가 불편해서-감정에 북받쳐 오를 상황도 아닌데 계속 그러니 내가 다그쳐 물을 수밖에.
“자네 내외 무슨 일이 있었군그래.”
침묵만 지키던 내외가 다시 울먹이는 소리로 말한다.
“뉴질랜드 유학을 다녀온 딸애를 며칠 전 교통사고로 잃어버렸습니다. 흑흑.”
“이 사람들 보게나, 이를 어쩐다는 말인가? 그러면서도 나를 싣고 여기까지 왔으니, 내가 망발을 저지른 셈이네.”
“선생님, 선생님도 얼마 전 참척(慘慽)을 당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드님 생각이 나서 군 안보 강사로 나가시는 것 정도는 저희도 짐작합니다. 선생님께 위로가 될까 싶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셋은 거짓말 같지만 대성통곡을 하고 말았다. 재래종 개의 목줄을 쥔 한 할머니가 차 안의 소동을 눈치 챘는지 들여다보는 흉내를 내고 지나갔다.
거기에서 부대가 그리 멀지는 않았다. 대신 검문검색은 철저했다. 군데군데서 병사(헌병/ 지금은 군사경찰)들이 신분증을 확인했다. 마침내 검문소 앞 중위와 상사(上士) 혹은 중사가 요구하는 대로, 그 절차를 고스란히 밟고 나서야 이윽고 부대에 닿을 수 있었다. 참 적이 탱크로 남침하면 자동으로 낙하하여 이를 저지한다는 시멘트 구조물로 여러 개 보았다. 중대장실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나는 교회 쪽으로 발길을 돌렸고 제자 내외는 안산으로 떠났다.
성전(聖殿) 안. 나는 꼬박 120분 동안 열변을 토하고, 막춤도 섞었다. 소대장인 중위 하나가 단상에 올라와 내 흉내를 내는 바람에 모두들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가져간 교안(敎案)과 책들을 번갈아 뒤짐은 물론 ‘땡벌’ 등 새내기 병사들이 좋아하는 노래도 불렀다. 그게 다냐고? 나머지 강의 내용의 개요는 뒤에 등장하는 1사단 18연대 뒷부분에서 보충한다. 이재형 일병은 첫 시간이 끝나고 나서 만났다. 어떤 병사가 M16 소총을 어깨에 메고 성전으로 들어서더니 큰소리로 외쳤으니! 우레와 같은 박수와 웃음소리가 성전 안을 가득 메웠다. 할아버지, 저 재형입니다. 공격!
종친 조손의 조우(遭遇)였다. 첫 외출을 한다기에 5만원 지폐 한 장을 녀석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로써 중시조 휘자 거명 할아버지께 체면을 세운 셈이다. 얼마 뒤 내가 치른 26사단 장병 초청 콘서트에도 녀석이 모범 병사로 뽑혀 당당히 참석했으니 경주 이 씨로서 화룡점정(畵龍點睛)을 찍어 주었다고 해야지 않겠는가! 더구나 행정 부사단장 윤성필 대령과 셋이서 찍은 사진도 찍었겠다. 녀석이야말로 헌헌장부란 말이 절로 내 입에서 튀어 나올 밖ㅐ. 그럴 때 다시 쥐어 주는 5만원! 그것도 나와 녀석이 엮어낸 미담(?)의 매체다.
다만 제대할 때 녀석을 전송하지 못해 섭섭했는데, 마침 내게 녀석이 주소를 일러 주었기에 다시 5만 원짜리 한 장을 책갈피 속에 넣어 우송했다. 그래서 말인데, 녀석과의 ‘어깨 겯기’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시한(時限)? 그게 우리 사이에 있을 수 있단 말인지 반문(反問)하고 싶다.
우스운 퀴즈 혹은 수수께끼를 누가 던지고 여럿이 대답한다 치자.
“그 노병이 그렇게 집착한 까닭은 무얼까?”
갖가지 답이 나오리라. 그 중에서 내가 정답으로 치고 싶은 것은 이거다. 뭐 첫사랑 때문이겠지. 아니야, ‘지역감정 타파’ 덕목에서 노무현과 상통하는 바가 있어서였을 거야. 아무래도 종친(宗親)이란 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 걸? 정답은 이 속에 있다. 다만 밝히는 게 별 의의가 없을 것 같아 함구무언(緘口無言)할밖에.
다시 일곱 달여가 흘렀다. 7월 말이 되었으니 한참 더위에 사람들이 시달릴 무렵이었다. 전(前) 12* 기보대대장이 전화를 했다. 몇 두어 해 전 대령으로 진급 합동참모본부에서 근무하는 것으로 알았는데, 그새 1사단 1*연대장으로 부임했다는 게 아닌가? 그가 아니었으면, 내가 마흔 시간이라는 안보 강연이라는 기록(?)은 꿈도 못 꾸었을 터, 난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날 통화 당시 재현.
“여보세요.”
“공격! 선배님, 저 김 대령입니다.”
“아니. 너무 적조해서 미안합니다. 어떻게 전화를 주셨습니까? 여전히 ‘공격’이군요, 구호가!”
“대한민국에서 유일한 26단 구호 ‘공격’을 제가 왜 잊겠습니까? 편안하시지요?”
잠시만 양해를 얻는다 하고, ‘공격’ 구호에 얽힌 비화 하나를 내가 소개했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마흔 평에 조금 못 미치는 규모다. 단지라 해봤자, 총 여덟 동(棟)이고. 대개가 10층. 그러니 하사 모자를 주야로 쓰고 다니면서 아무 데서나 노래를 부르고, 서투르게 색소폰을 부는 별난 나를 주민들이 대개는 알 수밖에. 26사단 출신인 걸 그들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눈치 챈다. 국방 TV에서 ‘우리는 전우’를 녹화하면서 한나절 동안 우리 집 주위를 샅샅이 카메라에 담기도 해서다. 자연스럽게 주민들과 거수경례를 주고받는 게 되레 친숙한 인사가 되고 말았다. 현관문을 열고나서면 구호가 터진다. 공격! 공격!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아파트 단지의 어린이집에 손자가 다니게 되었는데, 나는 항상 군모를 쓴 채 녀석을 데려다 주고 데리고 오기도 했다. 어느 날 어린이집 현관에서 녀석의 신발을 벗기고 있는데, 친구들이 여럿 쪼르르 달려 나오는 게 아닌가? 나도 모르게 거수경례를 하고 우렁차게 부르짖었다.
“공격!”
어린이집 원장이 이 모양을 보고선 아연실색을 하고선 하는 말이다.
“할아버지, 어린이들 보고 ‘공격’이라니요. 그건 아니지요.”
코를 싸매고 돌아 나오는 수밖에. 그래도 그 버릇은 여간해서 없어지지 않았다.
예까지 들은 뒤의 김 대령 왈
“아하 선배님,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건 그렇고. 이번에 제가 1사단 1*연대장으로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8월 초순 시간 좀 내어 주셨으면 합니다.”
“좋지요. 저는 군에서 부르면 무조건 갑니다. 더구나 연대장님의 부대에서 안보 강연이라니 불감청(不敢請)이언정고소원(固所願)이지요. 위치가 어딥니까?”
“힘이 들어서 어쩌지요? 여긴 서부 전선 최전방 문산입니다. 서울역에서 지하철을 타셔야 하니 한 시간 반 가까이 걸리지요. 선배님 댁에서 또 서울 오시는 데 걸리는 시간까지 합하면, 왕복 여섯 시간 정도? 강사료도 안 받으시는데….”
“걱정 붙들어 매세요, 연대장님. 저는 갑니다. 사단 경례 구호가 뭡니까?
‘전진(前進)!’이란다. 백선엽 장군과 강무봉 장군, 전두환 전 대통령도 거기 사단장으로 있었다고 연대장은 덧붙였다. 노재현 전 국방장관도 6‧25 발발 당시 포병 대대장으로 있었고. 가수 윤상은 병 출신으로 GOP에 복무했다나? 옛날에 ‘전진’이란 이름을 가진 병사가 있었다고도 했다. 8월 7일로 날짜를 잡았다.
약속한 날 아침 여덟 시에 양서(良書) 스무 권쯤 넣은 배낭을 짊어지고, 지하철역으로 출발했다. 강연 때 지니고 다니던 다른 잡다한 교재도 잊지 않았다. 서울역까지 거의 두 시간, 거기서 한참 헤매다가 경의중앙선행 플랫폼에서 문산 행으로 환승했다.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리고 설렜다. 그래 혼자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난생 처음으로 우리나라 최전방(最前方) 1사단 1* 연대에서 장병들과 어울리다니 꿈만 같다!
열차는 생각보다 느릿느릿한 속도였다. 한 시간 훨씬 넘게 걸려 문산에 닿았다. 약속 장소에 연대장이 직접 차를 몰고 나왔다. 연대장이 직접 마치 장갑차처럼 보이는 1호차 운전대를 잡다니, 세상에 이럴 수가! 몇 년 만의 해후와 포옹에 눈시울이 뜨거워졌고말고. 연대 본부 가는 시간은 10분 남짓? 그런데 열두 시를 넘긴 지 제법 됐는데도 부연대장 이하 전 간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중에 몇 번 연락이 오간 끝에 그 시각에 도착 가능하다고 짐작하고 수저 드는 걸 미루고 있었던 거다. 항상 군부대에서 그래왔듯이 나는 식반에 담아다 주는 밥과 반찬을 후딱 비웠다.
역시 연대 본부에는 교회가 있었다. 장병이나, 병역을 필한 예비군이면 누구나 알듯이 성당은 사단에 하나뿐이다. 파주에 전진 성당이 있다는 귀띔을 새겨들으며 성전으로 들어섰다. 연대장이 나를 소개했다. 스무 번(두 시간씩이니까) 강연을 하는 동안 중대 단위에서는 부사관이 대대에서는 대위가 대표로 ‘강의 준비 끝’을 부르짖었었는데, 1*연대에서는 거의 파격 예우를 내게 해 주었다. 소령! 그가 맨 앞에 서더니 부대를 지휘했다. 부대 차려엇! 그리고 돌아서서, 경례. 저진(轉進)! 내가 받았다. 쉬어! 다시 소령이 돌아서서 다소 누그러뜨려진 목소리로, 부대 쉬어!
그로부터 예비역 하사인 내가, 괴짜가 아니면 창출할 수 없는 강의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120분! 물론 화장실 가는 시간이 없기는 나 자신이나 연대장 이하 전 장병이 마찬가지.
맨 처음엔 당연히 애국가 제창이다, 4절까지인데 갈수록 음이 처지는 건 대한민국 어느 부대 장병이나 마찬가지. 웃을 수만은 없는 애국가는 여음(餘音)으로 변하여 성전에 가라앉았다가 이윽고 사라진다. 다음은 당연히 ‘1사단가’다. 악보를 보고 이미 익혔으니 생각보다 수월하게 선창(先唱)할 수가 있었고말고. 연대장이 적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음은 물론이다.
1사단가를 다시 한 번 불러 본다. 내 조국 삼천리를 지켜서 싸워가는/우리는 맹호 같은 필승의 용사다/ 송악산 십용사의 투혼을 본받아서/ (중략) 일 사단 일 사단 천하의 일 사단/승리의 기개를 높이 울려라
그러나 다음 순간부터 분위기가 반전되기 십상이다. 갑자기 ‘단장의 미아리 고개’가 튀어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반야월이 주인공이었다던가? 전쟁의 와중에서 참척(*딸이 죽음)을 겪은 그가 그 딸의 시체조차 못 찾았다는 얘기에, 나는 가슴으로 운다. 사람이 미칠 지경이면 억지로라도 눈물이 흐른다. 나 자신이 그 반야월이 된다. 미아리 눈물 고개/ 님이 넘던 이별 고개/ 화약 연기 앞을 가려 눈 못 뜨고 헤맬 때/ 당신은 철사 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중략) 울고 넘던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 고개
아니 내가 ‘임’이 되고, ‘화약’이 되고, ‘철사 줄’이 되고…. 마침내 ‘미아리 고개’가 되어야 나는 한숨 돌린다. 이어 2절도 끝까지 소화시키면 이마의 땀을 훔칠 수 있었다. 눈시울을 젖은 채지만. 그 강의 전까지 스무 번을 그렇게 연출+주연까지 해 왔으니 이골이 났다고나 할까? 이렇게 장황하게 늘어놓은 현장 분위기의 진위(眞僞)를 따질 게재가 아니다. 누가 이의를 건다고 하자. 그 ‘누가’는 자식과 부모의 인연을 모르는 사람이리라.
1‧2절 노래를 끝낸 나는 화가(畫家)가 되었다. 화이트보드에다 강(江)의 하구 그림도 그리고 원숭이도 몇 마리 상상화로 나타낸다. 사람도 머리 몸통 팔다리만 흉내 내서 사이사이에 끼워 넣고. 다시 민요와 가요를 열창한다. 느닷없이 어기야 디야 어기 여차! ‘뱃노래’를 부르고, 흘러간 옛 노래 몇 곡도 보탠다. 바야흐로 신이 절정에 올랐다. 장병들은 어리둥절해 하게 마련.
사람들은 어느 고관대작과 그 부하들이다. 봄을 맞아 그들은 그 장소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만취상태에서 놀다가 귀로에 오른 시간이었다. 어느 부하가 강가에 노는 새끼 원숭이를 한 마리 낚아 채어 배에 싣는다. 어미 원숭이가 구슬피 울며 새끼를 찾아 헤엄치며 따라온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하자마자 어미는 뱃전에 겨우 기어올라 숨을 거둔다. 놀란 사람들이 배를 갈라보니 아, 어미의 창자가 한 치 끊어져 있더라는 것! 나는 강조한다. 한갓 미물인 원숭이도 그럴진대 하물며 만물이 영장인 사람이랴, 항상 기도하건대 손톱 끝 하나라도 부주의로 다치지 않도록! 그쯤에서 나는 돌아서서 ‘단장(斷腸)’이라 쓰고, 고사성어(故事成語)였음을 밝혔다.
다음도 비슷한 맥락. 어느 장병들 앞에서나 그랬던 것처럼 <명심보감> ‘효행편’으로 장식한다.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수지부모(受之父母)라 불감훼상(不敢毁傷)이 효지시야(孝之始也)요/ 입신행도(立身行道)로 양명어후세(揚名於後世)하여 이현부모((以顯父母)함이 (孝之終也)니라. 일단 화이트보드에 전문을 일필휘지하고 난 뒤에 ‘입신행도’ 이하는 지워버린다. 해설이다.
“내 몸과 머리카락 하나 피부며 정신은 부모님에게서 받은 거라, 그 중 하나라도 다치지 않은 게 효도의 첫 걸음이니라.”
26사단 공병중대 및 정비중대 합동 강연에서 들었던 어느 병사의 경우를 부리나케 옮기고 나선 나는 또 미친 사람처럼 떠들고 한다. 녀석(난 병사들을 그렇게 부른다.)이 그랬었다. 행군 중에 발이 불편해 군화를 잠시 벗었다가 독사한테 물렸다는 것.
교직 생활을 하면서 어린이 다섯 명을 저승으로 보낸 이야기 등을 털어 놓는다. ‘부주의= 불효’란 등식을 입에 장착하고 거품을 섞어 연거푸 성전 안에 난사(?)한다. 눈이 휘둥그레지는 장병들 앞에 모습에서 진지함을 읽어야 나는 안도한다.
둘째 시간이 재미가 있으니 되레 ‘백미(白眉)’라 할까?
부모 형제와의 통신(通信)! 입에 거품을 물고 그 덕목의 소중함을 부르짖는데, 첫째 매체는 <논어(論語)다. 부모(父母)I 在어시든 불원유(不遠遊)하며 遊必有方이니라(부모가 살아 계시거든 먼 데 가서 놀지 말고 반드시 어디에 있는지 알려야 하느니라)
“지금이야 군인이니 부모님과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는 수시로 알려드려야 한다는 점을 말씀드려야 한다! 최고는 편지다. 편지를 쓰자, 어디서든지! 하다못해 전화라도 드려야지. 26사단 공병중대의 내 손자 이재형은 걸핏하면 발신번호가 이상한 생활관 번호로 수시로 내게 전화했어. ‘할아버지, 저 재형입니다.’”
도중의 수수께끼 하나. 정답을 말한 병사를 불러내어 내 스마트폰으로 엄마와 통화를 시켜 주는 것은 최고의 보너스였으니라. 녀석이 길길이 뛰는 모습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그때 녀석에게 건네주는 우표 서른 장의 의미는 크다. 기가 막히게도 그 녀석의 현주소도 광주였다.
그런데 여기서 절대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웃음 폭탄! ‘유필유방이니라’에서 병사들은 여자 ‘유방(乳房)’이 연상되어 도무지 폭소를 멈출 수가 없는 거다. 유방(乳房)이든 유방(有方)이든, 오로지 ‘유방(乳房)’으로만 받아들인다는 사실. 실로 통쾌 무비한 장면 혹은 상황이 그렇게 펼쳐지는 게 나는 너무나 좋았다. 방송실에서 거들고 있는 여군 간부도 거기 합세(?)하는 눈치였다.
그에 못지않은 건 <명심보감>에 나오는 이 첫 구절이다.
위선자(爲善者)는 천보지이복(天報之以福)하고/ 위불선자(爲不善者)는 천보지이화(天報之以禍)니라(착한 사람에게는 하늘이 복을 내리고 착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하늘이 화를 내리니라)
그런데 병사들은 여기저기서 킥킥댄다. 이상한 세 음절(?) 말 ‘천보지’ 하나가 혀를 날름거리며 웃기기 때문이다. 필요 없는 갈지(之)가 들어가, 그 옛날 서당에서부터 오늘날 군부대에까지 접목의 역사를 써온 것이다. ‘천보이복하고’ 하면 된다고 나고 나서야 진정이 된다.
부디 착한 일을 많이 하라는 권유를 끝으로 그날 강의를 매듭지었다. 참 이 말은 잊지 않았다. 위 ‘위선자(爲善者)’는 ‘위선자(僞善者)’와 다름을 명심할 것! 발음의 악센트도 ‘위(爲)’에 두어야 한다.
내가 봐도 그날 강의가 제일 내실 있었다. 하지만 대장정의 막도 그걸로 내릴 수밖에 없었다. 뒤로 난 안보 강사 위촉을 받기 힘들었던 것이다. 까닭은 내게 있지 않다.
대신 나는 계속하여 그들에게 육필 편지를 쓴다. 병사에 국한된 게 아니고 장교들에게까지 영역을 넓혔다. 전화번호를 알면 나의 육필 편지는 우표를 붙이지 않아도 그들에게 간다. 카톡으로 찍어 보내는 것이다. 두 경우가 각각 반쯤 되리라. 영원히 기억될 일화 하나. 타처에서 온 내가 두 해 전 어느 전국 단위 문학 단체의 이사에 출마, 당당히(?) 당선된 것도 육필 편지 7백 통 덕분이다. 재미(在美) 작가에게도 보냈으니, 뉘라서 나의 극성을 감당할 수 있었으랴.
그러다가 일생일대의 대 발견을 했으니 편지는 횡서(橫書)가 아니라 종서(縱書)로 써야 멋이 더해진다는 사실! 아무래도 내리긋는 획(모음)이 자를 대고 그은 듯이 한 줄에 얹혀야 금상첨화(錦上添花)인 것이다. 필기구는 때로 붓일 수도 있지만, 대개가 네임카드 펜이다. 어느 쪽이든 월점 찍는 데에 묘미를 느낀다. 물음표는 똑바로 세우는데, 느낌표는 약간 기울게 찍는다. 마침표는 동그라미로 하고, 쉼표는 45도로 비스듬히 눌러 찍는다. 따옴표는 낫표로 갈음한다. 말줄임표? 아래로 (‧)을 세 개만 약간 크게 종(縱)으로 이어붙이고 그 끝 오른쪽에 작은 동그라미!
옛 부대를 떠나 전국의 곳곳에 흩어져 군복무를 하는 부사관과 장교들이 나의 소중한 고객이다. 광주, 전주, 대구, 부산, 대전, 춘천….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병사(兵士) 또한 마찬가지. 하지만 이 기쁨이 일선 부대 장병들과의 직접 만남에 어찌 미치랴. 나는 군부대가 그립다.
그렇다, 난 서두에 들먹였듯이 잠시 군이라면 자다가도 깨어날 영원한 노병이고말고. 68년 전쯤 선고(先考)가 사랑방에 열었던 서당. 근동(近洞)에서 모여든 청장년들도 어김없이 ‘천보지(天報之)’와 ‘유필유방(有必有方)’에서도 웃음을 참지 못했었지. 그 들릴락 말락 하던 소리가 오늘도 귓전에 맴도는 느낌이다.
*<순수문학>통권 320호에 실었던 졸작입니다.
첫댓글 이원우사령관님!
표를 붙이지 않아도되는 카톡으로 찍어 보내는 육필 편지!
정말 멋집니다.
10년동안 수원, 천안, 용인으로 이사를 다니셨다구요?
저는 천안이 고향이며
수원으로 이사와서 현재 살고 있고
나중에 이사가려고 작년에 인에 아파트를 샀습니다. ㅎㅎㅎ~
이사하시면 자주 뵙겠습니다. 그런 기다림이 있어서 조금 더 살아야겠습니다. 회장님 같은 분이 계셔서 뭔가에 새롭게 부딪혀(쳐) 보고 싶어집니다. '개척'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