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이 일어나던 바로 그날
갑신정변이 일어난 1884년 12월 4일, 또 다른 사건이 발생했다. 그날 민영익뿐 아니라 ‘노도사’로 불리던 노인 한 명이 등장한다. 그의 본래 이름은 노춘경이다. 따뜻한 밥그릇에 봄날의 화사한 경치가 담겼다는 뜻이다. 한국에서 처음 기독교인이 된 사람으로 이름의 의미가 기막히게 들어맞는다. 한국에 따사로운 기독교의 봄날이 오는데 그것은 마치 이제 우리들에게 차려놓은 밥상과 같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알렌은 한국에 입국할 때 데리고 들어온 중국인 집사를 본국에 돌려보냈다. 대신 나이가 지긋한 점잖은 선비 노도사를 어학선생 겸 집사로 채용했다. 노도사는 일과 중 틈틈이 알렌 집 서가에 꽂혀 있는 두꺼운 한자 신약성서를 읽었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그날 오후 알렌은 노도사가 집으로 돌아갈 때 그 성경책을 집에 가져가라고 했다. 노도사는 그 성경책을 마치 금덩어리인 것처럼 안고 집으로 돌아갔다. 열심히 성경책을 읽고 있던 그때 뫼렌돌프 집에서 운명의 연회가 열리고 있었다. 노도사가 성경을 읽다가 기독교인이 되기로 마음속으로 서약한 시간은 알렌이 민영익의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안도했을 시간이었다. 한국근대사에 중요한 두 사건이 같은 시간에 일어난 것이다. 한국에서 기독교는 민족의 일대 사건과 함께 꼭 같은 시간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첫발을 내딛은 것이다.
한국 최초 기독교인은 장로교? 감리교?
한국 최초의 기독교인이 된 노도사에 대해서는 갖은 소문이 만발하다. 그가 읽은 성경책을 알렌이 준 것이 아니라 노도사가 훔쳐간 것이라던가, 누가복음과 마태복음 페이지만 훔쳐갔다든가, 복음서 한 권만 가져갔다든가 하는 내용 등이다. 아마도 최초의 사건을 드라마틱하게 만들고 싶어 꾸며낸 이야기인 듯싶다.
다른 하나는 노도사가 장로교인인지 아니면 감리교인인지에 대한 것이다. 노도사는 1886년 7월 18일 장로교 선교사 헤론의 사저에서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의 사회로 진행된 세례식에서 세례를 받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하지만 당시 노도사는 감리교 스크랜튼 선교사의 어학선생으로 일하고 있었다. 때문에 알렌은 일기에 노도사가 감리교인으로 입교해 세례를 받았다고 기록했다. 당시 한국에서는 ‘목이 달아날 수도 있는’ 위험한 모험이었지만 노도사는 당당하게 세례를 받았다.
당시 한국의 조정은 기독교 선교를 허락하지 않았다. 헤론의 개인 집에서 세례식을 거행한 이유가 그것이다. 행여 발각될까봐 세례식을 진행하면서 밖에 사람을 세워 망을 보게 했다. 때로는 감시를 피해 일명 ‘요단강 세례’를 베풀기도 했다.
1889년 4월 27일 당시 평안도 지방에는 세례를 받고 싶다는 사람이 33명이나 됐다. 언더우드가 가서 세례를 베푸는데 국법에 어긋나는지라 압록강을 건너가 중국 단둥에서 세례식을 거행했고, 이를 요단강 세례라 불렀다. 선교가 우리 국법을 어긴 일은 없다.
노도사가 감리교인인지 장로교인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최초’라는 타이틀 때문일 것이다. 1885년 4월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와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가 함께 인천에 도착했을 때 누가 먼저 내렸느냐에 대해서도 여러 말이 있다. 누가 먼저 상륙하느냐에 따라 처음 한국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장로교인지 감리교인지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선교사들이 두 선교사의 이름에서 착안해 만들어낸 우스개가 있다. 아펜젤러가 계속 ‘앞에 서려’고 해서 먼저 상륙했다는 이야기와 언더우드가 ‘언더워터’, 즉 물에 뛰어들어 물속을 헤엄쳐 먼저 상륙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초기 선교사들에게 노도사가 어느 교단 신자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노도사는 알렌의 집에서 일하다가 책장의 성경책을 보고 그 성경을 집에 가지고 가서 기독교인이 됐다. 그렇다면 알렌이 장로교 선교사이니만큼 노도사가 장로교인이라고 주장할 만하지만 알렌은 오히려 노도사가 감리교인으로 세례 받았다고 기록했다. 언더우드 역시 자신이 세례를 베풀었고 헤론도 자신의 집에서 세례를 받았으니 장로교인이라 주장할 법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한국 최초의 신자는 당신들 교회에 먼저 갔소’라고 말하던 초대 선교사들의 모습에서 배워야 할 것이 많다.
선교의 시작은 언제부터인가
알렌이 의사였기 때문에 그를 선교사로 보기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미국 공사 푸트 역시 미국 헌법의 정교분리 정책에 충실하고자 선교 문제에는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있었다. 더구나 친일적인 개화파가 기독교 수용을 주장한 사실은 당시 정세에는 그렇게 반길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청국 군인들이 알렌을 만나면 ‘예수박사’라고 부르며 반겼다는 말은 알렌이 기독교의 빛을 발하고 있었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랴. 굳이 말하지 않아도 기독교의 씨앗은 뿌려지고 있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출처] [한국선교 130년 최초 선교사 알렌 이야기] (7) 알렌과 첫 기독교인|작성자 뱅갈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