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이장하 목사가
토마스 감독과 함께 당했던
강경에서의 구타 사건을 다시 한 번 살피면 다음과 같다.
1919년 강경에서 토마스 감독과 함께 일본인들에게 구타당하다.
상동년 말에 강경에 복음전도관이 설립되고
정달성 전도사가 파송 부임하여 성결구령사역을 전개하였다.
이에 다음해인 1919년 토마스 감독이
그곳 시찰을 위하여 이장하 목사를 대동하고 내려갔다.
강경은 부여 규암복음전도관 설립과 연이어
부여근동 서너지역에 복음전도관을 설립하고
순회하는 본부 일행들이
여러 차례 다녀간 지역이었는데
1918년이 되어서야 복음전도관을 설립하였다.
1919년 새해가 되자
토마스 감독은 이 강경을 시찰하고자
여행허가증을 발급 받고 3월 20일 강경에 도착하였다.
이장하를 통역원으로 데리고 가서
강경의 정달성 전도사와 함께 복음전도관을 살필 때
바로 뒤 나지막한 동산인 옥녀봉에서 만세 고창 소리가 났고
댓 명의 젊은이들이 감독 일행을 지나 내려갔다.
그리곤 군인들과 순경들이 올라오면서
감독 일행에게 무자비한 구타를 하였다.
여행증명서를 보이고자 하였는데
그 움직임을 무기를 꺼내는 것으로 오인하였는지
극심하게 구타하고 발로 찼다.
이때 이를 만류하려는 이장하 목사와 정달성 전도사에게도
무차별 난타를 하였는데
두 사람 중 누군가는 얼굴에 심한 상처를 입었다.
이후 토마스 감독의 진술서에 의하면
“두 명의 내 사역자들도 잔혹하게 맞았다”라고 하였다.
29곳에 심한 상흔을 입은 토마스 감독은
영국 영사에 의해 강력한 항의와 배상을 요구하자
총독부로부터 5만불의 금전적인 배상을 조건으로
(이 배상금은 한국으로 보내와 강경복음전도관을 신건축함)
감독은 추방조치 당하게 되어
더 이상 감독으로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아래 사진은
토마스 감독이 일본으로부터 받은 구타 피해 보상금을
한국에 보내자
본부에서 강경성결교회를 건축하도록 결정하고 보내옴으로 지은 예배당으로
현재 기성에서 매입하여 기념교회로 관리하고 있다.
건축당시와 현 예배당 모습의 사진이다.
1925년 건축 현재모습
이 강경 구타 사건 때
감독과 함께 이장하도 무자비한 구타를 당했으나
아무런 사과와 배상도 받지 못했다.
당시 1919년 3.1기미만세운동의 여파로
초긴장 상태에 있던 일본인들에게 만세소리는
또 다른 동요를 일으키는 빌미가 될까하여
즉시 차단하고 확대되는 것을 막고자 취한 조치로 보여지지만
간단한 신분 조사나 확인도 없이
무조건 매질한 것은
일본인들이 얼마나 3.1기미만세운동에 대한 공포가 극심했나를 알 수 있다.
이렇게 잔혹하게 난타질 당하여
대전을 경유하여 상경한 이장하 목사의 귀가 길은
얼마나 무거웠을까?
왜냐하면 집에는 딸과 아내가 그의 귀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피투성이 멍투성이의 몸으로 귀가했을 시 놀랄 식구를 생각하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큰 충격이었다.
여기까지가 이장하 목사의 성결교회에서 사역과 활동상이다.
그리고 1920년 사직(면직 출교)을 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