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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헌안왕과 충신들
경주의 서쪽을 지키는 산, 서악으로 불렸던 선도산 자락에는 많은 문화유적과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본래의 이름과 다르게 알려지고 있는 유적과 유물이 있기도 하지만 지금도 새롭게 감추어졌던 모습을 드러내는 진행형 역사현장이다.
대표적으로 손꼽히는 유적지로 무열왕릉이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며 입구에 엎드려 있다.
그 뒤로 산등성이 같은 봉분을 자랑하는 주인 모르는 4기의 고분이 있고, 성혈과 용지골에 이어 모전석탑, 왕릉으로 지정된 또 다른 4기의 고분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의 많은 고분군.
산꼭대기로 올라가면 성모설화로 유명한 성모사와 보물로 지정 관리되고 있는 마애삼존불이 경주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있다.
선도산 발뿌리 무열왕릉 앞으로 충신 김인문과 김양의 묘가 노랗게 고르게 잘 익은 잔디이불을 쓰고 앉아 후인들의 추측과 상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무열왕릉의 동쪽으로 형성된 마을 가운데 김유신 장군의 위패와 설총, 최치원의 위패를 모시는 서악서원 등이 줄을 지어 역사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다.
신라와 통일신라, 고려를 지나 조선시대로 이어지면서 왕릉의 이름이 급하게 지어져 지금까지 사적지로 지정돼 전해지고 있지만 왕의 이름이 잘못 지정되었다는 전문가들의 지적들이 꾸준히 제시되고 있다.
신라하대 왕권다툼이 치열하게 진행되면서 백성들의 고달픔이 산더미보다 큰 고통으로 일어나고, 결국 천년의 영화를 마무리해야 하는 시대로 접어들게 했던 주인공 귀족들이 잠든 선도산 자락에서 또 역사기행을 이어간다.
통일신라 해상을 장악했던 장보고에 이어 헌안왕의 치적과 신라의 통일에 직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던 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 무열왕의 9세손 김양의 발자취까지 고분을 찾아 더듬어보기로 한다.
◆조카에게 왕위 물려받은 헌안왕
경주 서쪽 선도산에서 무열왕릉을 지나 마을안길을 지나 산등성이로 오르는 첫걸음에 고분군과 함께 헌안왕릉이 나타난다.
조선시대 영조때 후손들이 헌안왕릉으로 지정해 지금까지 관리되고 있지만 정확하게 인정 받지 못하고 있다.
경주의 서쪽을 지키는 망루역할을 했던 서형산성이 축조된 선도산을 오르는 입구에 고분군이 형성돼 있다.
조선시대 족보가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 후손들에 의해 헌안왕릉도 문정왕릉, 진흥왕릉, 진지왕릉과 함께 조선시대 영조때 이름이 지어져 사적지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물론 지금은 헌안왕릉도 연접해 있는 4기의 왕릉과 같이 지정되어 있을 뿐 헌안왕의 무덤으로 정확하게 인정받고 있지는 못한 실정이다.
상징적인 왕릉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신라 47대 헌안왕의 이름은 의정이다.
흥덕왕이 죽고 왕권을 두고 다투다 죽은 균정의 아들로 신무왕 우징의 배다른 동생이다.
헌안왕 의정은 신무왕 우징이 장보고의 힘을 빌어 왕위에 오를 때 힘을 보탰다.
신무왕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문성왕 경응이 아들인 태자가 죽어버리자 삼촌인 헌안왕 의정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유언을 남겨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으로 전한다.
문성왕 때에는 장보고의 난을 비롯해 많은 반역사건이 일어났다.
헌안왕은 857년에 즉위해 4년간 흉년으로 고생하는 백성들을 구제하고 제방을 건설해 농사를 장려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헌안왕은 아들이 없고 딸들만 있었다.
헌안왕은 평소에 신하들에게 “우리나라에 여왕이 있었지만 이는 본받지 못할 일”이라며 “사위 응렴이 어리지만 노련하고 성숙한 덕이 있으니 왕으로 세워 섬기도록 하시오”라고 말했다.
왕은 희강왕의 손자 아찬 계명의 아들 응렴을 사위로 삼고 그에게 왕위를 잇게 했던 것이다.
응렴이 헌안왕을 이어 48대 경문왕이 되었지만 많은 반란이 일어나 어려움을 겪으면서 왕권은 쇠약의 길을 걸었다.
무열왕릉 뒤로 이어진 4기의 고분과 쉰등으로 불리는 선도산의 즐비한 고분들에 대한 연구가 진척되어 무덤의 참주인을 찾고, 역사 바로 세우기를 희망하는 후학들의 기대가 언제 이루어질 지 까마득하다.
◆성혈군(性穴群)과 용지골
무열왕릉 뒤로 이어지는 마을안길이 끝나는 지점에 수십개의 구멍이 패인 청색 바위가 엎드려 있다.
성혈로 불리는 이 바위는 죄를 지어 지상으로 쫓겨온 신하가 죄업을 다하고 용이 돼 승천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경주의 서쪽 무열왕릉을 왼편에 두고 선도산으로 오르면 마을을 벗어나기 바쁘게 산 입구에 청색바위가 길게 누워 있다.
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길쭉한 모습으로 4m, 동서로 2m 정도의 바위에 크고 작은 구멍이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이 패여 있다.
헌안왕릉으로 지정된 고분군에 이르기 직전에 위치해 있는 바위다.
바위에 음각된 홈선들이 성혈을 잇고 있지만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어떠한 그림을 묘사한 암각화로 해석하는 역사학자들도 있다.
문화재해설사 일부는 호랑이가 타고 있는 용바위로, 개구리, 토끼, 남녀 성기 등의 암각화가 새겨져 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곳 쉰등마을주민들과 인근지역의 많은 주민들도 용의 코와 호랑이 등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고 믿고 소개한다.
성혈은 직경이 5에서 20에 이르는 다양한 크기로 북두칠성 모양을 띠는 것도 있다.
성혈군은 청동기시대 지석묘에서부터 등장하고 있다.
늦은 것은 최근에도 나타나고 있다.
주술적으로 소원을 빌면서 바위를 갈아 성혈이 형성되었다는 설명이다.
이 성혈군은 또 용바위로 불리기도 한다.
청색을 띠고 있는 청룡이고 뒤편으로 이어진 계곡이 용이 승천하면서 생긴 용지골이라는 전설이 내려져 오고 있다.
청룡과 황룡이 옥황상제의 벌을 받으면서 이 마을에 살다가 죄업을 다하고 용으로 승천해 용지골이라 불린다.
선도산 쉰등 서쪽으로 1 길이로 형성된 계곡. 화산활동으로 용암이 급하게 냉각되면서 형성된 주상절리로 절경을 이루고 있다.
1㎞ 깊이로 이어진 용지곡은 용암이 흘러내리면서 급격하게 냉각되는 과정에서 생긴 주상절리로 형성돼 있다.
최근 주상절리의 4각, 5각, 6각 기둥으로 형성된 계곡의 절경이 일반에 알려지면서 용지골의 전설과 함께 새로운 경주의 관광자원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마을 주민들은 주상절리로 이루어진 용지골의 절경을 찾아오는 관광객들로 자연경관이 훼손되지 않도록 안내도하고 있지만 행정기관이 홍보와 관광자원화 작업에 앞서 적절한 보호대책을 세워야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
김인문의 묘에 비석을 업고 있었던 김인문묘비의 거북이상의 귀부. 무열왕릉 귀부와 비슷한 모습으로 조각됐지만 솜씨는 다소 떨어진다.
5개의 발톱으로 역동적으로 헤엄쳐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보물 70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김인문의 묘 바로 앞에 있다.
김인문은 629년에 태어나 694년에 사망한 것으로 전하는 무열왕의 둘째 아들이자 문무왕 법민의 친동생이다.
김인문은 일생동안 7번이나 당나라를 드나들면서 22년이라는 기간을 당나라에 머물렀던 것으로 전한다.
태종무열왕 7년 660년에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소정방과 함께 출전한데 이어 664년 문무왕 때에는 당의 지시로 의자왕의 아들과 화친의 맹약을 맺기도 했다.
668년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도 출전했다가 다시 당으로 가서 대부분의 기간을 당나라에서 보내다가 신라가 당군과 충돌하기 시작하면서 당나라가 그를 감옥에 가두기도 했다.
이때 자장율사가 감옥에 갇힌 김인문을 찾아와 김인문이 당나라의 신라를 공격하려는 계획을 알려주면서 대비하게 했다는 이야기도 삼국유사 등에 전해지고 있다.
당나라가 김인문을 일방적으로 신라의 왕으로 책봉해 파견했지만 신라에서 사죄하면서 다시 당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삼국사기는 김인문이 66세 되던 해에 당나라의 서울 장안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는 김인문이 신라와 중국의 외교적 마찰로 중국의 감옥에 있을 때 나라사람들이 그를 위해 절을 지어 인용사라 하고 관음도량을 개설했는데 김인문이 돌아오다 바다 위에서 죽어 도량을 고쳐 미타도량이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인문의 묘는 태종무열왕릉의 동쪽에 있는데 일제시대에 개설된 도로가 가로지르고 있지만 원래는 같은 묘역으로 인식된다.
1932년 서악서원 경내에서 김인문의 묘비 조각이 발견되면서 서악동의 귀부가 김인문 묘비라는 것과 그의 행적이 밝혀지기도 했다.
김인문의 묘 옆에는 김인문묘비의 귀부가 비신 없이 고개를 빳빳이 들고 힘찬 모습으로 나아가는 무열왕릉 귀부와 비슷한 형식으로 엎드려 있다.
김인문 묘비를 업고 있었을 귀부는 경주 서악동 귀부로 불리며 보물 제70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충신 김양의 묘
김인문은 무열왕의 둘째 아들이자 문무왕의 동생으로 신라 삼국통일에 직간접적으로 공이 크다.
김양은 신라 무열왕의 9세손이다.
제45대 신무왕 때 공신이다.
822년 그의 할아버지와 형제항렬인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켜 모두 살해되었지만 할아버지 김종기의 집안은 피해를 입지 않고 정계에서 지속적으로 활약했다.
김양의 대에 이르러 왕권다툼의 일선에서 일등공신이 되기에 이르렀다.
836년 흥덕왕이 후사가 없이 죽은 이후 왕위 계승을 두고 김균정과 김제륭 사이에 왕위쟁탈전이 벌어졌을 때 김양은 균정의 아들인 우징과 함께 균정을 왕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김제륭과 김명의 연합군에 패배해 장보고가 진을 치고 있는 청해진으로 피신해 그의 도움을 받았다.
김양은 839년 장보고와 손을 잡고 김우징과 함께 경주로 진격해 민애왕을 살해하고 김우징을 제45대 신무왕으로 추대했다.
김양이 857년 50세의 나이로 죽자 신무왕의 아들인 제46대 문성왕은 서발한으로 추증하고 부의와 염장을 김유신의 장례예법에 따라 행하도록 했다.
그해 12월 태종무열왕릉의 열에 배장토록 하고 원형토분으로 고분을 쌓아 무열왕릉과 김인문의 묘 사이에 있다.
신라의 삼국통일 주역 태종무열왕과 김인문, 김유신 장군의 묘역이 연접해 자리매김하고 있고, 나라를 혼란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으며 왕권다툼에 혈안이 되었던 왕과 귀족들의 고분도 서악에 잠들어 있다.
서방정토의 꿈을 꾸던 불국의 나라 신라시대 역사를 더듬어보는 장소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첫댓글 왕권다툼이 치령했던 흥덕왕 이후의 정계.............
오늘날 족보 없이 정권다툼에 이전투구하는 사람들.......
결국 끝이 어떠한지 역사를 다시 읽어보시기를 권하고 싶습니다만.
글이 제대로 이해되어 녹아들지조차 의문스런 혼란한 정국입니다. 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