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35> 석공 윤만걸 명장
경주 남산의 동쪽 가운데에 통일전이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서 있다. 통일전에서 해뜨는 방향으로 신작로가 시원하게 뚫려 있다. 그 도로 가운데쯤에서 북쪽으로 살짝 눈을 돌리면 무엇을 염원하는 듯한 기도하는 손이 조각된 석재 작품을 볼 수 있다. 기도손 표석을 따라 골목길을 들어서면 우리나라 대표적인 석공 윤만걸 명장의 작업장이 있다. 작업장으로 진입하는 길은 우람한 덩치의 포효하는 사자상, 봉사단체의 강령이 새겨진 돌비석 등등의 돌로 다듬어진 흔하지 않은 조각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윤만걸 명장의 연습작이자 예술품이기도 하다. 기능인의 꿈이라 할 수 있는 명장의 반열에 일찌감치 이름을 올린 윤만걸 석공은 경주 남산의 명물로 유명하다. 경주 남산의 명물 윤만걸 명장의 땀내나는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석수쟁이 윤만걸 명장
경주 남산의 명물로 불리는 윤만걸(60) 명장은 혈기 왕성한, 어쩌면 어리다고 할 십대 나이에 망치를 잡았다. 친구와 어울리는 것이 좋아 친구따라 망치를 잡아본 것이 평생 업이 되었다고 한다. 그가 처음 망치를 손에 든 것은 경기도 남양주 화도면의 석재공장에서였다. 명장의 처음 망치질은 친구들보다 오히려 서툴렀다. 그냥 남자들이 모여 일하고 막걸리 마시고 왁자한 분위기가 좋아 돌을 깨고 다듬는 작업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런 시간이 훌쩍 40년이 넘는 세월을 망치를 들고 살아가는 삶으로 인도해버렸다.
때리는 만큼 반작용이 심한 돌을 올라타고 미친듯이 망치질을 하다보면 근심도 걱정도 없어진다. 오직 다듬는 돌 속으로 파고드는 정의 머리에 모든 것이 집중된다. 배고픔도 사랑도 모든 것이 망치끝에서 해결되어야 할 숙제가 되고 종국에는 석수쟁이의 삶이 되었다. 돌을 때리는 망치는 이제 그의 숙명이자 그의 명예가 되었다. 그가 돌에 깊은 애정을 가지게 된 것도 그러한 몰입과 숙명 같은 운명 때문일지도 모른다.
부딪는 모든 것에 우월함을 자랑할 것 같은 청돌도 석수쟁이 윤만걸 명장의 망치를 만나면 물먹은 솜이 된다. 단단한 청돌도 그의 정을 만나 홈이 패이고, 글이 되고, 꽃이 되기도 하면서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다듬어지고 마는 것이다.
윤 명장의 삶도 돌을 깨고 다듬는 척박한 작업처럼 힘겹게 걸어온 시간으로 단단하게 무장되었다. 먹고 살기 위해 휘두르던 망치질은 이제는 그 궤를 달리한다. 신라시대로 거슬러 오르는 조상들의 얼이 깃든 작품을 그대로 재현하는 일에 명장의 눈과 망치가 집중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다보탑 그 화려한 모습을 재현해보고 망치를 놓아야겠다는 희망으로 돌을 깨고 다듬는 제련의 시간을 보내왔어요”라는 것이 윤만걸 명장의 석공으로서의 꿈 이야기다.
◆남산에 터를 잡고 명장이 되다
윤만걸 명장이 경주 남산에 자리를 잡은 것은 1980년도다. 신라인들의, 석공의 혼을 가장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는 곳이 경주 남산이기 때문에 삶의 터전을 남산 뿌리에 박아버린 것이다. 남산에는 곳곳에 불상과 석탑의 흔적이 남아 있다. 발만 옮기면 석공들의 손길을 더듬어 볼 수 있어 공부하기에 딱 좋은 곳이다.
윤 명장은 돈이 모이면 석재를 구입하고, 시간이 나면 돌을 깨고, 다듬고 연마하는 연습을 했다. 그의 집요한 땀은 배신하지 않았다. 스승을 만나 배우는 일에도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1987년 경주 남산에서 독립하면서 ‘종합석재 창조사’를 설립했다. 그리고는 답사공부와 연습에 몰두했다. 그가 스스로 돌을 작품으로 만들어내기까지 결코 순탄한 시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손에 피가 나고 굳은살이 박히고, 또다시 굳은살 위로 굳은살이 새살로 돋아나면서 망치가 숟가락보다 익숙하게 잡히면서 각종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87년 문화재수리기능자 석공으로 인준받으면서 1989년 석공예기능사 2급, 1990년 석조각기능사보 등의 관련 직종에서 자격증을 거두어들이기 시작했다. 이어 1991년부터 문화재수리기능자 자격증을 따기 시작해 석조각공, 조경공, 드잡이공, 한식미장공, 보존과학공 등의 석공예 대부분에서 기능자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가 출전하면 무조건 우수작을 만들어 심사위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경북기능경기대회는 물론 전국기능대회에 출전해 우수상을 휩쓸어 담았다.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같이 일하고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기술을 전수하는 작업에도 심혈을 기울이면서 1995년 대한민국 석공예부문 명장에 선정됐다. 석공예부문에서 기술력과 후진양성 등의 노력이 인정받은 것이다. 지금은 경북기능경기대회와 전국기능경기대회 심사장으로 위촉돼 석공예부문의 선두주자로서의 자리를 공고히 하고 있다. 2006년에는 한국폴리텍Ⅳ대학의 명예교수로 임명되기도 하면서 후진양성에 더욱 매진하고 있다.
그가 명장으로 거듭나면서 이순에 들기까지 망치질을 멈추지 않는 것은 과거에 대한 야릇한 향수 같은 것 때문일지도 모른다. 윤 명장은 유독 과거 선조들의 작품 복원에 많이 집착한다. 때문에 그가 복원한 작품들이 경주를 비롯해 전국 곳곳에 많이 있다. 우선 경주 남산의 대표적인 탑으로 손꼽히는 염불사지 쌍탑과 천룡사지3층석탑, 용장사지3층석탑 등이다. 이들은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된 이름난 문화재적 가치을 인정받고 있다. 모두가 윤 명장의 손끝에서 다시 태어난 석공예 걸작들인 셈이다.
이 외에도 윤 명장이 복원한 과거의 작품들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경주 남산에 제대로된 모습으로 답사객들을 만나고 있는 문화재는 모두 그의 손을 거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지방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기암곡 3층석탑과 국사곡 3층석탑, 지바위곡 3층석탑, 늠비봉 5층석탑 등등 남산의 모든 석탑들은 그의 손을 거쳐 복원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명장의 이름이 더욱 빛을 발하는 대목이다.
◆석공의 피, 명장의 아들들
경주 남산의 명물 윤만걸 명장은 돌을 방석으로, 의자를 삼아 왼손에는 정을 들고 오른손에는 망치를 잡고 일을 한다. 돌을 두들기고 또 두들기는 작업을 밥보다 많이 질기게 진행해왔다. 그의 돌에 대한 집착은 남다르다. 윤 명장은 현대적인 공구로 쉽게 뚝닥 자르고 쉽게 갈아서 만드는 작품이 아닌 순수 전통적인 방법으로 일을 진행한다. 특히 옛날의 문화재를 복원하는 작업은 더욱 그러하다. “석탑과 같은 문화재는 옛날의 전통적인 방법으로 재현해야 어색하지 않게 제대로된 모습으로 부활한다”는 것이 윤만걸 명장이 전통적인 작업방법을 고집하는 이유다. 이러한 그의 고집이 알려지면서 중앙정부에서도 문화재 복원에 대한 품셈작업을 그에게 의뢰해 작성했다. 그의 작업이 우리나라 문화재 복원의 기준이 된 것이다.
윤 명장의 석수쟁이 피는 그대로 아들들에게 전수되고 있다. 동천(36)과 동훈(33) 두 아들이 대학교와 대학원에서 각각 문화재와 건축학을 전공하면서 뒤를 이어 망치를 들고 있다. “힘든 일을 하려는 사람이 없고 아버지가 너무 어렵게 일하시는 모습을 보고 돕기 위해 망치를 들었다가 제 일이 되었습니다”라며 동안의 청년석공 둘이 입을 모았다. 효자아들들로 주위에 칭찬이 자자한 이야기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두 아들은 아직 젊지만 남산의 용장사지3층석탑과 천룡사3층석탑 등의 문화재 복원사업에 직접 참여해 석공으로서의 자질을 제법 갖추고 있다. 명장의 피를 이어받아 우리나라 석공예의 뿌리를 튼실하게 내릴 재원으로 기대된다.
◆재단법인 진흥문화연구원
윤만걸 명장은 석공으로 일을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문화재에 대한 관심을 키워왔다. 하는 일이 대부분 문화재 복원사업으로 연결되다보니 당연한 것이란다. 이러한 관심으로 그는 지난 3월에 경주에서 재단법인)진흥문화재연구원을 설립하는데 앞장섰다. 동국대 겸임교수 김호상 문학박사를 원장으로 13명의 연구원과 임직원들이 문화재 지표조사와 발굴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연구원은 또 신경주역에서 문화재전시관을 운영할 계획이다. 오는 6월이면 경주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신경주역전시관에서 선조들의 숨결이 묻어나는 문화재를 만나볼 수 있게된다. 첫 번째 사업으로 경주 구황동 발굴조사에서 통일신라시대 주거문화와 함께 토기와 기와 등의 200여점의 유물을 발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윤만걸 명장의 기대
윤만걸 명장은 문화재를 복원하는 사업을 담당하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많이 들었단다. 힘겨운 작업이라는 것 때문에 섣불리 석공의 길로 접어드는 젊은이들이 없기 때문이다. 그의 꿈목록에 “직업훈련원을 세워 제대로된 석공을 양성하고 싶다”는 것이 추가됐다. 그리고 “우리시대에서 석굴암을 그대로 재현해 현대과학의 기술이 선조들의 솜씨에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다”는 욕심을 표현했다.
또 “문화재 복원을 위한 사업을 추진하면서 지역적 특색을 살릴 수 있도록 주변 지역의 자재채취와 그 지역의 장인이 직접 복원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제도적인 개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기능인들에 대한 지원도 현실에 맞게 늘려 기능인을 양성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윤만걸 명장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지 않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하얗게 탈색된 성긴 머리카락으로 검게 그을린 얼굴을 태양에 노출시킨 채 누굴 원망이라도 하는 듯 명장의 망치질에 힘이 들어간다. 명장과 두 아들, 3부자가 두들기는 망치소리가 남산 계곡을 타고 메아리로 번진다.
(2014.5.22)
첫댓글 현대 첨단과학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전통적인 기능이 더 아름답고 견고하고 에술적으로
뛰어난 작품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