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글과 말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드는 종합 문예지 '계간 연인' 2012년 여름호에'함께하는 시인들' 특집이 실렸다. 특종자료 유치환의 미발굴 시와 산문을 비롯하여 기획에세이, 아동문학 특집과 음악에세이, 그림에세이, 사진으로 떠나는 세계문학기행, 장편연재소설과 "통"- 한국동화구연지도사협회와 '함께하는 시인들'이 소개되고 16명 동인들의 작품이 게재되었다. 함시동인 박정원 회장을 비롯한 권은중, 김금자,김남권,김 명, 김 숙, 김필영, 라경주, 박정원, 서봉교, 설용운 심우기, 유현서, 장해숙, 장혜경, 조재형, 허연숙 시인의 작품이 선 보이고 있으며, 1,100명의 회원과 더불어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는 함시 동인들의 다양한 활동과 작품세계를 엿 볼 수 있는 소중한 지면을 2012년 여름을 시작하는 '기쁨'으로 맞이한다. 더욱 치열한 작품 몰입과 독자와 소통하고 동인과 소통하는 소중한고 아름다운 인연이 되길 바란다.
물음표를 줍다 권 은 중 등산로 길목에 구르는 검붉은 물음표 하나 집으려다 멈칫, 들여다 본다 너무 말라서 움직이지 못하는 지렁이 한 마리 작은 개미들이 까맣게 뒤덮여 우글댄다 그가 죽어 가면서까지 온몸으로 던지는 질문은 무엇일까 끝없이 파헤쳐도 어둠뿐인 흙자갈 속에서 눈도 없이 무엇을 찾으려 했을까 여린 살로 흙을 파헤쳐야 했던 몸부림만이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을까 흙을 파고 흙을 먹어야만 하는 숙명을 한 번쯤 거부하고 싶었을까 사람들이 버려 놓은 박토를 삼키고 옥토를 뱉어 내던 지렁이 한 마리
꽃 진 자리 김 금 자 꽃 진 자리에 어느 틈에 별 같은 열매가 맺혔네
별 아가 떨어져 나간 엄마 태반은 미처 아물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봄은 오고 가는구나
소리의 무늬 김 남 권 강물에 갇힌 소리를 찾는다
물고기가 숨을 쉴 때마다 잔물결이 그대로 박제되는 강 묵묵히 흐르는 순물이다
바람 속의 고요를 안고 물고기 한 마리가 물의 무늬를 툭 쳐 본다 순간, 회오리치는 물의 무늬들 물이 처음 솟아난 순간을 기억하는 하늘을 흩트려 놓았다
갇힌 소리들이 일제히 치솟는다
마침내 하늘로 오르는 물고기 사람처럼 강물 위를 걷는다
조또 형 김 명 형은 말이 없다, 아니 짧다. 전혀 하지 않는 것이 아닌 절제하는 것이다. 가끄 말로 쓰는 시에서 굵은 뼈가 잡힌다. 언제인가 침묵 속에 뼈가 새어 나왔다. 작게 보면 별 상관없는 내용인가도 싶지만, 크게 보면 지구 한 모퉁이에 그와 내가 서 있기에 굳이 막지는 않았지만, 굵은 뼈가 뾰족해진다. 속도 입술도 뾰족해진다.
진실의 밤을 밝혔던 촛불이 사그라지고, 순결한 의지가 왜곡되면 앞서 간 누군가의 침이 듬뿍 얹힌 닭발이며 홍당무를 들었다 놓았다 한다. 그 열기로 허공이 빵빵해질 즈음 형은 혀가 꼬여 발음도 삐딱한 말씀을 세상에 내어 놓는다. 하루 중 가장 긴 말을 한다.
민박집 할머니 김 숙 칠순 노파가 자식 쓰던 방에 가끔 민박을 치는데 귀가 어두워 큰 소리로 말을 해야 눈치 살펴가며 알아들으신다
초저녁 밭둑에 나가 모깃불 놓을 쇤 쑥대 한 아름 베어서 풀밭에 툴툴 터시기에 왜 그러시냐고 물었더니 살 놈은 살라고 그라요 하신다
천지의 버러지들이 그 말을 넙죽 받아먹는데 나도 한 입 달게 먹고 찌르륵 찌르륵 울던 밤이었다
가야금 설화 김 필 영 혈관마저 말라 버린 오동이여! 내 가슴 오동꽃 우수수 쏟아지네 안족을 타고 양이두에 묶여진 열두 줄을 그대 사무침이라 부르리 일곱 겹 12현에서 서른여덟 겹 1현을 오르내리며 누르고 튕길 때 속으로 삼키려는 신음을 그대 목마름이라 부르리 언제까지 머물러 있을 줄 알았으나 돌아오지 않는 봉황을 끝내 잊지 못하는 오동이여! 달궈진 인두로 이천 번을 지져 화인을 삼키면 타 버린 그대 속 같아질까 손끝으로 농현하는 이백서른여섯 명주실 꿈에서라도 쓰다듬고 싶던 봉황깃 같아질까 오동이여! 그대 천년을 기다리며 삼키던 목울음을 천년 넘도록 앓아 온 그대 몸짓을 오늘 우륵에 토하여라 쏟아 내어라
꽃과 여자 라 경 주 꽃이 예쁘다고 새살스럽게 호들갑 떨다가 전리품인 듯 이 꽃 저 꽃을 꺾는다 꽃보다 예쁜 척 가슴에 품고 다니다 꽃 시들기도 전 차에 오르며 휙 던져 버리고 떠난다 이런 여자 보고 싶지 않다 슬픔 많은 세상에 슬픔 하나 더 ?혀 줄 여자며 사랑 작아져 가는 세상에 사랑 하나쯤 쉽게 지울 수 있는 여자다 시절을 다독이며 피어오른 꽃송이의 심정을 서린 눈길로 다가서며 그늘 한 번 되어 주지 못해 가슴 저미는 이런 여자를 보고 싶다
다시 꽃이다 박 정 원 핏빛 색깔이다 목까지 번진 상처다 버림과 버려짐의 보이지 않는 뒤태가 나무를 탄다 우는 소리도 웃는 모습도 같지 않은 낙엽의 비명 소리가 앞선다 바꿔 입은 옷에서 나뭇가지 부딪히는 소리가 앞선다 무엇을 주웠는가 당신 몸에선 지금 비가 오지 않는데도 비가 내린다 핏물인 듯 단풍 빛이 녹슨 쇠사슬처럼 엮여 나온다 다시 꽃이다 떨어질 데까지 떨어져 본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결정체다 나무마다 살진 팔뚝을 내세운다 버려짐의 힘이 더 아귀차다 낙엽 몇 잎 나눠 가진 벤치가 아까부터 누군가를 기다린다 그리워하는 사람보다 그리운 사람이 꽃이다
피 빼고 서 봉 교 한 자루에 오십이만 원 하는 강냉이 작석을 하는데 사십 키로 오백을 넣으란다 실 중량은 40kg인데 굳이 500g을 더넣으라는 것은 자루 무게 때문이란다 자루가 끽해 봐야 50g인데 450g을 더 넣으면 그 차액은 누가 챙기나 칠십대 중반인 우리 아부지 평생 농사짓고 살면서 고추 팔 때도 콩을 팔 때도 들깨를 팔 때도 피 값이라는 명목으로 준 500g 혹은 1kg들 어디로 갔을까 그 수많은 피, 피 값은 40kg 500g도 훨씬 넘은 앉은뱅이 저울 위에서 바가지로 강냉이를 덜어 내는 어머니를 향해 아부지 또 후달구신다
“아, 피 빼고, 피 빼고라니까.”
미련 설 용 운 나의 슬픔 나의 아픔이여 잠재우는 영혼의 노래여 잠에 깨여나 날 흔들고 있다
슬프게 하지 마라 아파도 하지 마라 자유로움에 깃발 세워 까만 밤 거두어 내 새벽 열어 차거운 바람 들여놓고 요란스레 떠나는 기차소리 그들은 종착역 향해 치달을 것이다
아픔이여 사라져라 고통이여 잠들거라 작은 소망에 귀기울여 먼 항해 떠날려는 채비에 통곡하는 속내의 울림 침묵은 흐르고 고요 속에 외침 같은 나의 노래 이제는 가리라 툭툭 털고 일어나 이슬 머금고 핀 들길 따라서 나를 버려 둔 채 떠나리라
바람도 없는데 심 우 기 호수에 물살 이는 것은
키 작은 나무 잎사귀 흔들리는 것은
흰 구름 떠가는 것은
떠나 온 길과 떠날 길 보이는 것은
괜한 사랑 그리운 것은
그대는 아는가
바람도 없는데
바닥이라는 말 유 현 서 싸가지가 있다는 말이다 희망이라는 말이다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말이다
깡통계좌가 되었다는 말, 바닥을 쳤다는 말, 밑바닥 생활을 했다는 말, 이제 남은 것은 올라갈 일뿐이 없다는 말, 더 이상의 낮은 곳은 없다라는 말, 내 부끄러움 서러움도 다 내려놓았다는 말,
하지만 바닥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말 발판이 되어 준다는 말이다 디딤돌이 되어 더 멀리 나아가게 한다는 말이다 마중물이 되어 준다는 말이다 어머니가 되어 준다는 말이다 괜찮아 괜찮아 등을 두드려 준다는 말이다 넓은 품이니 맘 놓고 뛰어 보라는 말이다 허허벌판이 되어 보라는 말이다 비워 보라는 말이다
바닥의 밑에도 바닥이 있을까 밑이라는 말, 밑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밑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라는 말이다 하늘에서 바닥을 내려다보라는 말이
장어 장 해 숙 전기고문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내 고통은 감전되었고 지나온 삶을 되씹을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강과 바다를 오가며 욕심으로 가득 채웠던 허상 그는 마지막 기름때까지 빠져나간 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간혹 소주잔을 부딪기도 하면서
두물머리에서 장 혜 경 그날따라 통바지가 잘 어울리겠다, 생각했어요. 날마다 우거진 숲이 통째로 강물에 뛰어들고 바람에 살을 섞는 물살들은 카타르시스에 목말라 해요. 아직도 강물은 여전히 침잠하는 새들을 불러 모아요. 물속에 비친 흠뻑 젖은 그림자를 들여다보지 마세요. 강가에 선 나무들이 뿌리를 박차고 올라 강물을 거슬러 오르도록 내버려 둬요. 도열하는 빛들이 어둠 속에서도 날 수 있는 날개가 되어 줄 거에요. 죽도록 날 수 있게 내버려 둬요. 통화할 수 없게 잽싸게 문장을 지워 버린 물살들, 또박또박 말대꾸하네요. 우리는 지금 어디쯤에 와 있나요.
수인 조 재 형 벽에 갇힌 대못을 빼 주려는데 출소를 거부하며 꿈쩍도 않는다
벽 위의 그림이 걸작으로 호명되며 햇살 호위 아래 환호할 때
육중한 액자를 등에 지고 수십 년 음지에 가려 짓누르는 고통 혼신으로 버티다 그의 생은 뻘겋게 녹이 슬었다
살과 뼈가 문드러져도 굽히지 않는다
일념을 위해서는 한 치의 타협이 없는 저 완고한 비전향 장기수
감자 허 연 숙 우수 지나 베란다가 술렁거린다 겨우내 방치된 잡동사니들 봄볕에 속내들 드러낸다 수상한 냄새를 따라가다 마주친 삐뚤삐뚤 주소가 적힌 찌그러진 상자 그 틈새를 비집고 나온 연둣빛 상자 안이 환하다 기다림으로 조글조글 옹이 진 눈이 마침내 가슴을 풀어 텃밭을 일구었다
빈 젖까지 다 빨리고 껍질로 버티고 계신 어머니 작년 여름 온몸으로 받아들인 뙤약볕을 고스란히 삭혀서 야윈 내 가슴에 봄을 들여 놓으셨다
베란다 가득 봄을 버무리는 숨결이 향긋하다
-계간 연인 ‘통’ 함시동인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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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들꽃세상 지킴이 김남권 시인, 시낭송가 원문보기 글쓴이: 팬더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