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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스토아 자연학에서 우주적 프네우마Pneuma 연구 한경자.hwp
책
철학박사학위논문
『초기 스토아 자연학에서 ‘우주적 프네우마(Pneuma)’ 연구 -크뤼시포스를 중심으로』
2016년 8월
서울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서양철학전공 한경자
총평
철학의 두 경향이 있다면, 한편에는 자연적 전체를 탐사하는 경향이 있을 것이고, 다른 한편에는 관념적 일자를 탐구하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너비있는 것(étendu)에 대한 철학과 사념적인 것(idée)에 대한 철학이 있는 것이다. 아마도 현상학은 이 스펙트럼의 가운데 영역에 있을 것인데, 사르트르가 전자인 현실 쪽이라면, 레비나스는 후자인 현상 쪽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광산 노동자들 앞에서 웅변하는 사르트르와 미래에 피아니스트가 될 아들을 학회에 데리고 가는 레비나스의 모습은 얼마나 다른가. 아예 다른 주제를 다룬다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하나의 주제를 이중분절 시킨다. 예컨대, ‘무’는 말할 것도 없고, 같은 ‘무한’을 표현하더라도, 이 무한의 의미는 두 편에서 완전히 다르다. 한쪽에서는 자연이야 말로 무한한 것이라 주장할 것이고, 한쪽에서는 관념이야 말로 무한한 것이라 참칭할 것이다. 한쪽은 전체성을 망각한 철학은 신학일 뿐이라고 할 것이고, 한쪽은 단독성을 폐기한 철학은 전쟁학이라고 할 것이다. 이 무한을 느끼기 위해서, 한쪽에서는 내재성과 관련된 사상의 항들을 생산할 것이고, 한쪽은 관념과 관련된 개념의 항들을 산출할 것이다. 베르그송이 반복해서 사용하는 ‘사실의 선’이라는 말과 레비나스가 중복해서 사용하는 ‘무한의 관념’이라는 말의 차이가 이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이들의 철학사도 분절될 것이다. 자연철학에서 당연히 그 앞자리에는 스토아학파, 특히 초기 스토아학파가 있고, 관념철학에서는 교부철학자들이 있다. 더 거슬러올라가서, 자연철학으로서: 흔적을 찾아보기 힘든 퀴니코스 학파와, 관념철학으로서: 이데아론자로 과도하게 해석된 플라톤을 예거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만은 규로(逵路)는 언급하는 것만으로 그치자.
이 논문은 자연철학에 대해서 스토아주의가 심도있게 제공했던 논리들을 ‘프네우마’개념을 통해서 제시하고 있다. 이 논문에서 다루고 있지 않지만, 이 논리들은 스피노자, 니체, 라마르크, 베르그송, 들뢰즈의 핵심에서 공명하는, 자연철학의 논리라고 해도 될 만한 것들이다. 그만큼 이 논문은 반드시 읽어야 하는 논문이다. 물론, 이 인사들의 철학에서는 이것들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만큼 변형되지만, 와류가 경향을 삭제하지 않는 것처럼 이들 철학은 스토아주의가 튼 큰물길 안에서 여전히 흘러가고 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하나만 더 말하자면, 나는 라마르크를 거론했는데, 다윈의 철학이 자연철학에 끼친 그 혁신성에도 불구하고, 온실체로서의 자연을 다루지 못한 철학으로 비춰지는 이유도, 이 전체로서의 생성의 평정을 강조하는 스토아주의 자연학과 견주어서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오히려 웍스퀼이나 굴드와 같은 사람이 더 나아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고등학교 생물학 교과서 수준이 아닌, 라마르크에 대한 진중한 박사학위자가 생기는 날에 한국은 많은 것이 달라져 있을 것. 사르트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각주 두 개만을 끌어올리는 것으로 이 총평을 마치겠다.
-옮긴이. 제논의 “영혼은 물체”라는 사고는 매우 충격적인 것이다.
베르그송 사유의 틀이 스토아철학과 크게 비슷하지만 이러한 점에서는 차이가 있다. 베르그송을 질료내재학자로 볼지언정 유물론자로는 볼 수 없는 것도 이 이유에서이다. 베르그송은, 일원론자라 자칭하는 스토아주의자들과 다르게, 다분히 영혼, 몸의 이원론을 수긍하면서, 논의를 전개하다. 그리고 영혼이 무한히 팽창하는 움직임이라면, 몸은 유한히 수축하는 움직임으로서, 둘의 상응이 (생명)현상을 만든다고 설명하는 틀을 취하는데, 이는 스토아주의자들이 오직 구현적(물체적)인 한 실체의 수축하고 팽창하는 운동이 구현물(물체)을 만든다고 했던 사유를, 분절시킨 인상까지도 준다. 스토아주의자들이 하나의 무한평면을 생각한다면, 베르그송은 복합적인 평면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상승과 하강, 수축과 팽창 등등의 이 우주발생론적 운동을 설명하는 방식에서 베르그송의 사유는 스토아주의자들과 매우 유사하지만, 이 운동들을 본성상 다른 실체적 경향성으로 본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유대주의의 영향일지. 가깝게는 스피노자의 영향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그렇지만 스토아주의자들도 프네우마를 근원으로 보면서도, 이것을 분리되는 두 요소로, 사실상의 두 질료로 설명할 때에, 과연 이 ‘두’ 질료의 ‘한’ 근원은 무엇인지 다시 묻게 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한 근원을 원리적인 것으로 설명해버리면, 스토아학파가 내내 강조하는 유물론적 자연관은 폐기하게 되어버리는 것이기에 이 문제는 심각한 것이다. 사유와 몸, 영혼과 육체, 원리적인것과 현상적인것의 상호 교호를 인정하는 철학에서는, 당연하게도 이러한 문제 자체가 제기될 필요가 없다.
한경자는 스토아의 우주발생론적 유물론과 현상론적 유물론이 한 계열을 그리기에, 그 전개의 차원에 따라서, 원리적인 형태에 가깝되 여전히 유물론인 것(근원적인 불)과, 현상적인 것에 가까운 유물론(4원소로서의 불)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하나의 계열체이고 하나의 유물론이라는 것이다. 마치 하나의 우주를 다루는 양자역학과 동역학의 관계 같은 것이랄까. ‘온’자연에서 발생하는 이미지‘들’. 박홍규에게서는 필연과 우연의 관계가 이러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해결책은 베르그송의 자연론에도 개진해볼 수 있다. 『창조적 진화』에서 진화들을 해석할 때도 알 수 있듯이, 베르그송이, 특히 『사유와 운동』에서, 형이상학의 한 차원에서 생명력과 질료성을 분간하였던 것이지, 진화들 자체를 설명할 때는 이렇게 강고한 틀을 유지하지 않고, 자연의 결들 그 자체를 윤곽 그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하나의 자연철학을 구현하고자 한다. 스토아철학이 그렇듯이 베르그송 철학에도 계열의 두 가지 차원이 있는 것이다. 다만 베르그송의 철학은 스토아학파 다음 시대의 철학과 같은 인상을 남긴다. 물론 베르그송이 프네우마를 언급한 적은 없지만, 그가 프네우마의 두 상반되는 특성을, 영혼과, 물체의 본성적으로 다른 두 경향으로 분별하면서, 이 둘의 역동을 설명할 수 있게 되어, 고대 근원적인 불로서의 ‘그 자체로 있을 뿐 설명할 수 없는 것’(플라톤)에 머물러 있던 프네우마조차 마치 그 시대의 4원소로서의 불처럼 이제는 생명현상을 통해 한 실질로서 실증할 수 있는 차원으로 끌어올렸고, 즉 표현하였고, 이 표현을 통해, 한층 더 깊은 ‘자연’을 암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진정한 표현은 진정한 암시를 할 수 있는 법이다. 베르그송에게 한층 더 깊은 ‘자연’, 그것은 ‘지속’이다. (그런데 더군다나 스토아학파가 프네우마의 힘을 묘사하는 개념으로서 사용한 ‘프네우마 토노스’가 파동운동에 꽤 가깝다는 점은 더 놀라운 점이다. 베르그송의 파동에 대한 강조는『물질과 기억』마지막 장을 참조하라).
-옮긴이. 스토아 자연학 아래에서의 발생적 근접성을 바탕으로 사유, 영혼, 언어의 근사성을 확보하려는 단편이다. 쉽게 말해, 사유, 영혼, 언어는 발생하는 곳이 ‘심장’으로서 같으므로, 같은 의미론적 장 안에서 공명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근대 언어학에서 언어가 심장에서 출발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프네우마, 영혼, 사유, 언어의 계열체성[‘잇따름’, (통합체성이 아니라)]을 역설하고 있다는 점에서 음미해볼 가치가 있다. 언어가 자연을 말하는 방식에 대해서 우리는 이런 구도 안에서 사고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구조주의적 의미론 이전에 몸과 살의 구성에서 의미의 진가를 규명하고자 하는 메를로퐁티의 철학은 이 ‘심장’의 언어관에 동감하는 언어관일까. 그런데 결정적으로 스토아주의는 ‘표상’과 ‘충동’ 사이 적극저인 ‘동의’작용이 필요하다고 보았다는 점이 고려되어야 한다. 이 동의는 단순히 의식의 선택활동이 아니라, ‘자기화’라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존재자성과 관련되는 개념이기에, 이렇게 보면 메를로퐁티 철학과 겹치는 점이 있다.
이 반대되는 언어관이 레비나스의 언어관이다. 그에게 언어는 ‘잇따름’이 아니라, 나와 완전히 ‘단절’된 타자라는 무한한 미지를 손쉽게 마주칠 수 있게 하는 끝없이 제공되는 촉매이다. 레비나스를 따르면, 말하면서 우리는 내가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끝없이 생산되고 있으며, 그 생산 자체가 타자라는 것을 감지한다. 그런데 이런 언어관에서는 레비나스 스스로가 주장하였던 바대로, 언어가 의미를 축적해간 역사, 짧게 말해 언어의 역사성은 폭력적인 전체성이라는 비판 아래 가능한 철저하게 지워지고, 마주침에서 현현하는, 그 마주침을 존중해야 한다는 윤리성만 부각되게 된다. 어떤 공명도 공유도 공공도 사라진 상태에서 어떻게 이 마주침이 평화로운 것일 수 있을까? 레비나스에게서 이 윤리성이란 정념적인 것도, 진화심리학적인 것도 아니기에, ‘단절’된 타자와 나 사이의 이 존중은 다분히 무한에 대한 ‘신념’으로서 강제되어야 하는 것인데, 이 ‘신념’의 구체적인 내용은 결국에 바깥에서, 레비나스의 표현으로는 ‘스승’에게서 별안간 떨어져서 어찌할 수 없이 하게 되는 것으로 설명된다. 그가 인격적인 신을 말하고 있지는 않더라도, 이러한 순간순간이 있으며, 그것도 내재성을 발산이 아니라, 외재성의 점지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인간 존재에 ‘외재’한 전지전능한 신성이 형성하는 ‘무한’한 순간들의 집결로서 철학, 즉 근대적 신학의 철학을 꿈꾸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절대적인 우리의 바깥을 상정해버릴 때, 결국 그 절대적인 바깥과 우리의 관계는 ‘신’의 ‘신학’의 힘을 빌려서 설명될 수밖에 없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이런 신학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이 우리를 이런 틀 속에 억지로 밀어넣는 것이다. 이는 자유롭지 않은 철학이고, 자발성이 없는 철학이다. 마땅히 우리는 내재성의 철학을 해야한다.
본문
I. 들어가는 말; 1. 문제 제기: 스토아 자연학 연구 현황과 논문의 목적; (1) 문제 제기, 논문의 목적
스토아 자연학은 우주와 사물의 구조를 ‘작용을 가하는 것(to poioun)’과 ‘작용을 받는 것(to paschon)’의 결합으로 설명한다. 모든 사물이 근원들(archai)이라고 불리는 두 가지, 즉 능동 근원과 수동 근원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스토아 철학을 ‘유물론’이라고 지칭할 때 는 먼저 스토아가 말하는 ‘물체’의 의미를, 특히 ‘능동 근원의 물체성’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스토아 유물론’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1.
//‘프네우마’는 ‘팽창-수축 동시적 운동성’이라는 함의를 확보하여, 그것의 독 특한 속성인 ‘프네우마 운동(kinēsis pneumatikē)’이라 일컬어지는 ‘토노스 (tonos)’, 즉 ‘긴장 운동(tonikē kinēsis)’을 구성해낸다. ‘프네우마의 긴장 운동’은 ‘동시에 반대 방향을 향하는 힘’으로, 다시 말해 ‘자기 자신으로부 터 움직이면서 그 자신 쪽으로 움직이는 운동’이다. 이러한 ‘프네우마의 긴장 운동’은, 사물의 질료적 요소를 제외한 사물의 구조를 설명하는데 있어 두 가지 핵심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동시에 움직이는 양 방향의 힘 중 ‘바깥쪽을 향하는 힘(운동)’은 ‘사물의 성질’을 제공하는 한편, ‘안쪽을 향하 는 힘(운동)’은 ‘사물의 실체성, 단일성, 안정성’을 부여한다. 또한 크뤼시포 스는 긴장 운동의 정도에 따라 ‘프네우마’의 상태가 다르고, 그에 따른 사 물의 상태도 달라진다고 설명하는데, ‘헥시스(응집상태: hexis)’, ‘자연(자라 남: physis)’, ‘영혼(psychē)’, ‘이성적 영혼(logikē psychē)’의 ‘프네우마’를, 각각 ‘무기물’, ‘식물’, ‘동물’, ‘이성적 동물’의 상태에 대응시켜 그 구조를 해명한다.
3.
//‘영혼’은, ‘헥시스(응집상태)’나 ‘자연(자라남)’과 마찬가지로, ‘프네우마’의 한 상태에 불 과하기 때문에, 영혼은 ‘프네우마’ 개념의 매개를 통해 앞서 긴장 운동으로 설명되는 사물의 물리적 구조로 설명될 수 있게 된다. ‘프네우마’의 작용은 사물의 내재적 결속력에서부터 성질 부여, 그리고 물질의 상태를 설명하던 물리적 기제를 따라 영혼의 능력까지 동일한 방식으로 설명해 낸다. 생명 체와 무생물 사이에 놓여 있던 존재론적 격벽은 프네우마 개념의 도입을 통해 가능하게 된 일관된 설명에 따라 무너지게 된다. 영혼은 영혼 아닌 물체들과 마찬가지로 ‘프네우마’로 설명되며, 이렇게 ‘프네우마’가 세계의 통일적 구조와 공감(sympathy)을 설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스 토아의 유물론을 유기체적 유물론이라고 부를 만한 중요한 근거이며, 능동 근원의 물체성을 이해하는 중요한 접근로이다.
4
II. 초기 스토아 자연학에서 두 근원(Arcahai)과 능동 근원으로서의 ‘프네우마’
//스토아 철학이 당대의 원자 론적 유물론과 차별적인 연속체적 유물론을 유지하면서 다른 한편 유기체 적 유물론의 자연학 체계를 확립할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의 독특한 근원론 (a theory of principles or ἀρκαί)이 기초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세계를 하나의 단일한 실체로5) 파악하면서도 세계와 사물의 구조를 물체적 두 근원으로 설명하는 스토아의 자연학 체계는 필연적으로 두 근 원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만 그 구조의 긴장감이 해소될 수 있다. 따라서 이 장에서 필자는 일차적으로 스토아 자연학 체계의 기초가 되는 두 근원의 의미와 그 둘 간의 관계에 대한 가능한 이해를 구성하고자 한 다. 이 고찰을 통해 ‘오직 물체적인 것만이 존재한다(ta sōmata einai ta onta / sōmata monon ta onta einai / onta mona ta sōmata)’는 스토아 적 유물론의 성격과 의미가 일부 해명될 것이다.
1. 스토아 자연학의 구조: 스토아 자연학에서 우주의 두 근원(Archai); 1.1. 스토아 자연학의 근원론에 대한 연구 현황과 문제 제기
그러나 사실 이런 방식의 비교 분석을 통한 평가는 초기 스토아 철학자들의 학문적 배경을 염두에 두면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며, 그들 간의 연 관 관계를 추적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초기 스토아 철학의 주된 인물인 창시자 제논과11) 2대 지도자인 클레안테스12), 그리고 3대 지 도자이자 스토아 철학의 이론적 체계를 완성했다고 일컬어지는 크뤼시포스가13) 활동했던 기간은 대략 기원전 300년경(제논의 스토아학파 창설)부 터 208/4년(크뤼시포스 사망) 사이이다. 플라톤이 기원전 348/7년에 사망하 고 아리스토텔레스가 기원전 322년에 사망하였으므로, 제논을 비롯하여 크뤼시포스에 이르기까지 이들 초기 스토아 철학자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망으로부터 약 반 세기에서 한 세기 이후에 활동한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 초기의 스토아 철학자들이 바로 전 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적 이론과 논의들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 철학적 가치의 유용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은 거의 분명하다. 실제로 제논은 아카데메이아의 4대 수장인 폴레몬에게서 수학하였으며,14) 크뤼시포스 또 한 젊은 시절 초기에 아카데메이아에서 수학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15) 따라서 초기 스토아 철학자들이 우주와 사물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 있어, 전 시대의 권위 있는 두 철학자들의 이론과 그 이론에서 논의된 개념들을 상당 부분 공유했을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들의 이론을 구축하는 데 있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유산을 충분히 고려하고 있었을 것이 라는 것은 사실 전혀 놀라운 추측이 아니며, 실제로 이들 사상들 간의 연 관 관계에 대한 연구도 많이 진행되고 있다.
19~20.
먼저, 스토아 철학자들이 만물의 수동 근원으로서 말하는 ‘질료’에 대해 살펴보자. 이것은 어떤 사물에서 그 사물의 모든 특성들을 제거한다면(사 실은 불가능하겠지만) 얻을 수 있는 그러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 질료를 ‘아무 성질도 갖고 있지 않은(무규정적) 실체(apoios ousia)’29)라고도 부르고, 어떤 성질을 받아들일 수 있는, 혹은 모든 성질들이 그 안에 들어 있는 ‘기체(hypokeimenon)’30)라고도 말한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에 따르면31) 제논과 크뤼시포스는 ‘질료(혹은 실체)’라는 용어를 두 가지 수준의 의미로 구분하고 있다. 첫 번째는 청동상의 청동이나 침대의 나무처럼 특정 사물의 질료를 가리킬 때의 그것이 고, 두 번째는 우주 안 모든 것들의 공통적인 바탕이 되는 것으로서의 그 것이다. 전자가 ‘좁은 의미의 질료(혹은 실체)’라면 후자는 ‘넓은 의미의 질 료(혹은 실체)’이다.32) 후자가 모든 것들의 공통적인 제일 질료(prōtē hylē)를 의미한다면, 전자는 그 부분들의 질료를 의미하며, 그것이 곧 개별 사 물의 질료이기도 하다. 이때 개별 사물들의 질료는 양적으로 증가하거나 감소하기도 하겠지만, 전체로서의 질료, 즉 모든 것들의 제일 질료로서의 실체는 증가하지도 감소하지도 않는다.33) 그래서 제논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하나의 공통된 기체’로서의 ‘이 실체는 유한하다’고 말하며, 전체로서 모든 것들의 기초인 이 질료는 ‘소멸하지도 생겨나지도 않는다’고 말한다.34)
한편 능동 근원의 개념은 보다 복잡하며 보다 중요한 함축들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능동 근원이 물체적이라는 사실은 스토아 철학의 특징적 정신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질료는 그것이 실존하는 동안에는 언제나 능동근원과 결합하고 있는데, 이때 능동 근원은 질료에 스며들어 있고, 질료를 움직이고, 질료에게 형체를 부여한다. ‘그 자체로는 아무 운동도, 모양도, 성질도 없는 실체에(he tōn ontōn ousia, akinētos ousa ex hautēs kai aschēmatistos)’ ‘다양한 형태로 모양지우고 움직이는 원인(to kinoun autēn kai polyeidōs morphoun aition)’으로서의 능동 근원은 바로 이 ‘질 료를 관통하는 힘(질료에 두루 퍼져있는 힘: dynamin tina di’ autēs pephoitēkyian)’이며, 이것은 곧 ‘영원히 그 자체로 자기 운동하는 신 (aidios kath’ heautēn autokinētos theos)’이다.35) 또한 능동 근원으서의 로고스(logos)는 ‘생식 기관을 통과하는 씨처럼 실체를 통과한다.’36) 그것 은 질료의 분리 불가능한 성질이며,37) 질료를 이성적으로 움직이고, 우주 안의 수많은 변화의 원인(aitia)이다.38) 또한 스토아 철학자들은 능동 근원 인 신을 ‘지성적인 것(noeron)으로, 즉 세계의 생성을 향하여 체계적으로 나아가며, 모든 종자적 로고스(spermatikos logos)를 포함하고 있는 기술 적인 불(계획적인 불: technikon pyr)’로 표현하며, ‘그 종자적 로고스에 의해 모든 것은 운명(himarmenē)에 따라 일어난다.’고 말한다.39) 또한 ‘신 은 세계 전체에 퍼져있는 프네우마(pneuma)로서, 프네우마가 통과하여 퍼 져나가는 질료의 변경에 따라 다양한 이름들을 취한다’고 스토아는 말한 다.40) 스토아 철학자들이 능동 근원을 이러한 식으로 지칭할 때 그들이 능 동 근원의 기능으로 의식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아무 성질도 지니고 있 지 않은 수동적 질료는 그 자체로는 형태도 없으며 움직이지도 않는다. 그 리고 이러한 무규정적 실체에 형태(성질)와 운동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능 동 근원인 것이다.
23~25.
//IV장에서 상세히 논의하겠지만, 스토아 근원론은 크뤼시포스의 ‘프네우마’론 도입 이후 새로운 전기를 맞으며 그를 통해 스토아 자연학이 내적으로는 정합적으로 체계화되고 외적으로는 세계 설명의 적용 범위를 획기적으로 확장할 수 있게 되는데, 이러한 ‘능동 근원’으로서의 ‘프네우마’ 개념에 있어 아리스토텔레스적 기원을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27.
스토아 철학자들이 말하는 능동 근원인 신은 세계 밖에서 세계 안의 것들을 움직이는 초월적인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 안에서 세계의 모 든 실체들에 스며들어 있는 물체적인 신이다. 스토아의 신은 플라톤이 묘 사했던 분리된(초연한) 데미우르고스와도 다르다. 스토아 자연학에서 세계 의 성장, 소멸의 전 과정은 신의 삶 그 자체이고, 또한 동시에 신의 로고 스는 우주 안의 모든 개체들의 정해진 전개(성장)와 통일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스토아의 신은 세계에 씨를 뿌리고 나서 세계의 성장이 독립 적으로 진행되도록 내버려두는 그러한 신이 아니다. 신의 자기 전개 과정 은 세계의 인과 연쇄 그 자체이며, 신 자신의 삶과 역사는 그가 움직이고 있는 세계의 역사와 같다.51)
28.
1.3.6. 보론-능동 근원으로서 ‘프네우마’가 갖는 설명력에 대한 예비적 고찰
이 물음에 답하기 전에 우리는 ‘신’으로서 불리는 스토아의 능동 근원에 대해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다. ‘능동 근원=신의 물체성’은 직관적으 로 많은 설명을 요구한다. ‘작용을 가하는 것’으로서의 ‘신’이 물체라는 것 은 신의 물체성을 주장하는 일차적 근거이긴 하지만, 신이 물체적이라는 주장은 이것 외에도 좀 더 많은 근거와 설명을 요구한다. 필자는, 그래서 크뤼시포스가 ‘물체로서의 능동 근원=신=프네우마’를 동일한 것으로 놓음 으로써 ‘물체로서의 능동 근원’을, 즉 ‘물체로서의 신’을 보다 풍부하고 체 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프네우마’에는 ‘신’ 개념에 없는 물체인 능동 근원의 중요 기능들이 추가적으로 있기 때문이다.
이 기능들에 대해서는 IV장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지만, 일단 간략하게 그 기능을 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성질 부여’ 기능이다. 하지만 이것은 ‘프네우마’의 중요한 기능이긴 한데(게다가 이것은 ‘프네우마’가 능 동 근원임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기도 하다), 이건 이미 ‘신’이 갖고 있 는 기능이다. 다음으로 ‘프네우마’의 또 다른 중요 기능은 ‘결속력(결합인)’ 이다. 개체이든 우주 전체이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프네우마’ 의 결속력 덕분에 흩어지지 않고 하나로 있게 된다. 이것은 ‘신’ 개념에서 설명되지 않는 기능이다. 그런데 성질 부여 기능이든 결속 기능이든 이 두 가지 기능의 발휘가 ‘프네우마’에서는 ‘신’에게는 없는 ‘토노스(tonos)’, ‘긴장 운동’의 속성으로 설명된다. 사물이 하나의 사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다양한 성질을 가질 수 있는 메커니즘을 제공하는 ‘토노스’는 ‘신’ 개념에서는 설명될 수 없다. 이 ‘토노스’는 ‘프네우마’에 의해서만 설 명될 수 있다.93)
그밖에도 ‘프네우마’는 인간의 영혼으로서 ‘생명부여의 원리’ 등 생물학적인 맥락에서 논해질 수 있는 여러 가지 기능을 끌고 들어온다. 그래서 능동 근원인 ‘신’과 ‘프네우마’의 만남, 그리고 양자의 일치성이 스토아 자 연학을 체계적이면서도 풍부한 함의를 갖게 하는 발판 역할을 했다는 것 이 필자가 이후의 논의에서 계속해서 해명하고자 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상의 논의를 전개하기 전에 먼저 검토되어야 할 물음들이 몇가지 있다. 첫 번째는 두 가지 물체적 근원이 결합되어 있는 상태가 개별 사물(혹은 우주 전체)이라 할 때 스토아의 일원론은 유지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고, 두 번째는 하나의 사물에 두 개의 물체적인 것(근원)이 들어있 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상태인가라는 물음이다. 필자는 이런 물음들에 들 어있는 긴장감을 해소하는 논의가 ‘스토아 혼합 논의’라고 생각한다. 이제 다음 1.4장에서는 ‘스토아 혼합 논의’를 검토하여 스토아 혼합 논의의 내용 과 이 혼합 논의를 통해 스토아가 보여주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54~55.
1.4. 스토아 혼합 논의와 두 근원의 관계
- 스토아 혼합론은 스토아 일원론과 두 가지 물체적 근원론을 양립가능하 게 하는가?9
55.
그러나 스토아 혼합론을 위와 같은 구도로 제시하는 비판적 주석가들의
단편들은 스토아 존재론의 구도를 근본적으로 흔들게 하는 어떤 전제를 함축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즉 혼합물이라는 것이 그것을 구성하는 어떤 구성 요소들을 전제하고 있고, 그래서 그 구성 요소들의 존재가 전제되어 있는 스토아 혼합론은 이 세계가 하나의 단일한 물체적 실체라는 스토아 일원론과95) 일견 양립하기 어려울 것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상이 비판적 주석가들의 왜곡된 전달 탓인지의 여부는 분명치 않다. 그 러나 처음의 양립 불가능한 것 같은 인상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보기에, 산재해 있는 여러 단편들의 분석과 비교에서 오히려 더욱 일관되게 드러 나는 것은, 스토아는 혼합 논의를 통해 ‘병치(parathesis)’와 ‘융합 (synchysis)’이라는 혼합(섞임; mixis)의 사태와 구별되는 ‘완전 혼합(diholōn krasis)’의 방식을 보여줌으로써96) 스토아 일원론과 유물론을 양립 시키려는 기획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56.
먼저 본 장에서는 1) 세 가지 종류의 섞임을 개요하는 216.14~217.2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단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100)
SVF 2.473 1) 216.14~217.2 : ⑴ ‘혼합(krasis)’에 관한 크뤼시포스 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크뤼시포스가 상정하기를, 실체(ousia)101)
전체는 하나로 되어 있는데(통일되어 있는데; hēnōsthai), 이는 ‘프네우마’라는 어떤 것이 전 실체에 두루 퍼져 있기 때문으로(diēkontos), 이 ‘프네우마’에 의해 세계는 자기 자신을(hautō) 함 께 붙들고(응집하고: synechetai) 자신과 함께 머물며(고정되며: symmenei) 자신과 함께 겪는다(공감한다: sympathes estin).
59~60.
⑴ 첫 번째는, 크뤼시포스가 ‘혼합(krasis)’에 관련하여 상정하고 있는 것
에 대한 내용으로 매우 짧고 간결하다. ‘혼합’에 대한 크뤼시포스의 상정에 따르면, 실체 전체는 하나로 되어(통일되어) 있는데, 실체의 이러한 하나 됨(통일성)은 ‘프네우마’ 덕분이다. ‘프네우마’가 실체 전체에 퍼져 있어서, 이 실체 전체에 퍼져 있는 ‘프네우마’에 의해 세계는 자신을(hautō) 함께 붙들고(synechetai) 자신과 함께 머물고(symmenei) 자신과 함께 겪는다 (sympathes). 세계는 흩어지지 않으며 고정되어 유지되고 있고, 또한 자기 자신과 공감(상호작용)한다. 여기에서 혼합 논의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구절은 ‘프네우마가 실체 전체에 퍼져 있다(diēkontos)’는 구절이다. ‘프네우마가 실체 전체에 두루 퍼져 있기 때문에’ 세계는 흩어지지 않고 고정되어 유지된다. 즉 세계가 흩어지지 않고 고정되어 유지되며, 더 나아 가 자기 자신과 공감(상호작용)할 수 있는 까닭은 세계의 응집성과 내부적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힘을 지닌 ‘프네우마’ 덕분이면서102) 동시에 그러한 힘을 지닌 ‘프네우마가 실체 전체에 두루 퍼져 있기 때문’이다. ‘프네우마’의 어떤 힘이 세계의 응집성과 내부적 상호작용에서 어떤 역할
을 한다고 할 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프네우마가 실체 전체에 퍼져 있 음’을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 혼합 논의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61~62.
① 첫 번째 종류의 섞임은 ‘병치(parathesis)’이다. 병치라는 섞임의 특성
은 이러한 방식의 섞임을 통해서 이루어진 혼합물(혹은 결합물)의 구성 성 분들이 ‘같은 장소에 함께 놓여 있으며, 나란히 병렬해 있다’는 점이다. 크 뤼시포스식 표현에 의하면, ‘연접하여(kath’ harmēn)’ 있다. 그리고 이때의 구성 성분들은 자신의 고유한 성질을 잃어버리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이것은//
② 두 번째 섞임의 종류는 ‘(완전) 융합(synchysis)’이다. 융합이라는 방
식의 섞임을 겪는 혼합물(결합물)의 애초의 두 구성성분은 융합 과정을 통 해 각각 자신의 고유한 성질을 상실하고(symphtharsis) 새로운 제 삼의 실 체로 재탄생한다. 새롭게 생겨난 실체는 원래 구성 성분들과는 전혀 다른 성질을 갖고 있다.//
③ 세 번째 종류의 섞임은 ‘(완전) 혼합(krasis)’이다. 이러한 종류의 섞
임을 겪는 두 물체적 실체는103) 그 섞임 속에서 서로 완전히 스며들어 있 다. ‘완전 혼합’은 그러한 방식의 혼합을 겪은 혼합물(결합물)의 두 구성 성분이 서로 완전히 스며들어 있다는 점에서, 단지 표면적으로만 연접하고 있는 ‘병치적 섞임’의 방식과도 다르며, 결합 후에도 여전히 애초의 구성성 분들이 자신의 고유한 성질을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혼합물(결 합물)에서 그 애초의 구성 성분들이 자신의 모든 성질을 상실한 ‘융합적 섞임’의 방식과도 다르다. 서로 완전히 상호 침투(di' holōn antiparektasis) 했으면서도 그 구성 요소가 각각 자신의 고유한 성질을 유지 보존하고 있 다는 점에서 크뤼시포스는 이러한 종류의 섞임이 진정한 ‘혼합(krasis)’이 라 할 만하다고 말한다.//
62~63.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 스가 전하는 구절을 보면, 혼합론 논의를 통해 크뤼시포스가 목적하는 바 는 병치가 진정한 의미의 혼합이 아님을, 혹은 진정한 혼합이라고 할 만한 것은 완전 혼합뿐이라는 사실을 규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병치적 섞임의 사태를 정확하게 그려냄으로써 완전 혼합의 사태를 병치와 명확하 게 구분하는데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완전 혼합은 그 구성 성분들 이 ‘표면적으로 접촉하여 연접하여 있는(kata perigraphēn kai parathesin)’ ‘원자적, 혹은 기계적 병렬 사태’인 ‘병치’와는 다르다
65.
알렉산드로스에 따르면, ‘완전 혼합’만이 진정한 의미의 혼합, 혹은 엄격한 의미에서의 혼합이라는 견해를 지지하는 자들은 ‘혼합(krasis)’, 즉 ‘혼 합된 물체의 각 부분들이 혼합된 물체 전체의 성격을 공유하는 방식의 혼 합’이 있다는 것의 근거로 다음과 같은 경우를 든다. 첫째, 많은 물체들이 자신의 크기가 확장되거나 축소되는 경우에도 자신의 성질을 보존한다. 가 령, 숯불로 태워진 유향이 엷어지면서도 자신의 성질을 보존하는 경우. 둘 째, 많은 물체들이 다른 물체의 도움을 받아 그 스스로는 도달할 수 없는 크기로 확장된다. 가령, 금이 약품의 도움으로 극도의 큰 넓이로 늘어나는 경우. 물론 이 경우에도 그렇게 확장된 물체는 자신의 성질을 보존하고 있 다. 따라서 어떤 물체들은 다른 물체들의 도움을 받아 완전히 하나가 되어 서, 자신의 고유한 성질들을 보존하면서도 전체적으로 완전히 서로 같은 크기로 퍼져있다(상호침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가령, ‘한 잔의 포도 주-많은 양의 물 혼합물’의 경우. 이 경우, 소량의 포도주는 거대한 크기의 물로부터 도움을 받아 그와 같은 크기의 외연을 얻게 된다. 그리고 물론 이때 포도주는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 모르지만) 자신의 고유한 성질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계속되는 알렉산드로스의 전언을 보자.
SVF 2.473 3)-2, 217.32-218.6 : 사정이 이와 같다는 분명한 증거 로서 그들은 다음과 같은 점을 사용한다. 즉 개별적인 존재 (hypostasis)를 가진 영혼은, 마치 그 영혼을 받아들이고 있는 물 체도 그러하듯이, 그 물체와의 섞임 속에서도 자신의 고유한 실체 를 보존하면서 물체 전체에 완전히 퍼져 있다. 왜냐하면 영혼의 어떠한 부분도 그 영혼을 가진 물체와 공유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113) 또한 이것은 식물들의 자연(physis)도 마찬가지며, 뿐 만 아니라 헥시스(hexis)에 의해 유지되는 것들114) 속에 있는 헥시스도 마찬가지다. 더 나아가서 그들은 불도 전체적으로 철 전체에 두루 퍼져 있다고 말한다. 그것들 각각이 그자신의 고유한 실체를 보존하면서 말이다.115)
그리고 계속해서 ‘완전 혼합’(이 있음)을 지지하는 이들은, 다른 물체 속
에 들어가(혹은 혼합되어, 혹은 스며들어) 극도의 큰 넓이로 확장된 물체 가 여전히 자신의 성질을 보존하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로 다음과 같은 것 을 제시한다. 첫째, 영혼은 몸과의 섞임 속에서 그 몸 전체에 퍼져있으나, 자신의 고유한 실체를 여전히 보존하고 있다. 영혼의 어떠한 부분도 그 영 혼을 가진 물체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사실은 영혼이 몸 전체에 퍼져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은 식물 전체에 퍼져 있는 자 연(자람; physis)과 돌이나 쇠 같은 무기물에 퍼져 있는 헥시스(hexis)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둘째, (빨갛게 달구어진) 철의 경우 불이 전체적으로 철 전체에 두루 펴져 있다. 그리고 이때 철과 불은 각각 자신의 고유한 실 체를 보존하고 있다.
71~72/.
1.4.4. 결론 - ‘혼합 논의’에서 스토아가 의도한 것
스토아가 혼합 논의를 통해 의도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물론여러 가지 혼합 혹은 섞임의 종류들 중에서 진정한 혼합이 무엇이냐를 밝 히려는 것에 있지 않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혼합 논의에서 스토아의 관심 의 중심은 보다 존재론-자연학적인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그들의 유물론과 관련이 있다. 스토아 자연학에서 우주 전체, 혹은 우주 안의 어 떤 한 존재는 모두 ‘작용을 가하는 것(즉, 능동 근원; to poioun)’과 ‘작용 을 받는 것(즉, 수동 근원; to paschon)’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오직 물체만이 작용을 가하고 작용을 받을 수 있으므로 우주의 두 근원인 능동 근원과 수동 근원은 물체이다.’ 그리고 능동 근원과 수동 근원은 각각 ‘프 네우마(혹은 신)’와 ‘질료’이다.125) 스토아는 이 물체적인 두 근원의 상관관 계를 물체적 능동 근원인 ‘프네우마’가 물체적 수동 근원인 질료에 완전히 스며들어 있다고 표현한다.126)
이때 ‘프네우마’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그것이 스며들어 있는 물체를 하나로 묶는 것이다. 필자는 스토아 혼합론의 전모를 비교적 자세 히 묘사한 알렉산드로스의 서술의 첫 부분(『혼합에 관하여』 216.14~17)에 이미 이 혼합론의 배경이 되는 문제가 언급되어 있음을 지적하였다. 거기 서 ‘프네우마’는 세계 전체에 스며들어서 그것을 하나로 묶어 흩어지지 않 게 고정하고 유지한다. 우주와 우주 안의 모든 사물들은 그 안에 스며들어 있는 ‘프네우마’ 덕분에 흩어지지 않고 자신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실상 이 세계의 모든 물체적 존재는 항상 ‘프네우마’와 결합된 상태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런데 스토아에게 ‘프네우마’ 역시 분명 물체적 존재이 다. 그것은 ‘작용을 가하는 것(to poioun)’이며, 그리고 오직 물체만이 작 용을 가하거나 작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체인 ‘프네우마’는 항상 다른 물체인 질료에 스며들어, 혹은 혼합되어 있는데, 이 사태는 분 명 병치적 섞임 상태와는 구별되는 사태이다. 병치적 섞임 상태를 일으키 는, 원자와 같이 각각 구별되는 물질들의, 기계적인 혼합은 두 가지 물체 가 어떻게 동시에 같은 장소에 있을 수 있는가와 같은 물음을 피해갈 수 가 없다. 그러나 ‘병치’와 구별되는, 그 구성 요소가 원자와 같은 것이 아닌, 어떤 물체적인 존재들의 ‘완전 혼합(krasis di’holōn)’은, 그 ‘완전함’, ‘완전한 상호 침투’에 의해 구성 요소들이 하나의 실체가 되게 해주며, 그 것은 동시에 같은 장소에 있는 물체들의 존재를 가능하게 해준다.127)
그것은 더 나아가 이 세계는 하나의 단일한 물체적 실체라는 스토아 일원론과 이 우주의 모든 사물은 두 개의 물체적 근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스토아적 유물론128)을 양립가능하게 해준다. 이 우주와 이 우주 안의 모든 사물은 두 개의 물체적 근원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 두 물체적 근원이 함께 있는 방식이 ‘완전 혼합’이기 때문에 이 완전 혼합을 통해 이루어진 실체는 두 개의 실체가 아니라 단 하나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때 이 하나의 실체를 이루고 있는 구성원인 두 물체적 근원은 여전히 자 신의 본성을129) 잃어버리지는 않고 있다. 이것이 물체적 능동 근원인 ‘프 네우마’가 물체적 수동 근원인 질료에 완전히 스며들어 있는 방식인 것이 다. 크뤼시포스는 혼합 논의를 통해, ‘완전 혼합’을 ‘병치’와 분명하게 구별 시키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혼합 논의를 의도적으로 변형시킴으로써, 두 개 의 물체가 같은 장소에 있을 수 있는 ‘완전 혼합’ 방식을 제시하여 스토아 적 유물론과 일원론의 양립이 가능함을 기획하고 있는 것이다.130) 131)
76~78.
각주131)
알렉산드로스의 단편 SVF 2.473을 필자는 ‘(1)=(2)의 ③이지, (1)≠(2)의 ①,②이다’와 같은 구조로 독해하였다(58-63쪽). 이에 대해 이창우 선생님께서는 이 구절이 ‘(1)≠(2)의①,②,③임’의 구조로 독해할 수 있음을 제안해주셨고, 이 제안은 이 단편을 세밀하게 읽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창우 선생님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1)과 (2)는 비교 혹은 대조되어 있다[μέ́ν…δέ…구문]. (1)의 논점이, ‘보편 질료(universal matter=ή́ σύ́μπασαού́σί́α)’에 대해서, ‘프네우마’가 이 비활성적인 보편 질료를 어떻게 ‘하나로 만드는지(h(nw=sqai)’에 관해 논하는 ‘우주적 층위(Cosmic level)’의 고찰이라면, (2)의 논점은, 이미 하나로 되어 있는 ‘개별적 물체들(σώ́ματα)’에 대해서, 이것들의 섞임 양태에 관해, ‘③ 섞여 있더라도 각자가 원래의 ‘성질(ποιό́της)’을 보존하는 양상’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는 ‘통합(unity:하나 됨)’이 아니라 ‘분리가능성’에 방점이 있는 것으로, ‘일상적 층위(Non-cosmic level)’의 고찰이다. 반면 ‘Cosmic level’에서는 ‘유기체적으로 하나 됨’이 강조점이다. 우주는 자신을(αύ́τω) 함께 붙들고(συέ́χεται), 자신과 함께 머물고(συμμέ́νει), 자신과 함께 겪는다(συμπαθέ́ς ὲ̀στιν). 이것은 ‘프네우마의 일방적 관통 운동’에 의해 이루어지며, 이 관통의 대상은 ‘보편적 질료(universal matter)’이다. 그에 비해, ‘Non-cosmic level’에서는 (이미 하나인) 사물(혹은 물체) A와 사물 B (혹은 사물 C)(ex. 불/쇠, 금/약, 유황/공기, 포도주/물)는, ③의 case인 경우, ‘쌍방적 공외연화(δί́α δλων αντιπαρεκτεί́νειν)’를 통해 동일한 장소를 차지한다. 그렇지만 ‘공외연화’, 혹은 ‘동일한 장소 점유’가 ‘하나 됨(ή́νωσθαι)’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둘은 공외연 속에서도 서로와 서로가 (혼합되어 있지만) 서로에 대항해(ὰ̀ντί) 있다. 즉 서로의 개별적 본성과 성질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공간 좌표점에서는 ‘하나’이지만 사물의 수는 ‘둘’ 혹은 ‘셋’이다. 우주적 층위에서는 존재는 하나이지만, 일상적 층위에서는 존재는, ‘완전 혼합’의 경우에서도, 여럿이며 개별화되어 있다. [옮긴이: 동물들이 일상적 층위에서는 서로 대결, 대항, 대립하지만, 우주적 층위에서는 함께 겪고, 머물고,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영미 진화론자는 전자 층위만을 유독 강조하는데, 자연의 결 자체를 파악하려는 후자 층위도 함께 보아야만 반쪽짜리 학문을 하지 않는 것이다. 개체적인 것들의 흐름을 오래도록 연구하여 파악하고자 하는 영웅적인 탐구욕을 가져야만 한다. 석주명.]
필자는 이창우 선생님의 제안대로 (1)이 ‘프네우마-우주 질료’의 관계를 설명하는 ‘우주적 층위’에 대한 고찰이며, 그에 반해 (2)는 ‘개별 사물’의 다양한 섞임 양상을 보여주는 ‘일상적 층위’에 대한 고찰이라는 전체 구조에 대한 독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만 본고에서 필자는, 이 ‘혼합 논의’의 전체 맥락이, 스토아가 (2) ‘개별 사물들’의 혼합 양상의 구별을 통해 ‘새로운 제 삼의 섞임의 종류(완전 혼합)’가 있음을 보여주고, 이것을 발판으로 (1)의 ‘두 우주적 물체’인 ‘프네우마-우주 질료’의 관계를 해명하려는 기획을 하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2)의 ③은 개별 사물들의 다양한 경험적, 특수 사례(금, 유황, 포도주)를 통해 ‘완전 혼합’의 사태를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분명 (1)의 우주적 사례(프네우마-우주 질료)의 관계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하지만 ‘완전 혼합’의 일상적, 특수 사례와 우주적 사례의 관계 성격이 간극이 있음에도, 이 ‘혼합 논의’의 핵심이 ‘개별 사물’들의 세계에서 ‘완전 혼합’이라는 ‘새로운 제 삼의 섞임 방식’이 존재함을 해명하는 것은 아닐 것이므로, 이 ‘혼합 논의’의 본질적 의도는 우주적 사례의 관계 구조를 해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78.
그러나 이 가능성, 즉 적어도 크뤼시포스는 ‘프네우마’를 원소 불과 원소
공기의 혼합물로 간주하지 않았음에 관련한 논의는 조금 뒤로 미루고, 앞 서의 여러 문헌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일단 ‘프네우마’를 원소 불과 원소 공기의 혼합물이라고 하자. 이럴 경우, 앞서 제기한 순환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즉 ‘프네우마’가 이미 (우주와 우주 만물을 구성 하는) 근원(archē)인데, 그것이 다시 다른 두 개의 원소(stoicheia)로 구성 되어 있게 된다. 이 문제를 알렉산드로스는 정확하게 스토아의 딜레마로 상정하면서 비판하고 있다. 그가 상정하는 스토아의 딜레마를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88~89.
1. 두 근원은 물체적이지 않다. 두 근원은 하나의 단일한 실체의 추상물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원론을 보호하지만, 어떻게 추상적 인 비물체적 근원이 서로 상호작용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일으 킨다.
2. 두 근원은 물체적이다. 두 근원은 하나의 실체를 형성하는 데 있어 균일하게 혼합되어 있는 두 가지 다른 실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두 근원의 상호작용에 대한 설명을 충족시켜주나, 일원론 을 포기해야 할 것 같다.
3. 두 근원은 물체적이다. 작용을 가하는 것(to poioun)과 작용을 받는 것(to paschon)이란 동일한 물체적 실체를 언급하는 다른 기술들이다: 이것은 일원론을 보호하지만, 어떻게 하나의 단일한 물 체가 자기 자신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M. Lapidge(1973)와 R. Todd(1978)는 1의 노선을 취한다.158) 먼저 Lapidge는 두 근원이, 구별되는 두 개의 물체가 아니며, ‘하나의 실체의 두 양태’라고 말한다. 그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두 개의 근원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불린다. 가령 신과 질료, 테크니콘 퓌르와 카오스,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 등등. 제논이 이런 식으로 두 근원을 호명할 때는 그것의 기 능에 의거하여 각기 다른 이름을 적용하는 것이다. 이 경우 이 이름으로 불리는 이 모든 힘 내지 기능들은 단지 하나의 실체의 두 양태로서 여겨 져야 한다는 것이다.
Todd는 조금 더 나아간다. 이 두 근원이 하나의 단일한 물체의 양태라고 한다면 이 물체의 양태는 물체일 수 없다. 따라서 스토아의 근원 개념 이 고대, 현대 비판가들에 의해 잘못 이해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Todd에게서 근원은 물체적인 것이 아니고 비물체적인 것으로 규정된 다.159) 그러나 Todd의 이러한 주장은 스토아가 분명히 비물체적인 것의 목록에서 언급하고 있는 네 가지(렉타, 시간, 공간, 허공)160)에 근원이 해 당하지 않으므로 근원을 비물체적인 것으로 두는 것은 스토아의 일반적인 입장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반론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Todd는 물체의 양태란 것은 사고 속에 잡혀진 개념이며 이것은 일종의 ‘렉타(lekta: 말해 진 것들)’이므로 ‘렉타’로서 근원은 비물체적인 것에 속한다는 강한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Lapidge와 Todd의 관점은 스토아의 물체에 대한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스토아 자연학에서는 물체만이 작용을 가하고 작용을 받을 수 있다는 전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스토아 자연학의 이 제일 전제를 유지하면, 노선 1은 어떻게 비물체적인 능동 근원과 수동 근 원이 상호작용할 수 있는지를 만족스럽게 설명해주지 못한다. 따라서 그 보다는 노선 2나 노선 3의 길이 좀 더 스토아 본래의 정신에 충실한 설명 을 제공할 것 같다. 그러나 2의 길은 스토아의 일원론을 유지하지 못하므 로 일단 배제하도록 하겠다.
Todd의 길로 가게 되면, 근원은 완전히 비물체적인 것, 즉 ‘렉타(lekta:말해진 것)’, 한 실체의 두 양태로 설명된다. 반면 원소는 우주발생론에서 등장한 물체적 실체이다. Lapidge 역시 근원을 하나의 실체의 두 양태라 고 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발생론적 설명에서는 우주 이전 단계의 원시 불(신=‘테크니콘 퓌르’)을 근원, 그리고 응축과 희박과정을 통해 생겨 난 것을 원소라고 본다. 필자는 ‘테크니콘 퓌르’를 근원이라고 보고 ‘아테 크논 퓌르’를 원소 불이라고 봄으로써 불을 ‘근원으로서의 불’과 ‘원소로서 의 불’로 구분한 Lapidge의 견해에 동의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근원과 원 소를 같은 수준의 우주발생론 차원에서 설명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본 다. 우주발생론에서 제시되는 근원은 그가 제시하는 양태로서의 근원과 양 립 가능한 설명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토아의 근원은 사물의 구조 를 설명할 때 더 적절하다. 물론 우주발생론 차원에서도 근원은 원시 우주 나 원 실체의 구조나 상태를 설명할 때도 쓰일 수 있긴 하다.
99.
따라서 이제 알렉산드로스가 제기하는 스토아의 순환 딜레마는 다음과 같이 고찰될 수 있다: 알렉산드로스가 스토아의 근원과 원소 관계를 오해 하여 순환 딜레마를 제기했다고 한다면, 알렉산드로스가 제기한 순환 딜레 마, 즉 알렉산드로스의 오해 근거는 무엇이며, 그리고 이 오해는 어떻게 해소될 수 있는가? 필자는 두 가지 수준에서 대답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우주발생론(Cosmogony)’ 차원에서의 대답이고, 다른 하나는 ‘우주 론(Cosmology)’ 차원에서의 대답이다. 먼저, ‘우주발생론’ 수준에서 이 문 제를 보자면, 이 오해의 원천은 알렉산드로스가 ‘근원으로서의 불(원시 불)’과 ‘4원소로서의 불’을 구별 못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근원으로서의 프네우마’는 (‘근원으로서의 불(원시 불)’과는 동일시될 수는 있지만) ‘4원소로서의 불’이 아니며, ‘원소 불과 원소 공기의 결합물’ 도 아니다. 따라서 알렉산드로스가 제기하는 스토아의 순환 딜레마는 ‘원 시 원소 불’과 ‘4원소 불’을 구별함으로써 해소될 수 있다. 다른 한편, ‘우주론’ 수준에서 이 문제를 보자면, 이 순환 딜레마는 ‘원소’에 의존하지 않 아도 해결된다. 왜냐하면 ‘프네우마’로 모든 것이 환원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모든 사물의 구조는 ‘프네우마의 응축과 확산’으로 환원되어 설명되 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이 ‘우주론’적 설명은 ‘우주발생론’적 설명을 포섭한다.173)
102.
각주173)
그러나 ‘프네우마’를 ‘원소 불과 원소 공기의 결합물’로 보면서 ‘순환 문제’를 피해갈 수 있는 길로 다음과 같은 방식의 해석도 모색해볼 수 있다. ‘프네우마’를, 우주생성과정에서 ‘원시 불’의 응축과 확산 과정을 통해 생겨난 ‘4원소로서의 원소 불과 원소 공기의 결합물’로 보는데, 이때의 ‘프네우마’는 4원소의 혼합을 통해 만들어진 우주, 즉 우주생성과정에서 두 번째 단계의 우주의 각 사물 구조를 설명하는 능동 근원으로 역할한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의 설명에서는, ‘프네우마’를 ‘원소 불과 원소 공기의 결합물’로 보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프네우마’를 사물의 구조를 설명하는 ‘근원’으로 보는 것을 양립가능하게 한다. 또한 이러한 해석은 근원과 원소의 관계를 우주론적 해석과 우주발생론적 해석으로 나누지 않고 하나의 틀 안에서 설명해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다만, 이 설명에서는 ‘프네우마’가 작동하는 능동 근원의 역할 범위가 4원소의 혼합으로 만들어진 이후의 우주에만 한정되고, SVF 2.300의 ‘근원들은 생겨나지도 소멸되지도 않지만, 원소들은 대화재 시에 소멸해 버린다’라는 구절에 대한 해명에 열려있다.
102.
//스토아에게 있어 ‘작용/피작 용’은 『소피스트』의 플라톤이 말하는 (물체가 배제된) ‘존재’의 기준이 아 니라 ‘존재=물체’의 기준으로, 다시 말해 스토아에서 ‘물체성’은 ‘작용/피작 용’은 이해된다. 이것은 곧 우리가 암암리에 생각하고 있는 ‘물체성’의 의 미, 즉 ‘수동적’ 성격에 한정되어 있는 ‘물체성’에 대한 의미를 재고하게 했다. 스토아는 물체가 수동적 성격의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 성 격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암암리에 가정되고 있는 ‘물체성’의 의미가 스토아의 ‘프네우마’에 의해 어떤 방식으로 확장되고 해명되는지를, 즉 이러한 스 토아식 ‘물체성’의 의미가 ‘프네우마’를 통해, ‘프네우마의 긴장 운동’을 통 해 어떻게 보다 더 잘 설명되고 해명되는지 그 과정을 보려고 한다.//그래서 필자는 우리가 ‘프네우마’ 개념을 통해 접근해야 스토 아 능동 근원의 물체성의 의미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105.
III. 크뤼시포스의 ‘우주적 프네우마’ 개념의 형성 배경
(3) 결론 – 스토아 ‘우주적 프네우마’ 개념의 맹아
지금까지 우리는 ‘철학적 맥락’에서 논의된 ‘프네우마’ 개념의 기원을 추적하면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에 등장하는 ‘프네우마’ 개념 의 변화의 모습과 철학적 함의의 특징, 스토아 우주적 ‘프네우마’ 개념과의 연관 관계를 살펴보았다. 단어 ‘프네우마’가 등장하는 남아있는 다른 초기 그리스어 문헌들과 마찬가지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들에서도 ‘프네우마’가 일상적 의미인 바람, 공기, 숨 등의 의미로 쓰인 용례들이 일 차적으로 많이 보인다. 이 일상적 의미에서 발전된 철학적 함의를 두드러 지게 보이는 주요 단편들은 아낙시메네스 단편 2와 엠페도클레스 단편 136, 크세노파네스 간접전승 단편 1이었다. 그리고 피타고라스 단편 30과 필롤라오스 간접전승 단편 21도 ‘프네우마’와 관련된 철학적 함의를 보여 준다. 이들 단편들에서 나타나는 ‘프네우마’의 의미는 ‘프네우마와 영혼의 동일성’, ‘우주에 스며들어 있는 프네우마’, ‘우주를 하나로 묶는 프네우마’ 의 역할’, ‘프네우마를 통해 우리와 우주의 다른 구성물들이 갖는 유대감’ 등에 대한 사유를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사유에서 우리는 ‘프네 우마’가 세계를 통합하고 유지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우리가 우주의 다른 구성물들뿐만 아니라 우주 자체와 교감하고 있다는 사유를 보여주는 스토아 우주론적 ‘프네우마’ 의미의 초기 모습을 확인한다. 이제 다음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에서 등장하는 ‘프네우마’ 개념과 ‘프네우 마’ 논의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134.
1.1.2.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논의된 ‘프네우마’ 개념
(4) 결론 - 스토아 ‘프네우마’ 개념과 아리스토텔레스 ‘프네우마’ 개념과의 관계
『동물의 생성에 관하여』 역시 ‘프네우마’가 영혼의 도구적 물체라는 사유를, 『동물의 운동에 관하여』와 일관된 관점을 보여준다. (‘도구로서의 프 네우마’는 『숨에 관하여』에서도 나타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일관된 관점이 다.) 『동물의 운동에 관하여』가 동물 운동 과정에서 역할하는 ‘프네우마’의 도구성에 초점을 맞춘 반면, 『동물의 생성에 관하여』는 동물 개체 발생 과 정에서 역할하는 ‘프네우마’의 도구성에 초점을 맞춘 것이 차이일 뿐이다. 도구적이긴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저작들에서는 동물의 자기 운동과 동물 개체 발생에서 물체적 동인이 요청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 바로 ‘프네우마’임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스토아적 사유와의 어떤 공통점이 발견된다. 더군다나 ‘프네우마’를 ‘뜨거운 공기’로 보고 있는 아리스토텔레 스의 사유는 비록 그 사유 맥락이 생물학적, 생리학적 맥락에 한정되어 있 긴 하지만, 스토아식 원소와의 관계, 즉 ‘불적인 힘과 공기적 힘을 함께 간 직하고 있는 것’, ‘뜨거움-차가움의 구성체’로서의 ‘프네우마’에 대한 사유 의 초석 역할을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동물의 운동에 관하여』, 『동물의 생성에 관하여』를 비롯해서 『숨에 관하여』 등에 나타나는324) 아리스토텔레스의 ‘타고 난 프네우마’ 개념은 여전히 생물학적 개념에 머물러 있으며, 그것이 ‘영혼 의 도구’로서만 여겨지고 있다는 점에서, 영혼을 곧 ‘프네우마’라고 보는, 혹은 ‘프네우마’의 한 상태라고 보는 스토아 ‘프네우마’ 개념과는 큰 차이 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크뤼시포스의 ‘프네우마’ 개념은 생물학적, 생리학적 개념이 아니라, 생물을 포함하여 세계의 모든 사물의 구조와 상 태, 운동 등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 ‘프네우마’ 개념 의 몇몇 내용이 스토아 ‘프네우마’ 개념과 공유되는 지점이 있다 하더라도, 그리고 스토아 ‘프네우마’ 개념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일부 사유를 초석으로 삼았다고 해석하더라도, 크뤼시포스가 발전시킨 ‘프네우마’ 개념은 사물과 생명체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와는 전혀 다른 틀을 구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72~173.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동물의 생성에 관하여』에서 ‘프네우마’를 ‘뜨거운 공기(thermos aēr)’라고 표현한다.436) ‘프네우마’를 불-공기의 구성체, 혹은 ‘뜨거움-차가움을 동시에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스토아의 관점 과 유사한 구조의 관점으로 읽힐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 스의 ‘프네우마’ 용법은 우리가 이미 III.1.1.2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생물의 생명 원리로서 생명체 내부에 있다고 여겨지는 ‘타고난 프네우마 (symphyton pneuma)’를 가리킬 때 쓰이는 말이다. 이 ‘타고난 프네우마’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동물의 생성에 관하여』 736a1에서 딱 한 번, ‘뜨거운 공기’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크뤼시포스가 전용한 내용은 ‘프네우 마’가 공기라는 내용이 아니다. 특히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타고난 프네우 마’는 그것이 외부로부터 들어온 공기가 아니라 생명체의 발생 순간부터 이미 생명체 안에 함께 있는 생명과 운동의 원인 물체라는 것인데, 크뤼시 포스의 ‘프네우마’는 단지 한 생물학적 존재를 유지시키는 힘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포함하여 모든 사물을 유지하는 힘에 대한 것이므로 단순 히 외부로부터 들어온 숨(공기)이냐 타고난 숨(공기)이냐의 구별의 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프네우마’는 공기가 아니다. 뜨겁다고 해서 불도 아 니다. 크뤼시포스의 ‘프네우마’는 공기의 차가움과 불의 뜨거움을 다 갖추 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226.
2.1. 제논의 ‘프네우마’ 개념 사용 맥락
SVF 1.135 키티움의 제논은 … 영혼이 따뜻한 ‘프네우마’라고 말 한다. 이것으로 우리가 숨 쉬고(살아있고) 이것에 의해 우리가 움 직여지기 때문이다.394)
SVF 1.136 영혼의 실체에 대해, 플라톤 같은 어떤 사람들은, 그것 이 비물체적이라고 말한 반면, 제논과 그의 추종자들 같은, 어떤 사람들은 물체들이 운동을 일으킨다고 말했다. 이들은 이것(영혼의 실체)이 ‘프네우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395)
SVF 1.140 …클레안테스, 크뤼시포스, 제논은 주장하길, … 영혼은 피로부터 영양섭취 하는데, 영혼의 실체는 ‘프네우마’이다…396)
SVF 1.135, 136, 140 모두 제논이 ‘영혼은 프네우마’라고 말했음을 전한다. 특히 SVF 1.135는 영혼은 ‘따뜻한 프네우마(enthermon pneuma)’라고 규정하는데, 영혼이 따뜻한 ‘프네우마’인 까닭으로 ‘우리가 이 ‘따뜻한 프네 우마’로 숨 쉬며, 이 ‘프네우마’에 의해 움직일 수 있음’을 든다. 즉 우리로 하여금 숨쉬게, 살아있게 하며, 움직일 수 있게 하는 ‘따뜻한 ‘프네우마’는 그것이 곧 ‘영혼’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SVF 1.136 역시 영혼을 ‘프네우마’ 라고 여기는 제논의 생각을 전하는데, 플라톤과 달리 영혼을 ‘물체’라고 생각했다는 내용도 전한다.397) 그밖에 SVF 1.137과 1.138도 유사한 논지를 전달한다. SVF 1.137은 “영혼(anima)은 ‘consitus spiritus’ 이며, 또한 이 ‘consitus spiritus’가 물체(corpus)이니, 영혼이 곧 물체”라고 하는 제논의 논증을 전해준다. SVF 1.138에서는 영혼을 ‘naturalis spiritus’로 표현하다. 전해지는 단편들에서 제논이 ‘프네우마’를 언급하는 대목은 이렇게 영혼의 물체성을 논증하는 맥락에서 영혼이 곧 ‘프네우마’임을 선언하는 내용의 것들이다. SVF 1.127과 128을 비롯해서 1.135-8, 140, 145까지 ‘프네우마’가 출현한 제논의 단편에서는, 우리가 지금 주목하고 있는 우주론적 맥락에서 의 ‘프네우마’, 곧 능동 근원으로서의 ‘프네우마’의 내용이 들어있는 단편들 은 발견되지 않는다.
207~208.
크뤼시포스에서도 인간 영혼은 분명 ‘프네우마’이다. 뿐만 아니라 세계영혼도 ‘프네우마’이다. 생물학적인 맥락에서 심적 기능을 영혼으로서의 ‘프네우마’에 할당하고, 영혼-‘프네우마’를 물체라고 보는 것은 제논, 클레안테스, 그리고 크뤼시포스에게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사유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물학적인 맥락에서 인간 영혼에 대한 사유에 있어, 제논에서 시작해서 클레안테스에게로 이어진 관점을 크뤼시포스가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것 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검토한 바에 따르면, 생물학적인 맥 락을 넘어서, 즉 동물과 우리 인간 영혼의 능력에 관련한 논의 맥락을 넘 어서, 각 개별 사물과 우주의 구조를 설명하는 맥락에서의 ‘프네우마’ 논의 는 제논과 클레안테스에서는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즉 능동 근원으로서 역할하는 우주론적 ‘프네우마’ 개념에 대한 사유는 현존하는 단편에 근거 한 이들의 논의에서는 중심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제 이러한 생물학적인 맥락에서는 물론이고 우주론적인 맥락으로 개념의 확장을 보이는 크뤼시 포스의 ‘프네우마’ 논의를 IV장에서 세밀하게 검토하도록 하겠다. 이러한 검토 속에서, 크뤼시포스의 ‘프네우마’ 개념의 확장이, 제논과 클레안테스 에서는 아직 확립되지 않은, 스토아 자연학의 체계를 공고히 하는 발판이 되고 있음이 함께 드러날 것이다.
213~214.
IV. 크뤼시포스의 자연학 체계에서 ‘프네우마’의 성격과 기능
따라서 이 장의 논의는 이 논문의 핵심적 관심사인 크뤼시포스의 ‘프네우마’ 이론의 내용과 그 위상에 대한 고찰에 집중될 것이다. 1장에서 우리 는 우선 크뤼시포스가 도입한 ‘프네우마’ 개념의 특징을 검토할 것인데, 특 히 천착해서 살펴볼 것이 ‘프네우마 운동(kinēsis pneumatikē)’이라 일컬어 지는 ‘토노스(tonos)’, 즉 ‘긴장 운동(tonikē kinēsis)’414)이다.
216.
1.2. ‘토노스(tonos)’와 긴장 운동
그렇다면 크뤼시포스가 불의 힘과 공기의 힘, 즉 뜨거움과 차가움을 동시에 함께 갖추고 있는 물체적 존재로서 ‘프네우마’에게 구현하려고 한 속 성은 무엇인가? 다음 알렉산드로스의 단편, SVF 2.442를 보자.
SVF 2.442 [스토아 비판 논변] (1) 더 나아가, 만일 불과 공기로 이루어진 ‘프네우마’가 모든 물체들에, 그것들 모두와 뒤섞임으로 써, 그리고 물체들 각각의 존재(실체)가 이 ‘프네우마’에 의존함으 로써, 두루 퍼져있다면, 어떻게 여전히 어떤 단순 물체가 있을 수 있겠는가?......(2) 또한 동시에 반대 방향을 향하는 ‘프네우마’ 운동 (hē eis to enantion hama kinēsis autou)이란 무엇인가? 이 운동 에 의거하여 이것(‘프네우마’)은 자신이 들어 있는 물체들을 결속 시키는데(synechein) 말이다. 그들이 말하길, 이것은 그 자신으로 부터 움직이면서 동시에 그 자신 쪽으로 움직이는 ‘프네우 마’(pneuma kinoumenon hama ex hautou te kai eis hauto)이기 때문이다.437)
//이렇게 물체에 두루 퍼져있는 ‘프네 우마’는 자신이 들어있는 물체를 결속시킨다(synechein).439) 그리고 이때 그 결속이 이루어지는 방식은 ‘동시에 반대 방향을 향하는 프네우마의 운 동(hē eis to enantion hama kinēsis autou)’에 의해서이다. ‘프네우마’는 자신의 운동 방식인 이 동시적 반대 방향의 운동을 통해 자신이 들어있는 모든 사물들을 결속시킨다. 스토아는 또한 ‘동시에 반대 방향을 향하는 프네우마의 운동’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움직이면서 동시에 그 자신 쪽으로 움직이는 운동’이라고 말한다. ‘동시에 반대 방향을 향하는 프네우마의 운 동’, 다시 말해 ‘자기 자신으로부터 움직이면서 동시에 그 자신 쪽으로 움 직이는 이러한 프네우마의 운동’은 ‘프네우마’로 하여금 그것이 들어있는 모든 물체들을 결속시키게 한다.440)
228.
SVF 2.441 또한 ‘프네우마’의 긴장(팽팽함: tonos)이란 것은 무엇이 란 말인가? 그것에 의해 (물체들이) 함께 묶여져서(syndoumena) 자신의 부분들과 관련해서도 결속성(연속성, 응집성: synecheia)을 갖고 곁에 있는 것들과도 연접하니(synēptai) 말이다.443)
229
단편에서 알렉산드로스는, 비판적 논조이긴 하지만, 스토아의 ‘프네우마 토노스(ho tonos tou pneumatos)’444)개념의 의미를 전달해주고 있다. 알렉산드로스가 전달하는 스토아 ‘프네우마의 토노스’ 개념은 다음과 같다: ‘프네우마의 토노스’에 의해 물체들이 묶여서(syndoumena) 각 물체들은 자신의 부분들과도 결속상태(응집상태: synecheia)를 유지하며 곁에 있는 물체들과도 연접된다(연결된다: synēptai).’ 전달되는 사항은 크게 두 가지 로 정리된다. ‘프네우마의 토노스’는 물체들을 하나로 묶는데, 그럼으로써 첫째, 각 물체들은 자신의 부분들과 연속성(응집성, 결속성)을 가지며, 둘 째, 또한 물체들은 자신의 주변에 있는 물체들과 연접된다(연결된다). 우리 가 지금 SVF 2.442와 관련하여 주목할 부분은 첫 번째 사항이다.445) 이 단편이 전달해 주는 첫 번째 사항은, ‘프네우마 토노스’의 기능이 하나의 물 체가 흩어지지 않고 묶여진 상태로 있게 한다는 것, 즉 각 물체들로 하여 금 자신의 부분들과의 연속성(응집성, 결속성)을 유지하게 함으로써 결속 된 상태에 있게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물체인 하나의 사물이 흩어지지 않고 묶여진 상태로 있는 것은, 즉 결속되어 있는 것은 ‘프네우마의 토노 스’ 덕분이다. 스토아는 ‘프네우마의 토노스’라는 개념을 통해 사물의 결속 상태를 설명하고 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러한 스토아 ‘프네우마’의 결속의 힘을 ‘프네우마의 팽팽함(프네우마의 토노스: ho tonos tou pneumatos)’이 라고 전달하고 있다.
우리는 알렉산드로스의 단편, SVF 2.442를 통해 스토아가, 불과 공기로 이루어진 ‘프네우마’가 모든 물체(물체인 모든 사물)에 스며들어 있어서, 그것이 들어있는 물체를 결속시키는데, 이때 이 물체를 결속시키는 ‘프네 우마’ 힘의 내용이 ‘동시에 반대 방향을 향하는 프네우마의 운동’이라고 설 명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이제 SVF 2.441은 이러한 ‘프네우마’의 결속의 힘의 원천이 ‘프네우마의 토노스’라는 것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 물체를 결속시키는 힘인 ‘동시에 반대 방향을 향하는 프네우마의 운동 상태’가 바 로 ‘프네우마의 토노스(ho tonos tou pneumatos)’이다. ‘프네우마 운동 (kinēsis pneumatikē)’은 곧 ‘긴장 운동(tonikē kinēsis)’이다. 이제 우리는 SVF 2.441과 2.442를 통해 ‘프네우마의 토노스’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물체를 결속시키는 힘인 ‘프네우마의 토노스’는 ‘동시에 반대 방향을 향하는 프네우마의 운동 성질, 혹은 그 힘’이며, ‘프네우마의 긴장 운동’은 ‘동시에 반대 방향을 향하는 프네우마의 운동’이다. 그리고 이때 ‘동시에 반대 방향을 향하는 운동’의 의미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움직이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 쪽으로 움직이는 운동’이다.
각주444)
‘프네우마의 토노스(ho tonos tou pneumatos)’는 우리말로 번역하기 어려운 말 중의 하나이다. 그리스어 ‘tonos’는 ‘잡아당기다’, ‘팽팽하게 당기다’, ‘늘이다’, ‘늘어나다’, ‘뻗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동사 ‘teinein’에서 온 명사이다. ‘토노스(tonos)’의 LSJ 사전의 일차적 의미는, ‘어떤 것이 잡아당겨지거나 늘여지게 하는 것’, 혹은 ‘자기 자신을 잡아당기거나 늘어나게 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그것은 ‘묶는 끈’(cord, brace, band)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며, 동물 신체와 관련해서는 ‘힘줄’(sinew, tendon)을 가리킬 때도 쓰인다. 두 번째는 ‘잡아당겨짐’, ‘늘어남’, ‘팽팽함’, 혹은 ‘그러한 상태’, 혹은 ‘그러한 힘’을 가리킬 때도 쓰인다(tension). 그래서 소리나 음의 높이나 강도를 가리킬 때도 쓰이고 정신이나 신체의 격렬한 활동이나 그 힘을 가리킬 때도 쓰인다. LSJ는 ‘tonos’의 스토아식 용법을 ‘tension’, ‘force’라고 풀어놓았다. 이러한 의미에 기초하여 스토아의 ‘토노스’를 우리말로 ‘팽팽함(팽팽한 상태, 팽팽하게 하는 힘)’, 또는 ‘당김(당기는 성질, 당겨진 상태, 당기는 힘)’, ‘긴장(긴장성, 긴장 상태, (긴)장력)’으로도 옮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러한 우리말 번역어가 그리스어 ‘tonos’의 원래 의미를 다 담기에 여러모로 부족하기 때문에 한 가지 번역어로 결정하여 옮기기에는 쉽지 않다. 따라서 필자는 ‘tonos’의 우리말 번역어를 맥락에 따라 선별 사용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그냥 ‘토노스’라고도 옮겼다(영어권의 번역어도 같은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에 연구자에 따라서는 그냥 ‘tonos’로 음차하여 옮기기도 한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프네우마의 토노스’를 ‘프네우마의 긴장’, 혹은 ‘프네우마의 팽팽함’, ‘프네우마의 긴장력’ 정도로 옮기도록 하겠다.
Hahm(1976, 167-172쪽)은 ‘teinein(당기다)’ 동사에서 나온 ‘tonos’가 ‘팽팽하게 당겨진 줄’과 연관이 있으며, 특히 이 단어는 ‘어떤 것을 묶기 위해 당겨진 줄’에 대해서도 쓰인다고 말한다. 한편 그는 tonoi는 배를 결합시킬 때 사용되는 로프 장치를 가리키는 기술용어라고 지적한다. 또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당대의 의사들의 용법을 통해 ‘tonoi’는 특히 ‘neura’가 생물체의 신체를 결합시키는 묶는 끈의 역할로 강조될 때 함께 쓰였음을 지적한다. 따라서 Hahm은 스토아의 ‘토노스’ 개념이 담고 있는 첫째, ‘결합’의 의미는 애초 사물을 묶기 위해 당겨진 줄, 몸을 하나로 묶는 힘줄(neura)에서 유래했으며, 둘째, 운동 감각 전달 개념의 의미는 기원전 3세기 의학자 Herophilius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왔다고 본다.
한편 스토아의 ‘토노스(tonos)’라는 단어는 크뤼시포스보다는 클레안테스에서 먼저 출현한다. Sandbach(1989, 76쪽)와 Hahm(1976, 153쪽)의 언급처럼, 이 단어는 클레안테스가 처음 도입했을 것 같다. 인간의 근육이나 리라의 현과 관련된 팽팽함이 묘사된다. Plutarch, Moralia 1034D에서 ‘plēgē pyros(a stroke of fire)’라고 묘사되기도 한다.
229~230.
크뤼시포스가 ‘프네우마’의 긴장 운동, 즉 양 방향 운동의 형태를 어떻게 보았는지 우리가 그 원형을 복원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 형태를 추적하기 에는 남아있는 자료가 너무 빈약하다. 연구자들은448) ‘토노스’, 긴장 운동 의 형태가 무엇인지에 대해 여러 해석을 시도하는데, 지금 갈레노스가 제 시하는 두 가지 방식처럼, 크게 두 가지 방향의 해석을 내놓는다. 첫째, 중 심을 향한 운동과 바깥쪽을 향한 운동이 아주 빠르게 번갈아 일어난다는 해석과 둘째, 이 반대방향으로의 운동이 동시적으로 일어난다는 해석이다. 첫 번째 방식은 일종의 진동 운동 방식이며, 두 번째 방식은 원심력과 구 심력의 균형 상태로 해석되는 운동 방식이다. Sambursky(1959, 29쪽)는 첫 번째 방식인 진동 운동을 지지하면서, 현대 물리학적 용어로 파동 전파 와의 연결을 시도한다. 매우 매력적인 제안이긴 하지만, 교체운동을 바탕 으로 하는 진동 운동 방식은 알렉산드로스의 단편에 정의된 양방향 운동 의 ‘동시성’에 의해 지지되지 못하는 난점이 있다.449) 그보다는 원심력과 구심력의 균형 상태라는 해석이 동시에 반대 방향을 향하는 운동이라는 정의에 더 부합되는 설명이긴 하지만, 남아 있는 빈약한 기록을 통해 그 형태를 정확히 해석하기에는 여전히 충분치 않은 면이 있다. ‘토노스’가 이 루는 힘의 균형 상태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에 대해서는 갈레노스 를 따라 우리 역시 여기에서 논의를 줄이도록 하겠다.450)
234.
1.3. 긴장 운동의 역할
네메시우스는 스토아의 긴장 운동, 즉 안팎으로 동시에 움직이는 운동이 야기하는 내용을 전달하고 있다. 스토아는 물체와 관련하여 긴장 운동, 즉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는 동시에 반대 방향을 향하는 운동 중, 바깥쪽을 향하는 운동은 ‘크기(megethos)’와 ‘성질(poiotēs)’을 낳고, 안쪽을 향하는 운동은 ‘하나됨(단일성, 통일성: henōsis)’과 ‘실체(무엇임: ousia)’를 낳는다 고 말한다.
236.
앞에서 검토된 능동 근원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그것이 그 자체로는 운동성도 없고 형태도 없는 질료에게 성질을 부여한 다는 것이었다.464) 질료에 퍼져있는 ‘프네우마’가 역시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는데, 크뤼시포스는 사물의 성질 구현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지금 이 ‘프네우마의 긴장 운동’에 의거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 크뤼시포스는 ‘프네우마’의 ‘토노스’를 통해 사물의 자기 동일성, 안정성, 단일성을 설명한다. 우리는 이미 여러 문헌들에서 ‘프네우마’가 질료 전체에 퍼져 그것을 하나로 통일하며, 이 ‘프네우마’에 의해 세계가 결속되고 고정되며, 자기 자신과 공감한다는 표현을 보았다.465) 능동 근원 이 신, 불, 열, 로고스로 표현될 때는 사물의 이러한 자기 동일성, 안정성, 단일성의 작동 원리가 제시되지 않는다. ‘프네우마’를 능동 근원으로 수용 하면서, 크뤼시포스는 ‘프네우마의 긴장 운동’에 의거하여 사물의 자기 동 일성이자 안정성, 단일성을 설명함으로써, 하나의 사물이 자기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메커니즘에 대하여 말할 수 있게 된다.466) 이렇게 크뤼시포스는 ‘프네우마’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물체인 능동 근원의 역할을 스토아 자연 학 체계에 보다 정합적으로 구현할 수 있었고, 이 구현을 ‘프네우마의 긴 장 운동’에 의해 확보했던 것이다. 그것이 ‘프네우마’가 ‘불-공기의 혼합물’, 즉 ‘불적 힘과 공기적 힘을 동시에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상정되어야 했 던 이유였다. ‘불적 힘과 공기적 힘을 동시에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상정 되어야 ‘프네우마 긴장 운동’의 ‘양 방향의 운동’이 설명될 수 있으며, ‘성 질 구현’과 ‘실체성’이라는 사물 구조의 두 가지 면이 설명되기 때문이다.
242~243.
2. ‘프네우마’의 네 가지(혹은 세 가지) 상태
2.1. 단편들의 검토
이제 이렇게 다양한 힘의 ‘프네우마’를 소개하고 나서, 갈레노스의 단편SVF 2.716②에서처럼, 필론은 세 가지 ‘프네우마’의 내용을 설명한다. 하지 만 필론의 단편에는 갈레노스의 단편 SVF 2.716②에는 포함되지 않은 내 용이 있다. 필론이 상술하는, 첫째, ‘헥시스’는 생명(영혼) 없는 돌이나 통 나무에 ‘또한’ 공유된다. 그리고 우리 몸을 구성하는 것들 중 돌과 같은 무 기물과 유사한 것인 우리 몸의 뼈 역시 이런 헥시스를 공유한다. 둘째, ‘자 연’은 식물에도 ‘또한’ 뻗어있는데, 역시 우리 몸의 구성물 중에서, 이 식물과 유사한 것들인 손톱과 머리카락에도 뻗어있다. 그리고 ‘자연’은 현재 ‘움직이는 헥시스(hexis ēdē kinoumenē)’이다. 즉 ‘자연’은 ‘헥시스’의 확장 된 형태이다. ‘자연’은 ‘헥시스’인데 현재 ‘움직이고 있는 헥시스’이다. 셋 째, ‘영혼’은 이러한 ‘자연’에 ‘표상’과 ‘충동’이 더해진다. 즉 ‘영혼’은 ‘자 연’의 확장된 형태이고 ‘헥시스’의 보다 더 확장된 형태이다. ‘영혼’은 ‘헥 시스’이기도 하고 ‘자연’이기도 한데, ‘현재 움직이는 헥시스’를 넘어서 ‘표 상과 충동이 더해진 자연’이다. 그런데 이러한 ‘영혼’은 비이성적인 것들에 도 공유된다. 다시 말해, ‘영혼’은 이성적인 것들에도 공유되며, 비이성적인 것들에도 공유된다. 그렇다면, 이 단편에 마저 기술되고 있지 않지만, 필론 이 지금 말하고 있는 ‘이성적-지성적 힘(logikē-dianoēdikē dynamis)’, 혹 은 ‘로고스-사유(logos-dianoia)’는 이성적인 것들에만 공유되는 것이다. 그 래서 최종적으로는 플루타르코스의 단편 SVF 2.460처럼 이 필론의 단편 SVF 2.458①은 네 가지 종류(혹은 상태)의 ‘프네우마’를 보여준다.
249.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전달하는 크뤼시포스 이후의 스토아(포세이도니오스, 튀리오스의 안티파트로스)는 우주가 지성(nous)과 섭리(pronoia) 로 다스려진다고 본다. 그들에 따르면, 마치 우리 안에 영혼이 퍼져 있는 것처럼 우주의 모든 부분에 지성이 퍼져 있기 때문이다. 비유는 우주 안 지성의 역할이 우리 안의 영혼의 역할과 같음을 말해준다. 영혼이 우리 안 에 펴져 있고 우리를 다스리는 것처럼 우주의 지성은 우주 전체와 우주의 모든 부분들에 펴져 있고 우주를 다스린다.
앞서 우리는 필론의 단편 SVF 2.458①에서 지성(nous)이 ‘프네우마’의 다른 이름으로 쓰인 것을 보았다.483) 이제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이 단편 SVF 2.634에서는 ‘프네우마’가 그것이 지나가는 물체에 따라, 혹은 그것이 구조화하는 물체의 상태에 따라, 혹은 그것이 각 물체를 어떻게 구조화하느냐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지성(nous)은 ‘프네우마’가 영혼의 주도부(헤게모니콘)를 지나갈 때, 다시 말해 영혼의 주도부(헤게모니콘)를 구조화할 때의 물체 상태에 대한 이름이다. 단편은 지성이, 혹은 ‘프네우마’가 우주의 부분들이나 사물의 부분들, 그리고 우리 몸의 부분들을 지나갈 때 그것의 ‘정도’가 다르다고 말한다. 어떤 부분들에 는 ‘좀 더 많이’, 어떤 부분들에는 ‘보다 적게’ 퍼져있다. 그리고 그 퍼져있 는 ‘정도에 따라’ 퍼져있는 지성(nous), 즉 퍼져있는 ‘프네우마’의 이름이 다르다. 뼈와 힘줄 같은 부분을 지나갈 때는 ‘헥시스’로 지나가고, 영혼의 주도부 같은 부분들은 ‘지성’으로서 지나간다. 다시 말해 돌, 목재와 같은 무기물, 우리 몸의 경우, 뼈, 힘줄 같은 것을 유지하는 힘은 ‘헥시스’이며, 이성적 존재에게 이성적 사유를 할 수 있게 하는 힘은 ‘지성(누스)’이다. (그리고 이 단편에는 생략되어 있으나, 식물이나 머리카락, 손톱 같은 부분 들을 자라게 하는 힘은 ‘자연’이며, 동물로 하여금 움직이게 하고 감각할 수 있게 하는 힘은 ‘영혼’이다.) 이것은 모두 ‘프네우마’(혹은 지성)의 다른 이름이며, 퍼져있는 ‘프네우마’의 정도(많고 적음)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릴 뿐이다. 따라서 헥시스, 자연, 영혼, 이성적 영혼은 ‘프네우마’의 다른 종류라기보다는 그것의 많고 적은 정도에 따른 ‘프네우마’ 상태에 대한 다
253~254.
2.2. ‘프네우마’의 상태에 따른 사물의 상태
SVF 2.716에서 갈레노스가 전달하는 스토아의 세 가지 ‘프네우마’는 다른 단편들에서도 모두 공통적으로 언급된다. 따라서 갈레노스가 전달하는 ‘프네우마’ 세 가지에다 나머지 다른 단편들에서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형태의 ‘프네우마’를 합쳐서 ‘프네우마’의 상태(혹은 종류)를 정리한다면, ‘프 네우마’의 형태는 다음과 같이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정리될 수 있다. 먼 저 첫 번째 방식은 다음과 같다
① ‘응집적 프네우마’, 혹은 ‘헥시스(hektikon pneuma; hexis)’
② ‘자연적 프네우마’, 혹은 ‘자연(physikon pneuma; physis)’
③ ‘영혼적 프네우마’, 혹은 ‘영혼(psychikon pneuma; psychē)’
③-1 ‘비이성적 영혼의 프네우마’, 혹은 ‘비이성적 영혼 (alogos psychē)’
③-2 ‘이성적 영혼의 프네우마’, 혹은 ‘이성적 영혼(logikē psychē)’
255.
① ‘응집적 프네우마’, 혹은 ‘헥시스(hektikon pneuma; hexis)’
② ‘자연적 프네우마’, 혹은 ‘자연(physikon pneuma; physis)’
③ ‘비이성적 영혼의 프네우마’, 혹은 ‘비이성적 영혼(alogos psychē)’
④ ‘이성적 영혼의 프네우마’, 혹은 ‘이성적 영혼(logikē psychē)’
256.
2.3. 네 가지 ‘프네우마’ 간 차이의 원인
그렇다면 이렇게 네 가지 사물의 상태를 결정하는 네 가지 ‘프네우마’인 헥시스, 자연, (비이성적) 영혼, 이성적 영혼의 차이는 어떻게 생겨나는가? 연구자들은 네 가지 ‘프네우마’ 구분의 결정을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설 명한다. 첫째, Sambursky와 Currie는 ‘프네우마’의 구성 성분인 ‘불과 공기의 비율’이 ‘프네우마’의 상태(혹은 종류)를 결정한다고 말한다. 이런 방 식의 설명은 갈레노스 단편 SVF 2.787499)을 전거로 삼는다. 둘째, Hahm 과 Sellars 등은 ‘‘프네우마’ 혹은 ‘프네우마’ 토노스의 정도 차이’로 설명한 다. 이 설명은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단편 SVF 2.634500)을 전거로 삼는 다. 이 장에서는 각 연구자들의 해석을 점검하고 ‘프네우마’ 상태의 차이를 설명하는데 있어 타당한 설명 방식을 모색해보도록 하겠다.
260.
먼저 각 ‘프네우마’의 차이를 ‘불과 공기의 비율’이 결정한다고 보는 견해들을 살펴보도록 하자.//다시 말해 ‘프네우마’의 두 가지 구성요소인 불과 공기, 혹은 불의 힘과 공기의 힘의 비율에 따라 ‘프네우마’ 간의 차이가 결정된다. 단 편은 ‘자연’이 ‘더 차갑고’ ‘영혼’이 ‘더 뜨겁다’고 묘사한다. 즉 ‘자연’에서 는 불보다 공기의 비율이 더 높고, ‘영혼’에서는 공기보다 불의 비율이 더 높다.//
261.
이 단편에서는 ‘헥시스’에 대한 언급은 누락되어 있지만 ‘자연’과 ‘영혼’의 차이가 어떻게 결정되는지를 설명함으로써 ‘프네우마’ 상태들 간의 차 이가 결정되는 구조를 알려준다. ‘자연’과 ‘영혼’은 둘 다 일종의 ‘프네우 마’로, 양자 간의 차이는, ‘자연의 프네우마’가 ‘보다 더 습하고 더 차가운’ 데 반해, ‘영혼의 프네우마’는 ‘보다 더 건조하고 더 뜨겁다’라는 데서 구 별된다. 그리고 ‘영혼의 프네우마’의 특성은 ‘공기적이고 불적인 실체의 혼 합 비(symmetria tēs aērōdous te kai pyrōdous ousias)’에 의해 결정된다 고 전달된다. 다시 말해 ‘프네우마’의 두 가지 구성요소인 불과 공기, 혹은 불의 힘과 공기의 힘의 비율에 따라 ‘프네우마’ 간의 차이가 결정된다. 단 편은 ‘자연’이 ‘더 차갑고’ ‘영혼’이 ‘더 뜨겁다’고 묘사한다. 즉 ‘자연’에서 는 불보다 공기의 비율이 더 높고, ‘영혼’에서는 공기보다 불의 비율이 더 높다. 그렇다면, 여기서 직접적으로 기술되진 않았지만, 갈레노스 단편은,헥시스-자연-영혼의 ‘프네우마’의 차이가, ‘프네우마’의 두 구성요소인 불과 공기 중, ‘헥시스’보다는 ‘자연’에서, ‘자연’보다는 ‘영혼’에서, 불의 비율이 높아지고 공기의 비율이 낮아진다는 것을 알려준다. ‘영혼’이 불의 비율이 가장 높고, ‘헥시스’가 공기의 비율이 가장 높다.502) Sambursky는 이러한 갈레노스 단편을 전거로 하여 ‘동물계와 식물계에 대한 구별의 원리가 두 가지 구성성분의 혼합비에 따른 프네우마의 구성적 본성에 의해 결정된다’ 고 설명한다. 뿐만 아니라 ‘각 사물의 물리적 속성들은 특별한 프네우마의 종류에 의해 한정되는데 이는 불과 공기의 일정한 혼합에 따라 특성이 결 정된다’고 해석한다(11쪽). Currie 역시 ‘구성요소의 비율이 프네우마들 간 차이를 결정한다’(56쪽)고 말하고 있는데 Sambursky와는 그 해석이 좀 다 르다. 그는 갈레노스 단편의 구절 ‘자연의 프네우마는 보다 더 습하고 차 가운 반면, 영혼의 프네우마는 보다 더 건조하고 뜨겁다’라는 표현에 의거 하여, 스토아가 불, 공기, 흙, 물, 4원소에 할당한 성질인 온, 냉, 건, 습의 혼합 비율에 기초하여 ‘자연의 프네우마’와 ‘영혼의 프네우마’를 구분했다 고 해석한다. 하지만 갈레노스의 해당 구절이 문자 그대로 보자면 그렇게 해석될 여지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일단은 ‘프네우마’의 구성요소를 불과 공 기로 보고 있는 스토아 상위의 전제를 생각할 때, 4원소 모두의 혼합 비율 에 의해 ‘프네우마’ 간의 차이가 결정된다는 Currie의 해석은 다소 무리가 있다고 여겨진다.503)
이제 자연 사물의 차이를 그 사물에 퍼져있는 ‘프네우마’의 정도 차로 해석하는 연구자들의 설명을 들어보자. 우리는 앞서 2.1장에서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단편 SVF 2.634의,
… 그것은 어떤 부분들에는 좀 더 많이, 어떤 부분들에는 보다 적 게 퍼져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뼈와 힘줄 같은 어떤 부분들에는 응집상태(hexis)로서 지나가는 반면, 영혼의 주도부(hegemonikon)같은 어떤 부분들에는 지성(nous)으로서 지나가기 때문이다.…
262~263.
//Hahm(163-4쪽)의 경우는 별도의 해석 없이 문자 그대로 ‘프네우마가 정도를 달리하여’ 퍼져있다고 이해한다. ‘프네우마의 많고 적음에 따라’ ‘프네우마’는 ‘헥시스’ 상태가 되기도 하고, ‘자연’ 상태가 되기도 하고, ‘영 혼’ 상태가 되기도 하고, ‘지성-로고스’ 상태가 되기도 한다. 반면 Sellars(91쪽)는 ‘프네우마의 토노스 정도에 따라’ 자연 사물이 형성되는 것 으로 해석한다. ‘세 가지 프네우마는 각각 다른 수준의 토노스를 반영’하 고, 이 ‘세 가지 수준의 프네우마는 각각 세 가지 유형의 자연물의 차이를 결정’한다. 그래서 세 가지 유형의 자연물들 간의 차이는 순전히 그것들의 ‘프네우마’에서 다른 수준의 토노스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프 네우마’들 간의 차이는 종류의 차이라기보다는 정도의 차이라고 Sellars는 말한다.
갈레노스의 단편 SVF 2.787과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단편 SVF 2.634를 준거로 ‘프네우마’들 간의 차이의 메커니즘을 각각 ‘프네우마의 두 구성성분인 불과 공기의 비율의 차이’로 설명하는 Sambursky와 ‘프네우마 (토노스의) 정도 차이’로 설명하는 Hahm, Sellars는 언뜻 이 메커니즘의 구조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프네우마’ 구성 과 기능에 관한 Sedley(1999)의 해석은 이들의 해석이 서로 만날 수 있는 지점을 제공해주는 듯하다. Sedley는 ‘프네우마의 불적 구성 요소는 뜨겁 고 희박한 반면 프네우마의 공기적 구성 요소가 상대적으로 차갑고 농후 하기 때문에, 프네우마는 그 구성 요소의 혼합(비)에 따라 다양한 정도의 희박한 상태로 있다’(389쪽)고 해석한다. 즉 ‘프네우마’의 가장 희박한 상태 에서 ‘프네우마’는 ‘영혼’이다.505) 이러한 Sedley의 해석은, 세 가지(혹은 네 가지) 상태의506) ‘프네우마’의 차이를 ‘더 많거나’, ‘더 적게’ 퍼져있는 ‘프네우마’의 상태로 표현하는, 즉 ‘프네우마의 퍼져있는 정도로’ ‘프네우마 간의 차이’를 설명하는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전언을, ‘불과 공기의 비율에 따른’ ‘프네우마의 차이’로 설명하는 갈레노스의 전언과의 연관성에 다리를 놓아준다. ‘프네우마’의 두 구성 요소 불과 공기는 일차적으로는 각 각 뜨거움과 차가움의 힘이면서 또한 희박과 농후의 힘(혹은 팽창과 수축 의 힘)이기도 하다. 따라서 공기보다 불의 비율이 높은 ‘영혼’은 보다 뜨거우며, 세 가지 ‘프네우마’ 상태 중 가장 희박한 상태에 있다. 다시 말해 ‘프네우마’가 가장 엷게 퍼져있는 상태이다. 이것이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 스 단편에서는 ‘프네우마’가 ‘보다 적게(hētton)’ 퍼져 있다고 표현되고 있 는 것이다. 이렇게 ‘더 적게, 더 많이’라는 ‘프네우마의 정도 차’는 ‘불과 공기의 비율에 따른’ ‘희박과 농후의 정도 차’로 해석될 수 있다.507)
264.
이렇게 생명이 있는 것, 즉 생물이 주제적 대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에 관하여』에서는 살아있는 것, 곧 ‘영혼을 갖는 것’의 단계가 식물, 비 이성적 동물, 이성적 동물의 세 단계로 설정되고 이들에게서 발휘되는 영 혼의 기능이 설명된다. 반면 스토아의 ‘네 가지 프네우마 상태에 따른 네 가지 사물의 상태 논의’를 내용으로 하는 스토아 단편들에서는 아리스토텔 레스의 ‘영혼’이라는 용어가 ‘프네우마라는 개념으로 대체되어 있다. 그리 고 대체된 개념인 ’영혼-프네우마’가 스며들어 있는 존재가 네 단계로 확 장되어 설명된다. 스토아의 이 단편들에서 영혼은 보다 좁은 개념이고 이 스토아식 좁은 의미의 영혼은 동물 이상의 단계를 설명하는 장치이며, 그 것의 기능은 감각과 표상, 충동, 운동으로 설명된다.514)
268.
//이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을 스토아의 ‘프네우마’로 대체해서 읽으면, 아리스토텔레스의 ‘①영양섭취능력, ②감각 능력-욕구능력-장소운동능력, ③사고능력’은 각각 스토아 ‘프네우마’의 ‘① 자연(성장과 양육능력), ②영혼(감각능력, 운동능력), ③이성적 영혼(사고능 력)’으로 대체되고, 그 능력을 갖추고 있는 생물은 각각 ‘①식물, ②(비이성 적) 동물, ③이성적 동물’로 대응된다.//그러나 유사한 설명 구조에도 불구하고 분명 양자 간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스토아는 생물체의 차이를 설명하는 데 동원되었던 ‘영혼’의 차이를 ‘프네우마’의 차이로 환원함으로써, 즉 영혼의 유개념으로 ‘프네우마’를 도 입합으로써, 유기체 간의 차이는 물론 유기체를 넘어 무기체까지 포함하는 우주 전체의 구조 속에서 통일적이며 체계적인 방식으로 설명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269.
//다시 말해 스토아는 식물-동물-인간에만 국 한하여 ‘영혼’의 능력을 설명하지 않고, 대체된 개념 ‘프네우마를 통하여, 그리고 ‘헥시스’라는 개념을 통하여, 이제 ‘프네우마’의 능력을 생물(식물동물-인간)을 포함 무생물에게까지 확장하여 씀으로써, 영혼을 가진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 있던 존재의 격벽을 하나의 확장된 체계 속에서 설명하는 것이다. ‘헥시스’는 생물을 포함하여 모든 무생물, 사실상 존재하 는 모든 자연 사물의 존재 구조를 설명하는 가장 기초적인 힘이다. 그리고 무생물을 포함하고 생명체도 포함하는 ‘헥시스’에 대한 논의는 스토아적 사유를 가장 잘 보여주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270.
3.1.2. 발생론적 설명
Hierocles, 1.5-33, 4.38-53 ⑴ 씨(sperma)가 적절한 시기에 자궁 안에 들어가고 동시에 건강한 상태에 있는 그 저장소에 의해 꽉 붙잡혀 있게 되면, 그 씨는 그때까지처럼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 고, 각성되어 자신의 고유한 활동을 시작한다. 또한 그것은 수태하 고 있는 몸으로부터 질료를 끌어와서 어떤 거역할 수 없는 배열에 따라 태아의 형태를 만들어내는데, 끝에 닿을 때 까지, 그 제작물 (태아)로 하여금 탄생이 준비되도록 할 때까지 그렇게 한다. ⑵ 그렇지만 그 모든 시간동안 -나는 착상에서 출산까지를 말하고 있다 - 그것은 씨로부터 변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자연(physis)’527)으로, 즉 ‘프네우마’로 남아 있다. 그런데 이 ‘자연’은 초반에는 보다 농후한 ‘프네우마’이며, ‘영혼’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그러나 나중에 탄생에 거의 임박했을 때에는, 희박해져 서(미세해져서), ··· 그 때문에 그것이 밖으로 나올 때에는, 주변 공 기에 의해 강하게 되어 ‘영혼’으로 바뀔 정도로, 주변 공기에 충분히 알맞게 된다. ⑶ 이 변화를 향한 준비 때문에 돌 안에 있는 ‘프 네우마’가 타격에 의해 빨리 불붙는 것처럼, 바로 그런 식으로 이 제 원숙한 태아는 태어나자마자, ‘자연’도 주위환경에 접하게 될 때 주저하지 않고 ‘영혼’으로 바뀐다. 그렇게 자궁에서 나온 것은 모두 그 즉시 동물이다. ···· ⑷ 여기로부터 모든 동물이 비-동물과 두 가지 차이점을 지니고 있음에, 즉 지각과 충동을 지니고 있음 에 주위를 기울여야 한다.···· ⑸ 동물은 두 가지 것, 즉 영혼과 육 체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들은 둘 다 만져질 수 있고 서로 때릴 수 있고 저항을 받는 상태에 있으며, 게다가 그것들은 완전히 뒤 섞여 있다. 그리고 그것들 중 하나528)는 지각 능력인데, 동일한 것 이 우리가 지적했던 방식으로 움직여진다. 그런 까닭에 동물이 끊 임없이 자기 자신을 지각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⑹ 왜냐하면 영혼 은 몸의 모든 부분들과 뒤섞여 있는 까닭에, 이완과 함께 바깥쪽 으로 뻗어나가서 몸의 모든 부분들과 부딪히고(때리고), 또한 [몸 의 모든 부분들에] 부딪히고 나서는 되부딪혀지기 때문이다. ⑺ 왜 냐하면 몸도 역시 영혼과 마찬가지로 저항력이 있고, 그래서 동시 에 같이 부딪힐(때릴) 수 있고 동시에 부딪힐 수 있는(때림을 당하 는) 그런 경험이 완성된다. ⑻ 또한 가장 가장자리의 부분들에서 안으로 기울면서 그것은 심장의 중심부기관(hēgemonia) 쪽으로 거꾸로 옮겨진다. 그리하여 몸의 모든 부분들에 대한 이해와 영혼 의 모든 부분들에 대한 이해가 생길 정도로 그렇게 한다. ⑼ 이는 동물이 자기 자신을 지각하는 것과 동일하다.529)
275~276.
인용된 단편은 크게 두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첫 째, ⑴~⑷는 착상에서 출산까지의 태아 단계를 ‘퓌시스’, 즉 ‘식물’적 ‘프네 우마’ 단계로 설명하고 있고, 둘째, ⑸~⑼는 출생 직후 영혼이 갖게 되는 자기지각의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277.
우리가 주목하는 구절은, 동물의 개체 발생 과정에서, 출생 이전, 즉 아직 태아가 암컷의 자궁 속에 있을 때의 상태를 ‘자연(퓌시스)’ 상태, 즉 ‘식 물’ 상태로 보는 ⑴~⑷의 구절이다. 히에로클레스에 의해 보고되는 이 구 절은, ‘프네우마’의 ‘영혼’ 상태는 지각과 충동을 동반한 상태이며, 이 상태 의 ‘프네우마’는 출생 이후, 즉 태아의 몸이 다 구성된 이후에 비로소 생겨 나고, 이런 지각과 충동이 동반된 ‘프네우마’의 ‘영혼’ 상태를 갖춘 생명체 가 이제 ‘동물’임을 알려준다.
278.
이 보고는, 앞의 히에로클레스의 보고처럼, 스토아가, 영혼은 이 세계에 오기 전에 선재해 있는 것이 아니고 나중에 생성된 것이며, 그것도 육체 다음에 생성된 것으로 생각했음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 영혼은 후생일 뿐 만 아니라 (태아의) 몸이 다 만들어진 뒤에 생기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히에로클레스의 단편과 이 플루타르코스의 단편 SVF 2.806은, 좁은 의미의 영혼, 즉 동물의 영혼이, 씨가 자궁 속에서 착상이 되더라도 아직 육 체가 다 만들어질 때까지는 ‘자연(퓌시스)’, 즉 ‘식물적 프네우마’ 상태이며, 자궁 속에서 육체가 다 만들어져서 지각과 충동 기능을 비로소 발휘할 수 있을 때, 그때서야 이제 동물의 ‘영혼’이 된다고 생각하는 스토아의 영혼관 을 뚜렷하게 잘 보여주고 있다.
279.
3.2. 운동의 원인으로서의 ‘프네우마’
이제 영혼을 가진 것, 즉 동물의 운동에 주목해보자. ‘영혼’에 의해 지탱되는 존재인 ‘동물’은 운동의 원인이 자신의 내부에 있으며, 그리고 그 운동이 ‘자기 자신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움직여 지는 식물과 다르다고 단편은 전달한다. 동물과 식물은 둘 다 운동 원인이 내부에 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ex heautōn)’와 ‘자기 자신에 의해(aphheautōn)’라는 표현이 식물과 동물의 운동의 성격을 가르는 것인데, 단편 에서는 더 이상의 부가적 설명이 없어 그 의미가 다소 분명치 않은 면이 있긴 하지만, 우리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살려 ‘자기 자신으로부터’라는 표현은 ‘그 운동의 출처가 어디냐’에 대한 답변으로, 그에 반해, ‘자기 자신 에 의해’라는 표현은 ‘그 운동을 누가 만들어냈는가’, 즉 ‘그 운동을 만드 는 작인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읽을 수 있다. ‘자기 자신 으로부터(ex heautōn)’와 ‘자기 자신에 의해(aph’ heautōn)’라는 표현의 의미를 이런 식의 답변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이 단편의 구분이, 동물의 경우는, 식물과 다르게, 운동의 원인이 내부에 있긴 하지만, 그 운동을 만 들어 내는 작인이 그 동물 자신임을 전달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그래 서 ‘동물은 자기 자신에 의해 스스로 자기운동을 한다.’ 그리고 동물의 운 동을 일으키는 작인인 동물 그 자신은 바로 동물 내부에서 표상을 통해 충동을 불러내어 스스로(자기 자신에 의해) 운동을 일으킨다.535)
282
3.3. 감각지각의 원인으로서의 ‘프네우마’
3.3.1. ‘프네우마-영혼’의 여덟 가지 능력
아에티우스가 전달하는 이 단편은 영혼의 여덟 부분, 혹은 영혼의 여덟가지 능력에 대한 스토아의 학설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준다. 스토아에 따 르면, 영혼은 그것의 중심부(헤게모니콘)와 다른 일곱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영혼의 여덟 부분(여덟 기능)은 중심부영혼(지휘능 력:hēgemonikon)540)과 다섯 가지 감각들(aisthētēria), 씨(sperma: 즉, 생식 능력),541) 말소리(phōne: 즉, 언어능력)이다. 그리고 중심부영혼(헤게모니콘)과 나머지 영혼의 일곱 부분의 관계는 ‘문어’로 비유되는데, 즉 이들의 관계는 문어의 몸통(혹은 머리)으로부터 뻗어 나온 촉수들과 같다는 것이 다.542) 이 문어 비유는 중심부영혼과 영혼의 나머지 부분(기능)이 어떠한 위계와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영혼의 일곱 부분들은 중 심부영혼으로부터 뻗어 나와서 몸의 적절한 각 기관에서 각각의 여러 능 력들로 작동한다. 각각의 감각은 영혼의 중심부에서 각기 다른 감각기관으 로 뻗어 나간 ‘프네우마’이다. ‘프네우마’가 뻗어 나간 감각기관에 따라 ‘프 네우마’가 작동하는 능력이 달라진다. 다시 말해 눈이라는 감각기관으로 뻗어나간 ‘영혼-프네우마’는 시각으로 작동하고, 귀라는 감각기관으로 뻗어 나간 ‘영혼-프네우마’는 청각으로 작동한다. 중심부로부터 뻗어나간 ‘영혼프네우마’는 그것이 도달한 기체(감각기관 등)에 따라 다른 능력을 발휘한 다.543)
284~285.
영혼의 능력이 어떻게 구분되는가에 대한 답변 방식이 두 가지이다. 첫번째는 밑에 있는 물체가 달라서 영혼 능력이 구분된다는 것이다. 즉 ‘프 네우마’가 그 기능을 작동시키고 있는 기저 신체(감각 기관 등)에 따라 다 른 능력이 발휘된다는 것이다. 가령 중심부영혼으로부터 뻗어나간 ‘프네우 마’가 도달한 눈이나 귀 같은 각각의 감각 기관에 따라 영혼 능력은 각각 시력,551) 청력 등으로 발휘된다. 이러한 방식의 설명을 우리가 앞서 아에 티우스의 SVF 2.836에서도 보았는데, 거기에서도 ‘영혼-프네우마’는 중심부 에서 뻗어나가 도달한 감각기관에 따라 각각 시각, 청각 등으로 기능하고, 그것이 생식기관(정소: parastatai)에 뻗어나가면 생식력으로, 발음기관(인 두, 혀 등)으로 뻗어나가면 언어능력으로 작동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두 번째는 중심부영혼(헤게모니콘)의 능력에 관한 답변이다. 중심부 영혼은 밑에 놓인 동일한 물체에서도 여러 가지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이것 은 마치 사과가 동일한 물체에서 달콤함과 향이라는 고유한 성질들을 갖 고 있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중심부영혼 역시, 그것이 발휘되는 기저의 물 체에 따라 다른 능력이 발휘되는 것이 아니고, 동일한 기체 하에서 표상 (phantasia), 동의(synkatathesis), 충동(hormē), 이성(logos)이라는 능력을 다 발휘한다. 그런데 여기 SVF 2.826에서 전달하는 중심부영혼의 능력은 표상, 동의, 충동, 이성이지만, SVF 2.836에서 전달되는 중심부영혼의 능력 은 표상, 동의, 감각지각, 충동이다.552) 단편에 따라 헤게모니콘의 능력으 로 언급되는 항목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553) 일치하지 않는 항목 중 SVF2.826의 ‘이성’은, 보통 비이성적 동물에는 없는 것이고, 이성적 동물인 인간에겐 있는 능력으로 위치지울 수 있다.554) 그런데 ‘감각지각’은, ‘헤게 모니콘’의 능력에 해당하는지가 좀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555)
289.
이제 영혼의 능력은 SVF 2.836과 SVF 2.879, SVF 2.826 등에 근거하여 크게 네 가지 영역으로 분류될 수 있다. 영혼의 능력 중 첫 번째 영역은 ‘중심부영혼(지휘능력)’으로, 표상, (지각), 동의, 충동, 이성의 활동이 이루어진다. 두 번째 영역은 ‘다섯 가지 감각 능력’이고, 이것은 그 능력이 발 휘되는 밑에 놓인 물체(감각기관)에 따라 다른 능력(시각, 청각, 후각, 미 각, 촉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세 번째, 언어능력556)과 네 번째, 생식능력 이 있다.557)
290.
각주556)
영혼의 언어능력에 관한 단편으로는 Sextus Empricus, Against the Professors 8.275-6(SVF 2.223 = LS 53T)과 U. Galen. On Hippocrates’ and Plato’s doctrines 2.5.9-13 (SVF 3 Diogenes 29 = LS 53U) 등이 있다. 본고에서는 이 단편의 번역만을 기록하고 단편에 대한 상세 분석은 진행하지 않겠다.
Sextus Empricus, Against the Professors 8.275-6 (= SVF 2.223, part = LS 53T) : “그들이 말하기를, 사람이 비이성적 동물과 다른 것은 분절음에 의해서가 아니라(왜냐면 까마귀, 앵무새, 어치들도 또렷하게 발음되는 소리를 내니까), 마음속에 들어있는 말에 의해서이다. 또한 단지 단순 표상에 의해서 다른 것이 아니라(왜냐면 비이성적 동물들도 표상을 받아들이니까), 추론적, 조합적 표상에 의해서 다르다. 그러므로 사람은 ‘따라감(잇따름)’의 개념을 가지고 있으며, 그 ‘따라감(잇따름)’ 때문에 곧바로 표시(렉타)의 관념을 포착한다. 그 표시 자체가 ‘이러한 것이면, 저러한 것이다’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표시가 있다는 사실이 사람의 본성과 구조로부터 나온다.”
Galen. On Hippocrates’ and Plato’s doctrines 2.5.9-13 (= SVF 3 Diogenes 29, part = LS 53U): “디오게네스는 실로 이 동일한 로고스에 대해, 동일한 설명에 따라서가 아니라 다음의 설명으로 탐색한다. 소리(음성: hē phōnē)가 나온 그것으로부터 분절된 소리(hē enarthros)도 나오며, 그리하여 의미 있는 또렷이 발음되는 소리(hē sēmainousa enarthros)도 그곳으로부터 나온다. 그런데 이 마지막 것이 언어(로고스)이다. 따라서 소리가 나오는 바로 그것으로부터 언어(로고스)도 나온다. 그러나 소리는 머리 부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좀더 아래쪽에서 나온다. 소리가 기도(氣道)을 통해 빠져나온다는 것은 어쨌든 분명하다. 따라서 언어(로고스)도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아래쪽에서 나온다. 그러나 실로 언어(로고스)가 사유로부터 나온다는 점도 사실이다. 더 나아가 언어(로고스)가 사유(생각) 속에 있는 개념에 의해 찍혀지면서, 이를테면 새겨지면서 나온다는 점, 그리고 언어(로고스)가 사유하는 것과 말하는 행위에 따라 시간적으로 같이 뻗어나간다는 점도 설득력 있다. 따라서 사유(생각)도 머리에 있는 게 아니라, 더 아래쪽에, 아마 특히 심장 부근에 있을 것이다.”
290
3.3.3. 표상-동의-충동
필론 의 SVF 2.844와 스토바이오스의 SVF 3.169에 따르면, ‘표상’은 ‘감각활동 을 통해 마음을 때리는(정신에 찍히는) 외부사물의 접근에 따라’ 형성된 다.563) 반면 ‘충동’은 ‘마음(정신: nous)의 긴장적 힘에 따라’ 형성된다. 즉 ‘마음이 대상을 파악하고자 긴장적 힘을 뻗어나가게 해서 감각활동을 통해 그것을 향해 가는 것’이다.564) 그래서 ‘충동’은 말하자면 ‘어떤 것(대상)을 향한 영혼의 운동(phora psychēs epi ti)’이다.565) 그리고 이 ‘충동’을 활성화시키는 것은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표상(hormaētikēn phantasia)’이다. ‘충동’은 이 ‘충동적 표상’에 의해서만 활성화되기 때문에 ‘표상’의 형제라 불린다. 다시 말해 스토아는, 감각활동을 통해 외부사물이 마음에 다가와 찍힌 이 ‘표상’이, 우리로 하여금 그 대상을 파악하고자 그것을 향해가는 마음의 ‘충동’을 불러일으킨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아직 설명되지 않은 동 물 운동의 요소가 있다. 스토아는 이 ‘표상’과 ‘충동’ 사이에 하나의 절차 를 더 집어넣는다. 네메시우스 SVF 2.991을 비롯해서 이미 앞의 여러 단 편에서 언급된 ‘동의’이다. 다음 플루타르크스의 단편 SVF 3.177을 보자.
293
각주569)
인식론적 혹은 윤리학적 맥락에서는, 동물의 목표지향적 행동, 즉 동물이 어떤 것을 추구하거나 어떤 것은 피하려는 행동은 스토아에서 ‘자기화(oikeiōsis)’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된다. 동물의 행동과 ‘oikeiōsis’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창우(2003), ‘스토아 철학에 있어서 자기지각과 자기애’, 『철학사상』, 17, 215-43와 Pembroke, S. (1971), 'Oikeiosis', Problems in Stoicism, 114-49에 상세한 논구가 진행되어 있다. 이창우(2003)에 따르면, ‘oikeiōsis’란 일상적 의미에서는 ‘어떤 외부의 것을 자기 자신에게 속하는 것으로 만듦’이라는 의미이지만, 스토아적 맥락에서는 ‘자기 보존의 욕구, 즉 자기애라는 근본욕구를 가지고 자신의 정체성을 보존시키고자 외부 대상들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다(218-9쪽). 즉 ‘자기화’는 ‘자기애’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데, 이 ‘자기애’는, 스토아에 따르면, ‘자기지각’에 의존한다. 왜냐하면 “자기 지각을 통하여 자신의 심신 상태 전체가 좋음으로 경험되고 이 과정에서 자기애가 발동되기” 때문이다(224쪽). 즉 자기 자신에 대한 욕구는 자기 인식을 전제한다. 그리고 또한 “외적 사물에 대한 인식과 욕구는 이 사물의 본성 의식에 의존하는데, 이러한 사물에 대한 인식과 욕구를 가진 채 사물을 추구하는 행동은 자기애로부터 유도된다(227쪽).” 앞서 우리가 읽었던 히에로클레스의 단편이 동물 발생에서 이 자기 지각이 시작되는 과정을 설명해주고 있다. 즉 히에로클레스(5.52-6.24)에 따르면, “자기지각은 대상지각의 조건이다. 동물은 자신에 대한 의식 및 자기애를 가질 때에만 자기 바깥의 대상에 대한 지각을 가진다. 자기에로의 관심의 토대 위에서 동물은 한 대상을 자기 귀속적인 것(oikeion) 혹은 자기와 이질적인 것(allotrion)을 경험한다(229쪽).”
우리의 논의 맥락으로 돌아가 보자. 행동을 일으키는 충동은 주어진 적절한 표상을 우리가 받아들일 때, 즉 표상에 동의할 때 일어난다. 동의된 표상만이 충동을 일으킨다. 그리고 어떤 표상을 받아들일지 여부, 즉 표상에 대한 동의 여부를 유도하는 것이 바로 ‘자기 것에 속하는 것에 대한 의식’이다. ‘자기 것에 속하는 것에 대한 의식’은 ‘자기애’에 의존하며, 이 ‘자기애’는 ‘자기 지각’에 의존한다. 따라서 동물의 목표지향적 운동을 가능케 하는 ‘대상 지각’과 ‘자기애’, ‘자기화’는 ‘자기 지각’의 결과이다. 그리고 이 ‘자기 지각’은, 히에로클레스에 따르면, 출생 직후부터 ‘영혼’상태로 바뀐 ‘프네우마’에 의해 동물이 겪는 과정이다.
//반면, 크뤼시포스와 안티파트로 스는 이 표상과 충동(그리고 이 충동은 행동을 일으킨다) 사이에 중간적인 것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중간 것이 인간적 수준에서는 동의
(synkatathemenous)이고, 동물적 수준에서는 굴복(eiksantas)이다. ‘표상’에 ‘동의’가 합쳐질 때 ‘충동’이 일어난다. ‘동의’ 없이는 ‘충동’이 발생하지 않는다. 적절한 ‘표상’이 일어났을 때 이 ‘표상’에 ‘동의(혹은 굴복)’해야만 ‘충동’도 행동도 일어날 수 있다.
‘충동’은 ‘어떤 것을 향하(거나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영혼의 운동’이다. 그리고 이 충동은 영혼이 어떤 표상을 ‘받아들일 때’ 시작할 수 있는 운동 이다. 우리의 감각은 매 순간 우리(헤게모니콘)에게 수많은 메시지를 보고 하고 있다. 우리는 그러한 메시지 중 극히 일부에만, 즉 ‘우리가 동의하는’ 것에만 주의를 기울인다. 어떤 ‘감각적 표상’에 ‘동의’하는 것은 어떤 메시 지에 주목하고 그것의 출처를 확인하는 일이다. 그래서 ‘동의’는 ‘충동’의 필요조건이 된다(SVF 3.171). 우리가 이로움이나 손해의 출처로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를 재촉하지도 않고 물러서게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 것이 스토아가 말하는 동물 운동의 메커니즘이다. ‘표상’과 ‘동의’, ‘충동’은 동물의 어떤 목표지향적 운동569)을 인과적으로 함께 설명해준다.
동물의 운동을 일으키는 이러한 ‘표상’, ‘동의’, ‘충동’을 산출하는 것은 우리 영혼의 중심부인 ‘헤게모니콘’이다. ‘헤게모니콘’은 감각들이 알리는 것들로부터 판단하여 충동을 일으키는 동의를 작동시킨다. 그리고 주어진 적절한 ‘표상’에 ‘동의’한 ‘충동’은 ‘행동’을 일으킨다. 이러한 표상-동의-충 동-행동을 산출하는 것이 바로 ‘헤게모니콘’인 것이다. 따라서 ‘헤게모니콘’ 은 우리 감각지각의 중추 기관이기도 하지만, 행위를 주관하는 기관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중심부 영혼인 ‘헤게모니콘’은 다름 아닌 ‘지성적 프네 우마’이다. ‘지성적 프네우마’인 ‘헤게모니콘’은 이렇게 동물 운동을 발생시 키는 ‘표상’, ‘동의’, ‘충동’을 만들어내며, 동물의 목표지향적 운동을 가능 하게 한다. 우리는 이상의 고찰을 통하여 표상-동의-충동을 만들어내는 ‘헤 게모니콘’의 운동 메커니즘에서도 ‘프네우마’에 의거한 통일적 설명 체계를 확인할 수 있다.
296.
4. ‘프네우마’: 우주적 맥락과 생물학적 맥락의 종합
4.1. 소우주와 대우주
SVF 2.633 따라서 우주는 동물(살아있는 것)이다. [우주가] 영혼이 있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영혼이 그것으로부터 떨어져 나온(분리 된) 것이라는 점으로부터 분명하다[고 스토아학파는 말한다].571)
스토아에 따르면, ‘우리 영혼은 세계영혼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 분리된 조각(apospasma)이다.’ 다시 말해 우리 영혼은 세계영혼의 일부이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전하는 이러한 스토아의 사유는, 우리 몸에 우 리의 영혼이 퍼져 있듯이, 우주의 몸에도 우주의 영혼이 퍼져 있다는 대우 주-소우주의 사유를 보여준다.572)
297.
4.2. ‘프네우마’ : 우주의 결속과 함께 겪음(공감)
한편, 우리는 앞에서 SVF 2.442, 441, 451, 444의 보고를 통해573) 스토아
의 ‘프네우마’ 긴장운동과 개별 사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확인하였다. 각 개별 사물은 그것에 퍼져있는 ‘프네우마 긴장 운동’의 안쪽을 향한 운동에 의해 자신의 하나임(하나됨, 단일성, 통일성: henotēs/henōsis), 안정성 (monimon), 실체성(무엇임: ousiōdes), 결속성(synecheia)을 갖는다. ‘프네 우마의 토노스’가 그것이 퍼져있는 각 사물을 ‘한데 묶어서(syndoumena)’ 사물 자신의 부분들과 결속성(연속성: synecheia)을 갖게 한다. 즉 ‘프네우 마의 토노스’는 개별 사물의 ‘결속성’의 원인인 것이다. 그러나 ‘프네우마’ 는 개별 사물의 ‘결속’의 원인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프네우마’는 그것이 퍼져있는 우주 전체를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도 한다.
SVF 2.473 크뤼시포스가 상정하기를, 실체(ousia) 전체는 하나로 되어 있는데(hēnōsthai), 이는 ‘프네우마’라는 어떤 것이 전 실체 에 두루 퍼져 있기 때문으로(diēkontos), 이 ‘프네우마’에 의해 세 계는 자기 자신을(hautō) 함께 붙들고(synechetai) 자신과 함께 머 물며(symmenei) 자신과 함께 겪는다(공감한다: sympathes estin).…574)
SVF 2.473에서 전달되고 있는, 크뤼시포스가 상정하고 있는, 세계와 ‘프네우마’와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실체 전체, 즉 세계는 하나로 되어 있는 데, 이 실체 전체의 ‘하나 됨’, 이것은 전 실체에 퍼져 있는 ‘프네우마’ 덕 분이다. 실체 전제에 퍼져 있는 ‘프네우마’에 의해, 세계는 자기 자신을 함 께 붙들고(synechetai), 자신과 함께 머물며 (symmenei), 자기 자신과 함께 겪는다(sympathes estin hautōi).575) 즉 ‘프네우마’에 의해 세계 전체가 ‘하나로 된다(hēnōsthai)’는 것은 세계가 ‘자기 자신과 함께 묶여 있고, 자 기 자신과 결속해 있고, 자기 자신과 함께 머물며, 자기 자신과 함께 겪는 다’는 것이다. ‘세계가 자기 자신과 함께 겪는다’는 것은 ‘세계가 자기 자 신과, 즉 세계 자신의 부분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상호작용하며, 같은 겪음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프네우마’의 결속을 통해 세계는 자신의 부분들과 함께 겪으며, 전체와 부분이, 부분과 부분이 공감한다. 우주와 그 안의 개별 사물들이, 세계 안의 유기체와 유기체가, 무기체와 무기체가, 무기체와 유기체가 프네우마에 의해 함께 겪고 공감한다.
298~299.
4.3. ‘프네우마’: 생물학적 맥락의 존재론적 확장
인간 영혼은 ‘프네우마’이고, 신의 영혼을 구성하는 ‘프네우마’의 한 조각이다. 이러한 스토아의 관점은, IV장의 논의를 통하여, 인간 단계의 설명 이 우주적 관계를 설명해주면서, 동시에 우주적 단계의 설명 구조가 인간 단계의 구조도 설명해주는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IV장에서 검토한 스토 아의 ‘프네우마’의 상태와 ‘영혼’에 대한 설명은 스토아가 생물학적 맥락의 프네우마 능력을 존재론적으로 확장시키고 있으며 유기체와 무기체의 격 벽을 무너뜨리고 있음을 보여준다.577)
301.
각주577)
그렇다면 크뤼시포스가 ‘프네우마’ 개념을 통해 대체시키려는 사유는 무엇이었을까? 스토아는 초월적 창조적 신을 내재적 신(자연)으로 대체하고 있다. 근대사유적 개념으로는 이것을 자연주의라고 말할 것이다. Sellars(91-5쪽)는, 많은 이들이 스피노자의 신이 단지 라벨일 뿐이라는 비판자들의 비판 맥락이, 플로티누스가 스토아를 비판한 맥락과 같다고 지적한다. 즉 스토아가 계속 신을 말하고 있긴 하지만 이건 자연 내부의 힘(운동 원인 등)에 대한 라벨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읽으면 스토아의 자연주의자, 즉 유물론자적 입장이 명료한 듯이 보인다. 하지만, Sellars도 지적하듯이 스토아 사유의 내부는 종교적 색채가 매우 짙다. 특히 에피쿠로스학파와 비교해 보면 더욱 더 그러한 점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이중적 성격은 무엇 때문일까? 아니 이중적 성격이 아닐 수 있다. 왜냐하면 스토아의 신=자연은 의식이 있는 신이기 때문이다. 스토아의 신은, 세계 밖에 있는 초월적 창조자로서의 신이 아니고, 세계 안에 있는, 혹은 세계 그 자체로서의 신인데, 의식이 있는 신이다. 그래서 스토아의 내재적 신은 그냥 세계 내부의 기계적 원인에 대한 라벨이 아니고, 유기체적 근원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의 표현대로라면, 전체로서 신과 부분으로서 개별적 존재들은 모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신의 섭리가 닿지 않는 곳이 없다. 부분인 우리 인간 개별자는 비록 그 섭리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말이다.
301~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