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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감의 해석과 주제 만들기
평론가 강 돈 묵 교수
문학적인 글과 비문학적인 글의 차이는 무엇일까. 자신이 경험한 바를 오롯이 적어 놓고 그것을 문학적인 글이라고 우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문학적인 글, 특히 수필을 요구하면 자신의 체험을 그대로 적기에 급급하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아무리 있는 그대로를 적는 수필이라도 삶의 일상을 적은 글과는 경계를 그어야 한다.
수필에서 가장 깊이 유념할 일은 현상을 적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적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경험한 바는 현상이다. 아침에 기상하여 우리의 시야로 들어오는 모든 것들은 현상이다. 하루를 살아내며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혀로 맛보고, 코로 맡고, 피부로 느끼는 모든 것들은 현상이다. 그러나 이런 감각 활동으로 얻어지는 것들의 속 의미를 우리는 본질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문학인 수필은 작가가 체험한 바를 그대로 줄글로 적어 내리는 게 아니라, 사물이든 사건이든 그것이 의미하고 있는 바를 해석하여 독자에게 전할 메시지를 만들어 적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문학적인 글과 비문학적인 글의 경계는 무엇일까.
주부가 아이를 육아하면서 경험한 바를 그대로 적어 놓은 글은 대개의 경우 생활 작문이라고 말한다. 더러는 문학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글도 있겠지만, 해석이 없는 글들은 대부분 문학적인 글이라고 칭하지 아니한다. 문학적인 글은 작가가 선택한 글감이 가지고 있는 본질을 찾아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여, 그것에서 독자에게 전달할 주제를 만들어 형상화한 것들이다. 특히 육아하며 주부가 접하는 일상은 보는 순간 많이 감동하고, 자연스럽게 시각의 노예가 되기 때문에 깊은 의미 발굴의 과정을 건너뛰기 쉽다. 그러다 보니 본질을 찾아 해석하는 과정을 빠뜨리게 된다. 문학적인 글은 반드시 주제가 있어야 한다. 주제를 설정하지 않고 글을 쓰게 되면 구심점이 없어서 통일성을 잃게 된다.
수필은 길지 않은 글에서 작가가 의도한 주제를 제대로 전달해야 한다. 그래서 집필 전부터 신선한 글감을 찾아야 하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본질을 찾아내어 해석해야 한다. 그 해석에 따라 주제를 만들고, 독자에게 충분히 전달하기 위해 얼개를 짜야 한다. 간혹 체험한 바를 시간에 따라 적어 놓고 수필이라고 우기는 사람도 있는데, 이는 상당히 위험한 생각으로 수필 문학에도 누가 될 수 있다.
이제는 독자들도 상당히 수필에 익숙해져서 서투른 생각으로 수필에 임했다가는 곤욕을 겪을 수 있다. 작가보다 훨씬 수필의 문법에 정확한 독자도 많다. 또 지금은 문학 강좌를 청강한 사람이 많아서 작품을 이해하고 나름의 이론을 갖춘 사람도 많다. 앞으로는 게으른 작가가 설 자리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다.
적어도 작가라면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다른 사람과 차별화된 정체성. 그것은 작가의 끝없는 노력이 따라 주어야 가능하다. 일상의 경험을 문학적 글감으로 환치시키는 능력도 키워야 하고, 그것을 독자에게 내놓기 전에 글감이 갖는 본질도 찾고 해석하여 의미화, 주제화하는 힘도 길러야 한다. 또 독자의 감동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형상화의 과정도 거쳐야 한다. 물론 정확한 문장 능력을 익히는 데에도 게을러서는 안 된다.
배명란의 <성형미인 자연미인>. 인간의 조급한 욕심을 질타한 글이다. 우후죽순으로 들어서는 아파트 단지, 그곳을 자연과 어울린 주거시설로 만들기 위해 하나같이 조경에 힘쓴다. 애당초 아파트를 세우기 전에 있었던 자연 자원을 최대한 보존 활용해야 할 터인데, 모두 밀어 버리고 계획 조경을 선택한다. 한편으로는 더 좋은 정원을 만들기 위한 배려라 하지만, 많은 생명체가 인간의 욕심으로 생애에 차단기를 내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욕심으로 빚어지는 결과이다. 특히 비싼 값에 옮겨오는 소나무들은 수령이 제법 된 것들이어서 살리기가 쉽지 않다. 옮겨 살리기가 어려운 큰 소나무는 전문 조경업자가 달려들어도 성공률이 그리 높지 않다. 새 아파트 단지에선 늙은 소나무가 누렇게 죽어가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입주민들이 조경이 잘된 아파트를 선호하는 것은 아이들의 정서 함양에도 크게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푸른 숲은 아이들의 정서를 순화시키는 데 최적의 환경이기에 선호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온전히 완성된 것보다 아이들에게는 성장하며 모양을 갖추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게 하는 게 더 효과적이란 말도 있다. 활짝 핀 국화는 얼마 되지 않아 죽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기에, 어린 국화를 심어 키우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그냥 밀쳐버릴 일은 아닌 성싶다.
이 글에서는 새 아파트 단지마다 조급하게 조경하려다가 좋은 정원수를 죽이는 모습을 여러 번 기술하고 있다. 인간의 조급한 마음에 경종을 울리는 글이다. 자연스럽게 성장해서 숲을 이루게 하는 조경을 제시한다. 굳이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게 해 준다. 제시를 통하여 독자들의 가슴을 울리려는 시도가 보인다.
아쉬움이 있다면 같은 내용의 예가 여러 번 반복 제시된 점이다. 수필은 한정된 길이 안에서 작가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글임으로 절제된 구성이 필요하다. 반복적인 예의 제시보다 강렬한 글감을 하나 제시하고 작가의 의도대로 끌고 가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한다.
또 꽃은 아름답다는 전제가 독자에게도 되어 있다. 굳이 꽃마다 아름답게 꾸며줄 필요는 없다. 절제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오히려 이 글에서는 큰 나무들이 죽어 황폐해져 가는 모습을 상세히 그려주는 게 더 필요하지 않았을까. 그래야 작가가 의도한 바를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데에 효과적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절제된 표현, 분위기에 맞는 표현. 또 그런 어휘가 동원된다면 더 좋은 글이 될 듯하다.
정순남의 <말하지 않는 분노>. 글을 쓰는 작가는 메시지의 온전한 전달을 위하여 최고의 방법을 모색하여야 한다. 정확한 문장을 익히고, 치밀한 구성을 짜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독자 앞에 설 때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야 한다. 작가가 독자 앞에서 흥분하여 흔들리면 독자들은 ‘코미디언도 연기할 땐 안 웃던데…’하며 아쉬워한다. 작가가 흥분하면 독자는 감동할 기회를 앗기는 꼴이 된다.
이 글에서는 작가가 너무 흥분되어 있다. 원색적인 감정 표현이 여기저기에 보인다. 그러다 보니 문장이 어설프고, 사용된 어휘가 정확하지 않다. 이런 주제를 다루는 글에서는 사실 기록을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하여야 하고, 그 기록을 토대로 작가의 비판이 따라야 한다. 작가의 눈이 흥분되어 있으면 독자는 그 사실마저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좀 더 정확한 문장 실현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전개도 논리적일 필요가 있다.
이경영의 <햇살이 눈부시다>. 겨울 비바람에 찢겨 너덜거리는 비닐하우스를 정리하려고 사다리에 올랐다가 사고를 만난 이야기다. 부상은 의외로 커서 이마에서는 피가 흐르고, 손목뼈는 살 밖으로 튀어나와 덜렁거리고, 앞니가 세 개나 부러져 입안에는 핏덩이가 고이는 지경이다. 순식간에 정육점의 뒹굴리는 고깃덩어리 신세가 된 환자는 세수, 양치, 배변마저 혼자서는 할 수 없게 된다. 여러 차례의 수술을 거치면서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상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코가 막혀 입으로 숨을 쉬니 혓바닥이 가뭄에 논바닥 갈라지는 듯하다. 가제 수건에 물을 적셔 입에 물고 잠을 청하는 힘겨운 밤을 지냈다. 코로 숨을 쉰다는 것이 얼마나 큰 감사인지, 비싼 대가를 치르고서 그제야 알게 되었다. 굶어봐야 배고픔을 알고, 목마름에 지쳐봐야 물이 꿀송이처럼 단 생수인 것을 안다. 건강이 얼마나 큰 재산인지, 소소한 일상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뒤늦게 깨닫는 어리석은 인생이다. -이경영의 <햇살이 눈부시다>에서
커다란 깨달음 뒤에 매사에 감사하는 작가의 눈에 햇살이 눈 부신 까닭을 독자들은 안다. 그러기에 독자들은 작가의 삶에 고개를 끄덕이며 카타르시스를 체험한다.
김현우의 <먹는 것에 대한 관심>. 의사는 사람의 신체적 흐름을 일반인보다 많이 알고 있다. 알고 있는 정보를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이지만, 그것은 지식인이 할 일이다. 작가는 지식 전달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알고 있는 지식을 이용하여 문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함유하고 있는지를 찾아내고 해석해야 한다. 그래야 문학이다. 이 글에서 프로이드의 정신분석 이론을 겉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작가가 일상에서 접한 글감에 알고 있는 지식을 토대로 해석하여 넌지시 메시지를 내놓는 게 더 공감을 얻을 것이다.
김외남의 <出必告, 反必面의 교훈>. 한 가족의 즐겁고 재밌는 모습을 영상으로 보여주듯 그려주고 있다. 있는 일을 나열한 것이라서, 굳이 구성이 필요 없고, 시간을 따라 사건을 따라 줄글로 내리 적으면 된다. 그래서 그 행간에 살포시 숨어 있는 가족의 행복은 저절로 노출된다.
더러 섭섭함이 끼어드나 그것은 엄살이다. 더없이 행복한 모습을 받쳐주는 디딤돌에 불과하다. ‘배알’은 우리 민족의 감정이 나오는 곳이다. 진한 감정은 ‘배알(창자)’에서 나온다. 며느리의 빨래는 그만큼 하기 싫은 일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오히려 더 친근하게, 정겹게 다가오는 것은 이 집안의 분위기 때문이 아닐까.
최광식의 <재래시장 단상>. 아내를 따라나선 재래시장에 대한 단상이다. 제목에서 암시하듯 단상이란 ‘때에 따라 떠오르는 단편적인 생각을 적은 글’이다. 재래시장을 둘러보며 정이 흐르고 있는 모습을 그린 글이다. 제대로 갖춘 점포보다 시장 거리에서 허름하게 쪼그리고 앉아 들고나온 봄나물을 파는 할머니를 찾아다니는 아내의 뒤를 졸졸 따라다닌다.
아무런 질서도 없이 쪼그리고 앉아 있는 듯이 보여도 거기에는 질서가 있다. 판매장소가 정해지지 않았어도, 옆 사람과의 경계선이 없어도 그들은 정확히 자기 자리와 남의 자리를 챙긴다. 옆 사람의 자리를 넘보는 일이 없다. 또한 장보기에도 일정한 규칙이 있다. 번듯한 상점엔 들르지 않는다. 복잡한 길가에 좌판도 없이 쭈그리고 앉아 있는 할머니들을 찾아다닌다.
역시 재래시장에서의 질서는 서로 신뢰하는 마음에서 나온다. 미리 약속하였으면 값을 더 쳐준다 해도 팔지 않고 약속한 사람이 오기를 기다린다. 또 약속한 사람은 아예 한눈을 파는 법이 없이 할머니에게로 바로 간다.
하나의 글에서는 분위기가 맞아야 한다. 또 바라보는 관점이 정해져야 한다. 이 글에서 작가의 시선이 어느 때는 처음 아내를 따라나선 사람이 되고, 어느 때는 여러 번 시장을 찾은 사람의 시각으로 변하는 것은 위험하다. 글은 언제나 치밀하여야 하고, 앞뒤에 모순이 발생하지 말아야 한다.
홍수연의 <횡성 호수 길을 가다>. 이 글에서는 작가가 횡성호숫가를 거닐면서 심신을 달래고 있다. 자연은 인간들에게 많은 말씀을 전하려 하나, 그것을 귀담아듣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작가 홍수연은 차분한 마음으로 자연에 귀를 내어준다. 그러면서 그들이 내뱉는 소리에 접근해간다.
이 맛에 횡성호수길을 걷는가 보다.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이 호숫물이 언젠가는 어디론가 흘러갈 것이다. 횡성댐이 생기면서 갇혀버린 물들이 긴 세월을 보내다 보니 어른스럽게 자기 자신을 내려놓았는가 보다. 갈등도 집착도 없이 생긴 모양대로 자기 자신을 스스로 채워 나가는 것을 배웠는가 보다.
-홍수연의 <횡성 호수 길을 가다>에서
자연의 순기능이라 하지만, 작가의 시선이 매우 차분하고 친근하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긍정적이다. 자연의 말씀을 모두 받아들이며 공존하려 노력한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언제나 공존할 때 그 가치가 더욱 배가된다. 그래서 작가 홍수연은 자연에서 삶의 지혜와 이치를 배우며 자신을 성찰해 간다.
이 글에서는 수필의 문장을 조금 더 깊이 이해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특히 수필은 산문이라서 형태 단락의 구성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고, 시제에도 민감해야 한다. 그리고 글의 전개에서는 무리가 따르지 말아야 한다. 현실에서는 배경이나 사건이 우연스럽게 진행되지만, 작품 속에서는 모두가 치밀하고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이점승의 <늦가을 속에서>. 이 글에서는 자연을 하나의 생명체처럼 인식하고 있다. 눈에 비친 자연에 머물지 않고 하나의 생명체의 변화처럼 기술해 나간다. 그 자연의 변화에 작가를 얹어서 삶을 성찰해 간다.
가을의 쓸쓸함은 희망의 씨앗이다. 하늘이 싸늘하도록 파란 건 앞으로도 눈부신 초록 빛깔로 건강하게 자라 알찬 열매를 맺으라고 보내는 응원이다. 알몸으로 찬바람을 맞고, 견뎌 더 여물어서 앞날을 위해 화려한 꿈을 꾸라고 보내는 희망의 메시지다.
어느새 내 가슴은 조금씩 푸르름으로 채색되고 있었다. 늦가을 속에서 아름다움과 쓸쓸함과 희망을 동시에 느끼며 가슴을 활짝 펴 본다. -이점승의 <늦가을 속에서>에서
돌을 이야기하든 나무를 이야기하든 어차피 수필은 사람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 인간의 삶이 글의 기저에서 웅크리고 있기 때문이다. 윗글 앞 단락은 자연이고, 뒤 단락은 사람 이야기다. 결국 성찰하는 인간의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임도순의 <남자라는 이유로>. 글벗끼리 강의실에서 벗어나 일박이일의 야외수업을 하면서 남자와 여자의 유별한 행동에 관심이 간다. 이틀 동안의 일정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지만, 그보다 남녀가 유별하게 행동해야 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터득하기 위한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그로 인하여 인간의 정체성도 찾아낸다든지, 기존의 우리의 성별 차별 문화가 개선점이 무엇인지, 더 확장하여 현실에 대한 작가의 시각을 내보인다든지 하는 뭔가 작가만의 독특한 메시지가 있었으면 좋겠다.
산문은 형태 단락이 바뀐다고 하여 연마다 줄을 띄우지 않는다. 모두 붙여 쓰되, 단락의 첫 어휘는 한 칸 들여 쓰면 된다. 굳이 매 연 한 줄씩 띄울 일은 아니다.
최점순의 <감격의 마음>. 수필은 작가가 체험한 바를 줄글로 내려 적는 것이 아니다. 체험 속에서 선택한 글감에 의미를 부여하여 해석해낸 바를 형상화하는 글이 수필이다. 그리고 문장은 그 글의 의미를 독자에게 정확히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본래 글은 앞의 내용을 토대로 뒤의 이야기가 모순됨이 없이 이어져야 한다. 그래서 글에는 구성이 필요하다. 분위기를 흩트리지 않고 전개되는 글이 독자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다.
또 문장에 사용되는 어휘는 정확해야 한다. 문장에서는 주어와 서술어의 관계가 어긋남이 없어야 한다. 문장은 나타내려는 바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기술해야 한다. 초보자일수록 한 문장에서는 하나의 이야기만을 기술하는 습성을 길러야 한다.
김중기의 <행복을 부르는 톡탁소리>. 산업화의 물결로 이웃과 마음을 열어 놓고 사는 모습을 보기가 그리 쉽지 않다. 남보다 먼저 소유하기만을 꿈꾸는 현대사회에서 다른 이에게 배려하며 사는 모습은 아름답다. 넉넉하지 못한 환경에서는 자그마한 배려가 가슴을 뜨겁게 달구어 주기도 한다.
이 글은 새마을금고의 공간을 얻어 탁구장을 만들고, 그곳에서 운동하며 서로 정을 나누는 이야기다. 이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서로 배려하며 운동하는 모습이 마냥 정겹게 느껴진다. 행복이란 커다란 게 아니다. 비록 작아도 만족하면 되는 것이다. 서로 아끼는 마음만 있다면 커다란 행복을 맛볼 수 있다. 서로 봉사하고 나누고 기부하는 마음이 눈에 선하게 느껴진다.
이번 《문학미디어》에 게재된 수필을 보면서 조금 더 문학적인 성공을 위해 적극적이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수필에 대한 인식의 결여는 독자들에게 쉽게 드러날 수 있음에 채우기를 권한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수필작가는 자신의 체험 속에서 선택한 글감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찾아내어 그것을 해석하고 형상화해 독자 앞에 내놓아야 한다. 작가의 일상은 삶의 조각일 뿐이다. 그것을 문학적 글감으로 바꾸는 일은 작가의 몫이다.
또 아무리 신선한 주제라 해도 그것을 전달하는 데에 미흡함이 없는 문장이 뒷받침해 주어야 한다. 작가는 수필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무수히 많은 퇴고를 반복해야 함도 잊어서는 안 된다. 초고를 그대로 독자 앞에 내놓은 것 같은 글은 작가의 성의를 의심하게 만든다. 정확한 전달을 위해 자기 글을 끝없이 수정하는 것은 작가의 의무이다. 이런 작가의 노력은 언제나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