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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서 ‘추억 여행’을 하는 횟수가 잦아지는 것 같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길게 이어져 오던 [해외여행기]를 잠시 접고 오늘은 추억을 소환하고자 한다.
50년 만에 처음 마주한 초등학교 [졸업앨범]
아래 사진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상한 점이 있다.
사진관에서 정식으로 제작된 앨범이 아닌 ‘복사가 된 앨범’임을 눈치 빠른 사람들은 이미 알아보았겠다.
고등학교 동기회장을 맡고 있는 김 군은 나와 초등학교부터 동기이다.
그런데 동기인줄은 알았지만 같은 반을 했었는지는 ‘아리송해’였다.
그 이유를 감히 밝히고자 한다.
나는 초등학교 ‘졸업앨범’이 없다.
6학년 때 서울로 수학여행을 갔었다.
때마침 농촌에서는 비료를 구매해야 하는 시기였다.
조부모를 포함하여 11명의 대식구였던 우리 집은 당시 무척 형편이 어려웠다.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 시절이었다.
장남이었던 나를 위하여 부모님은 어렵게 수학 여행비를 마련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비료를 구입할 시기가 다가왔다.
당시엔 개별적으로 구입을 하는 것이 아니고 반장을 통해서 농협에서 마을단위 단체구입을 하는 시스템이었다.
한해농사를 결정 짖는 비료를 구매하는 것이 우선인 상황이라 수학여행을 갈 처지가 못 되었다.
아쉬웠지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수학여행을 마치고 등교를 한 날,
담임 선생님께서는 참여하지 못한 사람에게도 여행 기념으로 모나미 볼펜을 한 자루씩 주셨다.
당시 우리지역 국회의원이었던
[국회의원 문태준 증정]이라는 황금빛 글자가 선명하게 박혀있는 볼펜이었다.
난생 처음 만져보는 볼펜이었기에 뇌리에 깊이 각인이 되어 아직도 그 볼펜의 형상이 뚜렷하게 기억이 난다.
그러한 가정 형편이었으므로 졸업앨범은 찾지를 못했다.
사진촬영은 했었지만 앨범비가 없어서 찾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나는 한 번도 초등학교 졸업앨범을 구경한 적이 없었다.
그렇게 50여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초등학교 동기들 중에는 교직에 근무한 동기들이 5명이나 있었다.
여학생인 전〇옥양, 육상선수로 이름을 날렸던 성〇봉군, 돈 골에 살던 유〇희군, 부친이 교직에 종사하셨던 박〇식군과 나까지 5명이 된다.
전 양을 제외하고 남자동기들은 포항과 경주에서 같은 학교나 인근 학교에서 근무를 했었다.
경주에서 교감으로 근무할 때의 일이다.
이웃학교로 박 군이 부임을 해 왔다.
교감모임에서 우연히 고향얘기가 나오고 학교얘기가 나오게 되었다.
놀랍게도 초등학교 동기였다.
그 친구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부친을 따라서 중학교 때 부터 안동에서 대학까지 졸업했으니 기억을 아무리 소환해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와는 한 번도 같은 반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학년은 당시 300여 명 이었다.
75명씩 한반에 배정하여 4반까지 있었다.
그러니 같은반을 하지 못한 그 친구를 기억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졸업 앨범이 없는 나는 앨범에서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온 얘기가
“나도 초등학교 졸업 앨범을 한번 보고 싶다.”
였다.
그리하여 그 친구가 복사기로 복사를 해서 나에게 전달을 해 주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앨범이 사진에서 보는 앨범이다.
세상에서 하나 밖에 없는 복사된 앨범이 된 것이다.
그렇게 손에 넣은 앨범을 통하여 동기회장인 김 군도 초등학교 6학년 때는 같은 반이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앨범에 등장하는 선생님 중에 맨 밑에 줄에는 김〇동 선생님이 계신다.
내 기억이 맞다면 동기회 톡방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김〇숙여사의 부친인 것으로 기억이 되는데…….
약간 자신이 없는......,
자!
이만하면 [추억 大 소환]이 아닌가?
졸업을 앞둔 어느 날 배 군이 제안 하였다.
“졸업을 하면 헤어져야 하는데 모임을 하나 만들자.”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모임의 이름을 무엇으로 할까?”
“모교 부근이 황토 흙 성분이다. 우리가 삽으로 땅 파는 실습을 할 때 많은 추억을 제공했으니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게 [황토회]로 하자!”
그렇게 해서 [황토회]가 발족되었다.
군 제대를 하고 결혼을 한 후에도 그 모임은 계속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2명의 친구가 같이 활동을 하자며 추가로 가입을 했다.
그렇게 모임이 계속되던 어느 해 나중에 합류한 한 친구가 말했다.
“회비 모아진 것을 내가 좀 사용했으면 좋겠다.
직장생활을 하는 너희들은 그렇게 아쉽지 않겠지만 나는 시골에서 농사일을 하므로 나에게는 이 돈이 꼭 필요하다. 이제 곧 농번기가 다가오므로 비료나 농자재를 구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면서 그동안 모아둔 회비를 모두 빌려갔다.
그런데 그것이 마지막이다.
돈을 가져간 그 녀석이 회장이었는데 도무지 회의 소집을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한해 두해가 흐르고 모두들 바쁜 일상에 묻혀 생활하느라 점차 우리들의 모임은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
지금과 같이 연락하기에 편리한 폰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엽서로
‘언제 어디로 모여라!’
하고 원시적인 모임을 통보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없어진 추억의 모임이다.
"○○야!
가져간 회비는 돌려주지 않아도 되니 모임이나 정상화 시키도!!!"
졸업식을 한 직후였다.
나는 군 입대영장을 받아둔 상태였다.
교실에서 짝꿍이었던 세장동 옛터 골에 거주하던 정〇억 군이 초대를 했다.
짝지인데다 나이도 같은 53년생이라 우리는 무척 친하게 지냈다.
광덕동을 지나 세장동에서도 골짜기에 있던 ‘옛터 골’은 졸업식 전에도 몇 번 방문을 했었다.
물론 정군도 우리 집에 몇 번 왔었고…….
그래서 연락이 되는 친구들 몇 명과 옛터 골을 방문했다.
정군은 고맙게도 예쁜 마을아가씨들도 섭외를 해서 야외전축을 틀어놓고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마을에 있는 친구도 함께 했는데 그 친구는 춤에 소질이 있었다.
“「개다리 춤」은 이렇게 추고 「다이아몬드 춤」은 이렇게 추면된다!”
하면서 즉석 강의까지 하며 가르쳐 주었다.
참으로 아련한 그 시절의 즐거운 추억이다.
마을 뒷산인 것 같은데 사진촬영을 한 친구가 누군지 기억이 아물 아물…….
“이 면장’ 잘 있나?”
면사무소에 졸업과 동시에 발령이 난 친구는 결혼도 가장 일찍 했다.
“그럼 새벽에 했나?”
[삼익쌀통]을 결혼 선물로 구입해서 고인이 된 김 소장과 석보 신혼집까지 싣고 간 추억도 아련.......
“비포장 길이었던 당시 내 자전거에 싣고 가느라고 고생 좀 했데이!”
☞ 60년대 장난감 살 돈이 없어서 스스로 나무로 만든 장난감총으로 총싸움을 하던 시골내기들~~~
검정고무신에 아버지 구두까지 실례하고,
아직 추위가 남아있는 3월초인데 양말을 신지 않은 친구도 눈에 뛴다.
사진 왼쪽 첫번째가 고교까지 함께한 죽마고우 박군이고
두번째 검정고무신 차림이 필자로 중학교 입학식 직후의 모습이다.
교복과 놀 때 입는 옷의 구분이 별도로 없었다.
한번 입으면 학교에 갈때도 그 옷이고 놀 때도 그 옷이었다.
☞ 달동네에 위치했던 수많은 구멍가게는 지금은 모두 어디로?
☞ '머슴애'들만 놀지 말고 나도 좀 끼워줘 봐!'
어른들은 위험하다고 야단을 쳤지만 리어카도 당시로서는 최상의 놀이 기구!
☞ "얘들아! 재미있니?"
수영장이 어디 따로 있나요?
☞ 살랑거리며 거리를 누비던 멋쟁이 아가씨!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
☞ 추억의 책가방과 보고싶은 얼굴들!
☞ "꿀엿 있어요!"
'아버지 고무신이라도 가져다 바꿔 먹을까?'
갈등의 순간이다.
☞ '진보우체국'에 근무하던 전화교환원 아가씨!
참 예뻣는데...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
☞ 철길은 '통행금지'인데......
☞ 추억의 '대한TV'대리점과 기아혼다 90cc오토바이!
☞ '석유곤로'도 보이고 이정도 부엌이면 당시로선 부유층!
☞ 양복점에서 양장점도 동시에......
☞ 이 정도면 일류패션
☞ "전화 좀 빨리 씁시다."
☞ 누가 출마하던 나는 상관없당께!
☞ 이 많은 것을 언제 다 팔지?
☞ '1회용 비닐우산이 아닌 제대로 된 우산을 가진 친구가 그렇게도 부러웠었는데......'
☞ [추억의 '서울역']
70년대 초반 나는 처음으로 [서울역]을 보았다.
촌놈이 처음 보는 서울역은 대단하였다.
그때 어느 서울 총각앞으로
경상도 말을 하는 아가씨 두명이 얘기에 열중하며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장난끼가 발동한 그 청년
"어서 옵쇼!"
하고 갑자기 큰소리로 호객행위를 하였다.
그러자 깜짝 놀란 그 아가씨들
"아이고 식겁이야!"
하면서 줄행랑을 쳤다.
"식겁이 무슨말이지?"
하며 고개를 갸웃뚱하던 서울청년이 생각난다.
☞ [장발 단속]
"봐주면 안됩니데이......"
고3 시절에 장발이 그렇게 멋이 있어 보인다고 한 친구가 있었다.
졸업을 하면 자기도 꼭 한번 장발을 해보고 싶다던 '세장동'에 살던 유군!
지금은 어떻게 지내시나?
☞ "사랑을 묶어두는 열쇠'도 있심더......"
진작에 좀 나타나지!
자갈논을 팔아서라도 틀림없이 나도 한개는 샀을텐데......
아차차!
'그시절 내겐 팔아먹을 자갈논이 없었는데......'
☞ 외출시엔 이정도는 차려 입어야......
☞ 추억의 '영덕 ⇔ 안동 34번 국도'
미류나무 가로수가 울창한 비포장인 이 길을 중학교때 까지는 걸어서, 고교 시절엔 자전거로 통학했었다.
74년 군입대후 그해 말 첫휴가를 받아서 다시 찾은 그 길은 말끔하게 아스팔트로 포장이 되어 있었다.
☞ 겨울준비는 연탄이 넉넉해야......
☞ 구멍가게집 딸내미도 나이를 먹었겠지......
☞ '추억의 교련복'
교련복 입은 그녀도 참 예뻣는데......
☞ 다! 먹고 살려고 하는 일인데......
☞ 어른이 되고 내가 돈을 벌면 '국화빵' 한번 싫컷 사 먹어야지......
'포항 철길 숲'을 걷다가 보니 '국화빵'은 보이지 않고 '황금 잉어빵'이 보인다.
'5개에 2천원'
옛날 그 맛은 어디로 가고 밀가루 맛이 난다.
'간사한 입맛이여......'
☞ "안내양 떨어져요. 안으로 좀 들어갑시다!"
그 시절 어느 날 대구시내 '원대주차장'에서 대명동 '교대' 앞으로 가는 50번 시내버스에서 경험한 일이다.
시골에 갔다가 대구에 와서 학교 부근 자취방까지 가려면 이 버스를 타야 했다.
머리가 더부룩한 청년이 버스에 올라탓다.
겉모습은 분명히 일반인인데 '학생용 회수권'을 내어 밀었다.
"학생이 아니면서 이 회수권을 내면 안됩니다. 일반인 요금을 빨리 내세요!"
하고 안내양이 얘기를 했다.
"나는 분명히 학생입니다. 그러니 일반 요금을 낼 수가 없습니다."
하면서 그 청년과 안내양이 시비가 붙었다.
말싸움이 길어지자 그 안내양 왈
"그러면 학생증을 한번 봅시다!"
라고 했다.
'이젠 싸움이 끝이 나는 구나!'
하고 생각한 순간
"그러면 안내양증을 한번 봅시다."
라고 받아친다.
당시의 안내양들은 제복에 모자를 쓰고 있어서 누가 봐도 한눈에 표시가 나는 차림이었다.
흥미롭게 말싸움을 지켜 보는 순간 내가 내릴 정거장이 다가 와서 나는 내리고 말았지만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
☞ '수도가 나오는 집'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 60년대 어느 봄날 시량국민학교 3회생들이 가장 멋지게 차려 입은 오늘은 즐거운 소풍날!
세상이 참 편해졌다!
[추억 大 소환]을 하고 나니 뭔가 홀가분한 느낌이다.
한 반 뿐인 고등학교 2학년 때는 부실장, 3학년 때는 실장까지 했었다.
당시 우리 반은 60명(남학생 47명, 여학생이 13명)이었다.
그러나 13명의 여학생 중 5명과는 졸업 시까지 끝내 말 한마디 건네 보지 못하였다.
그러한 성격 탓에 졸업 무렵에는 배〇 군이 여학생을 소개해 주었다.
믿을 수 없는 사실 같지만 그녀는 같은 반이었다.
그 무렵 ‘입영영장’을 받아둔 내게 그 친구는
“3년간 군 생활을 견디려면 편지라도 주고받는 여자 친구가 있어야 한다.”
라고 하였다.
그렇게 시작된 만남은 몇 번 만나지도 못하고 끝이 났음은 지난번 ‘인연’편에서 이미 밝힌 바가 있다.
대화를 해본 8명은 실장이라는 직책에 따른 업무상 필요에 의한 대화였던 것 같다.
그렇게 용기가 없었던 내가 실장에 도전을 하였다.
아마도 활발한 성격으로 바뀌고 싶어 한 내면과의 싸움의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렵게 차지한 실장역할도 [예비고사]를 앞두고 스스로 그만두게 되었다.
시험에 집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담임께 말씀드리고 부실장이었던 팔〇 군에게 넘긴 사연은 다음 기회에 좀 더 상세하게...
반면에 여학생들과 스스럼없이 장난을 치며 대화를 나누는 덕〇 군이 그렇게 부러웠다.
나중에 교직에 종사하면서 [상담전문가 자격증]과 [심리상담사 자격증]을 취득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MBTI 검사를 해 본 결과 내 안에는
“드러내 놓고 타인과 사귀는 것이 초반에는 어렵다. 그러나 한번 사귄 후에는 믿음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간다.”
라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재직 중 학부모 상담을 비롯하여 보직교사를 경험하면서 점차 자신감이 생겼다.
퇴임 무렵 ‘운동회’나 ‘졸업식’, ‘학부모총회’시에는 많은 학부모와 내빈들이 모인다.
그들 앞에서도 떨지 않고 단상에서 당당하게 얘기를 할 수 있었던 경험은 소중한 추억이다.
이제는 나도 말할 수 있다.
그때 한 번도 말을 건네지 못했던 5명의 여학생들!
지금은 만나면 용기 있게 다가가서 말을 건넬 수 있다고...
[추억 大 소환]에 대한 댓글
와~이 사진 아직까지 ~~
세 번째가 창수아이가?
예나 지금이나 친구는 변함이 없네.ㅋ
친구는 항상 앞에서 일등 난 뒤에서 일등,
“됏나?”
“됐다!”
이 두 마디면 앞 뒤 생각 없이 행동했던 어울리지 않은 추억 많은 소싯적~
“근데 방학 때 꼴 비고 소 먹이기 싫어서 부산에 도망가서 ‘용두산 공원’ 밑에 밤이면 괴 소리 들리는 여인숙 방에서 둘이 한 달간 라면으로 인생 공부했던 추억은 소환 안 하노ㅎ”
- ‘용두산 공원’에서의 추억 소환 -
P군이 얘기하던 72년 무렵의 부산 [용두산 공원]이다.
50여년이 지난 오늘에야 박 군이 부산 타령을 했던 진실을 알게 되었다.
‘꼴비고 소 먹이기 싫어서 부산에 도망가서.......’
라고 했는데 당시에 내게 얘기하기론
“자신감을 기르기 위해서 웅변학원에 다녀야 겠다!”
라고 했다.
그러면서 나도 함께 동참하기를 권유했었는데 나는 부모님께
“대학에 진학하려면 부족한 ‘영어’와 ‘수학’을 더 공부하기 위하여 학원에 다녀야 한다.”
라고 말씀을 드렸다.
공부를 하려는 나의 뜻을 부모님들은 웬만하면 허락을 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종〇야!
웅변학원에 가야 한다더니 사실은 소 꼴 베기 싫고 소 먹이기 싫어서 부산에 가자고 했구나!
ㅋㅋㅋ
끝까지 비밀을 지켜주마!
하기사 이젠 거짓말이 탄로 나도 꾸중할 어른도 안 계시지…….”
이 사진은 그 무렵 좁은 여인숙 방에서 라면만 한 달을 끓여 먹고 보내려니 지루하기도 하고 촌놈들이 부산에 온 김에 바람이나 쐬자면서 [해운대 해수욕장]을 찾은 모습이다.
부산을 찾은 우리들은 [용두산 공원] 자락에 위치한 [대청여인숙]에 거처를 정했다.
가진 돈이 넉넉하지 않았으므로 여인숙 부엌에 있는 석유곤로를 이용하여 양은냄비에 라면으로 식사를 해결하였다.
라면 한 박스를 사 두어도 금방 동이 났다.
삼시 세끼를 라면으로만 해결했기 때문이다.
김치도 없이 라면만 먹다 보니 나중에는 라면이 쳐다보기도 싫었다.
김치를 집에서 가져가는 것은 상상도 못할 시절이었다.
가져가 봐야 ‘냉장고’도 없는 한 여름에 보관이 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져온 돈이 달막달막 하고 보니 식당을 찾는 것은 엄두도 못 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8월 한여름 밤은 무척 더웠다.
선풍기도 없는 좁은 여인숙 방은 견디기가 엄청 힘이 들었다.
그래서 밤이면 가지고 간 소형라디오를 들고 우리는 여인숙과 접해있는 [용두산 공원]으로 올라갔다.
그곳은 가끔씩 바람이 불어와서 집 보다는 견디기가 훨씬 좋았다.
자정이 되어 가자 시민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빈 의자가 보이자 그곳에서 잠시 누워 하늘에 별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고 말았다.
단잠을 자는 그 순간 누군가 흔들어 깨웠다.
순찰을 돌던 방범대원들이었다.
[야간통행금지]가 있었던 시절이었다.
자정이 넘은 시각에 공원벤치에서 잠이 든 수상한 놈이라서 대청파출소로 연행이 되었다.
[학생증]을 제출하고 방학이라서 공부를 하기 위하여 시골에서 왔다고 구구절절 사정을 설명 한 후에 풀려난 일이 있었다.
박 군이 얘기한
[밤이면 괴 소리 들리는 여인숙 방]
이란 공원 밑에 위치한 여인숙이다 보니 데이트 족들이 필요에 의해서 여인숙 방을 찾는 일이 많았다.
요즘 같으면 [시간제 대실]을 많이 찾겠지만 당시만 해도 공원에서 가까운 여인숙 방을 찾아서 서로를 즐기는 일이 자주 있었다.
고등학생인 우리가 처음부터 그러한 내용을 알 수가 없었다.
설사 알았더라도 가진 돈이 넉넉하지 않으니 방값이 싼 그 여인숙의 유혹에서 벗어날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여인숙’보다는 한 단계 위인 ‘여관’에서 지낼 형편이 못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원하지 않게 밤마다 요상한 소리를 듣게 되었다.
참으로 아득한 옛날 일이구나!
고인이 된 김 소장과 셋이서 무단결석을 한 후 경주로 [신라문화재] 구경을 간 사건과 양정냇가에서 수학여행을 한 후 막걸리 파티를 한 사건 등은 다음 기회로…….
종〇와의 첫 만남
나는 영덕군 성호초등학교에 다니다가 3학년 2학기 때 진보로 전학을 왔다.
같은 마을에 살고 있던 종〇와 처음 만난 것이 그 무렵이었다.
당시 친구는 나보다 한 학년이 높은 4학년 이었다.
내가 초등학교를 한 해 늦게 입학한 탓이었다.
그러한 그가 나와 같은 학년이 된 것은 우연한 사고 때문이었다.
우리 마을은 ‘고현저수지’둑 부근이었다.
그곳에는 지금도 시멘트로 만든 엄청 넓은 광장 같은 배수로가 있다.
물이 흐르지 않을 때는 마을 친구들의 운동장이었다.
공놀이도 하고 밤에는 달밤에 모여앉아 수건돌리기나 술래잡기를 하던 추억의 장소였다.
어느 날 큰 비가 와서 배수로 위로 물이 넘쳐흘렀다.
개구쟁이 우리들은 그 배수로 위 좁게 난 둑을 가로질러 건너편으로 건너갔다.
물이 흐르는 탓에 그곳에는 이끼가 끼어있었다.
그 것을 잘못 밟은 친구는 시멘트 바닥으로 된 배수로로 미끄러져서 떨어지고 말았다.
그렇게 부상을 입은 친구는 몇 달을 치료하느라 학교에 가지 못했다.
그래서 유급을 하게 되었고 나와 같은 학년이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은 중학교를 졸업하고도 같은 방법으로 이어졌다.
내가 가정형편으로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친구도 진학을 하지 않았다.
당시 우리 마을에서 가장 부자였던 친구가 진학을 하지 않은 것이 조금은 의아했다.
그때부터는 더 어울려 다녔다.
담배농사가 주 농사였던 그 시절 친구와 나는 ‘품앗이’를 하며 서로 농사일을 도와주는 것부터 겨울철이면 땔나무를 하러 다니는 것도 항상 함께였다.
우리 집은 ‘리어카’를 끌고 땔감을 하러 다녔지만 친구는 ‘소달구지’를 끌고 다녔다.
오르막길이 시작되는 고현저수지 입구나 험한 길에서는 고맙게도 소달구지 뒤편에 줄을 연결하여 리어카를 연결해주었다.
달구지가 있는 다른 사람들은 소가 힘이 든다고 물론 연결을 하지 않았다.
어떤 날은 영덕군과의 경계부근인 ‘황장재’너머까지 갔었다.
지금 생각하면 무지막지한 일이었지만 담배 굴에 화력을 높이기 위하여 보조재로 넣을 장작용 나무를 베는 중이었다.
정신없이 작업에 열중인 그때
“어떤 놈들이야!”
하는 고함소리와 함께 무섭게 생긴 주인이 나타났다.
우리는 주인에게 늘씬하게 빰을 몇대 얻어 맞고는 목덜미를 낚아채어 무릎이 꿇여진체 추궁을 받았다.
요즘 대장동 사건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죄 지은놈이 범인이다.'
지은 죄가 있으니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와 같이 지은 죄를 인정하고 사과를 하면 깨끛하게 끝이 날 텐데 뻔뻔스럽게 죄가 없다고 우기니 그것이 문제로다.
자기편을 지지하는 국민만 보이고 전체 국민을 우습게 보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요즘 국민들은 바보가 아니다.
상습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었다고 사정사정을 하였다.
도벌의 증거물인 톱을 압수당하고 겨우 풀려난 일은 두고두고 추억거리다.
‘황장재’를 너머 영덕 쪽에 가면 나무가 더 많았다.
그래서 우리들은 가끔씩 그곳까지 갔었는데 재를 올라오려면 엄청 힘이 들었다.
‘소달구지’야 소가 끌고 오니 괜찮았지만 나는 리어카를 끌고 와야 하니 죽을 맛이었다.
그렇게 힘이 드는 나를 위하여 자기 집 소는 힘이 들었지만 달구지 뒤에 줄로 리어카를 연결해 주었으니 참으로 친구는 마음이 따뜻한 친구다.
그렇게 끈끈하게 이어진 우정은 이듬해 고등학교에도 함께 진학을 하였다.
그리고 늘상 붙어 다니던 고교 시절!
어느 해 여름 방학 ‘농업계고등학생 교환실습’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나는 ‘예천농고’에서 ‘농업측량’을 친구는 ‘울진농고’에서 ‘국화고목재배’분야에서 체험을 하기도 하였다.
졸업을 한 직후인 1974년 1월 21일이었다.
길게 이어져 온 우리들의 우정도 중단이 되었다.
엄청 눈이 많이 내린 그날 ‘의성초등학교’운동장에서 논산행 기차를 타러 가면서 손을 흔들었던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곳까지는 나도 입영을 하기 위하여 갔었다.
다행히도 교육대학에 진학하면 ‘RNTC’ 입단대상자로 ‘입영연기’를 해 주었기 때문에 나는 입영열차를 타지 않았다.
그 후 군 생활을 제대하고 1979년 1월 1일이 되었다.
포항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친구가 어느 날 연락이 왔다.
‘달전’에 있는 아가씨와 결혼을 한다는 소식이었다.
결혼식에 참여할 고교동기들을 소환하였다.
항상 활달한 성격이었던 ‘덕〇’, ‘성〇’와 나는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포항으로 달렸다.
비포장 길이었던 당시 시간이 늦을까봐 급한 김에 먼저 가는 버스에 올랐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완행버스’를 타고 말았다.
동네마다, 고객이 요구할 때마다 정차를 하는 완행버스에서 결혼식 시간에 늦을까봐 조마조마하게 가슴을 졸이며 갔다.
시외버스터미널에서 택시를 타고 Go & Go!
다행히 아슬아슬하게 지각은 면했다.
결혼식 후 ‘청룡회관’에서 뒷 풀이를 한 것이 어제 같은데 종〇야!
제수씨도 잘 지내지?
1965년 '합강'으로 봄소풍을 갔다.
보리이삭이 고개를 내미는 초록빛 보리밭에서 같은 마을에 있는 친구들이 기념촬영을 했었는데
'창〇'는 보이지를 않네! '어디 화장실에 갔나?'
이 사진이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어릴 때의 나의 모습이다.
1967년 3월경에 한마을 친구들이 고현저수지 둑에서 입학기념으로 촬영을 하였다.
당시 우리마을에는 같은 학년이 8명이었다.
남자 친구들이 5명, 여자가 3명이었다.
그중에서 여자동기 3명과 남자 1명은 초등학교도 끝까지 못 다니고 중간에 그만 두었다.
결국 8명중 4명만이 중학교에 진학한 셈이다.
그런데 초등학교 봄소풍때 촬영한 위의사진에서 화장실에 가느라고 보이지 않았던 창〇는 보이는데 대신에 달〇는 보이지 않는다.
"이번에는 그 친구가 화장실에?"
그 친구는 진학을 하지 못했다.
당시엔 중학교 진학을 못하는 친구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1972년 가을 '비봉산'뒷산 자락에 있는 '수정사'계곡으로 소풍을 갔다.
당시엔 군사훈련을 받던 시절이라 '소풍'이란 용어 대신에 '행군'이라고 했다.
종〇와 짝꿍이었던 고인이 된 김소장과 나, 셋은 엄청 붙어서 다녔다.
1972년 고등학교 2학년 무렵이다.
가을이 되었다.
Jh군과 Jd군은 교실 짝꿍이다.
저희 둘이서는 거사를 실행하기로 뜻이 통한 후 한마을 짝꿍인 나에게 어느 날
“요즘 경주에 가면 「신라문화재」행사를 한다. 공부도 하기 싫고 구경거리가 많다는데 같이 가자!”
라고 한다.
“학교는?”
“땡땡이 치고 가자!”
그렇게 간 경주에서 서울에서 구경 온 멋진 누나들을 만났다.
상세한 얘기는 다음 기회로......,
1973년 봄에 실시한 수학여행이다.
경주로 당일 여행을 갔었는데......,
1973년 당시 처음으로 접한 칼라사진이다.
축구시합때 마다 명수비로 이름을 날렸던 기〇와 함께......,
첫댓글 추억속의 장면들 정겹습니다🎵
첫장면엔 저의 어릴적 모습도...
잠시 추억을더듬어 봅니다.
외출시 사복 이쁘게 입는게 여학생
들의 로망 이였지요.
지나고 보니 교복 단정히 입은 모습이 젤 이쁜데~~
추억여행 고맙습니다.
좋은여행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