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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126
8월19일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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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돈이 다가 아닙니다! 돈 없이도 살 만합니다!>
가끔씩 어깨 너머로 자주 듣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나라, 돈만 좀 있으면 정말이지 살 만한 곳이다.”
비록 우리나라 뿐이겠습니까만, 따지고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좁은 땅덩어리지만 여기저기 즐기고 누릴 곳 많지, 돈 좀 있으면 어디 가나 대우받지, 치안 안전하지...
그러다보니 돈이라는 것이 점점 위로 치고 올라와 우리네 삶 가운데 가장 윗자리를 떡 하니 차지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 한 존재를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잣대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가진 것 없으면 어디가나 홀대받고 무시당하기 일쑤입니다. 과도하게 돈돈! 하다보니 지금 돈은 최고의 자리를 넘어 하느님의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이른바 배금(拜金) 주의, 즉 돈 앞에 무릎 꿇고 절하는 시절을 살고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 경제적으로 위축된 삶을 살아가는 약자들, 빈자들, 노인들, 환우들은 시대의 변방으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부모 자식간에도 서로를 향한 기대치가 확연히 다릅니다. 특히 물질적 유산(遺産)이 넉넉한 가정에서는, 그로 인한 갈등과 상처가 빈발합니다.
유산 분배 과정에서 눈뜨고 볼 수 없는 비참한 현실과도 마주하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저희 집안은 너무나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남겨주신 물질적 유산이 없으니 그에 대한 기대치가 조금도 없습니다.
단 신앙이라는 멋진 유산을 남겨주셨으니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합니다. 앞다투어 효심을 발휘합니다, 따지고 보니 유산 많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네요. 이런 황금만능주의 시대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역할이 막중합니다.
‘돈돈! 뭐니뭐니 해도 돈이 최고다!’ 하는 세상 앞에 돈이 다가 아니라고 외쳐야겠습니다. ‘돈만 있으면 살만하다!’고 부르짖는 세상 앞에서 ‘돈없이도 살만하다!’고 외쳐야겠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이런 질문 앞에 서게 되면 즉시 다가오는 것이 당혹스러움이요 난감함입니다. 그만큼 우리 역시 자신도 모르게 배금주의, 황금만능주의에 깊이 빠져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곰곰이 따져보면 돈 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있는 대상들이 참 많습니다. 언젠가 영성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아주 존경하는 한 인물을 만나 차와 담소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그 만남 한번이 제게는 수억 나가는 금은보화보다도 더 소중했습니다. 그 만남이 제게는 몇천만원 공돈 생긴 것 보다 더 기뻤습니다. 우리 모두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일생에 한번씩은 체험하는 바입니다. 한 존재가 바람결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우연히 다가옵니다. 얼마나 사랑스럽고 소중합니까? 뭐라도 있으면 다 주고 싶습니다. 그 무엇도 아깝지 않습니다. 그러한 대상은 돈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지난 인생사와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주변 환경을 찬찬히 한번 살펴볼 일입니다. 과연 돈보도 더 우위에 있는 대상, 돈과는 비교가 안되는 특별한 것이 무엇인지 유심히 한번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없을 것 같지만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 대상들을 찾아내고, 그 대상들에 더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더 깊이 사랑하는 노력, 그것이 배금주의와 황금만능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좋은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황금만능주의에 흠뻑 젖어 살아가는 한 유다 청년과,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향해서, 참으로 듣기 거북한 쓴소리를 건네십니다. 그러나 외면하지 말고 귀담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내 자리에서 주님 말씀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가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오 복음 19장 21절)
버림과 추종을 주제로 한 예수님의 말씀에 어떤 분들은 그러실 것입니다. ‘나는 수도자로서 이미 다 버렸고, 이미 주님 추종의 길로 깊이 들어섰으니, 내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씀이려니...’
‘나는 팔것도 나눌 것도 없는 사람,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도 벅찬 가난한 사람인데, 나는 해당사항 없는 듯!’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 삶 속에는 재물 못지 않은 것들, 재물에 준하는 것들이 다양한 대상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내가 목숨이 끊어져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대상들이 있습니다. 이것 만큼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나만의 공간, 나만의 시간, 나만의 달란트, 내 삶 전체...! 그것들을 필요한 이웃들과 공유하고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 아주 좋은 포기요 나눔, 봉헌이요 추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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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하느님 나라를 향한 달음질>
자수성가한 사람들은 항상 “당신도 할 수 있어요. 내가 했는데 당신이 왜 못해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한 일은 결코 평범한 사람들이 따라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영화 터미네이터로 유명한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그는 보디빌딩에서 전설로 남은 인물입니다. 미국에 이민 온 오스트리아계 유학생이었지만 20살 때에 세계 최연소로 미스터 유니버스 대회에서 우승합니다. 그의 목표는 세계 최고의 보디빌더가 되는 것이었고 그것을 통해 영화배우가 되어 많은 돈을 버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보디빌딩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잘 먹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돈이 없으니 영양을 보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학에 다니며 건축현장에서 막노동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루 5시간씩 대학교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였습니다. 이것만도 시간이 부족할 텐데 저녁 8시부터 12시까지는 연기연습을 했습니다. 그는 하루의 단 1분도 허비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아놀드 슈워제네거는 수많은 영화에 출현해 성공작을 만들어냈고 나중엔 캘리포니아 주지사까지 하게 됩니다. 지금은 은퇴하고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강사로 활약 중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그래, 나도 하면 할 수 있다. 근데 왜 그렇게 고생하며 살아야 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냥 평범하게 살다 천국 가면 되는데 왜 그 고생을 하면서 살아야 할까요? 예수님이라면 그런 자수성가한 동기부여 강사의 말에 어떤 대답을 해 주실까요? 예수님은 그렇게 성공을 목표로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나무라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것이 만약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장려하실 것입니다. 대부분의 자수성가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주위의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 부자가 찾아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그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 와서 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완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냥 하느님 나라에만 들어가도 좋기는 하지만 더 큰 상을 추구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만약 하느님 나라에 들어갔는데 어떤 사람은 상을 받고 어떤 사람은 상을 받지 않는다면 하늘나라에서도 조금은 마음이 상할 것입니다. ‘내가 왜 조금 더 열심히 하지 않았을까?’라는 후회를 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도 이 세상에서 노력한 것만큼 큰 사람이 있고 작은 사람이 있습니다. 영어 격언 중 매우 짧으면서도 유명한 격언이 있습니다.
“No Pain, No Gain”
고통 없이는 얻는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공허하다고 말하며 그냥 하루하루 연명하듯이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요? 우리는 분명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간을 허비하라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시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목표가 있어야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세상에 존재하게 만드신 이유를 찾아야합니다. 그리고 목표를 찾았다면 열심히 달려야합니다. 노를 저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로 부르시어 주시는 상을 얻으려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필리 3,12-13)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는 지금 가진 돈을 가지고 불편하게 살아가는 삶을 두려워했습니다. 고통을 받기를 원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편하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상을 타고 싶다면 고통을 즐겨야합니다. 무료함과 지루함을 사랑해야합니다. 그것 없이는 어떠한 성취도 이루어내지 못합니다. 무하마드 알리에겐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한 번은 기자가 그를 찾아갔습니다. 그때 알리는 윗몸일으키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기자가 물었습니다.
“윗몸일으키기를 몇 개나 하시죠?”
알리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아픔이 느껴지기 전까지는 세지 않습니다.”
그럼 언제부터 세기 시작한다는 것일까요? 고통이 와서 그만하고 싶을 때부터 세는 것입니다. 힘이 들 때부터 진짜 운동이 되기 때문에 더 많이 하고 싶어서 그런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 나라에서 상을 받고 싶다면 내가 견딜 수 있는 시간보다 10분 더 성체 앞에 앉아 있으려고 노력합시다. 내가 할 수 있는 묵주기도보다 1단만 더 하도록 해 봅시다. 내가 읽은 성경보다 1절만 더 읽으려고 해 봅시다.
이런 ‘조금 더’들이 쌓이면 하느님 나라에서 받을 상급도 그만큼 더 쌓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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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9,16-22 : 하느님 나라와 부자 젊은이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16절) 돈 많은 젊은이가 예수님께 나아가 ‘영원한 생명’을 청했다. 그 젊은이가 생각하는 영원한 삶이란 자신의 만족과 함께 하느님을 함께 누리고자 하는 편안함이었던 것 같다. 이 질문은 율법을 잘 지키고 선행을 쌓음으로써 그 대가로 영원한 삶을 받겠다는 것으로 나타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그 계명은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18-19절)는 것이라고 하신다. 이 젊은이는 그 계명들을 지켜왔다고 말한다. 그는 그것 외에 영원한 생명을 위해 또 다른 것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런 그에게 더 큰 계명이 주어진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21절)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은 그것을 잃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보화를 쌓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나를 따르라고 하신다. 율법을 따른다고 하면서 주님을 따르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는 슬퍼하며 떠나갔다.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우리의 선택만이 남아있다. 완전하게 되려고 한다면 자기가 가진 것을 팔아야 한다는 것이다. 판다는 것은 포기한다는 의미이다.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지 않으면, 즉 악을 끊고 선을 행하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을 본받고 그분이 가신 길을 가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을 가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가난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는 이들은 그들을 위해 기도를 해 준다. 도움을 주는 사람은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영적인 부를 나누어 받아 자신에게 모자라는 것을 채움으로써 자신의 구원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기도를 들으신다. 물질적으로는 가난해도 영적인 선물은 풍성히 받는 사람들이 그 사람들일 것이다.
그 젊은이는 이 말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22절)고 한다. 그는 재산을 아주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어려서부터 계명들을 잘 지켜왔다고 했지만, 그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든지 간에 아직은 미성숙한 사람이었다. 그 젊은이의 비극은 그 자신의 재물을 가지고 이웃에게 봉사하기보다는 그 재물에 더 아까워하고 마음이 집착되어 있다. 당연히 예수님께 등을 보이지 않을 수 없으며, 무엇인가 둘 중에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데, 결국 재물을 포기할 수 없을 때, 오늘 복음의 젊은이처럼 슬픈 얼굴로 예수님을 떠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오늘 복음에서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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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홍보국장/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독서는 판관들이 다스리는 동안에 선택된 백성의 역사를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느님을 포기하고 그들의 현실적인 욕망을 채워 줄 수 있는 다른 신들을 섬기며, 이집트 종살이 탈출과 해방, 곧 구원의 큰 행위를 잊어버리고 늘 똑같은 죄를 저지릅니다. 주님의 진노와 처벌은 그들의 행실에 따른 결과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들의 잘못으로 다시 억압과 종살이의 상황에 빠집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시려고 판관들을 세우십니다. 판관들은 하느님께 용서를 빌고 중재합니다. 그러나 판관이 죽은 뒤에 그들은 하느님의 눈에 악한 일을 다시 저지릅니다. 이는 참으로 인간이 저지르는 죄의 단조롭고 슬픈 역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회개로 이끄십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모든 상황에서 그리고 저지른 모든 죄악에도 아랑곳없이, 하느님을 믿고 충만한 생명을 회복하려고 자비로우신 주님께 돌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충실은 인간의 불충실보다 탁월합니다.
오늘 복음은, 인간적인 충실은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면서 우리에게 외적인 가르침을 제시합니다. 마음에 들어찬 재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유롭고 전적으로 따라가는 것을 가로막습니다. 많은 재물을 가진 사람은 옛 법을 충실하게 지키지만, 복음의 새로움을 향하여 확실하게 뛰어들 용기를 갖지 못합니다.참된 보물을 차지하려고 모든 것을 멀리하는 것이 성공적인 인생의 비밀입니다. 여기에서 재물은 예수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헌신하는 것을 가로막는 온갖 애착을 상징합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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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의 나라와 부자>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마태 19,16)
여기서 ‘어떤 사람’은 ‘젊은이’이고, 부자이고(마태 19,22), 어려서부터 십계명을 잘 지켜 왔고(마르 10,20),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는 경건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간단합니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마태 19,17)
십계명을 제대로, 즉 온전히 지키기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그런데 십계명은 사랑을 실천하라는 계명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7-40)
이 두 계명을 다시 하나로 압축한 것이 ‘황금률’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요한복음 3장을 보면, 예수님을 믿어야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말이 나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요한 3,35-36)
십계명을 지키는 일과 예수님을 믿는 일은 어떤 관계일까?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일은, 예수님께 모든 것을 내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일, 즉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이기 때문에, 이 일도 십계명을 지키는 일에 포함됩니다.
사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뒤를 충실하게 따르는 사람은 당연히 십계명을 잘 지킵니다. 반대로 표현하면, 십계명을 잘 지키면서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실행하는 사람은 당연히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게 됩니다. 만일에 어떤 사람이 십계명을 잘 지키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예수님의 뒤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십계명을 잘 지키는 사람이 아닙니다. 또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뒤를 잘 따르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십계명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면, 그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젊은이가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하고 다시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마태 19,20-22)
여기서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라는 말은, “부족한 것이 없다.”라는 뜻이 아니라, “아직도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 있음을 느낍니다.” 라는 뜻입니다. “부족한 것이 있음을 느낀다.”를 “공허감을 느낀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십계명을 잘 지키고 있고, 자기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하고 있고, 재산이 많아서 물질적으로 여유 있게 살고 있고, 그런데도 무엇인가 채워지지 않은 느낌, 허전한 느낌... 그는 그 공허감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왔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텅 빈 것 같은 허전한 느낌에서 벗어나려면 무엇인가를 ‘채워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에게 기대했던 답변도 그런 것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채워 넣는 일’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버리고 비우는 일’을 말씀하십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을 버리고 마음을 비워야만 영적으로 가득 채울 수 있다.”
자기 안에 가득 차 있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을 모두 버리고, 마음을 비우고, 영적인 것으로 가득 채우는 일은, 이 세상에서의 공허감에서 해방되는 일이고,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 일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들을 버리지 못하고 움켜쥐고만 있으면, 영적인 것이 들어갈 공간을 자기 스스로 없애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이 이야기에 나오는 젊은이는 재물을 섬기는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그가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이라는 것은 맞는데, 그 ‘섬김’이 부족합니다. 앞에서 이미 언급했던 ‘하느님 사랑’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 사랑은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해서” 실천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젊은이는 재물 때문에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 갈래로 흐트러져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라는 예수님 말씀은,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고 사랑을 실천하여라.”라는 뜻인데, “온 마음을 다하여 사랑을 실천하여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십계명을 완전하게 지키려면, 재물 때문에 흐트러져 있는 마음과 정신을 바로잡아야 하고, 그 방법은 능동적으로 재물에서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즉 재물을 자기 품에서 내보내야 합니다.)
다시 단순하게 정리하면, 그 젊은이의 ‘부족한 점’은 사랑 실천이 부족한 것과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사실상 하나의 문제입니다. 재물에 대한 애착심이 크면 사랑 실천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자신의 ‘모든 것’을 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는 도대체 무엇이 슬펐던 것일까? 그는 분명히 많은 재물로도 채울 수 없는 공허감을 느껴서 예수님을 찾아왔는데, 버려야 할 것을 과감하게 버릴 용기와 결단력이 부족해서 계속 그 공허감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을 슬퍼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자기 자신의 나약함을 슬퍼한 셈이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리 3,8)
지금 소중하게 여기면서 애지중지하는 것들이 영원한 생명과는 무관한 것이라면, 그것은 전부 다, 하느님 나라의 기준으로는 버려야 할 ‘쓰레기’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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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김광태 야고보 신부님]
<부자 청년>
젊은이는 다른 부자들과 달랐습니다. 재물에 취해 하느님을 몰라보지도 않았고, 흥청망청 낭비하지도 않았습니다. 십계명도 다 지켰다니 그 열성을 인정해줄 만합니다. 유혹도 많았을 텐데, 자신을 지켜가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겠습니까. 그런데도 이 젊은이는 예수님을 만나고 충격을 받습니다.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젊은이가 그동안 초점을 맞춘 부분은 ‘선한 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주체가 되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즉 많은 재물을 활용하여 하느님께 열성을 바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예수님께서 그에게 요구하신 것은 하느님이 그의 삶에 주체가 되시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또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어떤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자신의 삶 전체로 하느님을 섬기라는 것이었습니다. 재물이 악이라서가 아닙니다. 재물은 힘을 지니고 있어서 쉽게 사람들을 지배하고 오염시킵니다. 그 힘을 동원해서 하느님과의 관계까지도 해결하고 싶어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보잘것없는 자기 재물에 의지할 수 없다 보니 하느님께 의지하는 일이 상대적으로 수월합니다.
피조물인 우리는 본래 가난한 존재가 아닙니까? 하느님이 참된 주인이시라는 걸 잊지 않아야 부자 청년처럼 다른 데로 발길을 돌리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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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세속적 소유로부터 자유로운 만큼 예수를 따른다>
갈릴래아에서의 선교활동을 마치신 예수께서는 유다지방을 두루 거쳐 예루살렘으로 상경하고 계신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상경기: 마태 19,1-20,34)
예수님을 따라 열두 사도들은 물론, 여인들까지 포함된 큰 제자단과 많은 사람들, 그리고 어린아이들까지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다. 무엇 때문에 이 사람들은 예수를 따라가고 있는 것이며, 마지막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짐작이나 하고 있을까?
마태오는 지난 토요일, 어린아이들을 축복하신 내용의 복음(19,13-15)에 이어 오늘과 내일 복음으로 ‘예수추종’에 관한 가르침(19,16-30)을 들려준다. 예수추종에 관한 대목의 가르침은 크게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① 부자청년이 재산을 버리지 못하여 예수추종을 거부했다는 이야기(16-22절), ② 부자의 구원은 불가능하다는 단언(23-26절), ③ 예수추종에 대한 보상에 관한 대담(27-30절)이다.
오늘 복음은 두 가지 주제와 한 가지 결론을 담고 있는데, 처음 것이 나중 것에 종속되고, 예수추종으로 종결된다고 하겠다. 그 과정은 부자청년의 질문을 계기로 전개된다.
첫 번째 주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계명을 준수하라는 것이고, 두 번째 주제는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한 방법으로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원전(原典)이 되는 마르코복음의 같은 대목(10,17-22)과 비교하여 보면 마태오의 의도를 잘 읽을 수 있다. 마태오는 마르코의 원전을 약간 수정하였다.
이야기의 발단은 한 젊은이가 예수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선행(善行)에 대하여 질문한다. 예수께서 제시하시는 조건은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서, 십계명(출애 20,12-16; 신명 5,16-20) 중에서 부모를 공경하라(제4계명), 살인하지 말라(제5계명), 간음하지 말라(제6계명), 도둑질하지 말라(제7계명), 거짓 증언하지 말라(제8계명),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열거하신다.
마지막 이웃사랑에 대한 계명(레위 19,18)은 마르코에 없는 것을 마태오가 첨가하였다. 그 이유는 이미 산상설교(마태 5-7장) 안에 들어있다. 산상설교에서 이웃사랑이 직접 언급된 바는 없지만, 이웃사랑은 예수님의 대당명제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충분히 부각되었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율법학자와의 대담에서 하느님사랑(신명 6,5)과 이웃사랑(레위 19,18)의 계명을 율법서의 가장 큰 계명으로 천명할 것이다.(마태 22,34-40)
청년이 이 모든 계명들을 어릴 적부터 잘 지켜왔다고 하니, 그에게 영원한 생명은 보장된 셈이다. 그러나 영생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았던 것일까?
“아직도 무엇을 더 해야 하겠습니까?”(20절)라는 청년의 질문이 계속된다. 마르코는 이 대목에서 예수께서 청년을 보시면서 “너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10,21)고 말씀하신다. 유대교에 의하면 사람은 율법을 온전히 지킬 때 완전하게 된다. 예수께서도 산상설교에서 6개의 대당명제 끝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고 말씀하셨다.
여기서의 완전함은 유대인들의 생각과는 다른 것이며, 예수께서 제시하시는 율법의 근본정신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보시는 인간의 완전함은 단순한 계명 준수를 뛰어넘는 것이다. 즉, 계명 준수와 함께 선행과 추종이 요구된다는 말이다.
복음에서 보듯이 부자청년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난 뒤에 예수추종을 요구받는다.(21절) 그러나 그는 부자였기 때문에 풀이 죽어 떠나가 버린 것으로 오늘 복음은 끝난다.(22절)
계명을 지키며 사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는다. 우리는 재산을 많이 가진 부자로서 계명을 지키며 살아 갈 수도 있고, 큰 재산 없이 가난한 자로서 계명을 따라 살아 갈 수도 있다.
중요한 사실은 한번 계명을 지킨 것으로 영생을 보장받거나 자신의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푼다고 해서 당장 완전한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계명 준수와 선행은 종말론적인 영생과 완전함을 위해 평생을 두고 반복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덕행이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과 완전함은 미래지향적이다.
부자청년은 지금까지 계명을 잘 지켜왔다는 결과로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은 듯하지만 그가 살아있는 동안 계속해서 계명을 준수해야 하는 조건이 남아 있다.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는 것도 신나는 일이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에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은 더욱 신나는 일이다.
완전함은 최종적으로 예수를 추종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이 추종은 또다시 역으로 세속적 소유로부터의 자유를 요구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세속적 소유로부터 자유로운 만큼 예수를 추종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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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완전한 사람>
마태오 19,16-22 (하느님의 나라와 부자)
그때에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그가 “어떤 것들입니까?” 하고 또 묻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젊은이가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하고 다시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완전한 사람>
무엇 무엇을 가진
어떠어떠한 사람에서
무엇 무엇과
어떠어떠한을 떼어내고
그저 다만
사람만 남아
무엇 무엇도 없고
어떠어떠한도 없어
그저 달랑
사람일 수밖에 없는
사람과 더불어함께
무엇 무엇인 세상이 아니라
어떠어떠한 세상이 아니라
그저 다만
사람 사는 세상
일구는 사람
하느님 자리 박차고
그저 다만
사람이 되어
무엇 무엇도 없고
어떠어떠한도 없는
그저 달랑
사람만 남은
사람과 더불어함께
사람 사는 세상
일구던 예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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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고민 좀 하고 합시다>
저는 가끔 이런 말을 합니다.
“고민 좀 하고 삽시다. 생각 좀 하고 삼시다.”
그 답은 ‘하이데거’라는 철학자가 해 줍니다.
“하이데거”는 ‘우리 인간은 3가지 고민 덕분에 괴로워하면서도 사람답게 살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저는 그 말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첫째, 물질에 대한 고민입니다.
둘째, 인간에 대한 고민입니다.
셋째, 자신에 대한 고민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어떤 사람이 나옵니다. 성경에서는 어떤 사람이 이름이 누구인지를 밝히지 않고 침묵하고 있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좋은 점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열심히 한 신앙인이었고, 영적으로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보다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습니다.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을 지켜라.”라고 하시면서 여러 가지 계명을 가르치십니다. 그러자 그 어떤 사람(이제…. 젊은이)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런 것들은 어려서부터 잘 지켜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그 어떤 사람은 “이만하면 충분하고 완전하게 지키면 됐지요?”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어떤 사람에게는 3가지 고민이 없었습니다.
1) 물질에 대한 고민이 없습니다. 부자였기에 그랬습니다.
2) 인간에 대한 고민이 없습니다. 자기 주어진 모든 것을 다 지켰다고 생각했기에 그랬습니다
3) 자기 자신에 대해 고민이 없었습니다. 너무나 자기를 몰랐던 것입니다. 자기 삶이 완전하고 충분하다고 인정받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바로 거기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완전하지도 않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면, 그 어떤 사람은 다른 이웃에 대한 따뜻한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따뜻한 마음이 없었다는 것은 기쁨이 없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자 젊은이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한 가지 부족한 것을 채우지 못하고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이제 한 가지 부족한 것 때문에, 그 젊은이가 얻고자 했던 영원한 생명이 새어나가고, 하느님의 모든 축복이 새어나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따뜻한 마음이, 기쁨이 있는 삶이 복음에 나온 그 어떤 사람에게는 십자가였던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품ㅈ에 안거나 지고 갈 수 없었으니...
사랑하는 고운님들!
성인들께서는 온 생애를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에 평생을 바치시고 살아내셨습니다.
분명히 힘듦이, 시련과 역경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들 때문에 성인들의 마음이 흔들렸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성인들은 그 흔들리는 마음속에 십자가를 품고 살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가끔, 아니 자주 믿음의 마음이 흔들릴 때가 있을 것입니다. 사람 때문에, 두려움 때문에, 그리고 자신의 욕심 때문에 우리 믿음의 마음이 심하게 흔들리고 아파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 심중에 십자가를 붙들고 미사에 참례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심중에 십자가를 모시고 묵주기도를 바치십시오. 그러면 믿음의 마음을 흔들리게 했던 그것들을 잠재울 수 있습니다.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신앙생활에서도 다른 이들에 대한 따뜻한 마음이 있을 때 고운님들의 몸과 마음이 병들지 않음이, 그리고 치유의 은총이 있음을 십자가 앞에서 뜨겁게 고민하는 은총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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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228)
♧♧ 시편 44편 7절….
"정년 저는 제 화살을 믿지 않습니다. 제 칼이 저를 구원하지도 않습니다."
이 구절은... 4절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이 인간의 힘이 아닌 하느님의 능력과 은총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고백한 것으로, 현재 그리고 미래의 어떠한 난국도 인간의 힘만 의지하고 해결하려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야훼 하느님을 절대 의지하겠다는 고백입니다.
♧♧ 시편 44편 8절….
"오직 당신께서 저희를 적들에게서 구하시고 저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망신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조상들을 구원하신 사건에 대한 3절의 언급에 이어, 이번에는 당시에 백성들을 적들의 위협에서부터 구원해주신 과거의 구원 사건에 대한 언급입니다. 이는 곧 하느님께서 과거에 자신들에게 구원을 베푸신 것처럼 이번에도 국가적 위기에 직면한 이스라엘을 구원해 달라는 다윗의 간구입니다.
♧♧ 시편 44편 9절…
"저희가 날마다 하느님을 찬양하고 줄곧 당신 이름을 찬송합니다. 셀라"
* ‘날마다...’는 ‘모두’ 라는 뜻의 히브리어 ‘콜’과 ‘날’, ‘낮’을 뜻하는 ‘욤’이라는 합성된 단어로 ‘하루 온 종일’ 이란 뜻입니다.
* 하느님을 찬양하고 줄곧 당신 이름을 찬송합니다... 이는 하느님께 대한 찬양의 다짐은 8절에서 언급한 대로 과거의 구원 사건에 대한 지극한 감사의 표현임과 동시에 미래의 구원에 대한 확신의 표현입니다.
* 셀라... 시편에 자주 나오는 음악 용어로 노래를 부를 때 소리를 높이라는 지시어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내일은 시편 44편 10-12절을 공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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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죄를 짓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언제 이 죄를 짓게 될까요? 이에 대한 답으로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 것에 대한 욕심이 커졌을 때, 이기심이 극대화되었을 때,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사라졌을 때…….
이에 대한 답을 명쾌하게 내려주신 성인이 한 분 계십니다.바로 아오스딩 성인이시지요. 성인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순서가 바뀌면 죄를 짓게 된다.”
이웃 사랑과 돈 사랑이 있습니다. 여기서 분명히 사랑의 순서는 이웃이 먼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웃이 아닌 돈 사랑이 먼저가 될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돈이 먼저이기 때문에 이웃을 속여서라도 돈을 벌려고 한다면 이것이 죄가 됩니다. 또한 돈 사랑으로 인해서 어려워하는 이웃을 외면한다면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도 생각해보십시오. 친구가 내게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러면서 이 고민에 대한 비밀을 지켜달라고 합니다.
어느 날 친구들 모임이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자신의 인기를 올리기 위해서 그 비밀을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말했습니다. 이 역시 인기에 대한 사랑이 우정에 대한 사랑보다 더 위에 놓았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됩니다. 내 사랑의 순서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사랑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지, 아니면 낮은 곳에 있는 사랑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이에 따라 죄 중에 있을 수도 있고, 반대로 은총 속에서 행복한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한 젊은이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우리의 최종 목표라고도 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의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은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떠한 일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십계명을 지켜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계명들을 충실히 다 지켜왔다는 젊은이는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라고 묻지요. 주님께서는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라고 하십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준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사랑의 우선순위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재산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의 우선순위가 바뀌었을 때,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의 뜻을 제일 윗자리에 두고서 주님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합당한 모습으로 따르고 있을까요? 사랑하는 순서를 잘 따져보면 주님을 제대로 따르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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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먼저...}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나 선생님들, 그리고 전문강사들로부터 이런 말을 자주 듣습니다.
“가르치면서 배웁니다.”
저 역시 신학교에서 강의하고, 이곳저곳에서 강사로서 많은 강의를 하다 보니 이 말에 큰 공감을 하게 됩니다. 분명히 가르쳐야 확실하게 내 것으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솔직히 이해되지 않는 개념이 전혀 없지 않습니다. 그런데 강의를 하다 보면 이해되지 않던 개념들이 정리되고 쏙쏙 이해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의 지식을 만들어가는 것이지요.
이는 사랑의 실천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종종 내가 먼저 사랑을 받아야 사랑을 줄 수 있다고 말하지요. 그런데 사랑을 먼저 줘야지 사랑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사랑으로 서로가 힘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베푸는 사랑, 진정으로 상대방을 위한 사랑을 베풀 때, 내 안에서 사랑의 정의가 분명하게 세워집니다. 이웃을 향한 나의 사랑이 먼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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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매일 아침 산책하는 것이 취미이며 운동입니다. 성당, 현대시장, 성현동 성당, 봉천 고개, 상도 중학교, 중앙시장, 성당입니다. 1시간 30분 정도 걷습니다. 중간에 운동기구가 있어서 허리, 다리 운동을 합니다. 요즘은 방학이라 학생들을 보지 못하지만, 학생들의 생기있는 모습을 보는 기쁨은 덤입니다. 며칠 전입니다. 한 학생이 빨간불인데 건널목을 건너려고 했습니다. 저는 급히 학생을 불렀습니다. 학생은 스마트폰을 보면서 무심결에 건너려고 했습니다. 스마트폰이 좋고, 중요하겠지만 건널목을 건널 때는 신호를 꼭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는 옷을 입고 삽니다. 옷은 간편하고, 실용적이면 좋습니다. 사제는 사제의 복장을 하면 좋습니다. 스님은 승복을 입으면 좋습니다.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품위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옷을 입습니다. 체면이라는 옷, 가식이라는 옷, 직책이라는 옷, 욕심이라는 옷, 시기와 질투라는 옷, 책임이라는 옷, 도덕과 규율이라는 옷입니다. 재물, 명예, 권력이라는 옷도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옷이지만 말과 행동으로 그 사람이 입고 있는 마음의 옷은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칼릴 지브란은 ‘옷’이라는 이야기를 남겨주었습니다. “그대의 옷은 그대의 아름다움은 많이 가리면서도 아름답지 못한 것은 가리지 못하는 것. 그대는 옷으로 개인의 자유를 얻으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갑옷이 되고 사슬이 됨을 깨닫게 되리라. 그대가 옷을 좀 덜 입고 살을 좀 더 내놓아 태양과 바람을 더 많이 만날 수 있기를. 생명의 숨결은 태양 속에 있고, 생명의 손길은 바람 속에 있으므로. 잊지 말라. 부끄러움은 순수하지 못한 이의 눈을 가리는 방패일 뿐. 순수하지 못한 것이 거기 더는 있지 않을 때, 부끄러움은 오히려 마음의 족쇄, 마음의 얼룩이 아니고 무엇인가. 또한, 잊지 말라. 대지는 그대 맨발의 감촉을 기뻐하고, 바람은 그대의 머리카락과 장난치기를 갈망하고 있음을”
오늘 복음에서 한 젊은이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젊은이에게 길을 알려 주었습니다. “살인해서는 안 됩니다. 간음해서는 안 됩니다. 도둑질해서는 안 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해야 합니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젊은이는 규율과 율법이라는 옷을 잡 입고 있었습니다.
젊은이는 예수님께 무엇을 더 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옷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재물, 명예, 권력이라는 옷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체면, 가식, 율법이라는 옷까지 벗으라고 하십니다. 욕심, 시기, 질투라는 옷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진정한 자아를 보라고 하십니다. 진정한 자아를 보면 누군가에게 묻지 않아도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 보입니다.
모범생들은 열심히 살았다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공부도 잘했고, 법도 잘 지켰고, 성실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신학생 중에도 이런 모범생들이 있습니다. 모든 면에서 잘하는 학생들입니다. 그런 모범생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더 큰 사명을 주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컴퓨터도, 내비게이션도 업그레이드를 시켜 주어야 합니다. 아무리 모범생이라 해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보다 큰 노력이 필요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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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원한 생명의 구원>
-끊임없는 회개-
우리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호감을 드러낼 때는 흔히 ‘우리’라는 수식어가 들어갑니다. “회개하면 성인이 될 수 있어도 부패하면 성인이 될 수 없다. 회개한 다윗은 성인이 되었지만, 부패한 솔로몬은 성인이 되지 못했다.”, 참 재미있는, 의미심장한 통찰입니다.
살아있을 때 회개이지 죽으면 회개도 끝입니다. 회개하라 주어진 하루하루 인생입니다. 회개할 때 비로소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 과일도 살아있을 때 익어가지만 죽으면 썩어가기 시작합니다. 살아있어도 병들어 있는 과일을 보면 익어가면서 동시에 썩어갑니다. 그대로 놔두면 나중엔 온통 썩어서 먹을 수 없습니다. 인생의 이치도 이와 똑같습니다.
어제 저녁식사후 복숭아를 먹으며 수도형제들과 이야기 나누며 새삼스럽게 확인한 진리입니다. 옆의 형제가 겉은 곱고 먹음직스러워 복숭아 껍질을 벗기니 썩어서 거의 통째로 버렸습니다. ‘아, 사람도 겉은 멀쩡해도 속의 영혼은 이렇게 부패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즉시 나눈 대화입니다.
“회개도 때가 있습니다. 너무 늦어서 썩으면 회개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조금 썩었을 때 얼른 도려내고 먹을 수 있듯이 조금 썩었을 때, 부패했을 때 즉각적인 회개가 필수입니다. 아니 ‘썩어가는’ 부패腐敗인생이 되지 않고 ‘익어가는’ 발효醱酵인생이 되기 위해서 끊임없는 회개가 필수입니다.”
요지의 대화를 나눴습니다. 과연 우리는 ‘썩어가는’ 인생입니까? 혹은 ‘익어가는’ 인생입니까? 썩어갈 때 악취惡臭요 익어갈 때 향기香氣입니다. 봄의 꽃향기도 좋지만 가을의 익어가는 열매의 향기는 더 좋습니다. 사람 영혼 역시 냄새가 향기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제 가을이 되면 과일도 익어가기 시작합니다. 역시 인생 가을도 믿음, 희망, 사랑 즉 신망애信望愛의 열매들 익어가는 시절입니다. 참으로 ‘썩어가는’ 인생이 아니라 ‘익어가는’ 향기로운 인생이 되기 위해 죽을 때까지 끊임없는 회개는 필수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도 참 귀한 깨달음을 줍니다. 유의할 바 오늘 복음의 배치가 예수님께서 어린이들을 축복하신 예화 다음에 나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 나라는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며,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의 어떤 부자의 질문은 사막의 스승을 찾았던 구도자들의 공통적 물음입니다.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부자의 영적 목마름을 반영합니다. 겉은 멀쩡하지만 내면은 행복하지 않음을 반영합니다. 기쁨과 감사도 없습니다. 역시 부자는 무지에 눈이 멀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을 눈앞에 두고도 몰라보고 영원한 생명을 물으니 말입니다. 부자의 내면을 통찰하신 주님의 지혜로운 접근입니다. 예수님은 지켜야 할 구체적 계명들을 나열하시자 부자는 말합니다.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켰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분명 부자는 착한, 좋은 신자임이 분명합니다. 그래도 결정적인 것이 하나 빠졌습니다. 삶의 중심에 주님이 아닌 재물이 있었습니다. 겉은 멀쩡하지만 속의 영혼은 부패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래서 회개입니다.
끊임없는 회개란 살기위한, 무너지지 않기 위한, 썩지 않기 위한, 영혼의 몸부림이요 발버둥입니다. 이래서 ‘회개의 시스템’ 같은 일과표에 따라 매일, 평생, 규칙적으로, 끊임없이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인 성무일도와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부자의 내적 증상이 중증임을 알아 챈 주님의 즉각적인 극약같은 처방입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바로 이 말씀은 사막의 성자 안토니오는 물론 아씨시의 프란치스코를 회심시킨 복음입니다. 부자의 무지를 일깨우는 처방 말씀입니다. 탐욕의 무지에 눈먼 부자는 여전히 예수님이 영원한 생명이심을 알아 보지 못합니다. 삶의 중심에 재산이 요지부동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에게 이런 처방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오늘 복음의 부자에게만 하셨습니다. 재물이 문제가 아니라 재물에 집착하는 영혼이 문제입니다.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입니다. 재물을 소유하되 이탈의 정신으로 나누면서 존재를 사는 것이 진짜 지혜로운 삶입니다. 하여 날마다 회개를 통해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 하신 것입니다.
젊은 부자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났으니 그가 많은 재물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외적으로 계명을 잘 지킨 좋은 신자였지만 삶의 중심에는 하느님이 아닌 재물이 자리잡고 있었기에 그처럼 허전하고 목말랐던 것인데 절호의 좋은 기회를 놓쳤습니다.
하느님이 아닌 재물이 삶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공허한 삶이라면 결코 참 기쁨, 참 평화, 참 감사, 참 행복도 기대할 수 없으니 실상 역설적으로 불행하고 가난한 부자입니다. 참으로 시공을 초월하여 복음 말씀을 듣는 청자聽者들인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영원한 깨우침을 주는 예화입니다.
결론하여, 계명을 지켜서 영원한 생명의 구원이 아니라 끊임없는 회개로 자기를 버리고 주님을 따라 섬겨야 구원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섬길 때 예수님을 닮아 자연스럽게 저절로 따라 오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의 실천들입니다. 예수님이란 참 보물을 삶의 중심에 모실 때 저절로 재물욕으로부터의 이탈로 참으로 자유로운 삶입니다. ‘주님 맛’을 알아갈 때 비로소 ‘돈맛’은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판관기의 시작입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인간 죄의 현실을, 구제불능의 인간 현실을 봅니다. 주님을 섬기다가 그리도 빨리 유혹의 탈선으로 주님의 구원은혜를 잊고 세상 우상들을 섬기며 부패해가는 배은망덕背恩忘德의 영혼들입니다. 이들 이스라엘 백성들은 판관들의 말을 듣지 않을뿐더러 다른 신들을 따라가 섬기고 경배하며 불륜을 저지르곤 합니다. 예나 이제나 여전히 반복되는 인간 현실입니다.
주님을 따르지 않고 이방 잡신들이나 우상을 섬기는 것을 ‘불륜’이라 칭합니다. 불륜으로 파괴되는 가정처럼 이런 영혼의 불륜인 세상 잡신이나 우상들을 섬김으로 내적으로 분열되고 파괴되는 영혼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사실 둘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영혼의 불륜에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육신의 불륜입니다.
하늘 아래 새 것은 없습니다. 문제는 잊혀지는 것이 아니라 묻혀지는 것입니다. 깊이 묻혀진 좋은 것을 기억해 내어 새롭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이래서 믿는 이들의 삶은 영적 전쟁의 삶이요 우리는 주님의 영원한 전사가 됩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기에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주님을 따르며 섬김으로 주님을 닮아가는 주님의 전사들인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회개한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사하시며, 썩어가는 부패인생이 아닌 익어가는 발효인생을 살아가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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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나를 옭아매는 것>
주머니에 돈을 넣고 다니면 흐뭇합니다. 언제든지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쓰지 않아도 든든합니다.
그러나 돈이 없으면 불안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생깁니다. 저는 주머니에 돈을 넣고 다닙니다.
평상시에는 아무 생각이 없다가도 간혹 주머니에 돈이 없는 것을 알게 되면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주머니를 비워놓던 사람은 그런 것에 자유롭습니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답을 알려 주셨습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19, 21)
그러나 젊은이는 답을 얻었으면서도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그는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해답을 얻었으면 그대로 해야 합니다. 답을 얻었으면서도 그대로 하지 않아 하늘의 보화를 차지하지 못하는 것은 본인의 책임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영생에로 인도하면서 길을 알려 주시고 동행하여 주시지만 본인이 거부하는 데는 어쩔 수 없습니다.
사실, 부자에게는 돈이 전부입니다. 그의 재산은 곧 목숨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씀은 단순히 자선을 베풀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죽이라는 말씀입니다. 재산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거기에 목숨을 걸고 사는 사람이 있으니 문제 입니다. 사람 나고 돈 났다는 것을 알지만 돈에 매이는 것이 사람입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아프리카의 가난한 어린이들을 돕는 젊은이도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돈 때문에 형제부모도 없는 사람처럼 싸우는 재벌들의 추한 모습을!
주목할 것은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이라는 말씀입니다. 선한 일을 하는 공로를 뛰어넘는 것이기 대문입니다. 우리는 단순한 공로로 구원을 얻지 않고 주 하느님의 자비로운 은총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재물로부터의 자유를 갖는 것이기도 하지만 주님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라는 요구입니다.
학식도 명예도 권력도 재물에 속합니다. 그러한 것을 지니면 지닐수록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마음을 빼앗길 수 있는 것은 다 재물로 볼 수 있습니다. 훌훌 털어버리고 먼저 따름으로써 주님께서 주시는 더 큰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그리고 항상 주님”을 앞세울 수 있는 은총이 함께 하길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5) 버림으로써 얻는 신비에 눈 뜨는 하루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가진 재물이라는 것은 또 다른 무엇으로부터의 옭아 매여 있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만을 갈망하여 세상 것에 자유로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는 아가에 대한 강론에서 “사랑은 그 자체로 만족을 줍니다. 사랑은 다른 것 때문이 아닌 그 자체로 마음에 드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 자체로 공로도 되고 상급도 됩니다. 사랑은 그 자체 말고는 다른 이유나 열매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열매는 사랑하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합니다. 사랑은 보배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참된 사랑이라면 자신의 시초로 되돌아가고 자신의 기원으로 돌아서며 자신의 원천으로 되 흘러가야 합니다.
거기에서 항상 자신의 물줄기를 받아야 합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주님에게서 모든 것이 솟아납니다. 주님을 오롯이 사랑한다면 무엇이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포기할 수 있고 그리하면 하늘의 보화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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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신부님의 영성의샘물※
♥영적 선물로 얻을 수 있는 하느님이라면 모순된 하느님일 것이다.
누가 하느님을 위해 기도와 활동과 신심 단체 활동과 사도직 단체의 임원과 회원으로 열심히 했느냐는 현실적 사목활동의 주체적인 인물이었느냐는 어디까지나 인간적 기준이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 모두는 똑같다. 이 세상의 지혜로운 자도 가장 불운하고 무지하며 가난한 자와 동등하게 여겨진다. 그 사람이 받은 은사, 소유한 능력에 따라 하느님께서 사랑에 차별을 둔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적인 논리다. 곧 인간적인 논리는 그의 몸값이나 측정할 수 있는 가치지만 중요하다고 본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 첫째로 신뢰해야 할 분은 하느님이시다. 곧 우리를 믿으시는 하느님을 믿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이 이 현실을 인식할 때, 하느님께서는 그들 안에 있는 힘을 키워주신다.” - (불완전한 나에게」에서)
“우리가 공로를 세우면 하느님이 그 대가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다는 것은 모순이고 착각입니다. 구원의 주도권을 하느님이지 우리가 아닙니다. 바리사이들의 율법주의에 율법을 잘 지키면 마치 하느님이 그것에 빚을 져서, 그 대가로 자동적으로 구원을 주신다는 것은 구원의 주인이 사람이라는 모순과 착각입니다.”(김홍언 신부, 영성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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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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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영산성당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19,21)
'하느님 나라와 부자!'
부자는 영원한 생명이 있는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19,24)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와 부자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부자'는 어떤 사람일까?
단순히 재물을 많이 소유하고 있는 부자를 의미한다기 보다는, 집차과 애착 때문에 소유하고 있는 것들을 내어놓지 못하는 사람들, 어떤 지위나 권력 앞에서 겸손하지 않고, 더 나아가 이 지위와 권력을 끝까지 소유하려고 하는 사람들, 자신 안에 있는 것들을 비우지 않아서 하느님께서 머무실 자리가 없는 사람들, 오늘 복음이 말하고 있는 부자는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어떤 부자처럼 내려놓지 못하는 사람들은 내려놓으라는 말에 슬퍼하며 내려놓으라고 말하는 사람을 떠나갑니다. 그리고 다른 곳을 찾아 기웃기웃거립니다.
참으로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은 결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늘 하느님의 것을 채우려고 자신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하지 않고 비우는 사람들! 바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나라, 곧 구원은 바로 그런 사람들의 것입니다.(마태5,3 참조)
오늘도 나의 마음이 바뀌는 회개하는 사람!
그래서 오늘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된 부자가 되도록 합시다!
"이러한 세속성은 서로 긴밀히 관련된 두 방식을 통하여 더 격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영지주의의 매력입니다. 이는 특정한 경험이나 사상이나 정보에만 유일하게 관심을 두고 이로써 위로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지만, 결국 자기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갇혀 버리고 말게 합니다."('복음의 기쁨', 94항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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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해도해도>
마태오 19장 16~22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계명도 잘 지키고
열심히 사는 청년이
예수님께 묻는 질문입니다.
이만큼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사는것도 쉽지 않으나 더 좋은 모습으로
삶을 살려는 물음입니다.
'가진것을 다 팔아 나눠주어라'
해도해도 너무하신듯 하죠~
하지만 자기소유에서 탈피할 때 비로소
주어지는 자유를 주시려는 말씀입니다.
축적은 우리를 안전하게 하는것 같으나
혼탁하게 하기에 엑기스를 권하셨죠.
나누는 사람은 계속 나눕니다.
움켜쥐는 사람은 계속 움켜쥐려고 합니다.
나누는 사람은 하늘을 살고
움켜쥐는 사람은 세상을 삽니다.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삶의 질이 완전 달라지지요.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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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태 19, 21)
가난함과
영원함 사이에
우리가 있습니다.
생명의 소유권은
언제나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하느님 안에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삶인 나눔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나눔의 삶은
하느님을 향하는
삶입니다.
그냥 생명의
하루를 사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생명의 하루이길
바라십니다.
영원한 오늘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욕심과
집착으로부터
우리를 살리십니다.
끊임없이 내려놓는
여정을 우리는
걸어가야 1합니다.
하느님 아닌 것에
매달려 살고있는
우리를 반성합니다.
지나가고 사라지는
허망한 욕심이 아닌
쏟아지는 은총
영원한 생명이
있을 뿐입니다.
나눔이라는
영원한 생명을
이제 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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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편집/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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