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정 홍순록 선생의 옛 전시회 초청장 의 정겨운 글 =
얼마 전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옛 스승의 낡은 전시회 초청장을 발견하였다. 그 전시회 초청장을 읽어보니 그분의 개성과 인품 됨이 다시금 느껴졌고, ‘역시나 해정 선생님!’ 하면서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잠시나마 그분에게 그림의 기초를 배웠다는 것이 자랑스럽게 여겨졌고, 30년 전 당시의 일들이 추억처럼 새록새록 되살아나기도 했다.

“(...) 어찌 보면 그 모습은 흡사 자연의 보은의 표시로서 자꾸 두 손 부비며 절을 하는 성 싶었습니다. 그날 수수대의 느낌은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고 내 마음 한구석에 자리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걸어온 지난날과 농심(農心)이란 것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했습니다. 여기 감히 수숫대 보담도 못한 몇 점을 모아 보았습니다.”
고개 숙인 수수대의 모습을 ‘자연에 감사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그분의 소박한 마음과 자신의 그림들을 ‘그 수숫대 보다 못한 몇 점’이라 겸손히 소개하는 그분의 말씀은 참으로 겸손하고 다정하게 느껴진다. 저마다 자신의 그림을 이해하기도 어려운 심오한 철학적 문구를 써가면서 찬미하기 일색인 이 현대의 풍토에 그분의 겸손하고 소박한 표현에 더욱 존경스러워진다.
해정(海亭) 홍순록 선생님은 일제 강점기시대에 20대를 보내고, 30대에 해방을 맞았으며, 일본 셴슈대학(專修大學)에서 서양화를 전공하였다. 하지만 귀국한 뒤 좌우대립과 6.25한국전쟁 그리고 산업화시기의 혼란 속에서 다시금 동양화(문인화)를 수학하였다. 그분이 왜 서양화에서 동양화로 바꾸었는지는 아무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고 한다. 그분은 죽농(竹農) 서동균의 화법을 충실히 배운 영남의 주요 문인화 작가로 인정받고 있다. 다년간 교직에 몸담은 탓에 대구지역에는 이분의 제자인 화가들이 아직도 많이 있지만, 당시 나의 기억에는 누구도 자신의 제자라는 말을 함부로 하고 다니지 말라는 것이 그분의 신조였다. 나 역시 왜 그랬는지 아직 알 수 없지만, “스스로 자신의 그림을 그리고, 자신이 되라!”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교직에 오랫동안 몸담은 탓에 그분은 직업적인 화가로 활동한 적은 거의 없지만, 교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서화실을 운영하면서 꾸준히 후학을 양성하고 전시를 가지면서 제야의 예술가로 존경을 받았다. 사람들은 그분의 서화에 대해서 “장중하면서도 시원한 필치와 순정(醇正)한 먹의 맛의 사군자, 화훼, 기명절지, 산수, 풍경 등의 문인화와 서예”라고 평하고 있으며, 그분의 화정(畵情)에 대해서는 “진지한 일편단심”이라고 평하였다.
어쩌면 결과론적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화가가 한때 ‘나의 스승’이었다는 사실이 늘 감사히 여겨진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소박하게 자신이 좋아 하는 것을 매일 매일 성실하게 추구하는 ‘일편단심’의 사람, 세속적인 명성이나 대중의 시선이나 어떤 경제적인 이유나 그 어떤 이유도 없이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삶을 매일 매일 표나지 않게 그러나 쉬지도 않고, 묵묵히 걸어가는 진정한 ‘아마추어정신’을 가진 ‘탁월한 전문가’를 보는 것 같은 역설적인 사람! 그래서 그분의 그림들에는 참으로 정겨운 무엇이 있는 것 같다! 해정 선생님은 분명 참 아름다운 삶을 살다 가신 분인 것 같다!

<해정 선생님의 '풍죽', 제가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선생님의 그림입니다.>

해정 선생님의 <야생난>

해정 선생님의 산수화

해정 선생님의 <평풍화>

<해정선생 자제분인 묵농 홍종표선생의 풍죽/제가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묵농선생의 그림입니다>
*해정 선생님과 홍종표 선생에 관한 일화는 이 방의 '잊을 수 없는 두 화가'에서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