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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욥기24장1~25절
제목 : 어찌하여 하나님은
욥은 가난한 자들을 학대하고 착취하는 악인들을 잘되게 내버려두시고 개입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불평을 쏟아놓습니다.
욥은 당시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불의한 일들을 차례로 언급한 뒤에,
마지막에는 악한 자들에 대한 심판을 구형합니다.
1. 심판의 부재에 대한 고발(1~12절)
“[1] 어찌하여 전능자는 때를 정해 놓지 아니하셨는고 그를 아는 자들이 그의 날을 보지 못하는고[2] 어떤 사람은 땅의 경계표를 옮기며 양 떼를 빼앗아 기르며[3] 고아의 나귀를 몰아 가며 과부의 소를 볼모 잡으며[4] 가난한 자를 길에서 몰아내나니 세상에서 학대 받는 자가 다 스스로 숨는구나[5] 그들은 거친 광야의 들나귀 같아서 나가서 일하며 먹을 것을 부지런히 구하니 빈 들이 그들의 자식을 위하여 그에게 음식을 내는구나[6] 밭에서 남의 꼴을 베며 악인이 남겨 둔 포도를 따며[7] 의복이 없어 벗은 몸으로 밤을 지내며 추워도 덮을 것이 없으며[8] 산중에서 만난 소나기에 젖으며 가릴 것이 없어 바위를 안고 있느니라[9] 어떤 사람은 고아를 어머니의 품에서 빼앗으며 가난한 자의 옷을 볼모 잡으므로[10] 그들이 옷이 없어 벌거벗고 다니며 곡식 이삭을 나르나 굶주리고[11] 그 사람들의 담 사이에서 기름을 짜며 목말라 하면서 술 틀을 밟느니라[12] 성 중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신음하며 상한 자가 부르짖으나 하나님이 그들의 참상을 보지 아니하시느니라”
1) 전능자는 때를 정해 놓지 아니하셨다(1절)
“[1] 어찌하여 전능자는 때를 정해 놓지 아니하셨는고 그를 아는 자들이 그의 날을 보지 못하는고”
때를 정하지 아니하셨는고 - 여기서 '때'(이팀)는 악인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시행되는 날입니다(15:32;18:20).
그날은 악인을 위해 준비해 둔 형벌이 쏟아집니다(21:19).
본문에서 욥은 악인에게 곧장 심판이 임하지 않는 사실로 인해
심각한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욥에게 두 가지 의문을 갖게 했을 것입니다.
첫째는 악인들이 더욱 기세 등등하게 활보하고 다니는 것이며,
둘째는 하나님의 공의를 믿고 신실하게 생활하던 자들이 낙심하여 하나님의 공의의 시행이 편파적이고 비 일관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욥이 현재로서는 이해할 길이 없었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난 후에는 그 딜레마를 극복할 수 있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공의의 시행 혹은 보응의 원칙은 기계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깊으신 뜻에 따라 적용된다는 것입니다(E. B.Smick).
2) 악인이 오히려 번영하는 사례를 나열합니다(2~4,절).
“[2] 어떤 사람은 땅의 경계표를 옮기며 양 떼를 빼앗아 기르며[3] 고아의 나귀를 몰아 가며 과부의 소를 볼모 잡으며[4] 가난한 자를 길에서 몰아내나니 세상에서 학대 받는 자가 다 스스로 숨는구나”
(1) 어떤 사람은 지계표(地界標)를 옮기며.
고대 동방에서는 이웃하는 땅의 경계를 담이나 울타리를 쌓지 않고, 돌이나 바위 등을 경계선 자리에 놓아 표시하였습니다.
이러한 지계표를 옮김으로써 이웃의 토지를 부당하게 빼앗아 소유하려는 죄악은,
모세의 율법에서도 저주받는 이로 금지된 사항입니다 (신19:14;27:17).
또한 이것은 지혜서(잠22:28;23:10)와 선지자들에 의해서도(호5:10),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일로 죄악시되었습니다.
-잠22:28 “네 선조가 세운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지니라”
-잠23:10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며 고아들의 밭을 침범하지 말지어다”
-호5:10 “유다 지도자들은 경계표를 옮기는 자 같으니 내가 나의 진노를 그들에게 물 같이 부으리라”
왜냐하면 이러한 조작 행위는 개인의 소유를 약탈하는 행위였을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질서를 파괴시키는 원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2) 양떼를 빼앗아 기르며. - '빼앗다'의 히브리어 '가잘'은 '벗기다', '잡아뜯다', '강탈하다'의 뜻이며, '기르며'는 '방목하다', '풀을 먹이다'는 의미입니다. 즉, 그들은 양떼를 강제로 탈취했을 뿐만 아니라 아주 뻔뻔스럽게도 탈취한 양떼를 공개적으로 방목하기까지 했다는 의미입니다.
(3) 고아의 나귀를 몰아 가며.
(4) 과부의 소를 볼모 잡으며.
(5) 가난한 자를 길에서 몰아냄.
빈궁한 자들을 자기들이 다니던 길로부터 밀어내어 방황하도록 만들거나(Delitzsch), 약탈 행위로 인하여 그 길을 마음대로 다닐 수 없게 만든다는 뜻입니다(J. E. Hartley).
가난한 자들은 압제자들에 의해 길에서마저 쫓겨 다녀야 했습니다.
그들은 압제를 피하여 '땅'(에레츠)에서 숨을 곳을 찾았습니다.
이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지배자의 억압이 얼마나 심했는가를 깨닫게 합니다. 그들은 그 억압과 착취를 피하기 위해 은둔의 삶을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삿 5:5; 암5:11-13).
3) 그들은 거친 광야의 들나귀 같다(5절)
“[5] 그들은 거친 광야의 들나귀 같아서 나가서 일하며 먹을 것을 부지런히 구하니 빈 들이 그들의 자식을 위하여 그에게 음식을 내는구나”
그들 - 압제자들로부터 억압받는 가난한 자 (4절)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본절에서 욥은 피압제자들의 상황을, 험난하고 메마른 스텝 지역에서 소량의 먹이를 찾기 위해 헤매고 다니는 들나귀의 모습에다 비겨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39:5; 호8:9).
여기서 '광야'(아라바)는 '건조한 땅', 또는 '사막'을 가리킵니다.
가난한 자들은 배고파서 칭얼대는 자식들의 음식을 구하기 위해 찾아 나설 곳이라고는 광야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이 사회의 공동체에서 소외되었을 뿐만 아니라,
생존(生存)에 필요한 음식조차도 마음대로 구할 수 없는,
참혹한 현실에 허덕이고 있었음을 잘 보여줍니다.
분명 욥의 눈에는 이런 비참한 상황이 사악한 자들의 압제로 인한 결과로 보였을 것이며, 자신이 그들과 비슷한 처지에 있다고 생각한 욥은 그러한 불의(不義)를 가만히 두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불평하고 있는 것입니다(24:12, 22, 23).
4) 의식주의 해결이 안되어 비참하게 살아가는 모습 묘사합니다(6~8절)
6절에 이어 본절과 8절에서는, 인간생활에 있어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의식주(衣食住)문제가 해결되지 않음으로 인해 비참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1) 밭에서 남의 꼴을 베며 악인이 남겨 둔 포도를 따며(6절)
밭에서 남의 꼴을 베며 - '자기 것이 아닌' 곧 '남의 곡식'으로 옮긴다는 뜻으로 이 경우에는 가난한 자들이 허기를 견디지 못해 도둑질을 하게 되는 상황에까지 이름을 암시합니다.
악인의 남겨 둔 포도를 따며 - 직역하면 '그들이 사악한 자의 포도원에서 남겨진 것을 따다'이입니다.
이는 가난한 자들이 심지어 악인의 밭에 남겨진 것을 먹어야 할 정도로 비참한 꼴이 되었다는 뜻인 듯합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해 수확을 얼마 남겨두는 규정은 율법에도 있습니다(레19:10; 신 24:21).
그러나 악인이 가난한 자를 위해 열매를 남겨 두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그렇게 곡식을 모아봤자 가족의 굶주림을 해결할 만큼 충분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악인'이란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고 괴롭힌 자들이었다는 점에서 그들의 괴로움이 더욱 가중되었을 법합니다.
(2) 의복이 없어 벗은 몸으로 밤을 지내며 추워도 덮을 것이 없으며(7절)
가난한 자들은 먹을 음식뿐만 아니라 의복이 없어서 추위에 몸을 떨면서 밤을 지새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입을 옷이 없는 것은 워낙 가난해서이기도 했지만, 악인들에게 볼모잡힌 것을 돌려받지 못한 때문이기도 했습니다(9절).
(3) 가릴 것이 없어 바위를 안고 있느니라(8절)
“[8]산중에서 만난 소나기에 젖으며 가릴 것이 없어 바위를 안고 있느니라”
그들은 마땅한 은신처가 없어서 산으로 피하지만 거기에서도 소나기에 흠뻑 젖어 어찌할 바 모릅니다.
가릴 것이 없어 바위를 안고 있느니라 - '안고'의 히브리어 '하바크' 는 '포옹하다', '손으로 꼭 껴안다'라는 뜻으로 편안히 쉴 곳이 없어서 바위라도 의지하여 추위와 소나기를 피하려는 열악한 생활 환경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하바크'를 '바위 틈 속으로 몸을 밀어 넣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찬 바람과 산중 소나기로부터 보호해 줄 구석을 찾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처럼 바위 밑에 몸을 숨기는 것은 아마 그들이 바위 밑에 천막을 치고 살거나 아니면 바위 밑 동굴에 거주하였기 때문인 듯합니다.
5) 고아를 어미 품에서 빼앗으며(9절)
“[9] 어떤 사람은 고아를 어머니의 품에서 빼앗으며 가난한 자의 옷을 볼모 잡으므로”
고아를 어미 품에서 빼앗으며 - 본문은 아직도 어려서 어미의 젖을 먹고 있는 아이를 강제로 빼앗는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무자비한 채권자들이 아비 없는 아이를 그 어미가 빚을 갚을 시간도 주지 않고 담보물로 빼앗아 간다는 뜻입니다.
고대에는 어린 아이들이 가치 있는 재산으로 인식되었는데,
채권자들은 아직 젖도 떼지 아니한 아이들을 데려다가 노예로 삼고(느 5:5),
돈을 버는 경우가 많았습니다(왕하 4:1).
이것은 괴로운 처지에 있는 자들로부터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포악한 행위로서 그들에게 고통을 더 가중시켰습니다.
한편, 본절은 사악한 자들의 행동을 다시금 언급하는 것으로 문맥상 3절과 4절 사이에 오면 더 자연스러울 듯 싶습니다(Hartley, Pope).
가난한 자의 옷을 볼모잡으므로 - 가난한 자가 돈이나 곡물로 부채를 갚기도 전에 채주들은 그들의 유아들을 담보물로서 압류한다는 의미가 적당합니다(LB).
본문을 사악한 자들이 자기들 의 이익만을 위하여 가난한 고아와 과부들의 삶을 파괴시킨다는 의미로 보아도 무난할 것 같습니다.
6) 그들이 옷이 없어 벌거벗고 다니며 곡식 이삭을 나르나 굶주리고(10절)
옷이 없어 벌거벗고 다니며 - 이미 7절에서 비천한 자의 헐벗는 모습을 묘사한 바있는데, 7절이 추위를 막을 따뜻한 옷의 결핍을 말한다면, 여기서는 노동자들이 안전사고에 대비한 작업복마저 입지 못하는 형편을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J. E. Hartley).
이것은 압제자의 비정한 착취의 한 단면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압제자들은 그들의 일을 억압적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시켰지만 그에 필요한 어떠한 대가나 보호해줄 의무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였습니다.
주리면서 곡식단을 메며 -굶주림을 당하면서도 곡식 단을 날라야만 하는 고통의 현실을 표현한 것입니다.
압제자들은 짐승들에게도 금지해서는 안 될 일을 가난한 자들에게 행하고 있습니다(신 25:4).
그것은 노동의 삯을 주지 않고 일을 시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불의는 성경에서 매우 중요하게 취급하여 정죄하고 있습니다(신 24:14, 15 ; 딤전 5:18).
7)그 사람들의 담 사이에서 기름을 짜며 목말라 하면서 술 틀을 밟느니라(11절)
여기서 '담'(슈로탐)은 원어의 뜻이 불명확하여 해석상의 논란이 많지만. 대체적으로 '담'또는 '축대'(시 18:29;렘 5:10)의 의미에 동의합니다.
본문은 압제자들의 담 안에서(KJV, within their walls) 올리브 기름을 짜며, 포도주 틀을 밟는 장면에 대한 언급으로 보는 것이 낫습니다.
즉, 압제자들의 매우 철저하고 혹독한 감독이 시행되고 있는 그들의 정원 안에서 비천한 자들이 학대를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비록 포도주의 틀을 밟고 잇지만 가장 가깝게 있는 포도즙으로 갈증을 해소시킬 수 없을 만큼 혹독한 탄압을 받았습니다.
욥은 이러한 성읍 내에서의 불의와 압제의 현실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8) 하나님이 그들의 참상을 보지 아니하시느니라(12절)
“[12] 성 중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신음하며 상한 자가 부르짖으나 하나님이 그들의 참상을 보지 아니하시느니라”
인구 많은 성중에서 사람들이 신음하며 - 압제와 심지어는 살륙으로 인하여 상하며 죽어가는 자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신음하며'의 '나아크'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자가 외치는 부르짖음을 뜻합니다(Dlitzsch, 렘 51:52 ; 겔 30:24).
상한 자가 부르짖으나 -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하면 '부상당한 자의 영혼이 부르짖다'입니다.
여기서 '상한 자'(할라림)는 단순한 부상이 아닌 치명적인 상처로 거의 죽게된 자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본문은 억울하게 습격당하여 거의 죽게 된 자들이 매우 처절하게 도움을 호소하는 장면을 연상시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불의를 보지 아니하시느니라 - 사악한 자들이 도덕 질서, 또는 신적 법칙을 조롱하고 비웃는데도 징벌을 당하지 않은 채 이 땅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Lange).
결국 욥은 이 땅에 폭력과 억압이 계속되고 정의가 짓밟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잠잠하시다는 것을 항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악인들이 어둠 속에서 행하는 죄악을 고발(13~17절)
“[13] 또 광명을 배반하는 사람들은 이러하니 그들은 그 도리를 알지 못하며 그 길에 머물지 아니하는 자라[14] 사람을 죽이는 자는 밝을 때에 일어나서 학대 받는 자나 가난한 자를 죽이고 밤에는 도둑 같이 되며[15] 간음하는 자의 눈은 저물기를 바라며 아무 눈도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고 얼굴을 가리며[16] 어둠을 틈타 집을 뚫는 자는 낮에는 잠그고 있으므로 광명을 알지 못하나니[17] 그들은 아침을 죽음의 그늘 같이 여기니 죽음의 그늘의 두려움을 앎이니라”
1) 광명을 배반하는 사람들
“[13] 또 광명을 배반하는 사람들은 이러하니 그들은 그 도리를 알지 못하며 그 길에 머물지 아니하는 자라”
이제 욥은 앞서 언급한 사악한 자들 외에 또 다른 부류의 악인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빛을 반역하고 어두움을 사랑하는 자들로서
십계명의 제 6, 7, 8,계명을 어기는 살인자들(14절), 간음자들(15절),
밤도둑들(16절)입니다.
이런 부류의 악인들이 가지는 공통된 특성은 본절에서 요약한 바와 같이 광명을 미워하고 어두움으로 덮여진 은밀한 죄악을 남몰래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밤과 어두움이 그들의 악한 행위를 감춰줄 수는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34:22).
광명을 배반하는 사람들은 - '광명'의 '오르'는 '빛'을 뜻하지만 그 해석은 다양합니다.
(1)상징적으로 해석하여 자연의 빛, 율법의 빛, 양심의 빛이라고 보는 견해(Habel).
(2)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빛이 있는 '낮'으로 보는 견해(Pope).
(3)세상의 빛으로서 하나님을 언급한다고 보는 견해(Ezra).
여기서는 이 세 가지 해석 모두가 가능합니다.
한편 '배반하다'의 '마라드'는 '반역','배도'를 뜻하며,
다른 사람을 대항하여 싸우는 것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본절은 빛을 싫어할 뿐만 아니라 빛의 원수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Lange, Delitzsch).
광명의 길을 알지 못하며 -악한 자들이 빛의 길에 익숙하지 못할 뿐 아니라 아예 그것에 대한 지식을 얻으려 하거나 그 유익에도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그 첩경에 머물지 아니하는 자라 - 악인들은 자기들의 사악한 범죄 행위가 드러나지 않도록 어두움 가운데서 계락과 음모를 꾸밀 뿐,
그것이 발각될 우려가 있는 밝은 곳은 어디든지 가까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빛의 길에서 평안함을 느끼지 못하며(Dlitzsch),
삶과 진리의 근본이 빛에 있음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설령 빛의 고상함과 의로움을 발견한다할지라도 그들은 돌이키지 아니합니다.
2) 밤에는 도둑 같이 되며(14절)
“[14] 사람을 죽이는 자는 밝을 때에 일어나서 학대 받는 자나 가난한 자를 죽이고 밤에는 도둑 같이 되며”
악인은 인적이 드물고 주위가 캄캄한 때를 골라,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일찍부터 기동하는 궁핍한 자들을 습격하여 약탈하고 죽인다는 것입니다.
3) 어둠이 빨리 오기를 기다리는 자(15절)
“[15] 간음하는 자의 눈은 저물기를 바라며 아무 눈도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고 얼굴을 가리며”
간음하는 자의 눈은 저물기를 바라며 - 직역하면 '어두움을 살피는 간음자의 눈'입니다.
본문은 음행의 수치와 그 죄를 감추기 좋은 어두움이 빨리 오기를 기다리는 간음자의 특성을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4) 광명을 알지 못합니다(16절)
“[16] 어둠을 틈타 집을 뚫는 자는 낮에는 잠그고 있으므로 광명을 알지 못하나니”
도적들이 낮에는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자기 집의 문을 잠그고 몰래 숨어 있다는 뜻입니다.
광명을 알지 못하나니 - 그들은 빛과의 사귐 또는 교제가 전혀 없었음을 의미합니다.
오히려 어두움 속에서 어두운 일을 행하며 어두움과 밀접한 교제를 나눕니다(요1:5,11).
한편,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신 자신을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는다고 하셨으며(요 8:12), 나아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도록 빛의 아들이 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요 12:35. 36).
5) 그들은 아침을 죽음의 그늘 같이 여깁니다(17절)
“[17] 그들은 아침을 죽음의 그늘 같이 여기니 죽음의 그늘의 두려움을 앎이니라”
아침을 흑암같이 여기니 - 원문을 직역하면 '왜나하면 흑암이 그들에게는 아침이 되기 때문이니'입니다.
즉, 다른 사람들이 활동하는 낮은 그들에게 발각될 위협을 가져오지만,
다른 사람들이 잠드는 깊은 밤은 그들에게는 아침처럼 활동하기 좋은 환경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도적들은 그들의 악한 행위를 숨겨주는 어둠이 올수록 기뻐하면서 비로소 활동을 시작합니다.
흑암의 두려움을 앎이니라 - 즉, 깊은 밤이 도적에게는 아침과 같기 때문에 그들은 밤의 위협적인 두려움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밤에 너무나도 익숙하여 밤의 두려움에 놀라지 않고 도리어 그런 위험을 미리 예견하고 피하는 것에 능합니다(Dlitzsch).
그들은 어두움의 특성을 노련하게 이용하여 사람들의 집을 뚫고 재산을 훔치는 데 교묘하고 능란합니다.
이와 같이 어두움에 깊이 빠졌기 때문에 그들은 빛과의 사귐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고후 6:14).
본절에서는 어두움과 매우 익숙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Lange).
3. 악인들에게 마땅한 형벌을 구형함(18~25절)
“[18] 그들은 물 위에 빨리 흘러가고 그들의 소유는 세상에서 저주를 받나니 그들이 다시는 포도원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라[19] 가뭄과 더위가 눈 녹은 물을 곧 빼앗나니 스올이 범죄자에게도 그와 같이 하느니라[20] 모태가 그를 잊어버리고 구더기가 그를 달게 먹을 것이라 그는 다시 기억되지 않을 것이니 불의가 나무처럼 꺾이리라[21] 그는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를 박대하며 과부를 선대하지 아니하는도다[22]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능력으로 강포한 자들을 끌어내시나니 일어나는 자는 있어도 살아남을 확신은 없으리라[23] 하나님은 그에게 평안을 주시며 지탱해 주시나 그들의 길을 살피시도다[24] 그들은 잠깐 동안 높아졌다가 천대를 받을 것이며 잘려 모아진 곡식 이삭처럼 되리라[25] 가령 그렇지 않을지라도 능히 내 말을 거짓되다고 지적하거나 내 말을 헛되게 만들 자 누구랴”
1) 그들은 물 위에 빨리 흘러가고 그들의 소유는 세상에서 저주를 받습니다(18절)
“[18] 그들은 물 위에 빨리 흘러가고 그들의 소유는 세상에서 저주를 받나니 그들이 다시는 포도원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라”
그들은 물 위에 빨리 흘러가고 - 악인들의 존재는 물 위에 떠서 빨리 흘러가 보이지 않는 물체처럼 쉽게 잊혀지고 만다는 것입니다(9:26;호 10:7).
2) 악인의 허망한 파멸(19절)
“[19] 가뭄과 더위가 눈 녹은 물을 곧 빼앗나니 스올이 범죄자에게도 그와 같이 하느니라”
뜨거운 태양이 눈을 녹이고 물을 증발시키듯이 음부(陰府)가 악인을 재빨리 채간다는 의미입니다.
악인의 허망한 파멸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봄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3) 악인의 비참한 결말을 강조합니다(20절)
“[20] 모태가 그를 잊어버리고 구더기가 그를 달게 먹을 것이라 그는 다시 기억되지 않을 것이니 불의가 나무처럼 꺾이리라”
본문의 두 문구가 서로 대조를 이루어 악인의 비참한 결말을 강조합니다. 즉 악인은 맹목적이라 할 정도로 강렬한 어머니의 사랑으로부터 조차 버림을 받으며 그를 가까이하고 달려들 자는 구더기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4) 욥의 현실을 고발합니다(21절)
“[21] 그는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를 박대하며 과부를 선대하지 아니하는도다”
사악한 자의 생전에 저지른 죄악의 실상이 밝히 증거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욥이 불의한 현실을 명백하게 고발하기 위한 구절입니다.
즉, 욥은 자식을 낳지 못하는 불쌍한 여인들을 학대하거나 약탈하고 과부를 긍휼히 여기지 않는 사악한 자의 불의한 죄악이야말로 반드시 형벌 받아야 마땅하다는 사실을 항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의 눈에 목격된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의인들이 고난을 받고 악인들은 흥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또한 욥 자신의 처절한 체험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욥의 딜레마입니다.
5) 일어나는 자는 있어도 살아남을 확신은 없으리라(22절)
“[22]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능력으로 강포한 자들을 끌어내시나니 일어나는 자는 있어도 살아남을 확신은 없으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능력으로 강포한 자들을 끌어내십니다.
강포한 자들. 자기 자신의 힘만 의지하는 교만하고 대담스러운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자신의 힘만 믿고 하나님의 뜻을 완고하게 거역하는 자들이기도 합니다(Delitzsch, 사 46:12).
일어나는 자는 있어도 살아남을 확신은 없으리라
6) 하나님은 그에게 평안을 주시지만 그들의 길을 살피십니다(23절)
“[23] 하나님은 그에게 평안을 주시며 지탱해 주시나 그들의 길을 살피시도다”
하나님은 그에게 평안을 주시며 지탱해 주시나 - 하나님이 악인들의 피난처가 되어 그들로 하여금 (악한 일에)담대하게 하시며 또한 그들의 버팀목이 되어 그들을 평안하게 휴식하도록 만든다는 욥의 불평입니다.
그들의 길을 살피시도다 - 24절 내용과 연결되어 악인의 행위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의 섭리를 나타내십니다.
7) 결국은 가라지와 같은 신세가 될것이다(24절)
“[24] 그들은 잠깐 동안 높아졌다가 천대를 받을 것이며 잘려 모아진 곡식 이삭처럼 되리라”
본절에서 욥은 자신의 입장을 최종적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즉, 이 변론(23, 24장)이 진행되는 동안 욥은 악인의 번성과 의인의 고통이라고 하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로 인해 깊은 회의에 빠져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을 끝내 불신할 수 없었던 욥으로서는 본절에서 처럼 악인의 멸망을 기대하는 강한 기대감으로 자신의 변론을 마무리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8) 욥은 자신의 말에 자신감을 갔습니다(25절)
“[25] 가령 그렇지 않을지라도 능히 내 말을 거짓되다고 지적하거나 내 말을 헛되게 만들 자 누구랴”
욥은 지금까지 표명한 자신의 입장에 대한 자신감을 누구든지 공박할테면 해보라는 투로 확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욥은 그 친구들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또한 자기에게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께 항변하며 호소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무죄를 변호해 주실 분은 하나님이며, 또 이 고통의 신비를 깨닫게 하실 분도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21:22).
따라서 욥의 현재의 소망은 극심한 고통에서 빨리 벗어나는 데 있었다기보다는 그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아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자기의 무죄함을 하나님께서 증명해 주시리라는 생각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욥이 보기에 하나님은 이 땅에서 일어나는 불의에 관심조차 없으신 분 같습니다(1,12절).
하지만 하나님은 이 세상 불의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하나님이 지금 이 일들을 내버려두시는 이유를 우리가 알지 못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나 보응은 기계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깊은 뜻에 따라 적용됩니다.
혼란스럽게 보이지만 언젠가는 모든 것이 상세히 드러나 온전한 이해가 가능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이러한 때를 이길 지혜와 힘을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당시 상류층들은 가난하고 연약한 자를 학대하고 착취했습니다(2~11절).
욥은 이런 모습 때문에 하나님이 세상 통치를 포기하신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오늘날에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먼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연약한 자들을 돌보고 구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내가 있는 곳에서 연약한 자들을 돌보는 데 힘써야 하지 않을까요?
2) 욥은 악인들의 또 다른 면을 고발합니다(13~17절).
그들은 빛 되신 하나님의 원수들로 환한 곳을 싫어하고 어두움과 은밀함을 즐기며 살인죄, 간음죄, 도둑질 등을 행하는 죄인들입니다.
이들은 낮과 밤이 바뀐 생활을 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적발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의 눈을 더 두려워합니까?
하나님의 눈입니까, 아니면 사람들의 눈입니까?
3) 욥은 단순히 악인의 번영에 대해 하나님께 원망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들의 죄악상을 고발하면서 그들의 멸망을 기대하며, 그에 합당한 징벌을 호소합니다(18~25절).
우리 눈에는 하나님이 마치 악인들을 보호하시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어쩌면 내가 죽을 때까지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날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탄원을 갚아주실 것이며, 악인들은 순식간에 멸망할 것입니다.
기도
공동체-악과 불의가 가득한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사랑과 긍휼과 공의의 사역을 감당하게 하소서.
열방-시리아 내전으로 1만 명 이상의 어린이들이 사망하고, 전체 550만 명 중 120만 명이 타국에서 난민으로 살고 있다. 시리아 어린이들이 고향에서 안전하게 생활할 날이 속히 오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