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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파미르종주기 -다시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 ‘오아시스 루트(Oasis R)’의 양대 갈레길 ‘서역남, 북로’
현장법사는 17년이란 오랜 세월 당시 세계 불교학의 중심지인 나란다(Nalanda:那爛陀) 사원에 머물면서 그가 하고 싶었던 불경 연구를 마음껏 한 다음 귀중한 불경을 한 보따리 안고서 꿈에도 그리워하던 고향 땅으로 향하였다.
그리하여 무사히 파미르고원을 넘어 당나라의 서쪽 끝인 건반타국, 타쉬쿠르간에는 입성했다고 하지만, 아직도 그의 최종 목적지인 장안성까지는 1만 여리라는 머나먼 노정이 남아 있고 더구나 파미르고원보다 더 무서운, 한번 들어가면 다시 나올 수 없다는, 대 사막 타클라마칸1)이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런데 타쉬쿠르간을 떠난 현장의 발길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적지 않다. 잘 알려진 대로 현장은 17년 전 천축으로 나아갈 때는 ‘서역북로(西域北路)’2)를 경유하여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 인도로 나아갔다.
▼ 서역남, 북로 개념도
▼ 타클라마칸 사막의 항공사진
▼ 타클라마칸의 남쪽에 서역남로를 따라 동서로 뻗어 있는 곤륜산맥의 웅자
▼ 루란고성의 유지
▼ 호탄인근의 현장의 발길이 머물렀다는 라왁사원 유지
‘서역북로’는 일명 ‘천산남로’ 라고도 부르는데, 크게는 <오아시스 루트>라고 부르는 타클라마칸을 넘나드는 양대 통로의 하나이다. 천산산맥의 남쪽과 타클라마칸 사막의 북쪽 사이의 오아시스 마을을 연결하여 카슈가르에 이르러 여러 갈레로 갈라져 파미르고원을 넘나든다. 실크로드 여러 루트 중에서 가장 보편적인 길이다.
그렇다면 현장법사는 귀로 길에도 당연히 타쉬쿠르간에서 카슈가르를 경유하여 그에게 익숙한 ‘서역북로’로 나아가 장안으로 입성하는 것이 순리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서역북로 상의 고창국(高昌國)3)에 들려서 감사의 귀국인사를 하는 게 은혜를 입은 사람으로서의 도리였다. 그러나 현장은 그러하지 않았다. 왜 일까?
여기서 잠시 시계를 17년 전으로 돌려보자. 현장법사가 정관3년(貞觀3年,629년) 가을, 나라의 금지조치를 어기고 몰래 여장을 준비하여 장안을 출발하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전통적인 루트인 하서주랑(河西走廊)4)을 통과하여 하미(哈密)까지 펼쳐져 있는 고비(Gobi,戈壁)사막5)을 건넜는데, 이 때 그는 사경을 헤매는 첫 번째 경험을 하게 된다. 『대당서역기』에는 나오지 않는 이야기이지만 『삼장법사전』권1에는 그의 첫 시련이 다음과 같이 그려져 있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인적은 커녕, 하늘을 나는 날짐승도 없는 망망한 천지가 벌어지고 있을 뿐이다. 밤에는 귀신불이 별처럼 휘황하고 낮에는 모래바람이 모래를 휘몰아 소나기처럼 퍼부었다.
이런 일이 일어나도 두려운 줄 몰랐다. 다만 물이 없어 심한 갈증 때문에 걸을 수조차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5일 동안 물 한 방울 먹지 못하여 입과 배가 말라붙고 당장 숨이 끊어질 것 같아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었다.
이 때 현장은 물 대신 늙은 말의 간을 꺼내 먹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고창국에 도착한 다음 국왕의 요청으로 왕성에서 설법을 해주며 한 달간 머무르게 된다. 당시 고창국왕은 국문태(麴文泰, 624~640 延寿)6)였는데, 그는 현장을 당시 서돌궐(西突厥, 투르크)제국7)의 대칸(大汗)8)이 있는 소엽성(素葉城, 현 Tokmak)까지 호송을 해주었고 그 다음에 인도까지 무난히 갈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었다. 이렇듯 현장에게 고창국왕은 은인 중의 은인이었다. 그렇게 되어 현장은 천산남, 북로를 넘나드는 ‘현장로(玄奘路)9)’를 통해 인도로 가게 되었던 것이다.
▼ 아직도 웅장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고창고성의 폐허
여기서 우선『대당서역기』의 기록된 그의 귀국로를 따라가 보자. 20여일 머물던 타쉬쿠르간을 떠나 현장은 오쇄국11)을 지나 카슈가르(Kashgar:疎勒;佉沙國)12)로 향하였다. 그렇기에 당연히 ‘서역북로’로 나가는 줄 알았는데, 돌연 아무 설명이나 해명도 없이 그의 발길은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 카르가릭[Karghalik:哈爾碣里克:斫句迦國, 현葉城)]13)을 거처 호탄국으로 나아갔다. 바로 전형적인 ‘서역남로’로 뒤돌아 온 것이다.
말하자면, 카슈가르까지 갔다가 되돌아 내려왔다는 이야기인데, 이는 그곳에는 직접 가지 않고 주워들은 정보만 기록했을 것이라는, 이른바 ‘전문국(傳聞國) 설(說)’에 해당된다.
하여간 현장은 ‘서역남로’로 귀국을 서둘렀다. 그를 기다리는 것은 역시 생명을 위협하는, 움직이는 모래산 쿰다리아(Kum-Darya)와 검은 바람, 카라부란(Kara-Buran)14)이었지만, 그의 발길은 거침없이 동쪽으로 나아갔다.
▼ 옛 서역남, 북로를 연결하여 사막을 관통한 타림공로
▼ 타림하의 석양
▼ 공포의 모래폭풍 카라부란
타클라마칸의 공포의 대명사인 이 모래산과 검은 바람에 대해서는 4세기 법현의 것이 인류역사상 최고의 기록으로 꼽는다.
사하(沙河)에는 악귀와 열풍이 심하여 이를 만나면 모두 죽고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한다. 하늘에는 날아다니는 새도 없고, 땅에는 뛰어다니는 짐승도 없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망망하여 가야할 길을 찾으려 해도 어디로 갈지를 알 수가 없고 오직 언제 이 길을 가다가 죽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죽은 사람의 고골만이 길을 가리켜 주는 표지가 될 뿐이다.
하여간 현장은 남로의 최대 요충지인, 호탄(Khotan:于闐:和田:瞿薩旦那國)16)에 무사히 도착하여 그 비중에 걸맞게 장황한 기술을 남겨 놓았다.
호탄은 지금도 옥의 산지로 유명한 서역남로의 최대 도시인데, 기원전부터 번영을 누려왔기에 대개의 순례기에 자세하게 나타난다. 우선 법현을 비롯하여 송운, 혜생 그리고 현장에 이르기까지 그러하다.
▼ 서역남로의 허브타운, 호탄 시가지
▼ 현대의 서역남로
▼ 온갖 보석류로 장식을 한 호탄왕의 위풍당당한 모습, 그런데, 송운의 묘사대로 “ 닭 벼슬과 같은 금관을 쓰고 있는데 머리 뒤로 길이 두 자, 폭 다섯 치의 비단을 늘어뜨려 장식하였다.” 같은 모습이다.
호탄국은 주위가 4천여 리이며 모래와 자갈이 태반을 이루고 있다.17) 농사가 잘 되며 온갖 과일이 많이 난다. 양탄자와 가는 모직물을 생산하는데 가늘게 실을 뽑아내는 기술이 특히 뛰어나다. 또 백옥(白玉)과 예옥(瑿玉)을 생산하고 있다.18)
기후는 온화하고 화창하며 회오리바람이 불어서 먼지가 날아다닌다. 풍속은 예의를 알며 사람들의 성품은 온화하고 공손하고 학문을 좋아하고 예능을 익히며 여러 기술에 널리 통달해 있다. 나라에서는 음악을 숭상하고 있으며 사람들도 춤과 노래를 즐긴다.19)
역시 서역북로로 귀향하던 혜초사문도 아무 설명이나 해명 없이 호탄에 대해 짧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러니까 혜초에게 호탄은 ‘전문국’이라는 설이 제기되는 이유이다.
또 안서를 떠나 남쪽으로 호탄국까지 2천 리를 가면20) 역시 중국 군대가 지키고 있다. 절도 많고 승려도 많아 대승이 행해진다. 이들은 고기를 먹지 않는다. 여기서부터 동쪽은 모두 당나라의 땅이다. 누구나 다 알고 있어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이다.
호탄에서 현장은 다시 동쪽으로 발길을 재촉하여 치라(Chira:策勒:媲摩城)21)와 니야(Niya:尼雅:尼攘城)22)를 거쳐 다시 전설속의 옛 루란(樓蘭)23)유지를 거처 드디어 하서주랑(河西走廊)24)으로 나아가 장안으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 하서주랑도
* 대 회향(廻向)25)
드디어, 마침 내, 삼장법사는 장안성에 도착하였다. 무려 17년 만에…
그의 귀향은 떠날 때처럼 초라하지 않았고 황제에게까지 노고를 치하 받을 정도의 금의환향이었다고 한다.
정관 19년(A.D.645)정월 6월 곤명지(昆明池)에서 장안으로 들어오는 샛강위에 한 척의 배가 정박을 서두르고 있었다. 배 위에는 많은 짐과 이상한 차림의 복장을 한 승려 한 사람이 타고 있었는데 이가 바로 고난으로 점철된 17년의 여행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현장법사였다. 이에 태종황제는 반기면서 그의 노고를 위로하였다.
현장법사의 집념이 응집된『대당서역기』12권 끝부분에는 책의 편찬자인 변기(辯機)가 쓴 ‘기찬(記讚)’이라는 부분이 있는데, 그곳에 다음과 같은 현장법사의 평전이 실려 있다.
무릇 현장법사는 사람 됨됨이는 훌륭한 덕의 상서로움을 체현하고 있고 중용을 잃지 않는 순수함을 간직하였습니다. 게다가 그의 복덕은 이미 전생부터 인연이 맺어 있었고, 그의 운명은 바야흐로 탁 트인 세상을 만나게 될 운세였습니다. (중략)
정관 3년(639) 중추 초하루 아침, 옷자락을 걷어 올리고 출발하여 석장을 끌고 아득한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중략) 그러나 세월은 속절없이 지나가 버리고 여름과 겨울이 몇 번이나 반복되자, 법사는 안락한 고국이 그리워지고 망향의 정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이에 [여러 가지 물건을 가지고]33) 위없는 가르침을 널리 펼치기 위해 험하고 위태로운 길을 지나 고국을 향해 길을 서둘렀습니다. 그리하여 총령의 가파른 언덕을 넘어 사막의 험한 길을 건너 정관 19년(645년) 정월 장안에 돌아와 천자를 배알하였습니다.
또한 위의 ‘기찬’ 부분에는 인류역사상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대하 여행기인 『대당서역기』를 저술하게 된 동기, 방법, 목적을 끝부분에서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거작의 탄생의 기본이 ‘메모광(狂)’에서 비롯되었다는 대목도 다음과 같이 내비치고 있다.
그래서 머물거나 도착한 곳마다 간략하게 그곳에 관하여 대체적인 줄거리를 기록하였고,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여 두었다
▼ 대자은사의 현장법사의 소상
▼ 서안의 서쪽교외에 실크로드의 상징물이 세워져 있다.
특히 마무리 에필로그에 해당되는 구절은, 마치 작가 자신의 육성 같은 일인칭의 화법-[소납 현장은]-으로 일관하면서 그의 모든 공덕을 모두 황제에게 돌리고 있어서 눈길을 끌고 있다. 비록 이 구절이 그의 조국 ‘대당(大唐)’이란 거대한 제국에 대한 자부심과 절대권력자에게 바치는 아부성 멘트라고 하더라도 이 문장하나로 삼장법사 현장의 위대한 업적이 빛을 발하는데 지장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소납 현장은] 각 나라의 산천을 명백히 밝히고 그 국토들을 두루 고찰하여 그 나라의 풍속이 거칠고 강한지, 부드럽고 순박한지를 상세하게 살펴보고 각처의 기후와 자연환경을 엮어보려고 생각하였다. (중략)
"태양이 지는 곳에서부터 이곳 동쪽까지 모든 사람들은 대 당나라의 은혜를 누리며 모두 폐하의 성덕을 우러러 받들고 있사옵니다. 천하가 대동을 이룩할 수 있게 통일을 이루시지 않으셨다면, 어찌 제가 혼자만의 힘으로 이역만리 머나먼 여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겠나이까?"
현장은 장안에 도착한 뒤 황제의 배려로 장안성 교외의 대자은사(大慈恩寺)34)에서 머물며 그가 열반에 들기 전날까지 10여 년 동안 그가 가져온 법어로 된 불전을 한역하는데 마지막 집념을 불살랐다. 그리하여『대반야바라밀다경』을 비롯하여 무려 74부 1,335권을 한문으로 번역하여 사바세계의 뭇 중생들에게 널리 회향하였다.
▼ 16세기에 목판으로 출판된 명나라의 오승은의 판타지 소설 『서유기 』 이미지본
▼ 서유기 주인공 들의 이미지
삼장법사가 수만리 서역과 천축 길을 누비고 다녔던 7세기로부터 시간의 수레바퀴는 무심히 흘러 벌써 천 수백 년이 지나갔다. 그러나 지금도 타클라마칸 사막 언저리에 사는 원주민들 사이에는 서산에 해가 뉘엿뉘엿 지는 붉은 석양 속에서 가끔 신기루 같은 환영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고 하며 또 어떤 이는 바람결에 누구를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고도 한다.
“오공아, 오능아, 오정아! 아직도 오늘 밤 묵을 객참은 보이지 않는데, 벌써 해님은 총령산 너머로 넘어 가려고 하지 않느냐. 좀 서둘러야겠구나.” 35)
<大尾>
1) 타클라마간(塔克拉玛干)은 신장위구르자치구에 있는 사막으로 남쪽으로는 곤륜산맥, 남서쪽으로는 파미르 고원, 서쪽과 북쪽으로는 천산산맥에 의해 경계가 정해진다. 그 면적은 270,000km²에 달하며 길이는 1,000km, 폭은 400km이다. 북부와 남부 가장자리에 비단길이 있으며 근래에는 중국이 타림사막 고속도로를 건설하였는데 남쪽의 호탄과 북쪽의 룬타이를 연결하였다.
2) 장안성을 출발한 대상들이나 순례승들은 하서주랑을 통과하여 둔황에 도착한 다음 다시 낙타대열을 정비하여→하미[Hami/哈密/伊吾]→투루판[Turfan/吐魯番/高昌]→엔치[Karashar/焉耆/阿耆尼國]→쿠차[Kucha/庫車/(龜茲/屈支]→아커수[Aksu/阿克蘇/跋祿迦]→카슈가르[Kashgar/喀什/疎勒/佉沙]에 도착하여 여러 경로를 통해 파미르고원을 넘게 된다.
3) 그런데, 1926년 경주 서봉총(瑞鳳塚)에서 은합의 몸체 겉면 바닥과 덮개 안쪽에 `연수원년(延壽元年)‘이란 명문이 나왔는데, 이는 신라ㆍ백제ㆍ고구려ㆍ왜ㆍ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어느 왕조에서도 확인되지 않고 다만 고창국왕 국문태(鞠文太)가 재위 5년째인 서기 624년(신라 진평왕 42년)에 새로 선포한 바로 그 연호여서 고창국과 신라의 실크로드를 통한 교류관계를 짐작하게 해주고 있다.
4) 하서주랑은 동쪽은 오초령(烏鞘嶺)으로부터 시작해 서쪽은 옥문관(玉門關)에 이르며, 남북은 남산(南山: 기련산(祁連山)과 아미금산(阿爾金山))과 북산(北山: 마종산(馬鬃山), 합려산(合黎山) 및 용수산(龍首山)) 사이의 길이 약 900km, 폭 수km에서 100km에 이르는, 서북-동남 방향으로 늘어선 좁고 긴 평지이다. 감숙성(甘肅省)의 난주(蘭州)와 「하서사군(河西四郡): 무위(武威), 장액(張掖), 주천(酒泉), 돈황(敦煌)」을 포괄한다. 거주하는 민족은 한족과 몽골족, 위구르족, 티베트족 등의 민족이 있다. 한의 무제가 하서를 개벽해 무위, 장액, 주천, 돈황의 사군을 연 이래, 내륙의 신강(新疆)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통로이며, 고대 실크로드의 일부분으로서 고대 중국과 서방 세계의 정치·경제·문화적 교류를 진행시킨 중요한 국제 통로였다. 복도 모양과 같고 황하의 서쪽에 있어 하서주랑이라 부른다.
5) 몽골과· 중국 간에 걸쳐있는 사막으로 몽골《고비숨베르 · 고비알타이 · 도르노고비 · 돈드고비 · 바잉홍거르 · 수흐바타르 · 엄너고비》 등으로 분류된다. "고비"는 몽골어로 "거친 땅"이라는 뜻이다. 북쪽은 알타이 산맥과 스텝 지대, 남쪽은 티베트 고원, 동쪽은 화북평원으로 둘러싸여 있다. 고비 사막의 모래가 날리는 황사는 편서풍을 타고 한반도와 일본을 건너 하와이까지 가기도 한다.
6) 고대 실크로드 사역북로상의 허브 도시로 고창고성 유적은 현재의 투르판에서 북쪽으로 30km 부근에 있다. 고창은 기원전 1세기에 건설되었다. 고창은 위구르어로는 ‘콰라호자’라고 불린다. 서기 460년 즈음에 이웃 루란왕국에 의해 정복되어 번영을 이루다가 다시 고차(高車)에 지배 아래로 들어갔고 후에 한족출신의 국씨[쿠지아,麴嘉]가 국왕이 되었다. 바로 현장이 지나갈 때 편의를 제공했던 국문태의 선조이다. 그러다가 651년 당태종은, 당나라보다는 돌궐족과 가깝다는 이유로 소정방을 보내 고창을 정벌한 후 서돌궐까지 항복시킴으로써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은 모두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에 예속되게 된다. 그 뒤 당나라가 쇠약해지며 고창국은 이슬람과 몽골의 연이은 침입을 받아 왕성이 완전히 소실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고대 고창의 흔적은 바로 ‘고창고성’과 ‘베제클릭 천불동’에서 그 찬란한 불교문화를 엿볼 수 있다.
『자은전』1권에는 현장과 고창국왕과의 인연담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630년 2월 현장은 어렵게 고비사막을 건너 이오(伊吾)에서 국문태를 만나 그의 초대를 받아 고창국에서 1개월간 머물면서 설법을 해주고 돌궐가칸[王]이 머물고 있던, 소엽성[현 키르기즈스탄의 토크마크]까지 도착하기까지의 후원을 받아 무사히 인도로 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17년 후 귀환 시에 다시 고창국에 들려서 그 사례를 할 예정이었으나 당시 고창국은 이미 당 태종에게 멸망한 뒤였기[640년] 현장은 고창국에 들르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물론 서역기의 편찬시점으로 보면 과거형이기에 그렇게 서술한 것이겠지만, 애초 현장의 발길은 서역북로로 나아가지 않고 서역남로로 나아갔기에 앞 뒤가 맞지 않는 기록이다.
그런데, 1926년 경주 서봉총(瑞鳳塚)에서 은합의 몸체 겉면 바닥과 덮개 안쪽에 `연수원년(延壽元年)‘이란 명문이 나왔는데, 이는 신라ㆍ백제ㆍ고구려ㆍ왜ㆍ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어느 왕조에서도 확인되지 않고 다만 고창국왕 국문태(鞠文太)가 재위 5년째인 서기 624년(신라 진평왕 42년)에 새로 선포한 바로 그 연호여서 고창국과 신라의 실크로드를 통한 교류관계를 짐작하게 해주고 있다.
7) 돌궐은 흉노에 이어 두 번째로 통일 유목 제국을 세워 약 2세기 동안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동으로는 요동만, 서로는 카스피 해, 북으로는 바이칼 호, 남으로는 고비 사막에 걸친 번성했던 대 제국이었다. 성립 초기부터 효율적으로 광대한 영역을 통치하기 위해 동서로 나누어 이원적 통치 체제를 실시하였으나, 후에는 동돌궐과 서돌궐로 완전히 분열되어서 세력이 약화되어 7세기 중엽 당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두 돌궐은 적대 관계에 있었다.
그러다가 한 때 걸출한 통야브구 칸[統葉護汗, 618~630)이 등극하여 재기에 성공하여 숭불정책을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통야브구가 피살된 후 카간 계승 문제로 내분이 일어나 국력이 약해지자 당의 정토(658)에 의해 서돌궐은 망하고 만다. 그러나 돌궐족들은 끊임없이 국권 회복 운동을 전개하여 그들은 운중도독부의 토둔(吐屯)이었던 쿠드룩(골탈록骨咄錄, 682~691)을 구심점으로 하여 막남(漠南)지역을 중심으로 다시 제2돌궐 제국의 재건에 성공하였지만, 고질적인 내분이 끊이지 않다가 위구르, 바슈미르, 카를루크 등이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제2돌궐 제국은 망하고, 745년 그 토대 위에서 위구르 제국이 건립되었다. 돌궐 제국의 역사를 증언하는 비문들이 제2제국 시기에 건립되었는데, 바로 널리 알려진 ‘오르콘비문(Orkhon Inscription)이다.
8) 돌궐국을 다시 일으킨 통야브구 칸[統葉護汗, 618~630)은 숭불정책을 취하기도 했기에 현장을 인도로 보내주는 배려를 해주었다
9) 가칭, ‘현장로’에 대해서는 본서의 부록으로 <실크로드와 그 지류들>에서 실크로드를 10여개로 나누어 자세히 설명하였으니, 이를 참조하시기 바란다.
< #(3-3) 베델(別達)고개길: 일명 현장법사로(玄獎法師路)>
전통적인 서역북로를 따라 내려오다가 종착지인 카슈가르 도착 직전 아커스[阿克蘇]에서 노선을 변경하여 신장의 베델(別達)마을→보그콜도이 산맥의 베델고개(4,284m)→키르기즈스탄의 베델마을(Bedel)→카라세이(kara-say)→바르스쿤(Barskoon)→이시쿨호수의 서쪽 발리크치(Balikchi)를 우회하여→키르기스탄의 토크마크 →비쉬켁→우즈벡의 타슈켄트 등의 전통적인 천산북로의 오아시스 도시를 따라 인도로 들어가는 루트이다.
10) 이렇게 8백여 리를 가다 보면 총령을 벗어나서 오쇄국(烏鎩國)에 이른다. 이 나라는 주위가 천여 리에 달하고 큰 도성은 10여 리에 달한다. 남쪽으로는 사다하(徙多河)에 접해 있는데 토지가 비옥하고 농사가 아주 잘 된다. 나무와 숲이 울창하고 꽃과 과일이 번성하다. 여러가지 옥이 아주 많이 난다. 백옥(白玉), 예옥(黳玉), 청옥(靑玉) 등이다.
11) 현장은 카슈가르에 들리지 않았음으로 전문국에 해당된다. 원문에는 병주로 “구역(舊譯)에서 말하는 소륵(蘇勒)이란 바로 그 성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정음(正音)으로는 마땅히 실리흘률다저(室利訖栗多底)라고 불러야 한다. 소륵(疏勒)이라는 말은 오히려 잘못된 말인 것 같다” 라는 구절이 붙어있지만, 지금도 소륵이란 말은 많이 쓰인다.
현 카슈가르는 현 신장위구르의 끝자락의 국경도시로 현재도 위구르인은 ‘카슈가르’로, 중국인들은 ‘카스[喀什]’로 즐겨 부르고 있다. 동서교통의 요충지로서 서로는 파미르 고원을 넘어 서역과 천축에 이르고, 동으로는 사막을 지나 둔황에 이른다. 한 무제 때 서역통로가 열린 이래 급속히 발전하여 서역 36국 중의 일국으로서 중요시되어 지금까지도 그 명성을 유지하면서 지금까지도 파키스탄, 키르키즈스탄, 타지크스탄 등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엣 자료에는 ‘소륵국(疏勒國,) 객십갈이喀什噶爾), 가사라서(迦舍邏逝), 거사(佉沙) 로 표기되어 왔다.
12) 카르갈리크(Karghalik:哈爾碣里克:葉城:斫句迦國) 카르갈리크국의 주위는 천여 리에 달하며, 도성은 10여 리 정도인데 견고하고 험난한 곳에 위치해 있으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매우 많다. 산과 구릉들이 서로 이어져 있으며 자갈과 돌이 길에 가득 깔려 있다. 두 강10)을 끼고 있어서 농사가 아주 잘 되며 포도·배·능금과 같은 과일들이 아주 풍성하다. (중략) 이곳에서 동쪽으로 산봉우리를 넘고 계곡을 건너 8백여 리를 가면 구살단나국에 도착한다.
13) 예청, 즉 카르갈리크 지역 일대의 북부를 서남 파미르 고원으로부터 동북쪽으로 흐르는 야르칸드강과 그 남쪽의 카르갈리크 근방을 같은 방향으로 흘러서 사막 속으로 사라지는 티즈나프(Tiznaf)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 두 강 사이에는 많은 작은 물줄기가 있어서 이 지방을 풍요롭게 만들고 있다.
14) ‘사하’란 바로 현지어로 ‘쿰 다리아’인데, ‘쿰’은 모래를, ‘다리아’는 강물을 의미하여 ‘모래가 강물처럼 흐르는 모래의 강” 이란 뜻으로 바람에 따라 움직이는 지형을 말한다.
현장도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온통 모래뿐인데 바람 따라 모이고 흩어진다. 발자국이 남지 않아 길을 잃는 수가 많다. 그래서 그곳을 왕래함에 있어서는 유해(遺骸)를 목표물로 삼는다. 바람이 일기 시작하면 사람 짐승 할 것 없이 눈을 뜨지 못하며 때로는 노랫소리가 들리고 때로는 울부짖는 소리도 듣게 되는데 그것을 듣는 사이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이렇게 해서 가끔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모두가 악귀의 소행이다.”
15) 호탄은 현 신강위구르자치구 남부의 서역남로 상의 요지였다. 기원전 138~126년 장건(張騫)이 처음으로 서역으로 갈 때 이미 잘 알려져 있었는데,『한서』「서역전」에는 “우전국(于闐國)은 장안으로부터 9,670리 거리에 있으며 가구 3천3백호에 인구 1만9천3백명, 군사 2천4백 명을 가지고 있다. (중략) 옥석(玉石)이 많고 서쪽으로는 피산(皮山)까지 380리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법현도 당시 14개의 대사찰을 비롯한 수백 개의 사찰이 있었으며 그중 하나인 왕신사(王新寺)에는 높이가 75미터나 되는 탑이 세워져 있었다고 하였고 또한 『송운행기』에는 불법을 불신하던 우전왕이 어떻게 불교에 귀의하여 독실한 불자가 되었는가 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혜초사문도 역시 우전이라 부르며, “또 안서를 떠나 남쪽으로 호탄국까지 2천 리를 가면15) 역시 중국 군대가 지키고 있다. 절도 많고 승려도 많아 대승이 행해진다.”라고 하였다.
16) 옥의 산지로 유명한, 현 호탄은 서역남로의 요충지로 혜초의 귀향 루트인 서역북로와는 완전히 루트가 다른 길이고 거리도 2천여 리나 되는데, 어째서 혜초는 쿠차와 엔지 사이를 가다가 갑자기 호탄으로 행선지를 바꾸었는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는 아직까지도 의문으로 남아 있기에 그래서 혜초가 호탄을 가보지 않고 전해들은 전문국(傳聞國)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러나 혜초가 안서와 호탄에 대하여 다방면으로 자세히 기록한 것을 보아서는 쿠차 근처에서 오래 머문 것으로 보이기에 구법승들의 순례기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호탄을 비롯하여 안서사진을 모두 구경해보리라는 마음으로 2천리나 되는 호탄을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서 갔다가 도로 쿠차로 왔을 것이라는 가설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어 보인다.
옮긴이 역시 그 루트를 따라 사막을 가로 지르는 직행로를 따라 답사를 해본 결과 그 가설의 가능성에 무게를 주게 되었다. 혜초의 기록에서 나타나는 이런 이른바 “튀는 행동”은 후학으로 하여금 좀 헷갈리게 하지만, 묘한 화두를 던지는 것 같아 그의 길을 따라 걷는 이들을 긴장시키고 있다.
혜초처럼 서역남북로를 종횡무진으로 누빈 탐험가는 스벤혜딘(Sven Hedin(1865∼1952)인데, 스승인 F. 리히트호펜의 영향을 받아 중앙아시아 탐험을 목표로 삼아 누란(樓蘭)유적을 발굴하여 많은 고문서를 발견하였다.
17) 현 호탄은 티베트고원의 곤륜산으로부터 눈 녹은 물이 두 줄기 강물이 흘러내려, 동쪽의 위롱카시 다리야{Yurung Kash Darya:白玉河)와 서쪽의 카라카시 다리야(Kara Kash Darya:黑玉河)와의 사이에 위치한 비옥한 지역이다. 이 두 강은 이윽고 사막에서 합류하여 호탄하[和田河)]라고 불린다. 현재의 신 호탄은 백옥하에 가까운 지점에서 동쪽의 회성(回城)과 서쪽의 한성(漢城)으로 이루어져 있고 구 호탄은 지금의 한성(漢城:新城)의 서문으로부터 약 5마일 떨어진 지점에 있는 요두강(姚頭岡:요트칸Yot-kan)이란 작은 부락에 산재한 폐허로 비정되고 있다.
18) 예옥은 검은 옥을 말한다. 호탄에서는 서역냄새가 물씬 풍기는 바자르와 다양한 종류의 옥(玉)도 볼만하였지만, 역시 호탄 최대의 관심거리는 역시 기원전후에 번성했던 오아시스도시였던 고대 정절국(精絶國)의 유적지인 니야(尼耶)우지이다. 20세기 초 영국의 스타인(Steien) 탐험대에 의해 3차에 걸쳐 발굴된 니야 유적지에는 수많은 고대 실크로드의 유물들이 그 실체를 드러내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카로슈티(Kharosthi)' 문자목간(木簡)인데, 그 숫자가 8백여 개에 달해 현재는 학자들에 의해 거의 해독이 되어 당시 서역의 면모를 그려볼 수 있게 한다.
19) 쿠차와 함께 호탄의 음악도 유명하다.
20) 옥의 산지로 유명한, 현 호탄은 서역남로의 요충지로 혜초의 귀향 루트인 서역북로와는 완전히 루트가 다른 길이고 거리도 2천여 리나 되는데, 어째서 혜초는 쿠차와 엔지 사이를 가다가 갑자기 호탄으로 행선지를 바꾸었는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는 아직까지도 의문으로 남아 있기에 그래서 혜초가 호탄을 가보지 않고 전해들은 전문국(傳聞國)으로 분류하고 있다.
21) 현 호탄(和田/Khotan)과 위탄(于田/Keriya)의 중간에 있는 치라(Chira Bazar/책륵(策勒,)으로 비정된다.
22) 현 서역남로 상의 유명한 유적지인 니야[尼雅/Niya]를 가리키는데, 니야유적은 1901년 영국의 M.A.스타인에 의해 발굴되어 다수의 카로슈티 문서가 출토되었다. 782점에 이르는 이 문서들은 공문, 지령, 편지, 계약서, 장부 등 다양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를 해독한 결과 이 유적은 3~4세기경 로프노르 호반의 크로라이나를 수도로 하여 번영하였던 선선왕국의 서쪽 끝에 위치한 오아시스였음이 판명되었다. 이를 계기로 고대의 서역남도에 있었던 여러 국가의 실체가 밝혀졌으며, 중국의 여러 왕조와의 정치, 경제, 문화관계도 분명해졌다.
23) 한(漢)나라 이래 누란(樓蘭)에 수도를 설치한 선선국(鄯善國)을 말하는데, 5세기에는 청해성에서 차츰 강대해진 토곡혼(吐谷渾)에게 멸망당하였다. 수나라는 토곡혼을 무너뜨리고 선선군을 설치하였으며, 당나라 초기 아직 그 세력이 서역에까지 미치지 못하였던 당 테종 정관 초년에는 강국(康國) 소그디아나의 수령이 이곳에 들어와 식민지를 세운바 있다. 이 같은 시기에 현장이 이 지역을 통과하고 있는 점으로 본다면 그가 납박파의 옛 땅'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서북인도에 원류를 두고 있는 카로슈티 문자를 사용하는 과거의 나라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할 것으로 비정된다. 전설적인 누란에 대해서는 이노우에 야스시의 소설『누란』에서 환상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24) 동쪽은 오초령(烏鞘嶺)으로부터 시작해 서쪽은 옥문관(玉門關)에 이르며, 남북은 남산(南山: 기련산(祁連山)과 아미금산(阿爾金山))과 북산(北山: 마종산(馬鬃山), 합려산(合黎山) 및 용수산(龍首山)) 사이의 길이 약 900km, 폭 수km에서 100km에 이르는, 서북-동남 방향으로 늘어선 좁고 긴 평지이다. 복도 모양과 같이, 황하의 서쪽에 있어 하서주랑이라 부른다.
구역을 잇는 다른 정의로는, 감숙성(甘肅省)의 난주(蘭州)와 하서사군(河西四郡)의 무위(武威), 장액(張掖), 주천(酒泉), 돈황(敦煌)을 잇는 루트를 말한다. 한나라 이후로 고대 실크로드의 일부분으로서 중국과 서방 세계의 정치·경제·문화적 교류를 진행시킨 중요한 국제 통로였다.
25) 『대당서역기』원문에는 없는 목차이고 용어이지만, ‘회향(廻向)’은 불가에서 주로 쓰는 사전적인 정의는, “자기가 닦은 공덕을 중생에게 널리 베풀어 중생이 깨닫도록 하다.”라는 뜻이다. 옮긴이는 이 단어를 삼장법사 현장의 17년간의 고난의 천축순례의 공덕을 기리는 뜻으로 사용하면서 실질적인 현장의 순례를 마감하는 의미로 사용하였다.
26) 불사리 150과(顆), 금불상 1구(軀)26) 금불상 1구27) 단향목을 조각한 불상 1구28) 단향목을 조각한 불상 1구29) 은불상 1구30) 금불상 1구31) 단향목을 조각한 불상 1구32)와 나아가 <대승경전> 224부, <대승론> 190부, <상좌부>의 경·율·논 14부, <대중부>의 경·율·논 15부, <삼미저부(三彌底部)>의 경·율·논 15부, <미사색부(彌沙塞部)>의 경·율·논 22부, <가섭비야부(迦葉臂耶部)>의 경·율·논 17부, <법밀부(法密部)>의 경·율·논 42부, <설일체유부>의 경·율·논 67부, <인론(因論)> 36부, <성론(聲論)> 13부 등 총 520상자, 657부를 가지고 귀국하였다고 한다.
27) 마게타국의 전정각산(前正覺山)에 있는 용의 굴에 여래의 그림자를 남겨둔 불상을 본뜬 것으로, 광좌(光座)까지 통틀어 높이 1척 6촌이다.
28) 파라닐사국(婆羅斯國) 녹야원의 초전법륜상을 본뜬 것으로, 광좌까지 통틀어 높이 3척 3촌이다.
29) 교상미국의 출애왕(出愛王)이 여래를 사모하여 단향목을 깎아서 진영을 그린 상을 본뜬 것으로, 광좌까지 통틀어 높이 1척 5촌이다.
30) 겁비타국에서 여래가 천궁으로부터 보석계단으로 내려오시는 모습의 불상을 본뜬 것으로, 광좌까지 통틀어 높이 2척 9촌이다.
31) 마게타국 취봉산에서 『법화경』을 설하신 상을 본뜬 것으로, 광좌까지 통틀어 높이 4척이다.
32) 나게라갈국에서 독룡을 항복시키고 그림자를 남기셨던 상을 본뜬 것으로, 광좌까지 통틀어 높이 3척 5촌이다.
33) 폐사리국에서 성을 돌아다니시며 교화하신 상을 본뜬 것으로 광좌까지 통틀어 높이 1척 3촌이다.
34) 수나라 대흥성에 있던 한 사원 터에 태종 정관 22년(648년) 황태자 이치가 모친의 영가를 천도하기 위해 건립한 사원으로 인도에서 불경을 가져와 귀국한 현장이 주석하면서 전문 번역기관인 번경원이 설치되어 역경사업의 중추적인 사원이 되었다. 특히 652년에 장안의 랜드마크가 된 대안탑이 건립되어 현장이 가져온 불상이나 경전이 수장되었다.
35) 현장을 주인공으로 하는 유명한 『서유기(西遊記』는 명나라의 오승은(吳承恩, 1500-1582)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삼장법사가 천축에서 경전을 구하여 온다는 이야기가 골자로 되어 있는데, 스승인 현장과 세 제자인 손오공(孫悟空), 저오능(猪悟能), 사오정(沙悟淨)이 기상천외의 요마들을 물리치고 무사히 불경을 가지고 장안으로 귀향한다는 스토리텔링이다. 현장의 발길이 거친 여러 지방의 전설을 바탕으로 하여 작가의 천재적인 상상력과 뛰어난 각색이 가미되어 환타지 소설의 장르를 여는, 큰 획을 그은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첫댓글 오공아 오능아 오정아
다정선생님 좀 잘 모시고 다녀라...
훌륭한 수호신장을 거느리게 되어 안심입니다 ㅎㅎㅎ
<대미>.라는 뜻은 연재가 모두 끝났다는 건갸요?
<대미> 라 ~~
네 연재는 끝났지만 단행본은 좀 더 수정보완해야 할 부분이 좀 남았습니다
짝짝짝~~~
빨리 단행본으로 만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