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군에서 주최하고 한국생산성본부에서 주관하는 "2014 음식디미방과 함께하는 2014 장계향아카데미" 팸투어에 참가했었습니다.
영양군에서는 음식디미방 세계화와 장계향선생의 여중군자로서의 면모재조명, 한글 최초의 조리서인『음식디미방』이 가진 의미와 가치를 홍보하고 인지도 향상에 기여하고자 11월까지 13회에 걸쳐 대기업임원, 대학교수모임, 외국인 파워블로거, 외교인저명인사 및 외국관광객 유치실적이 뛰어난 인바운드여행사 대표 등을 대상으로 1박2일 과정의 “2014 장계향 아카데미”팸투어를 실시합니다.
진행되는 프로그램으로는 음식디미방 식사체험. 전통주와 전통음식만들기, 장계향선생관련 강연 및 동영상상영, 영양의 역사/문화 유적지 탐방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난달 팸투어에 참가하여 음식디미방 식사체험. 전통주와 전통음식만들기에 대한 포스팅에 이어 두들마을 역사문화탐방을 기록합니다.
경북 영양(英陽)의 옛 이름은 ‘고은(古隱)’입니다. 후에 광제원이라는 원이 있었다하여 원두들이라고도 합니다.
석계 선생이 영해로부터 와서 정착한 후 석계 선생의 아들인 갈암 이현일과 손자인 밀암 이재 등이 퇴계 이황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켜 후학에게 널리 전했고, 근세에 의병대장을 지낸 나산 이현규, 유림 대표로 파리장서에 서명한 운서 이돈호와 이명호, 이상호 등의 독립 유공자를 배출한 마을이기도 합니다.
'언덕위의 평평한 곳'을 뜻하는 두들에 석계선생이 살었던 석계고택과 석계 선생이 학생들을 가르쳤던 석천서당을 포함해 전통가옥 30여채가 있습니다. 이문열이 세운 광산문학연구소 등이 있으며, 마을 앞으로 흐르는 화매천을 둘러친 절벽 바위에는 석계 선생의 넷째 아들인 이숭일이 새겨 놓은 서대·낙기대·세심대 등 유묵이 뚜렷하게 보입니다.
두들마을 가는길
두들마을입구
음식 디미방 체험관이 마을입구에 있습니다.
두들마을 표석
석계고택입니다.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91호인 석계고택은 조선 인조(仁祖)와 현종(顯宗) 때의 학자인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1590~1674)이 인조 18년(1640)에 세운 고택으로 인조 18년에 이곳에 집을 짓고 자연지형을 본따 아호를 석계(石溪)라 하였습니다.
정부인 장씨는 이곳에서 임종할때 까지 살았습니다.
낙기대로 갑니다.
낙기라는 용어는 시경 형문衡門"에 "누추한 집에서 느긋이 쉴 수 있으니, 졸졸 흐르는 냇물을 보며 굶주림을 잊고 살만하다" 衡門之下 可以樓選 泌之洋洋 可以樂飢"에서 따온 말입니다.
약 10여미터 높이의 암벽이 서있고 주위에는 오래된 참나무 들이 서있습니다.
배고픈 것을 즐기려는데 쌀이 넘쳐나는 정미소가 나타나네요.
정미소를 지나 나타난 암벽에 서대라고 암각되어 있습니다.
이 마을의 있는 서대, 낙기대, 세심대 등의 마애는 석계선생의 넷째 아들 항재 이숭일(恒齋 李崇逸)의 글이라고 합니다.
두들을 돌아서 올라가며 광록초당이라는 현판을 만납니다.
광록정입니다.
퇴락하여 고종 21년(1884) 유생과 후손들에 의해서 중건되었습니다.
세심대
세심洗心'이라는 말은 <역경>"계사상전繫辭上傳"의 "聖人以此洗心 退藏於密"에서 나왔습니다. 퇴계 이황이 글을 쓴 세심대洗心臺를 본받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빈민의 구황을 위해 정부인 장씨대부터 심었다는 참나무옆을 지나갑니다.
주곡고택입니다.
경상북도 지정 민속자료 제114호로 조선 중기 유학자인 주곡 이도((做谷 李櫂, 1636~1712)가 영양 석보면 주남리에 건립했다가 후손들이 순조 30년 (1830년)에 이곳 두들마을로 이건했다 합니다.
이도선생은 우계 이시형의 손자인데, 영남학파의 학통을 이은 갈암 이현일의 문하생으로 말년에는 후학 교육에 힘썼다 합니다.
주곡고택은 경북의 전형적인 ㅁ자형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는 산지 마을의 특성인 곡식의 저장성을 중요시 한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도토리공원으로 올라갑니다.
마을을 내려다 보고
커피한잔이 생각나서 북카페로 갑니다.
책카페 두들 책사랑 입니다.
이곳 출신 작가들의 작품과 역사문화를 체함할 수 있는 공간으로 멀티미디어 자료실과 휴게실, 작품전시공간이 마련되어 있어 차를 마시며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곳 입니다.
오른쪽으로 또 다른 전시공간이 있습니다.
이문열 소설가의 성장기와 주요 활동상황이 판넬과 사진으로 전시되어 있고 이문열소설가의 작품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키피한잔의 여유를 가져봅니다.
광산문우
이문열문학관이자 후학들이 한국현대문학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할 수 있도록 설립한 광산문학연구회시설입니다.
이곳 두들마을은 이문열의 소설 <선택>의 직접적인 배경장소이며 <그해 겨울>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금시조><황제를 위하여> 등 많은 작품속 인물들이 삶의 역정을 펼치던 배경이 되기도 한 곳입니다. 그런 이유로 2011년에 이곳에 연구소가 마련되었습니다.
학사 6실, 강당 사랑채 등으로 이러어졌으며 문학강연, 토론회,작가와의 만남 등이 이루어지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정부인 안동장씨 유적비를 둘러보고
음식디미방전시관으로 갑니다.
음식디미방 전시관에서는 책에 소개된 음식 중 석이편, 잡과편, 대구껍질누르미 등 51종의 음식을 실물모형으로 제작 전시하고있습니다.
가지 간수하는 방법, 복숭아 간직하는 방법, 동아누르미 등의 모형에서 한참동안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저녁에 묵을 고택입니다.
전통한옥 체험숙박시설인 병암고택은 130여년의 전통을 간직한 고택입니다. 사진 오른쪽 안방에서 묵었습니다.
안방으로 들어가는 중에 마루에서 대문간을 내려다 보아 봅니다.
방안에 세면실이 있어 편안한 밤을 보냈습니다.
석간정사과 석천고택입니다.
독서실인 정사는 정면3칸 측면1칸 규모의 맞배기와집입니다.
경북도문화재 자료 제603호인 석간고택은 석계 이시명 선생의 아들중 넷째 항재 이숭일의 후손인 좌해공 이수영이 후진양성과 강학을 했던 살림집이며 소설가 이문열의 생가이기도 합니다.
좌해공 이수영은 1832년(순조32년) 석보면 화매에서 학문연마에 노력하면서 또한 심신수련을 위한 유람을 자주 하였다고 합니다.
강학할 수 있는 건물을 짓고 뒷 산인 광려산에서 이름을 따"여산정사"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여산정사는 석간정사 및 정침이라 하다가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석간고택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석천서당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79호인 석천서당(石川書堂)은 석계 이시명(1590∼1674)이 네 아들과 함께 생활하던 곳입니다.
조선왕조 인조 때 문인 석계 이시명이 1640년(인조 18년)에 이곳으로 이주할 때 네 아들과 더불어 낙기대(樂飢臺)위에 터를 잡고 석계초당이라 하였습니다. 후손들이 1831년에 이 서당을 지었으며 1891년에 중수하였다고 합니다.
과석계유허유감(過石溪遺墟有感), 갈암차운(葛菴次韻) 석천서당 중수기 등이 있으며 서당고(書堂庫)에는 안릉세전(安陵世典), 석계선생문집(石溪先生文集), 정부인안동장씨실기(貞夫人安東張氏實記), 정묵제선생문집, 항제선생문집, 영천집 등 목판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특이하게도 아궁이 바로 옆이 굴뚝이고 높낮이 차이가 거의 없습니다.
유우당으로 갑니다.
유우당은 조선 순조 33년 (1833년) 에 이상도 (1773-1835) 선생이 건립한 살림집으로, 당호는 선생의 장자인 기찬의 호를 따라 유우당이라 하였습니다. 이 집은 석보면 주남리에 있던 것을 이돈호 (1869-1942)가 현 위치로 이건하였는데, 이돈호는 3.1운동 때 유림대표로 파리 장서사건에 가담한 바 있고 그의 조카가 천재시인 이병각입니다. ...그런데 공사중인듯 합니다.
내일 다시 오기로 합니다.
쇠락한 사당옆을 지나 올라온 장계향유물전시관입니다.
전시된 정부인 장씨의 유물을 통해 생애와 업적을 살필 수 있습니다. 시인이자 서예가 등으로 활동을 알 수 있었습니다.
여중군자 장계향 예절관
청소년, 대학생, 일반인을 대상으로 인사, 복장, 식사예절 등 예절교육과 다도체험 등 전통문화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시설입니다.
우리도 이곳에서 정부인 장씨에 대해 재령이씨 종손에게 설명을 듣고 정부인 장씨 관련영상을 시청하였습니다.
고택에서 하루밤을 묵고 아침에 종택으로 갔습니다.
종택은 석계고택의 오른편에 위치하고 있는데, 문중에서 1800년대에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종가집 뒤안에 있는 사당을 열어준다하여 정부인 장씨의 위패를 보러 갔습니다.
사당건물 앞으로 달아서 낸 마루가 특이합니다.
이 마루위에서 기일(음력 8월20일)에 제사를 지낸다고 합니다. 사당안에는 석계 이시명과 첫 부인인 광산김씨(光山金氏) 김해의 딸 김사안(金思安)을 한 위패에, 그리고 따로 위패를 만들어 장씨부인을 모시고 있습니다.
정부인 장씨의 영정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해봅니다.
다시 유우당입니다.
공사중이라 어수선하지만 안방에서 숙식을 하는 공사인부인듯한 이에게 허락을 구하고 돌아보았습니다.
높은 지대에 높은 기단을 두고 건립되어 사랑채 마루에 오르면 아래 풍경이 넓게 펼쳐집니다.
건물 뒤편 사당앞에서 두들마을 답사를 마칩니다.
두들마을을 떠나 오면서 문득 석계 이시명선생이 석보에 살다가 수비로 옮기면서 지은 글(卜居賦)이 생각납니다.
‘바다집(영해 본가)을 떠난 후 석계(석보)에서 산 지 10년이나 되었네. 내가 어떤 사람인가 스스로 살피건대, 자주 재앙을 당해 마음이 어지러웠고, 마음이 분란하여 밖이 삐걱거리고 안이 무너져 내 몸 하나도 붙일 데가 없었네. 바탕은 천진하고 우직하나 운이 풀리지 않았으니 무슨 덕이 있어 내 스스로를 새로이 할 수 있었겠는가. 시대는 어둑어둑 바야흐로 쇠하려하고 밤은 길고 길어 새벽이 오질 아니했네. 때는 계사년(1653), 집을 옮길 때 좋은 날 좋은 때를 잡아 이사함에 꾸불꾸불 험한 길을 지나느라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수비(首比)를 향해 수레를 재촉했네.
…수해·한해로 창고는 텅 비었네. 온 식구가 하늘의 도움을 입지 못해 아우성이었지만 그 누굴 의지할 수 있었으랴. 도토리를 주워 곡식을 대신했고, 소나무 껍질 벗겨 삶아 먹었네. 이로도 오히려 죽지 않은 것을 만족하며 애오라지 분수로 생각하고 가난을 즐겨했네.
…요컨대 마음은 어느 곳에 두었는가. 배움에 두었을 뿐이었네. 배움은 반드시 익숙해진 이후라야 빛나는 법이네. 성인들의 가르침은 서적에 드러나 있으니 근실히 배우고 날마다 가르침 따라 공부하며 선생과 제자가 서로 토론했네.
…이 즐거움 남에게 말할 수 없는 것임을 아노라.’ |
출처: 하늘타리정원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타리
첫댓글 두들마을에 관하여 잘 정리 된 글을 읽으니 다시 동네 한바퀴 돈 느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