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 가볼만한곳 유달산 노적봉과 인근해있는 목포근대거리의 근대문화를 탐방하기 위해
노적봉 뒤편에 예쁘게 만들어진 데크로드길을 걷는다.유달산 노적봉 주변에는 꽃축제가
한창이다보니 다양한 공연이 열리고 있었으며 곳곳에는 즐거운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데크로드를 따라 내려가다보면 제일 먼저 만나진 곳은 목포근대역사관1관이었다.
'일제의 잔재' '군부시절의 헌병대건물' 등의 인식이 강하게 남아있어
문화재적 가치에 대한 인식이 외면되어 왔었으나 새로운 문화의 세기를 맞아 그 역사적.
문화적 가치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져 근대문화역사관이 조성이 되었음을 인지하고
둘러보면 좋을것 같다.
목포근대역사관1 (구 목포일본영사관) 목포시 영산로 29번길 T:061)242-0340
1897년 10월1일 목포항이 개항되고 1897년 10월26일에는 목포 일본영사관이 설치되었다.
이 건물은 일본영사관으로 사용하기 위해 1900년 1월에 착공하여 같은해 12월에 완공한 것으로
르네상스건축양식을 띄고 있다.이후 한.일간의 국제관계가 변화함에 따라 목포이사청,
목포부청,목포시청,목포시립도서관,목포문화원으로 사용되었다.
이 건물은 목포의 개항과 관련하여 역사적, 건축학적인 가치가 매우 높은
근대 건축물 가운데 하나로 1981년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목포 근대역사관 후문으로 들어서면 좌측에 방공호가 있다.
전쟁준비의 흔적인 방공호
방공호는 공중에서 가해지는 폭격을 차단하기 위해 만들어진 군사적 목적의 방어시설이다.
일제는 태평양전쟁시 대규모의 방공호를 만들어 취사시설및 공기정화시설까지 마련하고 장기전에
대비한시설을 준비하기도 하였다.한반도의 경우 남부지방을 중심으로
대형 방공호가 만들어졌으며목포에서는 유달산과 고하도에 방공호가 만들어졌다.
목포근대역사관 관람을 하려면 평일과 토.일.공휴일 관람시간은 오전 9시부터~18시까지
휴관일은 1월1일,매주 월요일에 휴관을 한다.
4.8 독립 만세 운동(1919년)목포에서의 독립 만세운동은 4월8일과 9일에 이루어졌다.
목포의 만세 시위를 준비한 것은 청년 학생층과 양동 교회의 신자들이었다.4월8일 아침 이들은 각각 영흥학교,
정명여학교,목포공립보통학교, 간이 상업학교에 들어간 학생들을 이끌고 시가지로 쏟아져 나왔다.
약속 시간인 오전 10시가 되자 시내 여기저기서 독립만세 소리가 터져나오고 태극기가 나부끼고 격문이 뿌려졌다.
이로써 목포시가는 삽시간에 사람의 물결로 뒤덮혔다. 이 시위로 서기견, 박상렬등 80여명이 체포되어 약 40명이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목포경찰서 1910년 일본의 강제병합 이후 목포경찰서의 관할 구역은 목포부,무안군,완도군 추자면에
걸치는 광범한 지역이 되었다. 목포부 내에서는 일본인들이 살던 영정과 항정에 파출소가 설치되었고,
조선인들이 살던 죽동에는주재소가 설치되었다.1919년 헌병 경찰제가 일반 경찰제로 바꾼 이후에는
목포부 내 항정, 영정, 역전 등에 파출소가 설치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우리가 얼마나 많이 약탈을 당했을지 곳곳의 근대역사관을 통해서 알수있다.
#신사참배강요 1936년 새로 부임한 미나미 지로총독은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내선일체'를
구호로 내걸고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만들려는 '황국신민화정책'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는 1938년 조선인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는데 개신교 선교사들이 세운학교인 정명여학교와
영흥학교 학생들은 선교사의 지시에 따라 참배하지 않았다고 한다.이에 전남은 두학교를 폐교조치를 하였고,
학생들은 공립보통학교로 모두 전학시켰다.이후 학생들뿐만아니라 각종 전시동원을 위한 단체에 소속된
조선인들도 목포의 송도신사 참배를 강요당했다.
#창씨개명 조선총독부는 1939년11월'조선민사령'을 개정하여 조선인들에게 고유이름을 버리고
일본식으로 씨를 새로 만들고 이름도 새로 지을것을 강요하였다.
창씨개명의 1차시한은 1929년 8월10일까지였는데 이때까지 80.5%의 조선인이 창씨개명된 새이름을 신고하였다.
#일본어 사용의 강제 1938년 총독부는 '내선일체'의 강화를 위해서는 조선인들이 일상생활에서도 일본어를
상용할 수있어야 한다면서 대대적인 '국어(일본어)보급운동' 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효과는 크지 않았다.1944년까지 일본어보급률은 20% 정도에 머물렀고
전남지방의 경우에는 19.5%에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인력의 강제동원과 쌀의 공출.배급제 1937년에 중일전쟁 1941년에 태평양전쟁을 도발한뒤,
모자라는 전력을 보충하기 위해 조선인들을 전쟁에 동원하였다.1938년 육군 특별 지원병,1943년 해군
특별 지원병 모집에 이어 1944년에 징병제가 실시되었다.
1939년부터 쌀의 공출과 배급제도를 실시하였으며,이를 위해 1940년에 '식량배급조항'을 만들었다.
이훈동 정원 전남 문화재자료 제165호 목포시 유동로 63(유달동)
유달산(228m)의 남동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며,1930년대 일본인 우찌다니 만페이가 만든 일본식 정원이었다.
해방후 해남출신의 국회의원 박기배씨가 소유하였던 것을 1950년대에 이훈동씨가 매입하여 약 60여년이
지나는 동안 일본식 정원의 특징은 사라지고 백제양식의 별서 정원으로 가꾸어져 있다.
개인정원으로는 호남지방에서 가장 큰 규로모 입구정원,안뜰정원,임천정원,
후원으로 이루어져있고 약 113여종의 나무종류도 있다.
시원한 숲속의 정원은 작은 구름다리를 지나 석등이 보이고
정원위쯤에 올라가면 목포시내가 한눈에 펼쳐진다.
최근 이식한 소나무는 가격이 상당히 비싸다고 한다.
이훈동정원을 둘러보고 나와 근대거리를 걸으면서 다음장소인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이었던
근대역사관2관으로 이동하던중에 그 시대를 잠시 느껴보았다.지금은 편안하게 느끼며
감성적으로 걸을수있지만그당시 일본인들에게 많은 억압을 받았을 그 모습이 생각나기도 하였다.
근대거리를 지나는 길에 카페도 보인다. 이곳에서는 체험도 함께 할 수있는 공간이라고 한다.
근대문화역사관2관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전남 기념물 제 174호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일본이 한국경제를 독점 착취하기 위해 1908년에 설립한 특수국책회사이다.
이 건물은 2006년도에 내.외부를 개.보수 하였고 현대는 목포근대역사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건물의 내부는 많은 변형이 되었으나 외부는 건축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목포근대문화역사관2관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일제가 한국의 경제를 독점하기 위하여 설립한 것으로 목포지점은 1920년 6월 문을 열었다.
한국 농민에 대한 수탈을 자행하였는데 목포지점의 경우 17곳의 농장을 관리하고 있었으며 가장 많은
소작료를 거둔 제1위의 지점으로 일제식민지 지배의 상징적인 장소이다.
'일제의 잔재' '군부시절의 헌병대건물' 등의 인식이 강하게 남아있어 문화재적 가치에 대한 인식이
외면되어 왔었으나 새로운 문화의 세기를 맞아 그 역사적.문화적 가치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져
지난 1999년 11월20일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목포의 역사는 일찌기 삼한시대에 마한에 속하였고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물아혜군이었다.
통일 신라시대에는 무안군으로 고려시대에는 물량군, 그 후로는 무안군으로 불리웠다.
목포라는 이름은 고려사라는 역사책에 처음 나오는데 땅이름의 유래는 정확하지 않다.
나무가 많은 포구라 하여 목포라고 불렀다고 하고,목화가 많이 난다하여 그렇게 불렀다는 설도 있으나,
서해로부터 육지로 들어가는 길목이라하여 목포라고 불렀다고 하는 주장이 가장 유력하게 거론된다고 한다.
목포진역사공원이 조성되어 있는 공원으로 이동하면서...
약사사는 만호동 옛 목포진이 있던 언덕위에 자리하고 있다.
1927년 4월21일 신축된 이사찰을 현대 대한불교 조계종 대흥사에 등록되어 있으며
경내에는 대웅전과 칠성각이 있고 1935년에 건립된 불상과 1930년에 건립된 물을 담는 석조가 있다.
약사사 본당은 지형을 최대한 살려 건립한 모임지붕의 일본식 목조 건축으로 일부 창호와
지붕 재료만이 교체 되었을뿐 비교적 건립당시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근대목포 불교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는 문화유산이다.
목포진 전남지정 문화재자료 제 137호
1872년 제작된 전라남도 무안 목포진 지도에는 목포진은 원형으로 둘러져있고 동,서,남,북 네곳에
문이 설치되어있었으며성내에는 객사,내아,군기고,사령청,장청,이청,창고,중문,내삼문,홍살문,옥,
그리고 성밖 남문과 동문사이 어변정이 있다.건물배치는 동,서로가로 지르는 도로 위쪽 중앙에 진의
중심건물인 객사가 위치하고 그 아래쪽 동쪽으로 아사가 자리하고 있다.
중략.. 만호는 인근지역의 해상 경계 경비등 병사업무의 수행과
진영 소재지의 인근 마을의 일반 행정까지도 관할하였다.
목포진 역사공원 주변에는 목포근대역사관1관 목포근대역사관2관
목포유달초등학교구강당(구 목포공립심상소학교강당)그리고
목포오거리 문화센터(구 동본원사 목포병원)등 근대문화를 관람할 수있는 공간들이 많이 있다.
목포 근대거리를 둘러보는 동안 그 많은 역사를 모두를 알수없었지만 잠시동안이나마
일제강점기 시절이 어떻게 힘들었을 것인지 그리고 다시는 이렇게 어느 나라의 지배도 받는일이
있어서는 안될것임을 느꼈다.비록 우리 선대에서 그러한 시절을 겪었지만 짧은 기간동안
이미 우리나라는 경제부국이 되었고 세계최고의 IT 강국이 된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움도 함께 가졌다.
상기 포스팅은 목포시에서 초청하여 호남선KTX개통과 목포시 문화 관광 먹거리를 알리기위하여
여행블로거기자단 초청으로 진행하는 팸투어를 다녀온 후기글입니다
첫댓글 옛 문화들을 배웁니다
네~ 자칫 잊기 쉬운 근대시절의
모습을 또 다시 한번 배운기회였습니다.~
우와아 포스팅 완전 짱이다...멋진 포스팅 잘 보고 갑니다...아싸아
ㅎ 석이님~ 칭찬들으니 기분좋으네요~아싸아~ㅎ
목포시의 근대문화역사거리를 탐방하셨군요.
좋은 정보 자세히 보고 갑니다.
네~~ 근대문화역사거리의 모습에서
많은것을 배우게 되었어요~~
일본의 강제 점검기에 수많은 나쁜 짖을 우리에게 하고 지금도 말도 안되는지꺼리를........힘을 키워야 합니다........우리 속에서 들끓지 말고
그럼요~~ 다시는 이런일이
있어서는 안되죠~~...우리 국민의식을 고취시켜야
할것같아요~
보면서 마음이 아파왔던 곳입니다!
네~ 맞아요~...
다시는 이런일이 있어서는 안될일이고
이러한 아픔이 있었기에
경제성장이 빠르지 않았나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