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장흥군을 부를 때는 정남진(正南津)이라는
랜드마크가 따라 붙는다. 그것은 지도를 놓고 서울 광화문에 있는 도로원표에서 남쪽으로 금을 그으면 전남 장흥(長興)을 만나게 된다.
정남진(正南津)은 장흥군의 안양면과 용산면, 관산읍, 회진면 일대의 바닷가를 지칭한 것이다. 그러한 인연으로 해안도로가 있고 아름답게 펼쳐진
다도해의 해돋이와 해넘이도 감상할 수 있어 기억에 남을 여행지로 복받은 곳이다.
특히 정남진(正南津)과 함께 들려야 할 곳은
천관산(天冠山 723m)이다. 정상 부근에 있는 80개의 봉우리가 보옥(寶玉)을 늘어뜨린 면류관처럼 도열해 환상적 신비감을 자아내게 하며
이곳에서 바라보이는 다도해의 비경을 함께 도취할 수 있어 지리산, 월출산, 내장산, 변산 등과 함께 호남의 5대 명산(名山)에 꼽히는 이유있는
산이기 때문이다.
또한 6개의 동천(洞天), 44개 영봉, 36개의 석대(石臺)를 갖추고 있어 공짜로 비경을 보기에
미안했을까? 옛 시인 묵객들이 천관산을 일러 천풍(天風)이라는 산에 호를 지어 준다. 그래서 신경준의 산경표(山經表)에는 풍천산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과 연계된다.
중 정명(靜明)은 천관산을 "이상하고 기괴한 것들이 많은데, 오뚝한 것, 숙인 것, 우묵한 것, 입을 벌린
것, 우뚝 일어선 것, 숨어 엎드린 것, 울툭불툭한 것 등이 천태만상 기괴하고 이상하여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다. 어찌 조물주가 여기에 정수를
모아 놓고 바다를 한계로 하고 넘어서 달아나지 못하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표현했다.
오늘은 장흥이 낳은 삼당시인 백광훈(白光勳)의 형이요 가사 작가
백광홍(1522∼1556), 금당별곡(金塘別曲) 위세직(魏世稷 1655~1721), 천풍가(天風歌) 노명선(盧明善1707~1775)의 맥을 이어
조선후기 선각자적 실학자로 생각보다 인물의 업적이 묻혀 있는 존재 위백규(魏伯珪 1727 ~ 1798)가 17세(1743년) 겨울 이곳에서
수학하는 등 후배를 양성한 곳으로 현재 장흥위씨 방촌계파의 사묘재실(祠廟齋室)로 사용하고 있는 천관산 오르는 길에 자리한 유서깊은
장천재(長川齋)를 만나러 보이지 않은 거센 칼바람을 맞으며 오르며 수련의 기회로 삼았다. 그때는 장천정사(長川精舍)라고
불렀다.
위백규는 그의 나이 9세때인 1735년 (영조11) 천관산을 올라 유람을
노래했을 만큼 수재였다. 그가 읊은 '咏天冠山遊 九歲乙卯'의 시에서는
관산사에서
발걸음 시작하여 / 허공을 사다리 삼아 봄 하늘 올라 인간 세상 굽어보니/티끌 덮인 삼만리라 發跡冠山寺 梯空上春昊 俯視人間世
塵埃三萬里/존재집 제1권/24권 연보
방문한 날 3월로 들어서더니 겨울과 봄의 기싸움이 거세다 싸움으로 애꿋은 막 피어오른 개불알
꽃만 움추리게 한다. 얼마나 피고 싶었는지 바위 밑자락 촉촉한 풀꽃들도 고개만 삐죽이고 이들 싸움이 끝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꽃샘추위 바람 속에는 이미 봄 냄새가 실려 있어 푸른 입봉오리가 수줍게 밀고 나오는 것은 그 누구도 말길 수
없었다. 지금 새 정부가 들어 선 후 행정부와 야당이 장관 인선을 두고 기싸움이 치열해 자연의 섧리나 인간사와 다를 바
없다.
그래도 장천재계곡에 흐르는 물줄기 소리는 겨울보다 한결 창창하다. 장천재를 오르는 길에 짧게는 100년, 길게는 300년에
이르는 고목에서 피어나는 동백꽃과 빽빽한 소나무 대나무숲으로 덮혀 있고 기암괴석을 감고 도는 계곡의 맑은 물줄기가 편안함을 주어 여름에는
생각만해도 신선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할 뿐만 아니라 독특한 고가(古家) 당당한 풍채가 만들어내는 절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장천재에 다다르면 아치형 도화교(桃花橋)라는 다리가 있어 등산객 또는 계곡을 찾은 사람들에게, 여행의 운취를 보태고 있다.
다리를 건너면 장천재 청뢰문(聽雷門)앞에서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는 이유가 또 하나 있다. 천년의 신비를 간직한 듯 아름다운 태고송(太古松)
때문이다.
이 고목은 조선시대 태종 때부터 자라기 시작했다고 하여 태고송(천연기념물
제356호) 또는 효자송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전해진다. 천관산을 찾는 사람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소나무로 칭송을 받으며 600년을 살고 있다.
이 소나무는 지난 600년 동안 날씨에 따라 바람결에 소리를 내어 장흥 사람들에게 날씨를 예측하게 했다는데 높이 20m 나무둘레 2.8m의
거목이다.
효자송(천연기념물 제356호)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곳에 효성이 지극한 세 청년이 살았는데 무더운 여름날 자신의 어머니가
노약한 몸으로 밭일하는 모습을 보고는 그늘을 만들어 쉴 수 있게 각각 소나무, 감나무, 소태나무를 심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소나무만 남아 있다.
효자송과 장천재의 사연과 일치한다. 이곳에 이 소나무의 수령을 받쳐주는 시가 전하고 있다.
반계(磻溪)
위정명(1589~1640)이 8세때 이 소나무를 보고 짓기를 "세황제의 은택으로 저절로자라 / 순목의 품성으로 천년이 되었구나. 빼어나게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그곳에 올랐더니 / 태고송의 봄볕이 그 중 으뜸일세 三皇雨露無爲化 順木之天歲幾千 勝賞別有登臨處
太古春光第一巓"했다.
천관산은 통일신라시대 때 당나라 승려들이 유학을 왔을 정도로 불교, 학문의 중심지였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산의 정기가 특별해서 산기(山氣)를 넘고자 하는 고승들이 수도하기에 적합하여 한때는 99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하며, 황금의 약수터가
있는 등 전설과 설화가 가득한 산이기도 하다.
장천재(長川齋)도 이중 한 암자로 원래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21년(1372)에 창건한 장천암(長川庵). 영은암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 중종 때 강릉참봉 위보현이 어머니를 위해 이 암자에
묘각을 짓고 장천암의 승려로 하여금 이를 지키게 한 것을 후에 장흥위씨(長興魏氏)들이 1450년경에 장천암터에 장천재를 세워 오랫동안 한학의
교육터와 서재로 이용해왔다고 한다. 이후 숙종 31년(1705년), 영조 23년(1724년) 개수를 거쳐 고종 10년(1873년) 현재의 형태로
중수하였다.
장천재는 부계당(府溪堂), 즉휴루(卽休樓), 낙영재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워왔으며 이들에 대한 용도에 따라 명명해
편액이 걸려 있다. 또한 현판에 적힌 시문으로 보아 유림들이 시문을 교류하였던 장소였음을 알 수 있다. 위백규가 살았던 때에는
부계당(府溪堂)였다. 그가 홀로 부계당에 묵으며(獨宿俯溪堂) 읊으시가 존재집 제1권에 전하고 있다.
물소리에 밤은 더욱 고요하고 /
바람 불어 산은 다시 그윽해지네 스님은 먼저 잠들었는데 / 가을이라 뜰에 달빛 가득하구나. 水鳴夜愈靜 風吹山更幽 一僧先自宿
明月滿庭秋
특히 위백규의 향촌교육활동은 장천재의 교육활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곳은 관산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남자든 여자든
형태야 어떻든 인연을 맺고 있다. 남자는 그곳에서 글을 배우며 음력 그믐 날 제야의 행사에 참여한다. 여자들도 명절이면 그곳에서 놀이를 하며
지냈다 한다.
장천재 학규는 아직도 후손들이 지켜가고 있는 등 일대의 학문과 시회의 중심지가 되면서 조선조 말 크게 문풍이
일어나고, 전국적으로 명성이 높아져 많은 인물이 다녀간 장소로 남아 있는 것이 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대부분의 제각이나
누.정자는 ㄱ자, ㄷ자, ㅁ자 6.8각형의 형태로 지어졌으나 이곳은 건축 양식은 매우 특이한 한문의 '공(工)'자 형태로 제각의 공간에서도
주변의 자연과 풍광을 조망할 수 있게 하는 구조라 관심을 끌고 있다.
바람이 따사로운 날 장천재 누마루에 앉아 그 옛날
시인묵객이라도 되는 기분이 들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장흥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서당으로서 많은 시인묵객들의 출입이 잦았다.
그중에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순국지사였던 송병선(宋秉璿1836(헌종
2∼1905)은 장천재에 오르고는
아 장흥 위씨의 장천재/백여 년 한결 같아라 깊은 곳이라 세상 근심 잊고 보니/여기 저기
노닐던 옛 사람도 그리워 魏氏長川業 百年此一樓 境湥忘世憂 人古想天遊
바위틈에 핀 꽃은 안개에 젖고/석간수에선 우레 소리까지
나는데 잠시 머물다 좋은 구경 하거니/달 보며 한 잔 술도 걸치누나 霞氣巖花濕 雷聲石澗由 少留酬勝賞 對月共觴流/ 宋秉璿「淵齋先生文集」卷2
또 서예가로
정기(鄭琦)의 문인으로 화이론(華夷論)에 입각하여 저술활동을 하였으며 서학(西學) 등 ‘이단(異端)’을 배척하고 성리학적 정통을 수립하는 데
주력한 전남 구례 출신 고당(顧堂) 김규태(金奎泰 1902 ~ 1966)가 이곳에 어느날 뜻을 같이한 지인들과 들려 읊기를
맑고
화창(和暢)한 계절 문득 빗줄기 걷히니/나무 그늘 걷어가고 보리밭 물결 출렁충렁 문 닫으니 그대를 진무기라 하겠고/떠도는 발자취의 나는
상자팽이 부끄럽다.
만국의 상전벽해(桑田碧海)는 구름 밖의 일이요/일생 백년 이별과 만남은 한 잔 술의 정 자리 앞의 문득
양춘곡(陽春曲) 불어대니/금속의 맑은 소리 반갑기도 하다.
본관이 장흥(長興)이었던 삼족당(三足堂) 위세보(魏世寶 1669 현종
10∼1707 숙종 33)도 어느날 장천재를 지내가 갔다. 그가 남긴에에 8대 후손 대랑(大良)이 차운하기를
추원루(追遠樓)와
열락헌(悅樂軒)은 /꽃동산 마냥 대대로 지켜야 하거니 변함없는 누각은 선조의 음덕(蔭德)이요 /사방벽 맑은 시들은 옛사람의
흔적이라 追遠樓兼悅樂軒 吾家世守是芳園 千年別業皆先蔭 四壁淸詩摠舊痕
선계런가 대숲 바람에 가슴까지 후련하고 /근원 좋은
시냇물이라 베개맡까지 뇌성일세 어질고 덕스런 이의 방문이 잦다보니 /그 광채 문 가득 빛나는가
하구나 竹籟透衿非俗界 澗雷鳴枕覺靈源 賢人長德多過此
精采于兮耀滿門
개항기의 학자이자 의병장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이 쓴
부계당추기(俯溪堂追記)에서 위씨묘재 겸 사숙(魏氏墓齋 兼書塾)의 장소였다고 적고 있다. 또한 시회 또한 장천재의 전통이었다. 주로 문중 어른들이
여름 한가한 때 피서를 겸해 시회를 연다. 시기는 유두, 칠석, 백중인데 농사에 장원한 집이 주관한다. 더구나 외지에서 다른 성씨의 선비들이
찾아오면 시회를 열어 접대한다. 이것이 외지의 선비를 접대하는 위씨들의 손님 접대방식이다고 한다.
이 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평면은 ㄷ자형이며
전면은 양쪽 날개 1칸씩을 누각형으로 한 것으로 조선조 건축양식의 특징을 잘 갖춘 곳이다.
중앙 3칸에는 온돌방을
두고 양측 전후에는 누마루형으로 난간을 둘러 돌출시켰으며, 우물마루를 깔았다. 양쪽 누마루의 지붕은 앞면에서는 팔작지붕의 모습인데 반해,
뒷면에서는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 형식을 하고 있어 특이하다. 장대석으로 짜올린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기둥은 원주를
세웠는데 포작이 없는 주두와 창방, 장여를 올려 결구하였다.
장천재는 몇
번이나 고쳐는지/ 선친 살아 생전에도 그랬지요 구비마다 화폭을 펼친 듯한 풍경에다/무덤 곁에 높다란 향나무까지 溪堂重建幾經營 先子當年亦告成 九曲風烟開畵幅 十尋檜柏護佳城
장서에서
다암공의 꼼꼼함을 보았고 기사로 춘옹의 세밀함도 느꼈지 귓가에 맴도는 듯 복받치는 눈물 나니 감히 유지를 잊고 평생의 뜻
어기리까 追着茶老藏書密 始覺春翁記事精 來耳伊今多感涕 敢忘遺戒負生平
지붕은 중앙 용마루 부분이 ㄷ자형 양익부와
높이를 동일하게 하고 전면에서는 팔작지붕의 합각이 보이며 배면에서는 맞배지붕으로 처리한 것이 특이하다. 문은 중앙 3칸에만 설치하였는데 3칸
모두 2분합이다. 장천재(長川齋)는 전라남도 장흥군 관산읍 옥당리 산95에 소재하고 있으며 1978년 전남유형문화재 제72호로 지정되었다.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추강(秋江) 남효원(南孝溫 1454 단종 2 ~ 1492 성종 23)은 장흥(長興)에 들려 천관산을 오르고 "돌아보매 강남 땅 몇 단정 지나왔던가 / 높고 험한
천관산이 푸른 바다 베고 있네.여섯 밤의 봄꿈은 취한 듯이 아스라하니 / 필마 타고 어느 해에 반갑게 다시 만날까"하며 여섯밤을 황홀한 봄꿈으로 표현하며 천관산 절경에 도취했던 산이기도
하다.
천관산을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와 보성의 인물 소파(小波) 송명회(宋明會)의 두 선비도 천관산을 오른다.
높고 크신 덕망은 산보다 무겁고 /거동 우러른 지 여러 해 감히 넘 볼 수 없네. 삼신을 의지하여 천리밖에 소요하고/가슴에
큰 띠 메고 양호간(兩湖間 호남 호서)에서 해후했네.
심상한 초목들은 비단을 먹음는 듯/자재(自在)한 새와 물고기 얼굴을 알아본
듯 하네 모실 헌병(軒屛) 헤아려 소쇄하여 받들고/이런 단장은 한번 만날 완인(頑人고집쟁이)으로 마땅하리
또 숙종(肅宗) 31년(1705) 병과(丙科)에 급제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른 양우전(梁禹甸 1671년 현종 12~?)이 천관산에서의 감흥은 이러했다.
산세가 바닷가에 웅장하게 서려있어 /올라온 이날에
눈이 번뜩 뜨인다. 일천바위 깎이어 공중에 속아났고 /열 섬 아스라히 눈아래서 감돈다.
법우(法雨)가 처음 개니
은월(銀月)이 깨끗하고 /선풍(仙風)이 잠시 자니 금운(錦雲)이 뭉쳤다. 술을깨어 시를 짓느라 한참 흥어리 하니 /진심(塵心)의
일심(一寸)이 싹 가심을 크게 느낀다.
장천재는 위로는 계곡을 따라 청풍담, 백설뢰, 도화량, 세이담, 명붕대, 추월담,
청령뢰, 와룡홍 등 소위 장천 8경이라 불리는 명소가 들어서 있는곳이다. 또한 이곳 방촌팔경에서 동산재월(東山齋月), 즉 재(齋),
'장천재에서 동쪽 소산봉에서 솟아 오른 달의 아름다움'을 1경으로 꼽았다. 장천재에서 느낄 수 있는 팔경을 지부(知府) 민치준(閔致駿)가
구수하게 읊어냈다
청풍대(淸風壁) 마름 끝에 맑은 바람 살랑대니, 그예 주인장 속내까지 개운했으리. 북창은 옛 말이고
지금은 청풍벽이니, 고만 고만한 흥취 그 가운데 있더라. 噓來蘋未自淸風 灑落賁襟是主翁 古有北窓今有壁
一般氣味在船中
도화량(桃花梁) 꽃 핀 언덕사이로 흐르는 냇물 한 구비, 선경의 오솔길에 작은 다릴 놓았군. 가끔씩
어부가 뗏목타고 오가는데, 안개 숲 깊은 곳에 인가를 찾는다지. 一曲長川兩岸花 仙源微路小梁斜 時有漁郎來去艇
樹雲深處訪人家
세이담(洗耳潭) 산 중 물이 절로 연못을 이뤘는데, 맑기는 옥호요 푸르기는 쪽빛 같아라. 속세의 일 듣지
않으려 하노니, 혹 나를 더럽힐까봐 맑은 기운 취하네. 山間有水自成潭 淸似玉壺碧似藍 莫使是非流入耳 若將浼我取澹澹
운영기(雲影磯) 그대의 그윽한 흥취 낚시하고 딱 맞으니, 모든 일에
무관하여 세상과 어긋났음이라. 한 조각 흰 구름에 내 마음도 실었으니. 비낀 바람 찬 눈에도 돌아갈 줄 몰라라. 認君幽趣付漁磯
萬事無關與世違 一片白雲心共住 斜風寒雪卻忘歸
추원담(秋月潭) 달빛어린 차디 찬 못 가을 분위기 더하는데, 티 없이 맑은 게 물과
함께 흘러간다. 주인장 불러다 그 이치 살피니, 속기 없는 담박함 그 가운데 있더구만. 寒潭月色倍生秋 寶鑑無塵水共流 喚得主翁觀物理
淡然氣像此中留
명봉암(鳴鳳巖) 성세엔 저 높은 바위에 봉새 운다하니, 사령20)중에 특별하기가 보통이 아니라.
서주이후에 천관산에서 울었으니, 우리 군주의 덕스러움을 본 게지 뭐. 聖世鳳鳴節彼巖 四靈超出異於凡 西岐以後天冠又
覽下吾君德有威
탁영대(濯纓臺) 못 가 누대에서 갓끈 씻을 만하니, 음 물이 맑아서 그럴테야. 이제야 굴원의 뜻을
알았으니, 창랑 한 곡조에 만고의 정회 이누나. 澤畔有臺可濯纓 水哉奚取取斯淸 而今識得三閭趣
一曲滄海萬古情
와룡홍(臥龍泓) 이 곳에 와룡이 있음은 아무도 모를게야, 신령함이란 게 애초 저 하늘이 모아주기에.
잠겨있대도 연못의 물건은 아닌 것이, 언제고 운우만 있으면 변해서 가버릴테니깐. 誰識斯間有臥龍 元來靈異自天鐘 雖潜不是泓中物
雲雨他時變化從
고려 고종 때 천태종(天台宗) 승려로 송광사松廣寺)에 가서 혜심화상(慧諶和尙) 배우고 만덕산 백련사에 원묘국사에게
공부한 정명국사(靜明國師) 석천인(釋天因 1205 ~ 1248)은 "지제산(천관산)은 높아 몇 천 길인가 / 오르고 또 올라도 그 근원 찾지
못하겠네 / 支提山高幾千仞 上上不得尋其源"라며 산의 산행하는 감흥을 나타냈으며, "위험한 곳 올라갈 때 남은 힘이 있으니 / 언제나 너의 은혜
입는 것 진실로 알겠구나 / 登危陟險有餘力 信知造次承渠恩...."하며 천관산에 대한 긴 여운을 남겼다.
천관산에 오르기 전에 반드시
들려도 좋은 곳, 그곳의 대들보를 들쳐보면 더 많은 구수한 시공간을 거스르는 사연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일대에서는 해마다 양방과 한방,
보완대체요법을 한 자리에서 체험할 수 있는 행사가 천관산 일원에서 열리는 대한민국통합의학박람회로 주변이 들썩이며 방문객들이 많이 늘어나 장천재의
존재 가치가 한층 가치를 더하고 있다.
이밖에도 관산읍에는 죽교리에 영호정(瑛湖亭 정재홍), 방촌리 417 계춘정사(桂春精舍)의
죽헌(竹軒) 위계창 (1921) 등이 현존하고 있다. 문화.김은희 [장천재]
.천문과 지리에 밝았던 존재 위백규(1727∼1798)가 제자를 가르쳤다고 전해지는 곳으로 고려 공민왕 21년(1372)에 처음 지어졌으나, 많이 파손되어 조선 고종 때(1870년경) 다시 지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ㄷ자형의 구조를 하고있는 이 건물은 앞면 5칸·옆면 4칸 규모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가운데 3칸은 온돌방이고 양쪽의 앞뒤는 누마루 형식으로 난간을 설치하여 돌출되어 있다. 양쪽 누마루의 지붕은 앞면에서는 팔작지붕의 모습인데 반해, 뒷면에서는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 형식을 하고있어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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