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종군 성지
이재익
단계 냇가에
빗줄기가 수면을 두드리면
오늘도 그 길은
사백여 년 전 발자국을 깨운다.
남색 철릭* 한 벌
칼보다 무거운 침묵을 걸치고
아들 하나, 가노 둘
말 네 필과 함께*
단계 냇가에 잠시 멈춰
찬밥 한술을 드셨다.
육백여 킬로미터,
나라를 짊어진 걸음이었다.
형장의 고문이 남긴
뼈마디 저린 몸.
두 달 전 어머니를 여읜 상복은
아직도 가슴속에 입고 있었다.
빗물 속에
눈물을 감춘 채
한 걸음, 또 한 걸음
조국을 향해 걸었다.
오늘 단계마을 사람들이
그날을 그림으로 되살리고
축제로 기억하는 것은
승전의 영광 때문이 아니라
끝내 무너지지 않았던
한 인간의 불굴의 승리를 기리는 일이다.//
* 철릭 남색 고급 관리 복장
* 백의종군숭모회 회장 공창석 님이 백의종군 모습 연구한 성과 반영함.
감상문
「백의종군 성지」는 영웅으로서의 충무공이 아니라, 한 인간 이순신의 고독과 인내를 조용한 시선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시인은 단계 냇가에 내리는 빗줄기를 통해 사백여 년의 시간을 현재로 불러오고, 그 빗속을 걸었던 장군의 발자국을 생생하게 되살린다.
남색 철릭, 아들 하나, 가노 둘, 말 네 필, 그리고 찬밥 한술이라는 구체적인 묘사는 역사적 사실에 생명력을 불어넣으며 독자로 하여금 그 현장을 함께 걷는 듯한 감동을 안겨 준다.
특히 「두 달 전 어머니를 여읜 상복은 아직도 가슴속에 입고 있었다」는 구절은 개인의 지울 수 없는 슬픔과 나라를 위한 사명을 한 문장 안에 응축한 이 작품의 백미라 할 만하다.
마지막에 이르러 시는 백의종군을 단순한 고난의 행군이 아니라, 끝내 꺾이지 않은 정신의 여정으로 승화시킨다. 단계마을의 축제는 승전의 화려함을 기념하는 자리가 아니라, 시련 앞에서도 사명을 버리지 않았던 한 인간의 불굴의 승리를 기리는 뜻깊은 기억의 장임을 일깨워 준다.
이 작품은 충무공의 위대함을 과장된 영웅담으로 그리지 않고, 슬픔을 삼키며 묵묵히 걸어간 인간 이순신의 숭고한 정신을 담담하게 노래한 역사 서정시로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