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손 장군은 고려 평장사 김태서(전주 모악산에 묘소가 있고 전주김씨의 시조로 김일성의 선조이다 )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성품이 온화하고 관대하며 지혜와 용기가 뛰어났을 뿐 아니라 대담하면서도 지략이 있었다고 전한다.
김경손장군은 최씨 무신정권 때에 최충헌과 최우의 사랑을 받고 최우의 사위가 된 김약선의 친동생으로 여진족과 전쟁시 혼자 힘으로 전쟁의 판도를 바꾼 척준경과 비견될 수 있는 인물이다.
김경손 장군은 몽고 1차 침입 당시 정주성을 지키고 있었다.
12명의 별동대와 함께 성 밖으로 나가 몽골군과 싸운 후 돌아왔더니 성안에 사람들이 모두 도망가 몽골 본대가 들이닥쳐 어쩔 수 없이 도망을 쳤다.
12명의 무사들은 계속 김경손을 따랐다.
김경손과 12명의 무사들은 몽골군에 들키지 않기 위해 불을 피우지 않고 날고기를 먹어가며 몽골군 진영을 돌파해 고려군의 거점인 귀주성으로 갔다.
몽골 장군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골 대군은 의주를 성주의 자진 항복을 받고 15일간 처절한 항전과 군.관.민 자결로 분전했던 철주를 점령한 후 귀주성을 공격했다. 몽골군이 기마민족이라는 이유로 기마병 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은 고정관념이다.
중국과 중앙아시아 호라이즘의 대도시들을 모조리 격파하는 과정에서 전세계의 공성 무기들과 공성 기술자들을 활용하여 공성전을 꾸준히 발전시킨 그들이다.
고려를 공격할 시점의 몽골군은 세계 최강의 공성전 무기와 실력을 갖춘 부대였다.
당시 귀주성 방어를 담당하던 귀주성의 성주는 박서 장군으로 5천의 병력으로 귀주성을 지키고 있었다.
몽골군을 맞아 박서 장군은 그나마 정예병이라 할 수 있는 별초군 250명을 각 성문에 나눠 배치했으나 이들조차 떨고 있었다.
말을 달려와 성벽을 기어오르고 포차를 쏘고 성을 함락한 다음에 사람들의 머리로 탑을 쌓는다는 세계 최강의 부대를 맞이하고 있던 고립된 성의 5천여 병사들의 사기는 바닥을 치고 있었다.
이때 김경손 장군이 대단한 결심으로 눈부신 활약을 한다
김경손과 12별초의 별동대
남문 수비를 맡은 김경손 장군은 별동대를 조직해 말을 타고 성문 밖으로 나가 몽골군을 기습할 계획을 세우고 출동명령을 내렸지만 250 여명의 별초틀은 겁을 먹고 움직이지를 않자 김경손 장군이 먼저 성문을 열고 나가자 그를 따른 별초는 정주성에서부터 동행했던 12별초 뿐이었다.
김경손과 12인의 별초들은 몽골군 대열 속으로 들어가 화살로 기수병과 지휘관들을 저격하며 기선을 제압했다.
몽골군은 기습에도 강한 부대였지만, 이렇게 적은 숫자로 기습해 올것을 상상하지 못한터라 속수무책으로 당하였고 당황한 몽골군을 척살하고 단한명의 사상자도없이 무사복귀한 김경손장군과 12별초틀을 보고 처음에는 못믿어워했던 박서장군이 큰절을 하고 그들을 맞이했다고 正史는 전한다.
이를 본 고려군의 사기는 최고조로 고무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귀주성 공방전에서 고려군과 백성들은 끝내 귀주성을 지켜냈고, 그 중심에는 박서 장군과 김경손 장군이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마주한 몽골군은 부대를 나눠 개경으로 곧바로 진격했다.
이에 무능한 고려 정부는 강화를 맺었는데, 그 조건에 귀주성 항복이 있었다.
강화를 맺는 그 시점가지도 귀주성은 버티고 있었고, 급기야 강화의 저해 요소가 됐던 것이다.
조정에서는 사자를 파견해 몽골군에 항복하라 했지만, 박서와 김경손은 두번에 걸쳐 항복을 반대하다가 고려조정의 강한 명령에 어쩔 수 없이 귀주성의 성문을 열고 항복하게 된다.
귀주성 전투는 몽골 제국 군대를 맞아 싸워 이긴 세계사적으로도 몇 안되는 사건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김경손 장군이 있었다.
영웅의 비참한 최후
전주에서 백제 부흥을 외치는 이연년의 반란이 일어났고 김경손 장군이 출진하자 반란군 수장 이연년은 그 이름을 높이사 부하들에게 명을 내렸다.
"절대 활을 쏘지 말라. 생포해 내가 부릴것이다."
라고 했다고 한다.
이연년은 김경손을 설득해 보려다가 그만 싱겁게 사로잡혀 처형당하고 만다.
이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김경손은 반란군에게 까지 명성을 떨쳤던 것이다.
최우가 죽고 그 서자인 최항이 고려 최고 권력자가 되었는데 최항은 자신의 라이벌이었던 김약선의 동생이자 전쟁 영웅인 김경손 장군이 늘 눈에 가시였다.
고려의 영웅이자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그에게 시기와 질투심으로 누명을 쒸워서 백령도로 유배를 보내고
끝내는 바다에 수장을 시킨다.
아까운 고려의 인재는 그렇게 저세상으로 갔다.
최항의 명을 받은 군졸들에 의해 유배 2년쯤 뒤에 김경손은 사지를 꽁꽁 묶인 채 배에 실려 나가서 바다에 던져 졌던 것이다.
세계 최강의 군대를 상대로도 겁없이 돌격을 했던 용맹한 장수의 최후가 수장이라니...
그 자신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귀주성 전투의 영웅이자 고려의 영웅은 그렇게 허망한 최후를 맞이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왜 항상 영웅들의 최후는 비참한 경우가 많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