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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시>
어쩌다 시간 여행 외 2편
박남희
내가 너에게 가기까지가 시간이다
너는 감자, 어쩌다 무지개
그러다 바람, 이럴 땐 적당히 꽃이라고 해두자
네가 나를 규정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나를 모른다
그러므로 네가 내게 오기까지가 시간이다
나는 날마다 너를 찾아 시간 여행을 떠난다
나는 여행을 떠나면서 누군지도 모르는 너에게
소크라테스를 사랑하는 자들이
소크라테스에게 붙여준 이름을 붙여준다
아토포스,
아마도 이것은 너의 이름이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너에게 가는 길을 알지 못하므로,
도처에 길이 너무 많다
아무 길이나 들어서서 너를 찾다가
깜박, 나를 잊는다
시간여행을 하면 할수록
시간의 한가운데가 비어있다는 걸 알았다
그 안에
생각이 없어서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빈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는 진리가 나를 깨웠다
빈 꽃병이 꽃을 유혹하듯
그 빈자리가 너를 꽃피게 했다는 걸 알았다
저녁에게는
저녁에게는 말을 아끼자 그 대신 빛을 풀어놓자 내 안에 꽁꽁 묶여있던 빛, 어둠이라고 말을 할 수도 없고 달이나 해를 떠올릴 수도 없는, 어떤 말의 모습을 한 저녁에게는 넓은 백지를 하나 던져주자 그러면 백지의 옷을 입고 수많은 빛을 퉁겨내겠지 퉁겨낸 빛이 어떤 말을 하겠지
저녁에게는 한번 쯤 울어주자 그 대신 사소한 질문은 하지 말자 저녁이 저녁답게 어두워지도록 그냥 내버려 두자 저녁을 향해 뒷산의 갈대들을 조금씩 흔들어주자 갈대를 흔들어 붉게 충혈된 산자락의 눈시울을 달래주자
저녁에게는 한 밤중이나 새벽을 물어보지 말자 새벽이 감추어둔 것들의 일기장을 궁금해 하지 말자 저녁 하늘을 날아갈 새들의 행방을 미리 예측하지 말자 저녁이 그냥 저녁의 보폭으로 은은하게 걸어갈 수 있도록 하늘에 징검다리 별빛 몇 개 놓아두자
그리고 세상의 모든 불빛에게 스스럼없이 제 몸을 내어주는 저녁에게는 더 이상 도처에서 깜박이는 불빛의 주소를 묻지 말자 그 불빛들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궁금해하지 말자
기린의 법칙
질문이 기린을 낳고 대답은 점점 키가 자란다 다리가 긴 대답이 어디론가 성큼성큼 걸어간다 눈이 쳐다보는 곳을 발은 모른다 발이 눈에게 질문한다 너는 어떤 물음표냐고 눈이 발에게 대답한다 우리는 서로 관심사가 다르다고 그게 기린의 법칙이라고,
기린의 목과 발이 길어진 것을 기린의 법칙으로 다 설명할 순 없다 그래서 질문이 물을 마실 때는 대답이 다리를 벌려 주어야 한다 높은 산에 크레바스가 많은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성큼성큼 시간의 발이 보이지 않는 것도 시간의 목이 너무 길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러므로 기린은 이유 없이 법칙을 만들지 않는다 기린의 키에는 이유가 없다 세상을 향한 물음이 너무 긴 것과도 상관이 없다 다만 어떤 질문도 대답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키가 자라고 한 순간 우연한 한 쌍이 되어 어디론가 성큼성큼 걸어갈 뿐이다
<신작시>
기울기 산책 외 2편
박남희
지상의 모든 것들은
제 몸을 일으켜 세우면서 기울기가 시작된다
바람에 흔들리면서
어디론가 걸어가면서 기울기는 변화한다
빛은 물을 통과하면서 기울기가 변한다는데
먼 우주를 전속력으로 달려온 빛은
대기권을 통과하는 순간 보폭을 바꿔
새로운 산책을 시작하는 것일까
어떤 것을 향하여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것들은
그 순간
이미 감당하기 어려운 기울기를 지닌 것이어서
몸은 중심을 잡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하지만 살아있는 것들은
몸에 천칭저울 하나씩은 가지고 있어서
어디선가 한 차례씩 몰려와
이따금 기우뚱거릴 뿐 아주 넘어지지는 않는다
천칭저울은 몸의 기울기에 민감해서 자주 요동친다
저울을 가장 크게 요동치게 하는 것은 마음이다
이럴 때 몸은 수직과 수평의 위치를 자주 바꾼다
한없이 어딘가로 중심이 기울어진다
지구 중심의 기울기를 감지하며 출렁이는 파도도
달의 표정이나 움직임에 따라 출렁임이 달라진다
달은 지구 중심의 기울기를 허물어 파도를 일으킨다
제 몸의 무게로 누군가의 중심을 지나가는 것들은
그 중심을 허물어 출렁이는 파문을 일으킨다
파도는 물거품이 일으켜 세운 감정의 집이다
한 차례 파도가 지나가면
사랑은 희미한 물거품의 흔적으로 남는다
작시법
나에겐 도토리묵의 시간이 있다
고교입시에 낙방하고 검정고시를 하면서
몸에 생각이 쌓여 생각에 몸이 심하게 휘둘리던 시절
엄마는 나를 데리고 도토리를 따러 다니셨다
장흥 일영 송추 계곡 밑둥에 무거운 돌을 던져 울리면
마음의 가지에 옹골지게 키우던 생각들이 한꺼번에
후두둑 쏟아졌다
비어있던 푸대자루는 순식간에 묵직해졌다
그렇게 생각을 털어내는 방법을 배웠다
옹골지고 단단한 생각들은 무거운 맷돌짝 밑에서
껍질을 벗고 흰 살을 드러냈다
가루가 된 흰 살을 입에 대보면 몹시 떫었다
어설픈 사춘기 같았다
떫은 것은 물에 불려 가라앉혀야 한다
떫은 물을 빼기 위해 수차례 물을 갈아주다보면
밑에 진득한 것이 남는다
그 진득한 것은 물처럼 흘러다녔다
물인가 하고 만져보면 놀랍게도 단단했다
내 손 끝에 만져지는 것들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했다
액체이면서 고체인 말들은 불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 말들을 물에 풀어 뜨거운 불에 올렸다
열기가 오르면서 차츰 말들이 풀썩거렸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야기를 다 풀어낸 말은 식혀주어야 한다
흐늘거리는 어둑한 말을 주발에 부어 식히면
오래 들끓던 생각들이 찰지게 식었다
단단하게 뭉쳐있던 생각들이 적당히 풀어져 야들거렸다
맛을 내기 위해서는 오래 숙성된 간장과 칼이 필요했다
찐하게 다려진 간장에 매운 마늘을 곁들여 버무리면
맛있는 도토리묵이 되었다
비로소 단단하게 뭉쳐있던 떫은 생각들이 풀어져
물처럼 흐늘거리면서도 단단한 한편의 묵이 되어
입속에서 미끄러지듯 찰지게 씹혔다
그렇게 야들거리는 어둠의 맛을 알게 되었다
풍경 되기
나무나 개울물이나 건물들을
풍경이라고 말하기는 쉬워도
사람을 풍경이라고 말하는 건 어딘가 어색하다
풍경은 보는 이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어
보는 이의 시각을 방해하지 않거나
자신을 애써 설명하지 않는 침묵의 미덕이 있다
풍경 사진을 찍을 때는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주인공 행세를 하기도 하지만
인물 사진을 찍을 때 풍경은 기꺼이 배경이 되어준다
사람들은 혼자서 셀카를 찍기 위해
풍경 반대쪽으로 셀카봉을 높이 들어 올리지만
풍경에게는 셀카봉이 필요없다
풍경은 주인공이 되고 싶어하는 것을 앞에 세워두고도
풍경이라는 이름의 자존심에 손상을 입지 않는다
그렇다고 풍경은 애써 스스로 풍경이 되려고도 하지 않는다
자신을 주장하지 않는 것들이 모이면 자연스레 풍경이 된다
풍경은 자신을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도처에
자신의 계절을 만들 줄 안다
덥고 시원하고 차갑고 맑고 흐리고 촉촉한
계절의 옷을 애써 차려 입지 않고도
제 안에 피처럼 흐르던
계절에 맞는 풍경을 넉넉히 불러낸다
풍경은 풍경이 아닌 것들을 가두려들지 않는다
그리하여 사람이 풍경이 되기는 어려워도
나뭇잎 위를 기어가는 개미 한 마리가 풍경이 되기는 쉽다
<시인의 에스프리>
시의 끝없는 미끄러짐 혹은, 아토포스의 시학
박남희
시론이 먼저일까 시가 먼저일까 하는 질문은 우문처럼 보이지만 가끔은 자신의 시론을 먼저 정립해 놓고 그 시론에 맞게 시를 쓰는 시인이 있다. 자신의 시에서 관념을 배제하기 위해 무의미 시를 쓴 김춘수 시인이나 비대상 시를 쓴 이승훈 시인, 날 이미지 시론으로 시를 쓴 오규원 시인은 물론 1930년대 이미지즘 시의 단초를 보여준 김기림 시인 등의 시는 시가 시론에 앞섰다고 선뜻 말할 수 없는 애매성이 있다.
그렇다면 내 시는 시가 시론에 앞섰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그동안 무수한 평론을 써왔지만 내가 평론가 이전에 시인인 것처럼, 내 시는 생래적으로 시론 앞에 놓여있다고 생각된다. 그 근거로 나는 시를 쓸 때 미리 어떤 시를 쓸지 계획을 하고 시를 쓰지 않는다. 시는 과학도 철학도 아닌 그냥 시이기 때문이다. 시는 어떤 것에 억압 될 때 시 본연의 목소리를 잃어버린다. 시를 쓸 때 시를 미리 설계하는 것도 일종의 선입견이다. 시창작에 앞서서 선입견이 개입될 때 시는 상상력이 한정되고 표현의 자유를 억압당하게 된다.
내가 199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할 때, 원고 맨 앞에 작심하고 쓴 신춘문예용 시가 당선되지 않고, 신춘문예와 상관없이 쓴 맨 끝의 「폐차장 근처」가 당선된 것을 보고 스스로 놀랐었다. 그 후 다시 당선작을 읽어보고 이 시가 당선된 것이 미리 계획하고 쓴 시가 아니라 나도 모르게 몸에서 흘러나온 시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후 시는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낳는 것이라는 진리는 내 시의 바탕이 되었다.
이번에 선보이는 신작과 대표 시들은 시를 쓰기 전에 미리 구상하고 쓴 시들이 아니라 엄마가 아이를 낳듯 내 안에서 스스로 미끄러져 나온 것들이다. 내가 대표 시로 뽑은 「어쩌다 시간 여행」은 시 전체가 나도 모르게 내 안에서 흘러나온 내 시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내가 너에게 가기까지가 시간이다/ 너는 감자, 어쩌다 무지개/ 그러다 바람, 이럴 땐 적당히 꽃이라고 해두자// 네가 나를 규정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나를 모른다/ 그러므로 네가 내게 오기까지가 시간이다// 나는 날마다 너를 찾아 시간 여행을 떠난다// 나는 여행을 떠나면서 누군지도 모르는 너에게/소크라테스를 사랑하는 자들이/ 소크라테스에게 붙여준 이름을 붙여준다// 아토포스,/ 아마도 이것은 너의 이름이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너에게 가는 길을 알지 못하므로,// 도처에 길이 너무 많다”는 시구들은 너(詩)를 찾아 나서는 내 태도의 불확실성 위에 놓여있다. “내가 너에게 가는 길을 알지 못하므로//도처에 길이 너무 많다”는 생각 위에서 내 시는 끝없이 미끄러지고 있는 것이다.
내가 대표 시로 선택한 또 다른 시 「저녁에게는」에서 ‘저녁’은 하루 중 저무는 시간을 가리키는 시간 개념이지만, 이 시에서는 동시에 저녁이라는 시간 속에 놓여있는 시인 자신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 시를 메타시로 본다면 이 시는 시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어쩌다 시간 여행」과는 다르게 시인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어떤 말의 모습을 한 저녁에게는 넓은 백지를 하나 던져주자” “저녁에게는 한번 쯤 울어주자 그 대신 사소한 질문은 하지 말자 저녁이 저녁답게 어두워지도록 그냥 내버려 두자” “저녁에게는 한 밤중이나 새벽을 물어보지 말자 새벽이 감추어둔 것들의 일기장을 궁금해하지 말자 저녁 하늘을 날아갈 새들의 행방을 미리 예측하지 말자 저녁이 그냥 저녁의 보폭으로 은은하게 걸어갈 수 있도록 하늘에 징검다리 별빛 몇 개 놓아두자”는 구절들만 보아도 시인 자신이 스스로를 억압하는 것들로부터 어떻게 자유롭고 싶어하는 지를 엿볼 수 있다.
필자가 선택한 세 번 째 대표 시 「기린의 법칙」은 키가 커서 머리와 다리가 따로 노는 기린의 아이러니한 몸짓을 통해서 비유적으로 필자의 시관을 말하고 있는 시이다. 현대 시 속에 질문과 대답이 숨어있다는 전제를 ‘기린’에게 적용하고 있는 이 시는 머리와 다리의 어긋난 행위의 원인을 목이 길다는 것에서 찾지 않고“기린의 키에는 이유가 없다 세상을 향한 물음이 너무 긴 것과도 상관이 없다 다만 어떤 질문도 대답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키가 자라고 한 순간 우연한 한 쌍이 되어 어디론가 성큼성큼 걸어갈 뿐”이라고 하여 무의식의 시학에 근접해있는 시인의 ‘시의 법칙’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
이번에 새롭게 소개 되는 신작시들도 지금까지 이 글이 모색해온 시관에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그 중에 「작시법」은 내가 처음 시를 쓰기 시작한 사춘기 시절에 고교 입시에 낙방을 하고 어머니를 따라서 교외로 도토리를 따러 다니던 경험을 시로 쓴 것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때 내가 딴 도토리들이 묵이 되기까지의 과정이 습작기의 내 시작과정과 많이 닮아있다. 그때 내가 처음으로 시를 쓰게 된 것은 어쩌면 내게 ‘도토리묵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도토리를 따는 시간은 내가 복잡한 생각으로부터 벗어나 오로지 도토리를 따는 행위에 몰두할 수 있는 ‘힐링의 시간’이었다. 시를 쓰는 행위가 일종의 “생각을 털어내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라면, “액체이면서 고체인 말들”을 불에 익혀서 묵이 되게 하는 과정은 시를 하나의 유기체로 완성시켜 나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다른 시 「기울기 산책」은 어디론가 기울거나 굴절되는 자연물의 속성을 사랑이나 시로 비유하고 있는 시이다. 시는 산문과는 다르게 스스로 평탄한 곳에 머물기를 바라지 않는다. 빛이 물속으로 들어가면 굴절을 겪고 파도가 달의 인력을 따라 자유롭게 요동치듯이, 시는 스스로 평탄한 곳을 걷는 대신 ‘기울기 산책’을 택한다. 파도가 “물거품이 일으켜 세운 감정의 집”인 것처럼 시는 스스로 파도가 되어 끊임없이 출렁이면서 싱싱한 언어의 집을 짓는다. 그런 점에서 제 몸에 기울기를 가지고 있지 않은 시는 시라고 말할 수 없다.
지금까지 필자가 모색해온 시관의 중심에 장소 없음을 뜻하는‘아토포스’가 자리하고 있다면, 시를 쓰는 주체인 시인과 시적 대상이 되는 사물을 우열이나 주종관계에 놓고 바라보는 관점은 자유로운 시를 쓰기 위한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신작 시 「풍경 되기」에 드러나 있는 탈중심주의적 사유를 간과 할 수는 없다. 이 시에서 인간은 모든 자연물을 대상으로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지만, 자연물인 “풍경은 기꺼이 배경이 되어준다”그러면서 “풍경이 아닌 것들을 가두려들지”도 않는다. 이 시의 말미의 “사람이 풍경이 되기는 어려워도/ 나뭇잎 위를 기어가는 개미 한 마리가 풍경이 되기는 쉽다”는 구절을 통해서 화자는 자기중심적 사고를 쉽게 내려놓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비판한다.
그리하여 필자는 요즘 ‘아토포스’로 명명되는 시인의 존재성이 주체라는 인간중심주의에 갇혀있지 않고 기꺼이 대상(사물)에게 주체의 자리를 내어주고,‘장소 없음’이라는 무한한 가능성의 자리로 용감하게 나아가는 곳에서 발현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이런 시인의 사유는 시에 국한되지 않고 시론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러므로 이 글이 규정하고 있는 시인의 시론은 아토포스나 탈중심주의 등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곳을 향하여 끊임없이 미끄러지기를 소망한다.
박남희
1956년 경기 고양출생, 고려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문학박사), 1996년 경인일보, 199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폐차장 근처, 이불속의 쥐, 고장 난 아침, 아득한 사랑의 거리였을까, 어쩌다 시간 여행이 있으며, 평론집으로 존재와 거울의 시학이 있고, 학술서로 한국 현대시와 유기체적 상상력 등이 있다. 현재 시전문지 아토포스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