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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동쪽은 평안남도 영원군, 서쪽은 박천군·태천군, 남쪽은 묘향산맥을 경계로 평안남도 안주군·개천군·덕천군, 북쪽은 운산군·희천군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5°34′∼126°22′, 북위 39°38′∼39°53′에 위치하며, 면적 1,709.1㎢, 인구 16만184명(1944년 현재)이다. 14개 면 114개 동으로 되어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영변면 동부동이다.
자연환경
동남부에는 묘향산맥이 평안남도와의 경계를 이루면서 뻗어 있어 묘향산(1,909m)·용문산(龍門山, 1,180m) 등이 솟았고, 그 여맥이 군내로 미쳐 동부는 대체로 산지로 이루어졌다.
군의 중앙에는 적유령산맥(狄踰嶺山脈)의 지맥이 뻗어 내려 운두산(雲頭山, 837m)·천이산(天耳山, 528m)·약산(藥山, 489m) 등이 연이어 솟아 있으며, 서부에는 향적산(香積山, 762m)이 솟아 있을 뿐 대체로 평탄한 지형을 이룬다.
청천강이 이들 산지 사이를 남서류하면서 유역에 약간의 평지를 전개하고, 남부 일대에는 동룡굴(蝀龍窟) 같은 카르스트지형이 발달해 있다. 서부를 남류하는 구룡강(九龍江)은 유역에 금병섬벌·영변분지 등의 평지를 이루고, 파군담에서 청천강에 합류한다.
기후는 북부의 내륙에 위치해 한서의 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를 나타낸다. 연평균기온 8.5℃, 1월 평균기온 -10℃, 8월 평균기온 24.7℃이며, 연강수량은 1,225㎜로 비교적 많은 편이다.
역사
[고 대]
구석기시대의 유물·유적은 이 군뿐 아니라 평안북도에서 발견된 적이 없으므로 구석기시대에 이곳에 사람이 살았는지 아직 알 수 없다.
신석기시대의 유물·유적과 청동기시대의 유물과 주거지가 청천강 지류(支流)의 세죽리에서 발견되어 이 지역에 적어도 신석기시대부터는 사람이 정주하기 시작한 것으로 믿어진다.
단군신화에서 환웅(桓雄)이 내려왔다는 태백산이 『삼국유사』의 주(註)에는 묘향산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현재도 묘향산 향로봉 아래에 단군굴(檀君窟)이 남아 있다. 이 지역은 본래 고구려 영토였으나 고구려 멸망 후 발해에 편입되고, 이어 거란의 근거지가 되었다.
[고 려]
고려는 건국 후 옛 강토의 회복에 힘써 북진정책을 고수함으로써 이 일대는 곧 고려의 영토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곳은 연주(延州)와 무주(撫州)로 분리되어 있었다.
연주는 본래의 이름이 밀운군(密雲郡) 또는 안삭군(安朔郡)이었는데 970년(광종 21)에 연주로 고쳤으며, 995년(성종 14)에는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
1018년(현종 9)에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침입했을 때 연주도 포위를 당했으나, 현감 현장(玄章) 등이 여러 차례 접전해 승리하였다.
1174년(명종 4)에 서경유수 조위총(趙位寵)이 난을 일으키자 절령(岊領)주 01) 이북의 40여 개 성(城)이 모두 호응했지만 연주는 현덕수(玄德秀)를 중심으로 해 성을 고수하였다.
1216년(고종 3) 요(遼)나라의 왕자 금산(金山) 등이 몽고군에게 패해 9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이 지역까지 와서 주둔했으나, 김취려(金就礪)가 이끄는 고려군에게 패퇴하였다. 적은 묘향산으로 패주해 보현사(普賢寺)를 불살랐으나, 묘향산전투에서도 패하고 약산에 주둔하다가 연주의 영주(營主) 문한경(文漢卿)에게 패하였다. 1366년(공민왕 15) 연주는 연산부(延山府)로 개칭, 승격하였다.
무주는 본래 이름이 운남군(雲南郡) 또는 청산군(靑山郡)·고청성(古靑城)이었는데, 995년 무주로 고치고 방어사를 두었다. 1231년에 이곳 주민들이 몽고병을 피해 해도(海島)로 들어갔다가 1261년(원종 2)에 다시 나와 위주고성(渭州古城)에 자리잡고, 가주(嘉州)에 예속되었다가 1369년에 태주(泰州)로 이속되었다. 1381년(우왕 7) 다시 무주로 독립했고, 1391년(공양왕 3)에는 따로 감무(監務)를 두었다.
[조 선]
1413년(태종 13)에 연산부와 무주는 각각 연산도호부(延山都護府)와 무산현(撫山縣)으로 되었다. 1429년(세종 11) 연산도호부와 무산현을 합쳐 영변대도호부(寧邊大都護府)로 개편해 읍치(邑治)를 무산의 약산성에 두고, 도절제사(都節制使)가 부사(府使)를 겸하게 했으며 토관(土官)을 설치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 에 따르면 영변대도호부의 호구는 1,121호에 2,906명이었으며,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50명, 익군(翼軍)이 532명, 수성군(守城軍)이 24명, 선군(船軍)이 208명이었다.
1442년에 절제사영을 파해 강계로 옮겼다가 1446년에 복구했고, 1450년에 다시 파했다가 단종 때 복구해 절제사가 부사를 겸하게 되었다. 세조 때 옛 연주의 땅을 분할해 운산군(雲山郡)에 예속시켰다.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全州史庫)의 실록을 묘향산에 일시 보관한 일이 있었다. 특히 묘향산 보현사의 휴정(休靜)주 02)이 8도 16종(宗) 도총섭(都總攝)이 되어 승병을 일으켜 활약했고, 그의 제자 의암(義巖)·유정(惟政)·처영(處英) 등에게 격문을 보내 각 도에서 승병을 일으키게 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이 이곳에서 반란을 일으켜 한양을 점령하기까지 했으나, 곧 관군의 반격을 받아 진압되었다. 1627년 절도사영을 파해 안주(安州)로 옮겼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는 청나라 군사가 영변의 철옹성(鐵甕城)을 수일간 포위했으나, 성이 워낙 험준해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1759년(영조 35) 당시 영변부는 12방(坊) 1부내(府內) 134리로 호구는 7,354호에 2만 6600명이었다. 1811년(순조 11) 홍경래(洪景來)의 난 때는 청천강 이북의 서북 8읍이 모두 점령되었으나, 영변은 귀성·의주와 함께 점령을 면하였다.
홍경래는 철옹성의 험준함을 이용해 근거지로 삼고자 했으나, 영변부사 오연상(吳淵常)이 미리 내응한 남익현(南益顯) 등 10여 명을 잡아 참수하고 방비하였다.
이때 평안감사 이만수(李晩秀)가 군사를 모집하자 영변부 사람 김응철(金應哲) 등이 자원해 보병 300명이 포수 200명을 이끌고 정주의 선무진(宣撫陣)으로 갔으며, 곽산과 석우(石隅)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근 대]
1895년 지방관제가 부군제(府郡制)로 바뀌어 의주부 영변군으로 편제되었고, 1896년 13도제 아래에서는 평안북도 영변군으로 개편되어 도관찰부가 설치되었다. 1907년 도관찰부가 의주로 옮겨졌다. 1935년 영변의 호구는 2만 2684호에 13만 4571명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본래부터 강인한 기질과 단군신화의 발상지로서 강한 민족의식을 지니고 있어 일제의 침략에 대해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박은식(朴殷植)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3·1운동 때 이 군은 총시위횟수 8회, 참가인원 1만 9000명, 사망자 53명, 부상 85명, 피검(被檢) 38명을 기록하였다. 1929년 광주학생의거 때는 숭덕학교(崇德學校)와 영변농업학교 학생이 중심이 되어 시위를 전개하였다.
천도교·기독교 등의 종교운동이 활발했는데, 기독교는 평안북도 지방 선교의 중심지가 되어 다른 지역의 교회를 관리하였다.
천도교는 1893년 동학의 포교에 힘쓰던 강성탁(康聖鐸)이 사형당한 뒤 강대근(康大根)이 이를 계승해 포교했고, 1906년 중앙에 총부(總部)가 생기자 이곳에도 교구의 종리원(宗理院)이 설립되었으며, 1920년에는 농민공생조합(農民共生組合)을 세워 농민들에게 경제자립사상을 고취하였다.
1925년에 농민지도자강습회를 개최해 비밀리에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장벽학(張秉學)·채수반(蔡洙般) 등이 옥고를 치렀고, 그 뒤 영변산업조합에서 천도교인이 생산한 직물을 배척하는 데 항거하다 장병학 등 많은 사람이 옥고를 치렀다.
이곳 출신 독립투사로는 3·1운동 때 체포되어 고문하는 일본헌병의 팔을 꺾고 옥사한 김낙용(金洛用), 임정주만참의부(臨政駐滿參議府) 중대장으로 군자금 모집과 일본기관 파괴에 활약한 김창수(金昌壽), 광복군결사대장으로 총독부를 폭파하려다 체포된 김영철(金榮哲) 등이 있다.
유물·유적
1431년(세종 13)에 창건한 철옹관(鐵甕館)의 문루였던 언무루(偃武樓)를 중심으로 사방의 산정에 본성(本城)·북성(北城)·신성(新城)·약산성(藥山城)의 4개 성으로 이루어진 철옹성이 있다.
성의 남문인 완월루(翫月樓), 관서팔경의 하나로서 성의 서쪽에 있는 약산동대(藥山東臺), 약산의 최고봉인 제일봉(第一峰)에서 동대로 뛰어내린 장군 오세(吳世)의 나막신 자국, 북수구문(北水口門, 일명 飮博門), 그 왼쪽에 있는 서장대(西將臺) 등의 유적과 육승정 등의 명승이 있다.
이 밖에 누대로서 북장대(北將臺)·신성문루(新城門樓)·산성문루(山城門樓)·호수문루(虎睡門樓) 및 9개의 보루 등이 있다.
군의 서쪽 14㎞ 지점인 봉산동·고성동에 고무주토성지(古撫州土城址), 군의 서북 12㎞ 지점에 고위주토성지(古渭州土城址), 군의 남쪽 2㎞ 지점 연산면에 고연산부(古延山府) 유지가 있다. 역정(驛亭)으로는 신풍(新豊)·흥교(興郊)·출탄(出灘)·관화(官化)·개평(開平)·통로(通路)·고흥 등의 유지가 있고, 봉수(烽燧)는 율현(栗峴)·덕산(德山) 봉수지가 있다.
불교유적으로는 약산의 천주사(天柱寺)·서운사(棲雲寺), 묘향산의 보현사(普賢寺)가 대표적이다. 천주사는 1683년(숙종 9)에 창건한 절로 현재 보광전·천주루를 비롯한 많은 건물이 있는데, 건축양식이 일반 사찰과는 다른 형식으로 옛날 군사기관의 건축양식과 비슷하다. 서운사는 1345년(충목왕 1)에 창건했으며, 대웅전·백화전·청운당 등의 건물이 있다.
보현사는 1024년(현종 15)에 창건했으며,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가 승병을 일으킨 곳으로 유명한데 6·25전쟁 때 불탔다. 이곳에는 1141년(인종 19)에 세운, 보현사의 창건유래를 밝힌 사적비 보현사비가 있고, 1044년(정종 10)에 고려탑의 특수양식으로 세운 보현사9층탑, 1573년(선조 6)에 세운 것으로 전하는, 층마다 풍경을 달아 놓은 보현사 팔각13층탑 등이 있다.
보현사 대웅전에서 서쪽으로 약 400m 지점에 있는 안심사부도군(安心寺浮屠群)은 고려 말에서 조선 말까지 세운 44기(基)의 부도군으로, 부도와 부도 사이에 16기의 비석이 있다.
불상은 보현사의 철제비로자나불좌상 3구와 철제아미타불좌상 1구, 석가여래좌상 1구, 천주사의 목조도금아미타불상, 관세음보살상, 금불상 등이 있다.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와 사명당이 세운 공적을 기리기 위해 영정을 봉안한 수충사(酬忠祠),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철옹성을 개수해 혼란을 면하게 한 장군 임경업(林慶業)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운 충민사(忠愍祠) 등이 있다.
유교문화재로는 영변향교 내에 문묘·명륜당·동서재가 남아 있고, 수도재(修道齋)·덕암재(德巖齋)·문헌재(文獻齋)·경덕재(敬德齋)가 있으며, 약봉서원(藥峰書院)·향현사(鄕賢祠) 등은 자취만 전한다.
교육·문화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영변향교와 많은 서당이 있었다. 영변향교는 영변면 동부동 동문 안에 있었으나, 부사 이광한(李光漢)이 진망산 남쪽으로 이전하였다. 근대교육기관으로는 1906년에 철옹공립보통학교(鐵甕公立普通學校)가 설립되었다.
또 1907년에 미국 선교사 모리스가 영변면 서부동에 숭덕학교를 세워 초등·고등부를 설치해 영재교육에 힘썼으나, 신사참배 거부로 1938년에 용산면 구장동으로 강제 이전되어 공립 용문중학(龍門中學)이 되었다가 다시 용문공립공업학교로 개편되었다.
1908년에는 관찰사서리 양봉제(梁鳳濟)와 도유사 한동설(韓東卨)이 향교 내에 사립 유신학교(維新學校)를 설립하였다. 그 뒤 유신학교는 1년제 실업학교가 되었다가 이듬해 2년제 농업학교로, 다시 3년제 을종농업학교로 개편되었다. 1930년에는 1면 1교제가 완전히 실시되었고, 오지의 학생들을 위한 간이학교도 설치되어 영변군에는 유치원 2개와 49개의 학교가 있었다.
같은 해에 태평면 관상동에 태평농업실습학교가 설립되었고, 1937년에 군내 유학자들이 향교 내에 영변명륜학원(寧邊明倫學院)을 설립했으나 2회 졸업생을 배출하고는 폐지되었다.
1942년에는 팔원면 천양동에 팔원여자농업실습학교가 설립되어 광복 이후 삼화여자중학교(三花女子中學校)가 되었다. 영변면 동부동에는 간이도서관이 설립되었으며, 영변공회당도 건립되어 문화활동의 중심이 되고 있다.
종교상황은 묘향산의 보현사가 불교의 본산이었던 관계로 묘향산에만도 360개의 사찰이 있었다. 천도교는 1893년에 영변면 용추동에 동학으로 포교되어 1905년에 영변·구장 2개 교구가 분리되었다. 기독교는 1905년에 전파되기 시작해 1907년에 군내에 최초로 교회가 설립된 이후 교육과 의료사업을 겸하면서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이 고장에 전하는 설화 중에는 「구렁이신랑」의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 한 과부가 살았는데, 아들·딸이 없이 혼자 살았다. 하루는 이 집에 중이 와서 보시를 청했더니 과부가 보시를 많이 주었다.
중은 고마움의 표시로 신을 삼아 주고 떠났다. 과부가 그 신을 신고 다녔더니 얼마 뒤 태기가 있어 7년 만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는 사람이 아니고 구렁이였다. 구렁이를 낳았지만 자기가 낳은 것이어서 그냥 키웠다.
구렁이가 자라 하루는 어머니에게 앞집 이 정승 집 딸과 혼인하겠다고 하였다. 어머니가 깜짝 놀라 “그게 될 말인가, 이 정승 집은 부자이고 우리 집은 가난한데 어떻게 혼인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그런데도 구렁이는 가서 말이나 한번 해보라고 하면서 자꾸 졸랐다. 하는 수 없이 어머니는 이 정승 집에 가서 우리 집 구렁이와 이 집 딸과 혼인시키자고 하였다.
맏딸에게 물으니 구렁이한테 시집가지 않겠다고 하고 둘째딸도 똑같은 대답인데, 셋째딸은 시집을 가겠다고 하였다. 첫날밤에 구렁이는 허물을 벗고 아주 예쁜 새신랑이 되었다.
구렁이는 허물을 색시에게 주면서 이 허물을 누가 보자고 해도 보여 주지 말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없애지 마시오. 만일에 없애면 우리는 영영 같이 못 살게 되오.” 하고 말하였다.
색시는 구렁이 허물을 장롱 안에다 잘 간수했는데, 하루는 언니들이 와서 구렁이 허물을 좀 보자고 하였다. 색시는 안 된다고 했다가 할 수 없이 구렁이 허물을 농에서 꺼내 보여 주었다. 언니들은 구렁이 허물을 화로 위에서 보다가 그만 떨어뜨려 화롯불에 태웠다. 그랬더니 구렁이가 어디론지 가 버리고 말았다.
색시는 신랑을 찾아 집을 떠났다. 어디로 갈지 몰라 발 가는 대로 가다가 물어 물어서 큰 기와집으로 찾아갔다. 신랑은 첩을 얻어 그 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색시는 신랑한테 다시 같이 살자고 하였다.
그랬더니 구렁이신랑은 자기 말대로 지키지 못하고 허물을 태워 없앤 사람과 어떻게 같이 살겠느냐고 하면서 거절하였다. 색시는 허물을 자기가 태운 것이 아니고 언니들이 자꾸 보자고 해서 할 수 없이 보여 주었더니 실수로 불에 태운 것이라고 하였다. 신랑은 그 말을 듣고 다시 잘살게 되었다고 한다.
그 밖에 고성면 하초동에 있는 고성지(高城池)에는 「장자못설화」가 전하고, 백령면 은봉 밑 학암 뒤에 있는 우발수(優渤水)에는 고구려 시조인 주몽(朱蒙)과 관련된 설화가 전한다.
산업·교통
구룡강 유역의 평야지대를 중심으로 농업이 이루어지며, 밭농사를 주로 하나 논농사도 적지 않다. 쌀 생산량은 도내 수위이며, 조·콩·옥수수·수수·깨·감자·대마 등이 많이 생산되고, 특히 콩 생산량은 도내 1위이다.
농가부업으로 축우사육·양돈·양계·양잠이 이루어지며, 양잠은 예로부터 누에고치 생산이 전국 1위를 차지하고, 특산품으로 유명한 영변주(寧邊紬)가 생산된다.
산지에는 소나무·밤나무가 무성해 각종 목재가 생산된다. 광산물은 금·흑연·아연·무연탄 등이 생산되며, 특히 용산면의 용등탄광(龍登炭鑛)과 용문탄광(龍門炭鑛)의 무연탄은 품질이 우수하다.
『임원경제지』에 따르면, 1830년대 영변군내에는 부내장(府內場)과 연산면의 수우원장(修隅院場), 개평면의 개평장, 무산면의 무창장(撫倉場), 검산면의 표북원장(標北院場)과 구장(舊場)의 6개 장이 있었다.
이들 장에서는 주로 쌀·콩·밀·보리·포목·명주·생선·배·밤·철물·나무그릇·옹기·사기그릇·한약재·꿀·담배·가축 등이 거래되었다.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1902년경에는 부내장·동래장(東萊場)·표북원장·무창장이 있었고, 1926년에는 영변면의 영변장, 독산면의 수우장, 팔원면의 천양장(天陽場), 봉산면의 무창장(武昌場), 고성면의 입석장(立石場), 남송면의 석창장(石倉場), 태평면의 태평장, 북신현면의 향장장(香場場)·신월림장(新月林場), 용산면의 구장장(球場場)·소민장(小民場)·신흥장(新興場), 백령면의 동창장(東倉場)의 13개 장이 있었다.
이중 영변장이 가장 번성했으며 2·7일에 개장되어 도자기·명주·잡화·포목·소가죽·쌀 등이 거래되었고, 평양·안주·박천·운산·구장 등지에서 모여든 상인들로 성시를 이루었다.
만포선 철도가 동부를 청천강을 따라 지나며, 군내에 구장·어룡·신흥동·북신현·묘향산 등 여러 역이 설치되어 이 군의 교통에는 물론, 인근지역의 개발사업에도 큰 몫을 한다.
구장역에서 동룡굴을 지나 용등에 이르는 용등선이 분기되고, 어룡역에서 용문탄광에 이르는 용문탄광선이 분기된다. 도로는 만포선과 병행해 강계가도가 지나며, 영변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덕천, 서쪽으로 태천·박천, 남쪽으로 개천, 북쪽으로 운산과 통하는 각종 도로가 나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관광지로는 관서팔경의 하나인 약산동대와 산세가 뛰어난 묘향산에 만폭동(萬瀑洞)·단군굴(檀君窟)·보현사가 있고 청석곶이 있으며, 동양 제일의 종유동인 동룡굴과 유명한 어비약수(魚飛藥水), 주변경관이 수려한 육승정이 있다.
단군굴은 등천굴이라고도 하며 높이가 10m인데, 위에는 백토로 덮여 있고 단목(檀木)이 자생한다. 예로부터 국조 단군의 탄강처라고 전해지며, 철당(鐵堂)과 단청을 한 문지두리가 있다.
단군굴 아래에 돈오동이라는 또 다른 굴이 있는데, 돈오는 단군이 사격연습을 할 때 화살을 주워 오던 하인의 이름이라고 한다. 또 10m 가량 떨어진 곳에는 단군이 강무를 하던 곳이라는 작은 대(臺)가 있다.
[출처] 평안북도 영변군(녕변군) 지도 및 개황|작성자 이북도민작가 이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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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 변천>>>
평안북도 남동부에 있는 군. 동쪽은 구장군, 서쪽은 태천군, 남쪽은 박천군과 평안남도 개천시, 북쪽은 운산군과 접해 있다. 동경 125°35′∼125°53′, 북위 39°41′∼39°58′에 위치하며, 인구는 6만 7300여 명(1996년 추정)이다.
1952년 12월 이 군은 영변·향산·구장의 3개 군으로 분리되었다. 1961년 3월 구항리 일부가 분리되어 남산리에 편입되고, 1967년 10월 분강리·송화리·서산리를 합쳐 분강노동자구가 신설되었다.
하초리 일부가 분리되어 용성리에 편입되고 분장리·송화리·화평리·서산리가 폐지되었다. 1978년 8월 팔원리가 팔원노동자구로 개칭되었고, 서산리·송화리·화평리가 신설되었다.
행정구역은 영변읍과 팔원(八院)노동자구, 용포(龍浦)·세죽(細竹)·서화(西花)·대천(大川)·연화·용화(龍花)·서위(西位)·남등(南燈)·용추(龍湫)·관하(館下)·고성(古城)·봉산(鳳山)·구산(龜山)·망일(望日)·명덕(明德)·옥창(玉昌)·용성(龍城)·하초(下草)·남산(南山)·동남(東南)·구항(龜項)·오봉(五峰)·송강(松江)·서산(西山)·송화(松華)·화평(和平) 등 26개 이로 되어 있다. 군 소재지는 영변읍이다.
[자연환경]
이 군은 대부분의 지역이 언덕성 산지로 되어 있고, 북부에서 남부로 가면서 점차 낮아지는 지세이다. 북부와 북서부에 향적산(805m)·오봉산(593m) 등이 있고, 중부에는 전형적인 침식분지인 영변분지가 있으며, 그 주위에는 약산·북장대 등이 솟아 있다.
군내에 40여 개의 하천이 흐르는데 모두 청천강 수계에 속한다. 개천군과 경계를 이루면서 흐르는 청천강과 군의 가운데를 남북방향으로 흐르는 구룡강이 비교적 큰 하천이다.
기후는 연평균기온 8.4℃, 1월 평균기온 -10.4℃, 7월 평균기온 23.7℃이며, 연평균강수량은 1,400㎜ 이상으로 비가 많은 지역에 속한다. 첫서리는 10월 1일경, 마감서리는 4월 17일경에 내린다. 산림은 군면적의 50.9%이며, 주요 수종은 소나무이다.
[산업·교통]
주요 산업은 농업과 공업이다. 농업은 밭작물을 주로 하며 주요 농산물은 벼·옥수수·콩 등이다. 옥수수가 전체 곡물생산량의 65%를 차지하며, 700여 정보의 뽕밭이 있어 양잠으로 질 좋은 비단을 생산한다. 공업은 방직공업이 큰 비중을 차지하며, 영변방직공장에서는 약산단·색동비단·해방단 등의 인견직물을 생산한다.
영변군 구룡강변 일대에는 핵연구시설이 있어 1993년 3월 핵확산금지조약(NDT) 탈퇴와 함께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지역이 되었다. 교통망으로는 평북선의 구성역에서 분리되어 구장청년역에서 만포선과 연결되는 철로가 있으며, 의주∼개천선, 박천∼운산선을 비롯해 구장·향산·맹중리 등지로 통하는 도로가 건설되어 있다.
[문 화]
영변군내 영변읍 성터는 철옹성이라고도 부르는데 북한 역사유적으로 지정되었다. 영변남문(寧邊南門)과 읍내 신성(新城) 안에 있는 천주사(天柱寺), 약산의 서운사(棲雲寺) 등도 보물급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영변군 영변읍에 있는 거북바위는 천연기념물 제78호, 약산동대는 명승지 제2호로 지정되었다.
1962년 세죽리에서 신석기시대의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신석기 중기에 해당하는 기원전 3,000년 전반기 선사인들의 주거유적(움집터)과 돌연장·토기·장신구 등이 발견되었다. 영변읍 동남쪽으로 10㎞ 떨어진 청천강가의 충적층에서 출토되었다.
전래민요인 「영변가」에는 살길을 찾아 고향을 떠나는 애달픔을 노래한 「구영변가」, 영변군 관서팔경의 하나인 약산동대와 그 주변 역사유적의 경치를 읊은 신민요 「평북영변가」가 있다.
「평북영변가」는 5음조식으로 서도민요의 고유한 음조적 특징을 새롭게 도입했으며, 굿거리장단의 흥취를 한껏 살려 민족적 정서가 물씬 풍겨 나온다. 최근 들어 노동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이 민요를 널리 보급하고 있다.
참고문헌
북한의 산업 (대한무역진흥공사, 1995)
북한지지요람 (통일원, 1993)
북한의 관광자원 (한국관광공사, 1991)
인물의 고향 (중앙일보사, 1991)
북한문화재실태와 현황 (문화공보부문화재관리국, 1985)
평안북도지 (평안북도지편찬위원회, 1973)
영변지 (영변군민회, 1971)
주석
주01
자비령
주02
西山大師
집필자
개정 (1996년)
노도양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영변군(寧邊郡))]
[출처] 평안북도 영변군(녕변군) 지도 및 개황|작성자 이북도민작가 이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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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유익한 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