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가서 강해 4
2장
구분
1절은 술람미의 말 (솔로몬의 말로 해석하는 해석도 많이 있는데,
원어의 구분에는 여자의 말로 되어있다.)
2절은 솔로몬의 말
3-6절은 술람미의 말
7절은 솔로몬의 말
8-9절은 술람미의 말
10-14절은 솔로몬의 말
15-17절은 술람미의 말
1절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
여기서 나는 술남미로 지칭 된 마리아다.
그러나 1:4에 ‘우리가 너를 따라 가리라’ 하였으므로,
직접적으로는 마리아이지만 마리아와 함께 예수님을 따라가야 할 모든 성도도
같은 고백을 하게 되고 그렇게 되기를 힘써야 한다.
샤론은 갈멜산 남쪽에서 욥바까지 지중해 해안에 펼쳐진 평야다.
여기에 봄이 오면 많은 야생초가 만발한다.
꽃은 정원이나 온실에도 있지만, 술남미는 자신을 평범한 야생초로 표현한다.
이는 겸손과 소박함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수선화는 장미, 무궁화, 번홍화로 번역되기도 한다.
술남미는 또한 자신을 골짜기의 백합화로 고백한다.
백합화는 순결의 꽃인데, 골짜기에 은밀히 피어있음을 고백한다.
발또르따의 책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가 될 동정녀를 보내 달라고 기도하면서,
그 동정녀를 백합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구세주는 우리를 구속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야 하겠습니까? 얼마나 많이요! 이사야가 고통의 사람에게서 본 수천개의 상처에서는 초벌 구운 질그릇에서 나오는 물방울처럼 피가 비오듯 떨어질 것입니다. 그 신성한 피가 독신(瀆神)과 하느님을 모독하는 언사가 있는 곳에는 떨어지지 말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모아서 정신이 병든 사람들과 곰팡이 슨 영혼들과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죽은 모든 사람들에게 부으려는 향기로운 순결의 잔에 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땀과 눈물을 그 깨끗한 꽃잎의 흰 옷으로 닦아드리게 백합꽃들을 주세요, 백합꽃들을! 박해받으시는 그분의 뜨거운 열을 위하여 백합꽃을, 백합꽃을 주세요! 아아! 당신을 가질 백합꽃이 어디에 있을 것입니까? 당신의 피로 물들고 당신이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고통으로 죽을 그 사람이 어디에 있을 것입니까? 당신의 핏기 없는 몸에 눈물을 뿌릴 그 사람이 어디에 있을 것입니까? 오! 그리스도여! 오! 그리스도여!”
2절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
2절은 1절의 술남미의 고백에 대한 솔로몬의 대답이다.
여자들은 모든 성도들을 일컫는 말이다. (고후11:2)
모든 성도들 중에 사랑받는 여자라는 의미이다.
실제 솔로몬에는 수많은 여인들이 있었지만 그 중 술남미를 사랑한 것이다.
백합화처럼 순결한 여인인데 가시나무가운데 있다고 하신다.
가시나무는 남을 찌르기만 하는 것 이외는 쓸모가 없는 나무다.
가시나무는 죄악된 세상의 모든 죄인들을 일컫는 말이다.
백합화가 가시나무가운데 있으니 얼마나 어렵겠는가?
바람만 불면 그 꽃잎이 다 찢길 것이다.
그러므로 백합화의 향기가 진동하겠지만....
3절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
3절은 2절의 솔로몬의 말에 대한 술남미의 화답이다.
수많은 남자들 중에 예수님은 수풀가운데 사과나무 같다고 하신다.
수풀은 쉴만한 그늘도 없고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들이다.
곧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세상의 모든 정치, 경제, 종교, 철학에 속한 것들이다.
뜨거운 태양빛이 내려 쪼이는 것처럼, 환난, 핍박, 역경이 많은 세상에
오직 예수님만 그늘이 되시고, 피난처가 되심을 고백한다.
특별히 여기서는 어린 예수님과 함께하는 생활을 말한다.
사과나무의 실과는 예수님을 통해 나오는 말씀과, 그 안에 속한 신령한 복과
인격의 열매다.
4절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치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이 내 위에 기로구나
여기서 잔치집은 나사렛에서의 생활을 말한다.
나사렛에서의 생활은 모든 것이 사랑이다. 그 사랑이 깃발처럼 펄럭이고 있다.
여기서 예수님의 성장론적인 삶을 짚어보자
성장도표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하나님은 우리가 완전에 이르기를 명하셨다.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이르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완전에 이르러야 한다.
그것을 이스라엘을 불러 모형적으로 보이셨는데,
모세와 함께 출애굽하여
광야 40년을 지나 가나안땅에 들어가고
다윗을 지나 솔로몬왕 때 예루살렘을 건축하는 일까지다.
이모형은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인류 전체가 노아의 때에 멸망 직전에 구원받아
요한 계시록 21장에 새예루살렘이 내려옴으로 천국이 이루어지기까지의 여정이다.
또 하나는 한 사람의 개인이 부르심을 받아 그 인격이 변화 받아 완성될 때
까지의 과정이다.
(롬8:29-30, 엡4:13, 히6:1-2, 벧전1:4, 마5:1-12, 고전10:1-12, 천로역정)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지만,
죄인의 입장에서 모형적인 성장론적인 삶을 사셨다는 것이다. (히4:15)
성경에는 예수님의 자세한 일생이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모형적인 성장론적인 삶에 비추어 본다면,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출애굽사건이셨다.
성경에는 자세히 없지만 예수님의 바로의 추격사건은 애굽에서의 피난생활이셨다.
그리고 12살에 성전에 들어가신 것이 시내산에 하나님의 강림,
천로역정으로 하면 좁은문에 들어가신 사건이다.
30살에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으시는 것이 요단강을 건너
영적할례 받으시는 모습이고 마귀에게 시험받으시는 것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시는 모습이다.
이후 모세가 80살에 영적할례 받고 애굽에 가서 12지파의 이스라엘 백성을
불러내는 것처럼, 12제자를 불러 양육하신다.
여기서 예수님의 바로군대의 추격은 애굽 생활이셨는데,
애굽에서 돌아와 나사렛에 생활하게 되신 것이 신광야 생활이셨다.
이것이 2:4의 잔치집으로 표현되었다.
한편 마리아는 영적할례받은 상태에서 예수님을 낳으시는데,
예수님의 바로군대의 추격이 마리아에게는 천로역정의 허화시 과정이었다.
아가서에는 3번 같은 말씀이 있는데,
2:7, 3:5, 8:4이다.
2:7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 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찌니라
여기서의 잠은 시련 후에 오는 안식과 평강과 축복의 잠이다.
가나안에 들어 간 후에 3번의 축복과정이 바로 그것이다.
천로역정으로 말하면, 허화시, 의혹성, 미지의 시련 후의 과정이다.
2:7의 잠은 예수님의 바로의 추격 곧, 마리아의 허화시과정 이후의 안식이다.
그러므로 2:4의 잔치집은 2:7의 안식이 올 때,
애굽의 피난 생활을 마치고
나사렛에 온 때의 모습인 것이다.
참고로 나사렛의 집은 마리아의 본가이다.
발또르따의 책에 보면 나사렛의 생활은 사랑으로 충만한 생활이었다.
5절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케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음이니라
건포도는 저장식품이다. 포도나무는 예수님이신데, 포도는 진리다.
건포도는 영원불변의 말씀을 나타낸다.
사과는 예수님을 통하여 오는 열매다.
사랑으로 병이 났다는 것은 사랑이 완성되기 까지는
그 마음에 사모함이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사병이다.
그러므로 그 완성을 이루기까지 말씀과 열매로 힘을 얻기를 원하고,
시원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6절 그가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손으로 나를 안는구나
오른손은 보호의 손이요, 왼손은 안위의 손이다.
(시63:8, 단10:8-10, 계1:17, 요10:28)
2:7의 안식과 잠을 취하려는 자세다.
7절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 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찌니라
노루와 들 사슴은 쉽게 놀라는 짐승이다.
지금까지 예수님을 낳아 애굽으로 피난하여 살아 왔던 모든 역경이
지나갔으니, 주님이 원하셔서 또 다른 길을 가기 전 까지는
쉬게 놔두라는 고백이다.
이는 남자의 말이다. 성도의 영적 성장의 과정은 신랑되신 예수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한 단락이다. 더 자세한 것은 추후 설명할 것이다.
(예수님의 바로군대의 추격과 신광야, 마리아의 허화시사건 통과)
아가서 강해 2:8-17
2:8-9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 오는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
7절에 이어 술남미의 말이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솔로몬으로 상징된 예수님이시다.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데,
그가 노루처럼 사슴처럼 산을 넘어 빨리 달려와서 창문 틈으로 엿보고 있다.
그리고 10-14절 까지의 내용으로 여자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산은 방해물이다. 곧 달려 갈 길을 방해하는 고난, 역경, 시련, 문제꺼리들이다.
슥4:6-7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어 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이것은 예수님이 여기에 이르기 까지 큰 산, 작은 산 즉 크고 작은 고난과 역경을 잘 이기고
이 자리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산을 잘 달리는 노루와 사슴처럼 잘 달려왔다는 것이다.
7절의 노루와 사슴은 노루와 사슴의 조심성을 표현하고 있고,
9절의 노루와 사슴은 민첩성, 순수성과 조심성을 함께 표현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노루와 사슴같이 순수하게 잘 달려왔고, 노루와 사슴같이 조심스럽게 엿보는 모습이다.
이는 마리아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을 잉태하는 소식을 들을 때부터
나사렛 집에 이르기 까지 많은 고난과 역경을 지나 여기에 이르렀고,
이제 또 새로운 길을 가야하는데 인도해 가는 하나님입장(예수님입장)에서는,
이제 고난과 역경을 지나 쉬고 있는 중이므로 조심스러운 모습으로 다가서는 것을,
창에서 엿보며 말하고 있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공동번역으로 2:7-10을 보자, 더욱 이해가 될 것이다.
들판을 뛰노는 노루 사슴 같은 예루살렘의 아가씨들아, 이 사랑이 잦아들기까지 제발 방해하지 말아다오. 흔들어 깨우지 말아다오.
(신부) 사랑하는 이의 소리, 산 너머, 언덕 너머 노루같이, 날랜 사슴같이 껑충껑충 뛰어오는 소리. 담 밖에 서서 창틈으로 기웃거리며 살창 틈으로 훔쳐보며
나의임이 속삭이는 소리. 나의 귀여운 이여, 어서 일어나오. 나의 어여쁜 이여, 이리 나와요.
2:10-14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속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이는 솔로몬의 말로 술남미에게 들려지는 내용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는 어린 예수님이 하는 말이 아니고, 마리아가 은혜로 알게 된 내용이다.
지금은 쉬는 중이지만
이제 일어나 함께 더욱 주님의 일에 달려가야 함을 깨달아 알게 된 것이다.
겨울은 환난 핍박이다.
비는 장마를 의미하는데, 거추장스럽고 우울하고 쓸쓸한 환경을 말한다.
이것은 마리아의 개인적인 상태라기보다
메시야를 기다리는 이스라엘 전체의 모습으로 보아야 한다.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이스라엘의 모든 어려운 환경들을 겨울과 비로 표현하고 있다.
지면의 꽃은 사람들의 마음에 메시야가 온 기쁨을 말하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른 것은 메시야가 오셨음으로
모든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찬양이다.
반구의 소리는 곧 비둘기의 음성인데, 이는 성령의 음성이 들리는 것을 말한다.
무화과는 이스라엘인데, 그 열매가 익었다는 것은 메시야의 오심이다.
포도나무는 예수님이신데, 그가 약속대로 이 땅에 오셔서 자라고 계신 것을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한다고 표현하고 있다.
바위는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반석, 기초석, 흰돌, 공중에 뜨인 돌이시다.
마리아는 예수님 안에 숨어있는 비둘기다.
산의 정상으로 올라갈수록 떨어질 위험성이 많은 것처럼,
완덕으로 향하여 나가고 있는 마리아가 영적 낭떠러지에 있지만
예수님 안에 은밀히 보호받고 있는 모습이다.
애굽의 피난생활에서 돌아와 나사렛에서의 생활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숨어있는 은밀한 생활이다.
비둘기라는 표현은 5:2에도 나와 있다.
특별히 눈이 비둘기 같다는 표현이 4:1, 5:12에 나와 있다.
4:1은 술남미의 눈이고, 5:12은 솔로몬의 눈이다.
비둘기로 비유한 것은 비둘기의 평화, 순결, 멀리 내다 봄들의 특성을 말한다.
얼굴을 보이고 목소리를 듣게 하라고 하시는데,
이 아름다운 얼굴의 이목구비는 4장에 나온다.
그러나 얼굴 뿐 아니라 모습 전체를 보기를 원하신다.
이 나사렛의 생활은 사랑으로 충만하여 주님을 향한 모습과 얼굴은 아름답고,
주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과 목소리는 너무도 부드럽다.
15절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
포도원은 1;6에 술남미가 포도원지기가 된 그 포도원이다.
이는 하나님의 예수님을 통한 구원사역인데, 이스라엘을 부르셔서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메시야 곧, 예수님이 오심으로 그 포도원에 꽃이 피었다는 것이다.
여우는 무엇인가?
눅13:32에는 헤롯을 여우라 했고, 겔13:4에는 거짓선지자로 일컬어진다.
그러므로 주님을 보내셔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방해하는 모든 세력들을 말함이다. 그것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모두 없애야 한다.
계시록 12:3-5을 보자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 그 꼬리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붉은 용은 원수 마귀 사단이고,
여기 아이는 예수님이신데,
아이가 나오면 삼키려고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땅으로 끌어다가 던졌다고 하고 있다.
하늘의 천사들의 삼분의 일을 예수님을 죽이려는 세력으로 이용했다는 것이다.
이들이 바로 당시의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 유대인, 헤롯, 로마병정들을 이용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방해하는 모든 세력들이 모두 여우다.
물론 하나님은 그들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그 구원사역을 이루신다.
여기서 예수님은 아직 공생애를 시작하지 않으셨지만,
이미 아기 예수를 통해 70인의 전도대가 준비되어,
공생애의 사역의 바탕이 이루어져 가고 있었다.
이는 아직 공생애가 아니므로 방해하는 것이 크지 않아 작은 여우로 표현하고 있다.
16절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구나
이는 사랑의 고백인데, 아직은 내가 중심이다.
그러나 6:3, 7:10에 가면 더 성장하여 이 고백이 바꾸어진다.
6:3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그 양떼를 먹이는구나
7:10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성 버나드의 사랑의 4단계를 다시 생각해보라
마리아도 백합화지만 백합화 가운데서 라는 말은 백합화 꽃밭이다.
그러므로 당시의 여러 성도들 전체를 일컫는 말이다.
앞에서 표현한 70인의 전도대를 중심으로 모여진 사람들이다.
70인의 전도대와 그들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
메세야된 예수님이 아기예수로 와서 그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
그들 모두가 주님이 먹이시는 양떼들이다.
17절
나의 사랑하는 자야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돌아와서
베데르 산에서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아여라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는 다시 저녁이 온다는 것이다.
창세기의 한 주간(창1:2-2:3)으로 보면,
예수님에게는 둘째 날 저녁이 되고
마리아에게는 다섯째 날 저녁이 되는 것이다.
이는 3:1-4까지의 내용으로
예수님이 12살 되던 해에 잃었다가 찾는 과정이다. (눅2;41-51)
창세기의 한주간은 창세기강해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17절을 더 깊게 해석하기 위해 다른 번역들을 참고해보자
한낮 공기가 서늘하고 그리고 그림자가 길어 질 때 까지,
돌아다녀, 나의 연인,
노루와 어린 사슴처럼
베델산 쪽에서
서늘한 바람과 땅 그림자 질 때까지
베델산의 노루와 사슴처럼
놀자, 내 사랑아
날이 서늘해지고
그림자들이 달아나기 전에
나의 연인이여,
베델산 위의 노루처럼,
젊은 사슴처럼 되어 돌아오셔요
먼저 베데르 산(베델산, Bether)은
성경의 지명에는 없는 산인데, 최근 발굴되었다는 설이 있다.
현재 지명으로는 비트르로 예루살렘 남서쪽 11.2km 지점에 있다고 한다.
대체적인 해설은 베테르라는 원어가
‘둘로 자르다, 분리하다’에서 파생된 말로 ‘분리’라고 해석한다.
벧엘산이라고 해석도 하나 발음으로는 맞지 않는다.
종합적으로 볼 때,
앞서 말한 것처럼, 3:1부터 예수님의 둘째 날 저녁,
마리아에게는 다섯째 날 저녁이 오면
서로 얼마간 분리, 즉 잃어버리는 시간이 오는데,
그 저녁을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라고 표현하였고,
그 잃어버리는 시간이 올 때 까지는 쉬자는 것이다.
해가 지고 그림자가 없어지는 밤이 오면
베데르 산, 즉 분리의 자리로 돌아가자는 아픈 고백이다.
노루와 들 사슴이 밤이 오면 반드시 집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사랑하기 때문에 함께 가야만 하는 이 길 중에,
잠시 잃어버리고, 분리되는 시간이 오지만 그래도 그 길을 함께 가자는 고백이다.
예수님을 노루와 들 사슴으로 여러 번 고백하고 있는데,
이는 그들의 순수성, 민첩성, 조심성, 귀소성들을 말함이다.
첫댓글
아멘~멋진 강해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