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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익성(申翊聖)
출생일1588년(선조 21)
사망일1644년(인조 22)
조선시대 오위도총부부총관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군석(君奭), 호는 낙전당(樂全堂)·동회거사(東淮居士).
우참찬 신영(申瑛)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개성도사 신승서(申承緖)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신흠(申欽)이다. 어머니는 병마절도사 이제신(李濟臣)의 딸이다. 선조의 부마(駙馬)이다. 정숙옹주(貞淑翁主)와 혼인하여 동양위(東陽尉)에 봉해졌다.
병자호란 때의 척화오신(斥和五臣)의 한 사람이다.
임진왜란 때는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올랐으며 1606년(선조 39)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이 되었다. 광해군 때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를 반대하다가 추방되어 쫓겨났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재등용되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왕명으로 3궁(宮)을 호위(扈衛)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는 세자를 모시고 전주로 피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인조를 호종하여 끝까지 성을 지켜 청군과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주화파(主和派) 대신들이 세자를 청나라에 볼모로 보내자고 하자, 칼을 뽑아 대신들을 위협하기까지 하였다.
호종의 공으로 재상과 같은 예우를 받고, 1638년에는 오위도총부도총관을 제수했으나 사퇴하였다.
화의가 성립된 뒤 삼전도비사자관(三田渡碑寫字官)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거부, 사퇴하였다.
1642년 명나라와 밀무역을 하다 청나라로 잡혀간 선천부사 이계(李烓)가 조선이 명나라를 지지하고 청나라를 배척한다고 고하여, 최명길(崔鳴吉)·김상헌(金尙憲)·이경여(李敬輿) 등과 함께 심양(瀋陽)에 붙잡혀가 억류당했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주선으로 풀려나와 귀국한 뒤 시·서로써 세월을 보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문장·시·서에 뛰어났으며, 특히 김상용(金尙容)과 더불어 전서의 대가였다.
글씨로는 회양의 「청허당휴정대사비(淸虛堂休靜大師碑)」, 광주(廣州)의 「영창대군의비(永昌大君碑)」, 파주의 「율곡이이비(栗谷李珥碑)」 등이 있다.
저서로는 『낙전당집樂全堂集)』·『낙전당귀전록(樂全堂歸田錄)』·『청백당일기(靑白堂日記)』 등이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신익성(申翊聖))]
신흠(申欽)
[문과] 선조(宣祖) 19년(1586) 병술(丙戌) 별시(別試) 병과(丙科) 6위(09/14)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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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경숙(敬叔)
호(號) 상촌(象村)
시호(諡號) 문정(文貞)
생년 병인(丙寅) 1566년 (명종 21)
졸년 무진(戊辰)【補】(주1) 1628년 (인조 6)
향년 63세
합격연령 21세
본인본관 평산(平山)
거주지 한성([京])【補】(주2)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시대 예조참판, 자헌대부, 예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경숙(敬叔), 호는 현헌(玄軒)·상촌(象村)·현옹(玄翁)·방옹(放翁).
증판서 신세경(申世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우참찬 신영(申瑛)이고, 아버지는 개성도사 신승서(申承緖)이다. 어머니는 은진송씨(恩津宋氏)로 송기수(宋麒壽)의 딸이다. 송인수(宋麟壽)와 이제민(李濟民)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585년(선조 18) 진사시와 생원시에 차례로 합격하고 1586년 승사랑(承仕郎)으로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1583년에 외숙인 송응개(宋應漑)가 이이(李珥)를 비판하는 탄핵문을 보고 “이이는 사림(士林)의 중망을 받는 인물이니 심하게 비난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였다. 이 일로 당시 정권을 장악한 동인으로부터 이이의 당여(黨與:정치적인 견해를 같이하는 집단 또는 사람)라는 배척을 받아 겨우 종9품직인 성균관학유에 제수되었다.
그 뒤 곧 경원훈도(慶源訓導)로 나갔으며 광주훈도(廣州訓導)를 거쳐 사재감참봉이 되었다.
1589년 춘추관 관원에 뽑히면서 예문관봉교·사헌부감찰·병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의 발발과 함께 동인의 배척으로 양재도찰방(良才道察訪)에 좌천되었으나 전란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 신립(申砬)을 따라 조령전투에 참가하였다. 이어 도체찰사(都體察使) 정철(鄭澈)의 종사관으로 활약했으며, 그 공로로 지평(持平)에 승진되었다.
1593년 이조좌랑에 체직, 당시 폭주하는 대명외교문서 제작의 필요와 함께 지제교(知製敎)·승문원교감을 겸대하였다.
1594년 이조정랑으로서 역적 송유진(宋儒眞)의 옥사를 다스리고 그 공로로 가자되면서 사복시첨정으로 승진했으며, 곧 집의(執義)에 초수(超授:뛰어넘어 제수됨)되었다.
같은 해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청하는 주청사 윤근수(尹根壽)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그 공로로 군기시정에 제수되었다.
1595년 함경도어사와 의정부사인을 거쳐 장악원정(掌樂院正)·성균관사예(成均館詞藝)·종부시정·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홍문관교리·홍문관응교·의정부사인·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599년 선조의 총애를 받아, 장남 신익성(申翊聖)이 선조의 딸인 정숙옹주(貞淑翁主)의 부마로 간택되어 동부승지에 발탁되었다. 같은 해 형조참의 겸 승문원부제조를 거쳐 병조참지·우부승지·이조참의·예조참의·대사간·병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601년 『춘추제씨전(春秋諸氏傳)』을 합찬(合纂)한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자되고 곧 예문관제학이 되었다.
1602년 충무위부호군(忠武衛副護軍)으로 좌천되었다가 곧 오위도총부부총관을 거쳐 예조참판에 발탁되었다. 이어서 병조참판·홍문관부제학·성균관대사성·도승지·예문관제학·병조참판·도승지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604년에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오르면서 한성부판윤이 되었고, 그 뒤 병조판서·예조판서·상호군(上護軍)·경기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선조애책문(宣祖哀冊文:선조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을 짓고 한성부판윤·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세자의 책봉을 청하는 주청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그 공로로 숭정대부(崇政大夫)가 되었으며, 1610년에는 동지경연사·동지성균관사·예문관대제학을 겸대하였다.
그러나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선조로부터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인 까닭에 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1616년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비 및 이와 관련된 김제남(金悌男)에의 가죄(加罪:죄를 더함)와 함께 다시 논죄된 뒤 춘천에 유배되었으며, 1621년에 사면되었다.
1623년(인조 즉위년) 3월 인조의 즉위와 함께 이조판서 겸 예문관·홍문관의 대제학에 중용되었다. 같은 해 7월에 우의정에 발탁되었으며,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좌의정으로서 세자를 수행하고 전주로 피난했다.
같은 해 9월 영의정에 오른 후 죽었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었으나 학문에 전념하여, 벼슬하기 전부터 이미 문명을 떨쳤다. 벼슬에 나가서는 서인인 이이와 정철을 옹호하여 동인의 배척을 받았으나, 장중하고 간결한 성품과 뛰어난 문장으로 선조의 신망을 받으면서 항상 문한직(文翰職)을 겸대하고 대명외교문서의 제작, 시문의 정리, 각종 의례문서의 제작에 참여하는 등 문운의 진흥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사림의 신망을 받음은 물론, 이정구(李廷龜)·장유(張維)·이식(李植)과 함께 조선 중기 한문학의 정종(正宗:바른 종통) 또는 월상계택(月象谿澤)으로 칭송되었다.
묘는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영동리에 있다. 1651년(효종 2) 인조묘정에 배향되었고, 강원도 춘천의 도포서원(道浦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저서 및 편서로는 『상촌집』·『야언(野言)』 등과 「현헌선생화도시(玄軒先生和陶詩)」·「낙민루기(樂民樓記)」·「고려태사장절신공충렬비문(高麗太師壯節申公忠烈碑文)」·「황화집령(皇華集令)」 등이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신흠(申欽))]
[생원] 선조(宣祖) 18년(1585) 을유(乙酉) 식년시(式年試) [생원] 2등(二等) 3위(8/100)
[진사] 선조(宣祖) 18년(1585) 을유(乙酉) 식년시(式年試) [진사] 1등(一等) 3위(3/100)
[이력사항]
선발인원 14명 [甲1‧乙2‧丙11]
전력 승사랑(承仕郞)
관직 문형(文衡)
관직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
문과시제 책문(策問):육경(六經)
타과 선조(宣祖) 18년(1585) 을유(乙酉)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2등(二等) 3위
선조(宣祖) 18년(1585) 을유(乙酉)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1등(一等) 3위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신승서(申承緖)[生]
[조부(祖父)]
성명 : 신영(申瑛)[文]
[증조부(曾祖父)]
성명 : 신세경(申世卿)
[외조부(外祖父)]
성명 : 송기수(宋麒壽)[文]
본관 : 은진(恩津)【補】
[처부(妻父)]
성명 : 이제신(李濟臣)[文]
본관 : 전의(全義)【補】
[안항(鴈行)]
형(兄) : 신감(申鑑)[文](주3)
[주 1]졸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을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주 2]거주지 : 『을유8월사마방목(乙酉八月司馬榜目)』(국사편찬위원회[MF A지수532]) 내의 합격 기록을 참고하여 거주지를 추가.
[주 3]안항 : 『을유8월사마방목(乙酉八月司馬榜目)』(국사편찬위원회[MF A지수532]) 내의 합격 기록을 참고하여 안항을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卷之八(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신승서(申承緖)
[생원] 명종(明宗) 13년(1558)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8위(38/100)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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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중술(仲述)
생년 신묘(辛卯) 1531년 (중종 26)
합격연령 28세
본인본관 평산(平山)
거주지 한성([京])
[관련정보]
[이력사항]
선발인원 100명 [一等5‧二等25‧三等70]
전력 별제(別提)
부모구존 엄시하(嚴侍下)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신영(申瑛)[文]
품계 : 자헌대부(資憲大夫)
관직 :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안항(鴈行)]
형(兄) : 신홍서(申洪緖)
제(弟) : 신희서(申熙緖)
제(弟) : 신광서(申光緖)
[출전]
『가정37년무오식년추사마방목(嘉靖三十七年戊午式年秋司馬榜目)』(『연계방(蓮桂榜)』, 국립중앙도서관[古6024-145])
신영(申瑛)
[문과] 중종(中宗) 18년(1523) 계미(癸未) 알성시(謁聖試) 갑과(甲科) 1[壯元]위(01/04)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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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윤보(潤甫)
시호(諡號) 이간(夷簡)
생년 기미(己未) 1499년 (연산군 5)
졸년 기미(己未)【補】(주1) 1559년 (명종 14)
향년 61세
합격연령 25세
본인본관 평산(平山)
거주지 한성([京])【補】(주2)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전기 호조참판, 대사간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윤보(潤甫). 우정언(右正言) 신효(申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자계(申自繼)이고, 아버지는 증판서(贈判書) 신세경(申世卿)이며, 어머니는 증예조참판 박사란(朴思斕)의 딸이다. 김식(金湜)의 문인이다.
1516년(중종 11) 진사시에 합격하고 1523년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홍문관에 발탁되었다.
이어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으로 있을 때 화를 입은 스승 김식을 변호하다가 탄핵을 받았으나, 뒤에 형조좌랑·함경도도사를 거쳐, 공조·형조·병조정랑과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역임하였다.
권신에게 아부하지 않아 수원부사로 좌천되었으나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추앙을 받았다.
이어 한성부서윤을 지내고, 10여 년 동안 이조·호조·예조·병조참판을 역임하였으며, 명종이 즉위한 뒤 호조참판으로 있을 때는 진휼정책(賑恤政策)에 각별히 힘써 공물(貢物)의 폐단을 개선하려고 노력하였다.
1550년(명종 5) 한성부우윤을 거쳐, 대사헌·대사간을 역임하면서 당시의 권신인 이기(李芑)를 맹렬히 탄핵하였다.
호조판서·한성부판윤·우참찬을 지냈으나, 박한종(朴漢宗) 사건에 연루되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체직되었다. 시호는 이간(夷簡)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신영(申瑛))]
[진사] 중종(中宗) 11년(1516) 병자(丙子)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13위(43/100)
[이력사항]
선발인원 04명 [甲1‧乙1‧丙2]
전력 진사(進士)
관직 호조판서(戶曹判書)
문과시제 표(表)
타과 중종(中宗) 11년(1516) 병자(丙子)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三等) 13위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신세경(申世卿)
[조부(祖父)]
성명 : 신자계(申自繼)
[증조부(曾祖父)]
성명 : 신효(申曉)
[외조부(外祖父)]
성명 : 박사란(朴思斕)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
성명 : 우석규(禹錫圭)
본관 : 미상(未詳)
[가족과거]
손(孫) : 신흠(申欽)[文]
[주 1]졸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을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주 2]거주지 : 『정덕11년병자식생원진사방(正德十一年丙子式生員進士榜)』(개인) 내의 합격 기록을 참고하여 거주지를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卷之六(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신효(申曉)
[문과] 태종(太宗) 2년(1402)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1[壯元]위(01/33)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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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號) 효창(曉窓)
본인본관 평산(平山)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전기 사간원우정언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평산(平山). 호는 서호산인(西湖山人)·효창(曉窓).
신중명(申仲明)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즙(申諿)이고, 아버지는 고려 봉선고판관(奉先庫判官) 신안(申晏)이며, 어머니는 호조판사 임세정(任世正)의 딸이고, 좌의정 신개(申槩)의 아우이다.
1402년(태종 2)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여 1404년 사간원 우정언이 되었으나, 노이(盧異)·이양명(李陽明) 등과 궁중의 비밀을 발설했다가 탄핵을 받고 연안에 유배되었다.
2년 만에 풀려났으나, 행주에 은거하여 다시는 서울의 도성문을 밟는 일없이 세조 중기에 81세로 죽었다.
세종 때 형 신개가 재상으로 있으면서 다시 관직에 나올 것을 권하고 천거하였으나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신효(申曉))]
[이력사항]
선발인원 33명 [乙3‧丙7‧同進23]
전력 생원(生員)
관직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타과 태조(太祖) 5년(1396) 병자(丙子)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신안(申晏)
[조부(祖父)]
성명 : 신집(申諿)
[증조부(曾祖父)]
성명 : 신중명(申仲明)
[외조부(外祖父)]
성명 : 임세정(任世正)(주1)
본관 : 장흥(長興)【補】
[처부(妻父)]
성명 : 홍희충(洪希忠)
본관 : 미상(未詳)
[안항(鴈行)]
형(兄) : 신감(申鑑)【補】(주2)
형(兄) : 신개(申槩)[文]
형(兄) : 신건(申虔)[文]
[주 1] 외조부 : 『씨족원류(氏族源流)』 [평산신씨]편(624쪽)을 참고하여 외조부 본관을 추가.
[주 2] 안항 : 『씨족원류(氏族源流)』 [평산신씨]편(624쪽)을 참고하여 안항을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卷之一(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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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숭겸(申崇謙)
출생일 미상
사망일 927년(태조 10)
고려전기 고려개국공신1등에 책록된 공신.
신숭겸은 고려전기 고려개국공신 1등에 책록된 공신이다.
출생일은 미상이며 927년(태조 10)에 사망했다.
궁예 말년에 홍유·배현경·복지겸과 함께 혁명을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해 개국일등공신에 봉해졌다.
927년 견훤이 신라를 공격해 경애왕을 죽이고 갖은 만행과 약탈을 일삼자, 분개한 태조가 사신을 신라에 보내 조문하고 동시에 친히 군사 5천을 거느리고 대구의 공산에서 견훤을 맞아 싸웠다. 이 싸움에서 태조가 후백제군에게 포위되어 위급하게 되었을 때, 신숭겸은 대장으로서 원보·김락과 함께 힘써 싸우다가 전사했다.
본관은 평산(平山). 초명은 신능산(申能山). 평산(平山) 신씨(申氏)의 시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전라도 곡성현(谷城縣) 출신으로 태조(太祖)가 평산에서 사성(賜姓)하였다고 하고, 『고려사』 열전(列傳)에는 광해주(光海州) 사람이라 하였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 춘천도호부(春川都護府) 인물조(人物條)에 그의 이름이 실려 있으며, 또한 그의 묘가 춘천에 있는 것 등으로 보아, 본래 곡성 출신으로 뒤에 춘천에 옮겨와서 살게 된 것으로 보인다.
몸집이 장대하고 무용(武勇)이 뛰어나 궁예(弓裔) 말년에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복지겸(卜智謙)과 함께 혁명을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王建)을 추대해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에 봉해졌다.
태조 즉위 후 7, 8년 동안 소강상태였던 후백제와의 긴장관계는 견훤(甄萱)이 신라를 공격함으로써 악화되었다.
927년 견훤이 고울부(高鬱府)를 습격하고, 신라를 공격해 경애왕(景哀王)을 죽이고 갖은 만행과 약탈을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태조는 크게 분개해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조제(弔祭)하는 동시에 친히 정기(精騎) 5천을 거느리고 대구의 공산(公山) 동수(桐藪)에서 견훤을 맞아 싸우게 되었다. 그러나 후백제군에게 포위되어 태조가 위급하게 되었을 때, 대장(大將)이 되어 원보(元甫)김락(金樂)과 더불어 힘써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간신히 위기를 벗어난 태조는 신숭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해 시호를 장절(壯節)이라 하였다.
또한 아우 신능길(申能吉)과 아들 신보(申甫)를 모두 원윤(元尹)으로 삼고, 지묘사(智妙寺)를 창건해 그들의 복을 빌게 하였다.
994년(성종 13) 4월에 태사(太師)로 추증되어 태사 개국장절공(太師開國壯節公)으로 태묘(太廟)의 태조 사당에 배향(配享)되었다.
신숭겸의 행적을 기록한 『평산신씨장절공유사(平山申氏壯節公遺事』에는 1120년 예종이 신숭겸과 김락을 추도하며 지었다는 「도이장가(悼二將歌)」라는 향가가 전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신숭겸(申崇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