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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s:// 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44463
원제 : 백제와 신라의 역사적 분수령, 관산성 전투
[역사투쟁]
관산성 전투의 서막
관산성 전투의 결과는 훗날 삼국의 전쟁에서 가장 뒤처졌던 신라가 최후의 승자가 되는 단초가 되는 그런 전투였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관산성 전투에 대한 기록은 너무도 미미하다.
시간을 거슬러 성왕 32년, 서기로 하면 554년 지금의 옥천으로 우린 시간여행을 해본다. 금강의 지류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갈라선 산봉우리에선 백제와 신라의 장병들이 서로를 주시하면서 경계를 하고 있다.
벌써 1년째 이곳 관산성 일대에서 서로 밀로 밀리는 상황으로 치열한 접전을 치르고 있었다.
이 전투에서 백제는 왜와 가야와 연합군을 만들어서 신라를 거세게 몰아쳤다. 옥천 인근 환산(고리산성), 이백리산성, 식장산의 백제군과 관산성, 서산성 및 옥천 일대의 신라군은 오늘날 휴전선처럼 대치하고 있었다.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왜, 가야 연합군은 무려 3만에 가까운 병력을 잃을 만큼 참패를 기록했다. 이 전투 이후 신라는 한반도 남부의 주도권을 잡고 한민족의 본류를 이루게 되는 역사적 사건이다. 그러나 우리 역사서나 교과서는 관산성 전투를 달랑 한 문장조차 기록하지 않고 있다.
그 반면에 일본서기엔 관산성 전투의 당시 상황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일본서기에는 관산성 전투가 왜와 백제군의 신라 함산성에 대한 불화살 공격으로 시작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학자들은 일본서기에 나오는 함산성(函山城)을 옥천의 서산성과 삼양리토성으로 비정(比定)하고 있다. 이 곳은 지금도 경부선과 고속도로 그리고 고속철도가 통과하는 교통의 길목이다.
일본서기 흠명기 15년 조 기록에 나오는 관산성 전투의 시작은 이렇다. ‘이에 천황께서 유지신을 보내시니 그가 군사를 거느리고 6월에 왔으므로 신들은 매우 기뻤습니다. 12월 9일에 사라를 공격하러 보내면서 신이 먼저 동방(東方)의 령(領)인 물부(物部) 막기무련(莫奇武連)을 보내 자(自) 방(方)의 군사를 거느리고 함산성(函山城)을 공격하도록 하였는데, 유지신(有至臣)이 데리고 온 병사 죽사(竹) 물부(勿部) 막기위사기(委沙奇)가 불화살을 잘 쏘았습니다. 천황의 위령(威靈)의 도움을 받아 이달 9일 유시(酉時)에 성을 불태우고 빼앗았으므로 한 사람의 사신을 보내 배를 달려 아룁니다’...라고 하였다.
신라가 신주(新州:지금의 경기도 광주 지역 추정)를 설치한 것은 서기 553년 7월이다. 이미 그 한 달 전인 6월에 왜가 백제로 지원군을 보냈으며, 553년 12월 9일에 신라의 함산성을 공격하면서 전쟁은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관산성 전투는 553년 12월에 시작해서 그 다음해인 554년 7월에 끝난 장기전에 속하는 전쟁임을 알 수 있다.
관산성의 위치와 백제 성왕의 전사지 위치
백제 성왕의 비참한 죽음
삼국사기엔 그저 몇 줄만이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가 전하는 기록은 ‘성왕(聖王) 32년(554년) 가을 7월, 왕이 신라를 습격하기 위하여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에 이르렀는데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왕이 난병들에게 살해되었다.
시호를 성(聖)이라 하였다’라는 기록이 전부이다.
순간의 방심이라면 방심이랄까 아니면 신라의 치밀한 공작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결과는 백제 성왕(聖王)의 무참한 죽음이었다. 아마도 백제 성왕(聖王)의 죽음은 우리 역사상 그 어느 군주보다 치욕적이면서 비극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게다.
여기에 비한다면 조선시대 인조의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굴욕은 새발의 피에도 못 미친다. 한창 전쟁 중에 어찌하다가 백제의 국왕이 달랑 50여기 호위병만 거느리고 가다가 신라 매복에 걸려서 참수까지 당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이런 의문이 필자로 하여금 ‘고성혁의 역사추적’에 나서게 했다. 그렇다면 성왕과 같은 시대를 기록한 신라본기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 있을까? 신라 진흥왕의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관산성 전투가 벌어졌던 백제 성왕 32년(554년)은 신라 진흥왕 15년에 해당한다.
‘진흥왕 15년 가을 7월, 백제 왕 명농이 가량과 함께 관산성에 쳐들어왔다. 군주인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맞아 싸웠으나 불리하자, 신주의 군주 김무력이 신주의 군사를 데리고 달려왔다.
교전하게 되자 비장인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급히 쳐서 백제 왕을 죽였다. 이에 여러 부대들이 승세를 몰아 크게 이기고, 좌평 네 사람과 사졸 2만9600명을 베었으며, 말 한 필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백제 성왕의 마지막 장면은 드라마틱하다. 일본서기에는 백제 성왕을 명왕(明王)이라고 적고 있다.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한 것에 대한 보복전으로 시작된 백제의 신라 관산성 침공은 장기화 되었다. 그로 인해 왕자 여창이 몸져 눕게 되었다.
훗날 위덕왕이 되는 여창의 진지는 환산성(고리산성)이다. 아버지 성왕은 몸져 누운 아들 여창을 위문하기 위해 호위병 50기만 대동하고 아들 여창의 진영으로 가다가 참변을 당했다.
신라군이 백제 성왕이 움직인다는 첩보를 듣고 곳곳에 매복했다고 일본서기는 적고 있다. ‘ 신라는 명왕이 직접 왔음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내어 길을 끊고 격파하였다.’ 백제 성왕을 사로잡은 이는 천한 노비였다. 백제 성왕을 사로 잡은 ‘고도’는 두 번 절하면서 말했다.
“천한 노비로 하여금 뛰어난 군주를 죽이게 하여 후세에 전해져 사람들의 입에서 잊혀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제 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합니다.”
명왕(성왕)이 “왕의 머리를 노비의 손에 줄 수 없다”하니,
고도가 “우리나라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노비의 손에 죽습니다.”
그러자 성왕은 모든 것을 체념하고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라고 하면서 호상에 걸터앉아 차고 있던 칼을 내주었다. 그렇게 백제 성왕은 구천에서 참수 당했다.
▲ 관산성의 위치와 백제 성왕의 전사지 위치
관산성 전투 현장 답사
관산성으로 추정하는 곳은 옥천 일대의 산성이다. 백제 성왕이 참수된 ‘궂은벼루(굽은벼랑)’ 근처의 삼성산, 서산성 일대가 유력하다. 필자는 어느 좋은 날 옥천으로 달려갔다.
관산성으로 올라가는 초입은 지금의 옥천군 옥천읍 현대금빛 아파트 뒤쪽 야산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높이로는 불과 300여 미터의 야산이지만 그 등정로는 여간 가파르지 않았다. 중간중간 밧줄을 잡고 올라가야 하는데 금방 땀으로 젖을 정도로 경사가 심했다.
이런 길을 그 옛날 신라와 백제병사는 수시로 드나들면서 피를 뿌렸으리라 생각하면 오히려 숙연해지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올라가본 관산성은 너무도 좁았다. 불과 100여 명도 주둔하기 힘든 그런 곳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1500여 년 동안 신라와 백제의 운명을 갈랐던 그 역사적인 전투를 관산성 전투라고 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왜 백제 성왕은 신라군이 빤히 내려다보이는 저 구천에서 신라의 복병에 목숨을 잃어야 했을까 하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나는 잠시 1500년 전 신라의 장수가 되어서 전장을 지휘해 본다. 바로 코앞 백제의 산성엔 백제와 왜 그리고 가야군이 포진해 있다. 이곳이 적에게 뚫리면 신라는 치명적 상처를 입게 된다.
기필코 이곳을 지켜야 하는데 어떻게 할까? 후방 구릉의 산성과 토성에 주둔해 있는 신라군을 어느 쪽으로 진격시켜야 할는지 아무리 봐도 뾰족한 답이 안보인다. 눈앞에서 굽이치는 금강 건너 백제의 산성은 너무도 위압적으로 다가왔다.
아마도 그 옛날 그 자리에서 지휘하던 신라 장수의 혼령이 순간 나에게 들어온 듯하다. 그 순간 병사가 급히 다가와 보고하는 소리가 들린다.
“백제 성왕이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전갈입니다.”
“방금 무엇이라고 했느냐? 백제 성왕이 이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 정말이냐? 어느 길로 온다는 것도 아느냐?”
“아닙니다. 아직 그것까지는 알지 못하옵니다. 그저 이곳 관산성 쪽으로 온다는 첩보만 얻었사옵니다.”
“그래? 그렇다면 신속히 이동해서 길목을 틀어막아야 하지 않겠느냐? 예상 이동로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백제 왕을 사로잡을 좋은 기회가 온 게다. 빨리 이동하도록 하라.”
그 생각이 드는 순간 나도 발길을 서둘러 구천으로 옮겨간다.
관산성 아래 백제의 성왕이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던 구천(궂은벼루)까지 가려면 빨리 관산성에서 내려가야 하는데, 마치 신라 장수가 성왕이 온다는 첩보를 받고 급히 내려갔던 것처럼 나의 몸을 신라 장수가 조종하는 듯 나의 발걸음은 급히 구천으로 옮기고 있었다.
▲ 서기 554년 백제 성왕이 참수된 곳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구천(궂은 벼루). 관산성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다. 염장터라는 곳은 백제 성왕 호위 무사들을 염(殮) 했다고 전해지는 곳.
▲ 관산성 전투 당시 신라와 백제의 전선
비극의 현장 구천 (궂은 벼루 : 굽은 벼랑)
바로 이곳이 궂은 벼루라고 불리는 구천이다. 사진에 보이는 작은 마을엔 서기 554년의 역사가 그대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서화천이 굽이쳐 내려가는 구즌벼루(구천)를 돌아가던 백제 성왕이 신라 복병에 사로 잡혀 참수된 현장이다.
역사 기록엔 백제 성왕이 554년 이곳 구천에서 신라의 복병에 사로잡혀 참수된 곳이라고 전하고 있다.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충북 옥천군 군서면 월전리에 위치해 있다.
약 30미터 높이의 깎아 지른 절벽이 병풍처럼 이어지고 절벽 밑으로는 금강의 지류인 서화천이 굽이쳐 흐르고 있는 곳이다. 아마 당시에 저 벼랑 뒤 쪽에 신라군이 있었으리라고는 백제 성왕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봐도 저곳은 자연적인 요새(要塞)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자연 해자인 서화천을 끼고 절벽으로 막혀 있는 뒤쪽은 나지막한 구릉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아마도 신라군은 그 절벽 뒤쪽에 주둔하였으리라 생각이 들어서 현장을 확인해 보러 발길을 돌렸다. 그래서 저 절벽 뒤쪽으로 돌아 가보았다.
좁은 농로를 어렵사리 찾아 가본 그곳에서 난 또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곳엔 아직도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옥천이라는 교통의 요충지를 유사시 지키기 위한 군부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신라군의 통찰력에 짐짓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김무력의 신라군 백골산에서 백제군을 학살하다
한성백제의 옛 땅인 한강 하류를 신라가 차지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장군이 바로 김무력 장군이다. 진흥왕 14년 가을 7월에 신라는 한성백제의 옛 땅을 획득하고 그곳을 신주(新州)로 삼았다. 그 신주의 군주(軍主)로 임명된 이가 바로 김무력이다. 신라의 독특한 지역 지배 방식이다. 김무력 장군의 손자는 김유신 장군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김무력 장군 휘하 부대의 주둔 위치이다. 김무력 휘하 부대는 새롭게 얻은 한성백제의 옛땅인 신주(新州)뿐만 아니라 서기 550년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빼앗은 도살성과 금현성에도 주둔하고 있었다. 당시 도살성과 금현성은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의 교차점이자 군요충지였다.
현재의 위치는 충북 음성과 진천지역이다. 진천은 김유신 장군이 태어난 곳으로서 지금도 김유신 장군의 사당과 태실(胎室)이 있다. 바로 진천과 충북 음성에 주둔하고 있던 신라 김무력 장군의 부대가 백제 태자 여창의 주력군을 배후에서 기습하여 관산성 전투의 대미를 장식하게 되는 것이다.
관산성 지역을 답사하면서 발견한 지역이 있다. 바로 환산성 바로 뒤쪽에 위치한 백골산성이다. 말 그대로 백골이 산처럼 쌓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따르면 백골산(白骨山)은 ‘높이 344m의 백골산에 있는 산성으로 정상부에 석성이 있는데 백제 때 축조된 것이라 하며 주위 약 396m이다.
백제와 신라가 싸워서 사람이 많이 죽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전한다’고 적고 있다. 관산성 지역 일대에는 신라와 백제의 전투 현장의 치열함을 마을 유래로 전해오는 지역이 많다. 또 다른 곳은 ‘핏골’이라는 지역도 있다.
백제와 신라군의 피가 시냇물처럼 흘러서 방패가 핏물 위에 떠다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핏골(血谷)이다. 결국 백제, 왜, 가야 연합군은 신라 김무력 장군의 배후 공략에 의해 거의 3만이나 되는 병사가 관산성 일대의 전장터에서 참살되었다.
관산성 전투 결과는 우리 역사의 큰 물줄기를 바꿨다. 관산성 전투에서 승리한 약소국 신라는 한반도 남부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백제 편을 들었던 대가야는 전쟁에 패함으로써 완전히 소멸되었다. 마찬가지로 대가야와 백제와 연합했던 왜의 세력도 한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관산성 전투의 여파
관산성 전투는 전투가 아니라 전쟁이었다. 그것도 백제, 대가야, 왜, 신라가 뒤엉킨 국제전쟁이었다. 신라보다 많은 병력을 보유했던 백제는 왕까지 참수되는 치욕을 맛봤다. 그렇다면 왜 백제는 우세한 병력으로도 마지막 전투에 승리하지 못했을까? 그것은 백제 귀족들이 병력 지원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공주에서 부여로 수도를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백제 성왕은 백제 토착 귀족들의 완전한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그 공백을 백제 성왕은 왜와 대가야의 병력으로 메꿨다. 전쟁이 장기화 될수록 왜와 대가야에서 병력을 동원하는 것은 한계에 부딪쳤다.
그러나 신라는 김무력 장군 같은 막강한 후속 지원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장기전에서 백제는 신라에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 결국 동맹이 있더라도 국가 동원력에서 실패를 한다면 전쟁에서는 이길 수 없다는 교훈을 바로 관산성 전투에서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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