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귀향과 행복(35,1-10)
34장에서 선포된 에돔의 멸망과 35장에서 예고할 이스라엘의 구원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이 장은 이사야서 제2부와 많은 연결점을 보이는데, 아마도 이사야서의 첫 부분을 둘째 부분과 연결 지은 편집자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기원전 8세기의 예언자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심판을 선고했다면, 그 심판이 실현되고 예루살렘이 함락되어 많은 주민이 바빌론으로 유배를 가게 된 다음 유배의 끝 무렵에 제2이사야가 이스라엘의 귀환을 예고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구원 선포의 내용이 35장에 자리함으로써, 이사야서의 첫 부분도 미래 없는 멸망을 예고하는 것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심판을 통한 구원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넓은 전망이 열리게 된다.
과연 기원전 8세기, 멸망 이전의 예언자 이사야가 거기까지도 내다볼 수 있었을까?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그가 기록한 하느님의 말씀은 그가 이해한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이사야서라는 책이 이사야 예언자가 직접 쓴 본문들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제2부, 제3부가 한권의 책으로 묶인 것은, 성경 저자에게 감도하시는 성령의 작용을 한 사람의 저자에게 국한시키지 않고 더 깊은 의미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저자 자신이 기록할 수 없던 것이 그에게 감도하신 같은 성령의 작용으로 다른 사람의 손으로 기록되어 그가 처음에 기록했던 말씀을 밝혀주기 때문이다.
35,1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광야와 메마른 땅은 ;
이사야서 제2부인 첫 본문인 이사 40장은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될 장소가 ‘광야’, ‘사막’이라고 하고(40,3) 이어지는 본문 여러 곳에서는 이스라엘이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오는 길에 거치게 되는 장소들인 ‘광야’와 ‘메마른 땅’, ‘사막’이 변모되리라고 말한다. 그 가운데에서 광야는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과정에 거쳤던 광야의 여정을 상기시키며(탈출 16-18장과 민수기 참조)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오는 것을 과거에 있었던 이집트 탈출에 연결시킨다. 35장을 포함한 더 늦은 시기의 본문들에서는 이 ‘광야’와 ‘길’이 바빌론 유배만이 아니라 그 이후에 곳곳에 흩어져 살게 된 이스라엘이 언젠가 돌아오게 될 길을 나타낸다. 여기서 광야가 변모한다는 것은, 이제 이스라엘이 체험하게 될 구원이 모세 시대에 있었던 구원보다 더욱 놀라운 사건이 되리라는 것을 말해준다. “메마른 땅”은 황폐한 땅을 말하고, “사막”은 주로 사해 남서부 지역을 지칭한다. 다른 해석으로는 광야가 지리적인 장소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심판이 이루어진 다음 구원을 기다리는 상황을 나타낸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기뻐하여라 ;
구원의 기쁨을 나타내는 ‘기뻐하다, 즐거워하다, 환성을 올리다’는 모두 40-66장에서 자주 사용되는 단어들이다.
35,2 수선화처럼 활짝 피고 즐거워 뛰며 환성을 올려라. 레바논의 영광과 카르멜과 사론의 영화가 그곳에 내려 그들이 주님의 영광을, 우리 하느님의 영화를 보리라.
수선화처럼 ;
‘수선화, 백합’등으로 번역되는 이 단어가 어떤 꽃을 지칭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레바논의 영광과 카르멜과 사론의 ; 33,9 참조.
레바논 ;
팔레스티나의 북쪽에 위치한 높은 산지로서 특히 향백나무가 유명하다.(이사 2,13등 ; 1열왕 5장 ; 호세 14,6 등) 이 절의 지명들은 전쟁으로 황폐해지는 것이 예루살렘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땅 전체임을 보여준다. 언급된 지명들은 모두 식물로 유명한 지역들인데, 특별히 북부의 지명들이 주로 언급되는 것은 이스라엘이 북쪽으로부터 공격받았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사론 ;
카르멜 산 남쪽의 해안 평야 지대로서 꽃들로 유명하다.(이사 35,2 ; 65,10 ; 아가 2,1)
카르멜 ;
해안의 산으로서 나무들로 유명하다.(아모 1,2 ; 아가 7,6 등)
그들이 ;
보통 하느님의 영광을 본다고 일컬어지는 것은 사람들이다. 자연은 의인화된 표현에서도 그 영광 앞에서 기뻐하는 등의 반응을 보이는 것에 그치며, 산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본다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절에서 말하는 ‘그들’이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지칭하거나 9-10절에 나오는 “구원받은 이들”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한다. 40,5에서 “(광야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리니 모든 사람이 다 함께 그것을 보리라”라고 말하는 것도 이러한 해석을 지지하는 근거다. 같은 맥락에서 70인역에서는 ‘내 백성은’을 주어로 삽입하고 타르굼에서는 ‘이스라엘 집안’을 주어로 번역했다. 그러나 문법적으로는 앞 문장에 나온 광야, 메마른 땅, 사막을 주어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어떻든 이 본문과 40,5의 공통점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해방시키시어 광야를 거쳐 시온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데에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우리 하느님의 영화를 보리라 ;
카이사리아의 에우세비우스는 1-2절을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났던 것과 연결시키고, 특히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을 그리스도의 세례에 대한 언급으로 보았다. 이러한 해석들은 신약성경에서 이 본문과 가까운 40,3을 세례자 요한에게 적용시키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발전했을 것이다.
35,3 너희는 맥 풀린 손에 힘을 불어넣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라.
너희는 ;
4절에 나오는 ‘너희의 하느님’이라는 표현을 볼 때 ‘너희’는 불안과 두려움에 빠져있는 이스라엘인들이다. 이 절은 40,29에 가깝다.
35,4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하여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복수가 들이닥친다, 하느님의 보복이!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
신명기에서 자주 사용되는 “너의 하느님”이라는 호칭만으로도 주님과 이스라엘의 계약 관계, 곧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되어주시고 이스라엘이 주님의 백성이 되는 관계를 확인해 준다.(탈출 6,6등 참조) 그런 하느님께서 지금 가까이 와계시다는 것이(이사 40,9 ; “너희의 하느님께서 여기에 계시다.”) 이스라엘에게 힘을 되찾게 해준다.
하느님의 보복이! ;
34,8에서는 ‘복수’와 ‘응보’에서 에돔에 대한 심판이라는 측면이 부각되었다면, 여기에서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개입하신다는 측면이 더 강조된다.
35,5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눈먼 이들”과 “귀먹은 이들”은 다음 절의 “다리 저는 이”, “말 못하는 이”와 함께 여러 가지 어려움을 지닌 사람들을 뜻하기도 하고, 6,9 ; 32,3-4에서와 같이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선포된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을 뜻하기도 한다. “그때에” 곧 구원의 약속이 실현될 때에는 인간을 얽어매는 온갖 고통들이 사라질 뿐 아니라 눈과 귀가 열리고 마음이 열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교 교부들은 실제로 눈먼 이들과 귀먹은 이들을 고쳐주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 약속이 실현되었다고 보았다.(노바시아누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대 레오 등)
35,6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2절에서부터 이 장의 내용이 광야와 사막에서 실현될 것임을 말했는데, 6절에 이르러 그 변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가 나타난다. “물”과 “냇물”은 하느님의 넘쳐흐르는 은총, 하느님의 개입에 의해 이루어지는 행위들을 나타낸다. 광야의 물이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41,18 ; 43,20 ; 44,3 등을 보라.
35,7 뜨겁게 타오르는 땅은 늪이 되고 바싹 마른 땅은 샘터가 되며 승냥이들이 살던 곳에는 풀 대신 갈대와 왕골이 자라리라.
승냥이들이 살던 곳에는 ;
34,13에서 에돔이 ‘승냥이들의 소굴’이 되리라고 했던 것과 대조된다. 에돔이 심판을 받아 황무지가 된 것과는 반대로 이전에 광야였던 곳이 완전히 변모될 것이다.
풀 대신 갈대와 왕골이 ;
‘갈대와 왕골’(파피루스)은 물이 많은 지역인 나일 삼각주에서 많이 자란다.
35,8 그곳에 큰길이 생겨 ‘거룩한 길’이라 불리리니 부정한 자는 그곳을 지나지 못하리라. 그분께서 그들을 위해 앞장서 가시니 바보들도 길을 잃지 않으리라.
‘거룩한 길’이라 불리리니 ;
40,3에서는 “주님의 길”을 말하는 반면, 여기서 말하는 “거룩한 길”은 사람들이 거쳐 가는 길이다. 거룩한 길, 부정한 자, 구원받은 이들 등의 표현은 기본적으로 전례적인 성격을 띠며,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만이 성전을 향해 순례 또는 행렬에 참여할 수 있음을 나타낸다. 더 넓은 의미로는 구원된 이들이 시온으로 돌아오는 길을 지칭한다.
부정한 자는 그곳을 지나지 못하리라 ;
거룩함과 부정함을 나눌 때, 이사야서에 거룩함은 일차적으로 하느님의 속성이다.(6,3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라는 호칭 참조) 그러나 심판을 거치고 나서 남은 자들 역시 ‘거룩한 씨앗’(6,13)이라 일컬어진다. 그러면 ‘거룩한 길’, 히브리어로 ‘거룩함의 길’은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말하는 것일까. 인간의 거룩함을 말하는 것일까? 배타적으로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6장에서 보았듯이 하느님께서 거룩하시기에 부정한 인간은 거기에 범접할 수 없고 하느님의 거룩하심은 인간의 부정함을 태워 없앤다. 그렇다면 이 거룩함의 길은 거룩하신 하느님께 속하기 때문에 인간에게 거룩함을 요구하는 길일 것이다.
그분께서 그들을 위해 앞장서 가시니 ;
마소라 본문은 והוא-למו הלך דרך이다. 이 구절의 의미는 분명치 않고, ‘그것[그 길]은 길을 가는 사람을 위한 것’ 등 여러 가지로 번역을 시도하나, 위의 본문과 같이 번역하려 한다 해도 원문은 “그들을 위해”가 아니라 ‘그를 위해’로 되어 있기 때문에 해석에 어려움이 있다.
바보들도 길을 잃지 않으리라 ;
이 구절도 번역이 어렵다. 마소라 본문은 ואוילים לא יתעו이다. 적지 않은 이들이 이 구절을 ‘바보들은 그 길을 지나다니지 않으리라’고 번역한다. 일반적으로 ‘바보, 어리석은 사람’이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하느님께서 안 계시는 듯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지칭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 해석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더구나 앞 구절의 뜻이 불분명하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그 길은 오직 거룩한 이들, 구원받은 이들만이 걸어갈 수 있고 부정한 자나 바보는 지나갈 수 없다는 뜻이 된다.
35,9 거기에는 사자도 없고 맹수도 들어서지 못하리라. 그런 것들도 볼 수 없으리라. 구원받은 이들만 그곳을 걸어가고
‘구원하다, 속량하다’라고 번역되는 동사 גאל의 수동태 분사 복수형이다. 그런데 이 동사의 능동태 분사형 ‘고엘’은 본래 친족이 빚 때문에 종으로 팔려갈 경우 그를 속량하고, 친족이 상속 재산을 팔아야 할 경우 그것을 다시 사서 집안의 재산을 보전하는 의무를 지닌 사람을 말한다.(‘구원자’, 룻기 참조) 41,14 ; 43,1.14 ; 44,6.22-24등 특히 이사야서의 뒷부분에서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일컬어진다. 이러한 맥락에서 “구원받은 이들”이란 하느님의 백성이었다가 바빌론으로 유배를 갔거나 다른 나라 땅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다가 하느님께서 되찾아 오신 이들을 가리킨다.
35,10 주님께서 해방시키신 이들만 그리로 돌아오리라.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에 들어서리니 끝없는 즐거움이 그들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
주님께서 해방시키신 ;
פדה는 맹수에게 잡힌 동물이나, 폭력이나 억압에 눌린 사람 등을 풀어내는 것을 말한다. 4절에서도 같은 단어가 사용되어 “주님께서 해방시키신 이들”은 하느님께서 정의의 심판을 통해 구해내신 이들을 뜻함을 알 수 있다.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 ;
이 구절에 대한 가장 좋은 해설은 시편 126편이다. “주님께서 시온의 운명을 되돌리실 제 우리는 마치 꿈꾸는 이들 같았네....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1.6절) 이 시편 역시 유배에서의 귀환을 배경으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