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교신기』 구성과 내용
사주당이 한문으로 글을 짓고, 아들 유희가 음의(音義)와 언해를 붙여 1801년에 2부작 총 10개장인 『태교신기』는 그 구성과 내용이 <표16ㆍ17>과 같다.
사주당이 한문으로 글을 짓고, 아들 유희가 음의와 언해를 붙여 1801년(순조1)에 이루어졌으며 수고본(手槁本)인 유일본이 전한다. 원문 26장ㆍ언해 43장으로 합 69장이다. 『태교신기』는 원문이 한문으로, 널리 보급되지 못하고 대대로 유희 선생 가(家)에 필사로 전해오다가, 현손(玄孫)되는 유근영이 1983년에 경북 예천에서 목판본으로 간행하여 지금 세상에 전해졌다. 그 뒤 1966년 한제찬에 의해 한글 현대어로 번역되어 읽혀지기 시작하였다. 이후 활자로 간행되어 세상에 나온 해는 1937년 1월이다. 이 간행본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사주당은 육예(六藝)와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책을 두루 통달하여 많은 시문과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순조 21년(辛巳 1821년 4월 22일) 83세로 생을 마치면서 아들 유희를 불러 『태교신기』만 남기고 다른 책은 다 불사르도록 유언하였다고 한다. 아녀자로 태어나 문장을 남기는 것을 덕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나, 『태교신기』만은 남기려고 한 것과 책머리에 밝힌 서명(書名)과 저술의 동기를 보아 이 책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름을 알 수 있다.
『여범』에 말하기를, "옛 현명한 여인이 잉태함에 반드시 태교를 하여 몸가짐을 삼갔다 하니, 이제 모든 글을 상고해 보아도 그 상세한 법을 전한 데 없이 스스로의 뜻으로 구하여 보니, 대개 혹 가히 알 수 있는지라. 내 일찍이 오륙 아이를 임신하여 생육한 체험을 기록하고, 그것으로 한 편을 저술하여 모든 여인들에게 보이나니, 이는 감히 제멋대로 스스로 저술하여 사람들의 눈에 자랑함이 아니다. 이는 오히려 가히 『내칙(內則)』에 빠진 것을 갖추었는지라. 그러므로 이름하여 '태교신기'라 하노라.
의 내용을 다시 정리해 보면 저작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첫째, 중국의 『여범』이나 「내칙」에 태교에 관한 단편적인 기록만이 있을 뿐, 종합적이고 독립된 태교서가 없었다는 점, 둘째, 당시 태교의 중요성이 인식되지 못하여 세간에서 태교를 실천하지 않고 있다는 셋째, 1남 3녀를 태교하면서 양육한 경험과 여러 경전에 깊은 지식과 잡다한 책ㆍ의서ㆍ속설 등도 참고로 삼아서 태교를 널리 가르치고자 한 점, 넷째, 자녀교육으로 먼저 선행하여야 할 바는 태교부터 엄히 실시해야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 점, 다섯째, 부모된 자로서 태교를 소홀히 함은 그 스스로 의무를 포기하는 것이란 점을 경고하고, 여섯째, 기존의 태교를 보다 더 발전시켜 새로운 경지를 말한다는 뜻에서 신기(新記)란 두 자를 넣어서, 태교 방법을 단편적인데서 종합적으로 이룩해 보겠다는 사명감을 가진 점, 마지막으로 자신의 다른 저술들을 아낌없이 불태워 없애면서도 이 한 책만을 남겨 놓은 것은 부녀자로서의 큰 의무가 태교에 있음을 강조한 점이라는 것이다.
<인도전통의 태교사상과 실천방법 연구/ 조혜숙 원광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 철학박사 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