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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8. 연중 제13일. 묵상글 1차(0627. 21:50), 2차(05:50 ~ 06:30), 3차 (07:30)
28일 묵상글, 27일 21시 50분에 1차분 올립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05시전에 2차분, 8시이후 가능시간에 3차분으로 나누어 공유하려고 합니다.
** 김찬선 신부님 강론글이 05:50 현재 작은형제회 홈페이지에 올라오지 아니하여 2차분 묵상글을 우선 올립니다
** 06:30 게재된 것을 확인하고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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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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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8. 연중 제13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10,37-42 오늘 복음은 사랑의 순서와 사랑의 크기를 함께 말합니다. 주님을 그 무엇보다 사랑하라는 부르심, 제 십자가를 지고 목숨을 내어주라는 초대, 그리고 작은 이에게 물 한 잔을 건네라는 당부입니다. 큰 헌신과 작은 친절이 하나의 사랑 안에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성 예로니모는 “나보다 더 사랑하지 마라”는 말씀을 가족을 미워하라는 뜻으로 읽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에는 ‘올바른 순서’가 있다고 봅니다. 하느님을 첫자리에 모실 때 부모와 자녀를 향한 사랑도 비로소 바르고 깊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느님보다 앞세운 사랑은 우상이 되어 결국 그 사람마저 망가뜨리지만, 하느님 안에서 사랑하는 사람은 가족을 더 온전히 사랑하게 됩니다. 이어 주님께서는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고, 나 때문에 잃는 사람은 얻는다.” 하십니다.
예로니모는 여기서 그리스도인 삶의 역설을 봅니다. 움켜쥐려는 손은 텅 비고, 내어주는 손은 가득 채워집니다. 자기를 보존하려는 사랑은 메마르고,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은 영원한 생명에 가닿습니다. 그리고 복음은 가장 작은 사랑으로 끝맺습니다. “시원한 물 한 잔.” 예로니모는 이 작은 잔에 주목합니다. 주님께서는 위대한 업적이 아니라 작은 이에게 건넨 물 한 잔조차 결코 잊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거창한 데서가 아니라 바로 이 한 잔의 친절에서 시작됩니다.
사랑·기쁨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참 기쁨이 어디서 오는지 보여 줍니다. 기쁨은 더 많이 가질 때가 아니라 기꺼이 내어줄 때 솟아납니다. 성체 안에서 자신을 다 내어주신 주님을 모시고, 우리도 물 한 잔의 사랑으로 나아갈 때, 환경을 초월한 내면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자랍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하느님을 사랑의 첫자리에 모시고 있는가? 나는 움켜쥐려는가, 기꺼이 내어주려는가? 나는 작은 이에게 ‘물 한 잔’의 사랑을 건네고 있는가? 나는 내어주는 데서 오는 기쁨을 알고 있는가?
주님, 당신을 사랑의 첫자리에 모시게 하소서. 움켜쥐려는 손을 펴서 제 목숨까지 사랑으로 내어놓게 하시고, 작은 이에게 시원한 물 한 잔을 건네는 그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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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8. 연중 제13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중국의 사상가 장자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천리마는 하루에 천리를 달릴 수 있지만 밭을 가는 데는 소용이 없다. 큰 기둥은 집을 짓는 데는 필요하지만 작은 틈을 메우는 데는 소용이 없다. 부엉이는 밤에는 작은 벌레를 잘 보지만 낮에는 큰 산도 보지 못한다.” 장자는 능력과 쓰임과 본성이 다르므로 서로를 함부로 비교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꽃밭의 꽃들이 서로 다른 색과 향기로 아름다움을 드러내듯이, 우리도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자리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앞에서 공동체를 이끌고, 누군가는 뒤에서 묵묵히 봉사합니다. 누군가는 노래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누군가는 주방에서 설거지하며 공동체를 섬깁니다. 중요한 것은 비교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자리에서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는 블루투스 이어폰의 덮개가 떨어졌습니다. 매일 산책하면서 사용하던 것이라 새로 사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붙이면 되지 않을까?” 그래서 7불짜리 순간접착제를 사서 조심스럽게 붙였습니다. 붙인 자국은 남았지만, 사용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신앙이 바로 이런 접착제와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살면서 자주 갈라집니다. 오해 때문에 멀어지기도 하고, 자존심 때문에 관계가 깨지기도 합니다. 정치와 이념 때문에 갈라지고, 세대 차이 때문에 멀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그런 틈을 다시 이어주는 힘이 있습니다. 오해로 갈라진 사람은 이해의 접착제로 붙이면 됩니다. 미움으로 멀어진 사람은 사랑의 접착제로 붙이면 됩니다. 교만 때문에 헤어진 사람은 겸손의 접착제로 붙이면 됩니다. 그리고 어디에나 가장 잘 붙는 접착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믿음, 희망, 사랑’의 접착제입니다. 지난번 사제 모임에서는 ‘미국 가톨릭교회의 역사와 미국 한인 가톨릭교회의 역사’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참 인상 깊었습니다. 미국 가톨릭교회는 처음부터 중심에 있었던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플로리다를 중심으로 스페인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되었고, 동부에서는 영국에서 온 가톨릭 신자들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개신교가 중심이었던 미국 사회에서 가톨릭교회는 오랫동안 주변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일랜드 이민자, 독일 이민자,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교회를 지켜냈습니다. 그들에게 교회는 단순히 미사드리는 장소가 아니라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외롭고 힘든 이민 생활 속에서 교회는 가족이 되었고, 쉼터가 되었고, 희망이 되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사회복지 사업과 교육 사업을 통해 이민자들이 미국 사회 안에서 뿌리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톨릭 신자인 케네디 대통령이 탄생하면서 미국 가톨릭교회는 더 이상 주변부의 교회가 아니라 미국 사회의 중요한 공동체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미국 한인 가톨릭교회의 역사 역시 감동적이었습니다. 1966년 샌프란시스코의 성 미카엘 성당에서 시작된 한인 공동체는 이제 미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메이플우드, 필라델피아, 워싱턴 DC의 공동체가 50주년을 넘겼고, 올해는 타코마 성당이 50주년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내년이면 우리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도 설립 50주년을 맞이합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 온 유학 사제들이 중심이 되었고, 교우들은 낯선 땅에서 눈물과 땀으로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언어도 어려웠고, 경제적으로도 힘들었고, 문화적으로도 외로웠습니다. 그러나 교우들은 신앙으로 서로를 붙들어 주었습니다. 김치를 나누고, 국을 나누고, 눈물을 나누면서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저는 이번 사제 모임을 통해 우리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공동체가 참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이것은 교우 여러분의 기도와 헌신 덕분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교황 주일’입니다. 미국 사람들도 교황님을 존경한다고 합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에 대한 사랑도 크고, 미국 출신인 레오 14세 교황님에 대한 기대와 사랑도 큽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교황님은 전 세계 가톨릭교회를 하나로 이어주는 사랑의 접착제이기 때문입니다. 언어가 달라도, 문화가 달라도, 피부색이 달라도 우리는 교황님을 중심으로 하나의 교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교황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권력과 성공보다 사랑과 평화와 연대를 먼저 생각하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공동체를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접착제가 무엇인지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바로 ‘나눔’입니다. 제1독서에서 가난한 부부는 예언자 엘리사를 위해 작은 방을 내어주고 음식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가진 것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마음이 따뜻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는 그런 부부를 축복하였고, 아이를 갖게 되리라고 약속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결코 자기의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작은 나눔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 위로의 손길 하나, 식사 한 끼의 배려, 누군가를 위해 기도해 주는 마음이 공동체를 이어주는 접착제가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런 삶이 바로 ‘새로운 삶’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끝까지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부활의 영광에 들어가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살아갈 때, 우리 역시 성령 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점점 더 갈라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갈라진 세상을 다시 이어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미움을 사랑으로 붙이고, 상처를 용서로 붙이고, 절망을 희망으로 붙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교황님이 전 세계 교회를 이어주는 사랑의 접착제이듯이, 우리도 가정과 본당과 세상을 이어주는 믿음의 접착제가 되면 좋겠습니다. “주님, 제가 누군가를 이어주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상처를 치유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접착제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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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8. 연중 제13주일.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 얼핏 차갑게 들리는 이 말씀 속에는 급진적 요청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 온 질서, 혈연과 그에 따른 기대, 보호와 인정의 체계가 더 이상 궁극적 기준이 아니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합당함’은 개인의 완전함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께서 시작하신 일을 알아보고 응답하는 순발력을 가리킵니다. 그 응답은 때로 가족의 시선과 어긋나기도 하지요. 가족의 자랑이 아닌 실망이 될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기도 합니다. 그 순간 기존의 관계와 질서는 흔들립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10,38). 십자가는 기존의 관계와 질서를 깨뜨리고 우리 마음과 생각을 흔드는 시험대가 될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점점 자리를 잃어 가는 느낌, 안전한 자리에 남아 있으려는 본능과 복음을 향하여 걸어가라는 부르심 사이의 갈등, 예수님께서는 그 상실감과 갈등을 피하지 말라고 이르십니다. 오히려 당당히 맞서라고 하십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10,39). 목숨은 하나뿐입니다. 그렇다고 지금의 숨이 단순히 이어지는 것만이 다는 아닐 것입니다. 때로는 지키려다 잃고 내려놓았다가 비로소 얻게 되는 것이 목숨일 테지요. 이 말씀은 지켜야 할 목숨의 가치에 대하여 묻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사는 것일까요?
이러한 거창한 이야기를 뒤로하고, 오늘 복음이 마지막에 남기는 것은 시원한 물 한 잔입니다. 누군가를 예수님의 제자라는 이유로 맞아들이는 작은 손길을 이야기합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급진적 요구를 말하면서도 작은 친절을 잊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문은 물 한 잔의 배려 속에서도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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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8. 연중 제13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13주일이며, 교황주일입니다. 6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우리는 한 해의 중간에 이르렀습니다.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새로운 마음을 새겨야 할 때입니다. 그야말로 마음에는 꺼지지 않는 그리움을 품고, 그리움의 길을 가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워하며 말입니다. “그리움이 길이 된다.”라는 박노해 님의 시가 떠올려봅니다.
나는 기다리는 사람/ 그리움을 좋아한다.//
나는 그리움에 지치지 않는 사람/ 너에게 사무치는 걸 좋아한다.//
기다림이 지켜간다./ 그리움이 걸어간다.//
이 소란하고 쓸쓸한 지구에/ 그대가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눈물 나는 내 사랑은/ 그리움이 가득하여/ 나 어디에도 가지 않았다.//
기다림이 걸어간다./ 그리움이 길이 된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하느님께서 파견한 이를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축복’과 ‘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받아들임’(환대)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를 보여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예언자 엘리사를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으로 받아들여 숙소를 제공하고 대접한 수넴 여인에게 베풀어지는 하느님의 축복과 자비를 들려줍니다.
<제2독서>에서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이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묻혔으니, 그분과 함께 살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의 ‘뒤 부분’에서는 예수님께서 파견한 제자들을 받아들이고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들에게는 ‘상’이 베풀어지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0,40)
이 말씀은 당신께서 제자들을 단순히 당신의 대리인을 파견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과 ‘한 몸을 이루는 지체’로서 파견된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당신 안에는 아버지께서 계셔서 당신께서 하시는 일은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과 같이, 당신이 파견한 제자들은 당신의 일을 하게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예언자를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을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요, 당신의 제자를 받아들이는 이는 제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네딕도 성인은 그의 [수도규칙]에서 말합니다.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맞아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너희는 나를 맞아주었다.’라고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이다.”(규칙 53,1) “인사로서 오고 가는 모든 손님들에게 온갖 겸손을 드러낼 것이니, 머리를 숙이거나 온몸을 땅에 엎드림으로써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서 흠숭 받으시고 영접 받으시게 할 것이다.”(규칙 53,6-7) “가난한 사람들과 순례자들을 맞아들임에 있어 각별한 주의를 세심히 기울일 것이니, 그들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더욱 영접되시기 때문이다.”(규칙 53,15)
오늘 <복음>의 또 하나의 주제는 ‘파견 받은 이가 지녀야 할 각오와 태도’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은 ‘파견설교’의 마지막 장면으로,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당부하신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것은 ‘파견하신 분에 대한 오롯한 사랑’과 ‘십자가를 지고 따름’과 ‘목숨을 내놓는 헌신’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부모나 자녀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8)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은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
그렇습니다. 파견하신 분을 향한 ‘사랑’과 ‘따름’과 ‘헌신’을 위하여 ‘버려야 할 것’이 있고, ‘져야 할 것’이 있고, ‘바쳐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곧 ‘다른 것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지 말아야 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하고’, ‘목숨을 바쳐 헌신’해야 함을 말해줍니다. 그러면 파견 받은 자로서 ‘합당한 자’가 될 것이고, 그렇게 잃으면 ‘얻는 자’가 될 것입니다. ‘비움’에는 ‘향하여 하는 사랑’이 담겨야 하고, ‘십자가를 짐’에는 ‘향하여 따르는 추종’이 담겨야 하고, ‘헌신’에는 ‘그분 때문에 바치는 지향’이 요청됩니다. 그러니 ‘떠남’도, ‘십자가를 짐’도, ‘헌신’도, 오롯이 ‘주님을 향하여’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기꺼이 자신이 훼손되고 손해 보는 것을 감수하고, 노고와 수고를 감수하고, 상실을 감하는 일이지만, ‘더 귀한 것을 얻음’이 됩니다.
하오니, 주님! 그 무엇보다 당신을 앞세워 사랑하게 하소서. 당신을 따르는 데 노고와 수고를 아끼지 않게 하시고, 기꺼이 십자가를 지게 하소서. 저의 가난하고 비천한 헌신이 오롯이 당신께 바치는 제물과 기도가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마태 10,40)
주님! 아침처럼 어김없이 찾아온 당신을 지나가는 행인처럼 무심히 흘러 보내지 않게 하소서. 반겨 맞아들여 상처받을 줄을 알고, 부둥켜안고 눈물 흘릴 줄을 알게 하소서. 넘어지고 쓰러지신 당신과 함께 아파할 줄을 알고, 더 이상은 당신을 피하지 않게 하소서 찔리고 못 박히신 당신과 함께 거부당할 줄을 알고, 조롱당해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게 하소서. 억울해도 곡해해도 허물을 뒤집어쓸 줄을 알고, 수없이 거부당하면서도 용서할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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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8. 연중 제13주일. 키엣 대주교님. ‘따름’이 아니라 완전한 ‘일치’
아담과 하와의 죄로 인간은 생명을 잃고 죽음의 지배 아래 놓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죽음을 파괴하고 생명의 길을 여셨습니다. 세례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에 참여하여 새 생명 안으로 들어가며, 그리스도는 우리의 삶의 중심이 되십니다. 이는 다음의 세 가지 삶을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일치’ 세례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묻히며, 그분과 함께 새 생명 안에서 살아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은 단순히 본받는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에 의해’ 살아야 합니다 인간 안에는 죄와 죽음의 질서가 지배하고 있지만, 생명은 오직 그리스도께로부터 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그분의 생명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곧 자기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는 상태를 내려놓고, 그리스도께서 삶의 주인이 되시도록 내어 맡기는 것을 뜻합니다. 이 변화는 단순한 윤리적 선택이 아니라, 옛 생명에서 새 생명으로의 전환이며, 죄의 삶에서 은총의 삶으로의 이동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산다는 것은 그분을 모든 관계와 가치보다 우위에 모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모나 자녀보다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라는 말씀은 관계의 부정이 아니라, 모든 관계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질서 잡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위하여 산다는 것은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삶입니다. 이는 고난을 단순히 감내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 역사에 참여하는 방식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생명을 낳는 사랑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이는 자연스럽게 그리스도를 세상에 전하게 됩니다. “너희를 맞아들이는 이는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다”라는 말씀처럼, 그리스도를 모신 사람은 그 자체로 은총의 통로가 됩니다. 열왕기의 수넴 여인이 예언자를 맞아들임으로써 생명의 선물을 받은 것처럼,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삶은 반드시 생명의 열매를 낳을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단순한 삶의 일부가 아니라 삶의 중심이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그리스도에 의해 살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삶 안에서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며, 또한 그 은총을 세상에 전하는 존재가 됩니다. 그때 우리의 삶은 성모 마리아처럼 그리스도를 품고 세상에 기쁨과 은총을 전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백합니다. “주님, 주님의 자비를 영원히 노래하고, 주님의 성실하심을 입으로 전하리이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은 단순한 모범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는 삶입니다. 내가 신앙을 ‘따름’으로만 이해하고 있지는 않은 지, 그리스도와의 일치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조용히 성찰해 봅시다. 2. 내 안에 여전히 옛 삶의 방식이 자리하고 있는지, 그리고 새로운 생명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돌아봅시다. 3. 그리스도 안에 머문다는 것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 분께 속해 있음’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내 삶의 중심이 여전히 나 자신인지, 아니면 그리스도께 온전히 향하고 있는지를 묵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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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8. 연중 제13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재미있는 치료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거절 치료라는 것인데, 100일 동안 매일 최소한 한 번씩은 거절당하는 것입니다. 확실히 거절당할 부탁을 해서 거절 체험을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낯선 사람에게 10만 원만 빌려 달라고 묻기. 패스트푸드 점에서 햄버거를 리필 해달라고 요청하기. 방송국에 가서 자기가 직접 날씨 예보를 하게 해달라고 부탁하기. 도넛을 올림픽 오륜 모양으로 만들어 달라고 하기.
어떻습니까? 당연히 거절당할 줄 알고 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통해 거절이 생각보다 덜 고통스럽고, 때로는 즐겁기까지 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인의 거절에 크게 아파하기보다 오히려 웃어넘길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 한 가지는 거절당하기 위해 말했는데, 이를 거절하지 않고 해주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많다는 것입니다.
다른 이의 거절에 큰 상처를 받았다는 사람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이의 거절에 굳이 상처받을 필요가 없음을 깨닫습니다. 무엇보다 뜻밖의 사랑으로 다가오는 사람도 많다는 사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결국 사람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사람에게는 실망도 하게 되고, 아픔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 그 자체에 머물면 이를 극복해서 큰 기쁨과 행복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선순위를 사랑 그 자체인 하느님께 두라고 하십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
가족을 미워하거나 인륜을 저버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최종적인 우선순위를 어디에 둘 것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때로는 가족의 기대와 혈연적 이기심과 충돌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 타협하지 않고 주님을 선택할 수 있는 결단을 내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
자기의 이익과 안전만을 움켜쥐려고 아등바등하는 삶은 결국 죽음과 함께 허무하게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 기꺼이 자기 시간, 에너지, 나아가 생명까지 내어놓는 이타적인 삶은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우선순위는 어디에 있을까요? 사람에게 아픔과 상처를 받고 있다면서 힘들어하는 사람은 우선순위를 주님께 아직 두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만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세상에는 가장 단단하며 어려운 것이 세 가지 있다. 강철, 다이아몬드, 그리고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다(벤자민 프랭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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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8. 연중 제13주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새로운 노래를 부르기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노래는 우리 영혼을 살아나게 하여, 인내하고, 꾸준히 걸으며, 기쁨 안에서 하느님을 찬미하게 합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고난의 때의 희망 새로운 노래를 부르기! 2026년 6월 27일 토요일 루터 E. 스미스 주니어 박사(Dr. Luther E. Smith Jr.)는 노래가 영적 수행으로서 우리를 희망의 삶으로 살아가게 한다고 설명합니다: 하워드 서먼의 묵상 "나 주님께 새 노래를 부르리라"는 시편 40편의 말씀, "(주님께서) 내 입에 새로운 노래를, 우리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을 담아 주셨네."라는 구절을 바탕으로 합니다. 이는 이전의 이해와 노력들이 부족했을 때, 신앙인이 반드시 드려야 하는 창조적 응답을 보여줍니다. 그 묵상은 부분적으로 이렇게 이어집니다:
이 묵상은 희망에 대한 신실한 응답을 말하며, 그 응답은 충실한 희망을 낳습니다. 새 노래를 부르는 것은 개인의 내적 변화를 이루는 길이자 그 표징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희망과 사랑의 공동체로의 변모는 희망이 우리를 살아나게 하는 목적을 지닙니다…. 우리 영혼을 살아나게 하여 인내하고, 꾸준히 걸으며, 평안히 쉬고, 기쁨 안에서 찬미하게 하는 노래는 희망을 위한 영적 수행이며, 정의와 사랑의 공동체로 살아가는 길입니다. 기쁨의 때와 어려움의 때에 여러분은 어떤 노래를 부르십니까? 이 질문은 "여러분이 음정을 잘 맞추는가?"가 아니라, "여러분을 지탱시켜 주는 노래가 있는가?"를 묻습니다. 희망은 우리 안에 새 노래를 부르고자 하는 끝없는 갈망을 채워줍니다! 노래는 단순히 영적 수행일 뿐 아니라, 상징적 의미도 지닙니다. 노래는 또한 우리의 몸이 삶의 본질과 조화를 이루도록 내어 맡겨지는 것을 뜻합니다. 음악처럼, 우리의 삶도 박자와 음조, 리듬과 즉흥 속에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을 어떻게 살아내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을 작곡합니다. 기쁨과 절망, 열정과 권태, 사랑과 무관심, 용기와 두려움, 축제와 슬픔의 정서들이 우리의 온몸을 통해 "삶의 예술"에 대한 헌신을 드러냅니다. 새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단순히 노래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그 노래는 우리가 새롭게 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References [1] Howard Thurman, The Mood of Christmas (Friends United Press, 1985), 24. Luther E. Smith Jr., Hope Is Here! Spiritual Practices for Pursuing Justice and Beloved Communit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23), 17–19.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Dyu Ha, untitled (detail), 2019,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우리는 희망과 우리를 넘어서는 하느님의 시간에 연결되고자 하는 깊은 열망으로 손을 뻗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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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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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8. 연중 제13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6.28 06:24
- 서로가 서로에게 상이 되는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상을 받을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누가 상을 받을지를 생각하게 되었는데 문득 누가 상을 받을지를 생각하기에 앞서 무엇이 상인지 먼저 생각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상은 당연히 인간이 주는 상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상으로서 생명이고 천국에서 받게 될 영원한 생명입니다.
인간도 상을 주긴 하지만 그것은 상금이나 명예나 칭찬과 같은 세상 것들로서 죽고 나면 두고 떠나야 할 것들이고 생명도 아니고 영원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가 받길 원하고 받아야 할 상은 당연히 하느님께서 주시는 상이요 영원한 생명이어야 하는데 문제는 우리가 진정 이 상을 받길 원하냐 그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상을 진정 받길 원합니까? 하느님께서 주시는 상을 원한다면 진정 다행입니다.
그런데 이 상을 진정 원한다면 그다음의 문제가 또 있습니다. 그 상을 받기 위해 받아들여야 할 것들을 받아들이냐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상을 받기 위해 먼저 받아들여야 할 것이 있는데 오늘 복음에서는 먼저 십자가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십자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고통을 받아들인다는 뜻도 있지만 그저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따르는 것이요,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께서 들어가신 영원한 생명에 같이 들게 된다는 뜻입니다.
사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고통을 주님 없이 받습니까? 고통을 주님 없이 그저 꾸역꾸역 받고 억지로 받습니다.
그래서 고통을 그렇게 많이 받고도 아무런 상급이 없고, 고통이 아무런 성사(聖事)가 되지 못합니다.
다음으로 예언자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사람을 그냥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낸 사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인데 이것은 십자가를 주님께서 주신 십자가로 받아들이는 것보다도 더 우리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부가 서로를 내가 좋아서 선택한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게 맺어주신 짝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런 뜻이지요.
그리고 수도원에서 같이 살게 된 형제도 관구장이 보낸 것이거나 같이 살기를 서로 원해서 같이 살게 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같이 살게 해주신 것이라고 믿는 것이 우리 믿음이지요.
이렇게 배우자나 같이 사는 형제를 예언자로 받아들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개인의 성화는 물론 공동체 전체의 성화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옛날 어느 수도원이 있었는데 형제들끼리 갈등과 다툼이 그렇게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침 위대한 스승이 그 수도원에 머물게 되었고 그곳 수도자들은 그 위대한 스승이 자기들에게 좋은 말씀을 남기고 가길 바랐다고 하지요.
그런데 그 스승이 남긴 말은 여러분 가운데 성인이 하나 있다는 말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그곳 수도자들은 누가 성인일까 찾기 시작했고 성인이 아닐까 생각하며 서로를 대하다 보니 모두 성화(聖化)되었다고 하지요.
이렇게 사람을 그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사람으로 받아들이면 죽어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상으로 받을 뿐 아니라 그 이전에 이 세상에서 서로가 성인과 같이 살게 되는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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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8. 연중 제13주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최영근 님 ■ 성모님의 마음고통, 네번째 - 일상생활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31&id=2133960&Page=2&menu=4770 최영근 260627 08:23 ㅣNo.1903
** 성모님의 마음고통, 네번째 - 일상생활
오늘은 성모님의 마음의고통 네번째, 일상생활 입니다 성모님의 일상생활은 어떠하셨을까 묵상해 봅니다
기원 1세기 고대 이스라엘 나사렛 지방의 목공인 (일용노동자) 집안의 주부로서의 생활. 당시 재건중인 도시 세포리스의 건설에 목공인, 일용노동자 로서 요셉이 참가했다 라는 학자들의 견해가 맞다고 생각합니다
가장인 요셉 성인은 목공일을 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성모님은 넉넉치 못한 살림과 여러가지 일상생활의 삶을 영위하셨을것 입니다 성모님의 일상생활은 그 시대의 다른사람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성모님은 아주 순결한 영혼, 예민한 양심을 지니셨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일상 생활에서 마음의 고통을 느끼셨을 것 입니다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마음고통이란 무엇일까요?
세상에 만연한 죄악 그리고 원죄에 물든 사람들의 말과 행동은 성모님의 마음을 아프시게 했다는 것이 저의 묵상 입니다
물론, 성모님께서는 일상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마음의 고통을 희생으로 하느님께 봉헌하셨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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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저의 경험으로는, 소수의 착한 사람과 소수의 악한 사람 그리고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이 있는것 같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며 공정거래의 원칙을 지킵니다
세상에서 살다보면 우리는 참 많은 여러가지 사건들을 보고 듣고 알게 됩니다.
세상에는 착한 사람들도 있어서 그들의 착한 행실을 보면 흐뭇하고 절로 미소를 짓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좋은 일, 착한 일, 아름다운 사건 보다는 나쁘 일, 악한 사건, 아름답지 못한 사건 들이 더 많이 일어납니다
사악한 인간이 나쁜 일을 하는것도 있지만, 보통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다 보면 충돌은 일어나게 됩니다. 당신은 세상에 만연한 악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신가요?
세상에는 착한 사람들이 더 고난 당하는 것 같습니다 세상에는 착한 사람들에게 더많은 고통이 있는것 같습니다 세상에는 악한 인간들이 더 활개치고 다니는것 같습니다
혹시 세상에 만연한 악 또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나쁜 일들 때문에 마음의 고통이 있는 분이 계신지요? 그런 분들은 마음의 고통을 희생으로 하느님께 봉헌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 세상에 만연한 죄악은 저를 슬프게 합니다 하느님, 세상에서 일어나는 나쁜 일은 저를 기도하게 만듭니다 거룩하신 하느님, 세상에서는 악한 일, 나쁜 사건, 가슴아픈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한 소식을 보고 듣고 알게 될때 마음의 고통이 일어납니다. 주님, 저의 마음의 고통을 희생으로 하느님께 봉헌 하오니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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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덧붙여서 ;
"성모님의 마음의고통 세번째, 성부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 를 올리기도 전에 네번째 글을 먼저 올리는 이유는 세번째 글을 아직 다 쓰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성부 하느님과 관계된 글들은 다쓰지 못한, 완료하지 못한 글들이 좀 있네요. " 예수님 어록3, 세번째" 글도 쓰고있는중 이고요. "성부성심 흠숭기도" 도 아직 완성하지 못하고 있는데요 아직도 기도와 희생이 부족한것 같습니다
아무튼 일단 네번째 글을 먼저 올립니다 세번째 글은 완료하면 바로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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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8. 연중 제13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참 제자답게 삽시다 “사랑, 추종, 환대”
어제 소규모 피정지도를 하면서 깨달음을 잊지 못합니다. 나중 면담고백성사를 드리면서 이분들의 신분이 경찰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의 경찰에 대한 선입견이 잘못됐음을 깨달았고 여러분에게 공개적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의 모습이 착하고 순박해 보여 전혀 경찰인줄 몰랐습니다. 그동안 신앙생활을 참 잘 하신 것 같습니다. 그대로 주님을 닮은 착한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모두가 흡족한 표정으로 웃었습니다. 정말입니다. 이분들의 모습이 소박하고 진실해 보여 전혀 경찰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알게 모르게 그 직업에 따른 모습이 형성되기 마련인데 이분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평상시 어느 직장에서 일하든 참으로 주님을 잘 믿어 닮아갈 때 그 고유의 참 제자다운 모습임을 깨달았습니다. 새삼 험하고 거친 세상살이에서 마음과 얼굴을 지킬 수 있는 최상의 길은 신앙임을 확인했습니다. 어떻게 주님의 참 제자답게 살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이 답을 줍니다.
첫째, 사랑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사랑밖에 답이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주님께 대한 우선적 사랑입니다. 주님을 열렬히 항구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본기도 말씀처럼 빛의 자녀되어 오류의 어둠 속을 헤매지 않고 진리의 빛속에서 살 수 있습니다. 사랑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서두에서 주님은 바로 이 사랑을 강조하십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합당하지 않다.”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우선순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가족에 대한 집착 없는 초연하고 순수한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생명을 주는 참사랑도 가능합니다. 주님 없는 가족사랑은 십중팔구 맹목적 집착의 눈먼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자녀 사랑은 더욱 그러합니다. 이래서 무엇보다 우선해야할 주님 사랑이요 이래야 공동체의 참된 다양성의 일치도 가능합니다. 그래서 베네딕도 성인도 ‘그 무엇도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마라.’ 강조하십니다.
둘째, 추종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추종입니다. 주님은 나를 사랑하라, 믿으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따르라 말씀하십니다. 바로 주님을 따름이 우리 평생 삶의 길이자 방향입니다. 그러나 따름에는 반드시 필수 조건이 있습니다. 결코 값싼 추종이 아닙니다. 다음 주님 말씀이 답을 줍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주님의 말씀이 참 엄중합니다. 각자 고유의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십니다. 제 십자가 없이는 부활의 영광도 없습니다. 제 십자가는 천국의 열쇠입니다. 십자성호를 그을 때 마다 각자의 십자가를 상기하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제 십자가가 상징하는 바 책임이요 운명입니다. 아무도 탓하거나 원망함이 없이 자발적 사랑의 기쁨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의 십자가를, ‘아모로 파티(amor fati;운명애), 내 운명의 십자가를 사랑하여 지고 주님을 묵묵히 끝까지 따라 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할 때 그 사랑은 제 십자가를 짐으로 표현됩니다. 주님을 사랑할수록 주님은 제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도 주십니다.
셋째, 환대입니다. 환대의 사랑, 환대의 기쁨입니다. 환대는 그리스도교뿐 아니라 동서양 공통적 덕목입니다. 주님께 대한 진실한 사랑은 저절로 환대의 사랑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오늘 복음 후반부는 순전히 환대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환대에는 반드시 보답이 있을 것이라 말씀하시는데 환대 자체가 이미 기쁨의 보답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비단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들은 물론 환대가 필요한 모든 이들을 환대함은 바로 주님을 환대하는 것이 됩니다. 바로 제1독서 열왕기 하권에서 수넴 여인은 엘리사를 극진히 환대함으로 아들을 갖게 되는 환대에 대한 주님의 보답도 받습니다.
베네딕도 성인도 그의 규칙서에서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하라 하십니다. 모든 환대에 앞서 그리스도를 환대함이 우선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도를 우선적으로 환대해야함을 깨우쳐 줍니다.
“죽음은 더 이상 그리스도 그분 위에 군림하지 못합니다. 그분께서 사시는 것은 하느님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도 죄에서는 죽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미사전례를 통해 그리스도 예수님을 환대하여 마음 깊이 모시고 살 때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님처럼 하느님을 위해 살게 됩니다. 환대를 통한 그리스도와의 일치가 마르지 않는 <환대의 샘>입니다.
오늘은 교황주일입니다. 날마다 무수한 사람들을 맞이하는 레오14세 교황은 바로 환대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주님을 환대하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 역시 우리를 따뜻이 환대해 주시니 “우리의 주님 환대와 주님의 우리 환대”가 서로 만나 하나 되는 참으로 복된 시간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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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8. 연중 제13주일. 최종근 빠코미오 신부님. 비움으로 세우는 은총의 처소
1. 나그네를 위한 작은 방과 성령의 침묵 고대 사막의 교부들은 열왕기 하권에 등장하는 수넴 여인의 일화를 인간 영혼의 심오한 비유로 읽어냈습니다. 여인은 나그네 엘리사가 늘 지낼 수 있도록 벽을 둘러친 작은 옥상 방을 꾸미고 침상과 식탁, 의자와 등잔을 놓아둡니다(2열왕 4,10 참조). 세상의 번잡함과 내면의 동요를 멀리하고 하느님의 사람을 위해 온전한 여백을 마련한 것입니다. 교부들은 이 거룩한 환대를 세상의 애착을 끊어낸 영혼이 성령을 맞이하는 관상적 깨어있음으로 해석했습니다. 아무런 대가 없이 오직 거룩함 자체를 알아보고 영접한 이 작은 방에서, 자식이 없어 메말랐던 여인의 삶에 생명의 약속이 잉태됩니다. "내년 이맘때가 되면 부인은 한 아들을 안게 될 것이오."(2열왕 4,16) 하느님의 은총은 인간이 자신의 소유와 집착을 비워내고 온전히 깨어 맞이하는 그 고요한 처소에서 비로소 시작됩니다. 2. 제자도의 엄격한 조건과 환대의 신비 예수님께서는 이 영성적 환대의 지평을 제자도의 철저한 이탈과 절대적 사랑으로 확장하십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 이 말씀은 자연적인 혈연의 의무를 저버리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적인 무질서한 애착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데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선언입니다. 수도 전통의 위대한 스승 성 베네딕도는 이 복음을 바탕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보다 아무것도 앞세우지 말라"는 영적 나침반을 세웠습니다. 혈연과 자아로부터 철저히 이탈하여 하느님을 삶의 첫 자리에 두는 것, 그것이 곧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입니다(마태 10,38 참조). 역설적이게도 이 엄격한 자기 비움은 타인을 향한 가장 지극한 환대로 완성됩니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마태 10,40) 주님을 위해 자신을 비운 이는 찾아오는 가장 보잘것없는 손님 안에서조차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식별하며, 제자의 이름으로 건네는 시원한 물 한 잔으로도 예언자의 상을 잃지 않게 됩니다(마태 10,42 참조). 3. 세례의 급진적 실천과 하느님을 향한 삶 이 모든 포기와 환대의 영성적 뿌리는 우리가 받은 세례성사에 닿아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세례가 단순한 도덕적 정화 예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파스카 신비에 실질적으로 잠기는 사건임을 선포합니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로마 6,4) 물속에 잠기며 죄에 종노릇하던 옛 인간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물 위로 오르며 그리스도의 부활 영광과 함께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교부 오리게네스는 이 세례의 신비를 영원히 돌아설 수 없는 근본적인 선택으로 보았습니다. 세례는 단 한 번의 예식으로 끝나지 않고, 매일의 삶 속에서 죄의 영역을 거슬러 하느님의 통치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역동적인 투쟁을 요구합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 자신도 죄에서는 죽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로마 6,11) 4. 담담하고 간곡한 삶의 권유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새 생명을 누리고 있지만, 여전히 세상의 유혹과 고단함 속에서 흔들리는 종말론적 긴장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절대적인 사랑은 나의 가장 소중한 애착마저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내려놓는 아픈 결단에서 증명됩니다. 일상의 고통을 수동적으로 견디는 데 머무르지 않고, 복음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비워내는 수덕의 삶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내 안의 무질서한 욕망과 세상적 안락을 매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이웃을 편견 없이 맞아들이는 참된 환대의 처소가 될 수 있습니다. 세례 때 시작된 이 파스카의 신비를 나의 지금 여기에서 치열하게 구현해야 하겠습니다. 죄에 대해서는 단호히 죽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오직 하느님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신실한 제자가 됩시다. 주님의 자비와 부활의 희망을 신뢰하며, 날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기 십자가를 기쁘게 짊어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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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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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8. 연중 제13주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장을 위한 포기는 근본적인 선택!
예비 신자들이나 갓 세례를 받은 형제자매들이 무심코 읽었을 때 꽤 당혹스러운 성경 구절들이 몇 군데 있는데, 오늘 봉독되는 복음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 이 복음 구절을 읽고 묵상할 때는 ‘나보다 더’라는 표현을 눈여겨봐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의 진의는 부모나 가족들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결국 예수님께 삶의 최 우선권을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건설하시려는 새로운 왕국은 혈연이나 지연, 학연이나 모든 인간관계를 초월합니다. 거기서는 더 이상 그 어떤 차별도 소외도 없이 공평합니다. “유다인도 그리스도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 3,28) 예수님께서는 부활 이후 펼쳐질 새로운 세상에서의 국면을 이렇게 소개하십니다. “부활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마태 21,30) 결국 예수님 말씀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언젠가 맞이하게 될 하느님 나라에서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든 형제자매가 한 가족이 될 것이니, 지상에서부터 그런 연습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존재에 앞서 예수님을 선택하고, 그분께 우선권을 드리며, 그분 중심으로 살아가면서 언젠가 도래할 새로운 질서의 세상에 미리 맛을 들이라는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세상 모든 가치에 앞서 하느님에 대한 우선권을 부여하는 사람들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족이나 친척, 혈연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하라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우선순위를 어디에 둬야 하는가?’ 하는 화두를 늘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가까이 따랐던 열두 사도가 새로운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 된 것처럼, 오늘날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을 예수님께 봉헌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그분의 가족으로 수용됩니다. 새로운 혈연관계가 풍성하게 이루어지는 교회의 영적 가족을 통해 우리는 장차 완성될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 맛보고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받아들임을 통해 그분의 형제가 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특전이요 은총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모든 것을 다 선택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두 손에 다 쥘 수가 없습니다. 더 큰 선, 더 큰 아름다움, 더 큰 가치를 선택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취해야 할 태도는 기존에 우리가 지니고 있던 것들에 대한 과감한 포기입니다. 큰 바다로 나아가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작은 시냇물을 포기해야 합니다. 더 크고 맛있는 사과를 쥐고 싶다면 그 전에 쥐고 있는 작은 사과를 던져버려야 합니다. 이렇게 성장하고 변화하는 삶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포기는 본질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봉헌 생활, 수도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포기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상적 과제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포기는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 절대로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고 가장 아름다운 대상이며 모든 것을 다 주고 바꾸어도 아깝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그분을 따르기 위한 것이므로 정말 기쁜 일이며 행복한 일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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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8. 연중 제13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태 10,37-42).” 1) 이 말씀은, ‘구원의 자격’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합당하지 않다.” 라는 말씀은,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 라는 뜻입니다. 37절의 부모와 자녀에 관한 말씀은,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도 아니고, 가족을 버리라는 뜻도 아닙니다. 가정은 ‘작은 교회’이고, 가족은 끝까지 함께 가야 할 ‘영적 동반자’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은 실제 가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구원받는 것을 가로막는 것들과 그것들에 대한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애착심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이 말씀에서 루카복음 9장에 있는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1-62)” 예수님께서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작별 인사를 핑계로 주님을 따르는 일을 뒤로 미루는 것을 꾸짖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어떤 사람이 한 말을 다시 풀이하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라는 말은, “저는 주님을 따르고 싶습니다. 지금은 말고 나중에.”입니다.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라는 말은, “우선 먼저 가족들에게 돌아가겠습니다. 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엘리야 예언자가 엘리사 예언자를 제자로 삼았을 때의 일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때 엘리야가 엘리사 곁을 지나가면서 자기 겉옷을 그에게 걸쳐 주었다. 그러자 엘리사는 소를 그냥 두고 엘리야에게 달려와 이렇게 말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에 선생님을 따라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엘리야가 말하였다. ‘다녀오너라.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였다고 그러느냐?’ 엘리사는 엘리야를 떠나 돌아가서 겨릿소를 잡아 제물로 바치고, 쟁기를 부수어 그것으로 고기를 구운 다음 사람들에게 주어서 먹게 하였다. 그런 다음 일어나 엘리야를 따라나서서 그의 시중을 들었다(1열왕 19,19ㄷ-21).” 엘리사는 사실상 ‘따름’을 먼저 실행한 다음에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겨릿소를 제물로 바치고, 쟁기를 부수어 그것으로 고기를 구어서 사람들을 먹였다는 말은, “자기 인생의 모든 것을 버렸다.” 라는 뜻입니다. 2) 38절의 십자가에 관한 말씀은, “구원을 향해서 나아갈 때 힘든 일을 만날 수도 있는데, 그런 일을 만나더라도 구원받는 것을 포기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39절의 목숨에 관한 말씀은, “현세적인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집착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만을 희망하고,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 그 생명을 얻는다.” 라는 뜻입니다. 40절-41절의 말씀은, 사도들의 권위와 권한을 보증해 주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파견하신 분의 뜻에 어긋나는 말이나 일을 하면 안 된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복음을 전해 듣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면, 복음을 하느님과 예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사도들 자신들의 개인적인 의견이나 생각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신 ‘구원의 진리’ 라는 것입니다. 42절의 ‘물 한 잔’에 관한 말씀은,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마태 10,10ㄴ-11).”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빈손’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마태 10,9-10ㄱ). 그러면서 하느님께서 먹여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서, 마음 착한 사람이 예수님의 사도들을 맞아들여서 숙식을 제공한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천사와 같고, 그 음식은 하느님께서 주신 음식과 같습니다. 그렇게 사도들에게 숙식을 제공한 그 사람에게는 하느님께서 보상을 해 주신다는 것이 42절의 뜻입니다. 3)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마태 10,16).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또 신앙을 증언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하다 보면, 어렵고 힘든 일들을 만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에게 꼭 필요한 것은, “나의 믿음이 옳다. 나의 삶이 옳다.” 라는 확신과 신념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항상 주님께서 함께 계시면서 지켜 주신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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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628. 연중 제13주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더 깊은 삶, 즉 참된 삶으로 가는 길은 에고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길입니다.
오늘 복음의 첫 구절, 즉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주석하면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말하기를 부모에게 드리는 효성을 평가절하하지 않기 위해,'주님의 이 말씀에서 근본적으로 중요한 점은 부모가 자녀보다 뒤로 밀려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바로 예수님께 부모님의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이라는 점을 특별하게 강조합니다. 그러니까 주님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앞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는 말씀을 하시기 위해 주님께서는 우리 지상의 모든 관계성 가운데서 우리가 참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부모나 자녀를 언급하시는 것이지 부모나 자녀를 우리 사랑의 대상 가운데 두어야 하는 일종의 인륜 혹은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무시하려는 의도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면 모든 것을 내려놓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내어놓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지금 '내'가 선호하는 것이나 중요시하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내려놓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특별하게 주목해 보아야 할 핵심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이 말씀에서 강조되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의 절대적 성격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목숨까지도 내려놓을 때" 참으로 살게 될 것이라고 하시는 말씀에 우리는 특별한 강조점을 두고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까지도 사랑의 원천이신 분을 첫 자리에 두기 위해 단호히 내려놓을 수 있을 때 우리가 참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부지해 가는 이 육체적 목숨이 전부가 아니라는 진리를 말씀하시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실상은 신앙의 길을 걸으면서도 이런 단호한 각오를 늘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는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작은 것에서부터 주님의 이 말씀을 실현해 가고자 하는 정성을 기울인다면 '내'가 지금 내 목숨만큼이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존심'이나 '내' 에고의 욕구 등을 내려놓는 일이 결국은 '내' 목숨을 살리는 첫 걸음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신앙은 우리가 다른 중요한 일을 잠시 미뤄두고 다른 특별한 관심이나 취미 활동에 몰입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성 바오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주님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모릅니까? 과연 우리는 주님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과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3-4). 여기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물속에)잠기는 것"을 뜻합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 속으로 잠긴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분의 죽음 속으로 잠겼기에, 또한 그분과 함께 부활할 희망을 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단순한 "관심사"가 아니라, 삶과 죽음의 문제입니다. "삶과 죽음의 문제라…?" 그리스도교 바깥쪽에서 볼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의 목숨도 중요하게 여기지 말아야 하고 고통도 기꺼이 감수해야 하며,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 극단적이거나 비관적인 모습으로 비춰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고통과 죽음은 결코 전부가 아니라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도 절대로 고통과 죽음이 우리 삶이나 믿음의 여정에 있서 궁극적인 목적지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실 때 언제나 그 끝에는 부활을 언급하지 않으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그분의 부활과 함께 묵상합니다. 우리의 고통과 죽음도 부활로 향하는 문입니다. 마지막 말은 고통과 죽음이 아니라, "우리가 새 생명 안에서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죽음과 부활의 패턴은 우리 인간의 삶뿐 아니라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우주 전체에 새겨져 있는 자연스러운 패턴입니다. 깊은 삶은 자기 자신에 대한 많은 죽음을 필요로 합니다. 더 깊은 삶으로 가는 길은 자아를 높이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자아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길입니다. 거짓된 자아, 스스로 만든 자아, 교만한 자아는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것은 실체가 없는 거품이기에 터져야 하는 것이지요. 결국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길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부모와 자녀"에 대해 언급하시는 것은 '나', 즉 '에고'를 중심으로 하는 우리 사고의 패턴을 허물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우리 고통의 주된 원인을 제공해 주는'에고'로부터 해방되는 길인 것입니다. 사실 '에고' 중심의 삶은 사탕발림처럼 처음에는 달콤하게 다가오지만 결국은 우리를 옭아매는 족쇄로 작용하며,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자유롭고 넓은 사랑의 세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감옥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웃 사랑, 심지어는 원수 사랑까지도 포함하는 사랑의 길은 에고로부터의 해방의 길인 셈인 것입니다. 물론 이 길은 쉽지 않은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당신을 따르려면 누구나 자기(에고)를 포기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에고의 집착을 버리려는 노력을 않는 한 우리 삶에서 참된 해방이란 그저 요원한 옛날 이야기로만 남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 목숨(에고가 고집하는 거짓 생명)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하느님께서 주신 참된 생명)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 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근본적으로 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에고의 집착을 버리는 수양을 하는 데 있어 실패를 거듭하고 세상과 에고의 유혹으로 인해 끊임없이 쓰러진다 하더라도, 적어도 이런 노력을 하고자 하는 의지만이라도 지니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결국 그 목적지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당신의 가벼운 짐을 지어 주시고 당신의 편한 멍에를 메고 함께 우리 삶의 여정을 걸어 주시는 분이 바로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시는 우리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 말씀과 더불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8-29).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죄와 한없는 부족함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커다란 희망을 품고 이 여정을 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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