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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法門對示 第九 (9.법문을 상대로 보이다)
전법 제자들에게
중생을 제도할때 상대적인 이치로
변견에 치우쳐 삿된소견에 국집하는
중생심을 조복하여
중도에 머묾을 이끌어 교화하는 방편을
드러보여 일러주신 것이다>
師께서 一日은 喚門人-法海와 志誠 法達 神會 智常 智通 志徹
志道 法珍 法如 等하여 曰하시되 汝等은 不同餘人이어서
吾度度後에 各爲一方師가되리니 吾今敎汝說法하여서 不失本宗케하리라
先須擧-三科法門-動用三十六對하리니 出沒에 卽離兩邊하고
說一切法하되 莫離自性이며 忽有人이 問汝法이거든 出語盡雙하여
皆取對法하여 來去相因하되 究竟에 二法盡除하여 更無去處하라
조사께서
하루는 문인 법해와
지성, 법달, 신회, 지상, 지통, 지철,
지도, 법진, 법여
등을 불러서 이르시기를
"너희들은 다른 사람과 달라서
내가 멸도한 후에
각자 한 지방의 스승이 될 것이니,
내가 이제 너희에게 법을 설하는 것을
가르쳐 주어서 본종(조계종지)을 잃지않도록 하리라.
먼저 모름지기
3과 법문과 움직이고
작용함에 36 상대법문을 들 것이니,
나고 듦에 양변을 여의고
일체법을 설하되 자성을 여의지 말것이며,
홀연히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법을 묻거든
말을 쌍으로 다 하여서
상대법을 모두다 취하여
오고감이 서로 因하되
마침내(究竟) 두 법을 다 없이하여
다시 갈곳이 없게하라.
강설: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하는 것은
인가 받은 전법제자들로
六조대사 이후 크게 법을 선양하여
후학들과 중생들을 제도하여
법맥이 끊어지지 않게
유포할 선지식들이기 때문에
이들의 깨우침이 확철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중생을 제도함에는 능숙한 작가(作家)의
수완이 필요한 것이다.
마치 꿀은 먹어 봐서
그 맛은 확철하게 알지라도
이 맛을 알려 알게해줄 수단인 말이 필요하나
벙어리가 말을 하지 못하며 뜻은 있되
전할수 없음과 같은 것처럼
명안종사도 제도하는데는
속제의 방편을 갖추어야 법로를 알고
쓸줄 알아야 하기 때문에
그 가풍을 일러주신 것이다.
3과(5온,18입,18계)법문과
36가지 상대법(對對)을 들어 보일테니,
묻고 대답(법거량)함에
양변(有, 無·理, 事 등의
한쪽에 치우친 소견)을 여의게
(여의면 중도가 되며
중도는 자취를 쓸어야 참 중도) 하되
본원인 자성을 여의지 말 것(평등, 진공)이며,
법을 물으면 쌍(對對)으로 답하되,
주고 받는 것(상대적)을 因하여
구경에는 자취를 없이하여
갈 곳이 없게(眞空을 요달하게) 하라고
일러주셨으니 대자비의 발로라 할 것이다.
"3과 법문과....로부터∼자성을 여의지 말 것이며"
까지는 설법하는 이의 갖춤을 일러 주신것이고,
"홀연히....로부터∼ 없게 하라"는 것까지는
배우는 이를 이끄는 방편을 일러주신 것이다.
三科法門者은 陰界入也니라 陰은 是五陰이니 色受想行識이 是也요
入은 是十二入이니 外六塵인 色聲香味觸法과 內六門인
眼耳鼻舌身意是也요 界是十八界이니 六塵六門六識이 是也니라
自性이 能含萬法이 名含藏識하니 若起思量하면 卽是轉識이며
生六識하여 出六門하여 見六塵하나니 如是一十八界가
皆從自性起用이니라 自性若邪하면 起十八邪하고
自性若正하면 起十八正이니 若惡用하면 卽衆生用이요 善用卽佛用이니라
3과 법문이란
음과 경계와 듦이니라,
음은
바로 5음이니
색, 수, 상, 행, 식이 이것이요,
入은
바로 12入이니
밖으로 여섯 티끌인 색, 성, 향, 미, 촉, 법과
안으로 여섯문인 안, 이, 비, 설, 신, 의가 이것이라,
경계가
이 18계이니 여섯 티끌(6진)과 여섯
문(6근)과 여섯 의식
(6식)이 이것이니라.
자성이 능히 만가지 법을 머금음을
함장식이라 이름하니,
만일 생각을 일으키면
곧 이 식을 굴리는 것이며
6식을 내어 여섯문으로 나가서
여섯 티끌(6진 경계)을 보게 되는것이니,
이 같은 18계가 모두 다 자성으로부터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니라.
자성에
만약 삿되게 되면(생각을 일으킴)
18가지 삿됨을 일으키게 되고,
자성이 바르면
열여덟가지 바른것(생각)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니,
나쁘게 작용하면 곧 중생의 쓰임이요,
바르게 작용하면 곧 부처의 씀이니라.
강설:
3과 법문이란 것은
음은
5음(5蘊: 색, 수, 상, 행, 식)이요,
入은
12入
(밖으로 6진 경계인 색, 성, 향, 미, 촉, 법과
안으로 6門인 안, 이, 비, 설, 신, 의)이다.
이 12入과 이 6의식을 합하여 18경계라 한다.
자성에 일체법을 갈무리하고 있으므로
함장식(제8 아뢰아식)이라 하며
이 8식이 定일때는 아무 작용이 없이 공적하나
만약 생각을 일으키면 의식을 굴려
(작용)서 하여금 6의식을 내어 6門으로 나가
6진경계를 알아보게 되는 것이니,
따라서
이 6문과 6식과 6진 경계인
18계가 곧 자성으로부터
작용을 일으키고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성에서(8식) 삿된 생각을 일으키면
18가지 삿됨을 짓게 되고
바른 생각을 일으키면
18가지 바른 것을 짓게 되는 것이라,
나쁜 생각을 일으키면 곧 중생노릇하고,
바르고 밝은(반야)생각을 일으키면
곧 부처의 지혜행을 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요약하면
8식(함장식)이 생각을 일으켜 한번 굴리면
6식의 작용이 되서 이것이 여섯가지 의식을 일으켜서
6근(문)으로 나고 들어서
6진 경계인 객관과 응해서 18계로 벌어진
(6 X 3) 이것이 자성(성품)의 작용인 것이다.
따라서
성품이 삿됨을 일으키면 삿된 작용을 내고
바르고 밝은 지혜로 인연을 따르면
곧 18正(바름)을 내어
자성의 반야작용으로 구경각인 불과를 이루고
쓰임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가 청정하면 일체가 청정하고
일체가 청정하면 하나가 청정하며
하나가 생(생각 일으킴)하면 일체가 생하고
하나가 멸(定)하면 일체가 멸(空)하게 된다 하는 것이다.
用由何等인가 由自性하여 有對法하니 外境無情이 五對니
天與地對며 日與月對며 明與暗對며 陰與陽對며 水與火對이니 此是五對也니라
法相語言이 十二對이니 語與法對며 有與無對며 有色與無色對며
有相與無相對며 有漏與無漏對며 色與空對며 動與靜對며
淸與濁對며 凡與聖對며 僧與俗對며 老與少對며 大與小對이니
此是十二對也니라 自性起用이 十九對이니 長與短對며 邪與正對며
癡與慧對며 愚與智對며 亂與定對며 慈與毒對며 戒與非對며
直與曲對며 實與虛對며 險與平對며 煩惱與菩提對며 常與無常對며
悲與害對며 喜與嗔對며 捨與 對며 進與退對며 生與滅對며
法身與色身對며 化身與報身對라 此是十九對也니라
작용은 무엇으로 말미암음인가?
자성으로 말미암아 상대법이 있게 되니
바깥 無情인 경계가 다섯가지 상대이니
하늘과 땅이 상대며,
해와 달이 상대며,
밝음과 어두움이 상대며,
음과 양이 상대며,
물과 불이 상대이니
이것이 바로 5가지 상대니라.
법상과 말이 열둘 상대이니
말과 법이 상대며, 유와 무가 상대며,
색깔과 색깔 없 는것이 상대며,
모양과 모양 없는 것이 상대며,
새어 다함 있는 것과 샘이 없어 다함이 없음이 상대며,
물질과 빈 것이 상대며, 움직임과 고요함이 상대며,
맑음과 탁함이 상대며,
범부와 성인이 상대며, 승려와 속인이 상대며,
늙음과 젊음이 상대며, 작은 것과 큰것 이 상대이니
이것이 바로 12대니라.
자성이 작용을 일으킴이 열아홉대이니
긴 것과 짧 은것이 상대며, 삿된 것과 바른 것이 상대며,
어리석음과 지혜로움(慧)이 상대며,
우직함과 슬기로움(智)이 상대며,
산란함과 머물러 고요(定)함이 상대며,
사랑(慈)과 해치는 것(毒)이 상대며,
지계와 그른 짓이 상대며, 곧음과 굽은 것이 상대며,
실다움과 헛됨이 상대며, 어려움과 편함이 상대며,
번뇌와 보리가 상대며, 항상함과 항상하지 않음이 상대며,
연민과 해치는 것(毒)이 상대며,
기쁨과 화남이 상대며, 베풂과 아낌이 상대며,
나아감과 물러남이 상대며,
나(生)는 것과 멸하는것이 상대며,
법신(空)과 육신(相)이 상대며,
화신(有相)과 보신(無相)이 상대라
이것이 바로 19대이니라.
강설:
작용은 자성이 근본이 되어 그로부터 일어난 것으로
상대(對)법이 세워지게 되는 것이다.
1.
밖의 경계에 무정물(스스로 의식이 없음)에
다섯 가지(5)
곧 하늘과 땅, 해와 달, 밝음과 어두움, 음과 양,
물과 불이 상대로 대치되는 것이며
2.
법상(실상 진리: 理)과 말에 열 두가지(12)
곧 말(假設)과 법(相), 有와 無, 물상(相)과 비어 없음(空),
움직임과 고요함, 맑음과 탁함(흐림), 범부와 성인,
승과 속인, 老와 少, 大와 小가 상대이며
3.
자성이 작용을 일으킴에 열아홉(19)가지,
긴 것과 짧은 것, 삿됨과 바름, 어리석음(愚)과 지혜로움(智),
우직함과 슬기로움, 산란함과 定(머물러 고요함),
사랑(慈)과 독(憎惡)함, 지계와 방탕,
곧음과 굽음(비뚫어짐), 실다움과 헛됨,
어려움(험함)과 편함(쉬움), 번뇌와 보리,
항상과 무상함, 연민(悲)과 해침(害), 기쁨과 화남,
베풂과 아낌, 나아감과 물러남, 生함과 滅함,
법신(無色)과 육(色)신, 화신(有相)과 보신(無相)이
상대로 5+12+19로 36상대를 세우게 되는 것이다.
다시 분류하면
36대(相對)라는 것은
마음(자성: 법성)이 주체가 되어
상대적인 객관의 원리를 성립시키는 것이다.
첫째-
순수한 객관 즉 물질계를 다섯으로 나누고
둘째-
주관인 나와 객관경계가 응(교섭)하여 이루어진
생명있는 것과 물질로 인연하여 이루어진 언어와
그 원리를 열두가지로 나누며
셋째-
주관인 나의 순수 정신 활동인 내적 내용을
열아홉 가지로 나누어 세운 것을 합한 것
(36대법)이다.
유루는
(새는 것) 변한다는 뜻이 되며,
한계가 있음으로 곧 탐진의 번뇌이며,
이로인해 인과에 매이게 되며 따라서
곧 번뇌 법(진리)이 되는 것이다.
무루는
새지 않아 다함이 없는 것이니
번뇌를 떠나 보리법(佛覺: 불지견의 실상 진리)으로
영원히 변함없다는 뜻인 것이다.
자비란-
중생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慈요
불쌍히 여기고 연민을 일으키는 것이 悲이다.
자성은 -
體(定)인 평등문의 원리로 보면
청정본연하여 단지 중생의 작용 뿐 아니라
부처의 작용까지도
본래 한 물건도 얻을 것이 없는 절대
(상대적이 아닌)의 진공묘유(반야)한 것으로
영원불변하는 것과,
차별문인 用의 원리로 보면
인연을 따르는 것으로 청정하나
어지로움을 모두 갖추어 일으켜
6대의 상대법을 내어 함유함으로
항상 대상에 따라 응하여 작용하고 나투므로
고정해 있기만 하지 않고 항상 변화하는
묘유묘용의 온 우주법계의 성품이다.
따라서
무명중생은
치우친 변견으로 한쪽 법에 집착하여
삿된 소견을 일으켜 인과에 따르며,
깨달은 불보살은
일체를 밝은 지혜로 살펴 중도로써 보아
자유 자재하여 걸림이 없는
(원만경지, 평등성지, 묘관찰지, 성소작지인
4지 작용을 냄) 것이다.
師言하시되 此三十六對法을 若解用하면 卽道實一切經法하여 出入함에
卽離兩邊하여 自性動用하고 共人言語에 外於相離相하고
內於空離空이거니와 若全着相하면 卽長邪見이되고 若全執空하면
卽長無明하리라 執空之人은 有謗經해서 直言不用文字라하니
旣云不用文字라면 人亦不合語言이니 只此言語가 便是文字之相이니라
又云直道는 不立文字라하니 卽此不立兩字가 亦是文字거늘
見人所說하고 便卽謗他하여 言着文字라니라
汝等須知하라 自迷猶可하나 又謗佛經이랴 不要謗經이니 罪障無數하리라
若着相於外하여 而作法求眞하며 或廣立道場하여 說有無之過患한다면
如是之人은 累劫에도 不可見性하리니 但聽依法修行하며 又莫百物을
不思로 而於道性을 窒 니라 若聽說不修하면 令人反生邪念이니
但依法修行하여 無住相法施할지니라 汝等이
若悟依此說-依此用하며 依此行-依此作하면 卽不失本宗하리라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36 상대법을
만약 쓸 줄 알면
곧 도가 일체 경전의 법을 꿰뚫어,
들고 남에 곧 양변을 여의어서,
자성이 움직이고 작용하고
사람과 같이 말을 함에
밖으로 상에서 상을 여의고
안으로 공하나 공을 여의거니와,
만일
온전히 相에 집착하면
곧 사견을 기르게 되고
만일 온전히 空을 집착하면
무명을 기르게 되느니라.
공을 집착하는 사람은
경을 비방하게 되서 곧바로 문자를
쓰지 않는다고 말하나니,
이미 문자를 쓰지 않는다고 한다면
사람이 또한 합당히 말도 하지말아야 할 것이니
다만 이 말이 바로 문자의 相
(假說된 모습)인 것이니라.
또 말하기를
"直道는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
(直道는 不入文字)”하나니
곧 이 세우지 않는다는 두 글자
(不立)가 역시 바로 문자거늘,
사람이 말하는 것만 보고
(뜻은 모르고) 문득 곧 저를
(그것을) 비방하여 "문자에 집착했다”말하니라.
너희는 모름지기 알라,
자기의 미함은 오히려 허용하나
또한 불경(부처님의 말씀)까지 비방할까 보냐?
요컨대 경을 비방하게 되면(誤解) 안 될 것이니
죄의 업장이 무수하리라.
만일 밖으로 상에 집착하여
법(相見)을 만들어 참을 구하며,
혹 도량을 널리 세워서
있고 없는 허물과 근심을 말한다면
이와 같은 사람은 몇겁을 지나더라도
가히 견성하지 못하리니,
다만 들은대로 법(진리)에 의하여 수행하며,
또 백가지 일(萬事)을 사유하지 않는 것으로
(공견의 定에 국집하여) 도의 (청정한)성품을
(사견으로)막아 꺼리끼게 하지 말지니라.
만약
설법(이러한 불법의 진리의 말)을 듣고도
닦지 않으면 사람으로 하여금
뒤집힌 삿된 생각을 내게 하나니,
다만 법을 의지해 수행하여
상에 머무름 없는 법을 베풀지니라.
너희들이 깨달음에 의하여
이것을 설하고 이에 의하여 쓰며
이에 의하여 행하고
이에 의하여 지으면
곧 본래의 종지를 잃지 않으리라.
강설:
이 36 상대법을 바르게
제 때 제 곳에 쓸 줄 알면
도가 일체 경전의 법(바른 이치)을 꿰뚫게 되어
(밝게 깨달아 알게 되어) 만사에 양변을 여의어서
(치우친 소견을 여의고 중도로써)
본성(반야)의 작용으로써
사람과 더불어 응대함에
밖으로 상(속세의 갖가지 모습)에 있되
상을 여의게 되고(허망한 것에 집착하지 않게 되고)
안으로 공하나 공(비어 없다는 것)에
국집하지 않게되는 것이다.
따라서
상에 집착하면 변견에 치우쳐
삿된 소견을 기르며,
공(空)에만 국집하면
無明을 기르게 되는 것이다.
공에 집착하는 자는 도리어
경의 뜻을 잘못 앎으로써 비방
(그릇되게 앎)하게 되는 것이니,
이를테면 "문자를 쓰지 않는다"고 하는 말에
그 뜻하는 바는 깨닫지 못하고
문자(말)에만 끄달려 아예 문자
그 자체를 써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말도 또한 쓰지 않아야 하는 것이니,
문자를 쓰지 않는 다는 말이 바로
문자와 서로(相) 같은 것이며,
"直道는
不立文字"라 하나,
세우지 않는다(不立)는 그것이
또한 문자인 것을 모르고
말(경)만 보고 그 말의 뜻은 깨닫지 못하고
말이나 글 자체를 집착하는 소견을 짓게되는 것이니,
경에서 말씀하는 비어 공하다는 말씀의 뜻을
잘못 알아 일체가 아예 없다거나
공이라는 것에만 국집해서 알면 오류라,
이것이 치우쳐 집착하는 변견인 삿된소견인 것이다.
따라서 경의 뜻이 왜곡되어 비방함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미혹은 그렇다 치고
부처님의 말씀까지 오도하게 되면
그 죄업이 한량없게 되는 것이며,
이렇게 깊은 뜻은 모르고
문자나 언어에만 국집하여
밖으로 상에 집착하여 스스로 자기 소견으로
불법이라는 고집을 세우고 남에게 일러주고
그것으로 참을 구하고 널리 절을 짓고
있고 없는 허물 근심을 말한다면
그 미혹의 업장이
견성을 크게 장애하는 것이라 하신 것이며,
들은 법문
(이러한 불법인 진리에 들게 하는 말씀)의
뜻을 바로 알아 법
(진리)에 의해서 수행하고 번뇌 망상을 쉬어서
미혹을 더하지 말 것이며,
설법을 듣고도 닦지 않으면
도리어 삿된 소견을 스스로 기르게 될 것이니,
법대로 수행하여 무상주 보시를 기꺼이 할 것이며
깨달음에 의하여 법문을 설하고 쓰고 행하면
불법의 종지를 잃지 않게 된다 하신 것이다.
경문을 읽되 경의 뜻을 깨달아
문자를 스스로 굴려야 하거늘,
글자(말)에 국집해서 글 풀이나하며
글에 굴림을 당하는 어리석은 짓으로
도리어 문자에 매여 자기 스스로의
소견으로 이것이 불법의 진리라는 법을 세워
(지어 만들어) 자기를 속이고
남까지 그릇되게 이끌게 됨을 경계하셨다.
若有人이 問汝義하되 問有거든 將無對하고 問無거든 將有對하며
問凡이거든 以聖對하고 問聖이거든 以凡對하여 二道相因이되어
生中道義이니 汝一問一對하고 餘問을 一依此作하면 卽不失理也리라
設有人이 問하되 何名爲暗인가하면 答云하되 明是因이요 暗是緣이니
明沒卽暗이라하라 以明顯暗하고 以暗顯明하여 來去相因하며 成中道義니라
餘問도 悉皆如此이니 汝等이 於後傳法함에 依此迭相敎授하여 勿失宗旨니라
만일
사람이 너희에게 뜻을 묻되,
있음을 묻거든 없음을 가져 대하고
무를 묻거든 유를가져 대하며,
범부를 묻거든 성인으로써 대하고
성인을 묻거든 범부로써 대하여
두 도(양쪽)가 서로 因이 되어
중도의 뜻을 나게(깨달음을 이루게) 할 것이니,
너희는 한번 물으면 한번 대답하고
나머지 물음을 한결같이 이에 의해하면
곧 이치(진리의 뜻)를 잃지 않으리라.
설사(예를 들면)
사람이 묻기를 '
어떤 것을 어두움이라 이름하는가?' 하면
답해 이르기를
'밝음은 因이요 어두움은 緣이니
밝음이 사라지면 곧 어두운 것이라'하여
밝음으로써 어두움을 드러 내고
어둠으로써 밝음을 드러 내서
오고 감이 서로 인하여
중도의 뜻을 이룰지니라,
나머지 물음도
모두 다 이와 같이 할지니
너희가 후에 법을 전함에 이러함에 의해서
번갈아 서로 가르쳐 주어서 종지를 잃지 말지니라.
강설:
법을 거량할 때는
상대로써 물음에 답하여 물음과 답함을
서로 因으로써 치우침을 파하여서
중도를 깨닫게 할 것이며,
한번 물으면 곧 한번 답하여
바른 이치를 잃지 않게 하라 하셨으며,
상대적으로 드러내 문답이 서로 오고감으로 인해서
중도의 뜻을 깨달아 들게 하라 하시고,
나중에 법을 전할 때도
이렇게 점검해서 인가하고 상대로 문답하여
이 중도로써 교화하게 끔 일러 주어서
종지를 잃지 않도록 하라고 하신 것이다.
중도란
것은 갓 없는 중간이니
중간도 없고 양끝도 없이
치우침없는 가운데를 말하는 것이며,
갓 없는 양변이라는 것은
상대가 없고 끝이 없는 것이
양변을 여읜 것이고
따라서 밖으로 색, 성, 향, 미, 촉, 법에 얽힘
(끄달림, 집착)이 없어 망령된 생각이
일어 나지 않음인 것이다.
따라서
유도, 무(공)도 집착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며
또한 항상함에도 단멸함에도 국집하지 않고
이 양변의 치우친 소견을 모두 여의어야 하며,
또한 항상하고 항상함이 없는 것,
고와 낙, 단멸공과 실상, 나와 나없음에 집착하면
양변인 변견에 치우친 것이 되므로
이 모두에 치우치지 않음을
중도라하며 이것이 곧 반야바라밀인 것이다.
상대적인 것은
둘 아닌 즉 不二를 증오하지 못한 것이니,
주관과 객관 곧 能과 所를 가지고
나를 인정하고 일체 경계를 실상으로 인정하는
것은 상대법이므로,
이 두 가지를 여의면
곧 자성을 보고 깨달아 보리열반의 불법
즉 진리인 일체종지를 증득하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의 일대시교와
六조 단경이 곧 이것을 위해
설한 방편임을 알아야한다.
일체의 실상은 입을 열면
(곧 말이) 허물이 되니
실다운 것이 아닌 假說인 것이다.
그러므로
"입만 열면 어긋난다"하는 것이나,
이 말이 실다움이 아니요
말의 뜻이 실다움인 것이다.
이 뜻을 알려 주기 위해 말한
개구즉착이라는
뜻을 바르게 알고 써야하는 것이니,
'公으로는 바늘도 통할 수 없으나
사사로이는 거마가 통한다'는
것은 허물 가운데도 용서 받지 못할
삿된 허물이 있으며,
용납되는 헛됨이 아닌(無虛) 허물이 있으니
불조의 드러 보임이 곧 용납되는
허물 아닌 허물로 진실함인 것을
또한 알아야하는 것이다.
일체 두두물물
선, 악이 방편문이요
바르게 쓰면 곧 옳거니와
삿되게 굽어 쓰면 죄업의 因이 되는 것이다.
일체의 교설 뿐 아니라
선법도 또한 방편인 것이니
밖으로 옳고 그름을 살펴 가리려 하지 말고
안으로 내 삿된 소견을 살펴 굽은 것을 바르게 펴야
하는 것을 자기省察이라 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