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호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보드게임 ‘승경도놀이’
보드게임 카페에 가 보면 별의별 놀이들이 많다. 잘 알려진 ‘체스’나 ‘루미큐브’는 기본이고 ‘할리갈리’, ‘뱅’, ‘블래츠’, ‘추로’, ‘스파이폴’, ‘카탄’ 등 처음 접하는 놀이가 책꽂이에 수북이 쌓여있다. 놀이방법은 설명서를 읽으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국적도 동·서양을 망라하여 취향에 맞게 선택해서 즐길 수 있다. 얼마 전까지 많은 수의 카페가 있었는데 이제는 한풀 꺾인 것 같지만 그래도 몇몇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보드게임도 관심 영역이라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시간당 3천 원을 내고 들어갔다. 그런데 우리나라 보드게임은 고작 장기와 바둑 정도가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집에서도 할 수 있는 놀이고 다른 놀이에 밀렸기 때문인 것 같다. 이런저런 놀이를 살펴보고 나오다 다른 나라와 견줄 우리나라 보드게임을 떠올려 보았다.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보드게임으로 ‘승경도(陞卿圖)놀이’가 있다. 이 놀이는 ‘종경도’, ‘승정도’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모두 ‘벼슬살이를 하는 도표’라는 뜻이다. 조선 시대에는 관직의 칭호와 상호관계가 매우 복잡하였다. 따라서 양반가에서는 어릴 때부터 벼슬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이 놀이를 장려하였다. 특히 서당에서 권장한 놀이로 벼슬의 서열 뿐만 아니라 선비의 자세를 익히도록 하였다.
『용재총화』를 쓴 성현(1439~1504)은 조선 시대 정승을 지낸 하륜(1347~1416)이 만든 놀이라 하지만 중국의 문헌에도 이와 비슷한 놀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하륜이 우리 실정에 맞게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그밖에 <필원잡기>, <오산설림> 등에도 단편적인 기록이 남아 있고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도 쉴 짬을 이용해 장교들과 했다는 기록이 있다.
놀이방법
4명에서 8명까지 놀 수 있는데 편을 짜서 하기도 한다. 관직이 적힌 놀이판과 윤목이 필요하다. 윤목(輪木)은 손에 쥘 정도의 크기인데 5각 기둥의 모서리를 파서 1~5까지 표시된 것으로 끗수를 알 수 있는 일종의 주사위다. 이는 윷놀이의 도, 개, 걸, 윷, 모를 나타내기에 윷목이라고도 한다. 놀이판은 기름 먹인 종이로 만드는데 세로×가로가 약 2m 내외×40cm 내외의 직사각형이다. 각 칸은 300여 개로 나뉘어져 있는데 각 칸에는 큰 글씨로 관직을 쓰고 그 아래에는 다시 5개의 칸으로 나누어 작은 글씨로 행선지가 쓰여져 있다. 중앙부의 첫 꼭대기는 정1품을, 그다음에는 종1품을 늘어놓는 것이 일반적이다. 중앙 맨 아래 또는 가장자리 일부에 파직, 금고, 유배, 사약 등 벌칙이 있다. 말은 일정한 형태가 없으나 구별되도록 표시한다. 크기보다는 색깔을 달리한다.
①놀이가 시작되면 첫 번째 결과에 따라 신분이 결정되기 때문에 제일 중요하다. 신분은 크게 유학, 진사, 무과, 문과, 은일로 가장 낮은 출신이 유학이고 가장 높은 출신은 숨어 지내는 선비를 뜻하는 은일이다.
첫번째 | 1(도) | 2(개) | 3(걸) | 4(윷) | 5(모) |
유학 | 진사 | 무과 | 문과 | 은일 |
두번째 | 1 | 2 | 3 | 4 | 5 | 1 | 2 | 3 | 4 | 5 | 1 | 2 | 3 | 4 | 5 | 1 | 2 | 3 | 4 | 5 | 1 | 2 | 3 | 4 | 5 |
도 | 개 | 걸 | 윷 | 모 | 도 | 개 | 걸 | 윷 | 모 | 도 | 개 | 걸 | 윷 | 모 | 도 | 개 | 걸 | 윷 | 모 | 도 | 개 | 걸 | 윷 | 모 |
진사進士 | 무과 | 문과 | 은일 | 참봉 | 문과 | 감찰 | 교관 | 직장 直長 | 부장 | 별검 | 선전관 | 사복 내승 | 주서 | 부정 | 전적 | 시직 | 한림 | 익찬 | 돈령도정 |
②자기 차례가 되면 윤목을 굴려 나온 숫자만큼 이동한다.
③누가 먼저 끝까지 올라가는가를 겨루는데 문관의 경우 봉정하까지, 무관의 경우 도원수까지 올라가서 은퇴하면 놀이가 끝나게 된다. 참고로 가장 높은 관직을 보면 아래 표와 같다.
부원군府院君 | 우의정右議政 | 좌의정左議政 | 영의정領議政 | 봉조하奉朝賀 |
1 | 2 | 3 | 4 | 5 | 1 | 2 | 3 | 4 | 5 | 1 | 2 | 3 | 4 | 5 | 1 | 2 | 3 | 4 | 5 | 1 | 2 | 3 | 4 | 5 |
도 | 개 | 걸 | 윷 | 모 | 도 | 개 | 걸 | 윷 | 모 | 도 | 개 | 걸 | 윷 | 모 | 도 | 개 | 걸 | 윷 | 모 | 도 | 개 | 걸 | 윷 | 모 |
우의정 | 좌의정 | 판중추 判中樞 | 영의정 | 부원군 府院君 | 좌의정 | 영의정 | 우의정 | 영의정 | 봉조하 | 우의정 | 좌의정 | 봉조하 | 영의정 | 퇴退 |
당시 관료제가 반영되어 잘못하면 귀양 심지어 사약을 받아 놀이에서 탈락하기도 한다. 놀이의 특별 규칙으로 양사법, 은대법 등이 있는데 이 또한 당시 관료제의 반영이다.
시대에 따른 놀이의 변화와 원리의 지속
이와 유사한 놀이로 전국의 명승지를 유람하는 남승도(覽勝圖), 부처의 진리를 깨닫는 성불도(成佛圖), 전국의 유명한 정자나 누각의 이름을 적은 누각도(樓閣圖) 등이 모두 같은 맥락의 놀이이다.
일제 강점기에 왕조가 붕괴되면서 관직도 소멸되어 ‘승경도 놀이’는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같은 원리로 행해졌던 ‘남승도 놀이’는 당시 상황에 맞게 고쳐 ‘조선 일주 말판 놀이’(〈어린이〉잡지 4권3호, 1926.3)로 새로 만들어져 보급된다. 해방 후 각 지방의 특산물과 철길을 지도에 그려 놓은 말판인 ‘지도판 주사위 놀이’가 잠시 유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놀이들은 시대 변화에 부응하지 못하고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보드게임의 내용도 이를 따른다. 1982년 한국의 씨앗사에서 출시한 재산 증식형 보드게임인 ‘블루마블’이 그것이다. 놀이를 위해 놀이 세트를 구매하면 그 안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들어있다. 블루마블 놀이판, 주사위 2개, 현금(씨앗은행), 황금열쇠, 건물 등이 그것이다. 놀이의 목표는 여기저기 투자한 곳에서 수익을 얻어 파산하지 않고 끝까지 남는 사람이 승자가 된다.
먼저 돈을 각자 나눠 갖고 시작하는데 주사위 끗수도 중요하지만 자주 지나는 국가나 건물을 사서 통행료를 받는 등 자산을 잘 운영해 자본을 축적해야 이길 수 있다. 1980년대 크게 유행했는데 지금까지 디자인이나 재질 등이 개선되면서 이어지고 있다. 요즘은 부모와 아이가 함께 하는 경우도 많은데 보통 1시간 정도가 걸리기에 별도의 시간을 내야 한다.
놀이는 사회를 반영한다. 승경도에서는 출발할 때 가장 먼저 신분을 결정하고, 람승도 놀이에서도 전국을 유람하기 전에 처음 던진 말로 시인, 한량(무사), 미인, 스님, 농부, 어부 등으로 나뉘어 시작한다. 놀이가 행해졌던 시대엔 당연했는데 지금은 신기하게 느껴지는 것은 현재는 신분제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블루마블’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국가를 매입하고 부동산을 사들여 통행료를 받는 등의 활동은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사회에 따라 놀이도 변하지만 원리는 지속되기도 한다. ‘승경도 놀이’의 윤목이 ‘블루마블’의 주사위로 바뀌었을 뿐 운에 의해 진행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관직이 높아지는 것이 조선 시대 양반들의 바램이라면 오늘날은 돈을 많이 갖는 것이 지향점일 수 있다. 보드게임 카페에 우리의 ‘승경도 놀이’를 들여놓는다고 활용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놀이 원리를 응용한다면 새로운 놀이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조선 시대 관직 대신 오늘날 정부 부처를 기입하거나 ‘람승도 놀이’의 경우 각 시도의 관광명소를 돌아보는 놀이판을 만든다면 자연스레 지역 안내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밖에 ‘승경도 놀이’에서 처음 끗수가 중요하므로 이를 반영해 처음 던진 끗수로 포유류, 조류, 양서류, 파충류, 어류로 나뉘어 시작한다면 동물의 종류 뿐 아니라 유형별 생태 특징도 알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노령화 사회를 넘어 노령사회에 접어든 요즘 여가를 어떻게 활용하는 지가 화두가 되고 있다. 이러한 사회 변화에 부응하기 위해 조상들이 남긴 놀이 유산을 탐구하여 놀이 원리를 추출하고 이를 적극 활용해야 할 것이다. 훌륭한 놀이 유산을 구시대 유물로 치부하고 완성된 외국 놀이만 들여온다면 우리 놀이는 영영 잊혀지고 말 것이다.(끝)
첫댓글 놀이는 사회를 반영한다. 따라서 놀이는 사회 이데올로기를 넘어설 수 없다. 오늘날 사회는 신분제가 없어졌기에 요즘 놀이에서는 신분제를 매개로 하는 놀이는 없다. 따라서 놀이로 그 사회의 중심 이데올로기를 파악할 수 있기도 하다. 블루마블은 돈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좋은 예이다. 서양의 보드게임을 보면 신분이 아니라 아이템을 획득하는 과정이 많다. 이는 사회생활에서의 스펙으로 봐도 무방하다. 특히 전자게임에서 이런 양상이 두드러진다. 그밖에 누군가와 협동하기 보다 경쟁해서 이기기를 강요한다. 아님 자신이 당하기 때문이다. 이 또한 우리 사회의 이데올로기다. 이런 식으로 열거하면 끝이 없다. 그래서 이만 줄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