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세(1877-1962)는 소설가로 알려졌지만 평생 그치지 않고 많은 시를 썼다. 그는 열세 살에 이미, 시인이 되겠다고, 시인이 아니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고 작정했다.
서른 살에는 분명히 '서정시인'이라는 의미로 "여기 시인 헤세가 잠들다"라는 자신의 비명을 미리 써 보기도 했고, 소설 세 권보다는 좋은 시 한편을 썼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1895~1898)열여덟에서 스물 한살의 헤세. 젊음의 한 가운데서 벌써, 사라져가는 젊음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다. 혹독한 "수레바퀴 아래"를 지나왔다. 학업의 길은 벌써 버린 지 오래였고 잠시 병원에 갇히기도 했다.
젊음의 도주
지친 여름이 고개를 숙이고
호수에 어린 자신의 모습을 본다.
나는 지쳐서 먼지투성이가 되어 걷는다
가로수 길의 그늘 속을.
포플러 속으로 조심스러운 바람이 지나가고,
등 뒤의 하늘은 붉다,
앞에는 저녁의 불안들
-그리고 어스름- 그리고 죽음이 있다.
나는 지쳐서 먼지투성이가 되어 걷는다,
등 뒤에서 주춤하며 젊음이
멈춰 선다, 그 아름다운 머리를 숙인다
더는 나와 함께 가지 않겠단다.
초여름 밤
하늘은 소나기 퍼붓고,
뜰에 서서
보리수 한 그루 떨고 있다
벌써 늦었다.
한 가닥 번갯불
창백하게 제 모습 비춰 본다
젖은 커다란
두 눈으로 연못에다.
흔들리는 줄기 위에
꽃들이 달려,
바람에 실려 오는
낫의 날 가는 소리 듣는다.
하늘은 소나기 퍼붓고
후욱 무더운 입김 지나간다.
내 아가씨는 떨고 -
"말해봐, 너도 느껴지지?"
나는 별
나는 창공의 별,
세상 바라보며, 세상 경멸하며,
제 이글거림 속에서 불타 버리지.
나는 바다, 밤이면 포효하지,
탄식하는 바다, 죗값 무겁게
쌓인 옛 죄에 새 죄를 더하지.
나는 너희 세계로부터 추방당했어
자랑으로 키워지고, 자랑으로 속아,
나는 나라 없는 제왕.
나는 말 잃은 열정,
집에선 화덕이 없고, 전쟁에선 검이 없고,
제 스스로의 힘에 지쳐 병들었네.
(1899-1902)
이것이 나의 괴로움이다
이것이 나의 괴로움이다,내가 너무 많은
가면을 만들어 쓰고 너무 잘 연기하는 것과
또 나와 남들을 너무 잘
기만하는 것을 배웠다는 사실. 그 어떤 작은 움직임도
그 안에 유희와 의도가 없는
그 어떤 고통도 나를 동요하게 하지 않는다.
나 이제 이걸, 나의 비참이라 일컬어야 하리,
나 자신을 그렇게 속속들이 알기 위하여
모든 맥박을 미리 알아 버려, 이제
어떤 꿈의 무의식의 경고도
어떤 흥취도 어떤 고통의 예감도
더 이상 내 영혼을 건드리지 못하리라는 것.
편지
한 줄기 바람이 서쪽에서 불어온다,
보리수들이 몹시 신음한다,
달이 가지에서
내 방을 비죽이 들여다본다.
나는 나를 떠난
내 사랑에게
긴 편지를 썼다,
달빛이 종이 위로 내렸다.
글줄 너머로 가는,
그 고요한 빛 곁에서,
내 마음은 울음으로
잠을, 달을, 밤 기도를 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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