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誌, 길(路)(섬포함)
17. 홍성읍 대교리(교동마을)
안동처사 택전 윤동원 ・ 2023. 3. 14. 15:49
마을은 마을마다의 옷을 입는다. 화려한 옷을 입기도 하고 담박한 옷을 입기도 하며 세련된 옷을 입기도 하기만 수수한 옷을 걸치기도 한다. 때로는 고풍스런 옷으로 멋스러움을 한껏 드러내기도 하고 최첨단의 옷으로 치장하기도 한다.
홍성읍 대교리(大校里)는 고풍스런 옷을 멋스럽게 갖추고 단정하며 담박한 미소를 짓고 있는 마을이라는 인상이 짙다. 특히 대교 1․2리는 홍주향교, 혜학서원 터, 홍주의사총, 천주교순교성지 등이 남아있고 오랜 내력을 지닌 마을이라 그런지 예스러움이 가득 번져있는 마을이다.
대교리는 군청과 읍사무소가 있는 시내에서 가까워 개발이 크게 이루어진 지역이다. 특히 대교 2․3․4리의 개발이 두드러지고, 홍주향교가 있는 대교 1리는 그나마 옛 모습이 남아있긴 하나 전통적인 농촌마을과는 달리 시내에 가까운 지역이다. 월계천과 홍성천을 중심으로 대교 1․2리와 3․4리가 구분되며 대부분 평지에 주택가를 이루고 있다.
▲ 옛 모습과 현재 모습을 두루 갖춘 교동마을.
현재 대교리는 4개의 행정리로 이루어져 있다. 이 대교리 4개 행정리 중 으뜸마을인 대교 1리는 홍주향교가 있어 '교동'이라 불리운다. 그 옆에는 홍성고등학교가 자리하고 있고 학교 뒤편에는 조선시대 혜학서원이 있던 터가 남아있다.
대교 1리 교동마을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교동마을은 대부분 홍주향교 소유지였다. 향교 소유지는 대교리 뿐만 아니라 홍성 일대에 광범위하게 흩어져 있었다. 향교 땅을 빌려 경작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특히 향교가 있는 대교리로 땅을 찾아온 사람들이 한동안 모여들면서 인구가 증가했다. 그런 배경 때문에 교동 사람들은 여러 성씨가 모여 사는 마을이 됐다. 향교재단의 토지는 해방 이후 소작하던 사람들에게 분배되기도 했다. 조선시대 내내 대교리 대부분 지역이 향교 소유지였으나 해방 직후 토지분배가 이루어져 민간 소유지로 바뀌었고 지금은 일부만이 향교 소유지이다. 교동마을은 골짜기와 언덕 등이 모두 개발돼 주택이 들어서고 1941년 홍성공립중학교(홍성고등학교의 전신)가 세워지면서 옛 지명은 잊혀져버렸다. 이 일대에 남아있는 지명은 마을이름과 고갯마루에 관한 것뿐이다.
교동마을 중심에는 홍주향교(충남도기념물 제135호, 1997년 12월 지정)가 자리하고 있다. 향교는 홍성고등학교를 앞에 두고 약간 비켜진 서편에 정남향으로 위치해 있다. 향교의 창건연대는 불명확하나 조선초기의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향교의 위치가 홍주 북쪽 3리에 있다고 해 현재의 위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쳤으나 500여 년간 이전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때 향교가 불탔다는 기록도 있어 향교가 불타고 1600년대 초반 향교가 재건되는 과정은 교동마을 사람들에게 큰 사건이었을 것이다. 교동마을의 역사는 향교와 함께했다고 할 수 있으니 적어도 500년 이상의 전통이 있는 마을이다. 현재 향교에서는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충․효․예 교실을 운영하고 있으며 마을부녀회 회원들을 대상으로는 한문학당을 운영하고 있다. 향교뿐만 아니라 가까운 홍성고등학교 뒤편으로는 혜학서원(惠學書院)이 자리 잡고 있기도 했다. 주민들은 서원 터를 홍성고등학교 뒤편으로 지목하고 있다.
▲ 교동마을회관
▲ 홍성읍 주민들이 많이 찾는 대교공원
향교와 함께 한 역사가 마을 곳곳에
홍주향교와 혜학서원이 있던 마을에는 홍성의 명문고 홍성고등학교가 들어서 홍성교육의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홍성고등학교는 지난해 전국농산어촌 우수고 1등급으로 선정되는 명실상부한 홍성의 명문고로 현재 2만1168명의 졸업생(2009년 기준)을 배출했고, 앞으로 전국 최고의 명문고로 발돋움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교동마을은 천주교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마을 안쪽에 예산천주교홍성공소(본당보다 작은 교회)가 있었다. 프랑스에서 온 외국인 신부들이 이곳에 거주하며 전쟁으로 피폐한 삶을 살던 홍성사람들을 위해 온갖 구호물품을 자져와 봉사활동을 벌였다. 그 시절에는 교동마을에는 천주교 신도가 많았다. 그러다 1960년대에 들어와 천주교홍성성당을 공소 옆에 새로 지어 홍성천주교로 승격되었고, 이후 고암리로 성당이 이전하면서 교동성당은 문을 닫았다.
또한 최근 조성된 교동마을 대교공원에는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를 비롯해 '명곡이산보선생유사비', '천주교참수터순교성지' 등이 새로 건립돼 교동마을의 유구한 역사를 들여다볼 수 있고, 생활체육시설이 갖추어져 인근 주민들이 자주 이용하고 있다.
▲ 주신의 이장
교동마을은 마을총회를 매년 2월 10일경 개최한다. 이날은 홍성농협 교육 겸 좌담회 날이기도 한데 연초에 여러 번의 행사를 치루기는 어려우므로 같은 날에 마을총회를 열어왔다. 총회 때에는 중요한 안건을 토의하고 예․결산을 주민에게 보고한다. 회의가 끝나면 부녀회에서는 음식을 준비해 동네사람 모두가 회식을 하고 이날 하루를 즐겁게 보낸다. 마을총회에서 관리하는 마을재산은 마을회관과 상여집이 있다. 처음 마을회관은 현 한마음예식장 옆 자리에 있었다. 당시 도로가 4차로로 확장되면서 회관도 새로 지었는데 옛 회관은 주민들이 직접 흙과 모래를 나르며 자재를 구해 건축했던 것이다. 그러나 개인 사유지였던 까닭에 어려움이 많아 1996년 향교 옆에 부지를 구입하고 새로 지었다. 2008년에는 낡고 허술해진 내부를 전체적으로 수리하고, 외부에 신식 화장실을 지어 새로운 모습이 되었다. 상여집은 10평 남짓한 작은 건물로 현재 소향리에 있다. 원래 교동에 있어야하나 상여집을 지을 자리가 없어 수십년전 옆 마을인 소향리에 둔 것이다.
교동마을은 전통마을이긴 하나 약간의 농경지를 제외하고는 주택들이 빽빽하게 들어서있어 마을주민 대부분 직장생활이나 자영업 등의 경제활동을 하고 있다. 따라서 농촌마을의 옛 전통은 다른 마을에 비해 더욱 빨리 사라졌다. 마을사람들이 모두 모이는 절기의 모임이나 잔치는 기억조차 희미할 정도이며 최근 애향회나 부녀회가 주관하는 회식 때에 풍장을 치며 하루를 노는 것이 교동사람들의 주요 행사이다.
교동마을에는 주신의(72) 이장을 중심으로 부녀회와 노인회 등이 원활하게 운영되고 있다. 부녀회는 이상익(51) 부녀회장과 회원들이 마을대소사를 비롯해 취미교실 등에 음식대접을 하며 마을의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는데 노력하고 있다.
교동마을에는 특별히 '애향회'라는 모임이 있다. 일종의 청년회라고 할 수 있으나 특이한 점은 현재 마을 그리고 홍성군에 거주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교동을 고향으로 둔 모든 사람들이 이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애향회는 보통 28세 이상 45세 이하 정도의 젊은 사람들이 참여하며 매년 5월에 경로행사를 열어 효를 실천하고 불우이웃돕기 운동, 의료봉사 등도 벌인다. 마을의 애경사에 적극적으로 관여해 후원도 아끼지 않아 교동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홍성뿐만 아니라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가장 활성화된 '자생모임체'라 하겠다. 애향회는 초기 홍성군의회 조승만(54) 의회사무국장의 노력으로 만들어져 활성화됐으며, 지난해까지 홍성군청 이승우(52) 환경보호과장이 애향회 회장을 맡아 더 적극적으로 발전시켜 왔다. 최근 이호석(49) 푸른정형외과 원장이 회장직을 맡아 애향회를 더욱 알찬 모임으로 만들 예정이라고 전한다.
▲ 사고 위험성이 높은 향교 옆 단선도로.
▲ 홍성고 진입로와 마을 입구. 이곳도 사고위험성이 높다.
주민들의 희망사항과 숙원 사업
교동마을은 하루에 400여대의 차량이 마을을 통과해 지나간다. 특히 출퇴근 시간에 덕산통 쪽 차량과 홍성읍 내법리 현광아파트 차량 등이 향교 옆 좁은 도로를 지나다보니 사고의 위험성이 매우 높다.
덕산통 홍성여고 부근 도로는 출퇴근 시간에 신호대기 등으로 복잡하고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지름길인 향교 옆의 폭이 좁은 단선도로를 이용하는 차량이 많다는 것. 그러다보니 사고 위험성이 높아 주민들이 불안해한다. 주신의 이장은 "홍성군에서 차량 통행이 많은 향교 옆 단선도로를 2차선으로 확포장해주기 바란다. 또 홍성고등학교에서 홍성여자중학교까지 동서도로 2차선을 조속히 내줬으면 한다"고 요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