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회 소를 타고 소를 찾는다
안녕하세요.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마음공부를 단계적으로 안내하는 마음나라 TV입니다. 반갑습니다. 나는 지난 회에 마음공부의 쉽고 간편한 길을 찾아 보았다. 지금 세상은 인지와 과학기술의 발달로 거의 모든 과제를 해결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마음의 문제에 있어서는 아직 마음의 구조나 뇌와의 관계는 밝혀가는 과정에 있고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사용하는 마음의 자유를 얻는 것은 매우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마음의 자유를 얻어가는 마음공부의 첫걸음을 마음 소 길들이기부터 시작하려 한다.
견성을 한 공부인은 마음공부를 쉽고 간편하게 할 수 있으나 견성하지 못한 공부인은 기초부터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견성하지 못하고 마음공부 하는 일은 밭에 잡초를 일일이 제거하거나 돌로 잡초를 눌러 놓는 것처럼 힘이 든다. 그렇지 않고 쉽고 간편하게 하려면 소태산 대종사의 말씀 받들어 법신불 일원상을 체 받는 신성 있는 공부인이 되어 심지가 요란하지도 않고 어리석지도 않고 그르지도 않게 하면 마치 제초제를 사용하거나 컴퓨터에서 삭제하는 것처럼 쉽다.
견성하지 못한 공부인은 마음을 공부해야 하는 데 성품은 모양도 소리도 냄새도 없으니 성품을 비주얼하게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잡아매어 둘 수도 없어서 처음 마음공부를 시작한 사람은 어떻게 하면 좋을 지 막막하기만 하다. 그래서 과거 선사들은 마음을 소에 비유 하여 공부길을 인도 하여 주었고 소태산 대종사도 한 제자가 오는 것을 보고 ‘그대가 오는 것을 보니 소를 타고 오는 데 그대는 소를 보았는가’ 하고 묻는다. 마음공부의 시작을 소 길들이는 것에 비유하면 먼저 소를 길들이려면 코를 뚫어 고삐를 만들어야 하듯이 마음에도 고삐를 만들기 위하여 마음 소를 발견해야 한다.
소태산 대종사는 부안 변산의 실상사 옆 석두암에 주재하며 장차 회상을 열 준비를 하고 있을 때 한 제자가 오는 것을 보고 어떤 사람 이야기를 예로 들면서 그대도 소를 타고 왔느냐고 묻는데 당시 이 상황을 정리한 법문의 제목이 “우습다, 소 탄 자야! 소를 찾아 길들여라.”이다.
이를 소개하면 소태산 대종사는 제자에게 “내가 일전 어느 곳을 가다가 어떤 사람이 소를 타고 가는 것을 보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 있더라.” 하며 이야기를 시작 하였다. 사람이 소를 타고 간다 하니 이 모습을 상상해보면 사람이 소의 등을 타고 가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다. 이 당시 제자는 김남천이라는 사람으로 『대종경』 수행품 등에 이름이 5차례 나온다. 소태산 대종사의 말을 더 들어 보면 “어떤 사람이 소를 타고 가는 데 사람의 권리대로 소를 끌지 못하고 소의 권리에 사람이 끌려가는데 그 소가 가시밭이나 구렁으로 들어가면 사람도 따라서 들어가고, 산으로 가면 산으로, 들로 가면 들로 끌려가서 자빠지고 엎어지니, 의복은 다 찢기고 살과 뼈가 부서지며 얼굴이 성한 데가 없어 차마 볼 수 없더라.” 하였다.
그리고 내가 그 광경을 보다가 나의 마음에 심히 불쌍하여 그 사람에게 “여보, 그 소를 단단히 잡아서 사방으로 가지 못하게 하고 꼭 길로만 몰아가면 저러한 봉변이 없을 것이 아니요.” 하고 말한 즉, 그 사람이 슬픈 목소리로 하는 말이 “여보시오, 그러하면 오죽이나 좋으리요 마는 그렇지 못하게 되니, 괴롭소. 내가 본래 무식하여 이 소를 길들이지 못하고 모든 권리를 전부 소에게 맡겼더니, 나는 점점 늙어서 약해지고 소는 차차 장성하여 강해지며 성질이 나빠지니, 아무리 하여도 이제는 제어할 능력은 없고 이 모양으로 죽는 날만 기다릴 밖에 별 도리가 없다.” 하며, 슬프게 통곡하였다. 공부인 여러분은 이 상황에 이해가 갑니까?
소태산 대종사 제자에게 “그런데 오늘 또 그대의 오는 것을 본즉 역시 소를 타고 오니, 그 소는 어느 곳에 두었는가?” “제가 방금 타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소의 형체가 어떻게 생겼는가?” “키는 한 길이요, 빛은 누른빛이요. 신은 삼으로 만든 신이며, 수염은 혹 검고 희게 났습니다.” 소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 이 사진처럼 사람이 소를 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제자 자신을 소에 비유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정확하게 말하면 나 자신 곧 몸과 마음을 소에 비유한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 계속하여 “그대가 소의 모양은 알았는데 그러면 그대의 소는 그대의 하자는 대로 하는가? 그대도 역시 소에게 끌려 다니게 되는가?” 하고 묻는다. “소가 저의 하자는 대로 합니다. 만약 상당(相當)한 일에 소가 게으름을 부리면 호령하여 아무쪼록 그 일을 하게하며, 부당한 일에 소가 동하려 하면 또한 호령하여 그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하였다.
“그대가 소를 이미 발견하였고 길들이는 법을 알았으며, 더욱이 소가 그대의 말을 잘 듣게 된다하니, 더욱 힘써서 백천만사를 자유자재 하도록 소의 길을 잘 들이라” 당부하고 “아, 우습다. 이 세상 소 탄 자들이여! 길들이는 자, 그 몇이나 될꼬」 하였다는 한탄 하였다.
공부인 여러분은 소태산 대종사의 말처럼 타고 다니는 소를 발견 하였나요? 오늘도 소를 잘 타고 다닙니까? 그리고 그 소가 말은 잘 듣는 지 궁금합니다. 이미 모두 이해하였겠지만 이 이야기의 의미는 소를 타고 다닌다는 것은 어떤 사람은 소의 등에 말을 탄 것처럼 타고 다니는 것을 생각할 수도 있으나 그렇지 않고 우리의 정신이 육신을 타고 다닌다는 의미로 소를 타고 다닌다 한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공부 프로그램을 시작하면서 마음 밭 계발하기를 먼저 시작하여 마음공부를 쉽고 간편하게 하는 방법을 알아보았다. 그렇게 쉽고 간편하여 어렵고 힘들지 않게 마음공부를 지속할 수 있는 상급과정을 이해하면 좋겠지만 그 쉬운 방법을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않고 어렵게 느껴진다면 이제 마음공부의 시작인 초급과정으로 ‘마음 소 길들이기’부터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먼저 소를 발견하여야 할 것인데 오늘 모두 소를 발견하였습니까? 여러분의 소는 어떻게 생겼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의 말을 잘 듣고 있습니까? 궁금합니다. 마음공부 하는 사람은 먼저 성품을 알고 성품을 보는 견성을 하여야 하는 데 성품은 형상이 없어서 볼 수 없으며 소리가 없어 들을 수 없으며 냄새도 없어 맡을 수도 없다. 이 소식을 안 사람은 일체의 현상과 모든 언행에서 마음을 볼 수 있으나 이 소식을 모르는 사람에게 마음을 보여 줄 수 없어서 마음공부 하는 공부인에게 스승의 방편으로 마음을 시각화하여 소에 비유하여 준 것이다.
그래서 마음 소가 되었다. 공부인을 소에 비유하면 그 소를 다시 몸과 마음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처음 이해를 돕기 위하여 이렇게 나누어 볼 뿐 공부를 하고 보면 몸과 마음은 어울리어 하나가 되어 마음 소와 몸 소를 구분하여 보지 않고 나 자신을 소에 비유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자 이제 소를 발견하였으니 잘 길들이기 위하여 출발해 봅시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다. 마음공부 잘 하여서 새 세상의 주인 됩시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