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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로 왕의 교만을 보면서
2020년 11월 15일 / 겔 28:1-10
겔 28:1-10 / [두로 왕의 교만에 대한 심판] 여호와께서 내게 또 말씀하셨다. 2) `너 사람아, 두로 왕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나 주 여호와가 하는 말이다. 너는 권세에 취하여 스스로 너 자신을 신이라고 말한다.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 네 섬에 자리잡은 신이라고 큰소리 친다. 그러나 아무리 큰소리를 쳐도 너는 신이 아닌 인간이다. 3) 네가 비록 현인 다니엘보다도 더 슬기로워 아무리 깊이 숨은 비밀도 풀지 못하는 게 없고 4) 네 지혜를 써서 무역을 꽃피워 창고마다 금과 은을 가득히 쌓을 정도로 부유하게 되었을지라도 5) 너는 이제 재물 때문에 정신을 잃고 교만해졌다. 6)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한다. 네가 교만해져서 너 자신을 신과 똑같이 여기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7) 내가 세계 만민 중에서 가장 잔인무도한 사람들을 데려다가 너를 멸망시키겠다. 그러면 네 모든 재물과 지혜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것이 되고 네 영화가 쓰레기더미에 묻힐 것이다. 8) 또 너를 죽은 사람들의 세계로 내치리니 너는 바다 한가운데에 세운 네 요새 안에서 원수들의 손에 잡혀 죽을 것이다. 9) 너를 죽이는 사람들이 달려들 때에 그래도 너는 여전히 자신을 신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너는 여느 보통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그들의 손에 붙잡혀 죽을 것이다. 10) 다른 나라 사람들의 손에 너는 더없이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할 것이다. 나 여호와가 말한 것이니 그대로 시행할 것이다. 나 주 여호와가 하는 말이다.'
두로는 ‘바위’란 뜻이다. 이스라엘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어서 성전 건축에 필요한 백향목을 비롯하여 많은 물품을 지원해 준 나라이다(왕상 5:1-2). 그러나 교만해진 그들을 향해 하나님은 ‘너는 사람이라’(2), 그리고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하였으니’, ‘이방인의 손에서 죽기를’이라고 하셨다.
너는 사람이라(1-2) 성경에서 '사람'이라는 단어는 ‘제한적인, 유한한, 죽을 운명의 존재’, ‘영원히 살 수는 없는,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 치명적인, 대단히 심각함’을 의미한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가 제한적이며 유한한 존재라는 것은 매우 당연한 표현인 듯하지만, 육신의 것들이 채워지면 마치 신(神)이라도 된 듯 착각하게 된다. 두로 사람들은 이를 뒷받침할 많은 것을 가졌다. 그래서 성경은 이들을 '세상에서 존귀한 자'(사 23:8)로 불렀고, 스가랴 선지자는 두로 사람들이 '은을 티끌같이, 금을 거리의 진흙같이 쌓았다'고 표현했다(슥 9:3). 에스겔서 27장 전체에는 그들의 무역 내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그 결론은 에스겔 27:34-36에서 '네가 영원히 다시 있지 못하리라'이다. .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하였으니(3-6) 이 말은 '하나님과 동등한 척'이란 의미로 자신을 지나치게 과신함에서 나온 처사이다. 인간이 어찌 하나님과 동등하거나 하나님인 척하여 대우를 받을 수 있겠는가? 느부갓네살 왕은 다니엘 4:30에서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라며 교만했다가 들짐승과 같이 초근목피로 일곱해 동안 하늘 이슬이 내리는 들판에서 사는 인생이 되었다. 그러나 회개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 복귀시켜 주셨다.
단 4:34-37 / [하나님을 찬양하는 왕] 왕이 말하였다. `일곱 해가 지났을 때 내가 하늘을 쳐다보았더니 그제야 제정신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한없이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원토록 살아 계시는 그분에게 영광을 돌렸다. 주께서는 이 세상을 영영토록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주님의 나라는 한도 끝도 없습니다. 35) 주께서는 땅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하찮게 내려다보시지요. 하늘에 날아다니는 독수리도 땅위에서 살아가는 인간들도 다 주님의 뜻대로 움직이시는 분. 그 누가 감히 주님의 뜻을 거스르랴! 주께서 하시는 일 그 누가 감히 이러실 수 있느냐고 입을 뗄 수 있으랴! 36) 비로소 내가 제정신이 들었을 때 내가 다스리던 이 제국의 영광과 위엄과 영예가 회복되었다. 나를 돕던 관료들과 귀족들도 모두 나를 환영하였고 내 왕권도 되찾았다. 나는 전에 누렸던 영예보다 더한 영예를 누릴 수 있었다. 37) 그래서 나 느부갓네살은 이제 하늘에 계신 임금님께 찬양을 드리고 영광을 돌리노라. 그분을 드높이 기리노라. 그분께서 하시는 일은 다 올바르시다. 그분은 젠체하며 거만하게 목을 곧추세우며 살아가는 자들도 내리 꺾으실 수 있는 분이다.'
반면에 헤롯은 그의 연설을 들은 백성들이 신의 소리라고 하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므로 벌레에게 먹혀 죽었다.
행 12:20-23 / [헤롯이 죽다] 헤롯이 가이사랴에 있는 동안 두로와 시돈의 대표들이 그를 만나러 왔다. 헤롯은 본래 이 두 도시 사람들을 매우 못마땅해 하고 있었으므로 이 대표들은 왕의 시종 블라스도를 설득하여 그를 내세워 헤롯에게 화평을 청하였다. 그 두 도시는 헤롯의 영토와 무역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형편이었다. 특히 식량은 헤롯이 다스리는 영토에서 사들여야만 하였다. 21) 알현을 허락할 날이 되자 헤롯은 용포를 입고 왕좌에 앉아 그들에게 연설을 하였다. 22) 연설이 끝나자 그들은 열렬한 박수를 보내며 `인간의 음성이 아니라 신의 음성입니다' 하고 소리쳤다. 23) 그러자 그 순간 주님의 천사가 헤롯을 내리쳐 헤롯은 곧 병이 들어 몸에 구더기가 가득 슬어서 죽었다.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가로채 사람들에게서 예배를 받는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할례 받지 않은 자의 죽음같이(7-10) 사람에게는 두 가지의 죽음이 있다.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위해 가치있게 살다가 죽는 것과 짐승과 같이 살다가 죽는 죽음이다. 전자는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얼마나 더 가치 있는 일에 쓰는가?’이고 후자는 그 가진 것의 크기나 양(量)을 최고라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당신의 삶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적용: 사람이 가지고 있는 죄의 본성을 기록해 보자. 영적 교만이 곧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하는 것은 무엇일까?(선한 척, 거룩한 척, 신령한 척)
행 12:20-23 / [헤롯이 죽다] 헤롯이 가이사랴에 있는 동안 두로와 시돈의 대표들이 그를 만나러 왔다. 헤롯은 본래 이 두 도시 사람들을 매우 못마땅해하고 있었으므로 이 대표들은 왕의 시종 블라스도를 설득하여 그를 내세워 헤롯에게 화평을 청하였다. 그 두 도시는 헤롯의 영토와 무역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형편이었다. 특히 식량은 헤롯이 다스리는 영토에서 사들여야만 하였다. 21) 알현을 허락할 날이 되자 헤롯은 용포를 입고 왕좌에 앉아 그들에게 연설을 하였다. 22) 연설이 끝나자 그들은 열렬한 박수를 보내며 `인간의 음성이 아니라 신의 음성입니다' 하고 소리쳤다. 23) 그러자 그 순간 주님의 천사가 헤롯을 내리쳐 헤롯은 곧 병이 들어 몸에 구더기가 가득 슬어서 죽었다.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가로채 사람들에게서 예배를 받는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수탉 두 마리가 암탉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마침내 승패가 결정됐다. 싸움에서 진 수탉은 깊은 상처를 입고 고개를 숙였다. 반면 이긴 수탉은 암탉을 차지하게 된 기쁨과 승리에 도취해 높은 담장 위에 올라가 큰소리를 지르며 자랑했다. 그때 독수리 한 마리가 어디선가 날아와 눈 깜짝할 사이에 담장 위의 수탉을 낚아채 가버렸다. 결국, 싸움에서 진 수탉이 암탉을 차지하게 되었다. 한치 앞도 모르는 인생에서 영원한 승자도, 패자도 없다. 따라서 절대로 자만하지 마라. 높은 자리에 있을수록 조심해야 하고 또한 겸손해야 한다. 그때가 가장 위험한 때이다. -좋은 글 중에서-
정남준의 ‘열린 생각 열린 공간’이란 책에 이런 시가 있다.
어린아이의 미소가 아름다운 건 그대 안에 동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해맑은 아침햇살이 반가운 건 그대 안에 평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듣기 좋은 건 그대 안에 여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루하루가 늘 감사한 건 그대 안에 겸손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은혜를 모르기 때문에 감사할 줄 모른다. 겸손한 사람이 은혜를 알기에 감사할 줄 안다. W. H. Beecher 씨는 ‘교만은 감사를 죽여 버린다. 교만한 자는 결코 자기가 소유할 만큼 소유했다고 생각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렇듯 겸손과 감사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문제는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싫어하시고 반드시 꺾으신다는 사실이다. 아름답고 성숙한 인생은 감사하는 인생이고, 범사에 감사하는 신앙인이 될 때 정말 행복한 사람이 된다. 고로 우리는 겸손과 감사로 살아야 하는 인생이다.
본문에 나오는 두로는 에스겔서 기록 당시, 해상무역으로 부요한 나라였다. 세계사 속에 페니키아(성경/ 베니게)라는 도시로 유명한 곳이 바로 두로다. 현재 레바논에 티레(Tyre, 티르)가 두로와 같은 지명이다. 처음에는 팔레스타인 본토와 떨어져 맞은편 섬에 두로 성읍이 있었으나 오랜 세월동안 토사가 쌓여 지금의 반도로 바뀌었다. 본래 이 둘을 합해서 두로라고 했으나 두로의 원래 중심 성읍은 섬에 있었다. 그렇기에 ‘네가 바다 한가운데 신의 자리에 앉아 있다고 하지만’(2절)이라고 말한 것이다.
두로는 메소포타미아, 아라비아, 소아시아, 이집트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이자 중심 무역항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지중해를 주름잡는 해상도시로 자리 잡았다. 백향목(삼나무)과 소나무, 아마포, 자수제품, 채색 도기, 소금, 등을 수출했고, 상아세공과 목각장식이 특산품이었고, 금세공사와 금속세공품도 널리 알려졌으며, 중계 무역에 탁월하여 경제적인 번영과 문화의 꽃을 피운 역사적 상업도시이다. 두로인들은 해상무역을 통해 부요해지자, 국방을 강화하고 많은 식민지를 거느렸다. 그런 두로는 농사하기에는 적합한 땅은 아니었기에 늘 양식을 이스라엘에서 수입해서 살았다.(행 12:20) 다윗 왕 시절에 두로 왕 히람은 백향목과 목수와 석공들을 보내 다윗 왕궁을 짓는 데 협조했고(삼하 5:11), 솔로몬 왕 때에는 레바논 산에서 벌채한 백향목을 뗏목으로 지중해 남쪽에 있는 욥바로 보내 성전 건축을 도왔다(왕상 5:10).
두로 섬에 지어진 성채는 거대한 배를 연상하게 했다. 약 30만평 넓이의 거대한 배였다. 그 배는 최고급 자재를 사용하여 지은 것으로 겔 27:3-7에서 묘사된다.
겔 27:3-7 / 바다로 드나드는 통로를 지배하며 수많은 민족들과 해상 교역을 벌이고 있는 도성 두로에게 내 이름으로 이렇게 조가를 불러 주어라. `두로야, 너는 아름다운 도성이라고 떵떵거려 왔다. 4) 너는 바다에 둘러싸인 한 척의 배였다. 너를 건설한 기술자들은 모두가 예술가들이어서 너를 진귀한 조각품으로 만들어 놓았다. 5) 스닐산에서 전나무를 가져다가 네 몸통의 판자를 튼튼히 맞추어 놓았다. 저 높은 레바논산에서 송백을 베어다가 네 돛대로 세워 놓았다. 6) 바산에 있는 참나무 가운데에서도 가장 높은 것을 골라 네 노를 만들고 깃딤 섬에서 회양목을 가져다가 네 갑판을 만들었다. 7) 애굽에서 수놓은 세마포를 가져다가 네 돛을 만들어, 멀리서도 그 색깔로 너를 알아보게 하고 엘리사 섬에서 가져온 자주색과 진홍색 비단으로 네 선실의 차일을 만들었다.
한 마디로 최고급 자재로 배의 판재와 노와 돛을 만들었다는 얘기다. 마치 타이타닉 호를 연상하게 하는 표현들이다.
이어서 선장과 선원 그리고 병사들까지 최고의 사람들로 채워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두로의 중개무역 나라들과 물품에 대해 죽 나열하고 있다. 중개무역을 하는 나라가 인근의 모든 나라이고 그들이 취급하는 물건은 매우 다양하고 풍성하다. 두로의 국토는 작았지만 그들이 누리는 영화가 매우 컸던 이유는 지혜와 총명과 슬기로운 백성들이었기 때문이다(3-5a).
이렇게 장황하게 두로를 설명하는 이유는 이런 두로가 멸망당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 흔적도 별로 남지 않고 그의 후손이라고 자처하는 레바논은 국기에 백향목을 그려놓았지만, 그 유명한 백향목도 그 땅에서 거의 사라지고 없어져 가고 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옛 영화가 왜 다 사라지고 없어졌을까? 그 이유를 살펴보며 교훈을 얻자.
1. 두로의 멸망은 교만이 원인이었다.
지중해를 중심한 강대국들의 교역의 중심이며 교통의 요충지로 주변 나라들의 선망의 대상이 된 두로의 번영은 주변 강대국들의 침략 야욕을 부추겼다. 그러나 성경은 두로의 멸망의 근본적인 원인이 그의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음을 지적한다(1-8).
두로는 무역을 잘해서 돈 좀 벌었다고 마음이 교만해지더니 자신을 신이라고 여기며 우쭐대면서 바다 한가운데 신의 자리에 앉았다고 자부했다. 그들이 슬기로운 것은 맞다. 하나님께서도 다니엘보다 슬기롭다고 인정하셨다. 지혜와 총명으로 재산을 모으고 큰 지혜로 무역을 해서 금과 은을 쌓아 놓았던 것이 맞다. 그런데 그만 그 재산 때문에 교만해진 죄악이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오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이런 영화로운 도시, 두로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7-8).
그러면서 멸망당하는 순간에도 교만할 수 있겠느냐고 하나님께서 짓궂게 질문하셨다(9-10).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다! 사람들의 손에 찔려서 죽는 게 신이 될 수 없다.
이 에스겔 선지자의 예언대로 B. C. 586년 바벨론이 유다를 멸망시킨 때 함께 비참한 종말을 맞게 되고 무역의 왕자 자리를 시돈에게 내주었다. 이후 잠시 회복되지만 훗날 헬라제국의 알렉산더 대왕에게 공격당한다. 이때 알렉산더는 길이 800m, 폭 60m의 방파제를 쌓아 7개월 동안 공격한 끝에 난공불락의 요새 두로를 함락시켰고, 2천여 명 지도자의 목을 자르고, 주민 3만 명을 노예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이후에 로마제국에 의해 침략 당한다. 히람 왕이 세운 무역의 도시 두로 그러나 오늘날 부의 상징이었던 옛 항구터는 사라지고 로마시대의 흔적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두로의 히람 왕이 B. C. 10세기에 축조한 항구의 방파제가 수면 밑 15m 지점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역사가 Philip Myers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알렉산더 대제의 공격은 두로가 멸망되기까지 계속되었다. 이 공격 후 폐허가 된 두로는 조금 그 상태를 회복할 수 있었으나 다시는 그 전과 같은 나라로 재건되지는 못했다. 한 때 크게 번창하였던 그 땅은 이제 바위의 표면처럼 썰렁하게 되었고 지금과 같이 어부들이 그물을 펼쳐서 말리는 장소가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돈 좀 잘 벌면 자신이 마치 신이라도 된 듯이 착각한다. 말 타고, 비싼 차를 타고,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높은 빌딩 짓고, 고층으로 올라가면 갈수록 교만해져서 자신을 신처럼 생각한다. 많이 가진 자들이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기도 하지만, 주변에 갖지 못한 자들조차 그렇게 생각하면서 돈 가진 자 주위에 몰려들어 아첨한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떠난 모습을 연상케 한다.
■ 1972년 남 진의 ‘임과 함께’ 가사가 주는 교훈도 참고가 된다.
푸른 초원 위에 그림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백년 살고 싶어
봄이면 씨앗 뿌려 여름이면 꽃이 피네 가을이면 풍년되어 겨울이면 행복하네
멋쟁이 높은 빌딩 으스대지만 유행따라 사는 것도 제멋이지만
반딧불 초가집도 님과 함께면 나는 좋아 나는 좋아 님과 함께면 님과 함께 같이 산다면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백년 살고 싶어
멋쟁이 높은 빌딩 으스대지만 유행따라 사는 것도 제멋이지만 반딧불 초가집도 님과 함께면
나는 좋아 나는 좋아 님과 함께 같이 산다면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백년 살고 싶어 한백년 살고 싶어
얼마 전 우리나라 유행어 중에 뭔가 잘하는 사람을 ~신이라고 표현하곤 한다. 연예인들 이름 앞에 갓이란 단어를 붙여서 대세를 표현하는 언어로 쓰고 있다. 개그와 MC로 스타덤에 오른 유재석 씨를 유느님이라고 부른다. 운동 좀 잘하면 또 신, 황제, 갓~ 이런 단어를 붙인다. 호나우도, 마라도나. 메시, 호날두 같은 선수를 축구의 신이라고 부르고, 펠레를 축구의 황제라고 부른다. 야구의 홈런타자 출신 양준혁 씨를 양신이라 부르고, 마이클 조던이나 허재 감독을 농구의 황제라 부른다.
어느 정신병원에 환자가 들어왔는데, 그는 늘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하고 외쳐대자 같은 병동 안에 있는 다른 환자들이 매일 그 소리를 듣는 게 지겨워졌다. 그런데 어느 날 다른 방에 가서도 또 그 말을 외치니까, 그 방의 환자가 ‘나는 너 같은 아들을 둔 일이 없다!’고 하였다.
역사를 보게 되면, 강대국들의 왕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고 세계를 정복하고 나면 꼭 따라오는 게 자신을 신격화하는 것이다. 바벨론이나 페르시아의 왕들이나 이집트의 바로 왕이나 로마의 시저 황제나 다 자신을 신격화하고서 지배하던 나라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을 신처럼 숭배하게 만들었다. 죄의 본능이 다름 아닌 바로 하나님 자리에 앉으려는 교만이다. 그런 생각은 인간을 교만의 극치로 몰아넣고 착각하게 만든다. 그런 교만에서부터 강포와 폭력이 나오고 살인과 강간과 무자비한 권력 행사가 나오기 마련이다.
겔 28:16a / 무역이 번창하자 너는 오히려 비뚤어져서 백성을 탄압하고 무고한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여 죄를 쌓아 갔다.
낮은 곳으로 흐르는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 교만한 자와 강포한 자를 반드시 꺾으시고 심판하신다.
겔 28:16b-17 / … 그래서 내가 너를 그 거룩한 신들의 산에서 쫓아냈다. 너를 보호하던 그룹 천사가 불붙은 돌들 사이에서 너를 멸망으로 몰아넣었다. 17) 너는 아름다움에 취해 교만해졌고 허영심에 빠져 네 귀중한 지혜를 내버렸으며 재물들 때문에 지혜를 잃고 바보가 되어 버렸으므로 내가 너를 땅바닥으로 내쳐서 모든 왕들에게 조롱을 받도록 내버렸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반드시 심판하신다. 그러니 우리에게서 교만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
약 4:6-7 /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악한 욕망에 대항할 힘을 주십니다. 그러나 성경에 말씀한 대로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사람에게는 힘을 주시지만 교만한 자는 물리치십니다. 7)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겸손해지고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그러면 악마가 여러분을 떠나 달아날 것입니다.
2.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사용하신다.
성경에 의하면 모든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난다. 그러니 어떤 권세는 정치권력과 술수를 이용해서 쟁취한 것일지라도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그를 세우셨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렇게 권세를 잡은 자는 하나님 앞에 겸손할 줄 알아야 한다. 겸손하게 통치하는 일을 하나님 대신 해야 한다. 그래서 선한 자를 포상하고 악한 자를 징벌하는 권선징악을 잘해야 한다. 그걸 거꾸로 하면 안 된다. 교만하여 거꾸로 행사할 때 하나님은 그를 치신다. 그게 꼭 일국의 권세에게만 해당되겠는가? 오늘 우리에게는 아니겠는가!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교만하면 사용하기를 중단하시고 겸손할 때까지 내리치신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교만한 걸 못 견뎌하신다.
잠 16:5 / 남을 우습게 여기며 저 잘난 멋에 사는 자들은 여호와께서 역겨워하시나니, 스스로 벌인 짓은 그대로 되받는다.
‘역겨워한다’고까지 말씀하셨다. 그래서 징계의 채찍을 드신다. 겸손하게 만든 다음에야 사용하신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의 삶에도 시험이 있고 아픔이 있다. 그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사랑한다면서 무엇 때문에 그런 시련을 주실까?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그 중의 유력한 하나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겸손하게 만드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고난을 만나면 속으로 ‘하나님이 아직 나를 더 만지실 부분이 있나 보네.’하며 자중해야한다.
하나님께서 제일 좋아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겸손하며 순종하는 것이고, 제일 싫어하는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며 불순종하는 교만이다. 인간의 부모도 자식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려고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우리로 하여금 교만에서 멀어지고 겸손으로 가게 만들 수 있다면 어떤 수단이라도 쓰신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려는 시도는 어찌 보면 우리에게 시험과 아픔으로 다가온다는 이야기이다. 사도 바울의 육체의 가시는 ‘교만하지 않게 하려’는 하나님의 장치였다(고후 12:7). 건강 외에 무슨 장치들이 있을까? 물질, 사랑하는 가족, 인간관계 등 그 어떤 것이라도 겸손하게 하는 여러 방법을 사용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적극적으로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
이에 사도 바울이 얼마나 겸손해지려고 노력했는지에 대하여 보며 우리도 그렇게 하자.
빌 3:4-10 / 그러나 만일 스스로 구원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기에 충분한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바로 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적인 면만을 본다면 확실히 나도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5) 나는 순수한 유대인 혈통을 이어받아 오랜 전통의 베냐민 가문에 태어났으며, 난 지 여드레 만에 유대인의 표지를 받기 위해 할례의식을 치렀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어디 한군데 흠잡을 데 없는 진짜 유대인입니다. 게다가 유대교의 모든 율법과 관습을 지키기를 가장 엄격하게 요구하는 바리새파 회원이었습니다. 6) 얼마나 그악스러웠던지 교회를 모조리 핍박했고 유대교의 모든 규칙과 규정을 빠짐없이 지키려 온 힘을 쏟았습니다. 7) 그러나 한때 대단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던 이런 것들을 지금에 와서는 모조리 내던졌습니다.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그분에게만 소망을 두기 위해서입니다. 8) 그렇습니다. 나의 주님 그리스도 예수를 알게 된 것이 너무도 존귀해서 이것과 비교하면 다른 것은 다 무가치하게 여겨질 뿐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외에는 다 쓰레기처럼 여기고 모두 내버렸습니다.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9) 보다 더 의로운 사람이 되려고 하거나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으려는 생각을 집어치우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는 것은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10) 나는 지금 모든 것을 다 내던졌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다만 참으로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전능한 능력을 체험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당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아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의 간증 그것도 순교를 앞두면서 빌립보 교회를 향해 서술한 내용들 그 단어 하나하나를 뜯어보면 무어라고 표현조차 할 수 없는 전율을 느끼게 된다. 자기 자신을 그렇게까지 자랑했던 높은 교만 꼭대기에서 스스로 땅바닥에 내려 와 하나님 앞에 엎드리며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에 대하여 빠짐없이 기술한 것이다. 사도행전 9장에서 예수님을 만난 청년 사울이 순교를 앞둔 노년에 그렇게까지 자기를 부인한 것을 보면 말로만의 겸손이 아닌 또는 피부만으로 경험한 것이 아닌 몸부림치며 그러한 교만에서 즉 사망의 몸(롬 7:23-25)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 옛날 임금이 타는 당나귀가 한 마리가 있었다. 임금이 당나귀를 타고 나라를 한 바퀴 순찰하면 온 국민들이 나와서 왕에게 환호하고 박수갈채를 보냈다. 임금을 등에 태운 나귀는 왕을 태운 역할에 걸맞게 온갖 아름다운 장식을 해서 멋지게 보였다. 국민들은 왕과 함께 그 나귀를 향해서도 갈채와 찬사를 보냈다. 이러한 갈채와 환호에 고무된 나귀는 어느 날 왕을 땅에다 내동댕이쳤다. 나귀는 왕이 없으면 그 모든 환호와 갈채를 자신이 다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한 것이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귀에게 참수형이 내려지고 말았다.
이 어리석은 나귀처럼 우리도 그럴 때가 있다. 영광을 받을 때 마치 내가 한 것처럼 그것을 차지하려고 우쭐해서 뻐긴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영광은 우리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누리는 것들이다. 영광을 가로채지 말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영광을 돌리기 바란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벧전 5:5-6 / 청년들이여, 여러분은 장로들의 지도를 따르십시오. 그리고 모두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사람에게는 은총을 베푸시지만 교만한 자에게는 채찍을 내리실 것입니다. 6)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 아래 스스로 겸손해진다면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3. 겸손한 자는 감사와 기도를 하며 산다.
■ 어떤 시골에 사는 크리스천 농부가 대도시를 방문하여, 점심을 먹기 위해 근처 식당으로 들어갔다. 농부는 십대로 보이는 불량배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옆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음식이 나오자 그는 조용히 머리를 숙이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그러자 옆 테이블에 있던 불량배 중 하나가 큰 소리로 물었다. “어이, 농부 아저씨! 촌에서는 식사할 때 다들 기도를 하나보지?” 이때 늙은 농부가 대답했다. “다들 하는 건 아냐! 돼지들은 기도를 하지 않고 식사를 하지.” 세끼 식사기도에서부터 감사가 시작된다.
겸손한 자들에게 따르는 요소들이 무엇이 있을까? 감사가 따르고, 하나님을 의존하는 기도가 따른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거나 믿지 않는 죄처럼 큰 교만의 죄가 없다. 날 낳으신 부모를 무시하거나 거역하는 죄처럼 배은망덕한 죄가 어디 있겠나! 크리소스톰이란 초대교회 교부는 ‘사람의 근본적 죄는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이다.’라고 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라. 아담과 하와가 왜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굳이 따먹고 모든 인류를 죄인으로 만들었을까? 그건 하나님이 베푸신 에덴동산과 아름다운 창조세계와 동식물과 풍부하게 먹을 수 있는 과일과 벌거벗고 있으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의와 자유와 행복을 만족하지 못하고 불평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마귀가 ‘하나님이 정말로 너희에게,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느냐?’(창 3:1)하고 질문할 때, 아담과 하와의 마음에는 불평이 생겼다. ‘아! 그렇구나! 우리에게 먹지 말라 금지하신 것도 있구나. 왜 금지하셨지?’ 그때 마귀가 ‘그 금지하신 선악과를 따 먹어봐! 그러면 네가 하나님처럼 지혜롭게 될 거야! 선악을 알게 될 거야!’ 유혹하자 원망이 생기고, 동시에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교만한 마음이 일어났다. 그런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푹 빠져버리고 말았다. 이리하여 믿음과 사랑과 감사를 잃은 아담과 하와는 세상적으로 눈이 어두워져서 하나님의 지배없이 독립해서 ‘내가 에덴동산의 왕으로 살아야겠다’는 교만함에 사로잡혀 결국 불순종의 죄에 빠지게 되었다. 그 결과 인류에게 죽음이 찾아오고 영원한 지옥의 형벌에 처해지고 말았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다. 창조주는 창조주이시고, 피조물은 피조물이다. 아무리 피조물이 잘나도 창조주는 될 수 없는 노릇이다. 우리가 아무리 지혜가 있고 돈을 많이 벌고 세상을 주름잡는다 할지라도 피조물에 불과한 것이다. 모두가 다 한 번 죽는 인생, 피조물, 아니 흙과 먼지에 불과한 인생이다. 하나님이 위로부터 주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소유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아무 것도 걸치지 않고 맨몸으로 이 땅에 태어난 우리들 아닌가? 다 주셨기 때문에 내 것인 양 입고 차고 걸치고 살고 있는 거다. 다 주셨기에 누리고 쓰고 먹고 사용하고 즐기고 하는 것이다. 어떤 순간에도 우리는 이걸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럴 때 겸손하게 되고 감사하게 된다. 하나님 없이는 내가 존재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럴 때 ‘만물이 그에게서 나고, 그로 말미암아 있고, 그를 위하여 있습니다.’(롬 11:36) 이렇게 고백하며 기도하게 된다. 이럴 때 하나님에게 의존적 존재로 살아가게 된다. 그럴 때 인간의 참된 행복이 찾아오게 된다. 부모를 거부하고 사는 자식처럼 황폐한 인생이 어디 있겠나? 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부인하며 사는 인생처럼 황량한 인생은 없다. 마치 총 맞은 것처럼 가슴이 뻥 뚫린 채로 사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실 때에 야고보서 3:13-18을 묵상하자.
약 3:13-18 / [하늘에서 오는 지혜] 만일 여러분이 꾸준히 선행을 베풀면서도 자신의 그 선행을 자랑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참으로 지혜 있는 사람입니다. 14) 그러나 마음속에는 강렬한 질투심과 이기심을 품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만 지혜로운 체하거나 착한 사람인 양 행세를 한다면 그것은 가장 악한 거짓말이 되는 것입니다. 15) 질투와 이기심은 하나님께 받은 지혜가 아닙니다. 그런 것은 땅에 속한 것이요, 악마의 부추김입니다. 16) 질투나 이기적인 욕심이 들끓는 곳은 무질서하고 온갖 악한 것들이 범람합니다. 17) 그러나 하늘에서 오는 지혜는 순결하고 온유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평화를 사랑하고 예의가 바릅니다. 남의 의견을 존중하고 남에게 기꺼이 양보합니다. 자비심이 강하고 선한 일을 즐겨합니다. 진심이 들어 있고 솔직하며 성실합니다. 18)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평화의 씨앗을 심어서 선행의 열매를 거두는 것입니다.
■ 만인의 연인이요 세계 남성의 우상처럼 군림했던 미국의 여배우 마릴린 먼로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한 여성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나는 젊고 아름답습니다. 나는 돈도 많고 사랑에 굶주리지도 않았습니다. 수백 통의 팬레터도 매일 받습니다. 누구보다도 건강하고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미래에도 그렇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런데 웬일일까요? 나는 너무나도 공허하고 불행합니다. 뚜렷한 이유를 찾을 수는 없지만 나는 불행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결국 마릴린 먼로는 1962년 어느 날 밤 ‘나의 인생은 파장하여 문 닫는 해수욕장과 같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하나님 없는 인생은 세상의 모든 행복의 조건들을 다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그것은 신기루에 불과하다.
내가 누리는 것 모두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셨기에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내 생명도, 내 건강도, 내 가정도, 내 물질도,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다윗왕은 성전건축을 위해 백성들과 함께 최선을 것을 드린 후에 이렇게 고백했다.
대상 29:11-14 / 여호와여, 위대함과 강함과 존귀함과 높음과 위엄은 모두 주님의 것입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 주님의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통치권과 주권도 주님의 것입니다! 12) 이 세상의 재물과 영광이 모두 주께로부터 말미암으니 주께서 원하시는 대로 사람을 부자가 되게도 하시고, 권세를 얻게도 하십니다. 주께서는 이 모든 것의 주인이시요, 온 세계의 주인이십니다. 13)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 감사를 드리며, 주님의 영화로우신 이름을 찬양합니다! 14) 여호와여, 우리가 이토록 즐겁게 예물을 바칠 힘이 어디서 나왔겠습니까? 저나 저의 백성들에게는 그런 힘이 없습니다! 그 재산이 정말 우리의 것이었으면, 우리가 이토록 기쁘게 바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께서 주신 것을 다시 주께 드렸을 뿐입니다.
영적 세계에서 교만은 주님이 주인이 아니라 여전히 내가 주인으로 사는 데서 나타난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마음과 생각에서 내가 아닌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교만이 기도하지 않는 모습으로 종종 나타난다. 기도하지 않고도 내 힘으로 살 수 있다는 생각이다. 기도하지 않고도 내 능력과 지혜로 사역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점점 사단의 계략에 깊이 빠져들어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짓더니 점점 그런 모습이 커지다가 나중에는 사망에 이르게 된다. 그런 사람은 지족하는 마음에서 떠나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있어도 돈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상태가 되어버리고 만다. 에베소교회처럼 첫사랑을 잃은 결과라고도 할 수 있겠다(계 2:5).
또 영적 권위자에게 불순종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능력의 손 아래로 자기를 낮추십시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벧전 5:6) 그래서 영적 지도자는 영혼들을 섬겨야 하고, 교인들은 지도자에게, 목사에게 순종해야 한다. 겸손과 순종 그리고 교만과 불순종은 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귀영화를 누리던 두로의 멸망 원인은 교만이었다. 우리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풀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 겸손한 사람이 되자.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신다. 겸손한 자만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하며 살 수 있다. 우리 모두 겸손하게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하면서 후반기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열매를 누리며 살자. 아멘.
결 론
미국 장로교 최고의 신학자이며, 유명한 부흥사인 조나단 에드워즈(1703-1758)는 노덤턴 교회의 담임 목사가 된 후, 23년간 사역하면서 ‘대각성(Great Awakening)’이라는 신앙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그런 그가 교회의 배척을 받게 되어 47세인 1750년에 목사직을 사임했다. 새로운 사역지를 구하지 못한 그는 그 교회에 남았다. 그의 부인이 뜨개질을 하면서 열 명의 자녀들을 근근히 키웠다. 하지만 그는 전혀 불평하지 않았다. 그 교회가 다시 도와 달라고 했을 때에는 또 겸손한 자세로 도왔다. 그 후 에드워즈 목사는 스톡브리지라는 고산 마을의 작은 인디언 교회를 섬기게 되었다. 그곳에서 7년간 목회를 하는 동안에도 에드워즈 목사는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다. 1757년, 미국의 유명한 프린스턴 대학의 총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는데, 그는 여전히 겸손했다. 그는 지위가 높았을 때에도 겸손했고, 낮아진 때에도 겸손하여, 기독교계에서 겸손한 인물로 유명해졌다.
그렇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세상에 흘려보내기 위해서는 겸손이라는 그릇이 필요하다. 창세기 3장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간 세상에는 죄가 만연했지만, 하나님의 은혜 또한 세상에 흘러 넘쳤다. 하나님의 은혜는 크고 넓어서 마치 바다와도 같지만 겸손의 그릇에 담아야만 이웃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자신을 낮추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겸손의 그릇에 담아 모두에게 흘러가도록 한다.
기독교사에서 성인이라고 불리는 어거스틴에게 어떤 사람이 찾아가서 질문했다. “신앙생활에서 첫째로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겸손입니다.” “둘째는 무엇입니까?” “겸손입니다.” “그럼 셋째는 무엇입니까?” “셋째도 겸손입니다.” 어거스틴은 “천사를 마귀로 만든 것은 교만이며 인간을 천사로 만든 것은 겸손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겸손은 모든 미덕의 바구니”라고도 했다. 사랑도, 자비도, 충성도, 온유도, 절제도, 인내도, 양선도 겸손이라는 바구니에 들어갈 때 아름다운 것이다. 그래서 겸손은 모든 덕행의 기초가 되고 겸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렇다면 겸손이란 무엇입니까? 겸손이란 한 마디로 자기자신을 낮추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 앞에서, 특히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높이는 것을 뜻한다. 겸손은 비굴함도 자기학대도 아니다. 또한 겸손은 자기를 낮추는 듯하면서 실은 자기를 높이는 위선도 아니다. 겸손은 진정으로 상대를 높이고, 자기를 낮추는 것을 말한다.
■ 전북 김제시 금산리에는 한국교회사에서 중요한 자료인 금산교회가 있다. 이 교회는 우선 ‘기역자(ㄱ) 형’건물로 유명하다. 남녀의 자리를 구분하기 위해 예배당을 기역자로 지었는데 이것이 지금까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 교회의 초창기에 유명한 일화가 있다. 1908년, 미국 남장로회 전주 선교부의 데이트(Lews Boyd Tate) 선교사가 이곳에 와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때 그 마을의 유지요, 재력가요, 한학자로 이름을 떨치던 조덕삼과 그의 마부로 머슴 생활을 하던 경상도 출신 이자익이 함께 예수를 믿게 되었다. 주인과 머슴이 함께 교회생활을 했던 것이다. 교회가 성장해서 장로를 선출했을 때 머슴 이자익은 피택이 됐는데, 양반 조덕삼은 떨어졌다. 주인 입장에서 창피하고 질투심이 날 만도 한데, 조덕삼은 진심으로 기뼈하고 이자익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다. 이듬해 조덕삼 역시 장로가 되었다. 여전히 조덕삼은 이자익을 선임 장로로 받들고 교회를 잘 섬겼다. 조덕삼은 이자익이 신학교에 들어가 신학 공부를 하고 목사가 되기까지 물질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훗날 이자익은 목사가 되었고 교단의 총회장이 되었다. 그뿐 아니라, 한 번도 선출되기 어려운 총회장을 13회, 33회, 34회 세 번이나 역임했다. 조덕삼은 이자익을 늘 겸손하게 섬겼다. 조덕삼의 손자가 바로 국회부의장을 지낸 바 있는 조세형 장로이다. 조덕삼 장로처럼 진심으로 남을 인정해 주고, 높여 주고, 자신을 바로 깨달아 낮출 줄 아는 것, 이것이 겸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 스스로는 쉽사리 겸손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스스로 겸손하다는 것은 자기 의의 또 다른 모습일 수 있다. 고난과 고통을 겪으면서 깨달음을 통해 겸손해질 수 있지만, 인정받고 싶고, 높아지고 싶고, 자기 유익을 추구하고 싶은 자기중심성은 늘 마음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첫 아담의 후손이고 존재의 뿌리가 바로 아담이어서, 우리 안에는 아담의 성품이 담겨져 있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마음, 남들보다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 즉 교만은 아담의 성품 가운데 하나이다. 내가 선택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듯, 교만 역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면에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교만은 계속 자란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의 후손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 존재의 뿌리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둘째 아담의 성품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훈련을 통해서 둘째 아담의 성품을 빚어가야 한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가르쳐 주셨다. 그렇게 해야 마음의 진정한 안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겸손을 배워서 우리의 성품 안에 겸손을 채우자. 그러니까 예수님을 우리의 롤모델로 삼아서 배우되, 특히 예수님의 겸손 즉 십자가를 지기까지 하시는 겸손과 온유를 배우자는 것이다.
이 겸손을 배우려면,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안 된다. 성령님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겸손해야겠다, 낮아져야겠다’ 하면서도, 어느 순간 남과 비교하고 남보다 높아지려는 교만이 마음에 저절로 생기는가 하면, 남보다 못하다고 여겨질 때에는 저절로 자신이 초라해 보이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겸손은 말만으로는 드러나지 않는다.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신앙이 성숙한 만큼 겸손도 성숙해진다.
예수님은 근본이 하나님이시나 그 본체를 인간의 차원으로, 게다가 사람들이 끔찍하게 싫어하는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낮아지셨다. 예수님 자체가 겸손이셨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것을 이 땅에 담아내는 그릇은 바로 겸손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모시고 나아갈 때 비로소 겸손할 수 있다. 그래서 성령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님을 본받고, 진정한 자유를 가져다주는 진리를 깨닫고, 늘 겸손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며, 천국까지 나아가기를 바란다.
★ 참고로 율법적 겸손과 복음적 겸손에 대한 에드워지의 글이다.
율법적 겸손과 복음적 겸손(조나단 에드워즈)
율법적 겸손은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 아직 은혜로운 정서가 없을 때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복음적 겸손은 오직 성도에게만 고유한 것이다. 전자는 자연적 원리들을 돕는, 특히 자연 양심을 돕는 성령의 일반적 영향에서 비롯된다. 후자는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원리들을 심고 적용하는 성령의 특별한 영향에서 나오는 것이다.
율법적 겸손 아래서는 인간이 제압당해 강제로 땅바닥까지 낮아지게 된다. 복음적 겸손 아래에서 인간은 달콤하게 굴복하게 된다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 그리고 기꺼이 하나님의 발 앞에 부복한다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율법적 겸손은 복음적 겸손으로 나아가기 위한 수단으로 유용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복음적 겸손이 없는 자는 참 신앙이 없는 자다. 신령한 지식이 있으면 틀림없이 의지가 변화된다. 즉, 성품 내지 삶의 변화가 뒤따른다. 참 은혜를 받은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다. 그에 의하면, 겸손은 “진정한 기독교의 본질적 요소들 중 하나”이다. 복음적 겸손은 기독교인의 커다란 임무인 자기 부인의 주된 부분이다. 기독교적 자기 부인이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하나는 세상적 성향을 부인하는 것이다. 즉, 명예, 권력, 부, 쾌락, 정욕 등 세상적 목표들에 대한 욕심 내지 끌림을 버리는 것이다. 은자들이나 은둔자들이 버린 것이 바로 이 동물적, 마귀적 정욕이었다. 다른 하나는 타고난 자고함을 부인하고 자기 자신의 영광을 버림으로 자신을 비우는 것이다. 이 부분은 가장 위대하면서 어려운 부분이라고 지적한다.
일반인들은 사막이나 광야에서 수도 생활을 하던 고대의 은자들의 경건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그들의 겸손이 거짓된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은자들이 자신의 자존심이나 의를 전혀 버리지 않았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결코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을 부인하지 않았다. 단지 한 정욕을 버리고 다른 정욕을 산 것뿐이었다. “짐승 같은 정욕을 팔고 마귀 같은 정욕을 만족시킨”것이었다. “자기를 높이고 자기 의를 세우는 경향이 자연인에게 얼마나 강한가는 상상하기도 어렵다”고 에드워즈는 보았다.
에드워즈는 위선자들이 겸손한 척하려고 무진 애를 쓴다고 지적한다. 율법적 영이란 무엇이든 자만하는 영이었다. 자기의 의로움, 도덕성, 거룩성, 감정, 체험, 신앙, 겸손 등 어떤 좋은 것이든 그것에 대해 자부하는 영적 교만이야말로 율법적 영이었다. 에드워즈는 영적 교만의 특징이 자신의 겸손에 대해 과대평가하거나 과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신의 낮아짐에 대한 높은 평가로 마음이 하늘까지 올라가 있다. 그들의 겸손은 자신 있고 과시적이며 시끄럽고 주제넘고 마음이 부풀고 자만에 찬 겸손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아주 교만하고 행동이 거만한데도 자신은 아주 겸손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실에 놀란다. 인간 마음의 교활함이 이 영적 교만과 자기 의의 영역에서처럼 많이 드러나는 곳은 없다고 한다. 이점과 관련하여 사람을 다루는 데서 사탄의 교묘함은 그 절정에 달한다고 한다.
영적 교만이란 대개 커다란 겸손을 가장하고 나타나지만 두 가지 방식에 의해 그것을 발견해 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 영적 교만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자신의 신앙적 성취를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겸손한 자는 자신을 성도 중에 낮은 자, “모든 성도들 중 가장 낮은 자들 가운데 하나”로 여긴다. 그리고 다른 이들을 자신보다 낮게 여긴다. 그들은 듣는 것과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우는 데 열심이다. 그들은 권위를 지니 총감독이나 지배자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복종하는 경향이 있다. 정말 뛰어난 성도들 즉 가장 탁월한 체험을 가지고 있고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들은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낮춘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가 보기에 은혜에 있어 어린아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은혜로운 성도는 자신의 의무의 규칙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 규칙을 따르는 것이 자신의 목표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탁월한 성도 속에 있는 은혜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조차도 그가 마땅히 도달해야 하는 수준에 비추어 보면 아무 것도 아니다.”
영적 교만의 틀림없는 표지는 자신의 겸손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가짜 체험들은 대개 위조 겸손을 동반한다. 그리고 위조 겸손의 속성은 자신에 대해 과대평가하는 것이다. 뛰어나게 은혜로운 정서의 소유자들은 자신들이 이미 획득한 겸손을 아주 작은 것으로 본다. 반면, 자신에게 아직 남아 있는 교만은 크고 아주 혐오스럽다고 여긴다. 겸손의 원천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실상을 발견하는 것이다. 자기가 겸손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자체가 교만의 증거라고 주장한다. 정말 겸손한 사람은 자기의 겸손을 아주 적다고 여기고 교만한 사람은 자기의 겸손을 아주 크게 여긴다.
에드워즈는 자기가 존경하는 신학자 매스트리히트의 표현을 빌어서, 겸손을 한마디로 일종의 “거룩한 소심함(holy pusillanimity)”이라고 정의한다. 거지와 같은 가난한 심령을 은혜로운 겸손이라 본다. 은혜로운 정서의 상태에 있는 사람은 자신을 “계속적으로 하나님 집의 문간에 있는 거지로 자처한다.” 정말 겸손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교만보다 자기의 교만을 먼저 본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보다 더 교만한 자는 없다고 생각한다.
영적 지식도 마찬가지라고 그는 선언한다. “모든 참된 신령한 자식의 특징은 사람이 그것을 더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자기 자신의 무지를 더 많이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기독교적 정서들을 마리아의 향유에 비유한다. 그녀가 그리스도의 머리에 부은 그 향유는 온 집을 달콤한 향기로 가득 채웠다. 그런데 옥합이 깨어질 때까지는 햐유가 흘러나올 수없었으며 그 향기를 발할 수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은혜로운 정서들도 상한(깨어진) 심령에서 흘러나온다. 그리스도에게 달콤한 향기이며 기독교인의 영혼을 하늘의 달콤함과 향내로 가득 채우는 모든 은혜로운 감정들은 “상한 심령의 감정들”이다. 참된 기독교적 사랑은,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것이든 사람에 대한 것이든, “겸손한”상한 마음의 사랑이라고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심령을 더 가난하게 만들며 더 어린아이처럼 만들며 더 겸비한 처신으로 인도하는 경향을 가진다.
- 양낙홍저, 조나단 에드워즈 생애와 사상, 522-538에서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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