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響山文集卷之十 / 記 / 枕洛亭重修記
宣城治南洛江之滸。有枕洛亭。卽梅園金先生諱光繼之薖軸。寒岡鄭文穆公所命也。先生後彫挹淸兩君子之孫。近始齋先生之子。粤在執徐之亂。近始齋以鄕兵大將。不幸矢復。先生早年承家。天姿卓越。自能力學不怠。初從大菴朴先生得聞居敬窮理之方。後受心經于寒岡及旅軒張先生。致愼乎幽獨之地。專力乎踐履之上。脊梁精神。硬著鐵柱。又就荒閒寂寞之濱。以養性靈而資窮賾。枕洛云者。盖取孫楚枕流漱石之義。夫孫楚之枕漱。是何等淸修高標。明師擧以期擬之乎。先生當北論之起。謝絶公車。及 反正。亦杜門不出。丙子亂。倡率義旅。行至竹嶺。聞下城痛哭罷歸。屢有徵辟皆不就。其高風隱節。足以有光先烈。彼孫楚又不足道。然江山之助發則誠有之矣。是江發自潢池。南馳三百里。至陶山之下爲濯纓潭風月潭。自此再折。東納東溪。西至鼻岩北合驛溪。內藏千戶邑。外控川前坪六七里。又西受烏川。屈曲南駛。於是東西兩山對峙。峽束爲一邑都水口。狀若葫蘆。東山曰御廩。斗揷天中。北與靈芝爭高。載在輿志。壁間古有雲巖僧舍。故一名雲巖山。先生曾大父觀察公作亭其處。取以爲號。西山小無定名。自國思峯南來爲悟理峴。其東一支逆行二十里。左挾烏川。右挾樊川。橫截大江。奔薄御廩。欲進則江折帶之。欲退則二川捲後。所謂來之坎坎險且枕。亭於其頂曰枕洛。不亦宜哉。登斯亭也則上天下水。丹厓翠壁之外。不棲一塵。廩磧斜掛南北市徑。傴僂往來。畵面生響。非漁艇不能通。水淺或亂之。而金沙玉礫之中。不知孰爲人孰爲鷗。亭北沉削難攀。人從烏川來者。度後岡躡南岑而入。南岑卽山之餘氣。融結巖角。以適登眺者也。盤陀石芙蓉岩。舊在水中。今皆沙伏水下。美南五松杜湖諸山縹緲露其䯻。凡四時風景朝暮變態者。固不足言。雲巒之奇秀。林壑之幽深。水石之明麗。自是一定不易。儘野中之別界也。其視逋仙之西湖。狂奴之桐江。未知爲何如。而吾先祖嘗以風月潭爲吾縣第一。此或爲風月潭之亞也歟。先生之居此也。所讀者大易。所講者心經及朱書。相與往來而論心者。內則溪巖,定止齋。外則柳修巖,李蒼石,金鶴沙,權藏谷,金風䨓諸先生。平日進修次第及至言格訓。俱載遺集中。亭之成在萬曆戊申。其制度不可詳。後一百八十年乙未。曾孫同樞公岱重修。北二架房。南四架堂。合六間。後又一百八十八年今上壬寅。十世孫魯憲重修。堂南加設房二間。合舊爲八間。乃追揭先生之詩。凡遊息於斯者。豈徒誦其詩而已乎。先生所讀之書。不可不讀。豈徒讀其書而已乎。先生不仕之義。又不可不知。讀其書知其義然後。江山之浩劫。雖或無常。亭臺之芳躅。可與天壤長存。尙亦勉之哉。
향산집 제10권 / 기(記) / 침락정을 중수하고 쓴 기문〔枕洛亭重修記〕
선성(宣城 예안의 고호)의 관할 남쪽 낙동강 변에 침락정(枕洛亭)이 있다. 바로 매원(梅園) 김 선생 휘 광계(光繼)가 은거하던 정자이니, 한강(寒岡) 정 문목공(鄭文穆公 정구(鄭逑))께서 이름을 지어 주셨다.
선생은 후조당(後彫堂) 김부필(金富弼)과 읍청정(挹淸亭) 김부의(金富儀) 두 군자의 후손이요 근시재(近始齋) 선생의 아들이다. 옛날 임진왜란에 근시재가 향병(鄕兵)의 대장으로서 불행히도 전사(戰死)하시어, 선생이 일찍부터 가업을 계승하였다.
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탁월하여 스스로 학문에 힘을 쏟아 게을리하지 않았다. 처음에 대암(大菴) 박 선생께 배워 거경궁리(居敬窮理)의 방도를 들었고, 뒤에 한강 및 여헌(旅軒) 장 선생(張先生)에게 《심경(心經)》을 배워, 신독(愼獨) 공부를 극진히 하고 실천 공부에 힘을 쏟아 꼿꼿한 정신이 쇠기둥을 확고히 세운 것과 같았다. 또 황량하고 적막한 물가에서 성령을 함양하고 이치를 탐색하였으니, 정자 이름을 ‘침락’이라고 한 것은 손초(孫楚)의 침류수석(枕流漱石)의 의미를 취한 것이다. 손초의 침수(枕漱)는 그 얼마나 청정한 수양이며 고아한 표상인가. 그렇거늘 명철하신 대유께서 그 말을 들어 선생에게 비겼던 것이다.
북인(北人)이 세력을 떨치던 광해조에는 공거(公車)를 사절하였고, 인조반정 당시에도 역시 두문불출하였다.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의병을 일으켜 서울로 진격하다가, 행차가 죽령(竹嶺)에 이르렀을 때 남한산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고서 돌아왔다. 조정에서 누차 불렀으나 일절 나아가지 않았다. 선생의 고상한 풍모와 은군자(隱君子)다운 절의는 선열(先烈)을 영광스럽게 하기에 족하니, 저 손초 따위야 또 거론할 것도 못 된다.
그러나 공의 풍모와 절의에는 강과 산이 조발(助發)한 측면이 진실로 있다. 낙동강은 강원도 황지(潢池)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300리를 흘러 내려와
도산(陶山) 앞에 이르러 탁영담(濯纓潭)과 풍월담(風月潭)을 이룬다. 여기서 다시 굽이져 흐르다가 동쪽에서 동계(東溪)를 받아들인다. 그러고는 서쪽으로 꺾여 흘러가
비암(鼻巖) 북쪽에 이르러 역계(驛溪)와 합류한다. 안으로는 1천 가호의 거읍(巨邑)을 품고 있고, 밖으로는 천전(川前)의 들 6, 7리를 굽어보고 있다. 또 서쪽에서 오천(烏川)을 받아들이고서 굽이굽이 남쪽으로 흘러간다.
이 지점에 동서쪽 양편에 산이 마주 솟아 있기 때문에 협곡이 잘록해져 한 고을의 도수구(都水口)가 되어 형상이 마치 호로병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동쪽에 있는 산이
어름산(御廩山)이다. 우뚝이 하늘을 찔러 북쪽으로 영지산(靈芝山)과 높이를 다투니, 《여지(輿志)》에 실려 있다. 바위벼랑 사이에 옛날에 운암승사(雲巖僧舍)가 있었기에 일명 운암산(雲巖山)이라고도 한다. 선생의 증조부 관찰공(觀察公)이 그곳에 정자를 짓고 살며 호로 삼았다. 서쪽에 있는 산은 낮아서 특정한 이름이 없다.
국사봉(國思峯)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오리현(悟理峴)이 되었는데, 그중 동쪽으로 난 한 줄기 산맥이 20리를 거꾸로 달려 왼쪽으로는
오천(烏川)을 끼고 오른쪽으로는 번천(樊川)을 끼고서 큰 강을 가로질러 어름산을 향해 뻗어 있다. 산줄기가 앞으로 나가자니 낙동강이 굽이굽이 둘러 있고, 물러서자니 오천과 번천이 뒤편을 감싸고 있어, 《주역》 〈감괘(坎卦) 육삼(六三)〉의 효사(爻辭)에서 “오고 감이 험하고 험하며, 험함에 또 의지하였다.[來之坎坎 險且枕]”라고 한 형국이다. 그 꼭대기에 정자를 세웠으니
침락정이라 명명한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
이 정자에 오르면 위로 하늘과 아래로 물, 붉은 벼랑과 푸른 절벽 외에는 한 점의 속기도 서려 있지 않다. 어름산 자락의 서덜이 비스듬히 펼쳐진 곳에 남북으로 난 저자로 가는 길을 구부린 채 왕래하노라면 획연(畫然)히 얼굴 앞에서 바람 소리가 일어나니 고깃배가 아니면 접근할 수가 없다. 물이 얕은 곳을 혹 가로질러 건너다 보면 금빛 모래와 구슬 같은 자갈 사이에서 무엇이 사람이고 무엇이 물새인지 알 수 없다.
침락정 북쪽은 물에 잠기고 가파르게 깎여서 오르기가 어렵기 때문에 오천 방면에서 오는 사람들은 뒷산을 넘어 남쪽 봉우리를 타고 들어간다. 남쪽 봉우리는 곧 산의 끄트머리 자락인데, 불룩하게 바위 봉우리를 맺고 있기 때문에 올라가서 조망하기에 딱 좋은 곳이다.
반타석(盤陀石)과 부용암(芙蓉巖)은 옛날에는 강 중앙에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모래 속에 묻혀 물 아래로 잠겼다. 미남산(美南山), 오송산(五松山), 두호산(杜湖山) 등 여러 산이 아스라이 꼭대기를 보이고 있다. 사계절의 풍경이 아침저녁으로 변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구름과 봉우리의 기이하고 수려함, 숲과 골짜기의 그윽하고 깊음, 내와 암석의 명결하고 아름다움은 본디 한결같이 변하지 않으니 참으로 시골 속의 별세계이다. 포선(逋仙)이 노닐었던 서호(西湖)와 광노(狂奴)가 은거했던 동강(桐江)에 비겨 본다면 어떨지 모르겠다. 우리 선조 퇴계께서는 일찍이 풍월담을 우리 고장의 제일가는 승경으로 꼽았는데, 이곳이 혹시 풍월담에 버금가지는 않을까.
매원 선생이 이곳에 계시면서 읽은 책은 《주역》이고 강론한 책은 《심경》과 주자서(朱子書)이다. 그리고 함께 교유하며 마음을 나눈 분으로 말하면 같은 집안 내의 학자로는 계암(溪巖)과 정지재(定止齋)가 있고, 집안 밖의 학자로는 유수암(柳修巖), 이창석(李蒼石), 김학사(金鶴沙), 권장곡(權藏谷), 김풍뢰(金風雷) 등 여러 선생이 있다. 평소 학업을 연마한 차례 및 지언(至言)과 격언(格言)이 유집에 모두 실려 있다.
침락정이 낙성된 시기는 만력(萬曆) 무신년(1608, 선조41)이고, 건축 규모와 양식은 자세히 알 수 없다. 108년이 지난 을미년(1715, 숙종41)에 증손 동추공(同樞公) 김대(金岱)가 중수하였다. 북쪽 2칸은 방(房)이고 남쪽 4칸은 당(堂)으로 모두 6칸이다. 또 188년이 지난 금상 임인년(1902, 광무6)에 10세손 김노헌(金魯憲)이 중수하였는데, 당의 남쪽에 방 2칸을 증설하여 옛 건물과 합하여 총 8칸이 되었다. 그리고 선생의 시를 뒤미처 걸어 놓았다.
이 정자에서 마음을 수양하고 학문을 강마하는 자들이 한갓 그 시를 외기만 해서야 되겠는가? 선생께서 읽은 책을 읽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한갓 그 책을 읽기만 해서야 되겠는가? 선생께서 출사하지 않은 의리를 또 몰라서는 안 된다. 선생이 읽은 책을 읽고 선생이 실천한 의리를 안 뒤에야 비로소, 유구한 세월에 강산의 모습은 혹 변할지라도 침락정에 서린 아름다운 선생의 자취는 천지와 더불어 영원히 전해질 수 있을 것이다. 부디 힘쓸지어다.
[주-D001] 매원(梅園) 김 선생 : 김광계(金光繼, 1580~1646)로,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이지(以志), 매원은 호이다.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의 아들이다. 안동 부사로 부임한 정구(鄭逑)에게 《심경》을 배웠다. 저서로 《매원유고》와 《매원일기》가 전한다.[주-D002] 선생은 …… 아들이다 : 김부필(金富弼)에게 후사가 없어 아우 김부의(金富儀)의 아들인 근시재 김해를 양자로 들여 후사를 이었기에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주-D003] 임진왜란에 …… 전사(戰死)하시어 : 임진왜란이 발생했던 1592년(선조25) 8월 안동과 예안을 중심으로 영주, 예천, 의성, 청송 등 북부 지역 고을이 일제히 연합하여 안동 열읍 향병(安東列邑鄕兵)을 조직하였고, 김해가 대장이 되었다. 이후 문경과 상주 등에서 일신을 돌보지 않고 수많은 전투에 참가하여 왜적을 무찌르던 김해는 누적된 피로로 병을 얻어 1593년 6월 19일 경주의 진중에서 숨을 거두었다.[주-D004] 대암(大菴) 박 선생 :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을 도와 의병 활동을 하였던 박성(朴惺, 1549~1606)이다. 본관은 밀양, 자는 덕응(德凝), 대암은 호이다. 1569년(선조2) 낙천(洛川) 배신(裵紳)에게 《대학》을 배웠고, 뒤에 한강 정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만년에 청송 주왕산 아래 은거하며 학문에 매진하였다.[주-D005] 여헌(旅軒) 장 선생(張先生) :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이다.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덕회(德晦), 여헌은 호이다. 인조반정 후 산림으로 퇴거하여 학문과 제자 양성에 힘을 쏟았다. 저서로 《여헌집》, 《용사일기(龍蛇日記)》 등이 있다.[주-D006] 황량하고 적막한 물가에서 : 한유(韓愈)의 〈답최입지서(答崔立之書)〉에 “이 모든 것이 만약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에는, 넓고 한가로운 들판에서 밭을 갈고, 적막한 물가에서 낚시질이나 하면 될 것이다.[若都不可得 猶將耕於寬閒之野 釣於寂寞之濱]”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침락정이 낙동강 가에 있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주-D007] 손초(孫楚)의 침류수석(枕流漱石) : 손초는 진(晉)나라의 고사(高士)이다. 그가 장차 숨어 살려고 하면서 “돌을 베개 삼고 흐르는 물에 양치질하련다.[枕石漱流]”라고 말해야 할 것을 “물을 베고 돌로 양치질하련다.[枕流漱石]”라고 잘못 말했는데, 왕제(王濟)가 그 말을 듣고서 잘못을 지적하자, 손초가 “물을 베는 것은 속진에 찌든 귀를 씻어 내기 위함이요, 돌로 양치질하는 것은 연화(煙火)에 물든 치아의 때를 갈아서 없애려 함이다.”라고 하였다. 《世說新語 排調》[주-D008] 여기서 …… 합류한다 : 본문에서 설명하는 지형은
안동 와룡면 선양리(宣陽里) 일대의 물줄기 흐름인데, 지금은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었다.
역계(驛溪)는 사신리 보건진료소 앞쪽에 그 상류가 일부분 남아 있다.[주-D009] 도수구(都水口) : 한 지역 또는 한 공간의 모든 물이 빠져나가는 곳을 일컫는데 대체로 하나의 군, 읍, 시의 모든 물이 빠져나가는 곳을 말한다.[주-D010] 관찰공(觀察公) : 후조당 김부필의 부친 김연(金緣, 1487~1544)이다. 본관은 광산, 자는 자유(子由), 호는 운암(雲巖)이다. 사간원 정언으로 재직할 때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비행을 논박하다 파직당하였다. 김안로가 실권하였다가 조정에 돌아가려 할 때 극력 반대하였고, 그 일로 김안로에게 미움을 받아 경성(鏡城)에 유배되었다. 경주 부윤에 부임하여 임소에서 생을 마쳤다. 저서로 《운암일고(雲巖逸稿)》가 있다.[주-D011] 포선(逋仙)이 …… 동강(桐江) : 포선은 북송 때의 은자 임포(林逋)이다.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 초막을 짓고는 매화를 심고 학을 기르며 숨어 살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매처학자(梅妻鶴子)’라고 일컬었다. 《宋史 卷457 隱逸列傳上 林逋》 광노(狂奴)는 후한(後漢)의 고사(高士) 엄광(嚴光)이다. 광무제의 어린 시절 벗이었는데, 광무제가 등극하고 난 뒤 동강 칠리탄(七里灘)으로 은거하였다. 젊어서부터 방달불기(放達不羈)한 기상이 있어 광무제가 ‘미친놈’이란 의미로 친근하게 광노라고 불렀다. 《後漢書 卷113 逸民列傳 嚴光》[주-D012] 계암(溪巖) : 설월당(雪月堂) 김부륜(金富倫)의 아들 김령(金坽, 1577~1641)이다. 본관은 광산, 자는 자준(子峻), 계암은 호이다. 한성부 주자동(鑄字洞)에서 태어났다. 36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주서 등을 역임했으나, 광해조의 북인 정권에 낙망하여 1616년(광해군8) 봄에 벼슬을 버리고 예안으로 돌아왔다. 이후 인조반정 이후에 여러 차례 조정의 부름이 있었으나 번번이 병으로 사직하였다. 저서로 《계암집》과 《계암일기》가 있다.[주-D013] 정지재(定止齋) : 김확(金確, 1583~1665)이다. 본관은 광산, 자는 이실(而實), 정지재는 호이다. 1603년(선조36)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정온(鄭蘊)의 천거로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김광계와 의병을 일으켜 서울로 가던 도중에 항복 소식을 듣고 귀향해
어름산 아래 정지재를 짓고 은거하였다.[주-D014] 유수암(柳修巖) : 서애 유성룡의 셋째 아들 유진(柳袗, 1582~1635)이다. 본관은 풍산(豐山), 자는 계화(季華), 수암은 호이다. 1616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세자익위사 세마(世子翊衛司洗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으며,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학행으로 추천되어 봉화 현감을 지냈다. 37세에 하회를 떠나 상주 중동의 우천(愚川)으로 가서 터를 잡았다. 저서로 《수암집》이 있다.[주-D015] 이창석(李蒼石) : 유성룡의 문인 이준(李埈, 1560~1635)이다. 본관은 흥양(興陽), 자는 숙평(叔平)이다. 호는 창석ㆍ서계(西溪)이다. 25세에 유성룡의 문하에서 《주역》을 읽었다. 60세에 《서애집(西厓集)》을 편차하고, 74세에 간행하여 유성룡의 학맥을 이었다. 저서로 《창석집》이 있다.[주-D016] 김학사(金鶴沙) : 유성룡의 문인 김응조(金應祖, 1587~1667)이다. 본관은 풍산, 자는 효징(孝徵), 학사는 호이다. 영주 봉향리(奉香里) 출신이다. 1623년(인조 원년) 알성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으나, 병자호란 이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은거하였다. 안동 사천(沙川) 북쪽 학가산(鶴駕山) 기슭에 학사정사(鶴沙精舍)를 짓고 학문과 제자 양성에 매진하였다. 저서로 《학사집》과 《산중록(山中錄)》 등이 있다.[주-D017] 권장곡(權藏谷) : 권태일(權泰一, 1569~1631)이다. 본관은 안동, 자는 수지(守之), 장곡은 호이다. 어릴 때 구봉령(具鳳齡)과 김언기(金彦璣)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뒤에 유성룡의 고제가 되었다. 1599년(선조32) 문과에 급제하여 내외직을 두루 거쳐 형조 참판에 이르렀다. 접반사(接伴使)로 가도(椵島)에 갔다가 병을 얻어 죽었다. 저서로 《장곡집》이 있다.[주-D018] 김풍뢰(金風雷) : 학봉 김성일의 손자 김시추(金是樞, 1580~1640)이다. 본관은 의성이고, 자는 자첨(子瞻), 호는 풍뢰헌(風雷軒)ㆍ단곡(端谷)이다. 1621년(광해군13) 삼도(三道)에서 만인소(萬人疏)를 올릴 때 소두(疏頭)가 되어 이이첨(李爾瞻)을 참할 것을 요청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의병 대장이 되었다. 안동시 서후면 학봉 종택 동편에 그가 지은 풍뢰헌이 남아 있다.[주-D019] 108년 : 대본에는 ‘一百八十年’으로 되어 있는데, 이렇게 되면 간지와 연대가 서로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180년 뒤에 태어나는 증손은 있을 수가 없다. 전사 과정의 오류로 보아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규필 (역) |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