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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관덕정성지와 순교자
천주교인들이 처형된 성지
시원하게 솟은 한옥 누각을 이고, 길쪽으로 다소 급한 듯이 12계단이 있다. 계단을 오르면 대구대교구 제2주보 이윤일 요한 성인이 먼저 평화의 인사를 건넨다. 이윤일 성인은 병인박해 때인 1867년 1월 21일 경상감영의 처형장이던 대구 관덕정에서 치명당한 뒤, 형장 부근에 매장됐다가 아들 형제에 의해 날뫼(현 비산동)로 이장되었고 다시 경기도 묵리와 미리내 성지, 대구교구청, 성모당을 거쳐 1991년 1월 20일 대구 관덕정순교기념관 지하 경당에 봉안됐다. 이처럼 대구 관덕정은 이윤일 성인을 포함한 많은 천주교인들이 믿음을 버리지 않아 처형된 성지이다. 관덕정에서는 천주교인 뿐 아니라 동학 창시자 최제우도 처형됐다. 그렇게 교우들은 하나둘 스러져갔다.
성인들의 유해모신 제대
천주교 대구대교구는 선교 200주년과 103위 순교성인의 탄생을 기념하여 1991년 1월 경상감영 연병장이자 처형장으로 쓰이던 현장에 관덕정 순교기념관을 건립했다. 대구 관덕정순교기념관은 지하 경당과 제대 및 제1전시실, 1층 제2전시실, 2층 제3전시실과 사료실 겸 회의실, 3층 제4전시실, 누각, 그리고 별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하 경당에는 이윤일 요한 성인의 유해를 모신 중앙 제대와 감실 십자고상 그리고 이윤일 요한 성인의 초상화가 있다.
지하 경당안 오른쪽에 위치한 성인 유해실에 모신 제대는 1902년 대구본당(현 계산주교좌본당) 신자들이 고딕식 성당을 짓고 봉헌한 첫 제대인데 관덕정으로 옮겨졌다. 이 제대에는 성인과 복자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대부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에 의해 우리나라에 모셔진 유해들이다. 당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상황에따라 순교까지 각오 해야했기에 교회 장상들은 죽음이 예상되는 임지로 떠나는 선교사들에게 성인의 유해를 목에 걸어주며 순교 성인들처럼 복음 선포를 위하여 목숨을 다하고 성인들의 도우심을 청하라고 격려하였다. 이 유해들은 교구청에 보관되어 오다 대구 관덕정순교기념관이 건립되면서 이곳에 모셔지게 되었다.
유해가 모셔진 제대대구 관덕정순교기념관 지하 경당에 있는 성인유해실 제대에는 18명 성인의 유해와 18명 복자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18명 성인 유해는 우리나라 첫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기독교를 탄압하다가 다마스커스에서 회심하여 교회 발전에 크게 기여한 사도 바울로, 나자로와 마리아의 누이인 성녀 마르타, 성 유스티노, 성 프란치스코 카르치올로,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동료 성인 4인(여기에는 예수회 창설회원이자 선교의 수호성인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동료인 성 이냐시오, 성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성녀 요안나 프란체스카, 성 프란치스코 드 샬), 성 루페르토, 성 프리데릭, 성 비오 10세 교황, 성 비르질, 성 뿌덴스, 성 만수에토, 성 베드로 클라베르, 성 요한 베르그만의 유해이다.
사도 바울로 유해도 안치
18명 복자의 유해로는 동남아에서 순교한 파리외방전교회원 복자 8명(복자 보나르도 요한, 복자 베드로 보리에, 복자 베드로 프란치스코 네론, 복자 페오파네스 베나르드, 복자 아우구스티노 쇼플러, 복자 베드로 네엘, 복자 요한 샤를르, 복자 스테파노 테오도르), 동남아에서 순교한 다섯 복자(복자 베드로 보리에, 복자 아우구스티노 샤프델라인, 복자 요한 샤를로, 복자 프란치스코 자카르도, 복자 테오파네스 베르나드), 동남아에서 순교한 다섯 복자(복자 보나르드, 복자 요한, 복자 바오로 미키, 복자 코안, 복자 아우구스티노 쇼플러)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대구 관덕정순교기념관은 천주교대구대교구의 제2주보인 이윤일 요한 성인과 18명 성인의 유해, 18명 복자의 유해까지 총 37명의 유해가 모셔져있는 거룩한 순교 성지이다.
지하 제1전시실에는 교구 초창기 주교관, 성유스티노신학교, 계산주교좌본당,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 등에 관한 오래된 사진이 걸려있다. 1층 제2전시실에는 역대 박해 때 대구 관덕정에서 참수당한 순교자들의 명단이 쓰인 액자가 걸려있고, 스테인드 글라스가 눈에 띈다. 대구 관덕정에서는 17명(부산교구 3명 별도)이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을해박해 때는 고성대 베드로, 고성운 요셉, 구성열 발바라, 김종한 안드레아, 김화춘 야고보, 김희성 프란치스코, 이시임 안나가, 정해박해 때는 김사건 안드레아, 박사의 안드레아, 이재행 안드레아가, 병인박해 때는 이윤일 요한 성인과 김예기 김인기 박대식 빅토리노 박수영 송 마태오 박 요셉이 참수당하였다.
2층 제3전시실에는 조선으로 떠나올 때 죽음을 각오하고 잘라두었던 선교사들의 머리카락, 계산주교좌본당 초대 김보록 주임신부가 가실본당 신자 김희두 베드로에게 준 십자가, 주교좌성당의 제대에 쓰도록 했다고 전해지는 루페르토 십자가, 한티공소의 십자고상, 성모당의 고상, 박재수 요한 신부의 전교일지 등이 전시되어 있다. 또 시스테리안 수도원에서 보내온 예수님 손에 박은 것과 똑 같은 것으로 여겨지는 못, 신나무골 십자가도 있다.
3층 제4전시실 양쪽 창쪽으로는 이윤일 요한 성인의 일대기와 대구대교구 1백년사를 담은 스테인드글라스화를 만날 수 있다. 진열장에는 각종 성물과 옛날 교리서 기도서 성물 등이 다량 비치되어 있다.
한국적인 전통미를 지닌 누각의 단청에는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리는 모습, 예수님이 십자가를 진 모습, 포도나무 등이 묘사되어 있다. 대구관덕정순교기념관 외벽에는 교회의 반석을 이룬 순교자들이 새겨져있다. 1914년부터 유스티노 신학교에서 쓰던 성광과 종부성사를 받은 다산 정약용의 시는 각각 대신학교와 교구청으로 옮겨졌다.
이윤일 요한 성인
이윤일 요한 성인은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가족들을 데리고 문경 여우목(현 문경시 중평리 여우목)으로 이사를 했다. 그런데 그 때 당시 여우목에는 정해박해(1827년) 때 체포되어 기해박해(1839년) 때 대구 관덕정 형장에서 순교한 박사의 안드레아의 아들인 박요왕 가족들과 순교자 서인순·익순·태순의 부친인 서치보 요셉(서상돈 아우구스티노의 조부) 가정 등이 함께 살았다.
대대로 내려오는 신앙 가정 출신인 이윤일 요한은 가풍을 이어받아 전교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러던 중 1865년 겨울에 뜻하지 않게 사사로운 박해가 일어나 아들인 이 시몬이 병인박해가 일어나기 직전인 1866년 1월에 순교하였다.
1866년 2월 병인박해가 터져 이윤일 요한 성인은 여우목에서 체포됐다. 이윤일 요한 성인의 가족 8명과 마을의 많은 신자들이 함께 문경관아로 끌려갔다. 문경관아에 끌려가서 3일동안 갇혀 있다가 다시 상부 관청인 상주 진영으로 이송돼 달포 가량 지냈다. 자부 박 아녜스의 두 살 난 어린 딸이 옥중에서 죽었다. 여우목 공소 회장 이윤일과 한실공소 회장 김예기, 김인기 형제는 조정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형 집행을 위하여 대구의 경상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이윤일 성인은 경상감영으로 이송되기 직전 자녀들에게 “나는 순교하러 떠난다. 너희들은 집에 돌아가 성실하게 천주님의 계명을 지키고, 꼭 나를 따라 오너라” 라고 말하였다.
1867년 1월 21일(음 1866년 12월 16일) 이윤일 요한 성인은 관덕정에서 참수치명 당하였다. 그때 이윤일 요한은 52세였다.
미리내 성지에서 관덕정으로 이장하기까지
1867년 1월 21일 대구 관덕정에서 참수당한 이윤일 요한 성인의 시신은 형장 부근의 아미산에 가매장됐다. 2년 후 아들 이 마티아가 대구 비산동 날뫼 원고개(飛山)로 옮겨 모셨다. 1904년경 가족들이 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묵리로 이사를 가면서 묵리의 뒷산 작은 삼방골로 이장했다. 1976년에는 미리내 무명순교자 묘역으로 옮겼다. 대구대교구는 1986년 12월 21일 대구교구청 내 경당으로 옮겼다가 성인이 순교한 지 120년이 지난 1987년 1월 21일 교구청 내 성모당에 안치하였다. 같은 날 대구대교구 제2주보 성인으로 선포됐다. 1991년 1월 20일 관덕정 순교기념관이 완공되자 관덕정 내 지하 경당으로 옮겨 돌제대에 봉안하였다. 이윤일 요한 성인은 1968년 10월 6일 복자로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서 성인품에 올랐다.
위기에 더 빛을 발하는 역설의 진리
마음이 가난해서 하늘나라를 차지할 사람들은 대구 도심에 자리잡고 있어서 쉽게 갈 수 있는 천주교대구대교구 관덕정순교성지를 자주 찾는다. 일상의 한부분을 떼어내 관덕정을 청소하고, 미사를 드리고 후원도 하며 조용한 마음으로 묵상순례를 드리면 어느덧 영혼의 때가 말끔히 씻어지는 행복을 맛볼 수 있다. 대구지하철 1, 2호선 환승역인 반월당 역에서 내리거나 동아쇼핑이나 적십자병원 버스정류장에서 내리면 1분 안에 도착한다. 남문시장 쪽에서 내려도 5분 거리이다. 관덕정 순교성지를 제대로 체험하려면 운영위원회(053-254-0151)의 도움을 구하면 된다. 매달 첫째 토요일 후원회원을 위한 미사와 순교영성 강좌가 열리고, 국내외 성지 순례도 가고 있다.
성 이윤일 요한
성 윤일(尹一) 이제현(李齊賢) 요한은 충청도 내포지역의 홍주에서 그다지 부유하지 않은 중인(中人) 집안에서 태어났다. 성인이 태어날 당시 시작된 을해박해(1815년)로 경상도 지역에서는 많은 이들이 잡혔고 그중에 몇 명은 경상감영에서 옥사하였다. 대구지역 박해 시작과 더불어 성인은 탄생하신 것이다. 성인의 부친 대(代)에서부터 천주교 신앙을 가지게 되었고, 성인의 가족들은 신앙과 용기로 항상 빛났던 사람들이었다. 성인의 아들 시몬은 아버지보다 앞서 1866년 1월 27일(음력 1865년 12월 11일)에 예천 건학에 사는 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함께 체포되어 공주에서 치명하였다.
성인은 키가 큰데다가 길고도 숱이 많은 수염까지 기르고 있어 위풍이 당당하였다고 한다. 또한 성인의 성품은 순량하여 남을 꾸짖거나 탓하는 일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항상 화평한 모습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한 번도 성내는 일이 없었던 성인은 부친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동네 외인들이 그를 위하여 효자문을 세워야 마땅하다고 할 정도였다.
성인은 고향이었던 홍주를 떠나 상주 갈골에 살다가 부친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나자, 성인의 처가 집 식구들(순교자 박사의 후손)이 많이 살던 문경 호항리(여우목)로 이사를 갔다. 여우목에서 농사를 짓고 살던 성인은 온후한 성품과 독실한 신앙으로 수계 생활도 열심히 하였다. 성인은 그곳에서 공소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외교인들을 권면하여 천주교회에 입교시켰고 신자들을 잘 이끌었다.
1866년 11월 18일(음력 10월 12일) 문경 포졸들이 여우목으로 들이닥쳤다. 포졸들이 자기에게 다가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올 때가 온 것이라 각오한 바 있어 도망하지 않고 태연히 그들을 맞아들였다. 포졸들이 “이 마을의 대표자가 누구며, 천주교를 믿는 자가 누구냐?” 하고 묻자 성인은 선뜻 나서며 “바로 나요.”하며 점잖게 말하였다. 포졸들이 와서 성인의 손을 묶자, 성인은 침착하게 “이렇게 아니하여도 나 달아날 사람이 아니다. 수갑을 늦추어 달라.”하였다. 그리고 성인의 여덟 식구와 동네 교우들을 합쳐 약 30여 명이 문경 아문에 갇혔다. 당시 문경 현감은 신자들을 잡지 아니한 죄로 면직이 되어 현감 자리는 공석 중이었다. 현감이 없자 포졸들이 성인에게 돈을 내라고 요구하였고, 때리지는 않았지만 세간은 다 빼앗겼다. 문경에서 3일 동안 있다가 상주 진영으로 압송되어 갔다. 성인이 상주 진영에 잡혀 있을 때 잡혀 온 이들은 약 70여 명이 되었다. 그 중에서 약 20여 명 이상이 치명하였다.
상주 진영에서 성인은 큰 칼을 쓰고 차꼬를 채인 상태로 한 두어 달 갇혀 있으면서 문목을 받았다. 성인이 상주 감영에 있을 때 원(牧使) 앞에 3차례 문목을 받는다. 원이 “교우들이 어디에 있느냐?” 묻자 “교우들은 여기 들어 온 사람뿐입니다.”라고 대답하였고, “지금도 성교를 하려고 하느냐?”고 묻자 “아니 할 수 있습니까?”라고 대답한다. 원은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네가 회장이니, 네만 아니하면 다른 사람도 아니할 것이다.” 포졸들에게 큰 괴로움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그 동안에 성인의 두 살 난 손녀가 죽기도 하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성인은 교우들 중에서 마음이 변하는 자가 있으면 열심히 권면하여 마음을 돌이키게 하였고, 성인의 지도로 함께 옥중에서 아침저녁 기도를 그치지 않고 하였고, 항상 웃으면서 즐거워하였다.
상주감영에서는 끌고 온 신자들을 세 편으로 갈라놓는다. 빈곤한 사람과 여자와 어린 아이들처럼 풀어 줄 사람, 신앙을 버리지 않겠다고 말을 하여 죽어야 될 사람, 성인과 한실 공소 회장 김예기 형제처럼 사학 괴수라 하여 따로 사형을 받아야 할 사람으로 나누었다. 이 때 성인의 아들 이의서 마티아와 큰 며느리 박 아녜스와 모친과 누이가 풀려 나온다. 그러다가 성인이 대구로 참수 당하러 갈 때 자손들을 불러 이렇게 훈계한다. “나는 이제 치명하려 가니 너희는 가서 열심히 수계하다가 나를 따르라.” 그리고 치명하는 장소에는 따라오지도 말고 치명하는 장면은 보지도 말라고 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성인이 걱정하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다시 신부를 만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일성록’ 고종 병인년 11월 29일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지금 경상 감사 이삼현의 장계를 보니, ‘문경 고을에서 잡힌 사학 무리 중에 이제현, 김예기, 김인기 세 명은 사학에 매우 깊게 빠진 자들이니 해당되는 율을 시행하도록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해 주기를 바랍니다.’ 하였습니다. 이 세 사람에 대해서는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백성들을 많이 모은 뒤 효수(梟首)하여 모든 사람들을 경각시키도록 해야 합니다. 사학 무리들을 먼저 목 베고 후에 장계함이 일찍이 행한 일이 있은즉 이후로는 굳이 품처하지 말고 해당되는 율로써 형벌을 행한 후에 장계하여 드릴 것을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고 의정부에서 왕께 아뢰니 왕이 윤허하였다.
상주에서 경상감영으로 끌려온 지 3일 째 되는 날, 1867년 1월 21일(음력 1866년 12월 16일)에 각각 그 날 음식상을 한 상 씩 받았다. 그러자 김회장 형제 두 사람은 먹지 않고 울었다. 그러자 성인이 “천주가 먹으라 하신 음식을 먹지 않고 울긴 무슨 연고이냐?”며 권면하였다. 그리고 음식을 다 먹었다고 한다. 성인과 김예기, 김인기 형제는 영장이 먼저 나와 앉아 있던 관덕당 앞으로 묶인 채 끌려 나왔다. 사형 터에는 막대기 넷이 땅에 박혀 있었다. 포졸들이 묶인 것을 풀어 주었고 첫 차례로 성인이 죽을 때가 되자 성인은 자기 주머니에서 엽전 닷 냥을 자신에게 쓸데없는 것이라며 희광이에게 주면서 “여보게 이것 받아 주게. 내가 죽는 마당에 이것을 품속에 넣은 채 죽겠는가? 저승에서는 이런 것이 필요 없다네. 그러니 나를 위해 수고하는 자네들에게 주는 게니 받아주게. 자네들이나 나나 고생하지 않기 위해 한 칼 단번에 내 목을 잘라주게.”고 하였다. 그 후 희광이가 성인을 엎드리라고 하면서 손으로 치자, 성인은 엎드렸다가 다시 일어나 성호를 긋고는 스스로 엎드려 나무토막을 목에 괴고, 사지를 각각 잡아매라 하였다. 이렇게 성인은 관덕당 형장에서 장날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참수당하여 순교하였다. 당시 성인의 나이는 52세였다.
성인의 유해는 이 토마스에 의해 처음에는 이곳 관덕당 형장 근처에 임시로 묻혔다. 성인의 머리를 따로 효수하지 않아서 몸과 함께 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약 두 달 후(음력 2월) 성인의 아들 마티아와 마티아의 형과 외숙부와 이 토마스가 와서 봉분을 크게 만들었다. 2년 후 후손들에 의해서 대구 비산동 날뫼 뒷산으로 이장되었다. 그러다가 그 후손들이 경기도 용인군 묵리(墨里 = 먹방이 = 먹뱅이 = 묵뱅이)로 이사를 가서 1912년에 그곳으로 이장을 했다. 이미지그 후 다시 1976년 6월 24일 미리내 성지의 무명 순교자 묘역에 이장했다. 1985년 대구교구 신자들이 미리내 성지 순례를 할 때 해설자에 의해서 무명 순교자 묘역에 안치된 18위 중 한 분이 성인이라는 것을 듣고, 교회사연구소 최석우 신부님이 조사 검증하고 확인하였다. 성인의 묘소가 확임 됨에 따라 대구대교구 이문희 대주교와 수원교구장인 김남수 주교, 미리내 성지 정행만 신부의 합의에 의해서 대구대교구로 이장하게 되었다. 대구로 이장된 성인의 유해는 1987년 1월 21일 대구대교구청 구내 성모당으로 안치했었고, 대구대교구 교구장 이문희 대주교는 이날 성인을 대구대교구 제2주보로 모실 것을 반포하셨다. 그러다가 성인의 유해는 1991년 1월 20일(일) 교구장 이문희 대주교의 주례로 관덕정순교기념관 성당 제대에 봉안하였다.
한국의 병인 순교자 24위가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김수환 대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1968년 10월 6일 시복될 때, 성인도 복자가 되었다. 그 때 교황은 바오로 6세였다. 이후 성인은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하여 서울 여의도에서 더불어 시성(諡聖)되셨다. 성인은 우리나라 103위 성인 중 가장 끝에 소개되어 있는 분이다.
※ 성 이윤일 요한과 관련된 순례지
가. 충남 홍주, 덕산
다. 경북 문경 여우목
마. 경북 상주 감옥터
사. 대구 서구 날뫼(비산동)
자. 경기 용인 미리내 나. 경북 상주 갈골
라. 경북 문경 관청
바. 대구 중구 아미산(관덕정)
아. 경기 용인 묵리(먹뱅이, 이동면)
차. 대구 중구 성모당(남산동)
관덕정 관련 복자 11위
순교자 복자 11위
김희성 프란치스코 (1765~1816년)
구성열 바르바라 (1776?~1816년)
이시임 안나 (1782~1816년)
고성대 베드로 ( ?~1816년)
고성운 요셉 ( ?~1816년)
김종한 안드레아 ( ?~1816년)
김화춘 야고보 ( ?~1816년)
이재행 안드레아 (1776~1839년)
박사의 안드레아 (1792~1839년)
김사건 안드레아 (1794~1839년)
박대식 빅토리노 (1812~1868년)
순교자 5위
[순교자 소개] 김예기, 김인기
김예기(金禮己), 김인기(金仁己) 형제는 가족들과 함께 경상도 문경에 있는 한실 교우촌에서 살았으며, 교우촌 회장으로 신자들의 신앙을 이끌면서 모범된 생활을 하였다.
병인박해(1866년 음력 10월) 때 문경 포졸에게 마을 사람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상주 진영으로 압송되어 이곳에서 3차례의 심문(問目)을 받고, 신자들의 괴수로 지목되었다.
『承政院日記』고종 병인년 11월 29일(음력)에 사형 판결을 승인 받고, 이윤일 성인과 함께 대구로 이송되어 3일째 되는 날 대구 관덕정에서 참수로 순교하였다.
순교 후 그날 저녁 대구 교우와 다른 곳 교우들이 힘을 합하여 형장에서 약 3마장 떨어진 남산에 묻었는데 머리를 달아놓지 않아(효수하지 않아) 함께 묻을 수 있었으며, 형제는 한 곳에 함께 묻혔다고 하였다.
박수연, 송 마태오, 박 요셉
박수연은 순교복자 박대식 빅토리노의 조카이다. 1868년 박해 때 박 빅토리노와 함께 체포되어 김해 관아를 거쳐 대구로 이송되어 참수 치명하였다. 당시 그는 예비신자였고 나이는 47세였다.
박 요셉은 김해 마정에서 살았고 송 마태오 역시 김해 사람으로, 이 둘은 복자 박대식 빅토리노와 그의 조카 박수연과 함께 대구 관덕당 형장에서 치명하였다. 당시 송 마태오는 50세 정도 되었고, 박 요셉은 40세 정도 되었다.
관덕정 이야기
관덕방(觀德坊)과 관덕정(觀德亭) 옛 대구부(大丘府) 서상면(西上面)의 14방리(坊里) 중의 하나인 관덕방(坊)은 관덕정리(觀德亭里)라고도 했었다. 대구읍성(邑城)의 남문(南門) 밖에 관덕당(觀德堂)이 있었는데 관덕당은 군관(軍官, 將校)과 별무사(別武士)를 선발하는 도시소(都試所, 시험장)였고 관덕당 앞(남쪽)은 넓은 연병장이었다. 따라서 군문효수(軍門梟首)형의 국사범(정치범), 중죄인의 처형장은 연병장의 한 부분을 사용하는 것이 관례였다. 아미산(峨嵋山)이라 불리던 관덕당 남쪽 언덕받이 땅은 영남의 수도(首都) 경상감영(監營)의 제일 큰 형장으로 이곳에서는 다른 정치범뿐 아니라 “사학(邪學) 죄인의 우두머리”라는 죄목으로 참수치명(斬首致命)하신 순교자들이 1816년부터 1867년에 걸쳐 여러차례 이 형장에서 선혈(鮮血)로써 신앙을 증거하였고 그 순교자들 중에서 한 분이 성인으로 시성(諡聖)되신 유적지이다. 관덕방(坊)은 1914년 일제가 지방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일부는 명치정(明治町, 桂山洞)으로, 일부는 덕산정(德山町)으로 갈라져 “관덕당 말랭이”땅은 1960년대까지 덕산동이었다가 다시 대구시의 동(洞)구역 조정으로 현재는 남산2동에 편입되어 있다.
1. 영남 제일 순교 성지
대구의 옛 이름은 달구벌(達句伐)인데 조선왕조시대 1601(宣祖 34)년 경상감영(監營=도청)이 대구에 정착되고 대구(大丘) 도호부(都護府)가 됨으로써 영남지방의 행정 군사 경제 교통의 중심지가 되고 천주교를 사학(邪學=國敎 아닌 이단)으로 단죄하던 시대에 있어서 사학죄인은 국사범(國事犯)이므로 지방에 있어서 최종판결은 지방장관인 감사(監司=관찰사)가 결정했으므로 각 고을에서 체포된 신자들 지도급은 대구 감영으로 넘겨져서 처단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군문효수(軍門梟首)형이므로 장대(將台)가 있는 군사조련장(練兵場)에서 집행되었다. 장대벌(將台伐)이라는 말은 연병장이란 뜻이다.
대구성 남문밖 아미산(峨嵋山) 언덕위가 참수(斬首)하는 사형장으로 사용되는 것은 남문에서 서남쪽으로 200보 지점(현재 대구시 중구 계산동 245번지) 즉 동아쇼핑센터 서북 모퉁이 부근에 관덕당(觀德堂)이라 쓰인 현판이 걸린, 군관(軍官)과 별무사(別武士)를 선발하는 도시소(都試所)가 있고 그 앞 일대가 아미산 언덕바지 땅을 포함하여 넓게 자리잡은 연병장이었기 때문이다.
2. 관덕방(坊)과 관덕당(堂)
관덕방은 옛날 대구도호부(大丘都護府)의 서상면(西上面)에 속하는 14개 방리(坊里) 중 하나인 동리지명인데 관덕방을 관덕정리(觀德亭里)라고도 했다. 관덕방이란 동리 이름이 없어진 것은 한일합병 후 조선 총독부가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일부는 명치정(明治町=桂山洞)으로 편입되고 일부는 덕산동(德山洞)으로 분활되어 없어지고 70년대에 덕산동의 일부가 남산2동에 편입되었다.
관덕당은 1749(英祖 25)년에 민백상(閔百祥)감사 재임시에 건립되고 일제시대에 상제교(上帝敎=천도교의 한派) 절이 되었다가 광복 후 1960년대 말에 헐리었다.
대구의 순교지
신라시대에는 『달구벌천도』(達句伐遷都) 계획으로 신라의 왕도(王都)를 대구부근으로 옮기려 했던 만큼 지정학적(地政學的) 가치가 큰 대구(大邱)는 조선조시대에 이르러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98)으로 군사적인 면에서도 그 중요성이 크게 인식되어 1601(宣祖 34)년 경상감영(慶尙監營)이 대구에 정착되고 대구도호부(大邱都護府)가 됨으로써 영남지방의 행정 군사 경제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1. 대구읍성
대구부(府)의 읍성은 1590(宣祖23)년 토성(土城)을 쌓아 이듬해에 완성했으나 1년후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헐어 깨뜨려져 경상도 감영이 설치된 도호부이면서도 135년간 읍성 없이 지나다가 1736(英祖12)년 당시의 경상도관찰사(觀察使=監司)겸 대구도호부사(都護府使) 민응수(閔應洙)의 건의로 영조(英祖)의 윤허를 얻게 되어 결실을 보게 되었다. 이때 축조된 성벽은 석성(石城)으로 과거 훼파된 토성보다 규모가 커져 동서남북의 넷 정문이 있고 또 동과 서의 두 암문(暗門=樓없는 門)이 있었다. 즉 동문은 『진동문』(鎭東門) 그 위치는 현 동성로와 동문로가 교차되는 제일은행앞 십자로에 있었고 서문은 『달서문』(達西門) 서성로와 서문로가 교차되는 조흥은행앞 십자로에 있었다. 남문은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의 현판이 걸린 2층 누각의 건물이었는데 그 위치는 남성로와 종로가 교차되는 십자로에 서 있었고 북문은 『공북문』(拱北門)으로 북성로 31번지와 태평로 2가 13번지로 개통되어 있는 3거리, 북성로 31번지에 있었다.
동소문(東小門)은 『동야문』 이라했고 동성로 대구백화점앞 3거리에 있었다. 서소문(西小門)은 『서야문』이라 했는데 서정문인 달서문(達西門)에서 북으로, 서성(西城)의 북쪽 끝에서 그안에 감영옥사(監營獄舍)가 있는 『옥골』 골목으로 들어가는 곳에 있었다.
대구읍성 성곽 위에는 4개의 망루(望樓)가 있었는데 성곽 축조공사는 많은 인원을 동원하여 약 6개월 만에 완성하였는데 동원된 연인원은 78,584명이라 하며 소요되는 물자의 대금과 노임을 후하게 지불했다고 한다. 완공된 1737년 『영남감영축성비』(嶺營築城碑)를 세웠다. 그후 133년이 된 1870(高宗7)년 김세호(金世鎬) 감사의 재임시에 성벽의 증수축(增修築)이 있었는데 이때 종래의 4개 망루 외에 새로 8개의 포루(砲樓)를 증축하였다.
그러나 대수축후 24년만인 1906(高宗43)년 대구군수겸 관찰사서리 박중양(朴重陽)은 『쓸모없이 도시발전에 방해된다』고 일본인들과 손잡고 대구읍성을 철거함으로써 축조된지 170년만에 그 자취는 없어지고 현재 동성로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 하는 도로이름으로 옛 성터임을 말해주고 있다.
2. 관덕당
관덕정(亭)으로도 불리는 관덕당(觀德堂)은 1749(英祖25)년 경상도 관찰사겸 대구도호부사 민백상(閔百祥)이 건립한 별무사(別武士)와 군관(軍官)을 선발하는 도시소(都試所)였다. 그 위치는 대구읍성 남문(嶺南第一關) 밖 서남200보 지점(대구시 중구 桂山동 2가 245번지) 즉 동아쇼핑센터 북서 모퉁이 부근이다.
별무사는 활(弓) 잘쏘고 말(馬) 잘타는 특별 기량을 가진 군인으로 조선의 오위영(五衛營) 중 훈련도감(訓鍊都監) 금위영(禁衛營) 어영청(御營廳)에 배속되고 전시에는 일선에서 싸웠다.
도시(都試)란 조선시대 무과의 시험제도이며 중앙에서는 병조판서와 훈련도감의 당상관, 지방에서는 관찰사와 각 진영의 병마절도사가 매년 봄과 가을에 무사를 선발하는 제도를 말하는데, 성적이 우수한 자는 상을 주고 임금이 친림하여 보이던 전시(殿試)에 응할 자격을 주었다.
나라 지키는 간성들을 길러내는 구실을 해온 관덕당의 건물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 수 없고 국력이 빈사 상태이던 구한말에 이르러서는 퇴락한 건물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일제의 강점이 시작된 1906년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회원이며 『광문사』(廣文社)를 설립, 『나라의 힘, 국민의 힘을 기르는 운동을 전개하던 지사(志士) 김광제(金光濟)는 서상돈(徐相燉=아오스딩)의 도움을 받아 학교를 설립하는 일과 민중을 계몽하는 일에 열중했는데 때마침 이해 1월에 경북관찰사로 부임한 신태휴(申泰休) 감사는 광문사와 상의, 각 군에 학교 설립을 추진하는 한편 관덕당 건물을 수리하여 사범학교를 설립코져 했는데 이때 서상돈 정규옥(鄭圭鈺=바오로) 서병오(徐丙五) 등 각 500원(元)씩을 거출한 20인과 3~4십원씩을 의연한 65인의 대구유지들의 협력으로 사범학교를 개교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 통감부의 방해로 신감사는 부임 6개월만에 면직되고 학교는 문을 닫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대구읍성이 철거될 때 남문옆에 세웠던 『영남감영축성비』는 관덕당으로 옮겼다가 관덕당이 헐릴 때 동성로의 달성군청으로 옮겨졌고 다시 남산동 『향교』(鄕校)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3. 관덕당 마당
관덕당 마당은 현재 적십자병원이 자리잡고 있는 전후좌우 일대와 동아쇼핑센터 앞에서 반월당 로타리 아미산(峨媚山) 이라 부르는 언덕 밑 전부를 포함한 넓은 지역이다.
무과(武科) 과거를 보이는 연병장이었으므로 활을 쏘는 사격장, 말을 달리는 승마장으로 사용되고 또 세시민속 놀이의 줄다림도 이곳에서 했다한다. 넓은 큰도로가 개통되기전인 1920년대에는 현재 YMCA회관이 선 자리에 물방아간이 있었고 여기서 흘러내리는 물이 개천이 되어 염매시장을 지나고 고려예식장 앞길 중앙으로 흘러 계산오거리에서 북으로 굽이쳐 계산성당 앞을 지나 다시 서쪽으로 굽이쳐 동산밑에서 서현(西峴)쪽에서 내려오는 개천과 합류하여 달서교(동산파출소앞)와 인교동을 지나서 달성동으로 흘렀는데 이 물이 관덕당 앞에서 동산밑으로 합류할 때까지 유로는 남산동과 계산동의 경계선이 되기도 했다.
관덕당 마당은 1917년 8월 동문 시장의 일부가 옮겨오고 1919년 7월에 또 다시 동문시장 나머지 일부가 옮겨와서 새장(新市場) 또는 남문시장으로 1937년 3월까지 장터가 되었다가 남산동으로 시장이 옮겨간 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이다.
4. 관덕당 마루
『관덕당 마루』 또는 『관지(官地)땅 말랭이』로 불리우던 아미산(峨媚山) 등성이는 관덕당 앞을 흐르는 개천을 건너서 언덕밑까지가 140보의 거리인데 현재 아미산 언덕위에는 동쪽에 대한불교 대구거사림(居士林) 절이 있고 서쪽은 장로회 대구남산교회가 서있고 중간에는 복명국민학교가 덩그랗게 자리잡고 있다.
토박한 언덕바지로 쓸모없는 땅으로 조선조시대에는 중죄인을 처형하는 형장으로 사용해 왔으므로 대구에서 참수치명하신 천주교 순교자들도 이곳에서 목숨을 바쳤을뿐아니라 동학(東學) 운동을 일으킨 최제우(崔濟愚)도 1864년 이곳에서 사형되었다 한다. 또 일본이 조선을 강점한 후 항거하는 우리의병(義兵)들을 잡아 총살하는 형장으로도 삼았기 때문에 『관덕당말랭이』는 형장의 대명사(代名詞) 이기도 했다. 남산교회앞 길에서부터 동편일대가 옛날의 형장이라 하는데 그후 이곳에는 측후소(測候所)가 세워지고 한편 남문시장 옹기전이 되기도 하였다.
5, 관덕당마루 형장의 순교자들
대구에서 치명한 천주교 순교자들은 신유(辛酉1801)교난 후 박해를 피하여 경상도 북부 산협지대에 숨어살면서 교우촌(敎友村)을 이루고 살던 신자들이 배교자의 밀고로 영양, 청송, 진보 등지에서 모두 체포되어 먼저 그고을 현감 또는 부사의 초심(初審)을 받아 배교한 사람은 방면되고 그 상급관청인 안동, 상주, 경주의 목사와 대부사의 재심(再審)을 거쳐 두령이나 이름난 신자는 감사의 아문인 대구감영으로 넘기고, 보통죄수는 즉결 처형하게 되었는데 을해년에 대구로 압송된 이는 29명이다. 이때 경상도에 숨어들어와 신자취락을 이루었던 교우들은 충청도 홍주, 덕산, 예산, 청양, 내포 등지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1815(乙亥)년에 청송 「모래산」에서 잡혀 경주를 거쳐 대구로 이송된 7위중 네분은 옥사하고 3위가 참수, 진보 「머루산」에서 잡혀 안동을 거쳐 대구로 압송된 4위는 모두 참수형으로 1816년 1월 19일 관덕당 마루에서 순교하였다. 1927(丁亥)년 상주 「명의목」과 순흥 「곰지기」에서 잡혀 상주목사의 심문을 거쳐 대구감영으로 이송된 6위중 세분은 옥사, 세분이 참수. 이분들은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중앙의 결재가 없어 13년간 옥고 끝에 3위는 옥사하고 세분이 1839(己亥)년 5월 26일 관덕당 마루에서 참수되었다. 병인(丙寅=1866) 대교난 때는 선참후계(先斬後啓)라는 『학살령』이 내려져 각 지방에서 많은 순교자를 내게 되어 절차를 밟아 감영까지 이송된 이가 많지않고 문경에서 잡혀 상주목사의 심문을 거쳐 호송된 이윤일(李允一 사도요한) 성인과 김회장 형제 세분이 1867년 1월 21일 관덕당 마루에서 순교하였다.
6. 대구 감영옥
어둡고 더러운 옥사 안에서 사형집행을 고대하는 사람들, 그 처절한 가운데서 단란하고 화기애애하고 기쁘게 살고 있는 모습. 모든 일을 하늘의 뜻에 맡기고 낮에는 둘러앉아 새끼를 꼬고 집신을 삼아 생활비와 필수품을 마련하고 밤이면 희미한 호롱불 앞에서 정성스럽게 기도를 함께 올리는 경문소리.
그들을 밀고한 원수까지 따뜻이 돌봐주는 사랑. 이러한 대구감영옥에 있는 천주교신자들에 대한 소문은 대구읍민들의 호기심과 화제를 불러일으켜 구경하러 오는 사람과 『천주교가 무어길래』 하고 교리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로 옥중전교(獄中傳敎)를 한 대구감영의 옥사는 「서야문」 안 옥골에 있었는데 그 위치는 대구시 중구 서내(西內)동 8번지다. 한일합방후 삼덕동에 대구 형무소(刑務所)가 생기게 되자 옥사는 없어지고 그터에는 일본불교의 절이 세워졌다가 8.15 광복 후는 여러기관들의 소유로 전전하였고 지금은 장로회 대구 서성로 교회가 세워져 있다. 순교유적지로 말하면 관덕당 마루보다 옥터가 더 순교자들과 연고가 깊은 곳이다. 대구의 순교자들은 옥사자가 더 많고 모든 순교자들이 일단 옥에 감금되어 있다가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7. 한티마을
한티마을(漆谷군 東明면 得明동)은 대구 천주교회의 요람지 신나무골(漆谷군 枝川면 蓮花동 24)과 함께 대구본당 창립의 주역을 맡았던 신자들이 박해시대에 그곳으로 피신하여 은거하면서 신앙공동체를 이루어 살던 깊은 산중 취락이었다.
태백(太白)산맥의 남단. 대구북방 20km 지점에 위치한 팔공산은 대구분지(盆地)의 북부를 둘러싸고 동서로 길게 산줄기를 뻗어 웅장한 산세를 이루어 행정상으로 경북 칠곡 달성 경산 영천 군위 등 5개군에 걸쳐 자리잡고 있다.
주봉(主峯) 팔공산은 해발 1,192m이며 1,036m의 동봉과 1,041m의 서봉을 전위로 거느리고 사방으로 능선을 가르는데 주봉 팔공산에서 서북으로 파계봉(把溪峰900m) 파계재 한티재 산성(山城)이 있는 가산(架山901m)에 이르는 능선은 그 길이가 20km이며 『한티마을』은 파계재와 한티재 사이의 능선 북서쪽 원지곡산(遠志谷山-일명 大峴洞) 골짜기에 위치 한 두메마을이다.
한티(大峴)에 천주교신자 취락이 언제부터 형성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830년대에는 신자들 사이에 알려진 피난지로 경기도 충청도 등지에서 신앙의 안전지대를 찾아서 남하하는 실향(失鄕) 신자들이 찾아들었던 곳이다. 그래서 1850년부터 영남지방 전교를 맡았던 두 번째의 방인사제 최양업(崔良業 토마)신부와 1816년 후반부터 영남지방 전교담당자이던 다블뤼(A.Daveluy安敦伊) 보좌주교가 한티(大峴)를 순방하고 성무를 집행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조선대목구 제4대교구장 베르뇌(S.Berneux張敬一)주교는 1862년도 성무집행보고서에 『칠곡고을 굉장히 큰 산중턱에 아주 작은 외딴 마을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서 40명가량이 성사를 받았다』고 하였다.
지리적으로 높고 깊숙한 한티는 박해시대의 신자들 피난처로서 옹기굴도 마련되고 화전(火田)으로 일군 농토도 개척되어 당시 대구의 신자들은 교난(敎難)의 기미가 보이면 즉시 한티로 은신하였고 박해의 피바람이 가시었다고 짐작되면 다시 생활터전으로 돌아갔는데 이웃 외교인들에게는 먼지방에 장사하러갔다가 돌아온 것처럼 했다고 한다. 『신나무골』 신자들도 포졸들이 덮치는 위급한 때는 10리와 40리 거리를 두고있는 『어골』(於巨洞)과 『원당』(元堂里) 그리고 한티로 피신했다. 『어골』과 『원당』은 『신나무골』에서 한티로 가자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중간지점이다. 1861(哲宗12)년 이때 한양과 그 인근지방에는 박해가 없는 소강시대였는데도 칠곡지방에는 갑자기 『신나무골』에 포졸들이 들이닥쳐 신자들은 뿔뿔이 도망쳤다. 이때 배손(裵孫)의 가족 5명도 『여붓재』(餘火峴) 쪽으로 도망쳐 『흑다리골』로 피신했으나 뒤쫓는 포졸의 추격으로 『갈골』(架山城쪽)로, 또 가산의 높은(901m) 등을 타고 한티(大峴)의 옹기굴에 숨었으나 끝까지 추격해온 포졸들에게 잡히고 『죽어도 천주님은 배반 못한다』고 한 이선이(李先伊 엘리사벳) 부인과 맏아들 배도령(이름과 灵名 未詳16세)은 그 자리에서 참수되었다. 또 상주 살던 풍양조씨(趙氏) 가롤로는 천주교를 믿는것 때문에 문중에서 추방되어 여러지방을 전전하다가 한티에 정착했으나 병인대교난 시기인 어느날 한티에도 포졸들의 습격을 받아 조가롤로는 순교하여 한티 땅에 묻혔으며 그 후손들은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다가 대구로 전출했는데 후손중에는 조차성(趙且成바오로 1926년叙品) 신부가 있다. 한티에는 이름없는 순교자 무덤들이 여럿 있고 금교령(禁敎令)이 해제된 후에도 지방적 사군란으로 희생된 순교자들이 있다.
윤광선, 『새하늘 새 땅을 여는 빛』통권 제45호 (1987,1
경상감영 옥터
박해받던 교우들이 숨진 옥터
조선시대 대구에 설치된 경상감영은 행정 집행지였지만, 천주교인들의 순교지이기도 하다. 경북 도내 각지에서 박해를 받던 교우들은 교우촌에서 붙잡히면, 그 고장의 관아를 거쳐 경상감영으로 송치됐는데, 이곳에서 고문과 혹형을 견디지 못해 순교한 이가 적지 않았다. 경상감영의 옥사는 대구 읍성 ‘서아문’ 안의 옥골에 있었는데 그 위치는 대구시 서내동(西內洞) 8번지 그 일대이다. 오늘날 대안성당이 그 일대에 속한다.
1601년 대구에 설치된 경상감영은 죄인들을 잡아가두는 감옥을 설치하였는데, 이곳에서 천주교인들이 많은 고초를 겪고 옥사했다. 1815년 을해박해 때 경상도 동북부 지방인 청송, 진보, 영양, 봉화의 깊은 산골에서 체포된 33명 신자들이 경상감영으로 이송되어 와서 감사에게 문초를 받고 석방되거나 귀양가고, 끝까지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한 신자들은 20개월 동안 감옥에 갇혔다가 순교하였다. 그때 7명의 신자들은 감옥에서 옥사하고 7명의 신자들은 관덕정 형장에서 참수 치명하였다.
감옥에 갇혀서도 기쁨에 넘치는 평화누려
그 당시 신자들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불평 한 마디 없이 화목한 분위기를 이루었고, 낮에는 먹고 살기위해 짚신을 삼았고, 밤에는 공동기도를 바쳤다. 세상법으로 다스림을 받는 죄인들이었지만 항상 기쁨과 평화에 넘치는 모습을 지녀 대구 읍민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1827년 정해박해 때도 상주, 안동, 봉화 등지에서 처음 31명이 체포되어 혹독한 심문에도 끝까지 신앙을 증거한 6명의 신자들은 사형을 선고 받았다.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박경화 바오로, 김세박 암브로시오, 안군심 리카르도 등 3명이 옥사하였다. 나머지 박사의 안드레아, 김사건 안드레아, 이재행 안드레아 3명은 13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다가 1839년 4월 14일(음) 대구 관덕정 형장에서 참수치명 당하였다.
경상감영에서 옥사한 순교자
- 1815년 을해박해 경상감영 옥사자 : 7명
*김윤덕 아가다 막달레나: 1815년 5월(50세) / *최봉한 프란치스코: 1815년 5월(30세) / *서석봉 안드레아: 1815년 / *김시우 알렉시오: 1815년(34세) / 김흥금(세례명이 없어서 시복 추진 제외): 1815년 / 김장복(세례명이 없어서 시복 추진 제외, 김흥금 아들): 1815년(19세) / 안치룡(세례명이 없어서 시복 추진 제외): 1815년 (50세)
- 1827년 정해박해 경상감영 옥사 : 3명
*박경화 바오로: 1827년 9월 27일(71세) / *김세박 암브로시오: 1828년 10월 27일(74세) / *안군심 리카르도: 1835년
- 1866년 병인박해 : 2명
서인순 시몬: 1866년 / 송 이야기: 1866년
(* 표는 2007년 현재 시복 추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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