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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약전 (신유박해 순교자들)
사제영입 앞장선 호남의 사도
전주의 초남에서 살았던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 1756~1801년)은 양반집안 출신으로 덕망이 높아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는데, 그 외에 재산이 많아 상당한 세력을 지니고 있었다.
1791년 제사문제로 공식적인 사형집행으로 순교한 한국교회의 첫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의 이종사촌이기도 한 그는 사촌인 윤지충에게서 교리책을 빌려보고 관심을 가졌다. 유항검은 천주교 교리에 대해 더욱 깊이 알아보고자 하여 양근의 권일신을 찾아가 배우고 입교하여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그리고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며 집으로 돌아와 많은 가족들을 가르쳐 신자가 되게 하고, 친구와 이웃에게도 열정을 다해 교리를 전하였다. 그의 영향력과 한결같은 열성과 모범적인 신앙생활은 그로 하여금 반도의 남쪽 호남지역의 반석으로 인정받게 하여 우리는 그를 호남의 사도라 부른다.
그의 사도다운 면모는 그의 가족들이 천주교로 인해 참수 당한 모습에서도 충분히 볼 수가 있다. 우선 그의 동생인 유관검은 그와 함께 같은 날인 1801년 10월 24일에, 그리고 며느리인 이누갈다와 함께 동정부부 순교자로 유명한 장남 유중철 요한과 차남 유문석은 1801년 11월 14일에, 부인 신희와 조카 유중성 마태오, 옥중서간으로도 널리 알려진 며느리 이순이 누갈다 등은 1802년 1월 31일에 각각 순교하였다. 참으로 온 집안이 다 얼마나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는지 짐작이 될만하다.
단 한 사람의 선교사도 없이 자생적으로 시작한 명례방 김범우 선생 댁의 집회가 바로 그 이듬해인 1785년에 형조에 의해 발각되어 최초의 천주교 박해 사건인 소위 을사추조적발 사건이 일어 났다. 한국교회는 그 첫 싹부터 잘리는 박해를 받아 집회는 해체되고 유림의 거센 반발 속에 버려졌다.
이러한 어려운 때에 권일신, 이승훈, 정약용 형제 등이 1787년경 교회재건운동을 벌이면서 평신도에 의한 임시 교계제를 설정하였다. 아직 교계제에 대한 교리 지식이 부족했던 그들은 스스로 사제직을 수행하기도 했는데, 이 때 유항검도 신부로 임명받아 동참했다. 고향인 전라도에서 설교하고 세례도 주고 고해와 견진성사를 집행하였다. 그러나 그는 교리공부를 통해 이러한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의심을 품게되어 북경 주교께 문의하여 잘못임을 알고는 즉시 중단하고 평신도로 돌아가 신앙생활을 계속했다.
이 무렵 제사문제에 대한 북경의 회답도 있어 당시 많은 양반신자들이 제사를 드리지 않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교회를 떠났다. 아직 신심이 깊지 못한 상태에서는 당연히 현실적 문제가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유항검은 이러한 난관 속에서 용기와 믿음을 잃지 않고 복음전파에 힘쓰며 윤지충과 함께 교리 공부에 더욱 충실하였다.
초기교회에서는 이 일련의 사태를 겪으면서 사제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어렵게 전개한 사제영입운동이 성공하여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게 되었다. 유항검은 더욱 용기를 얻어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전라도 지방을 순회 사목하는 신부님을 자신의 집에 모시고 직접 보좌하였다. 엄중하게 비밀을 지키며 온갖 제약 속에 활동하던 그는 마침내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가장 먼저 체포대상으로 지목 받아 1801년 3월에 전주 감영으로 끌려갔다.
감사는 지방의 토호로 명망과 세력을 지닌 유항검을 다루기 위해 더욱 위엄과 절차를 갖추어 준엄한 심문과 고문을 했다. 유항검은 서양인을 청해오는데 비용을 부담했으며, 외국인을 입국시켜 자신의 집에 묵게 하고 사도를 널리 전했다는 점에 대해 심문을 당하고, 특히 서양의 선박을 초빙하여 나라를 위태롭게 하려 했다는 소위 대박청래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심을 받고 고문을 당했다.
유항검은 서울로 압송돼 의금부에서 심문을 받았는데, 그는"나라를 위태롭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서양선박을 초빙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서양과 우리나라가 친교를 맺음으로써 새로운 문명의 혜택을 받아 우리도 남과 같이 잘살아 갈 방도를 취하려고 한 것이며, 이렇게 되면 조정에서도 천주교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어 탄압하지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라고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조정에서는 의심과 경계를 풀지 않고 유항검에게 사형판결을 내렸다.
한때 그가 곤장을 맞고 성교의 신봉을 구태여 고집하지는 않았다고 하여 결코 그를 소홀히 할 수는 없다. 그의 생애와 교회에 기여한 업적과 가족들과 그 자신의 순교는 오히려 그의 굳건한 신심을 의심할 수 없게 한다.
유항검은 수렴청정하며 박해령을 내렸던 김대비의 주장에 따라 호남인들이 천주교를 신봉하지 못하도록 경계하기 위하여 전주감영으로 보내져 전주성 내에서 참수되고 능지처참을 당했다. 이에 따라 호남의 사도 유항검은 옥중서간과 동정부부의 순교로 너무도 유명한 그의 며느리의 간절한 옥중기도 속에 1801년 10월 24일 사십 육세의 나이로 능지처참되어 자신의 한 때의 나약을 피로 씻는 순교의 영광 속에 주님께로 나아갔다.
[가톨릭신문, 2001년 11월 25일,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2. 복자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유항검 아우구스티노(1756-1801년)
전주 초남이(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의 양반 집안에서 1756년에 태어난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전라도 지역 최초의 신자가 된 것이다. 1801년에 순교한 유중철 요한과 유문석 요한은 그의 아들이고, 그 이듬해에 순교한 이순이 루갈다는 그의 며느리이며, 유중성 마태오는 그의 조카이다.
유 아우구스티노에게 교리를 가르쳐 준 사람은 경기도 양근에 살던 인척인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였다. 그는 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집에서 주요 교리를 배우는 동안 이를 진리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내 이승훈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은 뒤에 고향으로 내려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가족과 친척은 물론 그의 집에 있던 종들도 모두 그의 전교 대상이 되었다.
이제 유 아우구스티노에게는 빈부귀천이 따로 없었다. 그는 교회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면서 모두에게 모범을 보여주었으며, 가난한 이웃은 물론, 자신의 종들에게도 애긍과 희사를 베풀었다.
1786년 봄, 이승훈 베드로를 비롯하여 지도층 신자들이 모임을 갖고 임의로 성직자를 임명하였을 때, 유 아우구스티노도 전라도 지역의 신부로 임명되었다. 이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거나 그들을 모아 놓고 미사를 집전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에 지도층 신자들은 이러한 행위가 독성죄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따라서 유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의 성무 활동을 중단하였다.
지도층 신자들은 이때부터 북경에 밀사를 파견하는 데 몰두하였다. 유 아우구스티노 역시 이 계획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1789년 말 밀사 윤유일 바오로를 북경에 파견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헌납하였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유 아우구스티노는 신주를 땅에 묻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그러나 이듬해에 이종사촌 윤지충 바오로가 제사를 폐지한 죄로 체포된 뒤, 잠시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다가 전주 감영에 자수하여 형식적으로 배교를 선언하고는 석방되었다.
1794년 말,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유 아우구스티노는 아우 유관검을 신부에게 보내 전라도 순방을 요청하였다. 그때 마침 조정에서 신부 체포령을 내리자, 주 야고보 신부는 이를 피해 지방 순회에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경기도와 충청도를 거쳐 전주 아우구스티노의 집을 방문하여 인근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하였다.
주문모 야고보 신부는, 이후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선교사를 태운 서양 선박을 조선에 파견해 주도록 요청하는 계획을 세웠는데, 유 아우구스티노가 앞장서서 이 계획을 도왔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오랫동안 결실을 얻지 못하였고, 그러던 차에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났다. 그에 앞서 유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의 장남 유중철 요한과 이윤하 마태오의 딸인 이순이 루갈다가 동정 부부 서약을 하고 혼인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박해가 일어나자마자, 유 아우구스티노는 전라도 교회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가장 일찍 체포되었다. 이어 그는 전주에서 한양으로 압송되었으며, 포도청과 형조, 의금부를 차례로 거치면서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때 박해자들은 선교사와 서양 선박 요청 계획의 주동자로 유항검 아우구스티노를 지목하고 모든 것을 실토하라고 강요하였다. 그러나 이미 순교를 각오하고 있던 그는 결코 신자들을 밀고하거나 교회에 해가 되는 말을 하지 않았다.
박해자들은 결국 유 아우구스티노에게서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이에 그들은 그에게 모반죄를 적용하여 능지처참(陵遲處斬刑 : 대역죄를 범한 자에게 과하던 극형으로, 죄인을 죽인 뒤에 시신의 머리, 몸, 팔 다리를 토막 쳐서 각지에 돌려 보이는 형벌)을 하도록 하였고, 이러한 판결에 따라 유 아우구스티노는 전주로 옮겨져 10월 24일(음력 9월 17일) 남문 밖에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성 다블뤼(St. A. Daveluy, 安敦伊) 주교는, 뒷날 그가 배교한 것 같다는 추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유항검이 배교하였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정하므로, 그는 하느님 앞에서 다른 순교자들의 팔마가지를 받으리라 믿는다.”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3.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재산 · 명예 · 목숨까지 바치며 하느님 증거한 '호남의 사도'
- 조정에서 대역부도죄로 능지처참형을 선고받고 고향인 전주 풍남문 밖으로 끌려가는 유항검. 능지처사라고도 불리는 능지처참형은 사지를 찢어 죽이는 극형으로, 유항검을 처형하고자 포졸들이 소를 끌고 가고 있다. 그림=탁희성.
요즘도 50마지기쯤 농사 지을 땅이 있으면 중농으로 친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유항검(아우구스티노, 1756~1801)이 소유한 토지는 전주 인근 10여 개 고을에 걸쳐 자그마치 1만 5000마지기나 됐다. 1마지기는 지역별로 계산방법이 150평에서 200평, 300평 등으로 들쭉날쭉하지만, 전라도에선 300평으로 계산하니 이를 기준으로 하면 450만 평 규모다. 요즘 단위로 환산하면 1487만633㎡(1488ha)이니 어마어마한 대부호였던 셈이다.
'그집 땅을 밟지 않고는 열 곳이 넘는 동네를 못 지나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부자였던 유항검은 왜 호남의 첫 가톨릭 신자가 됐을까. 그 많은 땅과 재산, 명예, 심지어는 목숨까지 기꺼이 바치며 '호남의 사도'로서 신앙의 길을 걸어갔을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선 그의 삶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유항검의 출생지는 전주 초남이다. 지금의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다.
호남 부호였던 아버지 유동근과 어머니 안동 권씨 사이 양반가에서 1756년 태어난 그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 초기에 교리를 배워 입교한다. 전라도에서 최초의 신자가 된 것이다.
그 이유는 뭘까. 세상 부러울 게 없는 그에게도 고민은 있었다. 부에 걸맞는 지위는 갖지 못했던 것. 양반인데다 진사였지만, 남인(南人)에 속해 제약이 뒤따랐고 자신의 뜻을 펼치며 살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유항검은 경기도 양근 권철신(암브로시오) 집에서 권철신과 문하생들이 서학을 탐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간다. 그곳에서 천주교 서적과 십자고상을 접한 유항검은 권철신의 동생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서 교리를 배운다. 그리고서 이승훈(베드로)에게 세례를 받고 입교한다.
입교 직후 고향으로 돌아온 유항검은 가족과 친척, 노비 등에게 복음을 전한다. 세례 이후 그에겐 빈부귀천이 따로 없게 됐다. 그는 교회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면서 모두에게 모범을 보였고, 가난한 이웃과 노비들에게 애긍을 베풀었다.
제5대 조선대목구장 다블뤼 주교는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을 통해 유항검이 교리를 배우고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처음 교리를 듣자마자 그의 올바른 영혼은 진리의 빛을 따랐고, 이를 지체없이 실천하기 시작했으며, 자신의 집에 돌아온 뒤로는 많은 가족들에게 이를 알렸는데, 그들 역시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가 지방(전주)에서 누리던 크나큰 존경과 영향력은 그가 친구와 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는 확실히 이 지방 교우공동체의 기반이었고, 어떤 사람들은 그가 남부지역의 신부로 지명됐다고 말하기까지 하지만 충분한 증거는 없다.(가성직제도 시행 당시 전라도에서 신부로 임명된 신자는 유항검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주문모 신부는 (전주에 왔을 때) 유항검의 집에 얼마간 머물렀다."
1786년 가을에는 가성직자단의 신부로 임명돼 미사를 집전하며 성무활동에 전념하는 한편 이종사촌인 윤지충(바오로)의 집에 자주 모여 동생 유관검(1768~1801, 세례명 미상)과 함께 교리를 연구했다.
그러나 이듬해 봄 사제품을 받지 않은 사람이 성사를 집전하는 것은 부당할 뿐 아니라 독성죄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유항검은 이를 이승훈에게 알리고 자신의 성무활동을 즉각 중단했다. 이를 계기로 1789년 겨울 윤유일(바오로)과 함께 북경에 파견되기에 이른다.
이어 두 번째로 중국 베이징에 파견된 윤유일이 천주교회에선 조상제사를 금지한다는 사실을 전하자 유항검은 교회 명령을 충실히 지키고자 신주를 조상 무덤에 묻고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이는 당시 많은 양반 교우들이 조상 제사 때문에 교회를 떠난 것과는 상반된 처신이다.
그런 가운데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나 윤지충이 처형되자 유항검은 7개월 동안 피신해 있다가 자수한 뒤 배교하고 풀려난다.
하지만 이는 입으로만 배교한 것이었지 마음으로 배교한 것은 아니었다. 이후 신앙생활을 계속하던 유항검은 1795년 5월 주문모 신부를 맞아들여 미사를 봉헌하고, 상경해 주 신부를 만났으며, 자주 서신 왕래를 했다.
1796년 겨울 주 신부가 신앙의 자유를 얻고자 서양의 큰 배가 조선에 와서 외교교섭을 하도록 간청하는 편지를 베이징대목구장 주교에게 보낼 때는 동생 유관검 등과 함께 돈 400냥을 모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오랫동안 결실을 얻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박해가 일어난다. 1801년 신유박해다.
박해에 앞서 유항검은 자신의 장남 유중철(요한 사도)과 이윤하(마태오)의 딸 이순이(루갈다)가 동정부부로 서약하고 혼인하는 것을 허락한다.
박해가 일어나자 박해 주도세력은 처음부터 유항검과 그의 가족을 노렸다. 그가 전라도 교회의 우두머리로 지목됐기 때문이다. 그해 3월 전라도 신자 가운데 최초로 체포된 그는 의금부에서 조사를 받은 뒤 형조로 이송돼 문초를 받았고, 그해 9월에는 형조 전옥서에서 다시 의금부로 보내져 추국을 받았다.
혐의는 그 유명한 '대박청래 일장판결(大舶請來一場判決)'이라는 말에 집약돼 있다.
"서양 군함이 조선에 출병해 조선 조정이 순순히 말을 듣지 않는다면 무력으로 한 바탕 결판을 내야 한다"고 동생 유관검이 말했다는 혐의로 형조와 의금부에서 심문을 받는다.
문초 당시 박해자들은 선교사와 서양 선박 요청 계획 주동자로 유항검을 지목하고 모든 것을 실토할 것을 강요한다. 하지만 그는 순교를 각오하고 있었기에 신자들을 밀고하거나 교회에 해가 되는 말을 하지 않았다. 박해자들은 결국 유항검에게서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다.
이에 조정은 유항검에게 대역부도죄를 적용, 능지처참형을 선고했다. 이 판결에 따라 전주로 이송된 그는 풍남문 밖에서 순교한다. 순교 당시 그의 나이는 45살이었다. 1801년 10월 24일(음력 9월 17일)의 일이다.
유항검의 가족 중 동정부부 순교자로 유명한 아들 유중철과 며느리 이순이, 둘째 아들 유문석(요한), 부인 신희, 조카 유중성(마티아) 등도 그의 순교를 전후해 순교의 화관을 썼다. 유항검과 신희, 아들 유중철ㆍ문석 형제, 이순이, 유관검과 그의 부인 이육희 등 순교자 7위의 묘는 전주 치명자 산에 합장돼 있다.
유항검의 남은 가족들은 노비로 끌려갔고, 적몰 재산은 모두 호조에서 환수했다. 그가 살던 집은 헐어 없애고 그 터에 연못을 만들었다.
전주교구 초남이성지(전담 하태진 신부)는 날마다 오전 10시 30분(토 오후 3시ㆍ일 오전 11시) 유항검의 고향 생가터에 파놓은 연못 옆 경당에서 순례자들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문의 : 063-214-5004
다블뤼 주교는 훗날 그가 배교한 것 같다는 추정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유항검이 배교했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에 의해 부정되므로 그는 하느님 앞에서 다른 순교자들의 팔마가지를 받으리라 믿는다."
[평화신문, 2013년 2월 10일, 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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