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효근張孝根 선생 프로필
이칭,별칭 - 자 자안(子安), 호 동암(東菴)
출생,사망 - 1867년(고종 4) ~ 1946년
성격 - 독립운동가, 국가유공자, 천도교인
본관 - 덕수(德水 : 지금의 경기도 개풍), (아버지 장호張浩)
저서(작품) - 《장효근일기》, 《한집閑集》
대표관직(경력) - 천도교 서울교구장, 대통령표창, 애족장
생애 및 활동사항
1898년 8월 이종일(李鍾一)·유영석(柳永錫) 등과 함께 『제국신문(帝國新聞)』 창간, 보급에 참여하였다.
1906년 6월 오세창(吳世昌)·이인직(李人稙)·권동진(權東鎭) 등과 같이 천도교의 기관지인 『만세보(萬歲報)』를 창간, 민족혼을 일깨웠다. 1909년 6월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의 후신인 대한협회(大韓協會)의 기관지 『대한협회회보(大韓協會會報)』를 발행, 애국계몽운동을 펼쳤다.
1910년 국권상실 이후 천도교 직영의 보성사(普成社)에 입사하여 서기, 총무를 역임하였다. 이 때 이종일과 같이 보성사를 중심으로 천도구국단(天道救國團)을 조직하였다.
1919년 2월 27 보성사 총무로 있으면서 최남선(崔南善)이 초안한 독립선언문 2만 1000여 장을 보성사 사장 이종일과 협의, 김홍규(金弘奎) 등의 주선으로 인쇄하여 전국에 배포하였다. 이로 인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 1920년5월 천도교 경성교구장에 임명되어 포교활동과 여성교육을 위한 교육활동에도 힘쓰다가 1922년12월에 퇴임하였다. 한편 보성사의 총무로 있으면서 천도교의 지하신문인 『조선독립신문』 발간에도 참여하였다. 1922년 3월 제2의 3․1 운동을 계획하던중 잡혀 문초 받기도 하였다.
경성교구장을 퇴임하고 또 보성사가 방화된 이후 1925년경에 행주내리로 낙향한 후로는 충장공 권율장군 기공사 수리 기성회를 주관해서 완성하는등 민족기상정립을 위한 대외활동, 후진양성을 위한 교육등 지역사회를 위해 헌신 하면서 시문을 짓고 일기를 남겼다.
『장효근일기』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그 가치를 인정받아 기록문화재로 등재 되었는바 학술적인 번역작업과 종합적인 평가.해석이 필요한 시점이다.
상훈과 추모
1977년 대통령표창, 1990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장효근일기(張孝根日記)』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 후손 장세청 정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