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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난다 세 분 스승 모시고 이야기마당을 펼치고 있는데, 오늘로 두 번째 마당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주제가처럼 부르는 <숲>을 두 번 함께 부르고 시작하겠습니다.
내 마음이 숲이었음 좋겠어 걸어 다닐래
내 마음이 숲이었음 좋겠어 숨을 쉴래
햇빛이 그리는 그림이 마음을 적시고
나뭇잎이 부르는 노래가 몸을 채우는
숲숲숲숲 살아 있는 숲
숲숲숲숲 살게 하는 숲
신난다 어제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네 가지 정도, 질문이 나왔습니다. 가슴을 열어, 그 질문으로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어제 오하이오의 춤을 봤잖아요? 아이들 앞에서 춤을 출 때는 그루브가 있게 췄는데, 어른들 앞이라 그랬을까요? 아주 격조 있게 추더라구요. 오늘은 어제 선생님들께서 머물렀던 집, 소현의 청아한 연주로 이 자리를 열도록 하겠습니다. 박수로 맞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소현, G선상의 아리아 연주하다.
(손뼉치다. 멋져요! 대단하다!)
신난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첫 질문은 사랑어린마을인생학교 스콜레 친구들이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에 대한 지혜를 구하고 싶어요. 착착께서 먼저 이야기를 열어 주시고 날개도 덧붙여 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착착 학생들이 직접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사랑어린• 청년 승희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고서 뭘 할 수 있을까? 하다가 10월에 그림을 그렸는데 그걸 더 구체화시켜 보자고 했어요. 그리고 그림만이 아니라 학교 안에서 잘 가지 않는 공간을 활용해서 그림발표회를 열어보려고 했는데 힘이 들더라고요. 부담도 되면서 어떤 준비들을 해야 하는지 감도 안 오는 거예요. 그러는 과정에서 <생명의 정원>을 같이 읽었어요. 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요. 불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기운이 있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우리가 작은 모닥불을 피워놓고 배움터의 추억, 앞으로 배움터가 갈 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자리를 만들어 보자는 것까지 나왔어요. ㅎ ㅎ
신난다 이렇게 우여곡절을 거쳐 가면서 조금씩 변화해 가고 있어요. 착착께서 먼저 도움을 주시면 어떨까요? 아, 이 모임 전에 풍경소리방에서 스콜레친구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도 공유해 주시면 좋겠어요.
착착 그러면 페이퍼를 잠시만. (사랑어린청년으로부터 종이를 건네받다) 학생들이 적은 거거든요. 한번 볼게요.
그림을 그리자 (있기는 하지만, 가지 않는 공간에서 그림발표)
10월달에 그렸던 그림을 구체화시키자.
두더지왈, 학교를 디자인해보라.
함께 모여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거기에서 나온 이야기를 토대로 시와 노래를 떠올려 오고 그림을 그렸다.
그림은 각자가 바라는 배움터의 빛깔로 표현을 했다.
이렇게 적혀 있어요. 첫 시작점이 ‘두더지 왈, 학교를 디자인해 보라’는 거였어요. 첫 번째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1번으로 매기고, 두 번째 이야기를 나누는 토대를 2번, 시와 노래를 3번, 그 다음으로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 4번, 빛깔로 표현했다는 것이 5번이 되는 거예요. 가지 않은 공간이 6번이 되고 그림발표가 7번이 되겠죠. 이렇게 숫자를 매겨요. 1번부터 5번까지는 한 일이고, 6번, 7번은 하지 않은 것이죠. 이런 것을 프로세스process라고 하거든요. 이러는 것을 굳이 디자인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거죠. 그다음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과정이 디자인의 단계라고 생각을 해요. 프로세스를 실현해 가기 위해, 생각을 모으고 대화를 하고 그림을 그리고 하는 그것들이 ‘숲’이 되는 과정이라고 봐요.
전체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니까 너무 안으로만 들어가서 보려고 하지 말고, ‘잘 해야겠다.’가 아니라 스스로를 믿고, 자신들을 과정 속에 담아내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청년들과 했어요. 디자인은 별다른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나온 생각들을 모으는 거거든요. 한 생각이 사고를 만들고, 이 사고가 다시 태도를 만들고, 이 태도가 나를 만들고, 그래서 내가 생활하는, 그렇게 순환을 한다는 말을 잠시 했습니다.
두더지 오, 이런 소중한 말씀을!
날개 역시, 이렇게 프로세스가 착착!
사랑어린 착착!착착!
날개 뭐든지 착착이야!
신난다 (민선생님을 향해) 혹시 한말씀 보태어 주시면 이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청년들이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민병걸 눈이 부시네요. 저 배우미들 때문에 눈이 부십니다. 하하! 생각해본 적이 없는, 여러 가지 생각들을 접하게 되네요.
실질적인 내용에 조언하기는 상당히 어려울 것 같지만 어제 대화를 통해서 이런 생각이 들기는 했습니다. 저도 이 프로젝트가 어떻게 풀려가면서 진행이 될지, 그 결과도 상당히 궁금해요.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생각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중심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그걸 계속 유지하는 방법은, 생각의 주인으로 있기 위해서 ‘답을 구하지 않는 질문’을 계속 모아 보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질문을 계속 하는 거죠. 보통 답을 기대하고 질문을 하면 생각의 주도권이 넘어가게 되고 누군가에게 의존한다는 거죠. 그런데 답을 바라지 않으면서 질문만을 계속하면 질문 속에 답이 나오기도 하고, 서로의 생각 차이를 알게 되죠. 중심키워드는 하나였는데 그걸 바라보는 관점은 천지 차이구나 하는 것도 알게 되고, 질문을 통해서 서로 확인해 볼 수도 있습니다. 질문을 이어가다 보면 많은 부분들을 스스로 풀어내기도 하고, 뭔가 모호했던 부분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하지 않을까? 답을 구하는 질문은, 하기도 좀 두렵잖아요? 질문도 평가를 받거든요. ‘아주 좋은 질문이다!’ 이렇게 말하기도 하고. 질문에 평가를 받는 느낌이 들면 필터링을 하게 돼요. 그런데 그런 것 없이, 질문만 한다고 하면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고요. 그야말로 날 것들이 모일 수도 있고, 그런 것들을 모아서 더 생각할 수도 있죠. 여기 계신 날개나 착착께서도 지혜를 주시기도 하지만, 서로 질문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찾아가는 답이 훨씬 가치 있고, 생각의 주인으로서 얻게 되는 결과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다음 단계로는 질문 중에서 스스로 답한 것들에 대한 과정을 겪어 보는 거죠. 좀 막연하죠?
두더지 아니요.
사랑어린 짝!짝!짝!
날개 어떤 말이 좋을까 생각을 했는데. 요새 젊은이들이 창업하는, 특히 IT쪽에서 창업하는 작은 회사들이 ‘애자일Agile’이라는 기법을 많이 쓰거든요. ‘애자일’이라는 말은 ‘민첩하게’, ‘빠르게’인데 ‘원숭이처럼 빠르다’ 그럴 때 ‘애자일’이라고 그래요. 여기서 핵심은 두 가지예요. 빠르게, 쉽게. 사실은 천천히 해야 될 때도 있지만 세상이 굉장히 빠르기 때문에 그렇게 대처하지 않으면 자꾸 처지는 거죠. 특히 소프트웨어 개발이나 창업을 하는 데는 그 속도에 뒤쳐질 수가 없잖아요? ‘애자일’한 방법은 문제가 생기면 그걸 다 자르는 거예요. 조각 조각 내어서 쉬운 것부터 하는 거죠. 복잡한 것을 한꺼번에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잘라서 하는데, 중요한 것이 뭐냐면 ‘아님 말고!’예요. 했는데 아닌 것은 금방 손을 떼는 거죠. 반드시 성공시키려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했는데 아니면 금방 접어요. 아침에 시작했는데 점심때 아니면 얼른! 전혀 창피한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하는 거예요. 어떤 순차적이고 논리적인 생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저지르는 거죠. 성공하는 경험도 맛보고, 아니면 포기도 즐겁게 하고. 성공했어, 그럼 얼른 적용을 하고. 그러니까 작은 거라도 성취감을 맛보고, 그 경험에 의해서 다음 것을 하고, 그렇게 에너지가 중첩되고, 그것이 상승효과를 내는 거죠.
어려운 것을 한꺼번에 뭉뚱그려서 하면 자꾸 자신이 작아 보이기도 하고 힘들죠. 대부분의 배우미들은 어떤 과제가 있으면 이렇게 하더라구요. 과제를 혼자서 한 이틀동안 해요. 그리고 가져와서 펼쳐 놓는 거야. ‘날개, 놀랬지? 내가 이 정도인지 몰랐지?’ 하하하 그러면 거기에 도움말을 주기가 굉장히 단순해져요. 고작 ‘그래 맞다. 깜작 놀랬는데’ 이런 말밖에는 할 수 없어요. 하하하 그렇지만 과정 자체를 작은 것이라도 처음부터 하나하나 공개하면서 일을 하면 협업 관계가 굉장히 즐거워지는 거죠. 그리고 자주 만나면 달라요. ‘이렇게 하면 이런 방법도 있을 거야.’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될 것 같은데?' 경험을 나누면서 이야기하는 것이 상당히 자유로워져요. 이런 저런 잠담도 하고 쓸데없는 이야기도 하면서, 그러다 보면 뭔가가 보이기도 하거든요. 계속 보여 줘야 돼요. 보여 주는 것 자체가 중요해요. 사실은 저한테보다는 옆 사람한테 보여 주는 게 좋거든요. 위에서 쏟아지는 것이 아니라 옆에 있는 동료, 배우미들 사이에서 제일 많은 영감을 받아요. 서로 까놓고 하는 거죠. 일을 잘하는 방법은 그렇게 연구되고 개발되어 왔고, 좀 더 효휼적이게 하는, 하나의 과학이더라고요. 정성스럽게 열심히 하는 태도는 당연한 것이고요.
미국에서는 ‘디자인 싱킹 design thinking’이라 하고 유럽쪽에서는 ‘서비스 디자인 Service Design’하는 게 있어요. 똑같은 말인데, 구체적인 방법 중의 하나가 애자일! 구글링을 하다 보면 많이 나와요. 곧이곧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블로거에서 봤어, 그럼 한번 응용을 해 보는 거죠. 하다가 우리한테는 안 맞아, 그러면 ‘아님 말고!’ 그리고는 우리 [사랑어린마을배움터] 방식대로 하는 거지. 뭐! 이런 생각들이 들었어요.
신난다 혹시 덧붙어지는 질문, 있을까요?
민병걸 아까 질문하고 싶었어요. 왜 잘 가지 않는 공간에 뭔가를 일으켜서, 그곳으로 가게 하고 싶은 건지?
사랑어린•청년 승희 우리도 저마다 생각이 다를 것 같은데, 저는 우리 배움터 사람들이 함께 만든 공간이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 좀 속상하더라구요. 오래 비워 두었던 공간을 함께 사용하다 보면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랑어린•청년 다은 저도 비슷하게, 잘 지어놓은 공간을 활용도 안 하고 저렇게 묵혀 놓은 것이 좀 마음이 안 좋았어요. 그래서 우리가 이 프로젝트를 하는데 그런 공간을 잘 활용해 보는 것을 시작점으로 하면 어떨까? 그래서 그곳이 되살아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민병걸 아침산책하면서 (착착)선생님이 했던 이야기가 생각이 나네요. 자기 몸인 줄 알고 있었는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부분이 있더라는 거예요. 그런데 좀 연습을 하니까 숨은 근육을 발견하게 되고, 내 몸이 아니었던 곳이 비로소 내 몸으로 느껴졌다고 하셨거든요. 하하하
신난다 우리 배움터에 내 몸인데 내 몸이 아닌, 안 움직여지고 살아 있지 못하는 공간을 잘 발견하는 것이 필요하겠다, 그렇게 들려집니다.
두 번째 질문은 우리가 ‘어머니땅 야생숲 원림’이라는 이름으로 모임을 가져가고 있어요. 날개가 말씀하셨던 것처럼 디자인을 ‘멋지음’이라고 했을 때, 사람들의 인식, 편견들이 확장되고 그것이 삶으로 드러나는 과정이 ‘말(이름)’이지 않을까? 그럴 때 말의 힘이 생기겠지요. 어제 두더지가 제안한 것처럼 이 과정을 잘 담아내어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처럼 달을 보게 하는 명확한 이름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세 분께 그 지혜를 요청하고자 합니다. 어제 얼핏 듣기로는 민선생님은 이름을 잘 짓는다 하셨고, 착착은 명리학의 대가이시고, 또 날개는 ‘멋지음’이라는 이름을 벌써 지었으니까. 하하하 생각나시는 대로 말씀을 해 주시면 이것 또한 변화해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두더지 우선 착착께, 배움터 생년월일을 먼저 말씀을 드릴까요? 하하하
모두 하하하
착착 어제 제일 기억에 남는 단어가 하나 있거든요. ‘어머니의 말’. ‘어머니의 땅’은 보통 명사처럼 느껴져요. ‘어머니의 말’을 계속 생각했어요. 건축을 어떻게 ‘어머니의 말’로 할 수 있을까? 훌륭한 건축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말’같은 건축을 하고 싶었다는 걸 자각하지 못했는데 어제 날개가 때려 주셨네요. 하하하 ‘어머니의 말’로 건축을 시작해야겠다. ‘가이아’ ‘대지의 여신’ 이런 말들이 있잖아요? 저는 ‘어머니의 말’이 대개 좋았어요. ‘어머니의 말’이라고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날개 우리말에는 ‘의’라는 말이 없었어요.
영어를 그대로 번역하면 ‘어머니 말’, 마더텅 mother tongue이잖아요? 텅이 ’혀’니까. ‘엄마말’하면 말을 처음 배울 때 따라 하는, 좀 어리고 깊이가 얇은 것 같은데, ‘어머니말’이러면 깊은 지혜가 있고 한없는 사랑이 느껴지고, 모든 것이 응축되어 켜켜이 쌓여있고. 어머니가 없는 사람은 없잖아요?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이렇게 계속 중첩되어서, 켜켜이 쌓여, 끝에서 나온 말이잖아요? 어머니의 말은 사실은 오래된 미래예요.
물리학적으로 시간을 정의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해요. <우주이야기>(토마스베리/대화문화아카데미)의 첫머리를 읽고 충격을 받았거든요. 사실 시간은 우주탄생 이전부터 흘러온 줄 알았어요. 우주의 탄생으로 시간이 탄생했다는 말이 나와서 깜짝 놀랐거든요. ‘시간이라는 것도 태어난 적이 있었구나!’ 우리는 시간의 선상에서 미래를 생각하잖아요? 미래라는 게 아직 오지 않은 특정한 시점이 아니라 언젠가부터 흘러와서 지금 내 앞에 있는 거잖아요? 시간을 강물에 많이 비유하는데, 지금 흘러가는 이 강물이 미래로 가는 거죠. 저쪽에서 흘러와서 미래로 가는 거예요. 거기에 내가 발을 담그면 미래가 되는 거지. 이 미래는 오래된 미래였던 거예요. 미래는 오는 것이 아니라 가는 거예요. 지금 내가 여기에다 이쁜 꽃을 띄우면 이쁜 미래가 되는 거고, 일테면 그래요.
어머니가 하는 말도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 그 속에서 나온 말을 하는 것인데 우리는 촌스럽다고 배웠어요. 철저히 교육을 통해서 배운 거죠. 우리 초등학교 교과서는 일본책을 베낀 거거든요. 교과서에 나오는 것이 아니면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난도질을 당했어요. 괴산에 계시는 선생님이 [파티]에 오셔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안녕하세요?’ 이 말이 얼마나 맥이 없는 말이냐는 거예요. 우리는 시시때때로, 그 상황에 맞는 인사를 해 왔다는 거죠. ‘진지 잡수셨어요?’ ‘어디 가세요?’ 이렇게. 그런데 ‘안녕하세요?’는 혼이 없는 말이라는 거죠. 굿모닝good morning처럼 아무한테나 하는, 관념화된 말로 바뀌었다는 거예요. ‘진지 잡수셨어요?’ ‘지금 어디 가세요?’하는 말은 교육받은 말이 아니라 우리 생활속에 스며들어 있는 소중한 정서이고 말이라는 거죠.
옛날에는 허공에 말들이 몇 개 없었어요. 별이 말이거든요. 지금은 별이 수십만 개로 늘어났는데 인터넷이다, 뭐다 해서 온천지가 말로 뒤덮여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말의 총량은 같은 것 같아요. 전체 질량을 같아. 옛날에는 하나 하나의 말이 무거웠어요. 부피도 크고 말 한마디에 많은 것들이 뭉쳐져 있었는데, 지금은 파편이 되어서 가벼운 거예요. 사람이 ‘공부를 한다.’는 것은 말의 무게를 얼마나 느끼느냐? 그것이 공부의 질량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두 사람이 똑같은 일을 손에 들었다고 하더라도 질량의 차이가 있어요. 우리는 항상 어머니의 말은 순도가 낮고, 잔소리고 촌스럽다고 무시하면서, 대학원에서 박사를 받은 사람의 말은 훨씬 더 가치있다고 교육받았어요. 어머니나 할머니의 말은 순우리말이거든요. 아주 흔한 풀처럼 설명하지 않고 강요하지 않아도 그냥 알게 되는, 그래서 서로 공감하게 되어서 심금을 울리는 것이 있는 것 같아요. 얻어들어서 한자말인지도 모르고 쓰시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신사임당이나 허난설헌 이런 사람들은 특별한 거예요.
두더지 ‘어머니말’이 네이밍으로 괜찮다, 이런 말씀인지?
날개 아니, 다른 ‘어머니말’로 생각을 해 봐라 이거지. ‘어머니말’을 써도 되고, 다른 ‘어머니말’을 생각해 봐라 이거지. 공자님의 유명한 ‘정명正名’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자기 휘하의 제자들을 데리고 천하주유를 했잖아요? 그 핵심은 자기 일자리를 구하러 다닌 거예요. 직접 이야기는 못하고 인사하러 간 것처럼 가서는, ‘내가 굉장히 지혜로운 사람이니까 재상이 되면 나라가 부강해질 것이다.’하면서 은근히 세일즈하러 다닌 거죠. 한 나라에 갔더니 제후가 물어요. ‘공자님, 정치를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랬더니 正名해야 된다고. 바를 正, 이름 名자를 써서. 이름을 잘 붙이면 정치를 잘하는 거라고 했대요. 사실 이름 하나를 잘 붙이면 설명할 필요가 없잖아요? 쉽고, 간단하고, 이해하기 쉽게. 이름만 똑부러지게 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거죠.
적절하고, 그걸로 인해서 힘이 생기고, 다른 사람들이 이해가 되는 것으로, 이름을 짓는 그 자체가 핵심이죠. 일을 하는 가장 핵심적인 거죠. ‘땅’ ‘원림’ ‘숲’ 이런 말들이, 이 일을 담아내면서 상징하는 중요한 말들이죠. 제 경험에 의하면 그 뜻은 자라나는 것 같아요.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자꾸 하다 보면 뜻이 자라더라구요. 누가 와서, 이렇게 착착이나 민선생이 와서 그 뜻을 보태어 주고 가기도 하고, 생각지 않았던 것을 마치 씰seal처럼 아주 독특하게 해석해 주기도 해요. 처음부터 완벽하게 만들어서 하자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써 가면서 해 보는 겁니다.
민병걸 저를 이름 짓는 사람으로 규정을 해 주시니. 하하하
어제 저녁에 두더지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여쭤보기도 했어요. 신영복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세상을 보는 은유로서 ‘숲’이라는 개념도 있잖아요? 여기서는 관점에 방점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원림’이라는 이야기들을 하시니까 물리적인 실체로서 ‘숲’에 더 가까운가? 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거든요. ‘숲’을 대하면서 깨달음이랄까, 이런 것들을 찾으시려는 것인가 여쭤봤는데 실제로 ‘숲’이라는 것에 의미가 깊다는 말씀을 하셔서 낯설기도 했고, 숲이라는 노래를 이렇게 부를 정도면 뭔가를 정하고 있구나,하는 생각도 해요.
하룻밤을 지내면서 ‘숲’의 근원, 형태적 어원, 이런 것을 추측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노래를 부르다보니까 ‘숨’이라는 말에 꽂혔어요. ‘숨’이 ‘숲’의 어원일 수도 있겠다, ‘숨숲’이 세상을 보는 은유로써의 ‘숲’이면서, 모든 것을 다 포함하는 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숨’도 ‘어머니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숨숲’
착착 역시 전문가맞잖아요!
날개 맞어 맞어!
신난다 ‘어머니말’, ‘숨숲’. 날개께서는 어머니말로, 달을 잘 가리킬 수 있는 손가락의 의미를 표현하는 것으로 만들어 보는 것. 그것은 성장해 간다는 말씀을 해 주셨어요.
세 번째 질문은 결과물을 내는 것이 아니라 ‘과정 자체를 숲이다.’ 그리고 우리가 품고 있는 가치와 의미를 잘 알고 살았으면 좋겠고, 그것들이 잘 전달되어서 흘러가기를 바라거든요. 그러기 위해서 기록과 관련한 것들이 있는데, 착착께서 구체적으로 말씀을 해 주시면 좋겠어요.
그리고 숲에서 나오면 숲이 보이는데, 안에 있으면 숲을 제대로 볼 수가 없잖아요? 날개는 오랜 인연속에서 이 공간을 보셨고, 민선생님도 여기 오셔서 발견하신 것이 있을 것인데 두 분이 바라본 [사랑어린마을배움터]숲이 궁금해요. 살고 있는 사람은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는데, 이 숲을 바라보는 입장에서 말씀해 주시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착착 ‘숨숲’에 꽂혀서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하하하
도시사람들이 ‘답답하다’ ‘숨을 못 쉬겠다’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해요. 저도 보통 사무실에 아침 6시, 7시에 출근해서, 밤늦게까지 치열하게 미팅하고 프로젝트 관리하거든요. 프로젝트는 인원이 많을 때는 몇 백 명인데, 공무원, 시공자, 건축주, 목공, 철거, 이런 모든 사람들을 만나서 조율해야 하기 때문에 굉장히 치열하게 일을 합니다.
[사랑어린학교]에서 [사랑어린마을배움터]로 바뀌었잖아요? 왜 ‘마을배움터’로 바뀌었을까? 마을을 채워나가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부분일 겁니다. 마을이 갖추어야 할 것들이 있잖아요? 농촌에 있는 사람들은 60대 이상이죠. 자식들은 다 외지에서 살고,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죠. 그렇다면 기존의 문화를 지속하는 것보다 새로운 사람들의 문화를 어떻게 마을과 연결할 것인가? 살면서 체감되는 것들도 많을 거예요. 농촌에 정착하려는 사람들이 어떻게 숨 쉴 수 있을까? 이 마을의 생태계와 어떻게 어우러질 수 있을까? 숲은 깃들게 하고 정착이잖아요? ‘숨숲’과 ‘마을’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민병걸 어제 오늘 보고 들은 것으로 이 공동체를 말하기는 어려운데 이런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이곳의 삶은 대단히 모험적이다, 그것에는 분명히 두려움 같은 것이 있을 것이다, 어떠한 확신도 쉽게 만들어지지 않으니 자연스러운 것일 것 같다. 그리고 더디 움직이기 때문에 두려움이 증폭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어제 저녁에 학부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배움터에 처음 왔을 때 (관옥)할아버지께서 ‘누굴 해하는 일이 아니면 무슨 일이든지 해 봐라’ 그 말씀이 아직도 울림으로 남아 있다고 해요. 여기는 두려움 같은 것이 있을 수는 있는데 혼자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계시는 것 같아요. 사람들한테 기대고, 기운을 얻고, 용기를 내는 것 같아요. 뭔가 다른 방식으로, 이런 과정들을 열어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크게 기대가 되기도 해요. 새로운 시도라는 것이 좀 모호하기도 하고 불안함 같은 것도 분명히 있을 것인데, 이럴 때 ‘아님 말고!’ 정신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막연히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날개 호박죽이 맛있네요. 제가 이야기할 테니까 드세요. 모든 분들이 드시는 숟가락 소리를 들으면서 제가 이야기를 할께요. 하하하
저는 디자이너로 한 삶을 살았는데, 그 ‘멋지음’에는 특징이 있더라구요. 개념을 시각화시키는 거예요. 아니면 어떤 생각을 만져볼 수 있게 하는 게 디자인이고 그걸 멋있게 하는 거죠. 텐저블 tangible, 실체를 만들어내는 것. ‘숲’이라는 걸 개념화시킬 때는 굉장히 커지는 것 같고 그래서 뭐부터 해야지? 하게 됩니다. 숲이 되려면 실제로 어떻게 하는 거야? 숲이 되려면 씨앗이 땅에 떨어지거나 묘목을 심는 때가 있잖아요? 그 굉장히 커지고 뭐부터 해야지? 이렇게 되는데 숲을 보이게 하는게 실제로 어떻게 하는 거야? 숲이 되려면 씨가 떨어질 때도 있을 것이고 묘목을 심을 때가 있는 거잖아요? 숲에 대한 전문가, 특히 조경 전문가도 도시조경과 농업대, 두 뿌리가 있더라구요. 이들은 조경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달라요. 농대쪽에서 조경을 생각하는 것은 그냥 개념이나 이념으로써 숲이 아니라, 들어왔는데 숲이 느껴지면 그게 숲이더라구요. 그걸로 이야기를 다 한 거예요.
구조주의 교육이라고 하는 것은 환경을 만드는 거잖아요? 여기에, 지금 당장 어떤 나무를 심고 아니면 내년 봄에 하려면 지금 뭘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인지, 거창한 마스터플랜으로 환경을 만들기도 하고 여기처럼 아침에 바닷길을 걷는다든지 이렇게 자연환경 자체가 교육이기도 하죠. 일을 연역적으로 하는 방법도 있고 귀납적으로 하는 방법도 있잖아요? 굉장히 직관적으로, 일들을 저질러요, 느끼게 하는 거죠. 그러다가 잘못 심었어요. 그러면 그것을 보완하려고 하고 균형을 맞추려고 하는 거죠. 이것은 신영복 선생의 신념인데, 서예가잖아요? 서예에 대한 굉장한 확고한 지론이 있어요. 서예는 한 획도 자기가 의도한 대로 가는 법이 없다는 거죠. 쉽게 말하면 삑사리가 난다는 거죠. 하다가 이렇게 됐어, 그러면 이걸 살리려고 그 다음 글씨는 균형을 맞추려고 다르게 간다는 거예요. 이것이 그분이 가진 서예에 대한 지론이예요. 이건 정말, 서예를 몸으로 하는 사람의 이론이라고 생각해요. 서법은 많이 발달되어 있어요. 그러나 이분은 감옥에서 직접 배워서, 하신 분이잖아요? 모든 것이 다 완성된 상태에서, ‘자, 그래. 여기에서 할 거야’ 하는 것은 당연히 멋있죠. 그런데 우리가 아는 것만큼, 조언을 받아서, 한 그루부터 차근 차근. 그러다가 잘못된 것이 있어, 그러면 그걸 보완하기 위해 이렇게! 사람들은 사실, 실패한 스토리를 훨씬 더 좋아하거든요. 예전에 외국에 가서 컨퍼런스에서 발표를 하는데 갑자기 컴퓨터 에러가 난 거예요. 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있는 데서 제가 긴장하고 허둥지둥하고 쩔쩔매고 하는 것을 사람들은 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보기에는 유쾌하고 통쾌한 거예요. 하하하
[사랑어린마을배움터]은 아주 세련되고 이런 게 아니라 진심이 매력이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아침에도 덕德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덕이 직심直心이거든요. 승하는 직심. 그저 생각이 나는 구체적인 행위를 질러 버리는 것, 그걸 하다가 그 과정 속에 좋은 생각이 태어나는 거예요. 언젠가 인터뷰를 할 때 ‘언제 발상을 하냐?’ 그런 질문을 많이 받거든요. 그런데 제가 하는 것을 보니까, 저는 무조건 하고 있었더라구요. 뭔가 생각이 정리가 되어서 하는 것은 많지 않아요. 생각이 나건 말건 컴퓨터 앞에 있거나 스케치를 끄적이고 있거나, 그러는 과정 속에서 뭔가가 생각이 나고, 끄적거리고 있는 그 상태에서 태어나더라구요. 이런 과정속에서 새로운 생각들이 태어나고 또 숙성시키는 과정 속에서 보완이나 개선이 나오니까 과정은 그만큼 가치가 있는 거죠. 민선생이 추천을 해서 <장인>(리차드 세넷/21세기북스)이라고, ‘생각하는 손’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책을 사서 봤어요. 제가 한 이야기는 그 책에 나와 있어요. 말하자면 행동할 때 좋은 생각이 나온다는 거예요.
신난다 마지막 질문이 지금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하는 것이었는데, 날개께서 미리 아셨는지 해 주셨네요. 이제 마무리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두더지부터 한말씀씩 해 주시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두더지 아쉬움이 크네요. 좀 더 깊이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것들은 과제로 남겨 두어야겠네요. 고맙다는 말 외에는 다른 게 떠오르지 않고요. 특히 민교수님, 함께 해 주셔서 참 고맙습니다. 예전에 오셨다는 걸 기억조차 못할 뻔 했는데.
날개 늘 묵묵히 계셔서.
두더지 그리고 이 과정을 함께 하고 있는 분들에 대한 애틋함이 크게 일었습니다. 그렇게 제 마음을 열게 하고, 깊게 만들어 주신 세 분 선생님께 특별한 고마움을 전합니다. 그럼, 이어서 착착. 제가 손 잡고 싶어서. 하하하
(두더지, 착착과 손을 마주 잡다)
착착 아침에 두더지께서 ‘덕이 무엇이오?’ 하고 물어 보시더라구요. 제가 혼쭐이 났어요. 저희 어머니가 ‘덕’자를 쓰셔서 저는 ‘덕’이 어머니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德이라는 게 곧을 直자에 마음 心자가 들어가잖아요? 곧은 것을 행하는 마음. ‘곡직하다’는 좀 특이한 말이 있어요. 사군자를 보면 소나무가 정말 굳건한 느낌이 있잖아요? 그런데 굽어 있거든요. 김봉렬선생님이 제 선생님이신데 ‘소나무의 곡직함이 한국의 건축을 좌우한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곧다’는 것은 ‘곡직하다’는 뜻인 것 같아요. 곡직한 마음을 행하는 것이 덕이다. 그래서 덕을 행한다는 것이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민병걸 20~30대 때는 돌아다녀도 산색 변하는 것을 잘 모르잖아요?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하루 하루, 그런 것에 시선이 가죠. 삶도 그렇죠. 결국에는 오랜 시간을 살다 보면 생명을 느끼는 디테일한 감각들이 생겨나는 거라고 볼 수 있어요.
아침에 개와 산책하는 배우미들을 봤는데 숲이라는 것이 저런 것이 아닐까 싶었어요. 또다른 생명에 대한 존중과 일체감을 느끼는 것, 숲은 생명에 대한 세밀한 이해 속에서 더 깊게 함께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하면 여기는 실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눈에 잘 보이지 않던 것들이 더 확장되고 깊어진다면 자연스럽게 ‘숲’속에 녹아들겠죠. 기대감이 생겼습니다.
날개 제가 가지고 있는. 제가 좋아하는 박경리선생님의 <문학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박경리/현대문학) 속에서 한 줄 읽어 드리는 것으로 대신 하겠습니다. 원주 연세대에서 유일하게 강의를 하신 내용을 담은 책인데. ‘문학은 삶의 총체성을 표현한다’ 이 챕터에 나온 첫 번째 말, 한 줄입니다. ‘예술은 생명에 접근하는 행위입니다.’ 울림이 있는 명쾌한 말입니다. 기차에서 읽으려고 했는데 여기 선물하고 가는 것이 낫겠다. 하하 짐 하나 덜었네.
(책을 두더지께 건네다)
신난다 이렇게 마무리하겠습니다. 서로 ‘우리는 사랑어린 사람입니다.’ 인사하고 마무리하겠습니다.
모두 우리는 사랑어린 사람입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