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16년(1792) 규장각 각신(閣臣) 남공철은 안의 현감으로 있던 박지원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자신을 비롯한 몇몇 젊은 관료들이 소설문체 때문에 정조에게 야단을 맞고 벌로 반성문을 쓴 근황을 적었습니다. 그러면서 경연 중에 정조가 박지원을 거론했다고 전합니다.
“요즈음 문풍(文風)이 이와 같이 된 것은 그 근본을 따져보면 모두 박 아무개의 죄이다. 이 자는 바로 법망을 빠져나간 거물이다. 《열하일기》가 세상에 유행한 뒤에 문체가 이와 같이 되었으니 당연히 결자해지하게 해야 한다.”
남공철은 편지에서 정조의 명을 전하며, 임금이 문체를 가다듬고 선비들의 취향을 바로잡으려하는 것이니 ‘순수하고 바른 글’을 두 달 내에 올려 보내라고 적었습니다. 박지원이 남공철의 조언에 따라 반성문을 써냈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자료마다 서로 다르게 나와 있기에 좀 더 살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명문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난 박지원의 필력은 당시에도 최고의 칭송을 받았습니다.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등 당대의 뛰어난 젊은 엘리트들이 ‘열하일기 문체’를 모방하였지요. 최고의 필력과 진보적 사상을 바탕으로, 대중적 유머와 시대의 언어를 풀어낸 소설을, 식자층에서도 체면을 내려놓고서 열독하였다고 합니다.
원래 조선의 문체는 성리학 경전에서 사용하던 고문체(古文體) 위주였고, 정조 시대 들어서서 비로소 다양한 문체가 유행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열하일기 문체‘가 단연 그 선두였습니다.
그러나 정조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문체가 바뀌면 생각이 바뀌고 더 나아가서는 주자학 중심의 왕권 통치 체제를 위협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1791년 정조는 명말청초(明末淸初) 문집의 수입을 금지시킵니다. 성리학을 제외한 모든 학문을 ‘이단’으로 규정한 뒤 “옛 사람인 공자를 다시 밝히려면 요즘 유행하는 문체를 금지해야 한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열하일기》를 쓴 박지원은 나라의 장래를 위태롭게 하는 저잣거리 패관(稗官) 문학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경고를 받게 된 것이었지요. 말하자면 정조는 조선시대 문학을, 그 문체를 빌미로 하여, 탄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역사에서는 이를 두고 ‘문체반정(文體反正)’ 또는 ‘문체순정(文體醇正)’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