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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 獅子
사자는 백수의 왕이라 불리울만큼 두려움이 없고 가장 뛰어난 위엄을 가진 존재로
받아들여진다. 몸과 마음을 고르게 하여 여러 가지 악행을 굴복시키는 부처님을 인사자人獅子라
칭하고, 부처의 위엄 있는 설법을, 사자의 울부짖음에 모든 짐승이 두려워하여 굴복하는 것에 비유하여
사자후獅子吼라 한다. 부처는 인간 세계에서 존귀한 자리에 있으므로 짐승의 왕인 사자에 비유하여
부처가 앉는 자리를 사자좌獅子座라 하여 부처가 사자와 같은 위세와 위엄을 가진 존재로 보았다.
사자상은 부처님의 위엄와 권능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거나 사자빈신獅子頻迅의 기개로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외호의 기능을 하는 한편, 사사자탑의 예에서 보듯이 깊고 오묘한 교의敎義를 드러내는
상징형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찰 장엄물의 하나이다.
불교미술에 사자가 처음 등장한 것은 기원전 3세기 경으로,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의 마우리아 왕조의
야쇼카 왕이 부처님을 흠모하여 그의 뜻을 기리고 불법을 널리 펴기 위해 불교유적지를 돌며 탑과 기념주를
건립했는데, 현존하는 30여기 중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석주의 모양을 보면, 기둥 정상에 겹으로 된
연꽃 대좌가 있고, 그 위에 3마리의 사자가 등을 서로 맞붙인 채 앉아 있다고 한다.
# 불국사 다보탑의 사자상
다보탑은 사사자 이형석탑이 아니고 석탑 중에 일반형을 따르지 않은 이형석탑으로 분류된다.
기단 위에 4마리의 석사자를 배치한 점이 특이하다. 보통 석탑을 보면 몇 층 탑인가 눈으로 보면
쉽게 알 수 있으나 다보탑은 그 층수를 알기 어렵다.
십(十)자 모양의 평면 기단에는 사방에 돌계단을 마련하고 8각형의 탑신과 그 주위에 네모난
난간을 돌리고 기단 위에 4마리의 석사자를 조형물로 배치하여 사자의 상징성을 나나냈다.
1902년까지만해도 사자가 4마리였으나, 일제강점기 때 3마리를 도난당하고
지금은 1마리만 남았다.
다보탑에는 왜 돌사자를 배치했을까?
다보탑의 정식 명칭은 다보여래상주증명탑으로, 법화경에 석가여래의 진리를
다보여래가 늘 증명한다고 하는 데서 유래한다. 법화경 견보탑품에 따르면
'석가여래가 법화경의 진리를 말하자 칠보로 장식한 탑이 우뚝 솟아올라 허공에 머물렀는데
석가여래가 탑문을 여니 탑안에 다보여래가 사자좌에 앉아 있었다'고 하였다.
다보탑이 화려한 것은 이와 관련이 깊고 기단 위에 돌사자를 배치한 것은
다보여래의 사자좌와 관련있는 둣 하다.
# 분황사 모전석탑의 사자상
분황사 석탑은 안산암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높이 9.3m의 모전석탑이다.
분황사 창건 당시 만들어진 석탑이 임진왜란 때 반쯤 파괴되었는데, 조선시대에 이 절의 중이
수리하려고 하다가 도리어 더욱 파손시켜 1915년 다시 수리를 하였다. 현재는 3층으로 되어 있으나
원래는 7층 혹은 9층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자연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는 화강암으로 조각한 사자 한 마리씩을 네 모퉁이에 배치했는데,
두 마리는 수컷, 두 마리는 암컷이라고 한다
석탑 기단 위 돌사자는, 탑을 수호하는 사자답게 힘차고 굳건한 자세로 앉아 있다.
# 구례 화엄사의 사사자삼층석탑
4마리 사자들은 입을 벌린 정도가 각각 다르다.
이 미세한 입모양의 변화 속에 불법의 깊고 오묘한 진리가 숨어 있다.
사자가 가장 크게 입을 벌린 것은 <A아>, 사자가 보통으로 벌린 것은 <U우>,
작게 벌린 것은 <M훔> 발음의 표현이며 ,
입을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침묵의 상태를 암시한다.
<A>는 입을 여는 소리,
<M>은 입을 닫는 소리로 일체의 언어와 음성이 이 두자 사이로 들어간다.
<AUM아훔>의 신비스러운 발성은 고대 인도의 베다의 찬미와 주문의 신성한 언어로부터
유래된 것으로, 그것은 창조의 완전성에 대한 표현의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A>는 경험과 함께하는 의식 상태이고, <U>는 꿈꾸는 의식 상태이며,
<M>은 기고 잠잠하고 분화되지 않은 의식 상태이다.
<A> <U>와 <M>의 발음 뒤에 따르는 침묵은 궁극적인 신비의 세계이며,
법성法性자체가 자아로서 체험되는 단계인 것이다.
<아훔>의 신비로운 발성 표현은 화엄사 원통전 앞 사자석탑,
제천 사자빈신사지 사사자석탑에도 적용되고 있다.
# 불교미술에서 사자는 크게 2가지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1) 부처님의 화신으로서의 사자상으로, 부처님의 권위와 위엄으로써 외도外道나 악마를 제어함과
동시에 몸, 입, 마음의 삼업三業을 조화하여 모든 악행을 조복調伏시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2)화엄사 사사자석탑에서 보듯이, 그 입모양을 통해 법성 진리를 터득하는 단계,
즉 현실적 경험과 의식 상태, 미묘한 꿈의 의식 상태, 미분화된 의식의 자연적 상태, 그리고
법성과 일체된 자아의 상태를 단계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일체 중생은 자증自證과 타화他化를
본래 갖추고 있다는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 사자상이다.
# 화엄사 원통전앞 사자탑
# 제천 사자빈신사터 사사자석탑
월악산 송계계곡 사자빈신사터에 세워져 있는 고려시대의 탑으로 원래는 9층 탑이었다고 하는데
5층의 탑신에 4층의 옥개석이 남아 있다. 그러면 사자빈신사터란 이름은 어디서 유래했나?
사자빈신은 '사자빈신삼매'에서 온 것으로,
사자빈신은 '사자가 포효하면서 기운을 뻗는 상태'를 말한다.
사자빈신사터 탑은, 두려움이 없는 존재인 사자와 같이 용맹스럽게 중생을 구제하려는
의지가 묻어 있는 탑으로 보면 된다. 이와 관련된 기록이 남아있다.
하층기단 정면에 고려 현종 13년(1022년)이라고 연대를 분명히 밝히면서
'몹쓸 적들이 영원히 물러갈 것을 기원하며 월악산 사자빈신사에 9층석탑을 세운다'는
탑의 내력이 적혀있다.이 때는 거란족의 잦은 침입이 있을 때였음으로 불력으로 외침을 막아
백성을 안신하고 편히 살도록 기원하고자 세운 것으로 여겨진다.
비로자나불과 사자들 모두 좀 뚱뚱해 보인다. 두 사자는 경계를 하듯 좌우를 살피고 있다.
사자들의 입모양은 각각 다르다, 정면 왼쪽 사자가 입을 가장 크게 벌렸고
정면 오른쪽 사자는 그보다 작게 벌렸다. 오른쪽 사자 뒤에 앉은 사자는 입을 꽉 다물었고,
그 옆의 사자는 입을 약간 벌리고 있다. 구례 화엄사 석탑의 사자들과 같은 입모양이다.
# 홍천 괘석리 사사자삼층석탑
원래 두촌면 괘석리 절터에 있던 것을 1969년 읍사무소안으로 옮겨왔다.
탑은 2단의 기단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로, 4마리의 사자 중심에는 보살상과 같은 석조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없어졌다.
이 탑은 조각이 다른 사사자탑과 비교해 세련되지 않고 사자의 표정도
기개가 나타나기보다는 익살스러워 보인다. 가슴에 달고 있는 방울이 두드러져 사자라기보다는
개처럼 보여 친숙한 느낌이 든다. 사실 방울은 불전 수호를 목적으로 달아놓은 것인데
무당이 굿을할 때 방울을 흔드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 사자도 방울을 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의성 관덕동 삼층석탑의 석사자에 관한 사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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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잡지>1934년 2월호에 소개된 의성관덕동삼층석탑과 석사자들의 모습이다. 이 사진은
동경제국대 건축과 교수인 후지시마 가이지로(藤島亥治郞)가 촬영한 것으로 그는 이 석탑에 대한
동경제국대 실측자료와 여러 장의 사진자료를 남겼다.
동경제국대 관덕동석탑의 석사자는
나중에 석탑과는 별도로 보물로 지정된 바 있었으나, 도난사건과 관련하여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으며,
지금은 잔여 석사자 2구만 전해져 국립대구박물관에 이관 전시되고 있다.
왼쪽은 <국보도록> (1957년)에 수록된 의성관덕동삼층석탑과 석사자의 모습이고, 오른쪽은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진 이후의 석사자 모습이다.
왼쪽의 사진은 후지시마가 촬영한 그것과 큰 차이는 없어보이지만,
석사자의 모습들은 비교적 또렷한 편이어서 지금은 사라진 관덕동 석사자의 모습을
이것으로나마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이 조금은 다행스럽다고 하겠다.
# 동래 범어사 대웅전의 계단 소맷돌 사자상
범어사 대웅전 앞 계단의 사자상은 2마리만 있는데, 한 마리는 입을 벌리고
다른 한마리는 입을 꾹 다문 상태이다.
#해남 두륜산 대둔사 대웅보전 돌계단의 돌사자
대둔사 대웅보전 돌계단의 머릿돌 돌사자는 아주 매섭게 생겼다.
#송광사 일주문, 관음전, 대웅전소맷돌의 돌사자
일주문 돌계단 양쪽 소맷돌 끝에는 두 마리의 돌사자가 다소곳이 앉아 있다.
세월에 많이 닳기는 했지만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앞발을 살며시 들어 턱을 괴고 앉아
생각에 잠긴 모습이 자못 진지하다.
송광사는 돌사자조차 깨달음을 얻는 곳일까.
관음전 앞 돌사자는 입을 벌리고 눈을 부릅뜬 채
앞으로 돌진하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어 경계를 하는 모습이다.
대웅보전 돌계단 소맷돌 끝의 네 마리 돌사자
# 포항 보경사 천왕문과 적광전 신방목에 조각된 사자상
중국 진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지명스님에 의하여 창건된 보경사는
동해안지역에서 가장 큰 절 가운데 하나로 그간 여러차례의 중창을 거쳐 오늘에 이른다.
보경사에 들어서면 눈길은 자연 건물에 부수적으로 베풀어진 몇몇 소품'들과
지정문화재로 향하게 마련이다.
보경사 천왕문에 이르면 신방목(信防木-일각문 등의 기둥 및 좌우쪽에 받쳐 놓은 베갯목)에 조각된
사자상이 문 양쪽에 있어 잠시 발길을 멎게 한다.
지금은 신방목의 존재 자체가 흔치 않기도 하거니와
거기에 음각이나 양각으로 얕게 무늬를 베푼 것이 아니라 상 전체가 드러나게 환조(丸彫)한
경우는 더욱 드물어 이 사자상은 예사롭게 보아지지 않는다.
하 오랜세월을 지나다보니 눈 코 입은 흔적도 없고 머리조차 거의 비바람에 깎이고 닳아
어찌 보면 통통하게 살찐 토끼를 연상하게 하는 이놈들은 세월이 입혀준 맑은 잿빛 살결을 드러내며,
또 그 세월에 잃어버린 이목구비에도 아랑곳없이 천왕문을 지키고 있다.
신방목의 사자는 적광전에도 있다. 역시 좌우로 나뉘어 뒷다리를 쭈구린 채
앞다리로 버티어 앉은 두 마리 사자 또한 마모가 심하지만 천왕문의 그것보다는
한결 표정과 자태가 또렷하다.
특히 왼쪽의 사자는 다섯 개의 굵은 방울이 달린 목걸이, 불거진 눈, 처진 귀,
길게 다문 입, 볼륨감 있는 몸체와 다리 등이 더욱 선명한데,
사자 본연의 근엄함이나 사나움을 세월에 앗기면서 부드러워진 탓인지
담싹 보듬고 싶을 만큼 순하고 귀여운 인상의 강아지가
거의 다 되었다.
옛 사람들은 금속성 소리가 귀신을 쫓는 영험한 기운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 방울을 벽사용으로 사용했다.
무당이 굿을할 때 방울을 흔들거나 상여 기둥 끝에 방울을 매달아 소리나게 하는 것이 같은 이유에서다.
# 곡성 태안사 적인선사부도의 사자
적인선사 혜철의 지위를 말해주듯 그의 부도와 부도비는 경내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부도는 전체 높이가 3.1m에 달하는 팔각원당형으로, 적인선사조륜청정탑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혜철의 시호가 적인선사, 부도가 세워질 때 하사받은 이름은 조륜청정이다.
혜철은 15세에 출가하여 영주 부석사에서 화엄경을 공부하고, 30세에 당나라로 가서
남종선 계통의 지장선사에게서 공부하였다. 지장선사의 법통을 전수받은 제자는 모두 넷인데,
그 가운데 셋이 신라인으로 도의와 홍척 그리고 혜철이다. 55세에 귀국하여 화순 쌍봉사에서 머물고
63세에는 동리산문을 열고 수행을 하다가 77세에 입적하였다. 풍수도참설로 유명한 도선도
그의 수많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적인선사 부도는 사각 지대석 위에 각 면마다 안상이 한 쌍씩 조각된 팔각의 하대석 받침이 놓여 있고,
하대석에는 각 면마다 방향과 형태를 달리한 사자가 한 마리씩 도드라지게 조각되어 있다.
# 공주 계룡산 갑사 부도의 사자
갑사 뒤편 계룡산에 쓰러져 있었던 것을 1917년 대적전 앞으로 옮겨 세웠다.
아래받침돌에는 사자·구름·용을 대담하게조각하였으며,
거의 원에 가까운 가운데받침에는 각 귀퉁이마다 꽃 모양의 장식이 튀어나와 있고,
그 사이에 주악천인상을 새겨 놓았다.
아래받침돌에 새겨진 사자
#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부도
전형적인 통일신라 팔각원당형 석조 부도로 통일신라 시대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 전시대에 걸쳐 첫손에 꼽히는 대표적인 부도이다.
지붕돌 위에는 동그란 찰주구멍만 남아 있고 상륜부는 없어졌다. 세부 조각 수법에서는
목조 건축 양식을 본뜨고 있어서 그 무렵 건축 기술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도굴꾼들이 사리장치를 빼내기 위해 쓰러뜨려 놓았는데, 1957년에 다시 짜 맞추었다고 한다.
그 탓인지 지붕돌 추녀가 조금씩 상해 있다.
하대석 상단 8면에는 엎드리거나 고개를 젖혀 뒤를 돌아보거나
뒷발을 물고 있는 사자들이 생생하게 조각되어 있다.
아직까지는 사자상들의 다양한 도상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 구례 지리산 연곡사 동부도
연곡사 경내 뒤쪽 산등성이에는 동부도, 북부도, 서부도와 두 점의 부도비가 있다.
그 중 동부도는'부도 중의 부도'라 할만큼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기품을 간직했다.
신라 말기에 만들어졌으며, 누구의 부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원형을 온전히 유지하고 있다.
현재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부도 중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 부도와 함께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네모난 지대석 위에 팔각 2단의 하대석이 놓이고, 하단에는 운룡문이 얕게 조각되어 있다.
상단에는 둥근 윤곽선을 돌린 각 면에 자세를 달리하는 사자가 양각되어 있다.
# 보은 속리산 법주사 쌍사자석등
신라 석등의 전형 양식인 팔각석등에서 팔각기둥이 들어갈 부분을 사자 두 마리로 바꾸어놓은
석등이다. 삼국시대 이래 우리나라 석조물 가운데는 사자를 조각해 넣은 것이 많이 만들어졌다.
통일신라시대의 쌍사자석등으로는 이것 이외에 경남 합천의 영암사터 쌍사자석등,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된 중흥사터 쌍사자석등이 있다.
그 중 법주사 쌍사자석등은 높이 3.3m로 규모도 가장 크며
조각수법도 가장 뛰어난 유물로 꼽힌다.
팔각기둥을 대신한 사자 두 마리는 가슴을 대고 머리를 젖힌 채 마주서서
앞발과 주둥이로 상대석을 받들었다.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입을 벌렸고 한 마리는 다물었다.
갈기털과 몸의 근육이 표현되었고 하대석을 딛고 선 뒷발이 굵고 탄탄하다.
# 합천 영암사터 쌍사자석등
합천 영암사터 쌍사자석등은 병풍처럼 둘러진 황매산의 눈부신 화강암 골산과 환상적으로 어울린다.
마치 교향악단의 지휘자처럼 높직한 석축 위에 홀로 우뚝하다. 생김새도 다른 나라 사자처럼 사납지 않고
털복숭이 삽살개 같은 친근미가 있다. 사자는 불교의 신성한 동물로
쌍사자석등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다. 통일신라 이전에도 없고 통일신라 이후에도 없다.
쌍사자석등은 영암사터의 핵이며 눈이며 꽃이다.
이 석등이 있음으로 해서 영암사터는 영암사터가 된다. 모르긴 해도
절을 지은 이들의 이 석등에 대한 애정과 자부는 여간 아니었을 듯 싶다.
영암사 절터가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데는 마을사람들의 수고로움과 애씀이 컸다.
1933년 일본인들이 몰래 가져가려던 쌍사자석등을 지켜낸 것도 마을 사람들이었고,
1959년 면사무소에 있던 그 석등을 기어이 찾아다 애초의 자리에 세운 것도 그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주민들은 무너진 채 방치되던 삼층석탑을 바로 세웠고, 마을의 고가 두 채를 옮겨 지어
절터를 지켰다. 흙 속에 묻혀 있던 금당터를 땅 위로 드러낸 것 또한 그들이었다.
비록 집 두 채를 옛터 위에 세우는 바람에 절터의 본 모습을 일부 훼손하거나 볼 수 없게 만드는
실수를 범하기도 했지만, 이들의 억척스러움과 끈질김이 아니었다면 영암사터가
오늘의 모습이나마 간직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도대체 우리나라에는 살지도 않을 뿐더러 네 발로 걸어다니는 사자라는 짐승을 일으켜 세워
화사석을 받치게 한 발상부터가 절묘하지 않은가. 게다가 석등의 무게를 온몸으로 지탱하고 있는 두 마리
사자에서는 팽팽한 긴장감이나 강인함은커녕 어딘지 모를 여유로움과 장난기조차 느껴지니
이 또한 우리네 천성이 자연스럽게 드러난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고 사실성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알맞게 벌린 두 발로 다부지게 버티고 서서
가슴과 두 발을 맞댄 채 화사석을 떠받치고 있는 사자의 균형과 비례가 아주 정확하다.
등 뒤로 늘어진 갈기, 잘록한 허리의 묘사가 충실하다. 그러나 역시
석등을 조각한 장인의 의도는 사실의 묘사보다는 해학의 강조에 있는 것 같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엉덩이, 복스럽게 등 뒤로 올라붙은 탐스런 꼬리, 토실토실한 두 다리는
이 사자를 사자이되 귀여운 강아지처럼 보이게 한다. 적절한 압축과 생략과 왜곡을 통해
'우리의 사자'를 표현하고 있으니, 저 유명한 미륵반가사유상이 보여주는 이상적 사실미 혹은
사실적 이상미의 아련한 모습이 여기서도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는 것은 아닐지.
- '답사여행의 길잡이'에서-
금당지 기단에 새겨진 사자상
# 광양 중흥산성 중흥사터 쌍사자석등 (국립광주박물관소장)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쌍사자석등은 세 개가 있다.
법주사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 영암사터 쌍사자석등(보물 제353호).
그리고 중흥사터 쌍사자석등(국보 제103호)이 그것이다.
어느 것이나 뛰어난 걸작이다.
그 가운데 중흥사터 쌍사자석등이 특히 빼어나다.
오랫동안 덕수궁과 경복궁안에 서 있다가 지금은 제 고향에 가까운
국립광주박물관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석등이 덕수궁에 있을 때, 고고학자이자 미술가였던 김원룡선생은 이렇게 평했다.
인도의 사성수(四聖獸)의 하나인 사자가 불교 관계 기념물에 나타나는 것은
기원전 3세기까지 올라가며, 인도 중국 할 것 없이 불교미술에 많이 쓰이고 있지만,
두 마리의 사자를 맞세워 석등의 화사(火舍)를 받들게 하는 착상은 신라인들의 발명이고
신라 영토 내에서만 행사된 신안특허이다.
대리석이나 사암에 새긴 날카롭고 괴이한 중국 인도의 사자에 비하면, 화강암에 새겨진
신라의 사자는 토실토실한 발바리같이 귀엽다. -중략- 이 친밀감과 인간미와 목가적인 낙천,
허식 집착을 잊어버린 천생의 해탈이 고금을 통하는 한국미의 척추인지도 모른다.
어느 산사의 고요한 뜰에 있으면 얼마나 예쁘련만, 서양인이 지은 석조전의 배경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 김원룡, <한국미의 탐구> 중에서-
#양주 회암사터 쌍사자석등
회암사터에 있는 공민왕과 조선 태조의 스승이었던 무학대사(1327~1405) 부도는
조선시대 부도 중 가장 뛰어난 걸작으로 꼽는다.
무학대사 부도 앞에서 촛불공양을 올리는 쌍사자석등은
상하 대와 화사석, 지붕돌 등이 모두 방형이고, 중대석만 쌍사자인 독특한 모습이어서
주목된다. 이는 신라시대 8각 석등이 고려시대로 내려와 방형으로 바뀌는 특별한 조형이고,
조선시대까지 줄곧 영향을 미치고 있다.
두 마리의 사자가 가슴과 배를 맞댄 채 상대석을 받치고 있다.
무거운 석등을 떠받고 있어 힘에 겨운 듯 배가 아예 붙어버렸고,
꼬리는 바짝 등뒤로 치켜올라가 있으며, 복실복실한 머리털이 사실에 가깝다.
사자의 뒷모습이 볼수록 예쁘다.
# 충주 청룡사 보각국사부도 앞 석등
보각국사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들어진 석등으로 하대석을 사자상으로 대신하여 사자석등으로 불린다.
보각국사는 고려 공민왕과 공양왕 및 조선 태조의 국사(國師)이다.
# 여주 고달사터 쌍사자석등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고달사터(高達寺址)에 쓰러져 있었던 것을 1959년 경복궁으로 옮겨 왔으며, 현재는 중앙국립박물관에 있다. 불을 밝히는 화사석까지만 남아있었으나, 2000년에 경기도 기전매장문화연구원이 실시한 발굴조사에서 지붕돌이 출토되었다.
직사각형의 바닥돌 사면에 안상(眼象)을 새기고, 받침돌 대신 2마리의 사자를 앉혀 놓았다. 사자는 좌우에서 앞발을 내밀고 웅크리고 있으며, 등 위로 구름이 솟아오르고있다.
우리나라 쌍사자석등의 사자는 서 있는 자세가 대부분인데, 이 석등은 웅크리고 앉은 모습이 특징이며,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 전기인 10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 여수 영취산 흥국사
법고를 떠받치고 있는 동물이 사자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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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동안 무심히 봤는데 사자가 정말 많군요. 그러고보니 호랑이 석상은 못 본 것 같습니다.
청주에서 자란 나는 법주사를 찾을 때마다 쌍사자석등 주위를 맴돌곤 했지요. 십 여년 전부터 절집을 찾아다니며 "우리 옛 건축에 담긴 표정' 사진을 찍다가 합천 영암사터 쌍사자석등을 보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우리 장인들의 솜씨를 그냥 보아넘길 수가 없었지요. 오래 묵혀두었던 사진을 정리하고 인터넷에서 보완하여 꾸며 보았습니다. 보시는 분들께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저도 그 생각했습니다. 우리나라에 사자가 살고 있었다는 소리는 못 들은 것 같은데..근데? 고대 인도에도 사자가 살고 있었을까요?
백수의 왕으로 알려진 사자는 아프리카, 유럽, 서아시아, 인도 등지의 열대 초원에 서식하는 동물임에도 불구하고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 사자와 관련된 기록이 나오고 있습니다. 옛날 한반도에 사자가 서식하지도 않았는데, 왜 신라인들은 보지도 못한 사자를 생활속에 표현하고 나타냈을까요. 사자는 각 나라 미술품에 자주 등장하는 등 그 신성함과 절대적인 힘, 그리고 위엄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삼국사기나 유사의 기록을 통해 삼국시대부터 사자의 존재를 이미 인식하고 있었으며 사자상이 불법을 지키기 위한 수호상으로 표현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 중에서 / 신라 지증왕 13년 6월 우산국이 귀복해 해마다 토산물을 바치기로 했다. 우산국은 명주 동쪽바다의 섬에 있는데 혹 울릉도라 이름하기도 한다. 땅이 사방 백 리인데 험함을 믿어 복종하지 않았다. 이찬 이사부가 하슬라주(명주-강릉지역)군주가 되었는데, 말하기를 "우산국 사람들은 어리석고 사나워서 힘으로 굴복시키기 힘들므로 계책을 써야한다"하였다. 이에 나무사자를 많이 만들어 전함에 나누어 싣고 우산국으로 갔다. 그 나라의 해안에 도착한 후 신라군은 우산국인들에게 속여 말하기를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들을 풀어서 모두 밟아 죽이게 하겠다"고 위협하였다. 우산국 사람들이 두려워 하며 곧 항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