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어질 듯 이어지는 가녀린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어 잠옷을 추스르며 가만히 들어보니 어머니의 방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동해바다 용왕님네 우리 엄마 찾아주소. 출렁출렁 물길 따라 우리 엄마 찾아주소.
서해바다 용왕님네 우리 엄마 찾아주소. 출렁출렁 물길 따라 우리 엄마 찾아주소.
남해바다 용왕님네 우리 엄마 찾아주소. 출렁출렁 물길 따라 우리 엄마 찾아주소.
엄마 엄마 우리 엄마 어디있노 우리 엄마. 출렁출렁 물길 따라 어디든지 찾아오소.”
“오늘도 누워있기 힘들어 앉아서 밤을 지새우나 보다.”라고 중얼거리며 안방으로 들어가 눈을 감았다.
어머니의 말씀대로 불행 중 다행으로 딸 셋을 출가시키고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아들 셋을 사람 만드느라 닥치는 대로 일하시며 치열하게 사셨다.
나는 고등학교부터 지금까지 객지에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를 모시고 살지 못했다. 직장이 울산인 동생 부부는 어머니를 모시고 생활하면서 출·퇴근을 하기로 했다. 동생은 어머니가 살고 있는 집을 새로 지었다. 내가 태어난 집은 초가집이었는데 중학교 때 사랑채가 있는 넓은 기와집으로 이사했다. 밖에서 보면 넓고 괜찮아 보였지만 생활하기가 불편했다. 부엌이 깊어 다니기가 힘들었고 사랑채에 딸린 화장실은 두 개였으나 비가 오면 빗물이 새어 나왔다. “어머니가 생활하기 편리하도록 지었다.”라는 동생의 말에 울컥했다. 동생은 생각과는 달리 출퇴근하기가 힘들었는지 집을 막내동생에게 물려주고 울산으로 이사를 했다. 막내동생이 직업을 가지고 장가를 가면서 어머니의 생활은 안정되었다. 따뜻한 밥에 손자들의 재롱을 보면서 돈 걱정 없이 생활하셨고 경로당에도 넉넉한 마음으로 갈 수 있었다.
막내동생은 조그마한 우사를 지어 소를 키우며 농사도 짓고 중장비 사업과 마을 청년회 일도 같이했다. 아마도 어머니의 인생에서 가장 걱정거리가 적은 기간이었으리라 생각된다.
큰조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어머니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막내동생이 조카들의 교육 문제로 경주 시내 아파트로 이사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머니와 함께 농사와 소를 키우며 마을 대소사를 챙기는 동생이 있어 마음이 편했다.
고향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주말을 보내고 대구로 올 때가 항상 힘들고 어색했다. 나는 남편이고 아버지이기도 하지만 어머니에게는 맏아들이기도 하다. 혼자 서서 손을 흔드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기 싫어 차를 타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막내동생으로부터 어머니가 아프다는 연락을 받고 내려갔다. 무릎과 다리가 좋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가슴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는 말을 듣고 걱정이 많이 되었다. 경대병원으로 모시고 와서 보름 동안 검사와 입원 치료를 받았고 막내동생도 지병으로 입원했다. 집안에 비상이 걸렸다.
의사는 “어머니의 심장 기능은 약해져서 100%를 기준으로 볼 때 5%밖에 남지 않았다. 다른 기능은 정상이니 집에 모시고 가서 편하게 해드리는 것이 좋다.”라고 했다. 대학병원에서 치료만 잘 받으면 금방 좋아질 거라고 기대하고 오셨는데 증상이 그대로라며 짜증을 내시는 어머니를 마주하고 있자니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멍해졌다.
아내와 상의해서 서재를 어머니 방으로 만들어 모시기로 했다. 장남이면서 어머니를 직접 모시지 못해 동생들에게 항상 마음의 짐이 있었는데 나름대로 기분은 개운했다.
일평생 농사를 지으며 흙과 같이 사시던 어머니가 고립된 아파트 생활을 결심하시기까지 힘들어하셨다. 그래도 빨리 완쾌해서 고추와 상추도 심고 고향 경로당에 하루라도 빨리 가고 싶어 어려운 결심을 하셨다.
어머니와 같이 생활하면서 대화도 많이 하고 그동안 못했던 것들도 하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그런데 아내는 달랐다. 바쁜 일정 중에도 어머니의 등과 팔다리를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주물러 드리며 음식에도 정성을 다했다. 목욕을 시키고 로션을 발라주며 농담까지 주고받는 아내가 신기하기도 하고 예쁘기도 했다.
어머니에게는 딸이나 며느리가 필요했던가 보다. 아플 때는 아들보다 딸이나 며느리가 더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도 좋아하던 손자가 임용에 합격하던 날 어머니는 “내가 있어 공부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합격해서 다행이다. 정말 고맙다.”라고 하셨다. 손자의 첫 용돈을 받으시며 좋아하시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봄날의 토요일이었다. 아내는 쑥을 뜯으러 가고 아들은 자기 방에서 쉬고 어머니와 나는 거실에서 TV를 보며 느긋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쑥을 뜯어와 펼쳐 놓는 아내를 보고 마을 골프연습장에 갔다. 막 운동을 시작하려는데 아들에게서 “할머니가 쓰러지셨어요.”라는 다급한 연락을 받고 뛰어와 보니 벌써 119에서 응급처치를 하고 있었다. 가까운 보훈병원에 119와 함께 갔으나 숨은 멎어 있었다.
어머니는 “야야, 눈이 잘 보이지 않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며느리 품에 안겨 아버지 곁으로 가셨다.
어머니는 외할머니와 관련된 이야기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외할머니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아들보다 며느리가 더 편했던지 우리 집에 있는 삼 개월 동안 아내에게 외할머니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셨다.
어머니가 아주 어릴 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외할머니는 집을 나가서 외할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철이 들었을 때 꿈에서나 본 듯 찾아온 외할머니는 생활에 지쳐 너무 슬퍼 보였다고 했다. 그 이후로 어머니는 외할머니를 보지 못했다.
어머니가 좋은 일이 있을 때나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중얼거리던 노래가 그 노래였으며 어느새 나도 중얼거리고 있다.
2024.5.16.(7)
첫댓글 어머니에 대한 추억 잘 정리 했습니다. 글이 조금씩 발전됩니다.
주희쌤! 공감가는 글 잘 읽었습니다. 호자.아들들을 두신 어머니는 행복하셨을것 같아요. 모든 자식들은 어머니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는만큼 챙겨드리지 못했음을 두고두고 후회하겠지요.
어머니가 흥얼 거리던 노래 속에 숨어 있는 비밀. 그 뜻을 되새겨 보는 아들의 심중이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가슴을 찡하게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맏이는 언제나 가슴 깊이 부모님에 대한 빚을 새기고 있는 것 같지요 운명이랄까 숙명이랄까
효자의 마음씀을 다시 한번 새겨보았습니다
지금은 고아가 된 내 처지가 더 애닲게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