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十一章 항마무성거(降魔武聖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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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한 끼 먹을 시간 동안 달렸을까? 멀리 잠룡곡의 정경이 들어왔다. 일대를 휘감고 있던 검은 안개는 사라졌으며, 황량한 광경 이 눈에 들어왔다. 상관안은 불길한 마음에 더욱 신법을 빨리했다. 무성곡이 가까이 다가서자 요란한 함성이 들려 왔다. "와……!" "놈들은 모두 죽여라. 항마구검 중 하나를 죽이는 자에게는 황금 천 냥의 상이 있을 것이 다." 야차의 울부짖음, 그리고 치솟는 마기. 펑- 펑-! 일대는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흑무평이라 불리고 있는 분지 안이 홍의를 걸친 천녀교 무 리들로 가득 차 있고, 무성곡 내도 마찬가지였다. 상관안이 무성곡을 떠나기 이전 설치한 절 진은 산산이 박살나 있었다. 매캐하게 번지는 초연. 진을 이룩한 돌더미는 돌모래로 변해 사방으로 흩어져 있다. 일만 근 이상의 화약이 터지지 않았다면 진이 이렇듯 완벽하게 파괴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성곡 입구는 핏빛 물감으로 물들인 듯 홍의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홍의인들이 붉은 뱀처 럼 길게 늘어서 있는데, 그 맨 앞에서 혼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차창- 창-! 홍의인들 이십여 명이 흑무평을 뒤덮으며 죄충우돌하고 있고, 가운데 흑의인 넷의 용감무쌍 한 모습이 보였다. "사상무적검진이다." "너희들은 한 걸음도 들어설 수 없다!" 항마구검수 중 네 사람이 상관안이 전수해 준 검진을 써 천녀교 무리들을 가로막고 있는 중 이었다. 수천 수만 갈래 검기가 일어나 십 장 이내를 물들였고, 홍의인영이 오르락내리락할 때마다 장력이 흙바람을 내며 무성곡 전체를 뒤흔들었다. 천살구검은 마도초식의 극성이다. 그 독랄한 검초가 절묘한 검진과 어우러져 있기에 홍의인 들은 사 인을 뚫고 무성곡 안으로 좀처럼 들어갈 수 없었다. 그들의 싸움이 절정에 이르고 있을 때, 그곳에서 이십 장 떨어진 석루 앞에서는 치열한 한 판 승부가 펼쳐지고 있었다. "이얏-!" 허공으로 솟구쳐 올라 우검(右劍)과 좌소(左簫)를 쳐내고 있는 백의미녀 하나가 있었다. 상대는 홍의로 전신을 휘감은 일곱 명의 무사들과 한 명의 아리따운 소녀. "항마령주! 이제 항복해라!" 놀랍게도 홍의인들의 우두머리는 나이 스물이 안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녀였다. 그러나 사악 하기는 백 년 묵은 구미호를 능가할 정도였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이 홍의인 일곱을 수족같이 움직이게 했고, 여덟 사람은 한 가지 진세 를 형성하는 참이었다. "고약한 것들! 더 이상 사정을 봐주지 않겠다." 노해 외치는 백의미녀는 바로 항마령주 이난음이었다. 이난음은 항마대천신공을 검신에 주입해 수 장 길이 검기를 만들어 냈으나, 홍의인들이 만 들어 내는 검진을 격파하지는 못했다. 우르릉-! 거대한 회오리 하나가 형성되어 아홉 사람을 감싸고 있었다. 안력이 뛰어나지 않은 사람이라면 붉은 그림자와 흰 그림자가 왔다갔다하는 정도만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난음은 중원무성에게 전수받은 갖가지 초식을 사용해 보았으나 검진을 격파하지는 못했 다. 초수가 지날수록 불리해지기만 하는 것은, 실력이 뒤져서라기보다 마음이 조급해서였다. '큰일이군.' 이난음은 백 초를 버티지 못할 것 같아 걱정하며 비장한 표정이 되었다. '이곳에서 뼈가 가루가 되는 한이 있어도, 놈들을 안으로 들여보내지는 않겠다. 여기서 놈들 과 최후를 같이하겠다.' 이난음이 허공에서 수십 검을 잇따라 쳐내 여덟 명으로 이룩된 검진을 향해 몸을 날리려 할 때였다. "왜 천뢰지곡을 불지 않소? 설마 그것이 난음 동생의 검술만 못할까 봐 그러는 것이오?" 갑자기 그녀의 고막을 때리는 천리전음(千里傳音) 소리가 있었다. "오빠가 오셨군요?" 이난음은 말소리의 주인공이 상관안이라는 데 눈물을 뽑으며 최면에 걸린 사람같이 그의 말 에 따라 천뢰혈적을 입에 물었다. 순간, 그녀의 검세가 거둬지자 여덟 사람의 포위망이 한결 압축되었다. 츠츠츳-! 이난음은 여덟 자루 화살에 맞기 직전의 참새와 같이 가련한 신세가 되었다. 여덟 자루 장검이 그녀의 몸 바로 근처로 다가섰을 때였다. 삘리리……! 이난음이 입술 사이 물고 있는 천뢰혈적의 구멍에서부터 지극히 강렬한 적성(笛聲)이 흘러 나왔다. 하늘과 땅을 한데 태워 버릴 듯한 피리 소리. 이난음의 몸을 난도질하려던 여덟 고수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오장육부가 타는 고통을 느 꼈다. 그도 그럴 것이, 천뢰지곡을 그리 가까이서 듣게 되었으니… 어찌 인육으로 된 오장육부가 성할 수 있겠는가? "으악!" "으으으으……!" "켁!" 여덟 마디 비명 소리가 지축을 뒤흔들 듯했다. 땡그랑- 땅-! 홍의인들이 쥐고 있던 장검이 홍의인들의 몸뚱이와 함께 지면으로 떨어져 내렸다. "너… 너… 너는 옥면혈마와 한패구나." 일행의 우두머리였던 홍의소녀가 이난음을 노려보며 원망스럽다는 듯 말하다가 눈을 뜬 채 세상을 떠났다. 홍의나찰(紅衣羅刹) 요옥진(妖玉眞)이 그녀였다. 이난음은 요옥진이 수하들과 함께 죽는 것을 보며 피리를 입에서 떼어 냈다. 그녀의 옷은 땀으로 축축이 젖어 있었다. 사실 천뢰지곡을 시전해 낸다는 것은 항마대천신공을 시전하는 것보다 세 배 힘든 일이었 다. 땀이 흐르는 것은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이난음이 천뢰혈적을 쥐고 지면을 밟을 때, 그녀 곁으로 다가서는 여섯 사람이 있었다. 천녀 제, 그리고 그녀를 업고 있는 상관안과 항마구검사 중 네 사람이 그들이었다. 소란하던 무성곡 안은 고요한 곳으로 화해 있었다. 홍의인들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고, 피비린내가 감돌지 않는다면 한 사람도 없는 곳이라 여겼을 정도로 고요했다. 소란스러움이 끝난 후이기에 더욱 조용하게만 여겨지는 것이었다. 상관안이 세 가지 방책을 마련해 주지 않고 떠나갔다면 무성곡은 거대한 초토로 화했으리 라. 할 말이 많겠으나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살아 얼굴을 마주 대하고 있는 사실 한 가지로 만 마디의 말을 대신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일행이 우뚝 서 있을 때, 누각의 철문이 열리며 황포노인 하나가 걸어 나왔다. "장하다. 내 눈으로 보고서도 믿을 수 없었다!" 황포노인은 누각을 벗어나며 상관안을 향해 칭찬의 말을 던졌다. 무림화타, 그는 이제껏 누각의 비밀 창을 통해 치열한 대전을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 중대한 사명이 없었더라면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결전에 임했을 것이다. "하하……!" 상관안은 얼굴에 홍조를 띠고 웃다가. "할아버지! 저를 치하하시기보다 이 노파를 치유시켜 주십시오. 이 노파가 바로 이날의 개선 장군입니다." "누구인가?" "살혼여마라 하는 여인입니다. 원래는 악한 여인이었는데, 지금은 천하에 다시없는 협도인이 지요." 상관안이 실혼여마의 몸을 건네주자, 무림화타는 별 의심 없이 받아 들고 먼저 누각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머지 여섯 사람이 그 뒤를 따랐다. 그로부터 반나절 후였다. 상관안과 이난음은 무성전 안에서 흥분의 극을 달리는 상태가 되 어 있었다. 세 개의 침상을 차지하고 있는 선대의 고수들이 무림화타가 만년화리 내단을 써서 만든 영 단을 복용하고 정신을 차리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가장 먼저 눈을 뜬 사람은 중원무성(中原武星)이었다. 그는 키가 아주 크고 대나무같이 마른 노인이었다. 중원무성은 오랫동안 잠을 잤다가 일어나는 사람같이 흰 눈썹을 찡그리고 졸립다는 표정을 하고 몸을 움찔하다가 한순간 눈을 번쩍 떴다. "아니?" 중원무성은 그제서야 자신이 되살아난 것을 아는 듯, 기절초풍 놀라 눈을 부릅떴다. 순간. "의형(義兄)!" "사부님!" "여… 여기가 어디인가? 아주 오랫동안 잔 것 같은데?" 중원무성의 말소리는 탁할 대로 탁했다. 그 이유는, 너무 오랫동안 잠들어 있어 목이 잠길 대로 잠겼기 때문이었다. "자세한 것은 차차 아시게 될 것입니다. 우선은 이 약탕을 드시고, 운기행공하도록 하십시 오." 무림화타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며 준비해 둔 약그릇을 전했다. 중원무성은 묻고 싶은 것이 많았으나 수양이 많은 사람답게 한 마디도 묻지 않고 무리화타 의 말대로 약그릇을 받아 단숨에 약을 섭취했다. 그리고 곧 운기행공에 들어갔다. 그리고 일각 후, 오른팔이 끊어진 채 십이 년 동안 잠들어 있던 천지대협 이옥룡이 신음 소 리 비슷한 소리를 내며 눈을 지그시 떴다. "아……!" 그는 자신의 눈앞에 오래 전에 죽은 자신의 아내를 닮은 젊은 여인 하나가 서 있다는 데 놀 라워했다. "아버님!" "이 대숙!" 이난음과 상관안이 동시에 외치는데 놀라 눈을 번쩍 떴다. "난… 난음이란 말이냐? 네… 네가 이렇게 크다니… 이… 이럴 수가? 이제 보니 너는 안아 가 아니냐?" 세 사람의 몸이 거의 한덩어리로 합쳐졌다. "아버님!" 이난음의 울음소리가 그중에서 가장 컸다. 아주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세 사람이 지난 일을 이야기하자면 백 일 밤낮을 준비해도 모 자랄 것이다. 천지대협은 딸과 상관안을 알아보고 간단히 지난 일을 들은 후, 무림화타가 주는 약탕을 먹 게 되었다. 그리고 중원무성을 따라 운기행공에 들어갔다. 이제 깨어나지 않은 사람은 상관위 한 사람뿐이었다. 상관위가 가장 늦게 깨어나는 이유는, 그가 입었던 상처가 제일 큰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원래 죽었어야 할 몸이었다. 그가 죽지 않는 이유는, 생사의 기로에 있던 그를 발견한 사람이 백골에 살을 붙일 수 있는 의술의 소유자 무림화타이기 때문이었다. 무림화타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를 살리지 못했을 것이다. 상관위는 달콤한 잠에 취해 깨어나지 않을 듯 약간 코 고는 소리와 함께 깨어나질 못했다. 상관위의 속옷이 식은땀으로 젖어 갔다. 그가 애간장을 태우다 못해 비장의 수법으로 태극 선강을 일으켜 아버지의 몸 안에 진기를 주입하려 할 때였다. "크으으……!" 상관위가 고개를 돌리며 쓰디쓴 숨소리를 토해 냈다. 그리고 입술 사이로 아주 검고 냄새가 고약한 피가래 한 모금을 뱉어 내며 눈을 지그시 떴 다. 눈에 눈꼽이 많이 끼어 잘 떨어지지 않는 듯하자, 상관안이 얼른 다가가 손가락으로 눈꼽을 떼어 냈다. "누… 누구냐?" 상관위의 입에서 거센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아… 아버님!" 상관안의 음성은 너무도 떨렸다. 다리가 후들거려 제자리에도 서 있지 못할 지경이었다. "청… 청년인 듯한데… 나… 나를 아버지라 부르는 이유가 무엇인가?" 상관위가 눈살을 찌푸리고 그를 올려다봤다. "아… 아버님! 저, 안아입니다. 아버님께서 이 대숙의 천지죽림 안으로 데려다 놓고 다시 찾 지 않은 아버지의 외아들 안아입니다." 상관안이 크게 외치자. "네… 네가… 언제 이렇게 장성했느냐? 설… 설마 여기가 저승은 아니겠지?" "아버님!" 상관안은 아버지가 되살아났다는 것을 알고 아버지를 길게 외치며 상관위를 부축해 일으켰 다. 상관위의 몸이 나무 인형같이 가볍게 들려졌다. 오랫동안 약만 먹고 살아와 모골이 상접한 탓이었다. 그것은 이제 수일 안으로 없어지리라. 무림화타가 지은 약을 먹게 된다면 며칠 안 가 과거의 건장한 몸뚱이를 되찾게 될 것이니 까. 부자지간의 대화는 오랫동안 끊이지 않았다. 상관위는 자신이 십오 년 간이나 잠들었다 깨어났다는데 경악했으나 곧 적응하고 과거지사 를 이야기했다. 무림제일기녀 단방에 얽힌 일이 거의 전부였다. 단방과 상관위와의 싸움은 아주 오래 전에 시작되었다는 것이 상관위의 말이었다. "단방은 자신이 천하제일이라 여기던 계집이었다. 그러나 한때 나를 사랑했기에 내게 대한 호승심을 사랑으로 억눌렀지. 그러다가 타인의 아내가 되자 그 마음이 발작해 버리고 만 것 이다." 단방은 기구한 운세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명가(名家)의 딸로 어렸을 때부터 좋은 스승 밑에 서 육예(六藝)를 비롯한 갖가지 재간을 배울 수 있었다. 그녀가 열 살이 되던 해 가문이 몰락했고, 그녀는 무림기인의 전인이 되어 무림계에 발을 디디게 되었다. 십 년 후, 단방은 상관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무림제일기녀로 천하를 풍미하게 되었다. 만에 하나, 사도제일고수 혈홍신검 이검엽이 두 사람 사이에 끼여들지 않았다면… 단방은 상관위의 아내가 되어 평탄한 생활을 영위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어쨌건, 단방은 상관위의 아내가 아닌 이검엽의 여인이 되어야 했고… 그것이 한이 되어 그 후의 인생을 망치게 되었다. "단방은 불지라는 딸을 낳은 후, 혈홍문을 뛰쳐나왔다. 반 미친 채로! 그 계집은 검주에 은 거하고 있던 나를 찾아왔다. 처음 나를 죽이려 했었는데… 네 어미가 끼여드는 틈에 나 대 신 네 어미를 죽이게 되었지!" "크으……!" 상관안이 비통한 듯 격한 신음성을 토해 냈다. "나… 나는 너무도 분했다. 그러나 네가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보고 차마 그 계집을 쫓을 수 없었다. 나는 우선 너를 낳다 죽은 백화선자 네 어머니를 위해 묘를 만들었다. 그 다음, 너를 무림화타 아저씨께 맡겼다. 그 다음에서야 단방을 찾아다녔지." "……." "단방은 미쳐 돌아다니다가 내 눈에 띄게 되었다. 하북(河北) 깊숙한 곳에서의 일이었다." "아……!" "나는 그 계집과 겨루게 되었다. 그 계집은 혼세마인의 절기로 나를 죽이려 했다만, 천룡대 승진기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나는 그 계집의 가슴에 일 장을 강타해 그 계집을 만장 절벽 아래로 날려 버릴 수 있었다. 나는 그 계집이 죽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고 곧바로 무림화 타 아저씨께로 달려왔다. 그곳에서 약물로 태중의 병을 치료받고 있던 너를 찾아 다시 사천 검주로 갔다. 그리고 칠 년을 살았지." "……." 그 이후의 일은 상관안도 잘 아는 것이었다. 상관위는 아들이 자신보다 더 자세히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힘주어 말해 갔다. "네가 일곱 살 때였다. 나는… 배첩 한 장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죽은 줄로만 알고 있 었던 단방이 보낸 것이었다." "음……!" "나는 단방을 이길 수 있으리라 확신하고 너를 일단 천지죽림에 맡겼다. 그리고 단방을 찾 아갔다. 단방은 백의에 몽면을 하고 나타났는데, 놀랍게도 천녀교의 무공을 자유자재로 사용 했다. 나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 나는 그 계집이 시전해 내는 천녀교 절기에 격타당해 그대 로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지금 깨어난 것이다." 상관위가 그 말을 끝으로 말을 끊자. "아버님! 단방이 지금의 천녀교주입니다." 상관안이 불현듯 하는 말이 중인을 놀라게 했다. "단방이 천녀제의 전인이라도 되었단 말이냐?" 상관위가 다른 사람에 비해서는 훨씬 덜 놀라고 무신경히 묻자. "전인이기는 하나, 강호에 알려지기는 전인으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천녀제로 알려 져 있습니다." "뭐… 뭐라고?" 상관위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 계집은 아버지께 쓰러진 후, 천녀제에게 발견됐습니다. 천녀제는 그 계집을 살리기 위해 갖은 공을 다 들였습니다. 한데, 단방은 그 공을 배반하고 천녀제를 암산했습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았군." "그 계집은… 가혹히도 천녀제의 얼굴 가죽을 벗겨 인피면구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강호로 나와 지금 천녀제로 행세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가……?" 이난음과 무림화타가 동시에 경악했다. 천녀제가 바뀌었다니? 그들이 크게 놀랄 때. "진짜 천녀제는 회개했습니다." 상관안이 미소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녀는 지금 나의 휘하 고수로 있습니다. 실혼여마가 바로 과거 중원무성 할아버지께 패해 은거에 든 천녀교의 창건자 진짜 천녀제이지요." 상관안이 비밀을 이야기하자, 모두 함구한 입을 벌리지 못했다. 기가 막혀 할 말이 없기 때 문이었다. 첩첩이 싸여 있는 비밀. 그 비밀을 다 알고 있는 사람은 상관안 한 사람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음양무상신공에 관한 비밀이었다. 그 비밀은 언제고 강호가 평화로워질 때 술좌석이나 다과를 나누는 자리에서 아주 자연스럽 게 상관안의 입에서 시작되리라. 지금은 할 때가 아닌 것이다. 상관안이 그런 말을 할 경우, 상관안을 자신의 목숨보다 아끼고 있는 여러 사람들이 너무도 분한 나머지 미쳐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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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탑성회의 날이 다가오자 중원무림이 들끓었다. 삼산오악(三山五嶽)의 고수들이 짐을 꾸려 황산(黃山)을 향해 떠났고, 천하의 주루에서 거론 되는 이야기의 전부가 혈탑성회에 관한 것이 되었다. 천 년에 한 번 있는 구경거리라 하는 사람이 허다했고, 정파와 사파가 크게 싸울 것이고 그 다음 대세가 결정지어질 것이라 말하는 사람이 거의 다였다. 누가 승리하냐고 묻는다면 열이면 열, 다 인상을 찡그렸다. 그것은 천녀교 쪽이 승리한다고 믿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행동이었다. 정파의 맥은 이제 다시 이어지지 못하리라. 강호인들은 혈탑성회의 웅장하고 화려함에 이끌리는 가운데에서도 백도가 희미해질 대로 희 미해졌다는 것을 못내 서운히 생각했다. 그래도 일말의 희망은 있었다. - 일령(一令)과 일살(一煞)이 남았다. 그런 말이 퍼지는 이유가 그 탓이었다. 일령은 곧 항마령주를 말하는 것이었고, 일살이란 삼살 가운데 유일하게 무사한 옥면혈마를 말하는 것이었다. 강호가 그런 일들로 시끄러울 때였다. 돌연 천지(天地)를 질타해 버리는 충격적인 사건 하나 가 있었다. 천녀교에 배첩 한 장이 띄워졌다는 것이 그 사건이었다. <천녀제에게 전한다. 혈탑성회 자리에서 네 수급을 떼고 천녀교를 해산시킬 것이니, 기다리 고 있거라. 중원무성(中原武聖).> 일컬어 무성첩(武聖帖)이라 불리고 있는 전대의 백도제일고수 중원무성이 보낸 배첩! 그것은 너무나도 꿈만 같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중원무성은 분명히 죽은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가 무덤 속에서 기어 나와 천녀제에게 도전장을 띄웠단 말인가? 아니면, 누군가 중원무성의 이름을 빌어 천녀교를 희롱하는 것인가? 진짜다 가짜다 하는 추측이 나돌 때, 모든 추측을 일소해 버리는 것 하나가 있었다. 항마무성거(降魔武聖車)! 대별산을 떠나 황산으로 향해 가는 거대한 팔두마차(八頭馬車)의 이름이 그것이었다. 여덟 마리 천리준마(千里駿馬)가 이끄는 마차의 크기는 천하에서 둘째가라면 서럽다 할 정 도였다. 마부석에는 외관이 훌륭한 노인 하나와, 두 다리가 없는 추면노파가 마치 부부같이 나란히 앉았고… 마차 주위 아홉 마리 건마가 아홉 명의 검사들을 태운 채 마차를 호위하고 있었 다. 마차의 창문은 휘장으로 가리어져 있어 누가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따그락- 따그락-! 마차가 달리는 속도는 아주 일정했다. 그런 속도라면 사월 십오야, 혈탑성회가 시작할 즈음 황산 천도봉 위에 닿을 것이다. <항마무성(降魔武聖)> <군마패주(群魔敗走)> 마차의 네 귀퉁이에 매달려 있는 깃폭에 적혀 있는 힘찬 글씨가 마차의 위용을 더해 주고 있었다. 따그락- 따그락-! 혈탑성회에 참석하기 위해 황산 쪽을 향해 일정한 속도로 달려가는 항마무성거는 곧 중원무 림의 눈길을 끌게 되었다. - 항마무성거 안에 중원무성이 타고 있다. 그분은 천녀제와 일전을 겨루기 위해 황산으로 가고 계시다. 이런 말이 항마무성거와 함께 황산 쪽으로 전해졌다. 놀라운 것은, 마부석에 올라 항마무성거를 끌고 있는 두 명의 마부가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이었다. 한 사람은 무림화타라 했고, 한 사람은 삼살 중 하나로 악양에서 죽었다고 소문난 실혼여마 라는 것이었다. 가히 일파의 주인이 될 사람들이 마부석에 올라 있으니, 마차 안에는 누가 머물러 있단 말 인가? 항마무성거는 관심의 초점거리가 되었고, 황산으로 가는 도중 많은 저항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마차는 단 한 번도 멈춰 서지 않았다. 마차를 호위하고 있는 아홉 무사가 마차를 저지하려는 무리들을 아주 간단히 퇴치하곤 했기 때문이었다. 따그닥- 따그닥-! 항마무성거의 말발굽 소리가 천하를 진동시킬 때, 한 자루 검을 등에 메고 사람이 다니지 않는 길을 골라 황산으로 나는 듯 달려가는 흑의청년 하나가 있었다. 스슥-! 그는 천하에서 가장 빠른 경신법을 갖고 있었다. 그의 목적지는 황산 삼봉 중 하나인 천도봉 정상이었다. '항마무성거가 황산에 닿기 이전, 혈탑 안에 갇혀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능운 형을 구 해야 한다. 항마무성거에 이목이 쏠리고 있으니, 황산 혈탑 안으로 잠입하는 것이 약간은 쉬 울 것이다.' 밤을 낮 삼아 길을 재촉하는 흑의청년은 바로 상관안이었다. 그가 바로 항마무성거라는 마차를 만든 장본인이라는 것은 항마무성거 안에 타고 있는 사람 들만이 아는 일이었다. 휘잉-! 상관안의 일신 조예는 쌍심마법을 터득한 이후, 더 이상 오를 수 없다 할 정도로 심오한 경 지에 올라 있었다. 십사 일 새벽, 상관안은 황산 경내로 들어서 천도봉을 향해 몸을 날리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황산 위로 오르고 있어 눈길을 피해 달리기 약간 힘들었으나, 각오한 일 중 하나인지라 온 신경을 다해 사람 없는 곳을 골라 천도봉 위로 올라가던 상관안은 한 곳 에 이르러 발을 멈추게 되었다. 울창한 송림(松林) 앞. <무림금지(武林禁地) 망입자사(忘入者死). 천녀제(天女帝).> 청석 하나가 서 있고, 이런 경고문이 파여져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상관안은 경고비를 바라보며 잔혹한 웃음을 흘렸다. "제대로 찾아왔군. 이제껏 단 한 사람도 이곳을 넘지 못했다니… 내가 혈탑 초유의 불청객 (不請客)이 되는 셈이군." 상관안은 중얼거리다가 앞쪽을 바라보며 외쳤다. "열다섯 놈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옥면혈마란 사람이니, 어서 나와 목을 바쳐 라!" 순간, 사방에서 음사한 음성이 들려 왔다. "지독한 놈! 우리들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다니……." "흐흐… 귀신 같은 재간을 갖고 있군. 강호삼살 중 최고라 하는 것이 허명은 아니었군. 하 나, 혈탑십오룡(血塔十五龍)을 피해 안으로 들어간 사람은 이제껏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으흐흐흐……!" 안개 낀 송림 안에서 홍의청년 열다섯이 나타났다. 비조 떼처럼 훌훌 날아드는 홍의무사들, 그들의 신법은 너무도 영활했다. 천녀교 비전의 귀조신법(鬼鳥身法). 그것이 아니라면 저렇듯 신묘한 동작을 취할 수 없을 것 이다. 상관안의 검미가 꿈틀거렸다. '단방이 절기를 전수한 것으로 보아, 보통 놈은 아닐 것이다. 첫 번째 적이 되기에 모자람이 없는 놈들이다.' 상관안은 그들이 다 떨어져 내리길 기다렸다가 뒷짐지고 차게 말했다. "천녀제의 전인들이냐?" "그렇다!" 일컬어 혈탑십오룡(血塔十五龍). 천녀교에 투신한 자들 중 자질이 탁월했기에 천녀제 단방에게 직접 무공을 사사받은 행운아 들이다. 혈탑십오룡은 상관안의 기도를 알아챘는지 조심스럽게 접근했으며, 두 패로 나뉘어지면서 상관안을 중심으로 하는 동심원 두 개를 형성했다. "하하… 그럼 나와는 남남이 아니군!" 상관안은 퇴로가 막히는 것을 개의치 않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무슨 소리냐?" 혈탑십오룡 중 하나가 인상을 찡그리고 물었다. "하하… 나는 과거 천녀교의 소교주로 불리었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천녀제에게 천녀교 를 물려받았다. 그렇게 따진다면 너희들은 나를 보고 절을 해야 한다." 순간. "이런 미친놈이 있나?" "고약한 놈!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리는군!" 혈탑십오룡이 눈짓을 교환하며 등에 메고 있던 검을 뽑아 들려 했다. 순간. "큰소리가 나면 곤란하지. 너희들은 조용히 사라져야 한다. 그것이 무림 장래를 위하는 일이 될 것이다." 상관안이 양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가 몸을 빙그르르 돌렸다. 그의 왼손은 검게 물들어 기이한 잠력을 발휘했고, 오른손은 초록색으로 물들어 녹영을 뿌 렸다. 오른손에 의해 시전되는 것은 구유망혼장(九幽亡魂掌)이었고, 왼손에 의해 시전되는 것은 천 녀교 비전 구혼수(拘魂手)였다. "어… 엇?" "두 가지 수법을 동시에 쓰다니……." 혈탑십오룡은 검자루에 손을 얹었다가 몸이 얼어붙는 것을 느끼며 뒤로 미끄러져 나갔다. 그리고 하나하나 입으로 피를 흘리며 아주 조용히 숨을 거뒀다. 구유망혼장이 소리내지 않는 가운데 그들의 오장육부를 녹여 혈수(血水)로 만들어 버린 것 이었다. 상관안은 혈탑십오룡을 일제히 죽인 후 몸을 날려 안개 낀 소나무숲 안으로 빨려들 듯 날아 들었다. 스슥-! 얼마나 빨리 나는지 그림자조차 남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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