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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의 상상력과 칸트의 선험지식(I)
김창식
1. 우리 수필의 문제점-읽히지 않는다
사람들은 말한다. 수필은 결국 ‘인간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가 아니겠냐고? 맞다. 그 다음이 문제다. 수필전문지나 종합문예지에 실린 수필들을 보면 내용과 구성이 닮은꼴이다. 일상과 주변의 그렇고 그런 이야기, 개인의 기구하고 구차한 삶의 기록, 감각적인 자연예찬이거나 오래 전 농경시대로 회귀하는 추억담, 타인에 대한 은근한 비난이나 타박, 자신과 가족에 대한 자랑 아닌 자랑(그러니까 결국 자랑)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수필이 읽히지 않는다.
자연과 사물, 현상에서 삶의 이치를 읽어내지 못하는 음풍농월은 울림이 없다. 개인의 신변잡기도 관심을 끌지 못한다. 불특정 독자에게 작가는 거리에서 스치는 모르는 사람에 지나지 않으니까. 가상현실이 일상에 틈입한 시대에서 농경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체험담도 당연히 흥미가 없다. 자신이나 가족자랑, 타인에 대한 비방을 듣는 것은 고역이며, 눈물 없이는 도저히 읽을 수 없는 신파성 글에도 질렸다.
위 같은 지적이 새로운 것이 아니다. 우리 수필의 문제점은 한두 가지가 아닐뿐더러, 문제가 되는 요소들이 SNS 상의 정보유통망처럼 가지를 치거나 어지럽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상태를 악화시키는 측면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점은 읽히지 않는다는 것일 것이다. 도대체 왜 수필이 읽히지 않는 것일까?
2. 결정적 문제점-상상력의 부족
한 마디로 재미가 없어서다! 장르적 재미(선정적, 말초적, 자극적, 그로테스크한)를 말함이 아니다. 상상력 부족, 주제의식 결여, 흥미 없는 소재의 채택, 뻔한 전개와 결말, 정확하지 않은 문장과 논리, 교훈적 논조, 혼란스러운 미사여구와 수식어 사용이 얼키고 설켜 읽어도 남는 것이 없고 마음에 와 닿지도 않으니 누가 수필을 읽겠는가? 우선 고질병 중의 고질병인 ‘상상력 부족’에 대해서만 살펴보자.
상상력이 무엇일까? 현실세계와는 거리를 둔, 하지만 있음직한 가상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색일 것이다. 작가의 문학적 세계의 깊이와 너비를 가늠하는 척도이기도 하다. 수필 역시 문학의 한 갈래인 만큼 시야를 넓혀 다른 문학 장르(시?소설?희곡)에 통용되는, 상상력을 동원해 재창조하는 기법을 일부 참고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일어난 일을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 일기처럼 기록해야 진실하다’는 잘못된 주술呪術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사실을 사실대로, 있는 그대로 쓴다는 행위 자체가 도대체 가능하지 않다. 쓰려고 하는 모든 내용은 펜을 잡거나 컴퓨터 좌판에 앉는 순간 과거의 일이 된다. 즉 쓴다는 행위는 기억(생각, 체험)을 소환하는 작업인 것이다. 하지만 기억은 모호하고 자의적恣意的이며 온전치 않다. 기억은 습작되기도 하고 휘발되기도 한다. 게다가 기억을 표출하는 수단과 도구라고 할 수 있는 언어(문자) 자체가 불완전하지 않은가? 문학이란 원래 가능하지 않은 일에 가장 근사치로 도달하려는 피곤한 ‘도로徒勞’이겠지만.
어쨌거나 내가 보여주려는 내용은 재구성될 수밖에 없다. 물론 발생한 실제의 일일을 가능한 한 정확히 쓰려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다만 자신의 사상이나 관점, 정서와 체험에 충실하려 노력하되, ‘상상력’을 빌어 ‘실제적 사실’을 재해석하고 재구성해야만 ‘문학적 진실’로 탈바꿈한다는 것이다. 시나 소설, 희곡처럼 전적인 허구에 의존하면 작위적인 느낌을 주어 석연치 않을 뿐더러 수필 장르의 고유한 정체성을 훼손하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상상력의 도입을 겁내지 말아야 한다.
3. 상상력과 허구의 같은 점, 다른 점
피할 수 없는 의문이 생긴다. 시나 소설, 희곡 같은 인접 장르에서 사용하는 허구, 또는 왜곡과 수필에서 허용되는 상상력은 어떻게 다른가? 수필에서 발현되는 상상력은 ‘나와 관련된, 내가 개입하는’ 사건과 느낌의 재구성을 말함이다! 바로 이 지점에 미묘하거나 확연한 차이가 있다. 문학적 효과 증대를 위한 '선의의 조정(Goodwill Adjustment)'은 허용되지만, 있지도 않은 일을 있었거나, 있음직하게 거짓으로 꾸며 처음부터 속이려 드는 것은 고의적인 속임수요, 자기기만이다.
또 다른 갈래의 고민과 의문이 있을 수 있다. 어쩌면 글을 쓰는 사람 모두에게 공통적이고 원초적이며 피해갈 수 없는 한탄일 것이다. “상상력이 없거나 부족한 사람은 어떻게 하나?” 푸념은 이어진다. “경험이 없어서.” “책을 많이 읽지 않았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심지어 “가방끈이 짧아서, 어쩌고저쩌고….” 이 말들은 필계나 변명, 자기합리화에 지나지 않을는지도 모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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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의 상상력과 칸트의 선험지식(II)
김창식
4. 상상력과 선험지식
철학자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유명한 개념이 생각난다.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을 아우른 독일의 관념철학자 칸트는 인간사고의 기본 구조와 인식에 이르는 경로를 '선험지식(Wissen a priori)’으로 설명했다. 인간은 경험을 하지 않고도 사물과 현상의 인과성, 보편타당성에 대해 이해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인식의 수용 틀과 용량 또한 비슷하다는 것이다. 칸트의 개념은 인간에게 ‘내재한 상상력(innate imagination)’을 설명함에 있어 좋은 인유引喩가 될 수 있다. 칸트의 ‘선험지식’을 ‘상상력’으로 치환해보자.
누구에게나 어떻게든 보고 배운 것이 있다. 동화책, 위인전, 명작문고, 초중고 교과서 등은 읽었다. 사회생활을 하며 이런 저런 경험도 쌓았을 것이다. 이에 더해 경험하지 않은 사실도 유추와 추론으로 어느 정도 본질에 접근할 수 있으리라. 다만 상상력 또한 골치 아픈 사유를 동반하는 인식 체계이자 통로인고로 즐겨 사용하지 않을 뿐이다. 그러니 수필을 쓰며 누구에게나 본디부터 주어진 상상의 힘을 빌려 일상적 소재에서 의미를 걷어 올리고 미적 울림이 큰 주제로 형상화하면 어떨는지?
다음은 상상의 힘을 빌려 쓴 수필의 용례이다. 편의상 나의 글을 발췌 인용한다. 나는 2차 대전 때 나치 독일의 전차병으로 참전한 적이 없다. 독일어를 전공하고 가끔 우스개로 '독일병정' 소리를 듣긴 했지만. 나는 천지가 열리고 닫히는 듯 폭풍우치는 광란의 바다에 가보았거나, 바다 속 깊은 곳을 탐사해본 적도 없다. 어릴 적 집 어른들이 물가에 가지 말라고 해서. 영화나 TV에서 비슷한 장면을 보았을 뿐이다. 또한 나는 오래 전 탑골공원에 가서 상자 안에 갇힌 쥐를 구경하며 안타까워한 적은 있지만, 쥐가 되었거나 쥐의 입장에서 인간을 조롱한 적은 없다. 쥐 해에 테어났지만. 쥐가 나오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보았을 뿐이다.
상상력이란 무엇인가, 도대체? 상상력을 상상한다. '음, 그게 그러니까….' ‘아마 그랬을 거야.’ ‘혹 그러지 않았을까?’ ‘아무렴 그렇고말고!’
5. 상상력을 발휘한 수필 쓰기 사례
#오래 전 본 영화가 생각난다.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독일기갑사단이 최후의 반격을 준비하며 벨기에 접경지역에 있는 쇠뿔 모양의 삼림지대인 '아르덴'으로 향한다. 추위에 언 병사들의 얼굴은 푸르뎅뎅하다. 탱크부대가 진격을 멈춘다. 눈발이 흩날리고 자작나무가 귀신울음 소리를 낸다. 탱크 뒤에 도열한 병사들이 입술을 들썩여 신입 전차병 시절 배운 군가(Panzerlied)를 부른다. 서치라이트 푸른 불빛이 구름에 반사돼 천지를 밝힌다. 철십자훈장을 목에 건 지휘 장교가 채찍을 들어 전방을 가리킨다. 포격이 시작된다. 찢어지는 굉음과 함께 수목이 잘려나가며 움푹움푹 구덩이가 파인다.
-<탱크>
# 바다의 겉이 아니라 은밀한 속살과 장기, 피돌기를 보려면 볕도 들지 않은 어두운 밑바닥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곳은 어떤 모습일까? 해파리 떼가 공정대처럼 낙하하고 날씬한 뱀장어가 악기의 현絃처럼 물길을 흩뜨리는 곳. 자줏빛 물풀이 미친 여자의 서러운 울음처럼 나풀대고, 덩치 큰 곰치는 미욱한 새색시처럼 바위 틈 사이로 얼굴을 내민다. 강철 근육과 지옥의 눈을 가진 대왕문어가 마술보자기처럼 몸집을 오므렸다 펼치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검고 노란 띠를 두른 잔 물고기 떼가 일사분란하게 방향전환을 하며 제식훈련을 펼치는 곳. 그곳에 물길의 본류, 해저의 정밀, 침묵하는 바다의 모습이 있으려니.
-<해변의 카프카>
#종로3가 탑골공원. 쥐 한마리가 뿔뿔 기어가자 작은 널빤지 벽이 나타난다. 작은 동물이 방향을 틀어 출구로 향한다. 구경꾼들이 박수를 치려는 순간, 미련한 쥐가 쪼르르 멀어지더니 다른 곳을 헤맨다. 짜증이 나려는 순간 설핏 의심이 든다. 쥐가 우리를 비웃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면 너희들이 웃고 재밌어 한다는 말이지?" 그러고 보니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쥐가 얼핏 우리를 쳐다보았다. 쥐의 붉은 눈에 연민과 슬픔이 일렁였던 것 같기도 하다. 쥐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래, 내가 이처럼 망설이고 어쩔 줄 몰라 하면 너희들이 즐거워한단 말이지? 다음번엔 더 어려운 문제를 내보시지. 스프링 장치가 달린 쥐덫도 여기저기 설치해 놓고 말야.
-<쥐는 이렇게 말하였다>
*유튜브 강의 자료. 원제목은 <문학적 상상력과 비센 아 프리오리>
김창식nixland@naver.com
수필집 <<안경점의 그레트헨>> <<문영음文映音을 사랑했네>>
흑구문학상, 조경희수필문학신인상, 한국수필작가회문학상
부평삶의문학상,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2011/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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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수필, 무엇이 문제인가, 도대체? / 김창식
우리 수필 이대로 좋은가?
수필이론서를 보면 수필의 종류와 구분, 범위를 놓고 말도 많고 탈도 많다. 다른 장르의 문학은 오직 ‘길이’로만 구분하는데 왜 우리 수필을 두고는 ‘내용’과 ‘형식’의 갈래가 많은 것인지 씁쓸하다. 문학 장르로서의 수필은 '붓 가는대로 쓴 글'이 아니라, '개인의 체험, 사상, 감정을 언어(문자)라는 수단으로 상상력을 통해 체계를 갖추고(배치, 구성, 전개) 형상화한(서술, 묘사, 비유) 정교한 글‘이다.
흔히들 말한다. 수필은 결국 ‘인간과 삶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가 아니겠냐고. 말이야 옳다. 그런데 수필 전문지나 종합 문예지에 실린 수필들을 보면 내용이 닮은꼴이다. 일상과 주변의 그렇고 그런 이야기, 개인의 흩뿌려진 상념이나 구차한 삶의 기록, 감각적인 자연예찬, ‘그때 그랬었지’하는 추억담, 자신과 가족에 대한 자랑 아닌 자랑(그러니까 자랑), 타인에 대한 은근한 타박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자연과 사물, 현상에서 삶의 이치를 읽어내지 못하는 음풍농월은 독자를 견인하지 못한다. 읽는 이들은 브런치 카페에서 오감직한 신변잡기에도 관심이 없다. 불특정 독자에게 작가는 모르는 사람에 지나지 않으니까. 가상현실이 일상에 깊숙이 틈입한 메타버스의 시대에 오래전 농경시대로 회귀하는 체험담에도 당연히 흥미가 없다. 자신의 신산한 가족사나 가족자랑, 타인에 대한 교훈조 비방을 듣는 것은 고역이며, ‘눈물 없이는 도저히 읽을 수 없는’ 신파성 글에도 물리고 질렸다.
위 같은 지적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우리 수필의 문제점은 한두 가지가 아닐 뿐더러 문제가 되는 여러 요소들 간에 서로 연관이 있어 어지럽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상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측면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점은 읽히지 않는다는 것일 것이다. 왜 수필이 읽히지 않는 것일까?
읽는 재미가 없고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때문이다. 재미는 장르적 재미(선정적, 말초적, 자극적, 그로테스크한)를 말함이 아니다. 주제의식 부족, 상상력 미흡, 흥미 없는 소재의 채택, 뻔한 전개와 결말, 정확하지 않은 문장과 일관성 없는 논리, 그밖에 가르치려드는 논조, 불필요한 수식어와 미사여구가 서로 얽혀 글을 혼란스럽게 하는 마음에 와 닿지 않은데 누가 수필을 읽겠는가? 여러 문제점 중 우선 주제의식 부족과 상상력 미흡에 대해 살펴본다.
주제의식 부족
자폐적인 서정이 큰 흐름을 이루는 우리 수필의 주제의식 결여는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문예적 산문, 문학의 한 갈래로서의 수필에 주제가 없다면 문학임을 포기한 것이다. 왜 수필은 시, 소설, 희곡 같은 주제를 담지 못하는가? 인간의 구원, 인간성의 고양高揚, 어려움에 맞서는 불굴의 저항정신,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공감과 소통, 부조리한 곳에 던져진 자의 불안과 소외, 극복 의지, 자아와 정체성의 혼란, 인간 내면에 자리한 어두운 무의식의 심연 같은 '보편적이고universal 근원적인fundermental' 주제를 외면하는가?
역사적 사건이나 이슈는 왜 또 주제가 되지 못하는가? 6.25전쟁이나 4.19혁명, 부마민주항쟁, 5.18민주화운동, 가깝게는 세월호 참사 같은 우리 민족사에 아픈 트라우마나 희생이 따른 의거로 남아 있는 사건들을 수필가들이 직간접으로 다룬 사례는 찾기 힘들다. 왜 그런가? 우리 수필가들이 역사 인식이 부족하고, 수필가들의 일상이 시대정신과 거리를 두고 있는 때문인가? 설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글을 왜 쓰는가? 무언가 말하려는 메시지가 있어서다. 글을 쓰는 목적은 언어(문자)를 통해 작가의 의도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려 함이다. 이를 위해 사실과 체험을 기반으로 하는 상상과 표현(비유, 서술, 묘사), 설계(구성, 절차, 화소배치)가 필요한 것이다. 주제가 없는 글은 좀비 인간(만일 있다면!)과 같다. 걸을 수는 있고 기묘한 동작도 흉내 내지만 영혼이 없어 비틀거리고 헤매기 마련이다.
상상력 미흡
다음은 상상력 미흡이다. 상상력이 무엇일까? 현실세계와는 거리를 둔, 하지만 있음직한 가상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색일 터이다. 작가의 문학적 세계의 너비와 깊이를 가늠하는 척도이기도 하다. 수필 역시 문학의 한 갈래인 만큼 시야를 넓혀 사실에 기초하되 상상력을 동원해 재창조하는 기법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일어난 일을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 일기나 수기처럼 기록해야 진실하다’는 잘못된 주술呪術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도대체 사실을 있는 그대로 쓴다는 행위 자체가 가능하지 않다. 쓰려고 하는 모든 내용은 펜을 잡거나 컴퓨터 앞에 앉는 순간 과거의 일이 된다. 쓴다는 행위는 기억(생각, 체험)을 소환하는 작업인 것이다. 하지만 기억은 모호하고 자의적이며 온전치 않다. 기억은 습작되기도 휘발되기도 한다. 게다가 기억을 표출하는 수단과 도구라고 할 수 있는 언어(문자) 자체가 불완전하지 않은가! 문학이 원래 가능하지 않은 일에 가장 근사치로 도달하려는 피곤한 ‘도로徒勞’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내가 보여주려는 내용은 재구성될 수밖에 없다. 물론 일어난 실제의 일을 되도록 정확히 쓰려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다만 자신의 사상이나 관점, 정서와 체험에 충실하려 노력하되, ‘상상력’을 빌어‘실제적 사실’을 재해석하고 재구성해야만 ‘문학적 진실'로 탈바꿈한다는 것이다. 반면 시나 소설, 희곡처럼 전적인 허구에 의존하면 작위적인 느낌을 주어 석연치 않을 뿐더러 수필 장르의 고유한 정체성을 훼손하니 주의가 필요하다.
피할 수 없는 의문이 생긴다. 시나 소설, 희곡 같은 인접 장르에서 사용하는 허구와 수필에서 허용되는 상상력은 어떻게 다른가? 수필에서 발현되는 상상력은 ‘나와 관련된, 내가 개입하는’ 사건과 느낌의 재구성을 말함이다! 바로 이 지점에 미묘하거나 확연한 차이가 있다. 문학적 효과 증대를 위한 '선의의 조정Goodwill Adustment'은 허용되지만, 있지도 않은 일을 있었거나, 있음직하게 거짓으로 꾸며 처음부터 속이려 드는 것은 '고의적인 속임수Willful Misconduct'에 지나지 않는다.
수필 발전을 위한 제언
과거 우리 수필은 전통적 서정수필로 수필의 범위를 한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결과 비슷비슷하고 상투적이며 키치적인 신변 수필의 범람을 불러왔다. 물론 서정수필도 잘 쓰면 좋은 수필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 철학적 사유를 개진하여 보편적인 원형의 정서, 문화‧사회적 이슈를 포괄하는 입체적인 글쓰기로 외연을 넓히고 주제와 형식면에서도 새로움을 추구해야 멀어진 독자를 다시 끌어올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한 방법으로 칼럼과 문화‧인문학적 글쓰기를 제안한다. 칼럼은 시의성이 있고 주의‧주장을 펼치는 저널적 글쓰기지만 수필과의 접점이 있다. 시사적인 팩트에 객관적인 의견을 서술하고, 그에 더해 자기만의 고유한 사유와 정서를 결합해 치우치지 않고 보편적인 주제로 나아가면 읽는 이의 마음에 와 닿는 독특하고 새로운 글쓰기 형태가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칼럼을 논리‧사회‧비판 수필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으리라고 본다.
문화‧인문학적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문학, 철학, 역사, 연극, 영화, TV, 음악 등을 다루되 보다 넓은 외적인 맥락Context에서 현상을 진단해 실제적 삶과의 상호관계, 공동체의 문화‧사회적 흐름을 분석하거나 진행 방향을 예견하는 글을 쓴다면 그 또한 수필의 경계를 넓히는 일이 될 것이다. 문화‧인문학적 글쓰기와 수필은 결국 사회와 인간의 삶을 다룬다는 관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문화‧인문학적 글쓰기가 큰 틀에서 역사와 사회 현장을 들여다보는 거시담론이라면, 수필은 미시적인 개인의 삶과 일상에서 작은 우주를 읽어내는 문학행위로 비교할 수 있다.
칼럼과 문화‧인문학적 글쓰기는 퓨전, 멀티스태킹, 크로스오버, 하이브리드 같은 시대 트렌드를 선취하는 글쓰기 형태이기도 하다. 인문학적 지식과 대중 문화적 요소를 일상과 경험 사례에 녹여내면 수필의 층위를 몇 단계 끌어 올릴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바꾸어 말해 흥미(대중성)와 깊이(철학성)를 함께 갖추자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야말로 제자리에서 발 구름하거나 뒷걸음질 치는 현대 수필의 나아갈 길이며, 동시에 시나 소설 등 인접 인기 장르에 맞서 고유한 영역과 독자(특히 젊은 독자)를 확보하는 돌파구가 될 것이다.
나는 왜 글을 쓰는가?
수필과 다른 장르의 문학은 허구의 수용 여부를 포함한 형식과 기법이 다를 뿐이다. 나의 주된 관심은 '세계 안에 있는 존재로서의 나In der Welt-Sein' '원망願望, Wollen'과 당위當爲, Sollen의 길항대립', '내적인 자아와 외부 세계의 조화', '사물의 본질과 삶의 참모습에 대한 성찰' 같은 것들이다. 어쨌거나 왜 글을 쓰는가? 복합적이다. 전에는 확실하고 그럴듯한 명분을 갖고 있었다.‘삶의 비의를 찾아 내 삶의 형적을 더듬어보려고. 또는, 주변을 위로하고 사회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책임을 자각하며, 인간 영혼의 구원에 이르는 단초를 탐색하기 위해….’
사실 얼마 전부터 글 쓰는 이유가 모호해졌다. "왜 글을 쓰느냐?" 묻는다면 "그저, 그냥, 절박하니까."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원래 글 쓰는 것 자체가 삶의 외곽을 더듬는 일인 것일까. 글을 열심히 쓰면 쓸수록 삶의 중심으로부터 멀어지는 것 같은 막막함도 있다. 확실한 것은 이제 글을 쓰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됐으니 이것이 좋은 일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글쓰기의 효능 중 하나로 흔히 '소통'을 거론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소통은 '결핍된 부분을 내보이고 그것을 서로 나누어 가지는 것'이다. 그렇담 내게 무엇이 결여되었나? “그거야 많지만 말할 수 없거든요!”
앞으로의 계획? 당연히 수필에 전력을 쏟겠다. 한 편 한 편에 혼을 싣는 치열한 글을 써서 수필이 다른 산문 형식에 못지않은 매혹적인 장르임을 실증하고 싶다. 어떤 글이든 우선 읽혀야 한다. 그 다음에 문학의 효용과 목적을 논의해야 한다. 수필의 종류와 구분, 범위를 놓고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수필에는 ‘좋은 수필'과 ‘그렇지 않은 수필’이 있을 뿐이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수필’은 ‘지성(철학성)과 감성(문학성)이 조화를 이룬 글‘ '삶의 진정성을 토대로 보편성과 근원성을 획득하는 글' 결과적으로 ‘읽는 이의 마음을 움직여 변화를 이끌어내는 글’이다.
이를 위해 깊은 사유와 신선한 감성으로 보편적인 원형의 정서를 포착하고 개인의 삶에서 시대적 함의와 사회적 맥락을 이끌어내는 수필을 쓰고 싶다. 위에서도 밝혔지만, 신화나 역사, 철학적 개념을 실생활과 연관해 재구성하거나, 영화‧음악‧문화 트렌드와 사회적 이슈에서 모티브를 얻어 문학적 상상력으로 형상화하는 스타일리시한 글을 선보이려 한다. 기회가 닿으면 칼럼집, 문화평론집도 펴내고 싶다.
*<<수필미학 32>>, 2021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