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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지고무상의 기초 홍의여인은 비류신의 그 한마디에 무척 감명을 받은 듯 담담히 웃어 보였다. “좋아, 목숨을 걸고라도 초지일관 하겠다는 그 굳은 의지가 무척 마음에 드는군. 요즘 강호에 자네처럼 패기만만한 청년이 있을 줄 미처 몰랐군.… …!” 비류신은 상대방을 똑바로 주시하면서 낭랑한 어조로 말했다. “사실 불초는 노 선배님의 백 초나 양보하시겠다는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이 이렇게 되고 본즉 이제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군요.” “좋아, 더 이상 여러 소리할 필요가 없으니 어서 일신의 무공을 모두 발휘하여 공격을 개시해 보게.” 비류신은 즉시 쌍장을 휘둘러 날카로운 공격을 전개하였다.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신속하고 날카로운 공격을 연속 퍼부었으나 홍의여인은 두 손을 허리에 착 붙인 채 이리 훌쩍, 저리 훌쩍 날렵하게 피하고 나서 여유롭게 비류신의 다음 공격을 기다렸다. 날렵한 몸매가 허공에서 너울너울 춤을 추는 그 절묘한 신법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금치 못하게 했다. 비류신은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듯한 기세로 눈 깜짝할 사이에 오십 여 초나 속공을 퍼부었으나 상대방에게 상해를 입히지 못했음은 물론 옷자락 한 번 건드리지 못하였다. 차츰 초조해지기 시작한 비류신은 분노가 발동하여 우렁찬 함성을 지르며 일 보 물러섬과 동시에 강맹하기 짝이 없는 일장을 내뻗쳤다. 홍의여인은 비류신이 오십여 초나 맹공을 퍼붓는 동안 그의 공력이 의외로 심후할 뿐 아니라 기이한 무형의 진기가 무궁무진하게 발출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터에 그가 돌연 우렁찬 함성을 지르며 기초를 발출하자, 그의 분노가 얼마나 격화되었는지 짐작하고 더욱 경각심을 굳힌 채 완전무결한 태도를 취했다. 일진의 잠력과 암경이 노도처럼 덮침을 느낀 홍의여인은 신속하게 운기조식하여 몸을 보호함과 동시에 왼쪽으로 다섯 자 가량 물러났다. 비류신은 절묘하기 짝이 없는 기초를 펼쳐 맹공을 가한 직후 여세를 몰아 계속 비호같이 덮쳐가면서 쌍장으로 후려쳤다. 그의 이번 공세는 아까와 달리 매우 신속하고 악랄하여 노도와 같은 장풍과 지풍은 당장 바위라도 부서뜨릴 기세였다. 매 초식마다 변화무쌍하고 내세는 무궁무진하여 그 강도를 예측키 어려워 천하무림에서 적수가 없다는 자부심을 가진 홍의여인도 크게 위협을 받았다. 그녀는 시종일관 여유를 잃지 않으려고 완강히 버티었으나 비류신의 신랄한 속공 앞에서 하마터면 신법이 파해(破解)될 뻔한 위기를 느꼈다. 그 바람에 허리춤에 붙이고 있던 두 손을 쳐들어 반사적으로 손을 뻗칠 뻔하였으나,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경각심을 가지고 내뻗지 않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사십 초나 속공을 퍼부은 비류신은 앞으로 삼 초만 더 공격하면 약속한 백 초가 다 찬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흠칫 놀라서 공세를 멈추어버렸다. ‘음… 이 여자의 무공은 확실히 절대적이구나. 만약 이런 상태가 계속 된다면 백 초를 더 공격하여도 도저히 승리를 거두지 못할 것 같다… …’ 이때 홍의여인이 큰 소리로 외쳤다. “왜 공격을 계속하지 않는가?” 비류신은 무거운 어조로 대답하였다. “노 선배님의 무공은 확실히 천하제일이라 할 수 있으며, 후배의 보잘 것 없는 무공으로 앞으로 백 초를 더 공격한다 하더라도 역시 승리를 거두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절감했습니다.” 홍의여인은 담담하고 온화한 웃음을 머금었다. “오호… 자네의 겸손한 말 한 마디가 무척 마음에 드는군. 나는 자네를 몹시 좋아하게 될 것이네. 하나 어쨌든 애당초 약속한 대로 나머지 삼 초를 모두 공격하게. 마지막 삼 초는 채찍과 장력을 동시에 사용하여도 좋아. 다만 나는 단 일 초만 반격하여 자네 수중의 잔금섭혼신편을 빼앗아 보겠네. 자네 손에서 채찍을 빼앗을 수 있다면 승리는 나의 것이며,만약 실패한다면 나는 솔직히 패배를 인정하겠네.” 비류신의 두 눈동자에서 싸늘한 정광이 번뜩였다. 그는 땅에 꽂아두었던 잔금섭혼신편을 뽑아들고 단호히 대답하였다. “좋습니다. 후배는 노 선배님의 뜻을 받들어 분부대로 해보겠습니다.” 그가 곧 잔금섭혼신편을 휘둘러대며 맹렬한 기세로 후려치자 사람의 혼을 완전히 빼앗아 갈 정도로 날카로운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어두운 밤하늘에 찬란한 금광(金光)이 퍼져 눈을 어지럽혔다. 비류신은 잔금섭혼신편의 신묘한 효력을 잘 알고 있는 터라 마음을 놓고 공격을 개시하였다. 잔금섭혼신편은 일단 휘둘러 대기만 하면 상대방이 제아무리 절세의 일류 고수라 하여도 절대 빼앗을 수 없다는 사실을 소대호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때 홍의여인은 물샐틈없는 공세에도 불구하고 돌연 비류신의 정면으로 덮쳐들었다. 비류신은 우렁찬 함성을 지르며 또 한 차례 교묘한 초식을 펼쳐 공격을 가했다. 놀랍게도 홍의여인은 그 강맹하기 짝이 없는 편세(鞭勢)를 따라 신형이 움직이는 것 같더니 돌연 허공에서 한 바퀴 회전하며 바늘 구멍만한 공격의 빈틈을 뚫고 들어와서 잔금섭혼신편을 쥐고 있는 비류신의 오른팔 관절을 붙잡아 버렸다. 비류신은 소스라치게 놀라 곧 왼손을 내뻗쳐 노도와 같은 장풍으로 상대방의 가슴팍을 후려쳐 갔다. 이 초식은 비류신이 공격을 퍼붓기로 한 백 초 중 마지막 일초였다. 일순 비류신은 외마디 비명을 지름과 동시에 상대방의 금나수법(擒拏手法)에 의하여 붙들린 팔목이 부러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는 찰나 잔금섭혼신편을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렇게 되니 비류신이 발출한 장력은 완전히 상실되고 말았지만 그의 손가락 끝은 공교롭게도 상대방의 가슴팍 옷자락을 가볍게 스쳤다. “엇!” 홍의여인은 기겁을 하여 외마디 경악성을 지르고 주춤 물러서더니 놀라움이 가득 찬 눈동자로 비류신을 응시하였다. 비류신은 자신의 손이 상대방 옷자락에 닿았다는 사실을 미처 느끼지 못한 터라 오로지 상대방의 절묘한 금나수법에 감탄할 뿐이었다. 그 금나수법은 천하에서 가장 무예가 훌륭한 절학으로써 어떠한 초식보다 신속하고 정묘한 지고무상(至高無上)의 기초(奇招)였다. 비류신도 홍의여인이 그처럼 신묘한 수법을 펼쳐 결정적인 우세를 차지하고서도 즉시 질풍처럼 몸을 날려 물러나버리자 내심 짙은 의혹을 품은 채 다급히 외쳤다. “노 선배, 이 채찍… …” 그의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 홍의여인의 신형은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완전히 잠적해 버렸다. 비류신은 홍의여인이 사라져버린 어두운 허공을 응시하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무공이 너무도 보잘 것 없다는 사실에 대한 비관이었다. 잠시 후 비류신은 지령보 방향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비류신은 희끄무레한 달빛을 받고 서있는 한 사람의 그림자를 발견하였다. 그 인영은 수장 밖에 서 있었다. 비류신은 단숨에 그에게 접근하며 큰 소리로 외쳤다. “소대천, 마침 잘 만났소. 나는 그렇지 않아도 당신을 찾아 헤매던 중이었소.” 지살도 소대천은 고개를 돌려 비류신을 한 번 살펴보고 나서 빙그레 웃었다. “비소협,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소?” 비류신은 분노가 치밀어 올라 우렁차게 외쳤다. “나는 당신을 찾아 잔금섭혼신편의 채찍집을 되찾고 억울하게 돌아가신 스승님의 원수를 갚을 결심이오!” “비소협은 지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구려. 내가 비소협의 채찍집을 가지고 있다니, 내가 그것을 탈취했다는 증거를 댈 수 있소? 또한 비소협의 스승이 누구인데 나에게 원수를 갚겠다는 것이오? 혹시 비소협의 스승이란 나의 둘째 형님인 소대호를 가리키는 게 아니오?” 비류신은 그의 말을 듣고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렇다! 나는 채찍집을 그가 약탈해 갔다는 증거를 제시할 수 없다. 거대한 괴인이 바로 소대천이라고 단정을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나 나는 지령보에 침입하였을 때 열세 구나 되는 뻣뻣한 시체를 직접 목격하지 않았던가?’ 비류신은 이런 생각을 하고 나서 싸늘한 어조로 대꾸하였다. “소대천, 당신은 음모와 계략이 남달리 뛰어나고 교활하기 이를 데 없는 인물이라는 정평이 나 있소. 그러나 아무리 영특하다고 해도 결코 나를 속이지 못할 것이오.” 지신도 소대천은 여전히 그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냐는 듯 무거운 어조로 반박하였다. “비소협, 엉뚱한 사람에게 그런 터무니없는 누명을 덮어씌우려 들지 마오. 자고로 우리 무림인들은 명예를 생명보다 더 중시하거늘 지금 당신이 이렇듯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여 명예를 훼손시키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속셈에서요?” “그럼 당신은 내 채찍집을 탈취해가지 않았단 말이오?” “지금 강호 무림에서 잔금섭혼신편에 눈독을 들인 사람은 수천수만에 달할 정도요. 그리고 나보다 무공이 고강한 인물 역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단 말이오. 조금 전 비소협과 일전을 겨룬 그 여자만 하더라도 얼마나 절세적인 무공을 지녔는지 직접 싸워봤으니 나보다 더 잘 알 거요.비소협은 그 여자가 누구인지나 아오?” “난 모르오. 그녀가 누구란 말이오?” “그녀는 지금부터 십팔 년 전 천하제일이라는 명성을 얻은 황천선구요.” 비류신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홍의여인이 바로 황천선구일 줄이야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는 매우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수수께끼 같은 소대호의 원한 관계를 알고 있는 자는 선우휘와 소대천 형제 그리고 황천선구 뿐이거늘, 조금 전 황천선구를 만났을 때 그 진상을 물어보지 못한 것이 무척 애석하였다. 지신도 소대천은 비류신이 침묵만 지키고 있는 것을 보고 입을 열었다. “내가 알기로는 천하의 쟁쟁한 무림 고수들이 잔금섭혼신편을 탈취할 욕심으로 구름처럼 이곳으로 몰려오고 있다는데 비소협이 채찍을 가지고 있으니 어딘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드는구려.” “불길하다는 소리는 묘지에서도 했지 않소? 더 이상 반복하여 얘기할 필요는 없소.” “허허헛… 비소협은 너무 성급하구려. 물론 충고를 하면 귀에 거슬리겠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비소협의 안전을 위해서… …” 비류신은 매우 불쾌한 듯 재빨리 그의 말을 가로챘다. “흥! 생명의 안전을 위해서라고? 당신은 진정으로 자비로운 마음에서 그런 소리를 한 거요? 현재 우리는 물과 불처럼 상극이거늘 숙명적으로 서로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처지요. 이런 상황 아래서 당신이 목적 달성을 위해 갖가지 야비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리라는 사실은 얼마든지 예측할 수 있소.” 지신도 소대천은 껄껄 웃고 나서 말을 받았다. “비소협은 지나치게 엉뚱한 오해를 하고 있구려. 설마 내가 핏줄을 나눈 형님에게 학대를 가하여 돌아가시게 했다고 무고한 누명을 뒤집어씌우지 않겠지요?” 비류신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버럭 언성을 높였다. “소대천! 똑똑히 들으시오! 당신은 소대호 그분과 피를 나눈 형제간으로서 어떻게 그분이 십팔 년이란 기나긴 세월 동안 깊은 원한을 품은 채 눈물과 한숨의 나날을 보내게 할 수 있었단 말이오? 어디 입이 있으면 그 점에 대하여 변명을 해보시오!” 비류신은 소대호의 비참한 말로가 상기되어 치미는 울분을 참지 못하여 날카롭게 외쳤다. 시종일관 여유로운 웃음을 머금고 있던 소대천의 얼굴에서도 웃음이 걷혔다. “비소협은 너무 지나친 말을 함부로 지껄이는구려. 방금 비소협이 지적한 대로 내가 형님에게 그런 학대를 가하여 돌아가시게 한 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당장 자결해 버리고 말겠소.” 비류신은 소대천의 표정이나 말투가 너무도 절실하여 자기의 판단이 혹시 틀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대호 노 선배님은 운명하시기 전 누구 때문에 죽게 됐다고 분명히 밝히지 않으셨다. 다만 자진하여 기나긴 세월 동안 시달림을 받게 되었다고만 말씀하셨을 뿐이다. 음, 여기에는 반드시 중대한 사연이 숨어있을 것이다… …’ 이런 생각이 들자 그는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애를 쓰며 정색을 하고 다시 캐물었다. “그렇다면 소대호 노 선배님이 무슨 까닭에 그처럼 처절한 고통 속에서 한을 품고 죽어가기를 자원했는지 말해 보시오!” “거기에는 매우 복잡한 사연이 얽히고설키었소. 나도 그 문제에 관한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하지만 단 한 가지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있소. 그것은 다름 아니라 지금 비소협의 수중에 있는 잔금섭혼신편 때문이었다는 사실이오.” 비류신은 소대천이 자기 형의 사인을 입에 담기 꺼려하는 기색을 눈치를 채고 혼자 궁리를 해보았다. ‘음… 하긴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토로하시기를 모든 일은 잔금섭혼신편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자기들 삼형제 간에 얽힌 사랑싸움에도 기인했다고 하셨지… …’ 비류신은 이때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 있어서 냉랭한 어조로 물었다. “소대천, 내가 묻는 말에 사실대로 대답하시오. 소월녀 낭자는 바로 당신이 낳은 딸입니까?” 그의 입에서 소월녀라는 말이 튀어나오자 소대천의 안색이 싸늘하게 변하였다. “비소협, 내 간절히 부탁하겠는데 여하한 일이 있더라도 그 애에게만은 이런 사실을 알려서는 안 되오.” “그 사실을 알리든 안 알리든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마음대로요. 좌우간 당신네 형제들 간에 얽힌 일을 제 삼자가 참견할 바 아니오. 하나 나는 당신의 형님인 소대호 노 선배님으로부터 온정을 입었기 때문에,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어떤 난관에 봉착하더라도 기어이 그 내막을 밝히고 말겠소. 그러니 당신은 사실대로 내 질문에 답해주기 바라오.” 지신도 소대천은 땅이 꺼질 듯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만일 그런 사실을 밝힌다면 우리 삼형제의 명예는 영원히 더럽혀지고 마오. 또한 당신은 구태여 그런 사실을 꼬치꼬치 캐물을 필요도 없소.” “좋소! 당신 입으로 밝히지 않겠다면 더 이상 강요하지 않겠소. 하나 나는 언제든지 기필코 진상을 밝히고 말겠소. 그건 그렇고, 당신은 어서 내 채찍집이나 돌려주시오.” “흠” 지신도 소대천은 흠칫 놀랐다. “비 소협,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아까도 분명히 얘기했지만 나는 결코 당신의 채찍집을 빼앗아 가지 않았소.” “시치미 떼지 마시오! 열세 명의 강시들은 바로 당신이 길러낸 무리들이지 않소?” 일순 소대천의 입언저리에 잔악하고 싸늘한 비웃음이 번졌다. 그러나 그는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고 담담하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비소협, 우리 그런 얘기는 그만 둡시다.만약 내가 채찍집을 가졌다손 치더라도 나는 당신의 목숨을 구해줬으니 그 대가로 계산할 수도 있는 문제 아니겠소?”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요? 당신이 언제 내 목숨을 구해 줬단 말이오?” “허허헛… 그렇다면 지금 내가 곧 언제 당신의 목숨을 구해줬는지 증명해 보이겠소.” “나는 아무런 부상을 입지 않았고 이렇듯 사지가 멀쩡한데 당신은 무엇을 어떻게 하여 내 목숨을 구하겠단 말이오?” 이때 소대천은 여유로운 웃음을 머금은 채 엉뚱한 질문을 했다. “비소협은 남색 옷을 입은 그 소녀를 잘 아오?” 비류신은 두 눈을 번쩍 뜨고 재빨리 반문하였다. “당신은 흑룡강 파의 세 여자 중 그 남의소녀를 말하는 것이오?” 지신도 소대천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무슨 꿍꿍이 속인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비소협은 그 여자와 어떤 묘한 관계요?” 비류신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자고로 남녀칠세부동석이라 하였거늘 무슨 특별한 관계를 맺었겠소? 그녀와 나는 시종일관 팽팽한 대립 하에 서로 경원시하는 처지요.” 소대천은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핫… 그렇다면 바로… …” 비류신은 상대방의 모호한 언행이 적이 불쾌하여 불끈 화를 냈다. “그렇다면 바로 어쨌단 말이오? 당신은 왜 분명한 말을 하지 않고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는 거요?” “비소협, 너무 흥분하지 말고 내 말을 귀담아 듣는 게 이로울 거요. 당신 몸에 무상지음부골공이라는 독소가 침투해 있을 때 그것을 치료해 준 사람이 누구요?” “당신이 이미 알고 있다면 굳이 물어볼 이유도 없지 않소?” “목하 무림 강호 인물들은 모두 여우처럼 간사하고 교활하오. 그들은 자기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음은 물론 방해자가 되는 인물을 제거하려고 온갖 심혈을 기울이고 있소. 그러하거늘 비소협과 아무런 정분도 없는 남의소녀가 당신을 치료해 준 저의에는 어떤 딴마음이 작용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소?” 이 말을 들은 비류신은 내심 크게 놀랐다. ‘음… 흑룡강 일파의 잔인하고 악독한 수단을 볼 때 남의소녀는 순순히 남을 도와줄 여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방금 소대천의 분석이 결코 틀리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의소녀는 무슨 까닭으로 나를 구해 줬을까? 혹시 흑백사가 자신의 목숨과 나의 목숨을 바꾼 것은 아닐까?’ 비류신은 이런 생각을 하다가 불쑥 물었다. “그럼 남의소녀는 무슨 마음을 먹었기에 나를 구해줬단 말이오?” 소대천은 가볍게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지금 비소협은 흑백사가 자신의 목숨과 당신의 목숨을 바꿨다고 생각한 것 같은데,그게 명백한 사실이라고 확신할 수 있소?” 비류신은 울화가 치밀어 올라 버럭 언성을 높였다. “그렇게 쓸데없는 소리만 늘어놓을 필요 없소. 어서 시원시원하게 묻는 말에 답변이나 하시오.” 그러나 소대천은 조금도 노하지 않고 담담히 대꾸했다. “흑백사가 죽지 않는다면 당연히 비소협이 죽게 되는 것이오. 한데 현재의 상황에서 냉정히 따져볼 때 당신들 두 사람 중 죽을 가능성이 많은 사람은 바로 당신이오.” “그건 무슨 말이오?” “비소협은 남의소녀로부터 치료를 받을 때 환약 한 알을 복용시켰다는 것을 알고 있소?” 비류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그런 기억이 없소. 만약 그것이 독약이었다면 내가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있을 수 없지.” “비소협은 그 알약이 매우 무서운 만성 독약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구려. 그 독약은 복용한 직후 발효되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내장에 침투하여 몇 개월이 지난 다음에야 발작하는 기독(奇毒)이오. 일단 독이 발작하기만 하면 도저히 목숨을 건지지 못하게 되오.” 비류신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게 정말이오?” “정말인지 거짓인지는 내가 해명하기 전에 시험해 보면 될 것이오. 당신은 곧 단전의 진기를 끌어올려 운기(運氣)하여 어떤 이상이 느껴지는지 한 번 확인해 보구려.” 비류신은 곧 그의 말대로 진기를 끌어올려 운행해 보았다. 지금 비류신은 소대천의 묘수에 속아 넘어간 것이다. 그는 일찍이 독경 한 권을 입수하여 거기 수록된 독술을 완전히 터득하였기 때문에 공교로운 수작을 부려 비류신을 감쪽같이 속이고 있었다. 비류신이 단전의 진기를 끌어올려 전신의 혈도에 돌리려는 찰나, 그는 일진의 미묘한 향이 단전으로 스며들고 있음을 느낌과 동시 불현듯 소대호로부터 소대천의 독술이 절세라는 말을 들은 것이 상기되어 후다닥 날카롭게 외쳤다. “비열한 인간! 이 따위 비열한 수단을 쓰다니… 이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당신을 죽여 버리고 말 테다!” 그는 곧 오른손을 훌쩍 쳐들더니 잔금섭혼신편을 휘둘러 강맹한 기세로 후려쳐 갔다. 소대천은 가볍게 몸을 날려 물러서더니 날카롭게 외쳤다. “비소협, 왜 그렇게 성급히 날뛰는 거요? 말로 해도 얼마든지 할 수 있거늘 그렇게 격노할 필요가 있겠소?” 비류신은 그의 속임수에 넘어가 극독에 중독되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기왕에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는 생각으로 일언반구도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더욱 매서운 기세로 질풍같이 덮쳐가면서 상대방의 곡지혈(曲池穴)을 찔러갔다. 소대천은 살짝 무릎을 굽혀 신랄한 공격을 피해낸 뒤, 비류신의 팔목을 움켜쥐려고 다섯 손가락을 갈고리 모양으로 구부린 채 아래서부터 위로 쳐올렸다. 비류신은 대갈일성 하더니 허공으로 사뿐히 뛰어올라 손바닥을 칼날처럼 엇비슷이 세워가지고 소대천의 팔목을 향해 맹렬한 기세로 내려쳤다. 그 일 초는 매우 신속할 뿐 아니라 강맹한 경력이 서려있어 무쇠라도 자를 기세였으나 소대천은 피하려 들지 않고 여유롭게 매서운 일격을 그대로 맞았다. 일순 비류신은 자기 손끝이 일진의 무형 잠력에 부딪친다고 느꼈으나 당황하지 않고 계속 맹공을 퍼부었다. 그러나 소대천은 신형을 약간 이동하였을 뿐, 별로 충격을 받지 않은 것 같았다.오히려 공격을 가한 비류신이 다리를 휘청거리며 삼보나 후퇴하였다. “비소협의 내공은 상상 외로 심후하구려. 하나 방금 격출한 일장이 나보다 약하다고 생각지 않소? 만약 비소협이 자신의 내력이 나보다 약하다는 사실을 시인한다면 내가 비소협을 죽이기는 누워서 떡먹기보다 쉽다고 할 수 있소.” 소대천은 품속에서 조그마한 약병 한 개를 꺼내더니 말을 이었다. “아마 내 말이 틀렸다고 생각지 않을 거요. 나는 비소협을 구해주고 싶은 솔직한 심정에서 이 귀중한 약을 주겠으니 내 말을 믿고 목숨을 구할 의사가 있으면 어서 받아서 복용하고 끝내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거절해도 좋소.” 그는 분홍색 알약 한 개가 담긴 흰 약병을 땅바닥에 내려놓더니 곧장 몸을 돌려 총총히 걸음을 옮겼다. 비류신은 어안이 벙벙하였다.오늘밤 그는 약 두 시진 동안에 걸쳐 무공이 자기보다 월등한 강적을 두 사람이나 만났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잔금섭혼신편을 탐내는 적이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갑자기 마음이 변하여 호의를 베풀었다. 잔금섭혼신편을 호시탐탐 노리는 그들이기 때문에 그 탁월한 무공을 충분히 발휘하면 얼마든지 간단하게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련만 오히려 호의를 베푸니 어찌 괴상하지 않단 말인가. 더욱이 그는 자신의 무공이 미흡한 점에 대하여 크게 비관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별로 느끼지 못하였지만 그런 쟁쟁한 고수들과 일전을 벌이고 난 지금 자신의 보잘 것 없는 무공이 너무도 한심스럽게만 여겨져서 부끄러운 마음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그는 물론 소대천의 말을 완전히 믿지 않았으나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그가 남기고 간 약병을 주워들었다. 죽음! 비류신은 죽는다는 사실에 대하여 조금도 두려움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지금 너무도 할 일이 많기 때문 절대로 무의미하게 개죽음 당할 수 없었다. 떳떳하고 보람되게 죽기 위해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일단 위기를 벗어나야만 했다. 그래야만 할 일을 다 마친 다음 떳떳하게 죽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비류신은 일단 소대천의 말을 믿고 그 약을 복용하려고 병뚜껑을 열고 분홍색 알약을 꺼냈다. 바로 이때였다. 떨리는 음성이 들려와 비류신으로 하여금 주춤 동작을 멈추게 하였다. “비류신… 그것을 먹어서는 안 되네.” 말소리를 따라 어둠 속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바로 청풍명사 청룡백호였다. 비류신은 청룡백호의 안색이 유난히 창백한 것을 발견하고 어리둥절하여 물었다. “이 약을 먹어서는 안 된단 말씀입니까?” 청풍명사 청룡백호는 체내의 고통이 무척 격렬한 듯 안면 근육을 파르르 떨었다. 그는 극렬한 아픔을 참느라 어금니를 악문 채 떨리는 음성으로 말하였다. “그… 그것은 독약이야… …” “네? 독약? 어떻게 알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나를 속이려는 것이 아닙니까?” 청룡백호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 침통하게 말하였다. “이 밤이 새기만 하면 나는 모든 게 끝장이 나고 만다네. 동녘이 밝아오면 나는 비참하기 짝이 없게 죽어갈 몸이거늘 무엇 때문에 거짓말을 하겠는가? 더욱이 자네는… …” 비류신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여 다급히 말을 가로챘다. “내일 아침이면 죽는다는 사실은 어떻게 아십니까?”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