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은 과거의 화려했던 시절을 추억하면서 그 시절의 아름다웠던 모습을 나열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현재의 비천한 처지에 대한 원망과 고통을 표출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만약 단순히 과거를 추억하는 것이라면 자신을 그런 풍성함 속에 살게 하신 하나님에 대해 감사할 수도 있을 텐데 욥은 지금 그런 마음이 아니다.
본인이 느끼는 과거는 특별히 하나님이 자신을 보호하시던 시절이었고, 전능자가 자신과 함께 계셨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그 시절에는 욥이 강장하던 날이었는데, 그 때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나열하면, 욥은 자녀들에 둘러싸여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경제적으로도 풍족하여 아쉬움 없이 소비할 수 있었고, 사회적으로도 존경과 칭송을 들으며 존귀한 자의 신분을 유지하며 살았다.
그리고 이처럼 이웃으로부터 존경받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욥 자신이 누구보다 더 헌신적으로 이웃을 향해 사랑을 베푼 결과였는데, 그는 “소경의 눈도 되고, 절뚝발이의 발도 되고, 빈궁한 자의 아비도 되며, 생소한 자의 일을 사실하여 주었으며 불의한 자의 어금니를 꺾고 그 잇사이에서 겁탈한 물건을 빼어내었다.”고 하지 않는가?
이처럼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 없는 삶을 누렸던 욥은 그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임을 의심치 않고 믿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삶을 영위하다가 마지막 날에 주님의 부름을 받고 이 땅을 떠나 주님 품으로 안길 것을 확신했다. 이런 욥이 왜 갑자기 그 아름답던 모든 것을 한꺼번에 다 잃게 되었는가? 친구의 말처럼 이웃을 향해 불의한 이를 취했는가? 아니면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서 연약한 자를 억압했는가?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 숭배에 빠져 교만한 삶을 살았는가?
본문에서는 결코 그런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그리고 욥의 말을 들어보아도 자신은 결코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과연 욥이 왜 이런 비참한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는가? 도대체 욥이 처한 현재 모습은 무슨 이유 때문에 발생한 것인가?
욥기를 읽으면서 늘 부닥치게 되는 한결같은 질문이 바로 이것인데, 해답을 알고 보면 우리가 가졌던 의문 자체가 우습고, 우리가 너무 하나님을 몰라서 어리석은 의문을 품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떤 인간도 하나님께 복 받을 자격은 없다. 그런데도 복을 누리게 되었다면 이것은 일방적은 주님의 긍휼과 사랑의 결과이다. 다시 말하건대 우리가 복 받을 만한 짓을 해서 복이 온 것이 아니란 사실이다.
그렇다면 비참한 처지에 이른 것에 대해 불평할 이유가 없다. 어차피 우리는 죄인이고 그 죄에 대한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것 아닌가? 죄인이 고통 받는 것이 뭐 그리 이상할 것이 있는가?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장 11-12절에서 이런 고백을 했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바울은 자신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말한다. 이것은 욥이 과거를 회상하며 현재를 비관하고 있는 심정과는 전혀 딴판이다. 그렇다면 바울의 현재 처지는 욥처럼 그 정도로 극심한 환경이 아니었기 때문에, 즉 참을만한 형편이기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만약 그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크나큰 실수이다. 결코 바울의 처지가 욥보다 나은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환경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는 것은, 자신이 죄인중의 괴수인 사실을 깨달았고, 그런 죄인이기에 어떤 환경에 처해지든지 불평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자신에게 주님은 십자가 복음을 전할 사도로 부르셨다는 그 사실 한 가지만으로 만족하고 감사하고 있다. 형편이 어떠하든 복음만 전해지면 감지득지한 일이기 때문이다.
욥이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모두가 자기 영광, 만족, 기쁨으로 충만해 있다는 사실이다. 그 어디에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은 불신앙이다. 아니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상상한 우상 하나님을 섬긴 꼴이다.
욥이 생각한 이런 하나님은 없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에 대해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족케 하시는 분이 아니라 자기 영광을 취하시는 분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이 자기 영광을 위해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고, 자기 택한 백성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 지게 하시고, 그 일을 근거로 자기 백성의 죄를 사하셔서 의롭다 칭하시고 자기 품으로 부르시는 그런 하나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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