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복지논쟁이 한창이다. 그런데 왜 복지 정책이 주요한 이슈가 되는가? 아이를 낳으면 양육비를 지원하겠다고 하고, 회사에 보육시설을 갖추었으니 출근할 때 아이들을 맡기라고 하고, 보금자리 주택을 건설하겠다고 하고, 주거 공간이 가능한 한 비쌀수록 좋으니까 집값이 내리지 않도록 정책을 펴야한다고 하고, 배추 값이나 생선 값이 오르지 않도록 행정지도를 해야 하고, 직장이 없더라도 소득이 연 501만원이면 지역 의료 보험료를 월 10 만원(연 120만원) 정도 내야 하고, 편안한 노후를 위해서 국민 연금에 가입하라고 하고, 금연해야 한다고 하고, 무상급식을 해야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고, 대학 등록금을 독일이나 프랑스처럼 무상으로 하면 안 되고.....정치 세력들은 개인들의 사소한 일상을 앞에 놓고 서로 편을 갈라서 다툰다. 그들이 언제부터 우리네 생활의 세세한 내용들에 그렇게 관심이 많았을까? 그들의 자비로운 배려와 세심한 정책이 우리 삶을 개선할 수 있을까? 이처럼 개인들의 신체와 생명을 배려하는 이런 정치적 양상들을 어떻게 주제화할 수 있을까?
무엇을 먹고, 어떻게 생계를 유지하고, 어떻게 치료 받고, 장애가 생겼을 때 어떤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등에 관한 사항들은 선거 이슈가 된다. 이런 논의를 좌/우의 대립구도로 설명하고 진보와 보수의 편가름으로 해명할 수 있을까? 누가 복지의 적이고 누가 동지인가? 누가 대학 무상 교육의 동지인가? 국가, 사회 조직, 다양한 권력 장치들이 개인의 생명을 어떻게 배려하고 관리하는가? 어떻게 국민의 건강을 관리하고 경제적 자원의 배분, 생산, 유통을 어떻게 조절하는가?
얼마 전 한 대학의 비정규직 청소근로자들의 재계약과 관련해서 다양한 쟁점이 제기된 적이 있었다. 한 사회의 ‘타자’들은 어떤 권리를 누리거나 누리지 못하는가?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희생당하는 인간’인가? 어떻게 그들의 권리를 박탈하고 제한하는 것이 정상적인 것이고, 그들을 예외 상황으로 내모는 것이 어떤 점에서 정상적인 사회 운영에 불가결한 것이고 어떤 경제, 정치, 법률적 이익을 보장하는가? ‘준 다수’가 된 비정규직 근로자/노동자들은 정상적인 시민인가, 아니면 예외적 존재인가? 전태일의 인간 선언은 정규적 노동자의 것이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배제하는 것인가? 소수자와 배제당한 자들의 문제가 왜 정상적인 존재들을 ‘예외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 글은 이런 문제들을 간접적으로 조명하기 위해서 서구 근대 주체의 신체와 생명을 문제 삼은 푸꼬의 논의와 그것을 생명정치의 틀에서 재구성하려는 아감벤의 논의를 소개하려는 것이다.
그의 생명 정치bio-politica는 푸꼬의 미시권력에 대한 분석, 생명관리 권력bio-pouvoir의 틀을 잇는 것이다. 일상적인 미시권력들에 대한 분석을 새롭게 사고하기 위해서 일상 공간에서 길들여지는 존재가 아니라 ‘예외 상황’에서 주권적 권력에 의해서 추방되고 수용소에 갇혀서 모든 권리를 상실한 ‘자연 생명nuda nita’과 ‘희생당하는 인간homo sacer’에 주목한다.
푸꼬의 권력분석틀은 전체주의 기획에 대한 비판적 접근의 하나로서 강제수용소가 ‘저기’에 숨겨진 곳에 있지 않고 일상적인 ‘여기’에서 작용함을 보여준다. 그는 사법과 정치적 틀에 얽매인 전통적인 권력관을 벗어나서 억압과 금지에 바탕을 두지 않은 긍정적이고 생산적으로 작용하는 지식-권력 복합체와 테크놀로지들의 작용을 제시한다. 그런데 이처럼 근대사회전체를 규율이 지배하는 사회로 분석하는 틀에서 외면 받은 수용소, 곧 전체주의적 기획을 구체화한 예외적 공간에 대해서는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아감벤은 수용소의 논리를 사회로 내면화하는 방식이 아니라 수용소라는 예외적 상태가 정상적인 법, 정치적 질서의 기반이자 숨겨진 '노모스'임을 드러내려고 한다. 그는 자연 생명을 정치적 삶으로 고양시키려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사고가 어떻게 자연생명을 정치공동체에 배제하는 방식으로 포함하는 지, 그것에 어떤 희생이 따르는지, 전체주의 국가와 자유민주주의 국가 모두가 어떻게 자연 생명을 권리의 원천이자 희생 지점으로 삼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I. 푸꼬의 생명관리 권력, 또는 생명관리 정치
1. 생명 관리 권력--규율 테크놀로지와 안전 테크놀로지
푸꼬는 『성의 역사』1권에서 주권 권력과 생명 관리 권력bio-pouvoir을 구분하고, 1976년, 1978-9년의 콜레쥬 드 프랑스 강의록에서 생명 관리 권력(또는 생명관리 정치bio-politique)을 주제로 삼는다.
생명관리 권력은 생명을 관리하면서 최대한 활용하는 방식으로 생명을 안전하게 하고 강화, 증식시키고 정확한 통제와 전반적인 조절을 추구한다.
그는 17세기 이래 주권자의 죽일 수 있는 권리가 ‘생명’을 관리하는 권력으로 옮아간다고 본다. 전통적인 권력 형식인 주권 권력은 권력관계를 재화, 산물, 봉사 등을 탈취prélèvement하는 형식을 취한다. 군주는 신하를 살려두거나 죽일 수 있는 권리(생사여탈권)을 지닌다. 그런데 17세기 이후 이런 ‘죽음에 관한 권력’은 새로운 권력 형식과 중첩되는데, 새로 나타난 권력은 생명을 관리하고 보장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Lemke, 2007, 49)
“더 이상 탈취prélèvement는 주된 형식이 아니라 그 아래 예속되는 힘들에 대한 선동, 강화, 통제, 감시, 최대화, 조직의 기능을 하는 다른 것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이 권력은 힘들을 가로막고 복종시키고 파괴하려고기 보다는 그 힘들을 산출하고 증대시키고 조직하려는ordonner 것이다.” (VS 179)
주권권력을 생명 권력 안에 배치하는 것은 (정치내적인 변화가 아니라) 일련의 역사적 전제들에 기인한다. “생명이 역사로 진입하는 것”, 또는 “생물학적인 것이 역사적인 것을 압박하는데” 결정적인 점은 18세기에 산업 생산, 특히 농업 기술이 개량되면서 생산성이 높아지고 생명 일반에 관한 지식이 발전하고 기술적, 과학적, 사회적, 의학적 혁신이 이루어진 점이다. 생명과 생존을 대상으로 한 관찰과 조치들을 바탕으로 권력-지식의 절차들에 의해서 생명 과정이 고려되고 그 과정을 통제하고 변화시키려는 시도가 이루어진다. (VS, 187)
푸꼬는 생명 권력이 (죽이고faire mourir 살도록 두는laisser vivre 주권 권력과 대비되는 점에서) 죽도록 두고laisser mourir 살리는faire vivre 것이라고 본다. 죽음에 대한 위협을 바탕으로 삼은 억압적 권력은 살리는 권력, 생명을 관리하는 권력으로 바뀐다.
푸꼬는 생명에 관한 정치적 테크놀로지가 전개되는 두 축을 개인 신체에 관한 규율과 인구 조절régulation de population로 본다.
17세기에 등장한 규율 테크놀로지는 (신체를 억압하지 않고) 신체를 특정한 목적에 맞도록 길들인다. 규율의 테크닉은 개체들을 통제하고, 훈련시키고, 조직한다. 이러한 근대 규율은 개인들을 억누르거나 금지하는 방식보다는 훈련시키고 힘을 조절하는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방식으로 작용한다. 이것은 다양한 테크닉들--세부적 규제, 연습, 훈련, 시간 사용, 평가, 시험, 기록 등--을 사용하여 신체를 길들이고 그 효율을 최대화한다. 곧 근대 규율은 신체를 조작 가능한 대상으로 삼아서 경제적으로 유용한 존재나 정치적으로 순종하는 존재로 만들고자 한다.
(근대인은 역사적 상황에서 특수한 ‘주체-대상’으로 만들어진다. 맑스가 자본주의적 상품 생산, 프로이트가 자본주의적인 욕망을 생산하는 절차에 주목하듯이, 푸꼬의 분석틀은 세심한 ‘신체-길들이기’ 절차가 인간이라는 산물을 제조하는 과정에 주목한다.) 푸꼬에 따르면 17-18세기에 신체에 대한 미시권력들은 신체를 만들고, 교정하고, 복종하도록 하고, 특정한 능력을 부여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개인을 통제, 활용하려는 일련의 기술들과 절차, 지식, 자료 등이 마련되고 18세기에 두드러진 길들임docilité의 도식과 신체를 유용하게 만들기 위한 새로운 테크닉이 결합된다. 신체를 분석하고 조작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드는 정치해부학 une anatomie politique은 길들여진 신체corps dociles를 만든다. (SP 138-140/205-7)
이런 복종 기술technique d'assujettissement에 따라 산출된 신체-대상은 훈련받은 신체corps de l'exercice로서 권위에 따라서 조작된다.(SP, 157/234) 이렇게 볼 때 근대인의 신체는 권력의 전략과 테크놀로지가 가로지르고 서로 만나는 중계점이자 집합점이다.
그런데 18세기 후반에 다른 권력 테크놀로지가 형성되는데, 그것은 개인 신체가 아니라 인구의 집단적 신체를 지향한다. 이런 안전 테크놀로지technologie de securité는 인구에 대해서 위험을 방지하거나 완화시키기 위해서 고유한 집단 현상과 그것의 변이 조건들을 살핀다. 이것은 (규율을 강제하고 훈련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조절하고 통제하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인구population에 대한 생명관리 정치bio-politique는 종개념의 신체le corps-espèce를 대상으로 삼아서, 개입하고 조절해서 증식, 출생률과 사망률, 건강, 수명, 장수 등과 그것을 변화시키는 조건들을 배려한다. 이런 ‘인구조절’의 측면은 인구통계학의 출현, 자원과 주민 사이의 관계에 대한 고려, 부와 그것의 유통, 다양한 생명과 그것의 지속기간을 파악한다.(VS, 184-5)
정리하면, 서구에서 생명 정치적 테크놀로지는 두 축--신체에 대한 규율과 인구 조절--으로 전개된다. 한편으로는 세밀한 감시, 끊임없는 통제, 꼼꼼한 공간적 구획, 의학적-심리적 검사, 신체에 대한 미시-권력들로 나타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규모 조치, 통계학적 평가, 사회체le corps sociale 전체나 집단에 대한 개입으로 나타난다. (VS, 192)
푸꼬는 생명을 관리하는 역사bio-histoire가 생명관리 권력과 대응한다고 본다. 생물학적인 생명이 정치에 반영되면서 (서구의) 개인들은 ‘생물 종’으로 파악되고, 그들 신체의 생존조건, 삶의 개연성, 개인과 집단의 건강, 가변적인 체력, 그 체력을 최적의 방식으로 배분하는 것이 배려/관리 대상이 된다.
그는 역사에서 처음으로 생물학적인 것이 정치에 반영된다고 본다. 생명은 지식이 통제하고 권력이 개입하는 영역에 포함된다. 권력은 생명체를 다루고 생명과 그 메커니즘을 명확한 계산 영역에 편입시키고 권력-지식으로 조절, 관리함으로써 생명을 변화시키는 동인으로 삼고자 한다.
“그러나 한 사회의 생물학적 근대성의 문턱seuil de modernité biologique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고유한 정치적 전략에 생명을 거는 시기에 자리 잡는다. 수천 년 동안 인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눈에 비친 그대로의 존재, 살아있고 덧붙여서 정치적 실존을 누릴 수 있는 동물이었다. 근대인은 살아있는 그의 생명이 문제가 되는 정치 안의 동물이다.”(VS, 188)
푸꼬는 생명관리 권력이 발전함에 따라 규범의 작용le jeu de la norme이 법보다 중시되는 경향이 있다고 본다. 생명을 담당하는 권력은 지속적으로 조절하고régulatrices 교정하는correctifs 메커니즘을 요구한다. 살아있는 인간은 가치와 유용성의 영역에 배치된다. 권력은 가치를 산정하고, 측정하고, 평가하고, 위계화하면서 규범 주변에서 배분한다. (VS, 189-190) 법이 점점 더 규범으로서 기능하고 사법제도는 조절하는 일련의 기관들(의료기관, 행정기관 등)에 점점 더 통합된다.
푸꼬는 19세기 이래 삶의 목표가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생명’이 된다고 본다. (FH, 172) 권력에 대한 투쟁이 목표로 삼는 것은 생명이다. 곧 근본 욕구들, 인간의 구체적 본질, 인간이 지닌 잠재성의 실현, 풍부한 가능성을 지닌 생명이다. 푸꼬는 정치적 투쟁이 전면에 나타난 경우에도 그 쟁점은 (‘법’이 아니라) ‘생명’이라고 본다. 생명, 신체, 건강, 행복, 욕구 만족에 대한 ‘권리droit’, 모든 억압과 소외를 넘어선 인간의 참모습과 모든 가능성을 되찾을 ‘권리’가 모든 새로운 권력절차들에 대한 정치적 반응la réplique politique이다. (VS, 190-1)
푸꼬는 이러한 생명관리 권력이 자본주의 발전에 불가결한 요소라고 본다. 자본주의는 신체를 생산 체제 안에 편입하여 유용하고 순종하는 신체를 만들 뿐만 아니라, 신체와 인구를 증가, 강화하고자 한다. 그는 사회체의 모든 수준들에서 작용하는 권력 기술인 해부-정치학적, 생명관리 정치 장치들을 부각시킨다. 푸꼬는 생명관리 권력이 인력의 축적을 자본의 축적에 따라 조절하고 집단들의 증가를 생산력의 확대와 이윤의 차별적 분배에 결부시킬 때에만 자본의 운동과 사회관계가 그 바탕을 마련한다고 본다. 자본 축적은 생명에 대한 관리를 전제한다. 이를 위해서 살아있는 신체에 투자하고,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 힘을 조절, 분배할 필요가 있다. 이런 설명이 타당하다면 신체, 생명에 대한 관리는 자본주의 생산의 조건이 된다.(VS, 185-6; FH, 168-9)
렘케는 푸꼬의 주장으로부터 근대정치가 점점 더 생명정치가 되어가고 주권자와 죽이는 권력이 더 이상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고 볼 수는 없다고 지적한다. (Lemke, 54) 오히려 그 반대인데, 죽음을 부여하는 주권적 법은 사라진 것인 아니라 생명을 보장하고 그것의 발전과 관리를 목표로 삼는 권력에 예속된다. 따라서 죽이는 권력은 생명 자체에 기여해야 하고, 더 이상 주권자의 법적 존재가 아니라 인구의 생물학적 존속에 관심을 쏟아야 한다. 이런 생명정치의 역설은 생명과 그것의 안전, 개선이 정치적 권위자의 과제가 되는 점이다.
2. 인종주의와 죽이는 권력
푸꼬는 주권 권력이 근대의 생명 권력으로 변형되는 과정에서 정치-군사적 담론이 인종주의적-생물학적 담론으로 옮아가는 점에 주목한다.
‘인종’ 개념은 생물학적 의미로 고정되지 않은 채 특정한 역사-정치적 분할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비교적 일찍 등장 했다.(같은 책, 55) 이런 담론은 사회가 두 적대적인 진영으로 분리되고 두 적대적 사회집단이 존재한다고 본다.
푸꼬는 생물학적-사회학적 인종주의가 형성되는 과정을 살핀다. 이것은 다른 인종이 외부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사회체에 침투하는 인종, 사회체 안에서 재생산된다고 본다.
사회가 이원적으로 균열된다면 상이한 두 인종이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같은 종족이 우월한 인종과 열등한 인종으로 나뉜다. 즉 열등한 인종은 한 인종 안에 나타나는 그 인종의 이면(裏面)이다. 이로부터 투쟁의 담론은 두 인종 간에 벌어지는 갈등이 아니라 ‘유일하고 참된’ 권력, 규범을 장악한 인종과 이 규범에서 벗어나서 생물학적인 유전 형질상 위험한‘ 종족 사이의 갈등으로 전개된다.
이 인종주의는 한 집단과 다른 집단 간의 투쟁 대신에 한 사회가 자신이나 자기에게 고유한 요소, 자기의 산물에 맞서게 한다. (“우리는 사회에 대해서 우리를 지켜야 한다.”는 주장 대신에 “우리도 모르게 우리가 구성하고 있는 다른 종족이나 하위 종족, 반종족의 모든 생물학적 위험에 대항해서 사회를 지켜야 한다.”가 된다.) 푸꼬는 사회적 규범화의 근본 차원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구 정화purification permanente의 인종주의, 내적 인종주의가 전면에 등장한다고 지적한다. (VS 52-3)
푸꼬는 인종 투쟁을 정치적 문제틀로 다루는 두 가지 재정식화가 19세기 말에 나타나면서 생물학적-사회학적 담론을 형성한다고 지적한다.
이런 인종주의에서 (전투, 승리, 패배를 강조하는) 전쟁에 관한 역사-정치적 주제 대신에 생존을 위한 투쟁의 진화론-생물학적 모델이 나타난다. 푸꼬는 이런 모델이 생명 권력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에 주목한다.
“생명을 과대평가하고majorer 수명을 연장시키고 기회를 증대시키고 사고를 피하고 결함을 보상하는 것을 중시하는 권력이 어떻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 (......) 근본적으로 사람을 살리는 것을 목표로 삼는 권력이 어떻게 사람을 죽도록 내버려둘 수 있는가? 생명 권력이 정초한 정치 제도에서 어떻게 죽음 권력, 죽음의 기능을 행사할 수 있는가?”(DS, 226-7)
푸꼬는 인종주의가 생명 권력의 경제 안에서 두 가지 기능을 한다고 본다.
먼저 인종주의는 원리적으로 동질적인 사회, 하나의 생물학적 전체를 쪼개서 내적으로 대립시킨다. 선한 인종과 악한 인종, 보다 우월한 인종과 열등한 인종, 상승하거나 하강하는 “인종”의 차이를 만들어서 살아야 하는 자와 죽어야 하는 자들 사이에 분리선을 긋는다.
이것은 전통적인 인종 투쟁과 달리 이원적 사회의 표상에서 나온 것으로서 한 사회 안에 사는 두 인종을 서로 맞세운다. 이런 인종주의는 사회 자체에 맞서있는 자신의 고유한 요소에, 고유한 산물에 맞서도록 방향을 바꾼다. 곧 영속적인 정화를 통한 내적 인종주의는 사회적 규범화의 근본 차원이 된다."(DS 53)
두 번째로 인종주의는 살만한 가치가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구분하는데 그치지 않고 보다 적극적인 관계를 제시한다. “많이 죽일수록 많은 사람을 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많은 사람을 죽도록 둠으로써 너는 보다 더 살 수 있을 것이다.”(DS, 227)
이런 인종주의는 전쟁 모델(“네가 살기를 원한다면 다른 사람은 죽어야 한다”)을 생명 권력의 행사와 양립할 수 있도록 한다. 곧 나의 삶과 타인의 죽음을 군사적으로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생물학적 관계를 앞세운다. “열등한 인종이 점차 사라지고 비 정상인들이 더 많이 제거되면 종의 퇴화를 막을 수 있고, 개인이 아니라 종으로서의 나는 좀 더 강하고 활기차게 살아남아 후손을 번식시킬 수 있을 것이다.” (DS 227-8)
인종주의는 ‘살만한 가치’에 따른 위계질서뿐만 아니라 한쪽의 건강이 다른 쪽의 소멸과 직접 대립되도록 한다. (생명을 개선한다는 명분으로 타자를 동일화하기 위해서 타자를 경계 바깥으로 내몰고 투쟁하거나 죽도록 하는 이데올로기적 토대를 낳는다.)
“타인의 죽음은 그것이 단순히 나의 개인적 안전과 관계있어서 나의 삶의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죽음, 곧 나쁜 인종과 열등한 인종(혹은 퇴화한 인간이나 비정상적 인간)의 죽음은 생명 일반을 보다 건강하게 한다. 보다 건강하게, 보다 순수하게 한다.” (DS, 228)
푸꼬는 인종주의가 19세기 말까지 국가적 합리성, 국가 장치와 구체적인 정책들을 이끌었고, 국가 인종주의로 물질화/구체화된다고 지적한다. 인종담론은 국가의 수중에 있는 무기가 된다. (Lemke, 2007, 58-9)
“이제 국가는 다른 종족에 대한 한 종족의 무기가 아니라 종족의 순수함과 우월성, 그 통합을 보장하는 도구이지 도구이어야 한다. 그 일원론적, 국가적, 생물학적 함의와 함께 종족의 순수함이라는 이념으로 대체될 것이다.”(DS 70-1)
푸꼬는 20세기에 인종주의 담론의 두 가지 확대된 변형태--나치와 소련의 국가사회주의 모델--를 지적한다. (DS 71-3)
나치는 제국주의적 확장과 내부의 적에 대한 투쟁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낡은 인종주의 투쟁과 민족적 신화를 이용한다. 소비에트 인종주의는 의학-치안의 도구로서, 무계급 사회의 유토피아, 지배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난 자들을 병자나 정신이상자로 다룬다. 계급의 적은 사회체로부터 격리되어야만 하는 생물학적 인자가 된다.
렘케는 이런 인종주의적 계보학에서 푸꼬가 인종주의를 이데올로기적 구성물로 보지 않고 예외 상황이나 사회적 위기에 대한 응답으로 보지 않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푸꼬에 따르면 인종주의는 사회적 분열을 표현하고 (영속적인) 사회체의 정화라는 생명정치적인 표상을 바탕으로 삼아서 사회적 구조화하고 정치적 실천을 이끌고 국가 기구들로 물질화된다. (Lemke, 2007, 59-60)
II. 생명 정치와 근대의 희생당하는 인간
1. 생명 정치의 문제제기
아감벤은 푸꼬의 생명관리 권력의 문제를 긍정적으로 수용해서 그것을 생명정치로 발전시키고자 한다. 푸꼬는 자연 생명이 국가 권력의 대상이 된 점, 정치가 생명정치로 전환되는 점을 지적한다. 따라서 살아있는 신체가 정치적 전략의 지향점이 되고, 국민의 건강, 생물학적 생명 등이 주요한 문제가 된다. (DE. III, 179) 하지만 그는 근대 생명 정치의 본보기인 집단 수용소나 전체주의 국가 구조를 주제화하지 않는다.
푸꼬는 권력이 주체의 신체와 생명에 침투하는 방식을 분석한다. 한편으로는 정치적 기술로 국가가 개인들의 자연적 생명에 대해서 배려하는 점, 다른 한편으로는 규율적 테크놀로지에 의한 주체화과정을 분석한다. (DE. IV, 229-32)
그런데 아감벤은 이런 두 방식의 권력이 수렴하는 지점이 불분명하다고 본다. 그래서 개체화하는 기술들과 전체주의화하는 절차들이 모이는 구별 불가능한indistinzione 지점을 밝히고자 한다. 법률적-제도적인 권력 모델과 생명 정치 모델이 교차하는 지점은 어디인가? (HS 9)
아감벤은 고전적 정치 사고에서 생명 정치가 어떻게 주제화되는지를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에서 찾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폴리스를 정의하면서 생명zēn과 좋은 삶eu zēn을 대비시킨다. 자연 생명은 정치적 삶에 포함되어야만 자신의 완전성을 찾을 수 있다. 폴리스에서 자연 생명은 '좋은 삶'으로 변형되어야 하므로, 스스로의 내용을 정치공동체의 규범에 알맞도록 수정, 변형해야 한다. 이렇게 선하고 정의로운 삶으로 바뀐 생명은 바로 zoē가 bíos로 변형된 것이다. 아감벤은 ‘자연 생명’을 정치화하는 이런 기획이 자연 생명을 배제하는 동시에 포함하는incluso attraverso un'esclusione 것이라고 본다. 자연 생명은 좋은 삶의 필연적인 부분이지만 좋은 삶은 ‘자연 생명이 아닌 것’이므로 자연 생명은 정치적 공동체의 자원이자 그것이 요구하는 형식을 갖추어야만 한다. (Norris, 4)
이처럼 서구 정치에서 자연 생명을 배제함으로써 국가가 정초된다면 정치학의 근본적인 범주 쌍은 (친구/적이 아니라) 자연 생명nuda vita/정치적 현존esistenza politica, 곧 zoē/bíos이다. (HS 11) (아감벤은 민주주의와 전체주의라는 두 적은 생명정치라는 공통의 지반을 공유하고 상이한 방식으로 개인들의 생명을 정치화한다고 본다.)
아감벤은 이런 주제와 관련하여 푸꼬의 틀을 보완한다. 푸꼬는 근대 정치를 자연 생명zoē이 폴리스에 포함되는 점뿐만 아니라 생명 자체가 국가 권력의 보호와 고려 대상이 되는 점으로 특징짓는다.
이런 자연 생명은 정치의 기반이므로 국가 권력을 조직하는 경우이건, 그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경우이건 그 바탕이나 목표가 된다. 이런 생명 정치의 과정은 마치 국가권력이 규율 과정과 함께 살아있는 존재를 고유한 대상으로 삼는 것처럼 진행된다. (HS, 12-3)
아감벤은 생명정치의 틀에서 자연 생명을 정치질서에 포함/배제하는 ‘예외’의 구조에 주목하고, 슈미트의 주권 이론에 제시된 ‘예외’의 논리를 원용해서 생명정치의 근본 구조와 강제수용소의 본질에 접근하고자 한다.
2. 주권 권력과 희생당하는 인간
이처럼 자연 생명이 정치적 삶에 ‘배제를 통해서만’ 포함될 수 있다면 이런 생명 정치의 문턱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가? 자연 생명은 정치적 삶 ‘안’에 있는가? 그것은 포함된 것이지만 안에 있지 않고, 바깥으로 배제된 것으로서 그 안에 있다. 아감벤은 이런 역설적인 관계를 예와 상황의 논리와 연결시킨다. 그는 ‘주권 권력’과 ‘희생당하는 인간homo sacer’을 이 문턱에 있는 두 형상으로 본다.
슈미트는 주권자의 권력을 ‘예외’의 구조로 파악한다. 주권자가 법질서의 외부에 있으면서 동시에 내부에 있다고 한다면, “주권자는 예외 상황에서 결정할 수 있는 자이다.” (Schmitt, 1922/1934, 11) 곧 주권자는 예외상황lo srato di eccezione을 선포하고 법의 효력을 정지시킬 수 있는 권력을 지닌 자이다.
아감벤은 예외eccezione가 (일반 규범에서 배제된 개별사례라는 점에서) 일종의 배제이지만, 배제된 것이 규범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예외는 규범의 정지라는 형식으로 ‘규범과 관계 맺는다.’ 이렇게 볼 때, 예외 상태는 질서의 정지에서 비롯된 상황이고, 예외는 단순하게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바깥에서 포획됨ex-capere’이다. (HS 21-22)
이런 주권자의 ‘예외’는 법적, 정치적 질서가 유효한 공간 자체를 창출하고 정의한다. 따라서 이 예외는 근본적인 위치를 확정함Ortung으로써 정상 상황과 혼돈을 구별하고 두 상황 사이에 있는 ‘예외 상태’라는 문턱을 산출한다.
아감벤은 오늘날 예외 상태가 근본적인 정치구조이자 규칙이 된다고 본다. 강제수용소는 가시적으로 공간을 확정한 결과이다. 따라서 노모스의 구조에 상응하는 공간은 감옥이 아니라 ‘수용소’이다. (감옥에 관한 법은 정상적인 법질서의 바깥에 있지 않고 형법의 특정 영역 가운데 하나이지만, 강제수용소의 근거가 되는 법은 군법, 계엄령이다.) 강제수용소는 절대적인 예외 공간으로서 감금하는 공간과 위상학적으로 다르다. (HS, 24)
아감벤은 주권적 권력의 짝이 되는 예외적 존재가 ‘희생당하는 인간homo sacer'이라고 본다. ‘희생당하는 인간’은 신성시되면서 비난받는 자로서 이중으로 배제된다.
“희생당하는 인간은 죄를 범했다고 판정받은 자이다. 그를 희생물로 바치는 것은 허용되지 않지만neque fas est eum immorali 그를 죽이더라도 살인죄로 처벌받지 않는다sed qui occidit, parricidi non damnatur"(페스투스Festus) (HS, 79)
“희생물로 바칠 수는 없지만 죽일 수 있는 생명이 바로 신성한/희생당하는 생명이다La vita insacrificabile e, tuttavia, uccidibile, è la vita sacra."(HS, 91)
희생당하는 인간은 그를 희생물로 바치는 것이 허용되지 않지만(신성한 법 영역에서 배제됨) 그를 죽여도 처벌받지 않는 기이한 존재이다(인간의 법 바깥에 있음). 이처럼 희생당하는 인간의 생명은 인간의 법과 신의 법 모두의 바깥에 있고, 죽여도 좋지만 희생물로 바치는 것을 금지하는 교차점에 있다. (HS 80-1)
주권의 구조와 신성화/희생sacratio의 구조는 상관적이다. 희생당하는 인간은, 한편으로는 주권자의 추방령에 포섭된 생명의 기원적 형상이고, 한편으로는 정치적 차원이 최초로 구성되는 기반을 보존한다. (HS 92) 주권자의 추방령에 포획된 것이 희생당하는 인간인데, 주권 권력은 이런 자연 생명을 산출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정초한다.
아감벤은 이 두 형상이 ‘예외 상황, 비상사태’를 통해서 정치의 근본 구조를 드러내고, 이런 예외 상황이 전면화 되면서 규칙/규범이 된다고 지적한다. 이처럼 예외 상황이 정상적인 정치질서로 자리 잡는 것이 강제 수용소이다. 수용소에서 예외 상황은 정상적인/규범적인 것으로normalmente 실현된다. (HS 190)
3. 수용소, 근대의 노모스
가) 생명의 정치화와 수용소
아감벤은 푸꼬의 생명관리 권력과 아렌트의 전체주의국가 분석이 던진 질문들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수용소의 문제에 새롭게 접근한다.
푸꼬는 근대 초기에 생명이 정치의 쟁점이 되고, 생명 정치bio-politique, 인간의 자연적 생명vita naturale이 권력 메커니즘과 계산에 포함되는 과정을 주제로 삼았다. 하지만 ‘주체화 과정’을 탐구하면서 근대 생명정치의 전형인 전체주의 정치를 탐구하지는 않았다. (HS 131)
이와 달리 아렌트는 전체주의 국가 구조를 분석하고자 한다. 그녀는 전체주의 지배와 수용소라는 특수한 조건 사이의 상관성을 인식했고, 전체주의 국가의 지상 목표가 ‘총체적인 지배’이고, 강제수용소는 이런 ‘지배의 실험실’이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생명 정치의 관점을 놓치고 있기에, 전체주의가 생명정치, 정치를 근본적으로 자연 생명의 공간(수용소)으로 변형시키는 것에서 출발해서 전면적인 지배를 정당화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았다. (HS 132)
그는 양자의 관점을 ‘자연 생명nuda vita’, 희생당하는 생명으로 새롭게 주제화한다. ‘생명정치’의 틀에서 정치의 중심 문제는 자연 생명을 보살피고, 통제하고, 향유를 누리도록 할 효율적인 형태를 기획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연 생명을 중심에 둘 때, 전통적인 정치적 구별--좌파/우파, 자유주의와 전체주의, 사적인 것/공적인 것--은 그 의미를 잃어버린다. 자연 생명을 관리/배제하는 정치에서 양극들이 큰 차이가 있는 것도, 적대적이지도 않다. (HS 134-5)
아감벤은 생명정치에 주목할 때, 자연 생명에 대한 주권적 결정이 예외 상태 너머로 확장된다고 본다. 광범한 사회 영역들에서 주권자는 독점적인 결정권을 점차 양보하고 법률가, 의사, 과학자, 전문가, 사제와 공생한다. 이런 생명 정치적 맥락에서만 (인권 선언 같은 근대정치의 기원적인 사건들뿐만 아니라) 생물학적, 과학적 원리들이 정치질서에 침투하는 사건들--국가사회주의의 우생학, 살 가치가 없는 생명의 제거, 사망판정기준에 관한 규범적 규정을 둘러싼 논쟁들--의 의미가 명료해진다.
아감벤은 이런 관점에서 수용소가 (예외상태에 기초한) “순수하고 절대적이고 넘어설 수 없는 생명 정치 공간”으로서 근대의 정치공간의 ‘숨겨진 패러다임’이라고 본다. (HS 135)
수용소에 관한 기존 논의가 비인간적인 상황에 주목한다면 아감벤은 수용소의 법률적, 정치적 구조를 문제 삼는다. ‘수용소에서 자행된 끔찍한 사건들을 가능하게 했던 법적, 정치적 구조는 무엇인가?’ 수용소가 근대 이후의 정치공간의 매트릭스라면 그것은 오늘날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
수용소는 예외상태와 계엄령에서 비롯된다. “공공의 안전과 질서가 심각하게 위협받을 때”인 비상사태 시에 공공 안전을 재확립하기 위하여 기본권을 잠정적으로 유보할 수 있다. (HS 185)
이런 예외상태가 규칙이 되는 공간이 수용소이다. 수용소로 추방됨은 배제를 통해서 포함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규칙과 예외가 구별되지 않는 새로운 법적, 정치적 패러다임이 생긴다. 수용소에서 예외 상태가 정상적으로/규범적으로normalmente 실현되므로 수용소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합법성 여부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HS 190) 아렌트는 수용소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지적한다.
아감벤은 수용소 안에서 예외와 규칙, 합법과 불법이 구별되지 않기 때문에 개인의 권리나 법적 보호가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수용소 수감자들이 정치적 지위를 모조리 박탈당하고 전적으로 벌거벗은 생명nuda vita으로 축소되어 있는 한에서, 수용소는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던 절대적인 생명 정치의 공간이 되고, 그 안에서 권력은 자신 앞에 있는 순수한 생명pura vita과 아무런 매개 없이 마주선다.”(HS, 191)
아감벤은 생명정치에서 ‘희생당하는 인간’과 ‘시민’은 구별되지 않기 때문에 수용소가 ‘정치공간의 패러다임’이 된다고 본다. 그는 어떻게 인간의 권리를 그토록 완벽하게 박탈하고, 그 안에서 자행되는 모든 행위가 위법이 되지 않는지를 탐구한다. (HS 191)
“수용소는 사실과 법, 규범과 적용, 예외와 규칙 사이에서 결정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결정하는 공간이다. (...) 수용소 안에서 모든 동작과 사건은 가장 사소한 것에서 가장 예외적인 것까지 모두 자연 생명에 대한 결정이고 독일인의 생명 정치적 신체는 이것을 통해서 실현된다.” (HS 194-5)
아감벤은 수용소의 본질이 예외 상황에 구체적인 형태를 부여하는 것materializza zione dello stato eccezione이고, 그에 따라서 자연 생명과 규범을 ‘구별할 수 없는 문턱’이 생긴다고 본다. 따라서 나치의 강제 수용소 뿐만 아니라 그런 구조를 지닌 ‘모든 경우에’ 수용소는 ‘현존 한다’.
(예를 들면, 1991년 이탈리아 경찰이 알바니아 불법 이민자들을 본국으로 송환하기 위해서 임시로 수용한 바리 축구경기장, 비시 정권이 유태인을 독일로 돌려보내기 전에 집결시킨 벨디브, 프랑스 국제공항에 난민 지위를 인정받으려는 외국인들을 억류시키는 대기 구역zone d'attente 들이 수용소에 해당된다. (HS 195))
정치체제는 어디에서건 수용소를 설립될 수 있다. 아감벤은 이런 탈영토적 위치확정localizzazione dislocante인 수용소가 근대 정치의 숨겨진 매트릭스이자 생명 정치적 ‘노모스’라고 본다.
4. 생명정치의 구체적인 양상들
1) ‘살 가치가 없는 생명’ 제거하기
아감벤은 특정한 생명을 ‘살 가치가 없는 것’으로 평가하는 우생학적 사고를 생명정치학에서 희생당하는 인간과 관련짓는다.
1920년 K. 빈딩Binding(형법이론가)과 A. 호헤Hoche(의학 윤리에 관심을 갖는 의대 교수)는 ‘살 가치가 없는 생명’을 결정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들은 자살이 무죄라고 주장한다. 자살이 인간 스스로의 존재에 관한 주권을 표현하는 행위라고 파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법이 살아있는 인간을 그 자신의 현존에 관한 주권자Souverän über sein Dasein로 여긴다.
빈딩은 자신의 현존에 대한 주권을 근거로 삼아서 ‘살려둘 가치가 없는 생명의 제거’를 인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살려둘 가치가 없는 생명’의 짝이 ‘살려둘만한 가치가 있는 생명la vita degna di essere vissuta이므로, 이런 평가에서 생명은 그 자체의 가치 또는 무가치가 결정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이런 논의에서 근대의 근본적인 생명 정치의 구조가 우생학과 관련하여 법률적으로 명확하게 표현된다. (같은 책, 151)
‘가치 없는 생명vita senza valore’이란 개념은 병이나 사고 때문에 불치가 된 채로 ‘구제’를 바라는 개인들에게 적용된다. 그런데 이와 달리 (자신의 조건을 의식하지도 못하고 의사를 전달할 수도 없는) 선천성이거나 (중풍의 경우처럼) 말년에 불치가 된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빈딩은 이들이 “살려는 의지도, 죽으려는 의지도 갖지 않으므로” 그들의 생명은 아무런 목적도 없는데, 그들 자신은 그것이 견딜 수 없는 것임을 알지도 못한다고 지적한다. (Binding, 31-2; HS, 152-3) 그는 ‘누가 절멸을 인가할 수 있는 가’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 환자 자신이나 의사, 가까운 친지, 의사, 심리학자, 법률가로 구성된 국가 위원회의 최종결정을 요구한다.
여기에서 자기 생명에 관해서 갖는 살아있는 인간의 주권은 ‘희생당하는 인간homo sacer’, 곧 어떠한 법률적 가치도 지니지 않고 살인을 범하지 않고도 죽일 수 있는 존재에 대한 규정과 짝을 이룬다. ‘가치 없는 생명’이라는 새로운 법률적 범주는 희생당하는 인간의 자연 생명nuda vita에 상응한다. (HS, 153-4)
아감벤은 이처럼 생명에 대한 모든 가치 평가와 생명의 정치화politicizzazione della vita가 일정한 문턱에 관한 새로운 결정을 함축한다고 본다. 모든 사회는 이런 한계, 곧 누가 희생당하는 인간이 될 것이지를 결정한다. 이런 한계는 법질서 안에서 역사적으로 확장되어 왔고, 국가의 새로운 생명 정치학의 지평에서 모든 인간 생명과 시민을 대상으로 삼을 수 있도록 확대되었다. (HS 154)
이와 관련해서 ‘존엄사’에 법적 지위를 부여하는 정식이 출현한다. 아감벤은 ‘치유 불가능한 환자들에 대한 존엄사 프로그램’은 전시에 유대인을 비롯한 불량분자들을 수용할 수용소의 급증 때문에 특수한 환경에서 이루어진 것이지만 단순히 상황만의 문제라고 보지 않는다. 인도주의적인 고려에서 출발해서 대량학살로 이어지는 우생학 프로그램을 생명정치학의 문제 틀로 볼 필요가 있다. 이런 우생학적 프로그램은 그라페넥Grafeneck, 하다머Hadamer, 하르트하임Hartheim 등에서 실행되었다.(HS, 155-6) (그라페넥의 의학센터로 매일 독일 정신병원들에서 불치병으로 선발된 대략 70여명(6세에서 93세까지)이 보내졌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그것에 도착한지 24시간 이내에 살해되었다. 그들은 Morphium Scopolamina이 든 약제를 받고나서 가스실로 보내졌다. 다른 곳에서는 보다 강력한 약제인 Luminal, Veronal, Morphium으로 살해했는데, 이렇게 6만 명이나 희생되었다.)
아감벤은 이런 우생학이 필연적인 것은 아닐 수 있는데 그것을 강행한 이유가 무엇인지 질문한다. 그는 국가사회주의가 자연 생명nuda vita에 관하여 결정하는 주권적 권력을 새로운 생명정치의 소명으로 여기기 때문이라고 본다. ‘가치 없는 생명’이라는 개념이 정치적인 개념이라면, 그것은 주권적 권력을 정초할 희생당하는 인간의 극단적인 변형l'estrema metamorfosi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근대 생명정치의 관점에서 우생학은 살해당할 수 있는 생명과 주권적 결정이 교차하는 지점에 자리 잡는다. 이런 우생학에서 생명정치는 죽음의 정치tanatopolitica로 전환된다.(HS 157)
만약 주권자가 (예외상태에서 결정하듯이) 어떤 생명이 죽임을 당해야 하는지를 결정할 권력을 갖는다면, 생명정치학의 시대에 이런 권력은 ‘비상사태를 벗어나서도’ 생명을 정치적으로 앗아갈 시점을 결정하는 권력으로 바뀔 수 있다. (슈미트가 지적하듯이) 이런 결정에서 주권적 권력의 궁극적인 근거가 관건이 된다. 근대생명정치학에서 주권자는 생명 자체의 가치/무가치를 결정하는 자이다. (HS 157-8)
아감벤은 국가사회주의에서 근대 생명정치학의 주요 특성인 의학과 정치학이 통합된다고 본다. 이런 조건에서 자연 생명에 관한 주권적 결정은 정치적인 동기부여와 정치 분야에만 고유한 것이 아니라 의사가 주도하는 보다 모호한 영역으로 옮아간다. (HS, 158-9))
2) 국민의 생명을 형태화하기
아감벤은 생명정치학의 관점에서 국가사회주의의 인종에 관한 개념화에 주목한다. 그는 자연적 요소와 정치적 결정이 어떤 지점에서 생명 정치학의 고유한 지형을 마련하는 지를 살핀다.
아감벤은 건강과 우생학에 관한 국가사회주의 정책에서 생물학적 생명의 정치화와 그에 따르는 정치적 지평의 변화를 살핀다. 이 가운데 라이터Reiter는 『국가와 건강』( 1942)에서 국가의 소유에 물질적인 부 뿐만 아니라 생명자산ricchezza vivente을 포함시킨다. 그는 국가사회주의가 이런 국가 자산인 국민의 생물학적 신체를 배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HS 160-1)
“경제학자와 상인들이 물질적 가치의 경제학에 책임이 있는 것처럼 의사는 인간 가치의 경제학economia dei valori umani에 책임을 진다.......의사가 합리화된 인간 경제에 기여함은 불가피하므로 그는 국민의 건강 수준이 경제적 이득의 조건임을 파악한다.......일반적으로 생물학적 실체의 변동은 물질적 대차대조표의 변동과 나란히 진행된다.” (HS, 161)
이러한 새로운 생명정치학의 원리들은 우생학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지만 유전학과 인종주의를 곧바로 연결시켜서는 제3 제국의 생명정치학을 파악하기 어렵다. 그는 푸꼬의 지적을 참조한다. 푸꼬는 18세기부터 정치적 이성과 관련하여 치안과학의 중요성이 증대되고, 인구에 대한 전면적인 배려가 명시적인 목표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DE, IV: 153-61) 국가사회주의 생명정치학은 18세기 이후에 치안과학에서 전승된 ‘생명에 대한 배려’라는 지평에 놓여있다. 폰 유스티von Justi는 정치Poiltik와 치안Polozei을 구별하면서 전자가 소극적인 과제로서 국가 안팎의 적과 맞서는 것이라면, 후자는 적극적인 것으로서 시민의 생명을 배려하고 육성하는 것이라고 한다.
아감벤은 국가사회주의 생명정치학을 파악하기 위해서 치안이 정치가 되고, 생명에 대한 배려가 적에 대한 싸움과 일치하는 점에 주목한다. “국가사회주의 혁명은 생물학적 퇴화를 초래하는 요소를 배제하고 국민의 유전적 건강을 유지하고자 하는 힘들에 호소하고자 한다.”( 『국가와 건강』서문) (HS 162-4)
유전학자 폰 페어슈어von Verschuer는 「과학과 국가 과제로서의 인종위생학」에서 국가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유효할 생명정치 개념을 제시한다. “새로운 국가는 국민Volk의 보존에 필수적인 조건을 갖추는 과제 이외의 다른 과제를 지니지 않는다.”는 총통의 말을 앞세워서 국가사회주의의 모든 정치 행위는 국민의 생명에 봉사하고, 국민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국민의 신체Volkskörper의 인종적 특성과 유전적 건강을 지키야 한다고 주장한다. (HS 164)
아감벤은 생명정치가 ‘인종’을 자연적인 소여로 보는데 그치거나 순전히 도구적인 관계에만 머무르지 않는다고 본다. 생명정치의 새로움은 생물학적 소여il dato biologico가 그 자체로 정치적이라는(정치적인 것 그 자체가 생물학적 소여라는) 사실에 있다. 정치를 ‘국민의 생명을 형태화하는 것die Gestaltung des Lebens des Volks’이라고 보는 사고는 국가의 소명을 국민의 신체를 형성하고 배려하는 데에서 찾는다. (HS 164)
이처럼 자연적 유전을 정치적 과제로 변형시키는 점에서 나치 생명정치의 역설과 생명 자체를 끊임없는 정치적 동원에 예속시켜야 할 필요가 두드러진다. 따라서 아감벤은 전체주의가 생명과 정치의 (역동적인) 동일성에 바탕을 둔다고 본다. 생명과 정치가 하나로 수렴될 때, 모든 생명은 희생물sacra이 되고 모든 정치는 예외eccezione가 된다. (HS 164-5)
이런 관점에서 유전학과 관련된 법을 국가 사회주의가 처음으로 입법화한다. 히틀러가 집권한지 몇 주 뒤인 1933년 7월에 유전적 질병에 관한 법이 선포되었다. 유전병에 감염된 자들은 외과 수술에 의해서 단종될 수 있다. 1933년 10월 18일 우생학적인 입법은 결혼에까지 확대된다.
나치에게 이와 관련된 법률들은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성격을 갖는다. 이 법률들은 ‘제국의 시민권’, ‘독일 혈통과 명예의 보호’에 관한 뉘른베르크 법률과 상관적이다. 그것들은 한편으로 유태인들을 이등 시민으로 격하시키고 온전한 시민과 유태인들의 결혼을 금지하고, 한편으로 아리안계 혈통의 시민들은 독일적 명예에 값하는 자신을 증명할 것을 요구한다. 이런 사태에서 정치는 ‘국민의 신체를 형태화하려는’ 기획이다. (HS 166-7)
3) 실험용 인간들
아감벤은 희생당하는 인간의 관점에서 ‘실험용 인간’의 함의를 살핀다. 정치공동체에서 어떠한 권리도 부여받지 못한 채 자연 생명만을 지닌 자들은 근대의 생명정치가 낳은 새로운 희생자이다.
그는 다카우 수용소 등에서 실험용 인간에 대해서 다양한 인체 실험을 한 사례들을 소개한다. 1941년 5월 로셔Rocher는 히믈러에게 고공 구조 작전을 위한 실험을 위해서 다카우의 군사기지에서 건강한 37세의 유태인 실험용 인간(Versuchspersonen: 인간 모르모트)을 상대로 12000미터 상공에 해당하는 압력 상태에서 필요한 실험을 한다. 그리고 얼음이 언 상태의 물에서 생존할 수 있는지, 소금물을 마실 수 있는 지에 대해서, ‘동물열을 통한’ 소생술 실험 등을 실시했다. 그리고 독일 병사들의 건강을 위협하는 전염병 치료 백신을 개발하기 위한 다양한 접종 실험도 행해졌다. (HS 172-3)
그런데 미국 등에서도 죄수, 사형선고를 받은 이들에 대한 실험이 행해진다. 1920년 대 800명의 죄수를 상대로 한 말라리아 감염 실험은 그 해독제를 발견하기 위한 것이었다. 골드버그Goldberg는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 12명을 대상으로 실험을 행했다. R. P. 스트롱Strong은 마닐라에서 최초의 각기병 간상균beriberi bacullus배양 실험을 시도했다. 사형선고를 받은 자들을 대상으로 하와이 키아누에서 나병 감염 실험을 한 사례에서 사면을 약속받은 대상자들이 모두 실험으로 죽었다. (HS 174) 미국과 강제수용소에서 행해진 실험이 비인간적이라는 점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HS 175)
실험용 인간에게 과학적 실험을 할 수 있는가? 허용한다면 어떤 기준을 제시할 것인가? 일반적으로 동의하는 기준은 실험 대상이 된 자(자원봉사자)의 명시적이고 자발적인 동의이다. 미국의 관행은 선고받은 자에게 일정한 각서--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관련자에게 어떤 책임도 묻지 않겠다는 내용--에 서명하도록 한다. 물론 사형선고를 받은 자와 수감자의 자유로운 의지와 동의를 언급하는 것은 위선적이다.
1947년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로제Rose는 점상출혈열의 백신을 위한 자신의 실험(실험용 인간들 392명 가운데 97명이 죽었다)을 옹호했다. 그는 마닐라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자들에 대한 스트롱의 유사한 실험사례를 인용하면서, TM트롱의 연구가 각기병 환자들을 치료하려고 했듯이 자신도 점상출혈열로 죽어간 독일 병사들을 위해서 연구했다고 주장했다.
실험용 인간들은 사형선고를 받았거나 수용소에 억류된 상태에서 정치공동체로부터 배제되고, 인간의 모든 권리와 기대를 상실한 채로, 여전히 생물학적으로 살아서, 삶과 죽음 사이의 문턱에 있다. 그들은 자연적 생명nuda vita에 지나지 않는다. 살인을 범하지 않고도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생명의 지위에 놓이기 때문이다. (HS 177)
4. 죽음을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물론 일상적인 삶과 죽음의 영역에도 생명정치가 개입된다. ‘죽음 판정’과 관련된 문제를 혼수상태에 빠진 코마 환자의 경우와 관련해서 ‘뇌사’를 죽음으로 인정하는 결정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살펴보자.
1959년 프랑스 신경생리학자인 P. 몰라르Mollart와 M. 굴롱Goulon은 뇌사상태에 가까운 코마 너머의 코마coma dépassé에 관해서 보고했다. 이것은 상관적 생명기능(의식, 운동성, 감각성, 반사)이 전면적으로 상실됨은 물론 식물적 생명 기능(호흡, 혈액순환, 체온조절)까지도 전적으로 상실된 코마 상태이다.(Mollart et Goulon, 4; HS 178) 이런 극한 상태가 유지되는 것은 새로운 생명 소생 기술--인공호흡, 아드레날린 정맥주사로 심장 박동을 유지함, 체온조절술 등--덕분이어서 소생 장치가 지속되면 환자의 생존은 심근이 구심성신경과 무관하게 수축할 수 있어서 장기들의 혈관 운동을 보장할 충분한 리듬과 에너지를 지닌다(이런 상태는 대개 며칠을 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상태가 살아있는 것인가? 생명기능이 정지된 환자, coma dépassé 상태의 환자는 누구/무엇인가?(HS 179)
무엇보다도 coma dépassé는 ‘죽음’에 대한 전통적인 기준인 ‘심장박동의 중단’과 ‘호흡 기능 정지’를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코마와 죽음 사이의 무인지경una terra di nessuno에서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 (HS 179-180)
또한 이 상태는 장기이식기술과 관련된 문제를 낳는다. 이 상태의 환자는 기관을 제거하기에 알맞은 조건에 있지만, 이식이 ‘살해가 되지 않으려면’ 사망시간을 정확하게 규정할 필요가 있다. 1968년 하버드 대학의 한 위원회 (The Ad Hoc Committee of the Harvard Medical School)는 의사, 법률가, 신학자가 참여해서 ‘뇌사brain death’를 죽음에 관한 기준으로 삼았다. 이후에 이 개념이 일반화되고 법제화된다. 의학 테스트를 거쳐서 뇌 전체가 죽었다고 판정하면 ‘소생기술 덕분에 호흡을 계속하더라도’ 환자가 사망한 것으로 판정한다.(HS 180-1)
아감벤은 여전히 사망 개념이 동요한다고 보지만(HS, 181-2), 의학과 법률, 의학적 판정과 법률적 결정 사이에도 갈등 소지가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서 1974년 캘리포니아 법정에서 제시된 진술서의 경우처럼 “뇌가 죽으면 죽은 것”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뇌가 이식될 수 없는 유일한 기관이기 때문”이라고 한다면(Lamb, 75) 가설적으로 두뇌 이식이 성공한다면 뇌사도 사망 기준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논의에서 사망은 장기 이식 기술의 부수현상이 된다. (HS 181-2)
2010년 김 할머니 사례에서 보듯이, 김 할머니는 식물인간 상태로 지내다가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거부한다'는 본인의 평소 뜻을 존중하라는 대법원 판결에 따라 호흡기가 제거된 상태에서 201일간 생존했다. 이와 비슷한 예로 미국소녀 퀸란Quinlan의 경우가 있다. coma dépassé 상태에 서 몇 년 동안 인공호흡과 영양공급에 의해서 삶을 유지하다가 부모의 요청으로 법원이 인공호흡장치를 제거하도록 허락했다. 그런데 바로 그 때부터 그녀는 자연적으로 호흡했고 인공적 영양공급 상태에서 ‘자연적 사망’ 시기까지 ‘생존’했다.
김 할머니의 201일간의 생존 기간과 퀸란의 생존 기간 동안 그들의 신체는 삶과 죽음이 그 의미를 상실한 예외적인 공간, ‘비 결정indeterminazione’의 영역에 있었다. (HS 182-3, 208)
아감벤은 이런 문제들과 관련하여 오늘날 생명과 죽음은 고유한 과학 개념에 그치지 않는 정치적인 개념이 되었고, ‘결정’을 통해서만 정치적 의미를 얻는다고 본다. 생명과 죽음의 경계는 생명정치적인 맥락에서 유동적이다. 이를 재규정하는 지점에서 주권적 권력의 실행과 의학적이고 생물학적인 과학들이 맞물린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동요하는 존재들은 예외적인 공간에서 자연 생명nuda vita의 자리에 있다. 이들은 ‘희생당하는 인간’처럼 살인을 범하지 않고도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생명의 자리에 있다. 이런 자연 생명에 대해서 어떤 정치적 결정을 할 것인가? 일부 뇌사 지지자들과 근대 생명정치는 국가가 사망 시점을 확정해야 한다고, 국가만이 ‘종말의 시점le moment de la mort’을 결정할 수 있고, 가짜 생명체에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을 지녀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기체들이 공공 권력puissance publique에 속하므로 신체를 국가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Dagognet, 189) 아감벤은 “근대 민주주의에서 나치 생명정치가들도 감히 언급할 수 없었던 것”을 공공연하게 주장하는 이런 입장이 기이하다고 본다. (HS 184)
III. 맺는 말
1. 생명 정치에 관한 평가를 대신해서 아감벤의 논의가 지닌 난점을 지적하자.
렘케는 아감벤의 논의를 푸꼬의 생명관리 권력과 연관 지으면서 아감벤의 생명정치가 푸꼬가 전통적 권력관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사법적 모델에 근거를 두며. 생명 정치를 국가 기구와 정책을 중심으로 파악하고, 생명 정치를 초역사적 범주로 파악하는 까닭에 유사 존재론적 틀에 머물러 있다고 지적한다.
이 가운데 두 가지만 살펴보자. 먼저 아감벤의 생명 정치에 관한 논의는 자연 생명과 정치적 현존을 명백하게 나누는 경계설정에만 주목하는 까닭에 푸꼬처럼 생명의 규율이나 훈련, 규격화에 주목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주권 권력의 바탕이 자연생명을 산출하는데 있으므로 주권 권력은 그 정당성과 영향력을 생명 정치적 질서에 의존한다고 본다. bios와 zoe, 정치적 현존과 자연 생명, 규칙과 예외의 이항대립은 바로 푸꼬가 비판했던 사법적 권력모델을 벗어나지 못한다. (Lemke, 2007, 79)
(칼 슈미트를 원용하는) 아감벤은 주권자가 예외상황에서 결단함으로써 법을 정립하는 자라는 점에 주목한다. 이런 점은 푸꼬가 정상상태에 관심을 두고 어떻게 미시 권력의 작용이 규범성/정상성을 산출하는지에 주목하는 점과 대조적이다. (Deuber- Mankow sky, 108-114; Lemke, 2007, 79-80)
렘케는 이처럼 법의 문제와 주권적 추방령에 집중하는 까닭에 생명정치의 핵심 측면을 놓친다고 지적한다. 예외 상황에서 희생당하는 인간(을 산출하는 것)에 몰두하고 생명 정치적 개입을 자연생명과 정치적 현존 간의 대립에 국한하는 까닭에 법의 하부나 그 너머에서 작동하는 메커니즘에 주목하지 않는다. (Lemke, 2007, 80)
그리고 아감벤의 분석은 생명정치에 관한 유사-존재론적 개념틀에 따른 난점을 지닌다. 그의 생명 개념은 정적이고 비역사적인 것에 머무는데, 이는 ‘자연 생명’이 자연적이거나 사회화된 상황과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실체’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가 전제하는 고대와 오늘날의 생명 정치의 연속성에 관한 생각이 의심스러운 것은 “생명”이 근대에 특수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같은 책, 82-3)
18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자연물과 인위적 산물, 유기적인 것과 무유기적인 것을 엄격하게 구별하지 않았다. 근대 생물학이 등장한 이후에 자연적 신체의 형성, 보존, 전개에 관한 고유한 작용원리가 문제되고 생명은 자율적인 합법칙성에 따르는 고유한 대상영역에 속한다. 18세기에 철학과 과학은 자연적 신체와 인위적 신체의 연속성에서 출발하고 유기체와 인위적 산물을 엄격하게 구획한다.
아감벤은 푸꼬가 주목한 생명 정치가 역사적 현상이라는 점을 부각시키지 못한다. 근대의 생명정치는 근대 국가의 형성물이고 인간과학의 성장,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와 분리될 수 없다. 따라서 생명 정치적 기획을 역사-사회적인 것으로 자리매김하지 않는다면 ‘자연 생명’은 추상화되고 그것이 지닌 정치적 함의와 복합적인 형성 조건도 불분명해진다. (같은 책, 83)
2. 아감벤의 문제 제기는 통상적으로 정치적인 것의 영역 바깥에 놓여있던 생명과 죽음, 건강과 병, 신체와 의학 등 생명 정치적인 주제를 도입한다. 이런 작업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정확하게 평가하기는 어려우므로 일단 그 주요 내용을 정리하면서 서구 근대 주체의 신체와 생명에 관한 논점에 대한 새로운 논의의 발판을 마련하자.
아감벤은 예외 공간인 수용소에서 출발하여 권리 주체인 시민들이 ‘잠재적인’ 희생자임을 밝히고 생명정치에 포함되는(동시에 배제되는) 자연생명이 근대정치 공간의 숨겨진 기초임을 드러낸다. 근대의 ‘희생당하는 인간’은 난민, 수용소 수감자, 식물인간, coma dépassé 상태에 있는 이들, 수용소에서 의학 테스트에 내몰린 실험용인간들, 의학 실험의 ‘자원봉사자들’로서 죽음이 예정된 죄수들이다.
그리고 아감벤은 수용소를 비상사태를 선포한 주권권력이 희생당하는 인간을 추방하는 동시에 정상질서가 배제된 공간에 포획하는 지점이라고 본다. 자연 생명에 대한 정치적 기획은 살 가치가 없는 생명들을 제거하는 법적, 정치적 기준을 제시하고, 건강과 치안의 이름으로 국민의 생명을 형태화하고, 죽이더라도 처벌받지 않는 실험용 인간들을 과학지식을 위한 도구로 삼는다. 생명정치는 모든 곳을 잠재적인 수용소로 만들고자 한다.
아감벤은 서구 정치가 처음부터 생명정치였고, 서구 생명 정치의 패러다임은 국가가 아니라 수용소라고 본다. 이런 점에서 정치적 자유의 기초를 인권에 두려는 시도는 의심스럽다. 개인들이 중앙권력과 맞서서 나름의 자율적인 공간을 획득하고, 자유와 권리를 요구하는 시도가 의도하지 않은 방향, 개인들의 생명을 국가질서에 편입시키는 쪽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이런 개인들은 그들이 벗어나고자 했던 주권권력에 새로운 토대를 제공한다.
생명정치의 틀에서 생명은 항상 이미 정치화된 것이다. 생명정치는 자연생명zoē에 대한 정치적 삶bíos의 우위를 전제하고 zoē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bíos에 포함시킨다. 아감벤은 서구 정치가 zoē와 bíos의 관계를 적절하게 구성하지 못했다고 본다. 이는 자연 생명이 배제esclusione라는 형식으로만 정치에 포함inclusione될 수 있기 때문이다.(HS, 14-5) 그러면 자연생명을 어떻게 정치화해야 하는가?
근대 서구의 정치 공간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전체주의 모두에서 자연생명이 ‘적절하게’ 정치화되지 않았다면, 과연 자연생명과 정치적 삶bíos이 배제와 억압 없이 공존할 가능성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우리는 zoē를 생명정치의 바탕에서 되찾고 정치적 삶에 예속시키지 않는 길을 모색하면서 희생당하는 인간의 문제에 구체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사고틀이 필요하다. 따라서 자연 생명을 원초적인 무구한 것으로 신비화하거나, ‘보다 나은’ ‘보다 인간적인’ 정치화를 주장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푸꼬와 아감벤의 논의를 참조하여 근대 주체들의 신체와 생명을 배치하고 결정하는 ‘조건들’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면서, 주체의 신체와 생명이 지닌 잠재력potentia을 새롭게 전개할 수 있는 사고와 실천의 가능성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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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재성과 비-잠재성을 함께 사고하기
양 운 덕
아감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잠재성 개념을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 않을 잠재성’을 부각시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잠재성potenza을 부정하는 메가라학파, 곧 잠재성이 오로지 실현됨으로써만 존재한다고 보는 태도를 비판한다. 악기 연주자는 연주하고 있지 않을 때에도 연주할 수 있는 능력potenza을 지니고 있다. 그는 잠재성이 자율성을 지닌다고 보는데, 이는 잠재성에서 현실성으로 이행하면서 잠재성이 소진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감벤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현실성과 잠재성의 관계가 논리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는 존재론적인 것이라고 본다--잠재성은 ‘현존하는 실제적인 양식modi effettivi della sua esistenza’이다. (Agamben, 1995, 52; Geulen, 2005, 45)
(한 가능성이 실현되는 것, 능력이 특정한 행위로 이행할 수 있으려면 행위 할 때, 능력/할 수 있음이 무능력/할 수 없음Impotenz과 분리되어야 한다. 행위 할 때, 잠재성에서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불가분적인 통일이 나뉘는 것은 이러한 ‘무능력을 부정하는 것’이 그것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그것을 충족시킨다. 이런 사고는 가능성과 실현을 의도, 의지로부터 사고하는 습관을 벗어나야만 가능하다. (Geulen, 2005, 45-6) 이처럼 아감벤이 현실성-가능성이란 논리적 범주를 존재론화하는 까닭은 할 수 없음이 할 수 있음의 반대항이 아니며, 할 수 없음이 고유한 힘을 지니며 존재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같은 책, 46))
아리스토텔레스는 잠재성dynamia이 무엇을 하지 않음adynamia을 포함한다고 본다. 음악을 연주하고 있지 않는 ‘잠재적인’ 음악가의 예에서 보듯이, 잠재성은 능력으로 파악되어야 하므로, 무엇을 하지 않음, 또는 존재하지 않음이다. (Geulen, 같은 곳) 따라서 잠재성이 실현됨으로써 사라지지 않고 고유하게 지속되려면 실현되지 않을non passare all'atto 수 있어야 한다. 잠재성은 구성적으로 (행하거나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potenza di non (fare o essere), 곧 비 잠재성(impotenza; adynamía)이어야 한다. (Agamben, 1995, 52)
그런데 이처럼 모든 잠재성이 ‘ ~ 않을 잠재성’이라면 현실성의 실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잠재적인 것은 실현되지 않을 수 있는 자신의 능력(비 잠재성adynamía)을 유보하는 순간에 현실성으로 옮아갈 수 있다. 비 잠재성의 유보란 (잠재성의 질적인 변화alloiosis나 파괴가 아니라) 잠재성의 실현, 곧 잠재성이 자신이 비 잠재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자기에게로 되돌아가는 방식이다. (같은 책, 53)
이처럼 잠재성에서 현실성으로 이행함은 잠재성의 보존conservarsi della potenza이자 잠재성을 자기에게 부여함"donarsi a se stessa" della potenza이다. (Aristoteles, De Anima, 417 b 1-16; Agamben, 1995, 53; 1999, 184)
인간은 그가 보거나 말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을 때 잠재성의 영역에 있다. 아감벤은 잠재성이 ‘능력’, ‘힘’으로서, 단순히 비-존재, 결핍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비-존재의 현존existence of non-Being, 부재의 현전이라고 본다. 곧 ‘능력을 지님’은 ‘결핍을 소유함’을 의미한다. 잠재성은 (논리적 실체hypostasis가 아니라) 결핍이 현존하는 양상이다. (같은 책, 179)
아감벤은 건축가가 자기 일을 ‘하지 않음’으로써 그의 지식을 현실로 옮겨 놓지 ‘않을’ 수mē energein 있기 때문에 잠재적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곧 건축가는 건축하지 않는 잠재력을 지니는 한에서 잠재적인 건축가이다. (같은 책, 179) 이처럼 잠재성은 (단순히 특정한 것을 하는 잠재력이 아니라) ‘하지 않는’ 잠재력potenza 'di non', ‘현실화하지 않는’ 능력임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두움을 위한’ 잠재성을 지적한 점에 주목한다. 흔히 생각하듯이 잠재성이 단지 보기 위한 능력일 뿐이고 빛이 현존할 때 보는 것 자체로만 존재한다면, 결코 어두움을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림자to skotos를 볼 수 있고, 어두움을 경험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은 ‘보지 않을’ 잠재력, 결핍의 가능성possibilty of privation을 지닌다. (Agamben, 1999, 181)
아감벤은 인간 잠재성의 특성이 이처럼 ‘~하지 않을’ 잠재력, 어두움을 위한 잠재력potentiality for darkness이라고 본다. 예를 들어서 지루함은 행위 하지 않는 잠재성의 경험이다. 따라서 지루함은 선과 악 모두의 가장자리에 있는 경험이다. (선하거나 악할 수 있음은 특정한 선이나 악을 행할 수 있음이 아니다. 그리고 근본악은 특정한 악한 행위와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어두움을 위한 잠재성’이다. 이런 잠재성은 또한 빛을 위한 잠재성이기도 하다. (같은 곳)
이런 점에서 모든 잠재성은 비잠재성impotentiality이기도 하다. “비잠재성adynamia은 잠재성에 맞서는 결핍이다. 모든 잠재성은 잠재성 자체, 혹은 잠재성 자체에 대한 비 잠재성이다 tou autoú kai katá to autò pása dýnamis adynamía (Aristoteles, Metaphysica, 1046 a 30-2; Agamben, 1975, 52; 1999, 181-2)
아감벤의 해석에 따르면, 그 기원적 구조에서 잠재성dynamis은 그것에 고유한 결핍strēsis, 그것의 고유한 비-존재와 관련해서 자신을 유지한다. 잠재성의 본질을 이루는 ‘잠재적인 것to be potential’은 자신의 고유한 결핍인 것, 자신의 고유한 비-활동성incapacity과 관계 맺는 것이다. 잠재성의 양상으로 현존하는 존재는 그것의 고유한 비-잠재성일 수 있고, 이런 방식으로만 잠재적이 된다. 곧 존재들은 그것들의 고유한 비-존재와 관련을 갖기 때문에 잠재적인 것으로 존재할 수 있다. (Agamben, 1999, 182)
이런 잠재성에서 감각과 마비, 지식과 무지, 봄과 어두움은 서로 관련을 맺는다. “잠재적인 것dynatos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 것endéketai이다. 잠재적인 것은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잠재적인 것 자체가 잠재적일 수도, 잠재적이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to autò ara dýnaton eînai endéketai kaì eînai kaì mē eînai.” (Aristoteles, Metaphysica, 1050 b 12-13)
아감벤은 잠재적인 것이 비-존재를 수용하는dekhomai 점에서 잠재성이 근본적으로 수동성이라는 (또는 근본적인 수동성으로 존재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런 수동적 잠재성은 그것 자체의 비-존재를 견디고 겪는다. (Agamben, 1999, 182) 모든 인간적 능력은 그것의 고유한 결핍과 관련을 갖는다. 이것이 인간적 능력(또는 심연)의 기원이다.
“다른 생명체들은 그들이 특수한 잠재성만을 가질/잠재성일 수 있다. 그들은 오로지 이것을 하거나 저것을 할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들의 고유한 비 잠재성일 수 있는 동물이다. 인간적 잠재성의 위대함은 인간적 비-잠재성의 심연에 의해서 측정된다.”(Agamben, 1999, 182)
아감벤은 이런 점에서 자유의 뿌리가 잠재성의 심연에서 발견된다고 본다. 자유로운 것은 단순히 특정한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거나 특정한 것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고유한 비-잠재성일 수 있음to be capable of one's own impotentiality이고 자신의 고유한 결핍과 관계맺음이다. 이렇게 볼 때 자유는 선과 악 모두를 위한 것이다. (같은 책, 182-3))
*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
프리모 레비는 『익사자와 구출된 자』에서 생존자의 지배적인 감정이 부끄러움이라고 밝힌다. 베틀하임은Bettelheim은 생존자들이 자신이 죄가 없음을 잘 알고 있지만 여전히 죄책감을 느낀다고 지적한다. “수백만 명이 죽고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자신의 눈앞에서 죽었는데도 믿을 수 없는 행운이 따라주지 않으면 집단 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기 때문에 누구든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Bettelheim, 1979, 297-8) 뷔이젤Wiesel은 이런 아포리아를 “나는 살았다. 그러므로 나는 죄가 있다”라고 표현하면서 “나는 여기에 살아 있는데, 이는 친구, 아는 사람이나 알지 못하는 사람이 나 대신에 죽었기 때문이다.”라고 덧붙인다. (QA, 82-3)
아감벤은 이런 죄책감을 비극적 영웅의 경우와 비교할 수 있는지 살핀다. 비극적 영웅은 (헤겔이 지적하듯이) “죄를 진만큼이나 무구하다”. 그런데 수감자들은 주관적인 무구함과 객관적인 죄, 그들이 행했던 바와 책임을 느껴야 하는 바 사이의 심연을 본다. 그들은 비극적 영웅이 죄책감을 느끼는 점에 대해서 무구하다고 느끼고 영웅이 무구하다고 느끼는 곳에서 죄가 있다고 느낄 것이다. (QA, 89-90)
물론 아이히만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신 앞에서 죄책감을 느끼지만 법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그리고 집행자들은 (명령에 따라야하는 강제적인 상황인) ‘비상사태Befehlnotstand’를 내세운다. 스스로 행위를 장악할 수 없었으므로 자신도 희생자라고 하면서 무구한 죄colpa innocente의 가면 뒤로 도피한다. 나치 관리들이 이런 ‘비상사태’에 호소하는 점은 뻔뻔스럽다. (Levi, 1989, 59) 이런 점 때문에 아감벤은 아우슈비츠 이후에 윤리학에서 비극적 패러다임을 사용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QA, 92)
또한 아감벤은 20세기 새로운 윤리학의 틀을 참조해서 이 문제를 해명할 수 있는지 살핀다. 이 윤리학은 니체의 원한 극복과 함께 시작된다. 차라투스트라는 과거와 관련된 의식의 무력함, 돌이킬 수없이 발생했고, 더 이상 의지할 수 없는 것에 관한 복수의 정신에 맞서서 영원회귀의 욕망을 제시한다. 곧 유대-기독교적인 도덕을 비판하고 죄와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영원회귀는 원한에 대한 승리이고 이미 일어난 것을 의지할 가능성이고 모든 ‘그러했다’를 ‘바로 그렇게 되기를 내가 원했다amor fati’로 변형시킨다.
아우슈비츠는 이런 점과 관련해서 결정적인 단절을 이룬다. 니체식의 질문을 던져보자. “당신은 아우슈비츠가 거듭해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되돌아오기를 원하는가? 당신은 수용소의 매순간, 모든 세부적인 것까지도 영원하게 반복되기를, 그것이 발생했던 정확한 순서에 따라서 영원하게 되풀이되기를 바라는가? 당신은 이것이 다시 일어나기를, 영원히 거듭 일어나기를 바라는가?” (QA, 92)
영원회귀 모델로는 아우슈비츠를 적절하게 주제화하기 어렵다. 따라서 아감벤은 아우슈비츠 이후에 윤리적 문제가 바뀐다고 본다. 더 이상 과거를 떠맡기 위해서 그것의 영원한 회귀를 의지하는 복수의 정신을 정복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수용과 거부를 넘어서는 것, 영원한 과거와 영원한 현재 너머에서 영원하게 되풀이되는 사건이지만 바로 이 때문에 절대적으로 영원하게 떠맡을 수 없는inassumibile 것이다. 선악 너머에는 (니체가 지적하듯이) 생성의 무구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시간조차 없는senza più tempo ‘부끄러움’이 있다. (QA, 94-5)
앙텔므Antelme는 부끄러움에는 죄책감이나 다른 사람 대신에 살아남았다는 것과는 다른 이유, 보다 어두운 이유가 있다고 지적한다. 수용소에서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죽는 것morire al posto di un altro이 의미하는 바는 모두가 아무런 이유도, 어떠한 의미도 없이 다른 사람 대신에 살거나 죽는다는 점이다. 곧 수용소에서 그 자신의 자리에서 참으로 죽거나 살아남을 수 없다. 특히 아우슈비츠에서 (죽어가는) 인간은 그의 죽음에서 부끄러움 이외의 다른 의미를 찾을 수는 없다. (QA, 95-6)
아감벤은 이런 부끄러움의 근본적인 측면을 살피기 위해서 레비나스의 분석을 참조한다. 부끄러움은 도덕철학자들이 지적하듯이 존재상의 불완전함이나 결핍에 대한 의식 때문이 아니라 우리 존재가 다른 곳으로 피할 수 없음,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 때문에 생긴다. 만약 우리가 벌거벗은 상태에서 부끄러움을 느낀다면 보이는 곳에서 사라지고 싶은데도 불구하고 숨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곧 회피할 수 없음impossibilità di evasione에 직면한 채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가려는 억누를 수 없는 충동 때문이다. 우리는 부끄러울 때 우리가 어떻게 해서도 우리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없음에서 생기는 어떤 것을 떠맡고 있다. (QA, 97)
“부끄러운 것은 우리의 친밀함, 곧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현전함이다. 그 현전은 우리의 무가 아니라 우리 존재 전체를 드러낸다. (...) 부끄러움에서 발견하는 것은 그 자신을 발견하는 존재이다.” (Levinas, 1982, 86 f.)
아감벤은 부끄러움에서 떠맡을 수 없는 어떤 것을 위임받음essere consegna a un inassumibile에 주목한다. 이런 ‘떠맡을 수 없는 것’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친밀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예를 들면 우리 자신의 생리적인 삶같은) 우리 안에 있는 가장 친밀한 것이다. 이때 ‘나’는 그 자신의 수동성sus stessa passivtà, 가장 고유한 감성sensibilità più propria에 의해서 짓눌린다. 이러한 탈전유적이고espropriato 탈주체적인desoggettivato 점은 ‘나’의 그 자신에 대한 극단적이고 축소할 수 없는 현전이다. 주체는 부끄러워할 때 그 자신의 탈주체화desoggettivazione라는 내용을 지닐 뿐이다. 곧 그 자신의 고유한 혼란이나 파산, 주체로서의 자신의 망각을 드러낸다. 아감벤은 이처럼 부끄러움에서 주체화와 탈주체화가 공존한다고 본다. (QA, 97)
아감벤은 이런 부끄러움의 등가물을 주체성의 기원적 구조와 관련해서 근대 철학에서 제기된 자기촉발auto affezione에 주목한다. 이것은 칸트에게서 시간과 동일시된 것이다. 칸트가 시간을 ‘내감의 형식’으로 정의할 때, 시간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 의해서 내부적으로 촉발될 때에만 우리 자신을 직관한다.”(Kant, B 153) 그런데 이처럼 시간이 자기 촉발Selbstaffektion이라면 역설이 생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수동적인 것으로 태도를 취해야 한다Wir uns gegen uns selbst als leidend verhalten mussten. (같은 곳)
이 역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어떻게 자기 자신에 대해서 수동적이 될 수 있는가?
수동성은 단순히 수용성, 외적인 능동적 원리에 의해서 촉발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기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주체 안에 있으면서 능동성과 수동성이 일치해야 하기 때문이다. 수동적 주체는 그 자신의 고유한 수동성과 관련해서 능동적이어야 한다. 그는 자기 자신과 마주해서gegen uns selbst 수동적인 것으로서 스스로에게 행위 해야만 한다. 자기촉발과 관련된 수동성은 자기 자신을 경험하는 수용성이고, 자기 자신의 고유한 수동성에 의해서 겪음을 당하는appassiona 것이다. (QA, 101-2)
하이데거는 이와 관련해서 시간이 ‘순수한 자기 촉발’임을 강조한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스스로 거리를 두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것에서 동일한 자기un se stesso와 같은 것이 구성될 수 있다.
“순수한 자기 촉발로서의 시간은 눈앞에 있는 자기에 맞부딪쳐서 그것에 작용을 미치는 촉발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에게-스스로-관계함과 같은 어떤 것의 본질을 형성한다. 예를 들어서 자기에게 관계될 수 있음이 유한한 주관의 본질에 속하는 한, 순수한 자기 촉발로서의 시간은 주관성의 본질 구조를 형성한다. 이러한 자기성을 근거로 해서만 유한자는 자기 본래의 모습으로, 곧 수용에 의존하는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다.” (Heidegger, 1951, 34절 172)
아감벤은 자기촉발에서 상관적인 능동성-수동성의 측면이 부끄러움과 유비적이라고 본다. 부끄러움은 주체성의 고유한 감정적 음조tonalità로 나타난다. (주체성의 형식으로서의) 수동성은 순전히 수용적인 극과 능동적으로 수동적인 극으로 파편화되지만 여기에서 두 극이 전적으로 분리되지는 않는다. 밀접함intimità을 지닌 채 수동성에 위임된 상태로 두 항이 ‘구별되면서도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서 자신을 수동적으로 만들도록 한다. (QA, 102-3)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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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________ (1998), Quel che resta di Auschwitz: L'archivo e il testimone. (QA로 줄여
씀) Bollati Boringhieri.
__________ (1999), Potentialities: Collected Essays in Philosophy, Stanford Univ.
Aristoteles, De Anima, in: The Loeb Classical Library, On The Soul, 1936/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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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ttelheim, B. (1979), Surviving and Other Essays, N.Y. Knopf.
Geulen, E. (2005), Gorgio Agamben: Zur Einfuerung, Junius.
Heidegger, Kant und das Problem der Metaphysik, Frankfurt, 1951
Kant, I., Kritik der reinen Vernunft, in: Kant's gesammelte Schriften. (hrg)
Königlich Preußischen Akademie der Wissenschaften. Berlin.
Levi, P. (1958), SE QUESTO È UN UOMO (SI C'EST UN HOMME tr.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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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_____ (1989), The Drowned and the Saved (tr: Rosenthal, R.) N.Y. Ran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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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vinas, E. (1982), De l'évasion, Fata Morgana, Montpellier
첫댓글 ?요즘 복지논쟁이 한창이다. 그런데 왜 복지 정책이 주요한 이슈가 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