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해지기 위해 애썼지 싶습니다. 하나님 앞에 깨끗한 사람으로 서기 위해 물로 손을 씻는 정결례를 중요하게 여기는 종교인들이 있었습니다.(요2:6) 가상한 노력입니다. 그러나 이런 종교적 의례를 통해 사람이 깨끗해지는 게 아닙니다. 손을 씻는 의식을 통해 깨끗해진다면 ‘빌라도’가 오늘까지 유명하진 않을 겁니다.(마27:24) 그래서입니다. 종교인들이 정결례를 위해 준비한 항아리에 물을 붓고는 예수께선 물을 포도주로 바꿔버렸습니다.(요2:8)
정결례에 쓸 물 담는 항아리에 포도주가 담기게 된 사건이 소문났을까요. 아니면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걸까요. ‘니고데모’가 찾아왔습니다. 다른 유대인들이나 바리새파 사람들이 오해할까 싶어 밤에 예수를 찾아왔습니다.(요3:1~2) 니고데모는 바리새파여서 모세의 율법을 열심히 연구하고 지키며 가르쳤을 겁니다. 성경을 잘 알고 하나님의 뜻에 막힘없을 바리새파 니고데모가 예수를 찾아와 묻고,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깊은 밤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께서는 다시 태어나는 것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3장 3절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물로 손을 씻어 깨끗해지는 종교의례를 하는 것으론 부족하다고 하십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것 같은 수준으로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십니다. 예수께서 잔치 자리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사건은 마술을 보이신 게 아니라, 사람이 어떤 수준으로 변화해야 되는지 가르쳐주시려는 체험학습이었습니다.
사람은 다시 태어납니다. 사람이 모월 모시에 육체로 태어났다면, 이후엔 성령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비로소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처음 사람 ‘아담’의 뜻은 ‘사람’입니다. 다시 태어나기 전엔 아담, 즉 사람이 아니라 흙뭉치일 뿐입니다.(창2:7) 육으로 태어났어도 다시 태어나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비로소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고후5:17)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육으로 태어나는 것과 달라서, 어디서 어떻게 태어났는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바람의 길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을 몰라 볼 수 있습니다.(요3:8) 자기 자신을 볼 때도 그렇습니다. 제 어머니의 몸을 가르며 태어난 날을 알지만,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날을 기억하진 않습니다.
성령으로 태어나는 건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한 날, 한 순간 무대 조명과 함께 번쩍하면서 성령으로 태어나는 경우도 있겠습니다만, 대부분 사람은 날마다 생일입니다. 사람에겐 매일 매일이 다시 태어나는 날입니다. 포도주가 익어가듯, 날마다 익어가는 게 성령으로 태어나는 과정입니다.
바울도 다시 태어났습니다. 누구보다 강한 민족주의자였고, 학식을 갖추었고, 추진력도 탁월한 사람이었던 바울이 말을 타고 길을 가다가 빛을 보았습니다. 바울은 빛을 안듯 말에서 떨어지면서 다시 태어났습니다. 유대인이었던 바울이 비로소 사람이 된 것입니다. 유대인 중에 바리새파였던 바울이 비로소 사람이 된 것입니다. 유대인 중에 명문 가말리엘의 제자였던 바울이 비로소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람을 결박하고 죽이기까지 했던 이가, 오히려 결박당하고 죽음의 위협을 감당하는 사람으로 변화됐습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하듯, 결박하던 자가 결박당하는 자로, 죽이던 자가 죽임당하는 자로 변화됐습니다.
성령강림 스물한 번째 주일입니다. 성령께서 내게 임하는 건, 비로소 내가 사람이 되는 시작이요 과정입니다. 성령께선 예수께서 떠난 자리로 오십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며 제자들을 떠날 수 밖에 없었을 때, 예수의 빈자리로 성령께서 오십니다.(요16:7)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제자들이
다시 태어납니다. ‘작은 예수’로 ‘다른 그리스도’로, 다시 태어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떠났지만, 성령께서 오심으로 제자들이 비로소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듯, 제자들이 ‘작은 예수’로 변화됩니다. 풀이 포도주가 되듯, 제자들이 ‘다른 그리스도’로 변화됩니다. 예수께서 떠나고 성령이 오시면 제자들이 예수가 되어, 비로소 사람이 되어 예수께서 하셨던 일을 하게 됩니다.
사람이 되기 전 제자들이 예수를 따르기란 불가능했습니다. 가룟 유다처럼 배반하거나 베드로처럼 부인하거나 도마처럼 의심합니다. 성령이 오시면, 작은 예수로 다른 그리스도로 다시 태어납니다. 사람이 됩니다. 무엇을 기도하든지 예수처럼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십니다. 이렇게 우리는 비로소 사람입니다. 사람이었던 예수처럼, 사람이었던 그리스도처럼, 우리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 작은 예수로, 다른 그리스도로 사는 사람이 되어 갑니다.
사람은 미움 받을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사람은 출교당할 수 있고, 바리새파에게 파문당할 수 있고, 학계에서 쫓겨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께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구요. 예수께서 죽기까지 미움 받으셨던 건 그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이었기 때문에 예수는 미움 받았고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눅4:18)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옛날 신화에 나오는 곰이나 호랑이 같은 짐승과 다르지 않습니다. 옛 신화가 곰 부족, 호랑이 부족을 사람이라 부르지 않고 곰이라, 호랑이라 여기는 것처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우리도 아직 참사람이 아닙니다. 곰이 먹었다는 쑥과 마늘은 어쩌면 사람이 되기 위해 받아야하는 미움이 아닐까 싶습니다. 조직으로부터, 관습으로부터 미움 받으며, 때론 쫓겨나 동굴에 홀로 갇히며 비로소 사람이 됩니다.(요16:1~3) 물이 포도주로 변하듯 변화합니다.
포도주가 되어, 하루하루 익어갑니다. 11월까지 이어질 성령강림주일이 해마다 이렇게 긴 까닭이겠습니다. 하루하루 한주한주 한달한달 한해한해 성령과 함께 익어가면, 비로소 사람입니다.
사람이어서 교리와 아집과 욕심에 사로잡힌 짐승들에게 미움 받기도 합니다. 미움 받으면 어떻습니까. 미움 받아 죽은 예수가 우리 주님이십니다. 미움 받아 죽은 예수께선 부활하셨습니다. 마늘 같은 쑥같은 미움 받아 다시 태어난다면, 기꺼이 동굴로 쫓겨나겠습니다.
나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