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지·화 초강대국’으로 … 중국, 찬란한 재탄생
[중앙일보] 2009.09.14
[신 중국 60년] 수퍼파워로의 성장과 한계
수퍼파워의 성립 조건은 흡인력이다. 멀리 로마제국에서 대영제국, 그리고 오늘날 미국은 세계의 인재·물자·자금 등을 끌어 모으며 헤게모니를 장악했다. 21세기 신흥 강국으로 부상하는 중국은 이 같은 수퍼파워 조건을 갖춰가고 있는가?
중국이 13억 인구의 풍부한 노동력과 광활한 시장을 바탕으로 기술·지식·자금 등 생산자원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상하이 푸둥(浦東)의 금융가가 중국의 부상을 대변하고 있다. [최승식 기자]
지난 8월 말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시내의 IT 제품 전문매장인 로얏. 델(Dell) 노트북컴퓨터를 가슴에 안고 나오는 웡치우멍(28)은 상기된 표정이다. 집에서 컴퓨터가 오기를 기다리는 아들 생각에서다. 그에게 “어느 나라에서 만든 컴퓨터냐”고 묻자 “당연히 말레이시아 페낭”이라고 답한다. 델 컴퓨터의 60% 이상이 페낭에서 만들어져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컴퓨터 뒷면 라벨을 살펴본 그는 깜짝 놀란다. ‘Made in China’라는 원산지 표시를 발견한 것이다. “페낭이 아니라고?” 실망감이 얼굴에 역력하다.
급히 페낭으로 길을 잡았다. 쿠알라룸푸르 북쪽으로 4시간을 달려야 도착하는 곳이다. 말레이시아의 대표적인 IT 산업단지답게 삼성·인텔 등의 광고판이 보였다. 델 컴퓨터 조립 공장을 찾는다는 질문에 시정부 관계자는 “이미 다른 곳으로 대부분 가고 남은 건 20%도 안 된다”고 말했다. 불과 3년 전만 해도 페낭은 델 컴퓨터의 최대 생산지였는데 도대체 어디로 거점이 옮겨진 것일까.
답은 중국에 있었다. 상하이 시 중심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쑹장(松江) 개발구. 이곳에 자리한 컴퓨터업체 광다(廣達)에 들어가니 하적장에 델 컴퓨터가 가득하다. “오늘 오후 수출 물량입니다.” 배송 담당 리즈량(李志良)의 설명이다. 웡치우멍이 쿠알라룸푸르에서 산 컴퓨터도 상하이에서 조립된 것이다. 현재 상하이를 중심으로 쿤산·쑤저우·항저우 일대에서 생산되는 컴퓨터는 전 세계 생산량의 80%에 달한다. 우리가 쓰는 컴퓨터의 십중팔구가 ‘Made in Shanghai’인 셈이다.
델 컴퓨터의 물류 흐름은 진화하는 ‘세계공장 중국’의 모습을 보여준다. 중국이란 공장에서 생산되는 제품은 신발·복장·완구 등 단순 임가공 제품에서 이젠 첨단산업으로 확대됐다. 휴대전화·컴퓨터 등 IT 제품에서 자동차·선박에 이르기까지 첨단기술제품 생산단지가 중국으로 빨려들고 있다. 중국은 현재 컬러TV·자동차 등 210개 내구소비재 품목에서 세계 1위의 생산국이다.
‘제조업의 꽃’이라는 자동차 산업을 보자. 지난 100년 동안 미국은 부동의 세계 최대 자동차 시장이었다. 그러나 올해 그 신화가 깨졌다. 돌풍의 주역은 중국이다. 올 상반기 중국의 자동차 판매 대수는 610만 대로 480만 대의 미국을 제쳤다. 세계 자동차업체들이 중국으로 몰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현재 세계 14개 주요 자동차메이커들이 중국에서 생산시설을 가동 중이다. 메이드 인 차이나 제품 수출은 올해 상반기 독일을 제치고 처음으로 세계 1위에 올랐다. 부상하는 제조업 왕국인 중국의 면모다.
제품(物)뿐만이 아니다. 지혜(智)도 중국으로 빨려 들고 있다. 지난 7월 초 베이징에서는 ‘글로벌싱크탱크서밋(全球智庫峰會)’이 열렸다. 쩡페이옌(曾培炎) 전 국무위원이 이끄는 중국국제교류센터가 ‘글로벌 금융위기와 세계경제 전망’을 주제로 개최한 세미나엔 900여 명의 두뇌가 모였다. 여기엔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 로마노 프로디 전 EC 집행위원장, 제프리 삭스 미 컬럼비아대 교수 등 400여 명의 외국 명사들이 포함됐다. 세미나에 참가한 김태준 금융연구원 원장은 “전 세계 지식인의 아이디어를 구하고, 또 그들을 상대로 중국경제의 위상을 떨치려는 매머드급 세미나였다”며 “그 많은 세계적 인사들을 한자리에 모을 수 있었다는 게 바로 중국의 힘”이라고 말했다. 이제 세계의 지식인들은 ‘중국이 부르면 달려가는 그런 시대’를 맞은 셈이다.
돈(貨)에 관한 한 이제 중국은 넘쳐날 정도로 풍족해졌다. 2조 달러가 넘는 외환보유액이 그 성적표다. 사실 중국경제의 성장 자체가 돈을 빨아들이는 과정이었다. 넘치는 돈은 이제 해외로 나가는 단계다. 석유·철광석 등 원자재 관련 기업 투자, 해외 금융망 확대, 선진기술 도입을 위한 기업인수합병(M&A) 등에 중국의 돈이 쏠리고 있다. 지난해에만 전년 대비 110%가 증가한 약 559억 달러가 해외에 투자됐다. ‘제품(物)·지혜(智)·자금(貨)’이 블랙홀 차이나로 빨려 들었다가 세계로 재생산되며 중국의 부상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빠른 부상은 “중국이 세계 1위가 되더라도 놀랄 일은 아니다”는 노벨경제학 수상자인 에드먼드 펠프스 미 컬럼비아대 교수의 말을 떠오르게 한다.
쿠알라룸푸르·상하이=한우덕 기자
베이징=장세정 특파원 , 사진=최승식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