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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의 진실탐구마당 스크랩 칼럼 문근영 외조부의 통혁당과 김대중의 민중봉기
역사학도 추천 0 조회 76 08.11.29 09:3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어째서 여우 문근영 양의 외조부 류낙진이 통일운동가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가?   단지 그가 1950년대에 지리산 빨치산이었기에 통일운동가라는 뜻인가?  아니다.  위에서 류낙진이 1968년에 가담하였던 통일혁명당 영상물을 보는바와 같이, 그가 민중봉기를 일으키려는 세력 중에서는 거목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적화통일 세력은 오래 전부터 민중봉기, 무장봉기를 적화통일 전략으로 삼아왔었다.

   무엇이 광주사태였던가?  김대중이 1980년 5월 하순에 전국적 민중봉기를 일으키려 하였으나, 광주와 전라도 일부 지역에서만 국한되어 발발하였던 무장봉기를 일컬는다.  그러면, 도대체 언제부터 김대중은 민중봉기를 일으킬 생각을 하였던 것일까?   김일성을 면담하고 美貨 7만 달러, 韓貨 3,000만 원, 日貨 50만 엔의 공작금을 받고 A-3지령만 167회를 수신했던 통일혁명당의 주동자 김종태는 민중봉기, 간첩의 무장 집단유격투쟁을 통한 수도권 장악, 북한으로부터 무기수령을 위한 양륙거점 정찰, 특수요원 포섭, 월북 등 14개 항목의 공작임무를 띠고 있었다. 

   민중봉기! 간첩의 무장! 집단유격투쟁!  김대중이 1980년 5월 전국적 민중봉기 일으키려 하기 12년 전에 이미 민중봉기를 통한 공산화 시도가 있었다.  사실 문근영의 외조부 류낙진이 가담하였던 통혁당 사건과 광주사태는 일란성 쌍둥이였으며, 민중봉기의 목표가 류낙진과 김대중을 엮는 코드였다.  통혁당 사건은 실패로 끝난 민중봉기 시도였으며, 1975년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이 시민군을 동원한 민중봉기로 월남을 패망시키는데 성공한 것을 본 김대중은 그 이후로 월남식 도시 게릴라 방법을 채택하였고, 1980년 3월 김대중의 전국연합 사무국장이 된 윤상원은 쿠바의 공산주의 혁명투사 체 게바라의 도시 게릴라 전법을 일찍부터 연구하고 있었다.

   탈북 군인들은 1980년 3월 김일성의 책상 위에는 5월에 광주에서 대규모의 봉기가 일어날 것이라는 정보가 놓여있었다고 증언한다.  그런 증언은 증명될 수 있는가?  물론, 자유 통일이 되어야만 증명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러나, 만약 정말로 3월에 그런 음모가 광주에서 진행되기 시작한 것이 사실이었다면, 그리고 김일성이 그때부터 무장봉기 지원을 하려고 시도한 것이 입증될 수만 있다면 탈북 군인들은 증언은 그만큼 신뢰성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래의 두 동영상에 보듯이 이 둘 모두 사실로 밝혀졌다.



   바로 위 동영상에서 우리는 이신범이 3월에 문익환 목사를, 제2의 동학란을 일으키자고 선동하였던 문익환 목사를 만나고 있었음을 본다.  문익환 목사는 신학을 시작하기 전에, 해방후 남한에 오기 전에 이미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어 있었던 인물이요, 북한에서 문익환 기념우표를 발행하였던 것만 보아도 그의 이념적 성향을 알 수 있다.   문익환 목사와 김대중이 말하던 제2의 동학혁명 또한 민중봉기, 유혈폭동, 무장봉기 등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이신범이 문익환 목사를 만난 사실이 있다.  그리고, 바로 아래 동영상에서 김일성도 바로 그 무렵 도시 게릴라 방법을 지원하기 시작하였음이 입증된다.



   광주청문회 때 이신범은 문익환 목사와의 대화는 단지 계엄령을 해제시키기 위한 대화였다고 변명한다.  그러나, 당시 계엄은 국방의 위기가 있던 시기에 군인을 대상으로 하는 계엄이었으며, 북한군 특수부대원(무장공비)들이 여기저기서 침투하고 있었던 때였는데, 당시 어린 학생이었던 이신범과 종교인 문익환이 계엄을 해제하라고 한다는 것이 납득이 될 수 있는가?  그리고, 이신범은 과연 김대중의 내란 음모에 소극적이었을까?

   독립신문 주필 정창인씨가 미국에서 본 이신범은 5.18사기꾼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그 사실을 이렇게 서술한다:

<<내가 미국에 유학 중일 때였다. 문제의 그 광주사태가 발생한지 3-4년이 지난 때였다. 그 때 이신범이란 사람이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광주사태에 대한 강연을 하고 다녔다. 나는 그 당시 군인신분이라 어떤 분란에 휘말리지나 않을까 하고 조심하면서 그 강연에 갔다. 그 때 깨달은 것은 이신범은 지독한 반대한민국주의자란 것이었다.

그는 일본에서 제작하였다는 광주사태 비디오를 틀었다. 문제는 그 비디오에 비춰지는 화면이 아니었다. 문제는 화면과 상관없이 진행되는 해설(토오키)이었다. 그 해설은 국군을 북한의 인민군보다 더 지독한 적으로 묘사하고 있었으며 세상에 상상하기도 힘든 잔인한 폭력집단으로 매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해설을 뒷받침할 화면은 아무리 눈을 닦으며 보아도 없었다. 그냥 지어낸 거짓말이었다.

이신범 자신의 증언은 거짓과 거짓 선동의 극치였다. 그는 한국군은 월남전에서 사용한 건쉽을 동원해 광주시위자에게 기총소사를 하였으며, 따라서 광주희생자의 상처는 모두 총알이 머리로 들어가서 하체로 나와 있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군은 일부러 납탄을 광주시위자에게 쏘았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적에게 사용하는 것도 금지된 납탄을 광주시위자에게 쏘았다고 하였다.

나는 건쉽을 동원한 기총소사도 거짓이지만 특히 납탄을 쏘았다는 것은 명백하게 거짓임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광주에 사용하기 위해 납탄을 일부러 만들지 않는 한 군에 납탄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군을 이렇게 악랄한 방법으로 매도하는 이런 사람들에 의해 광주사태는 전세계에 알려졌다. 그러나 사실은 다르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다수의 미국인들은 이신범같은 5.18사기꾼들을 통해서만 광주사태에 대하여 들었기에 지극히 편향적인 거짓 주장만 들었을 뿐이며, 광주사태에 관한 한 아직도 상당수의 외국인들이 거짓 정보에 속고 있다.  김대중이 노벨 평화상을 받은 것도 5.18사기꾼들에게 속은 이들이 김대중을, 딸을 숨겨두고 버리는 김대중을, 인권운동가로 미화하였기 때문이었다.  자, 여기서 일본에서 제작하였다는 광주사태 비디오가 북한 세력이 3월에 광주운동권 동향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느냐에 대한 또 하나의 단서이다.



   위의 1980년 5월 28일자의 대한뉴스 동영상에서 광주사태 당시 북한에서 생중계한 영상물을 잠깐 보여준다.  조총련이 찍고 제작하여 북한으로 보낸 영상물이었다.  이신범이 미국에 가지고 가서 유학생들과 교포들에게 보여준 그 광주사태 비디오 역시 편집만 약간 다를 뿐 조총련이 제작한 영상물이라는 사실이 맞는가?  그 비디오는 광주사태 이후에도 김대중 세력이 북한 세력과 접선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요, 그 사실은 광주사태 당시에도 광주의 운동권 동향 정보가 북한 세력으로 흘러들어갈 수 있었음을 유추케 한다.



   광주사태에 북한군 개입이 있었다는 탈북군인들의 증언에 대하여 5.18옹호론자들은 과연 북한군 침투가 가능할 수 있었겠느냐는 반론을 주장한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 시대였던 1968년 1월에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까지 침투했었으며, 6월에 무장공비들이 전라도 무안에 침투하였던데 이어 8월에야 통혁당 간첩단 정체가 노출되었던 것이다.  김신조 일당도 무서우나 문근영 외조부 류낙진 같은 이들이 북과 내통하며 무장간첩들이 수시로 드나들 수 있거나, 위의 사진에서 보듯 과거의 빨치산들이 다시 총기 무장할 수 있을 만큼 국방이 허술한 나라가 우리가 원하는 나라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래의 5.18무장폭도 사진을 보라.  혹자는 저 폭도가 광주시민이라고 우길는지 모르지만, 과연 시민이 저런 모습으로 무장할 정도로 치안이 불안한 사회가 우리가 원하는 사회상이었을까?



   혹자는 저 사신에 대한 이런 설명은 5.18측에 유리하지 않음이 불만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영화 화려한 휴가와 함께 5.18의 아성은 무너져 내렸다.  작년 영화 "화려한 휴가"가 상영되기 시작하자 국민들의 관심은 과연 그런 일이 정말로 있었느냐였는데, 5.18측이 정말로 있는 일이라고 우겼기 때문에 5.18의 아성은 무너졌다.  혁명가 윤상원을 운전사 강민우로 등장시켰을 때 그 영화는 혁명가와 혁명 정신이 없는 영화가 되고 말았다.  국군이 살인기계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혁명가는 어디에 있으며, 혁명정신은 무엇인가?  

   어제(2008년 11월 26일) 인도에서 발생한 몸바이 테러 사건으로 지금 인도는 아수라장이다.  무엇보다도 외국인들이 인질로 잡혀 있기에 인도 정부가 진압할 방법을 찾기 어렵다.  실은 5월 22일 해방구를 설치한 직후 윤상원의 다음 동작이 광주의 외국인들을 인질로 납치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반미는 광주시민들의 등을 돌리게 할 것이라는 측근들의 강력 반대에 부딪치자 윤상원은 말을 확 바꾸어 미국이 시민군을 지원하기 위해 항공모함을 보냈다는 대자보를 붙였다.  그리고, 26일 외신기자 회견 때 신분을 전남대생으로 속이고 외신기자들의 동정을 사는 연설을 하였다.  그때 통역이 린튼 선교사 가문의 자제 스티븐 린튼(Steven Linton)이었는데, 윤상원에 속아 넘어가 일방적으로 시민군을 옹호하는 통역을 했으며, 광주사태가 해외에 잘못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말을 전혀 모르며 한쪽 주장만 통역을 통해 전해 들은 외국인들에게만 광주사태가 잘못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 아니라, 같은 한국말을 쓰는 한국인들에게도 잘못 알려져 왔다.  1985년 5월 22일 미국 문화원 점거사건 장면을 보여주는 위의 동영상에서 우리는 사기꾼들과 미개인들이 미국 문화원 창에 "광주학살 책임지고"라고 써붙인 것을 본다.  이것은 한국인 반미감정의 뿌리가 광주사태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러면 도대체 어디에서 이런 반미 논리가 온 것이었을까?

   윤상원은 공산화라는 의미로 민주화라는 용어를 썼지만 외신 기자들은 민주화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윤상원은 모스크바의 공산주의자보다도 더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자였다.  1980년의 시점에서는 모스크바의 공산주의자들은 공산주의는 실패했으며, 경제 문제의 해결책이 아님을 깨닫기 시작한 때였다.  그러나, 여전히 19세기 낡은 공산주의 이론에 파묻혀 살고 있던 윤상원은 프롤레타리아 혁명, 노동자의 혁명만 이룩하면 금방 이상향이 실현된다는 망상을 신념으로 삼았다.  그리고, 26일 통역을 통해 전해진 외신기자들에게 전해진 그의 연설은 그가 신념의 사람이라는 동정을 사게 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주위의 반대로 외국인 납치 계획을 철회한 윤상원은 미 항공모함 코럴씨 호가 시민군을 지원하기 위해 부산항에 입항했다는 내용의 대자보를 붙인다.  실제로는 광주사태가 발발하기 직전 북한군의 남침 징후를 파악한 미국이 한국 정부에 통보하면서 보낸 것이지만, 윤상원은 광주사태가 일어나자 미국이 광주시민군을 지원할 목적으로 보냈다고 말을 지어내어 대자보를 붙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거짓말을 진실로 받아들였던 쪽에서는 미국에 배신감을 느끼고 분노했다.  그들은 윤상원의 거짓말에 분노한 것이 아니라, 파렴치하게도 오히려 미국에 누명을 씌우며 분노하여, 미국 문화원 점거로 그 분노를 폭발시키곤 했던 것이다.

   사실, 이들의 미 문화원 점거는 1985년 5월이 처음이 아니라, 1982년 3월18일 오후 2시 부산의 미국 문화원 건물에 방화한 이래 여러차례 미 문화원에 방화하였으며, 그 배후에 문부식의 지인이기도 한 5.18사기꾼 김현장이 있었다.  김현장은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은 아니지만 그가 유언비어 삐라를 뿌린 행적 때문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인물이다.   김현장은 5월 21일 광주에서 빠져나왔다고 주장하면서 ‘전두환의 광주살육작전’이라는 유인물을 작성하여 배포하였다.  

    그러나, ‘전두환의 광주살육작전’이라는 것이 있었는가?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왜 김현장은 그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는가?   최근에 이른바 "안재환 악플녀"가 그녀의 어머니를 때려 살해하였다고 한다.  네티즌들조차 거부감을 느낄정도로 연예인들에 대하여 근거없는 악플을 달았다고 한다.  우리는 근거없는주장을 거부한다.  김현장이 불순세력으로부터 유언비어 삐라를 받았는지, 자작 픽션이었는지는 모르나, 그는 거짓말을 퍼뜨려 소요를 일으킨 것을 자성하기는커녕 1982년에 미국 책임론을 주장하며 미국 문화원 방화를 선동하였다.  한때 그의 주장에 선동되어 동조하였던 문부식의 오늘날의 시각은 다르다.  만약 5.18측 주장이 떳떳하려면 김현장에게 도대체  ‘전두환의 광주살육작전’ 유언비어 출처가 어디였는지 물어야 한다.  5.18측이 진정으로 명예를 원한다면 진실성에 충실해야 한다.

   보라!  5.18측에서 영화 화려한 휴가를 옹호하였을 때 어떤 결과가 빚어졌는가?  그들의 혁명열사 윤상원이 실종되었다.  윤상원이 실제로는 김대중의 전국연합 사무국장 신분이었지만 외신기자들에게는 전남대생으로 잘못 알려져 전남대가 주도한 봉기였던 것처럼 항간에 인식되어 왔었다.  그러나, 영화 화려한 휴가는 광주사태는 결국 전남대 학생운동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한 꼴이 되고 말았다.  거기에 비록 프롤레타리아 혁명관일 망정 나름대로 신념에 살고 죽었던 윤상원의 모습도 없다.  그 영화 본 후에 사람들은 무엇이 5.18정신이었는지 묻는다.  그 영화의 허구를 옹호하는 5.18측에서 무어라 그 질문에 답변하겠는가?  5.18측에서 진실성에 충실하지 못하였을 때 결국 그 아성은 무너져 내린 것이다.

   그러기에 좌익의 세계에서는 역사적 실존 인물이었던 문근영의 외조부가 그들의 정신적 지주인 것이다.  그는 사망 직전까지도 범민련 고문이었다.  그는 반세기 동안 그의 이념을 한번도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무엇이 그의 이념이었던가? 공산주의 사상? 진정한 공산주의라면 김일성 왕조와 같은 독제체제란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왜 그가 김일성, 김정일 왕조가 지배하는 나라를 자기 조국으로 삼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빨치산 정신은 지리산 빨치산 시절 이후에도 통일혁명당의 민중봉기 음모, 남조선 지하당 "구국전위" 결성 등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그를 동지라 부르는 자들의 동아리에서는 그는 변절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런 신념을 미화한다 하더라도  대한민국을 조국으로 여기지 않았던 자를 통일운동가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일부 몰지각한 이들의 그런 주장에 우리가 침묵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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